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국관리위원회
Allied Control Council
연합국관리위원회는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소련·영국·프랑스 4개 점령국이 패전 독일을 공동 통치하기 위해 세운 최고 통치 기관으로, 독일어로는 Alliierter Kontrollrat라 한다. 1945년 6월 5일 베를린 선언으로 4개국이 독일 전체에 대한 최고 권력을 접수하고 같은 해 8월 30일 공식 출범했으며, 독일 전체에 관한 사항은 4개 총사령관의 만장일치로 결정해야 했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1948년 3월 20일 소련 대표 소콜롭스키가 회의를 중단하고 대표단과 함께 퇴장했고, 위원회는 더 이상 활동하지 못했다. 해산 시점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1949년, 1990년, 1991년으로 엇갈린다.
상세
설립과 구성
연합국관리위원회의 준비는 1944년 유럽자문위원회가 마련한 「독일 통제기구에 관한 협정」(같은 해 11월 14일 런던에서 조인)에 뿌리를 둔다. 독일이 항복한 뒤 1945년 6월 5일 베를린 선언으로 4개국은 1937년 12월 31일자 국경 기준 독일 전체에 대한 최고 권력을 접수하고 점령구와 베를린 구역의 경계를 정했으며, 독일 정부·최고사령부·주 및 지방 당국의 모든 권한을 인수했다. 이는 병합이 아니었고, 최종 국경과 지위는 평화조약으로 정하기로 했으나 그 조약은 1990년 「독일 최종해결조약」에 이르기까지 체결되지 않았다.
위원회는 1945년 7월 30일 비공식 회합을 열었고, 공식 업무는 8월 30일 시작해 첫 포고로 독일 국민에게 기구의 존재를 알렸다. 위원은 각 점령구 최고사령관이 겸했으며, 초대 위원은 주코프(소련)·아이젠하워(미국)·몽고메리(영국)·라트르 드 타시니(프랑스)였다. 본부는 베를린 쇠네베르크의 옛 법원청(Kammergericht) 건물에 두었고, 소규모 점령국인 룩셈부르크도 베를린에 상주 대표를 두었다.
활동
위원회는 포고·법률·명령·지시·지침의 형태로 입법했다. 1945년 9월의 지시 제10호가 이 다섯 범주를 정했고, 같은 시기 지시 제11호는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독일어를 공식 언어로 삼고 관보를 두었다. 1947년 4월 29일 지시 제51호는 범주를 포고·법률·명령 셋으로 줄였다. 다만 지시 제10호의 날짜는 러시아어 자료가 9월 22일, 영어 자료가 9월 20일로 갈린다.
입법의 내용은 나치 법령과 조직의 폐지, 비무장화, 탈나치화였다. 법률 제2호(1945년 10월 10일)는 나치당을 해산하고 재건을 금지했고, 법률 제8호(1945년 11월 30일, 12월 1일 발효)는 독일 군사 조직을 해체했으며, 법률 제4호(1945년 10월 30일)는 독일 법원을 재건했고, 법률 제10호(1945년 12월 20일)는 각 점령국이 자기 제도로 전범을 재판하도록 허용했다. 법률 제46호(1947년 2월 25일)는 군국주의와 결부된 이름을 이유로 프로이센을 독일 안의 행정 단위로서 폐지했다.
위원회가 다룬 주요 사안 가운데 하나는 포츠담 회의에서 결정된 독일계 소수민족 이주 문제였다. 1945년 11월 20일 위원회는 1946년 7월까지 이주를 마치는 계획을 승인했으나, 포츠담 당사국이 아니던 프랑스는 구속받지 않을 권리를 유보하고 자기 점령구로 이주민을 받지 않았다. 1948년 이전까지 80회 이상의 회의가 열렸고, 잠정 국경(오데르-나이세 선 등)과 이주 합법화, 독일 경제의 비무장화가 논의됐다. 그러나 산업 설비의 해체와 반출은 각 점령국이 독자적으로 집행해 이 문제에 관한 통일된 위원회 정책은 없었고, 배상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마비와 해체
모든 결정이 만장일치를 요구했기에 협력은 곧 흔들렸다. 1946년 9월에는 산업용 석탄 배분을 둘러싸고 이견이 생겨 소련 대표가 미·영·프가 합의한 계획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1947년 1월 1일 미·영 점령구가 이중점령구(바이조니아)로 통합됐고(프랑스 점령구는 1949년 4월 8일 합류), 두 나라는 1947년과 1948년 초에 걸쳐 도이치마르크 화폐 개혁을 준비했다.
1948년 3월 20일 제82차 회의는 소련 측 의장의 요청으로 열렸다. 3월 17일 조정위원회가 정규 안건이 없다고 판단한 뒤,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유고슬라비아 정부의 독일 문제 선언과 최근 런던 3국 회의 결과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서방 대표들은 프라하 선언을 정부 차원에서 다룰 선전으로 보고 논의를 거부했으며, 소련 측 위원은 안건을 철회했다. 이어 소련 측 위원 소콜롭스키는 동료들에게 런던 회의 결정을 위원회에 충분히 알리라고 요구했다. 영국·미국 대표는 런던 회의가 잠정적이고 관련 정부들에 권고만 했을 뿐 아직 '지령'을 받은 바 없다고 답했고, 영국 측 위원은 소련 측이 자기 점령구의 일방적 조치를 위원회에 알리지 않았다고 맞받았다.
소콜롭스키는 런던 결정이 위원회 관할 사안이며 서방의 논의 거부는 포츠담에 반하는 3국 합의를 감추려는 의도라고, 또 서방이 위원회 기구에서 이탈했으니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주장하며 위원회가 정부 기구로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뒤 '오늘 회의'의 폐회를 선언하고 소련 대표단 전원과 회의장을 떠났다. 서방 3국은 의장의 일방적 회의 종료가 부당하다고 보았다. 이후 위원회는 다시 열리지 않았고, 독일 전체에 관한 사항은 4개국이 함께 결정한다는 원칙도 작동하지 않게 됐다. 다만 정식으로 해산된 적은 없다. 1971년 9월 3일 한 차례 회의가 열려 베를린 4개국 협정으로 이어졌고, 위원회는 전후 독일 점령에 관한 4개국 권리의 제도적 틀로 남았다. 남은 공동 기능은 슈판다우 교도소 관리(1987년 마지막 수감자 루돌프 헤스가 사망할 때까지)와 베를린 항공안전센터였다.
1948년 6월 20~21일 밤 서방 3개 점령구의 화폐 개혁과 이에 뒤따른 소련 점령구의 화폐 개혁, 서베를린 봉쇄로 독일 분단은 되돌릴 수 없게 됐다. 위원회의 마비는 헌법적 난제도 낳았다. 1945년의 연합국은 독일 국가 주권을 통일 독일 국가에 넘길 구상이었기에, 서독과 동독 어느 쪽도 자기 헌법에 대해 완전한 관리위원회의 승인을 받을 수 없었다. 이후 서방 점령구와 서베를린 구역은 1949년 9월 설치된 연합국고등판무관부가, 소련 점령구와 소련 구역은 소련관리위원회 의장과 뒤이은 소련고등판무관이 통치했으며, 두 독일 국가가 1955년 사실상의 주권을 얻으면서 이 직위들은 끝났다.
위원회는 1990년 10월 2일, 독일 통일 전야에 마지막 회의를 열어 베를린을 통일 독일에 포함시키는 공식 문서를 공포했다. 독일은 1991년 3월 15일까지 명목상 군정 아래 있었고, 같은 날 1990년 9월 12일 조인된 「독일 최종해결조약」의 비준서 기탁으로 완전한 주권이 회복되면서 위원회는 끝났다. 러시아어 자료는 1990년 2+4 조약으로 독일이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면서 위원회가 공식 청산됐다고 본다.
해산 시점을 둘러싼 엇갈린 기록
영어 자료는 사실상 해산을 1949년 9월 20일, 법률상 해산을 1991년 3월 15일로 제시하고 1948년 3월 20일 이후 1970년대까지 소련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러시아어 자료는 1949년 10월 7일을 폐지일로 적고, 독일사료집은 1948년 3월 20일 이후 위원회가 업무를 중단했다고만 전한다. 현재 항목의 1945~1990년 표기도 이 가운데 하나다. 확정된 한 해로 단정하지 않고 대안을 명시한다.
구분
- 독일의 연합국관리위원회와 오스트리아의 연합국위원회는 별개 기구다. 후자는 1945년 7월 4일 런던에서 조인되어 7월 24일 발효된 「오스트리아 통제기구에 관한 협정」으로 설치됐고, 1955년 5월 15일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뒤 해체됐으며 마지막 회의는 1955년 6월 27일이었다. 오스트리아는 관리위원회, 집행위원회, 4개 점령군 참모부로 구성됐다.
- 소콜롭스키 퇴장 이후 서방 점령구에서는 연합국고등판무관부가, 소련 점령구에서는 소련관리위원회와 뒤이은 소련고등판무관이 위원회를 대체했다.
- 법적 지위 면에서 '독일 전체'는 1948년 이후에도 4개국의 통치 아래 남았다. 베를린 항공안전센터는 같은 쇠네베르크 건물에서 1990년 12월 31일까지 운영됐고, 베를린 4개국 협정은 1972년 6월 3일 위원회 본부 건물에서 조인됐다.
- 위원회의 쇠네베르크 청사는 나치 인민법원의 재판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1948년 이후 점령국들이 각자 구역으로 옮긴 뒤에도 베를린 항공안전센터만 1990년 12월 31일까지 남아 네 나라 국기를 매일 게양했고, 건물은 1994년 8월 러시아군 철수 뒤 독일 정부에 반환되어 1997년 법원청이 다시 들어섰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four-power governing body of occupied Germany (1945–1949/1991) and Austria, members USSR/US/UK/France, sole legal sovereign authority for Germany as a whole, seat in Schöneberg, constituted 30 August 1945, unanimity rule, Sokolovsky walkout 20 March 1948, formal lapse with 1990 reunification
- 위키백과 (러시아어) origin in 14 Nov 1944 control-machinery agreement, initial members Zhukov/Eisenhower/Montgomery/de Lattre, Law No. 46 abolishing Prussia, more than 80 sessions before 1948, boycott 20 March 1948
- germanhistorydocs.org begun meeting 30 July 1945 and officially commenced 30 August 1945, four supreme commanders doubling as military governors, unanimity requirement, Sokolovsky walked out 20 March 1948 after which the Council discontinued its work
- docs.historyrussia.org Marshal Sokolovsky's statements at the Control Council session of 20 March 1948 (primary source)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 history.state.gov
-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