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점령을 현실로 만든 군부 책략가
1948년 옥중 일기에 그는 만주사변의 성공을 되돌아보며, 중국에 손댄 것이 잘못이었다고 썼다.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과 중국 침략 확대를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이시와라 간지와 함께 1931년 철도 폭파를 계획하고 관동군의 독단적 군사행동을 점령과 괴뢰국 수립으로 연결했다. 이후 육군대신과 여러 전선의 지휘관을 지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04육군사관학교 졸업, 육군 보병 소위
- 1916육군대학교 졸업, 참모 경력 시작
- 1924–1926중국 주재 일본 공사관 무관보좌관
- 1929–1932관동군 고급참모, 만주사변과 점령 작전 주도
- 1934–1937만주국 군정 최고고문, 관동군 참모차장·참모장
- 1937–1939제5사단장, 육군대신
- 1939–1941지나파견군 총참모장
- 1941–1945조선군·제7방면군 사령관, 싱가포르에서 항복 서명
- 1948극동국제군사재판 사형 집행
관련 역사 사건
만주사변의 기획과 현지 군사행동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관동군의 참모로서 이시와라 간지와 함께 1931년 만주사변의 도발을 기획했다. 9월 18일 일본이 소유한 남만주철도 선로에서 일어난 폭발은 중국 측의 공격으로 꾸며졌으며, 두 사람은 이를 동북 중국 침공의 구실로 삼았다. 관동군은 도쿄 정부와 육군 지휘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그날 밤부터 봉천과 장춘 등 철도 연선의 요충지를 점령했다. 정부와 육군 참모본부가 사태 확대를 막으려 했음에도 관동군은 공격을 계속해 1932년 초 동북 중국을 장악하고 만주국을 세웠다. 이타가키의 역할은 현지 부대의 독단적 행동을 단순히 지지한 데 그치지 않고, 사전 모의한 도발을 침략 확대와 식민 지배의 제도화로 연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