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추바이

瞿秋白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9–1935 ✕ 처형

중국어로 《인터내셔널》을 처음 울린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이자 1927년 당의 지도자

1935년 6월 18일, 장팅 중산공원의 작은 언덕. 총살형 집행을 앞둔 취추바이는 풀밭에 앉아 집행인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좋군!" 그리고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5·4운동 세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러시아어를 익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현장을 중국에 생생히 전했다. 1923년 귀국 후 천두슈의 뒤를 이어 CCP 임시 중앙을 이끌며 광저우 봉기 등 무장투쟁 노선을 추진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실각 후에는 루쉰·마오둔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을 이끌며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중국에 정초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러시아·소비에트 문학 번역에 헌신했다.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장팅에서 총살당했으며, 사형장까지 《인터내셔널》을 부른 최후로 혁명적 순교의 상징이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문자개혁과 라틴화 신문자 운동

취추바이의 문화사업에서 흔히 간과되는 축은 문자개혁이다. 그는 소련 체류 시절 러시아 언어학자 V. S. 콜로콜로프와 함께 라틴화 신문자(Latinxua Sin Wenz)의 원형을 1929년에 고안했다. 1931년에는 소련의 중국학자 알렉세예프, 드라구노프, 슈프린친 등과 모스크바에 있던 우위장, 린보취, 샤오싼, 왕샹바오, 쉬터리 등 중국인 학자들이 힘을 합쳐 이 체계를 확립했다. 루쉰, 궈모뤄 등 중국 지식인들의 지지도 뒤따랐다.

이 운동의 문제의식은 식자율이었다. 익히기 어려운 한자를 로마자로 대체해 노동자와 농민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성조 표시를 아예 생략했다. 1928년부터 모스크바에서 준비된 이 작업은 소련 극동 지역에 거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적용되어 약 4년간 10만 명 규모로 시험되었고, 훗날 1940~1942년 옌안 일대의 공산당 통제구역에서도 시도되었다.

취추바이 개인의 활동은 1931년 상하이에서의 실각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는 한자 폐기와 로마자화를 주장하며 소련 학자들과 공동 작업을 계속했고, 좌익 문화운동 진영의 지식인들과 이 문제를 공유했다. 이 체계는 훗날 한어병음의 선구적 자산이 되었으나, 지역 방언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고 만다린 습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반대에 부딪혀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다. 문자개혁은 그가 정치적으로 밀려난 시기에도 계속 밀어붙인 학술적 과제였으며,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 번역과 함께 그의 후반기 작업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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