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1991

앙골라의 국유 부문과 석유경제

Angolan state sector and oil economy

앙골라의 독립 이후 경제는 국유화와 중앙 계획, 국영기업, 외국 기업이 참여한 석유 부문이 병존한 체제였다. MPLA-PT 중앙위원회의 통제 아래 정부가 경제 대부분을 직접 장악했고 국영기업이 민간 기업을 대체했지만, 민간 거래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암시장(병행시장, 카동가)이 거래를 지배했다.

상세

국유화는 필요와 이념이 겹친 조치였다. 제조업 공장과 농장의 포르투갈인 소유주들이 독립기에 떠나면서 국가가 가동을 유지하려고 국유화해야 했고, 정부는 광물·석유 부를 통제할 회사를 세워 대외 착취로부터 보호하려 했다. 국영 석유회사는 석유를 퍼 올리는 외국 기업과 유리한 조건을 협상해 이익의 상당 부분을 국내에 남겼다. 이 정책은 식민지 경제 체제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인이 남긴 공백을 메우려는 이념과 필요의 결합이었다.

역사적 배경이 중요하다. 앙골라 경제는 16세기 유럽 지배 이래 원료 생산과 값싼 노동력에 맞춰져 있었고, 1950년 이후 다수 들어온 포르투갈인 정착민은 앙골라 토지를 점유해 농민의 환금작물·자급작물 생산을 교란했다. 산업은 시장과 기계를 포르투갈에 의존했고, 포르투갈인은 앙골라인을 대기업 운영에 훈련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독립한 앙골라는 시장도 전문성도 없었다. 집권 MPLA-PT가 1976년 8월에 집계한 바에 따르면 농장의 80퍼센트 이상이 포르투갈인 소유주에게 버려졌고 692개 공장 가운데 가동 중인 곳은 284개에 불과했으며, 3만 명이 넘는 중·고급 관리자와 기술자, 숙련 노동자가 떠나고 2,500개 기업이 문을 닫았으며, 등록 차량 15만 3천 대 가운데 8천 대만 남았다. 이에 정부는 버려진 기업과 농장 대부분을 국유화하고 커피·사탕수수·사이잘 생산을 잇기 위해 국영 농장을 세웠으며 모든 공장 운영을 인수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경험 있는 관리자 부족과 UNITA 반군의 계속된 농촌 교란으로 대체로 실패했고, 석유 부문만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1980년 국내총생산을 1988년까지의 최고 수준인 36억 달러로 끌어올렸다.

1980년대 중반에는 재정 위기가 닥쳤다. 1986년 석유 생산량이 21.5퍼센트 늘었는데도 세계 유가 하락으로 정부의 석유 수입은 예산 목표의 45퍼센트에 그쳤고, 세입은 1986년 예산의 절반을 겨우 넘었으며, 지출은 5.5퍼센트 삭감되었다(주로 경제 개발 항목이 줄고 사회 서비스는 14퍼센트 늘었다). 국방비는 1986년 예산의 기록적인 40.4퍼센트까지 올랐다.

포르투갈인 농촌 상인들이 1975년에 떠난 뒤 국영 마케팅 기업 엔코디파(Emprêsa Nacional de Comercialização e Distribuição de Produtos Agrícolas)는 비효율적이었고, 소비재와 공업 투입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잉여 생산을 미루고 대부분 자급 농업으로 물러났다. 국영 축산 마케팅 회사의 부실은 남서부 목축 지대에 심각한 재고 적체를 낳았다. 정부는 1984년부터 옛 포르투갈인 상업 농장의 국영 농장을 해체해 토지를 노동자에게 넘기고 농업 개발소, 농민 협회, 협동조합을 세웠으며, 1986년 12월에는 농산물의 제한적 자유 거래를 허용하는 농업 마케팅 자유화를 명령했다.

1987년 8월 17일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대통령은 1985년 12월 제2차 당 대회 지침과 맞물린 경제·재정 정비(Saneamento Económico e Financeiro, SEF)를 발표했다. 그는 1986년 유가 하락과 ‘사회주의 계획 방법의 과도한 중앙집권화’, 국영기업의 부실 경영, 부패를 원인으로 들었고, 이 프로그램은 국내외에서 민간 부문으로의 강한 이행,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가입, 비전략 국영기업의 민영화, 예산 보조금 폐지, 국영 농장에서 농민 부문으로의 전환, 가격 인상, 통화 개혁과 콴자 평가절하를 규정했다. 수입 통제는 정부가 가장 놓기 어려워한 영역이었고, 대통령은 국가가 교육·보건·경찰·민정 같은 전통적 서비스의 악화를 더는 막을 수 없다고 인정했다.

민간 거래, 특히 병행시장은 계속되었다. MPLA-PT 중앙위원회는 부패와 병행시장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는데, 이 시장은 정상적으로 구할 수 없는 온갖 상품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제공했다. 1987년 6월까지 42개 작업반이 편성되고 주 당국이 모든 병행시장 폐쇄를 명령했으며 군이 물자 이동을 감독하도록 지시되었다. 그런데도 1988년 사료는 루안다를 통해 수입된 물자의 약 40퍼센트가 도난 때문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추산했고, 기본 식료품에 배급표가 요구되는 가운데 병행시장은 1988년에도 번성했다.

이 시기 경제는 석유 수출 산업이 지배했고 UNITA와의 전쟁으로 소모되었다. 커피 대농장을 비롯한 환금작물 경제가 무너지면서 1988년에는 자금 조달을 전적으로 석유 부문에 의존했고, 국내총생산은 1982년 1,094억 콴자에서 1985년 1,449억 콴자로 늘었다. 석유 수입의 대부분은 국방비로 빠르게 지출되었고 1986년 유가 하락기에 가장 첨예했다. 한때 식량 수출국이던 앙골라는 1980년대 후반 곡물 수요의 절반을 수입했다.

노동과 고용에서 앙골라는 스스로 사회주의 노동자 국가라 칭하며 노동자 권리와 적정 임금 보호를 약속했다. 1980년대 모든 노동자는 앙골라 노동자 전국연합(UNTA)에 속해 최저임금을 받았고, UNTA는 뛰어난 생산성에 보너스를 주는 ‘사회주의 경쟁’ 프로그램을 추진했으며, 정부는 국영기업의 생산성에 불만을 품고 임금을 성과에 연동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외국인 노동자의 높은 임금은 앙골라 노동을 중시한다는 당의 이념과 모순되었다. 포르투갈인 이탈 뒤 핵심 직위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쓰였고, 앙골라화가 가장 성공한 곳은 석유 부문이었다. 1985년 말 석유 부문 노동자의 50퍼센트 이상이 어느 정도 기술 훈련을 받은 앙골라인이었는데, 이는 정부와 앙골라 국영 연료회사(Sonangol)의 조치 결과였고 Sonangol은 석유 산업 노동자의 약 절반을 고용했다. 1982년 앙골라화법(법령 20/82)은 훈련 기금을 세웠고, 석유 분야 집중 훈련 과정과 세미나는 1982년 66회에서 1985년 151회로 늘었다.

기간의 구분과 관련해 당의 공식 정치경제 모델은 따로 볼 필요가 있다. MPLA는 내전을 거쳐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당국가를 선포했고, 1975년 헌법은 1976년과 1980년에 개정되어 사회주의 혁명을 승인하면서도 일부 사유재산권을 보장했다. 1977년 MPLA-PT로 개칭한 집권당은 국가 권력을 주장했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이끌 전위당으로 전환해 마르크스-레닌주의 교조에 따라 대중조직을 당에 예속시켰다. 1977년 제1차 정기 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임을 강령에 명기했는데, 실천하려 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마르크스 모델이었고, 1977년부터 1979년에는 당내 실용적 사고가 두드러졌다. 분파주의 사태 이후 MPLA-PT는 반대파와의 대화 없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일당 통치를 택했으며 당시 동유럽 체제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두스산투스의 일차적 목표는 이념적 순수성보다 경제 발전이었다. 포르투갈어 사료는 당의 현재 이념을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범아프리카주의, 좌파 민족주의로, 과거 이념을 공산주의,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적으며 정치 스펙트럼을 중도좌파에서 좌파(과거 극좌)로 본다. 따라서 국유 부문과 석유경제는 당의 영구적 모델이 아니라 한정된 단계였다.

이 단계의 상한은 사료마다 다르게 잡히며, 이 항목은 단일한 이념 포기 연도를 단정하지 않는다. 영어 위키백과는 냉전 종식과 소련 붕괴기에 MPLA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리고 1990년 12월 제3차 당 대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선언했다고 보며, 1977년부터 1990년까지의 당명을 ‘MPLA - 노동당’으로 적는다. 포르투갈어 위키백과는 1991년 다당제 민주 체제 채택과 함께 MPLA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고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정당이 되었다고 서술한다. 포르투갈어 「앙골라 1992년 헌법」 문서는 1991년 4월 28일 MPLA 제2차 임시 당 대회가 공식 이념을 바꾸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했다고 명시한다. 법적 전환은 1991년 5월 6일 헌법 개정법(Emenda-Lei n.º 12/91)으로 이뤄졌고, 1991년 5월 31일 비세스(에스토릴) 협정은 유엔 UNAVEM II 감독 아래 다당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규정했으며 1992년 9월 유엔 감시 다당 선거를 예정했다. 이 항목의 endYear 1991은 다당제 전환이 법제화된 해에 맞춘 것으로, 이념 포기의 시점은 사료별 주장을 병기해 제시하며 단정하지 않는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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