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을 끝낸 외무장관, 내전의 대통령으로
1990년 12월 20일, 셰바르드나제는 인민대표대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사임한다. 이것이 나의 항의다”라고 선언하고 외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8개월 뒤 8월 쿠데타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1958년 콤소몰 대회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난 이후 30년 넘게 그의 가장 가까운 동맹이었다. 1972년 그루지야 당 제1서기가 되어 3만 명을 체포할 정도로 부패와 그림자 경제를 뿌리 뽑으려 했고, 지역 실험장이던 아바샤 경제 개혁을 주도했다. 1985년 외무장관으로 발탁되어 군축·아프간 철군·독일 통일을 5년 만에 협상해냈고, 1990년 12월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와 함께 전격 사임했다. 소련 붕괴 후 고향으로 돌아가 내전과 암살 기도 속에서도 10년 넘게 그루지야를 이끌었고, 2003년 장미혁명으로 평화롭게 물러났다.
경력 연표
- 1965–72그루지야 내무장관
- 1972–85그루지야 당 제1서기: 부패 단속과 실험적 개혁
- 1985–90외무장관: 군축,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 협상
- 1990.12「독재가 오고 있다」 경고하며 사임
- 1992–2003그루지야 국가수반, 대통령: 2003년 장미혁명으로 퇴진
관련 역사 사건
- 1979–1989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철군 외교외무장관으로 소련군 철수를 위한 제네바 협정 외교를 이끌었다.
- 1985–1991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냉전을 끝낸 외교외무장관으로 군축과 화해로 냉전을 끝으로 이끌었다.
- 1985–1989신사고 외교와 냉전의 종식외무장관으로 군축 협상과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실무에서 이끌었다.
- 1988–1991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외무장관 · 사임 경고1990년 12월 독재가 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사임했고, 트빌리시는 그의 고향 공화국이었다.
- 19891989년 동유럽 혁명고르바초프의 외무장관, 비개입 정책 주도
- 1991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독재를 경고1990년 사임하며 다가오는 독재를 경고한 외무장관이었다.
그루지야의 실력자, 부패와 싸우며 아첨도 잘했던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1928년 그루지야 서부의 마마티 마을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콤소몰에서 출세한 그는 1965년 그루지야 내무장관이 되어 공화국의 뿌리 깊은 지하경제와 부패를 겨냥한 대대적 단속을 벌였고, 1972년 그루지야 당 제1서기에 올랐다. 수천 명의 관리가 옷을 벗은 그의 숙정은 전국적 화제가 되었지만, 그는 실험도 할 줄 알았다. 아바샤 지구의 농업 실험처럼 물질적 유인을 도입한 시도들은 훗날 개혁의 예고편으로 재평가된다.
동시에 그는 중앙에 대한 충성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1976년 당대회에서 그가 남긴 「그루지야에게 태양은 북쪽, 러시아에서 뜬다」라는 헌사는 아첨의 고전이 되었다. 규율과 실험, 충성과 실용을 겸비한 이 남부의 실력자는 휴양지에서 이웃 지방의 당서기 고르바초프와 흉금을 트는 사이가 되었고, 두 사람은 「이대로는 살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나눠 가졌다.
1985년 7월 고르바초프는 외교 경험이 전무한 그를 그로미코의 후임 외무장관으로 앉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놀라움은 곧 재평가로 바뀌었다. 직업 외교관들의 문법에 갇히지 않은 이 그루지야인은 신사고 외교의 가장 유능한 집행자가 된다.
1985–1990년, 후퇴를 관리한 외무장관
1985년 7월, 고르바초프는 외교 경험이 전혀 없는 그루지야 당 제1서기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를 그로미코의 후임 외무장관으로 앉혔다. 놀라운 인사였으나 계산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낡은 외교의 관성에 물들지 않은 맹우를 원했다. 셰바르드나제는 1972년부터 그루지야를 이끌며 부패 척결 운동과 실험적인 경제 개혁으로 이름을 얻은 인물이었다.
이후 5년간 그는 「신사고」 외교의 실무 책임자였다. 1987년의 중거리핵전력조약, 1988년의 제네바 합의와 이듬해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1990년의 독일 통일 승인과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까지, 소련의 세계적 후퇴는 그의 손을 거쳐 조약문이 되었다. 1989년 동유럽의 정권들이 차례로 무너질 때 소련의 불개입 방침을 대변한 것도 그였다.
비판자들은 그가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반대급부 없이 내주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독일 통일 과정에서 나토의 동진 문제를 문서로 못박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20일 그는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를 남기고 전격 사임했다. 여덟 달 뒤 그 경고는 쿠데타로 현실이 되었다.
1990년 12월,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
1990년 겨울 고르바초프가 강경파 쪽으로 기울자, 셰바르드나제는 5년간 함께 냉전을 끝낸 동지에게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경고했다. 12월 20일 인민대의원대회 연단에서 그는 원고에 없던 말을 쏟아 냈다.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 누가 독재자가 될지, 어떤 체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항의의 뜻으로 사임한다.」 회의장은 얼어붙었고, 고르바초프는 배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여덟 달 뒤 8월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의 경고는 예언이 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바로 그 겨울에 중용된 인물들이었다. 1991년 11월 그는 무너져 가는 연방의 외무장관으로 잠시 복귀해 마지막 몇 주를 지켰다.
보수파는 그를 동유럽과 독일을 「팔아넘긴」 장본인으로 지목해 왔다. 그 자신은 힘으로 지탱할 수 없는 것을 질서 있게 내려놓은 것이 외교의 성취였다고 반박했다. 관리된 후퇴가 패배인가 지혜인가라는 이 논쟁은, 소련 말기를 보는 두 개의 시선을 압축해 보여 준다.
1992–2003년, 트빌리시로의 귀환과 장미혁명
1992년 3월, 셰바르드나제는 내전 끝에 초대 대통령 감사후르디아가 축출된 조국 그루지야로 돌아와 국가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소련 해체를 이끈 외교의 얼굴이, 이번에는 그 해체가 남긴 폐허를 수습하는 자리에 선 것이다. 그가 물려받은 나라는 민병대가 거리를 지배하고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가 떨어져 나가는 파탄 국가였다.
1993년 압하지야 전쟁의 패배로 수십만 명의 그루지야계 주민이 고향에서 쫓겨났고, 셰바르드나제는 러시아의 지원을 얻는 대가로 독립국가연합 가입을 받아들여야 했다. 1995년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1995년과 1998년 두 차례의 암살 기도에서 살아남았다. 서방의 원조와 바쿠-트빌리시-제이한 송유관 유치가 국가를 지탱했으나, 경제는 침체했고 부패는 그의 정권의 대명사가 되었다.
2003년 11월, 부정 총선을 규탄하는 시위대가 장미를 들고 의회에 난입하자 그는 유혈 진압을 거부하고 사임했다. 장미혁명이었다. 그는 트빌리시의 자택에서 회고록을 쓰며 여생을 보냈고, 2014년 7월 7일 사망했다. 초강대국의 외교를 주무르던 인물이 작은 조국의 혼돈 속에서 경력을 마감한 이 궤적은, 소련 해체가 풀어놓은 운명들의 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