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을 진단한 뇌과학의 선구자
1927년 12월 23일, 스탈린을 진찰하고 돌아온 베흐테레프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방금 한쪽 팔이 마비된 편집증 환자를 진찰했다.' 다음날 그는 사망했다.
반사학(객관심리학) 창시자이자 강직성 척추염을 발견한 신경학자. 1907년 세계 최초의 종합적 인간과학 연구기관인 정신신경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27년 스탈린을 편집증으로 진단한 직후 급사했다.
경력 연표
- 1878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의과대학 졸업, 정신과 클리닉 근무
- 1881–1884의학박사 학위 취득; 라이프치히·파리·베를린 연수 (분트, 샤르코, 플렉시히)
- 1885–1893카잔대학 정신과 교수, 정신생리학 실험실 설립
- 1892강직성 척추염(베흐테레프병) 최초 기술
- 1893–1913군사의과대학 신경·정신질환 학과장, 『신경학회보』 창간
- 1907세계 최초의 종합적 인간과학 센터, 정신신경학연구소 설립
- 1907–1910『객관심리학』 3권 출간, 반사학(레플렉솔로지) 창시
- 1923레닌 주치의로 두 차례 신경학적 진찰
- 1927러시아 공화국 공훈과학자 칭호; 스탈린 진단 직후 급사
신경학적 발견과 임상적 유산: 베흐테레프병에서 15가지 반사까지
베흐테레프는 뇌의 형태학과 신경계의 기능적 해부학에서 광범위한 발견을 이룩했다. 그가 처음 기술한 상전정핵(베흐테레프 핵), 중심피개로(中心被蓋路), 올리브핵과 소뇌각의 연결은 오늘날에도 신경해부학 교과서에 등재된다. 독일 해부학자 프리드리히 쿠쉬는 "뇌의 해부학을 완벽히 아는 사람은 신과 베흐테레프, 단 두 사람뿐"이라고 말했다. 1892년 그는 척추가 점진적으로 경직·굴곡되는 만성 염증성 질환인 강직성 척추염을 독자적인 질환 단위로 기술했으며, 이 질환은 '베흐테레프병'(Bekhterev's disease)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불린다.
그는 신경학적 진찰법에 총 15개의 새로운 반사와 10개 이상의 증상을 추가했다. 견갑상완반사, 수근지반사, 종골반사, 베흐테레프-멘델 반사, 베흐테레프-야콥손 반사 등은 추체로 병변을 검출하는 데 사용되며, 동공의 역설적 확장 반응(베흐테레프 반사 I)은 그의 이름을 딴 대표적 임상 소견이다. 임상 도구로는 진정 효과로 유명한 '베흐테레프 혼합제'(Bekhterev's mixture)를 개발했고, 알코올중독 치료를 위해 약물·물리치료·최면을 결합한 '베흐테레프 삼제요법'을 고안했으며, 그 연장선에서 1912년 러시아 최초의 알코올중독 실험연구소를 개설했다.
그의 학파는 70명의 교수를 포함해 약 5천 명의 제자를 배출했고, 그중 40명이 각지의 정신신경학 기관장이 되었다. 베흐테레프의 이름은 질환뿐 아니라 반사·증상·핵·검사법 등 20여 개의 의학 에포님에 남아 있다.
반사학(레플렉솔로지): 객관심리학의 창시
베흐테레프는 인간의 모든 정신 활동이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반사 반응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내성법에 의존하는 주관적 심리학을 거부하고, 환경 자극과 외현 행동 사이의 결합반사를 측정하는 객관심리학을 주창했다. 1907~1910년 3권의 『객관심리학』을 출간해 반사학의 기초를 세웠고, 1921년 『집단반사학』에서는 이 원리를 사회 현상으로 확장했다. 이반 파블로프와는 조건반사 연구를 둘러싸고 평생 경쟁했는데, 베흐테레프는 타액 분비 대신 전기 자극에 의한 운동 반사를 측정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파블로프의 방법이 인간에게 적용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그의 반사학은 훗날 미국 행동주의 심리학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는 사회 조건이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여, 범죄 감소와 정신 건강 증진을 위해 사회 환경의 개선을 주장했다.
정신신경학연구소: 세계 최초의 통합적 인간과학 센터
1907년 베흐테레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립한 정신신경학연구소(Психоневролог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는 세계 최초로 심리학, 정신의학, 신경학, 교육학, 법학을 하나의 지붕 아래 통합한 연구·교육 기관이었다. 베흐테레프는 인간을 단편화된 전문 분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고, 신경계의 해부학에서 사회적 행동까지 아우르는 '인간학(человековедение)'을 구상했다. 연구소는 연구 기능과 고등교육 기관을 결합했으며, 교육학부·법학부·의학부를 갖추었다. 1916년 이 학부들은 연구소 부설 사립 페트로그라드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13년 베흐테레프는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의식 살인 혐의로 기소된 멘델 베일리스의 재판에서 증거 기반 의학 원칙에 입각한 법의학 감정을 제출해 연구소의 학문적 독립성을 입증했다. 10월 혁명 후 베흐테레프는 인민교육위원회에 연구소 확장을 청원했고, 1918년 로마노프 대공의 소유였던 대리석궁전 동관을 확보했다. 협상에서 '두 관 모두 달라'고 요구한 일화는 그의 대담한 성격을 보여준다. 같은 해 5월 그는 별도로 뇌·정신활동 연구소(Институт по изучению мозга и психической деятельности) 설립을 인민위원회에 청원해 승인받았으며, 평생 그 소장을 맡았다. 현재 이 기관은 V.M. 베흐테레프 국립 정신의학·신경학 의학연구센터로 계승되어 그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