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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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내 인물들

아르놀트 바실리예비치 보일루코프

Арнольд Васильевич Войлуков

개혁의 이면을 증언한 소비에트 은행가

그는 1991년 개혁의 발상이 국가보안위원회와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했다.

아르놀트 보일루코프는 소련 국립은행의 고위 은행가로, 말년 소비에트 금융 운영의 내부를 경험했다. 그는 1991년 1월 화폐개혁을 집행한 기관의 책임자였을 뿐 아니라, 훗날 그 구상이 재무부나 발렌틴 파블로프가 아니라 국가보안위원회와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한 증언자로 중요하다. 그의 회고는 개혁을 둘러싼 제도 간 긴장과, 비밀리에 추진된 조치가 대중의 신뢰를 훼손한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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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모스크바 금융대학 졸업
  • 1955–1960년대국립은행 지역 기관에서 근무
  • 1960년대–1970년대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 국립은행 현금유통·출납업무 부장
  • 1980년대소련 국립은행 중앙기구 고위 간부
  • 1990–1991소련 국립은행 이사회 부의장
  • 1992–1994러시아 중앙은행 제1부총재

가브릴 하리토노비치 포포프

Гавриил Харитонович Попов

쿠데타 음모를 미국 대사에게 알린 모스크바 첫 민선 시장

1991년 6월 20일 포포프는 미국 대사 잭 매틀록에게 쿠데타 준비를 알리는 쪽지를 건네 파블로프·크류치코프·야조프·루키야노프의 이름을 적었고, 이 경고는 워싱턴을 거쳐 고르바초프에게 전달되었으나 매틀록은 회고록에서 허위 경보였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아조프 그리스인 부모 사이에서 1936년 10월 31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경제학자로,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63년 경제학 후보, 1970년 박사, 1971년 교수가 되었다. 모스크바국립대에서 관리학 연구실장과 주임교수, 학장을 지냈으며(학장 시작은 1977년설과 1978년설이 있다), 1988~1990년 『경제문제』 편집장으로 '명령-행정 체제' 개념을 확산시켰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사하로프·옐친 등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을 맡았고, 1991년 6월 12일 65.3% 득표로 모스크바 최초의 민선 시장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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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모스크바국립대 콤소몰 서기
  • 1960–1961모스크바국립대 콤소몰 서기
  • 1959–1971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대학원 → 강사 → 관리학 연구실장
  • 1971–1988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관리학 주임교수
  • 1978–1980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학장
  • 1988–1990『경제문제』 편집장; '명령-행정 체제' 개념 도입
  • 1989–1990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
  • 1990–1991모스크바 시의회 의장
  • 1991–1992모스크바 시장(최초의 민선); 무상 주택 사유화, 프레펙투라제 도입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솝차크

Анато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бчак

제헌회의 의장을 맡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초대 민선 시장

「볼로댜, 청동으로 굳어지지 말게」 — 푸틴에게 남긴 마지막 말, 2000년 2월

아나톨리 솝차크는 법학자이자 민주개혁가로서, 제헌회의 의장으로 1993년 러시아 연방 헌법 제정을 공동 주도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대 민선 시장(1991–1996)을 지냈다. 레닌그라드 국립대 법학 교수 시절 블라디미르 푸틴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가르친 그는,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안드레이 사하로프·보리스 옐친과 함께 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을 맡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군 지휘관을 설득해 병력 투입을 막고 궁전광장에 20만 시민을 결집시키며 저항을 조직했다. 부패 혐의로 1997년 파리로 망명했으나, 총리가 된 푸틴의 도움으로 1999년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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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
  • 1989–1990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 (사하로프·옐친과 함께)
  • 1990–1991레닌그라드 시의회 의장
  • 1991–1996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 1993제헌회의 의장 (러시아 연방 헌법 공동 초안)
  • 1997–1999파리 망명

겐나디 예두아르도비치 부르불리스

Геннадий Эдуардович Бурбулис

벨라베자에서 소련의 사망선고 문장을 던진 철학자

벨라베자 숲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를 향해: "소련이 국제법의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옐친의 최측근이자 소련 해체의 지적 설계자. 우랄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 출신으로, 1991년 9월 가이다르 그룹이 쓴 '부르불리스 메모란덤'을 옐친에게 전해 러시아의 경제적 독립 노선을 결정지었다. 그해 12월 벨라베자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에게 "소련이 국제법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그 문장으로 시작된 합의문에 옐친과 함께 서명했다. 1992년 개혁에 쏟아진 비난의 번개 막대가 되어 물러난 뒤 의원과 상원의원으로 조용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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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83우랄 공대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 강의
  • 1987–1989스베르들롭스크 정치토론클럽 '토론 연단' 창립
  • 1989–1990소련 인민대의원, 지역 간 대의원 그룹 참여
  • 1990–1991옐친 대선 선거본부장
  • 1991.07–1992.05RSFSR 국가서기, 러시아 제1부총리
  • 1991.12벨라베자 합의 공동 서명
  • 1993–1999국가두마 의원(1·2기)
  • 2000–2007노브고로드 부지사, 연방평의회 의원

예고르 티무로비치 가이다르

Егор Тимурович Гайдар

충격요법의 설계자: 계획경제를 해체하고 러시아 자본주의의 초석을 놓은 경제학자

1993년 10월 3일 밤 TV 생방송: "이 시간에 경찰과 보안군에만 의존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모스크바 시민 여러분, 모소베트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섰다.

소련 작가 아르카디 가이다르와 파벨 바조프의 손자. 모스크바국립대 졸업 후 《콤무니스트》와 《프라우다》 경제편집자로 시장개혁을 주장했다. 1991년 11월 옐친 정부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으로 들어가 1992년 1월 2일 가격자유화와 민영화를 단행,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는 충격요법을 설계했다. 1992년 6~12월 총리 대행, 1993년 헌정위기 때 TV로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설 것을 호소했다. 기근과 국가 붕괴를 막았다는 평가와 국민 저축을 쓸어갔다는 비판이 교차하는,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정책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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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1987전연방체계연구소(VNIISI)·과학아카데미 예측연구소 연구원
  • 1987–1990《콤무니스트》 경제정책 담당 편집자
  • 1990《프라우다》 경제부장, 경제정책연구소 설립·소장
  • 1991.11–1992.03러시아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 재무장관
  • 1992.03–12제1부총리; 6~12월 총리 대행
  • 1993.09–1994.01제1부총리 겸 경제장관 대행: 10월 위기 TV 호소
  • 1993–1995국가두마 의원, '러시아의 선택' 원내대표
  • 1994–2001'러시아 민주선택' 당대표, SPF 공동대표(2000)
  • 1999–2003국가두마 의원, 조세·예산법안 주도
  • 1992–2009경제정책연구소(현 가이다르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