표트르 키릴로비치 코셰보이

Пётр Кириллович Кошево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4–1976 ○ 자연사

사푼산과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시킨 두 번의 영웅

≪적은 강하고 교활하다. 그러니 너희가 더 교활하고 더 영리해져라. 약점을 찾아내 예상치 못한 강한 일격을 가해라.≫ — 부하들을 훈련시키며.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소련 군사 지휘관이다. 대조국전쟁에서 티흐빈, 스탈린그라드, 크림, 동프로이센 전역을 지휘하며 사푼산 탈환과 쾨니히스베르크 함락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시베리아·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5년 주독 소련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68년 소련군 원수로 진급했다. 재임 중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압 작전에 주독 소련군 부대를 투입했으며, 1969년 해임될 때까지 동독 주둔 소련군의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주독 소련군

코셰보이가 주독 소련군 총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68년,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 운동인 '프라하의 봄'을 무력으로 끝냈다. 러시아어 사료는 그가 1968년 8월 20일 '도나이' 작전에 따라 주독 소련군 제20근위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입을 조직하고 프라하의 주요 거점을 장악하는 데 참여했다고 기록하며, 침공을 지휘한 조약군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의 이름을 올린다. 진입은 8월 21일에 시작되어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했고, 모스크바 협정으로 마무리되었다. 소련 지도부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통제 상실과 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을 우려했고, 조약군 측은 이를 바르샤바 조약상의 국제주의적 의무로 정당화했다. 서방은 필요하면 군사력도 쓸 수 있다는 이른바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이 제한된 주권 개념을 불렀다. 침공은 체코슬로바키아 주민 일부의 항의와 소련군 장비에 대한 저항에 부딪혔고, 사상자와 난민을 낳았다. 그는 침공 직전인 1968년 4월 15일 소련군 원수로 진급했으며, 1969년 10월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V. G. 쿨리코프에게 자리를 넘기고 국방부 감찰총감 그룹으로 옮겼다. 이후 그는 1976년 8월 30일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에 살았으며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침공은 그가 관여한 군사적 결정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으로, 노동계급의 진보적 개혁을 군사력으로 짓밟은 반혁명적 개입이었으며, 그 책임은 작전을 지휘한 그에게서 면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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