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세르타 협정에서 그는 해방 뒤에도 영국군 사령관 스코비에게 군사 지휘권을 맡기는 구상에 동의했다.
그리스의 자유주의 정치가로, 군주제에 반대하면서도 공산주의 운동과는 대립한 사회개혁 지향의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정부를 이끌며 레바논 회의와 카세르타 협정을 통해 저항 세력의 정부 참여와 군 통합의 틀을 마련했다. 1944년 귀국 뒤 국민통합정부의 수상으로 국가 통치권을 세우려 했지만, 영국의 군사적 개입과 EAM·비EAM 세력의 충돌 속에서 그 구상은 데켐브리아나와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후 중앙연합을 창당해 민주주의를 옹호했으며 1967년 군사 쿠데타 뒤 가택연금 중 사망했다.
그를 '영국의 요원'으로 여긴 자하리아디스는 1946년 '어떤 경우에도 시안토스를 내 뒤에 남겨두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해외 탈출을 미뤘다.
담배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 조지 시안토스는 그리스 공산당(KKE)의 핵심 지도자로 성장했다. 독일 점령기에 니콜라오스 자하리아디스가 다하우로 이송되자 당의 직무대행 서기를 맡아 KKE와 민족해방전선(EAM),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의 저항을 이끌었다. 그는 1944년 12월 무장충돌에서 EAM군을 지휘했고, 무장부대 해산에 반대하면서도 결국 협상 노선을 택했다. 1945년 바르키자 협정에서 EAM 대표단을 이끌고 서명했지만, 협정의 무장해제 조항은 뒤이은 백색 테러와 새로운 내전 국면 속에서 EAM의 정치적 패배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