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드니키 권총에서 마르크스주의 비평으로, 한 여성 혁명가가 걸어간 반세기
1878년 3월 31일, 배심원 전원 무죄 평결. 군중은 자술리치를 어깨 위로 들어올려 페테르부르크 거리를 행진했다. 차르 정부는 즉시 재체포를 명령했지만, 혁명가의 총성은 이미 전 유럽에 울려퍼진 뒤였다.
1878년 페테르부르크 시장 트레포프를 저격했고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 한 방은 짜르 전제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켰고 유럽 전역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술리치는 테러가 막다른 길임을 가장 먼저 깨닫고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했다. 1883년 플레하노프 등과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고, 「이스크라」 편집위원과 제2인터내셔널 러시아 대표, 그리고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로 활동했다. 멘셰비키로서 1917년 10월 혁명에 반대했고 볼셰비키 정권 아래 폐렴으로 숨졌다.
경력 연표
- 1869–73네차예프 사건 연루 체포·투옥·유형
- 1875–77바쿠닌주의 「남부 폭도단」에서 활동
- 1878트레포프 저격, 배심원 전원 무죄 — 국제적 센세이션
- 1879–80「검은 재분할」 공동 창립; 재망명
- 1883플레하노프 등과 「노동해방단」 창립 —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기원
- 1896–1904제2인터내셔널 3회 대회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대표로 참석
- 1900–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 1903–17멘셰비키 지도부; 이후 청산주의자
관련 역사 사건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
자술리치는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작업은 혁명적 민주주의 비평의 전통(벨린스키, 체르니솁스키, 도브롤류보프)을 마르크스주의의 렌즈로 재해석하고 계승했다. 그녀에게 문학 비평은 단지 미학적 판단이 아니라 사회적 의식을 형성하는 실천이었다.
제네바와 런던의 망명 시절, 그녀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1893년 출간된 『볼테르: 그의 생애와 문학 활동』은 러시아 최초의 볼테르 전기였으며, 계몽주의 철학자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처음 해석한 시도였다. 1898년에는 『장자크 루소: 그의 사회 사상에 대한 경험적 고찰』을 발표했다. 두 작업은 10여 년 후 검열 삭제를 거쳐 러시아에서 출간되었다.
1900년에 발표한 장문의 평론 「드미트리 피사레프」는 「노동해방단」의 첫 이론적 선언으로도 읽힌다. 여기서 자술리치는 1860년대 허무주의 비평가 피사레프의 유산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하며, 개인의 해방이라는 급진적 충동이 집단적 계급 투쟁으로 어떻게 승화되어야 하는지 논했다. 그녀는 또 글레프 우스펜스키, 스테프냐크-크랍친스키(그녀의 동지이기도 했다), 도브롤류보프, 체르니솁스키에 관한 평론을 『노보예 슬로보』와 『이스크라』, 『자랴』에 발표했다. 보보리킨의 소설 『다르게』에 대해서는,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자와 나로드니키 사이의 논쟁의 본질을 왜곡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자술리치는 러시아 문학 비평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멘셰비키라는 정치적 입장과 절제된 학문적 문체 탓에 소비에트 시기 그녀의 비평 작업은 대체로 망각되었으나, 1960년 선집 『러시아 문학에 관한 논문들』이 간행되며 재조명되었다. 그녀의 문학 비평은 혁명적 휴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분석이 결합된 독특한 지적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