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중부 포흐얀마의 칸누스에서 태어나 17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광산에서 일하며 급진적 서부광부연맹에 들었다. 1900년 돌아와 1907년 사회민주당 의원이 되었고, 1912~1917년 핀란드 노동조합연맹 의장, 1913년 의회 의장을 지냈다. 1917년 상원 경제부 부의장, 곧 세계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총리가 되었다. 내전 때 인민대표위원회 식량 위원을 맡아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3월 1일 조약에 서명했고, 패전 뒤 러시아로 피했다. 1919~1920년 영국이 꾸린 무르만스크 군단의 정치 고문이 되어 핀란드 공산당에게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22~1949년 미국에서 사회민주주의 신문 『라이바야』를 만들었고, 1944년 「토코이 법」으로 내전 관련 혐의를 벗었다.
1941년 6월 25일 저녁 의회에서 "핀란드는 소련의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소련은 핀란드를 상대로 전쟁 행위를 시작했다"고 선언했다.
핀란드은행 간부로 리스토 뤼티의 측근이 된 그는, 뤼티가 1940년 대통령에 오르자 총리로 발탁되었다. 재임 중 핀란드는 독일과 함께 계속전쟁을 치르며 동카렐리야를 점령했고, 경제 문제보다 외교·군사 권한은 만네르헤임과 뤼티, 비팅 외무장관이 쥐고 있었다. 1942년 힘러 방문 때 "우리에게 유대인 문제란 없다"는 말로 핀란드 유대인 논의를 차단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6년 전쟁책임 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49년 사면되었고, 이후 정치에 복귀하지 않고 IOC 위원으로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