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즈네프 말기의 보수적 총리
사망 직전 옐친에게 '저축이 없으니 국비로 장례를 치러 달라'고 썼다. 5년간 소련 경제를 이끈 총리는 평생 방 세 칸 아파트에서 살며 월급으로 버스를 사서 학교에 기증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출신의 실무형 경제 관료로, 75세에 코시긴의 뒤를 이어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정직한 기술자였으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3대에 걸쳐 총리로 재임했다. 정체기 말기의 관료적 연속성을 상징했지만, 1984년에는 기업 자율과 '사회주의 시장'을 검토한 개혁위원회를 주재해 페레스트로이카 구상의 단초를 마련했다.
경력 연표
- 1980–1985각료회의 의장
관련 역사 사건
공장 기술자에서 정체기의 마지막 총리로
티호노프의 권력 기반은 당 이론이나 대중적 명성이 아니라 중공업 현장이었다. 금속공학자로 출발해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의 공장과 경제 행정에서 경력을 쌓았고, 같은 지역에서 활동한 브레즈네프와의 오랜 인연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 진입했다. 1965년 각료회의 부의장, 1976년 제1부의장을 거쳐 1980년 병든 코시긴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총리 재임은 새로운 경제 노선보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관료적 연속성을 상징했다. 성장률 둔화, 만성적 공급 부족, 군사비 부담이 누적되는 가운데 각료회의는 기존 계획과 부처 간 조정을 이어 갔고, 근본 개혁은 추진하지 못했다. 그는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 아래에서도 자리를 지켰지만, 이는 강력한 독자 지도자라서라기보다 원로 관료집단의 균형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지도부 세대교체와 경제 ‘가속’을 내세우자 80세의 티호노프는 퇴진하고 니콜라이 리시코프에게 총리직을 넘겼다.
1984년 개혁위원회와 권력에서의 퇴장
티호노프의 총리 임기 말년은 소련 지도부의 연속적인 교체와 맞물렸다.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 아래에서도 총리직을 유지했고, 안드로포프의 건강이 악화된 말기에는 사실상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며 국가 운영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 1984년 2월 체르넨코가 서기장에 오르자 티호노프는 그의 승계를 지지한 핵심 인물이었다.
이 시기 가장 주목할 만한 제도적 움직임은 1984년 4월 26일 정치국 산하에 설치된 '인민경제 관리 개선 위원회'였다. 티호노프가 위원장을 맡은 이 기구(일명 '티호노프-고르바초프 위원회')는 행정적 규율 압박 대신 기업 자율성 확대, 대외무역 독점 완화, 이른바 '사회주의 시장' 개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혁안을 검토했다. 이는 훗날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서 실현된 여러 구상의 선행 작업이었다.
그러나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티호노프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는 체르넨코-우스티노프와 함께 고르바초프를 견제한 '반(反)고르바초프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간주되었고, 고르바초프는 경제 '가속'과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80세의 총리를 압박했다. 1985년 9월 27일 티호노프는 건강을 이유로 각료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고, 10월에는 정치국에서도 퇴출되었다. 말년에 그는 고르바초프의 승계를 지지했던 것을 후회한다는 편지를 썼다고 전해지며, 아내와 사별한 뒤 자식 없이 은둔하다 1997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