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민스크현 자즈베야에서 태어나 1903년 바르샤바 수의학교를 마쳤고, 수의사이자 마리나호르카 농업학교 교사로 일했다. 러일전쟁에 종군했고 벨라루스 사회주의 흐라마다에서 활동했다. 1917년 12월 제1차 전벨라루스 대회 의장으로 뽑혔고 대회가 해산될 때 체포되었다. 1918년 2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회담에 벨라루스 대표로 갔고, 3월 라다 의장이 되어 독립을 선포한 3월 24~25일 회의를 이끌었으며, 7~11월에는 인민서기국 의장을 지냈다. 1920년대 소비에트 벨로루시의 농업 부문에서 일하다 1930년 「벨라루스 해방동맹」 사건으로 체포되어 유형과 굴라크를 거쳤고, 1943년 석방된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9년 12월, 야코블레프는 전체 농지의 '최소 3분의 1'을 1930년 봄까지 집단화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신중하다며 기각했고, 야코블레프는 그대로 물러서 상향된 강행 일정을 충실히 집행했다.
본명 예프스타인. 1913년 볼셰비키 입당, 혁명 후 우크라이나에서 당 활동을 이끌었다. 1923년부터 『농민신문』 편집장을 맡아 농촌 문제 전문가로 부상했고, 1929년 초대 소련 농업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정치국 집단화 위원회를 주도했다. 1930년 1월 5일 포고령을 기초해 주요 곡창지대의 강제 집단화 일정과 '부농 계급 청산' 정책을 설계했으며, 트로핌 리센코를 발탁해 소련 생물학의 반과학적 전환에도 관여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니콜라이 데멘테이는 농업 전문가에서 벨로루시 공산당의 고위 간부와 최고회의 의장으로 올라선 소련·벨라루스 정치가였다. 그는 1990년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주권 선언을 주재했지만, 연방을 해체하지 않는 개혁을 지지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위원회의 쿠데타를 공개 지지한 뒤 사임하며, 소련 질서의 마지막 국면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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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962비쳅스크주 당위원회 강사, 비쳅스크 구역 당위원회 제2서기, 비쳅스크 구역 집행위원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