Башҡортостан · 1917–1919

바시쿠르디스탄 (1917–1919)

Bashkurdistan (1917–1919)

러시아 내전기인 1917~1919년 바시키르 민족운동이 세운 민족·영토 자치. 「소바시키리야」, 「바시코르토스탄 자치」라고도 한다. 1917년 11월 바시키르 중앙 슈로가 오렌부르크·우파·사마라·페름 현의 바시키르 영토를 러시아 공화국의 자치 부분으로 선포했고, 정부·예비 의회·군대를 갖추었다. 백군 쪽에 섰다가 콜차크가 자치를 없애려 하자 1919년 소비에트 쪽으로 넘어갔고, 3월 20일 협정으로 바시키르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었다.

상세

2월 혁명 뒤 1917년 6월 바시키르 지역국이 읍마다 협의회(슈로)를 조직했고, 7월 오렌부르크와 8월 우파의 제1·2차 전바시키르 쿠룰타이는 「연방 러시아 안에서 민족·영토 원리에 선 민주공화국」을 목표로 정해 바시키르 중앙 슈로를 뽑았다. 10월 혁명 뒤 중앙 슈로는 구력 11월 11일 자치의 필요를 확인했고, 11월 15일(신력 28일) 자치를 선포했다. 선포문에는 의장 샤리프 마나토프, 부의장 아흐메트제키 발리디, 서기 샤이흐자다 바비치와 여섯 부서장이 서명했다. 군대·은행·철도·우편·전신·징세가 바시키르 기관으로 넘어갔고, 현과 군은 칸톤으로 바뀌었다. 구력 12월 8~20일 오렌부르크의 제헌 쿠룰타이는 소바시키리야의 경계 안에서 자치를 승인하고 9개 칸톤을 두었으며, 인구 10만 명당 1명으로 된 예비 의회 「케세 쿠룰타이」(22명)를 세웠다. 케세 쿠룰타이는 바시키르 정부를 세웠고, 쿠룰타이는 발리디가 이끄는 바시키르 군 창설과 독자적 사법,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정했다. 영토는 7만 9,560㎢, 인구는 125만 59명이었다. 레닌은 1918년 1월 마나토프에게 바시키르 운동을 「반혁명이 아니며, 동방 민족들의 민족운동은 매우 자연스럽고 매우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소비에트 정부는 자치를 승인하지 않았다. 붉은 군대가 오렌부르크를 차지한 뒤 중앙 슈로는 중립을 내세우고 자체 헌법인 「자치 소바시키리야 규정」으로 바시키르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정했다.

긴장은 곧 무력 충돌로 번졌다. 1918년 2월 15~16일 밤 오렌부르크 무슬림 군사혁명위원회가 정부 위원 7명을 체포했고, 이 결정은 중상에 근거해 사후에 승인되었다. 3월에는 정부 위원 가브둘라 이델바예프와 김란 마가조프가 총살되었다. 4월 3~4일 밤 아미르 카라미셰프의 바시키르 부대가 카자크와 함께 오렌부르크 감옥에서 정부 위원들을 풀어냈고, 나흘 뒤 우파의 비밀 회의가 볼셰비키와 싸우기로 했다. 5월 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도움으로 자치가 회복되자 6월 1일 정부는 무장 저항을 호소했고, 시베리아 임시정부·코무치·오렌부르크 카자크와 손잡았다. 5월 쿠스타나이에서는 알라시 자치와 공동 투쟁을 논의했고, 사마라 회의는 「남동부 무슬림 지역 연방」을 세우기로 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9월 8~23일 우파 국가회의에도 대표를 보냈다. 그러나 콜차크가 바시키르 군을 강제로 해산해 오렌부르크 카자크에 넘기자, 11월 말 크라스나야 메체티에서 바시키르 정부와 알라시 오르다의 무스타파 쇼카이, 코무치의 빅토르 체르노프 등이 반콜차크 전선을 논의했다. 1919년 2월 16일 중앙 슈로는 소비에트 정부와 함께하며 「전 세계 제국주의자」에게 맞서겠다고 결의했고, 2월 27일 심비르스크와 3월 9일 모스크바의 예비 협정을 거쳐 3월 20일 협정이 체결되었다. 소비에트는 이로써 1917년부터의 민족·영토 자치를 인정했다. 백군 점령기의 소바시키리야는 형식상 13개 칸톤의 자치였지만 실제로는 시베리아 정부와 코무치, 두토프가 옛 군 행정 체계로 다스렸다. 바시키르 역사가 쿨샤리포프는 바시쿠르디스탄을 바시키르 민족의 첫 독립국가로 보며, 미국 역사가 리처드 파이프스는 1950년 논문에서 바시키르 공화국을 「소비에트 민족 정책의 첫 실험」이라 불렀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러시아어)
  3.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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