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방광암으로 사망해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라는 추도사를 받으며 국장으로 묻혔으나, 사인방 재판 직전인 1980년 10월 사후 제명되고 바바오산에서 유해가 옮겨졌다.
산둥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상하이 지하활동을 거쳐 1933년 모스크바에서 왕밍의 오른팔로 소련 숙청을 배웠다. 1937년 옌안에 돌아와 마오 편에 서서 사회부장으로 정풍운동의 「구조 운동」을 지휘해 수천 명을 특무로 몰았다. 건국 후 한동안 물러났다가 1960년대 중소 논쟁과 문화대혁명에서 중앙문혁소조 고문으로 복귀해 류사오치·허룽 등 원로들에 대한 조사와 박해를 주도했다. 1975년 암으로 사망했고 1980년 당적을 박탈당했다.
1936년 겨울, 부상과 병고 속에 매령에서 포위된 천이는 죽음을 각오한 시 세 수를 옷 속에 숨겨 두었다. 「이 몸은 황천으로 가 옛 부하를 모으리니, 십만 깃발로 염라대왕을 베리라.」
쓰촨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뒤 입당했고 난창 봉기 잔여 부대를 주더와 함께 징강산으로 이끌었다. 대장정에 참여하지 않고 남방에서 3년 유격전을 버텼으며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대리군장이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화둥 야전군(제3야전군)을 지휘해 회하이 전역에 참전하고 상하이를 점령해 초대 시장이 되었다. 1955년 원수, 1958년 외교부장이 되어 반둥 노선의 아시아·아프리카 외교를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2월 역류」로 비판받았고 1972년 암으로 사망했으며 마오가 장례에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