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우랄 무슬림과 크림 타타르의 민족운동
1917년 연방제와 문화자치를 요구한 볼가·우랄의 타타르·바시키르인과 크림 타타르는 내전 속에서 어떤 자치 정부를 세웠고, 그 요구는 어떻게 바시키르·타타르·크림의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으로 바뀌었나?
1917년 5월 전러시아 무슬림 대회는 영토 연방제와 문화자치를 두고 갈렸고, 볼가·우랄에서는 이델-우랄 국가 구상과 발리디의 바시키르 자치가, 크림에서는 쿠룰타이와 크림 인민공화국이 생겨났다. 볼셰비키는 무슬림 인민위원부로 무슬림 공산주의자를 끌어들이는 한편 자치 정부들을 해산했고, 백군과 싸우던 바시키르 군은 1919년 소비에트 쪽으로 넘어왔다. 1919~1921년 바시키르·타타르·크림의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차례로 세워졌지만, 크림은 1920년 말 대규모 적색 테러와 기근을 겪었다.
1917년 모스크바의 전러시아 무슬림 대회: 연방제인가 문화자치인가
러시아 무슬림의 정치 조직은 1905년 혁명에서 시작되었다. 그해 8월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열린 무슬림 대회가 첫 무슬림 정당 「이티파크 알무슬리민」(러시아 무슬림 연합)을 만들었고, 볼가 타타르 지식인이 주도한 이 당은 입헌민주당과 가까운 자유주의 입헌 노선을 걸었다. 이슬람 개혁 운동인 자디드 운동의 영향이 컸다. 당 지도자들은 1906년 국가 두마에 들어가 네 차례 두마 내내 무슬림 의원단을 꾸렸다. 카잔 출신 변호사 사드리 막수디는 제2·3대 두마 의원이었는데, 입헌민주당 지도자 파벨 밀류코프는 1909년 두마 연설에서 「무슬림이자 타타르인 막수도프 의원이 나는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는데, 여러분은 러시아를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을 주지 않겠다고 답한다」며 우파를 꾸짖었다. 2월 혁명 뒤 러시아 임시정부가 모든 시민의 평등을 선언하자, 1917년 5월 1~11일 모스크바에서 전러시아 무슬림 대회가 열렸다. 캅카스, 크림, 카자흐 초원, 리투아니아 타타르, 중부 러시아와 시베리아, 투르키스탄, 부하라와 히바에서 900명 넘는 대의원이 모였고, 그 가운데 300명이 성직자, 112명이 여성이었다. 아야즈 이스하키, 아흐메트제키 발리디, 마메드 아민 라술자데, 무사 비기예프가 참석했고 젊은 교사 미르사이드 술탄-갈리예프도 그 자리에 있었다. 볼셰비키를 뺀 거의 모든 정당과 좌파 분파가 대표를 보냈다. 1 2 3 4
대회의 가장 뜨거운 쟁점은 새 러시아 국가의 형태였다. 볼가·우랄의 타타르 대표들은 러시아 무슬림 전체를 묶는 하나의 종교 자치와 공동 대표 기관, 그리고 영토와 상관없이 민족에게 주어지는 민족·문화 자치를 원했다. 볼가에서 시베리아까지 흩어져 사는 타타르에게 특정 영토를 떼어 내는 방식은 불리했기 때문이다. 반면 북캅카스 산악민 지도자들은 전통과 땅을 지키려고 영토 자치를 강조했고, 아제르바이잔 대표들은 종교 자치에서 넓은 지역 자치로 나아가 러시아를 연방 공화국으로 바꾸려 했다. 표결에서 라술자데가 낸 연방안이 446 대 271로 채택되었다. 결의는 「러시아에 가장 맞는 국가 형태는 민족·영토·연방 원리로 조직된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면서도, 일정한 영토가 없는 민족은 민족·문화 자결을 누린다고 덧붙였고, 러시아 전체 무슬림의 종교·문화 문제를 다룰 입법권 있는 중앙 기관을 두기로 했다. 다른 결의도 급진적이었다. 8시간 노동제와 아동 노동 금지가 채택되었고, 일부다처와 신부값을 금지하고 여성에게 선거권과 복장의 자유를 주는 결정이 다수결로 통과되었다. 이에 항의하는 226명의 서명이 의장단에 제출되었다. 대회는 처음으로 황제의 임명이 아닌 선거로 무프티를 뽑았고, 카디 6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성 무흘리사 부비가 선출되었다. 2
대회는 5월 11일 전러시아 무슬림 협의회를 세웠다. 협의회에는 30명이 선출되었고 12명으로 된 집행위원회는 아흐메드 찰리코프가 이끌었다. 협의회는 러시아 임시정부에 무슬림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자신과만 협의하라고 요구했고, 7월 초에는 게오르기 리보프 총리에게 무슬림 각료 후보를 내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8월 코르닐로프의 진군 때는 협의회 대표들이 「야만 사단」의 산악민 병사들을 찾아가 진군을 멈추게 설득했다. 그러나 조직은 약했다. 찰리코프는 협의회 정원 30여 명 가운데 4분의 3도 모인 적이 없고 집행위원 12명 중 실제로 일하는 사람은 4~5명뿐이라고 한탄했다. 무게중심은 오히려 지역으로 옮겨 갔다. 1917년 7월 22일 카잔에서 일반·군인·성직자의 세 전러시아 무슬림 대회가 합동 회의를 열어 「유럽 러시아와 시베리아 무슬림의 민족·문화 자치」를 선포하고 민족 의회와 교육·재정·종교의 세 부서를 둔 민족 행정부를 세웠다. 이 기관들의 책임자가 사드리 막수디였다. 영토를 떼지 않고 흩어진 무슬림 전체를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묶겠다는 이 구상은, 10월 혁명 뒤 영토를 가진 국가 구상으로 빠르게 바뀌어 간다. 2 5
이델-우랄 국가 구상과 「불라크 너머 공화국」(1917~1918)
내부 러시아와 시베리아 투르크-타타르 무슬림의 민족 의회인 밀레트 메질리스는 1917년 12월 초(구력 11월 20일) 우파에서 문을 열어 1918년 1월 하순까지 회기를 이어 갔다. 1918년 1월 사드리 막수디가 민족 행정부 「밀리 이다레」의 의장에 뽑혔고, 메질리스는 볼가·우랄 국가(타타르어로 이델-우랄, 「볼가-우랄」이라는 뜻)를 세우는 절차를 정해 8명으로 된 위원회에 헌법 초안과 국경, 경제 문제를 맡겼다. 국경은 큰 논란거리였다. 타타르·추바시·마리인을 모두 넣으면 무슬림 비율이 44%, 카잔·우파 두 현 전체와 페름·오렌부르크·사마라·심비르스크 일부를 묶으면 51%, 사마라 현 전체와 부케이 오르다를 더하면 29%에 그쳤다. 투르크주의 분파는 사마라와 아스트라한까지 넣어 카스피해로 캅카스·이란·투르키스탄과 이어지는 「큰 이델-우랄」을 원했다. 바시키르를 「타타르 민족」의 일부로 볼지도 다툼거리였다. 1918년 1월 멘젤린스크 군 무슬림 대회에서 대의원 다수가 바시키르 자치 쪽으로 기울자, 메질리스는 바시키르가 이미 국가에 합류했다는 취지의 전보를 급히 보내 표를 돌려놓았다고 바시키르 쪽 자료는 전한다. 6 7 3 8
구상을 실행에 옮긴 것은 1918년 1월 8일부터 3월 3일까지 카잔에서 열린 제2차 전러시아 무슬림 군인 대회와 그 집행 기관 「하르비 슈로」(군사 협의회)였다. 대회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안에 우파 현 전체와 카잔·심비르스크·사마라·오렌부르크·페름·뱌트카 현 일부로 이루어진 이델-우랄 국가를 세운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제헌의회와 소비에트 가운데 어느 쪽을 받아들일지를 두고 대회는 갈라졌고, 하르비 슈로는 의회 공화국 대신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러시아어 출처는 이 구상의 근본 약점으로, 타타르가 당시 소비에트와 전국 정당 조직에 거의 대표를 두지 못했고 타타르 노동자·농민의 자기 조직 수준이 매우 낮았다는 점을 든다. 2월 26일 카잔 무슬림 단체들의 합동 회의가 국가 선포를 결정하고 이튿날 거리에 포스터가 붙자, 카잔 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는 2월 28일 계엄을 선포하고 군인 대회와 하르비 슈로 지도부를 체포했다. 저녁에 풀려난 이들은 회의 장소를 불라크 강 건너 타타르 구역으로 옮겼고, 3월 1일 그곳에서 소비에트 러시아 안의 자치 국가 이델-우랄을 선포했다. 소비에트 역사학은 이를 「불라크 너머 공화국」(자불라치나야 공화국)이라 불렀다. 실제로 이 공화국이 다스린 곳은 카잔과 우파의 일부 구역뿐이었다. 7 6
불라크 너머의 정부는 자체 인민위원회의와 무장 대원을 모으는 혁명 참모부를 두고, 신문을 통해 소비에트를 인정하며 이델-우랄을 지지하는 모든 조직과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는 다른 길을 택했다. 3월 22일 민족인민위원부가 이델-우랄의 소비에트식 대안인 「타타르-바시키르 소비에트 공화국」에 관한 결정을 내렸고, 술탄-갈리예프와 물라누르 바히토프는 민족 단체들에 맞서 싸웠다. 3월 24일 이오시프 스탈린과 바히토프가 서명한 법령으로 하르비 슈로가 해산되었다. 3월 27일 붉은 군대 병사들이 카잔의 타타르 구역을 에워쌌고, 시 소비에트는 불라크 너머 혁명 참모부에 무기와 보급품을 모두 넘기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시한이 지나자 총성이 울렸지만 큰 전투 없이 「불라크 너머 군대」는 항복했다. 3월 28일 인민위원회의와 참모부 구성원들이 체포되었다. 진압에는 카잔 적위대와, 바히토프의 요청으로 모스크바에서 온 수병 부대, 그리고 바이소프 종파의 무장대가 가담했다. 4월 민족 협의회가 재산을 몰수당하고 해산되었고, 5월 1일 밀리 이다레와 그 산하 기관이 모두 금지되었다. 대의원 일부는 「소(小)메질리스」를 꾸려 볼셰비키가 없는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 갔고, 7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봉기와 함께 민족 행정이 일부 되살아났지만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1918년 말 하르비 슈로의 남은 병력은 콜차크군의 제16타타르 연대로 들어갔다. 막수디는 핀란드로 망명해 탐페레에 머물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이델-우랄 주민의 정치적 권리를 호소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7 9 6 10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에서 무슬림 인민위원부로: 바히토프와 술탄-갈리예프
이델-우랄을 무너뜨린 쪽에도 타타르 혁명가들이 있었다. 1917년 2~4월 여러 도시에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가 생겼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카잔의 위원회였다. 멘셰비키·볼셰비키·사회혁명당·아나키스트가 함께 있었지만 모두 러시아인과 무슬림(이 지역에서는 타타르와 바시키르)을 구별했고, 사회주의를 이슬람 공동체 「움마」와 결부해 이해하며 토지개혁을 내걸었다. 성직자와 지주에 대해서는 강하게 적대했다. 위원회를 이끈 물라누르 바히토프는 1885년생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과 정신신경학 연구소 법학부에서 공부하며 미하일 프룬제 등을 만났고 무슬림 학생 서클을 조직했다. 그는 위원회 신문 「크즐 바이라크」(붉은 깃발)로 반전·혁명 선전을 펴고, 10월 카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에도 뽑혔다. 우파 현 출신의 타타르 교사 미르사이드 술탄-갈리예프는 1917년 7월 카잔에서 바히토프와 만나 위원회를 함께 꾸렸고 11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그는 12월 「배신자」라는 비난에 답해 「나는 아첨 때문이 아니라 내 민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들에게 간다. 그들만이 전쟁을 멈췄고, 민족의 운명을 민족 자신의 손에 넘기려 한다」고 썼다. 10월 혁명 뒤 위원회는 적위대를 조직해 하르비 슈로와 맞섰다. 소비에트 역사가들은 훗날 이 위원회를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조직이 아닌 소부르주아 조직이라고 평가했다. 11 12 9 4 13
소브나르콤은 1917년 12월 초(구력 11월 20일) 「러시아와 동방의 모든 무슬림 근로자에게」라는 호소문을 냈다. 그 열흘 전 신문에서 「볼셰비즘은 사회적 고립으로 자연사해야 한다」고 썼던 전러시아 무슬림 협의회는 이 호소문 뒤 「어떤 유럽 정부도 무슬림에게 이런 언어로 말한 적이 없다」며 조건부 지지로 돌아섰다. 찰리코프는 민족인민위원 스탈린을 만나 무슬림이 스스로 삶을 꾸릴 권리를 보장하면 충성하겠다고 했고, 스탈린은 주요 무슬림 민족 대표가 들어가는 무슬림 업무 인민위원부를 제안했다. 그러나 1918년 1월 17일 민족인민위원부 산하에 「내부 러시아 무슬림 업무 위원부」(무스콤)가 세워졌을 때, 그 수장은 찰리코프가 아니라 레닌의 권유를 받은 바히토프였다. 술탄-갈리예프는 러시아 공산당 대표로 참여했고 오스만 출신 공산주의자 무스타파 수피가 그의 비서였다. 무스콤에는 노동·농업·공업·교육·출판·재정·사법·군사·문화를 맡는 부서가 있었고, 1918년 6월에는 술탄-갈리예프를 의장으로 중앙 무슬림 군사위원회가 생겼다. 반면 전러시아 무슬림 협의회는 스탈린의 제안을 둘러싸고 갈라졌다. 밀레트 메질리스가 볼가 대표들을 불러들이자 협의회는 사실상 무너졌고, 1918년 5월 스탈린과 바히토프가 서명한 협의회 폐지 결정이 공포되어 그 재산은 무스콤으로 넘어갔다. 5 14 4 15
바히토프가 서명한 1918년 3월의 「타타르-바시키르 소비에트 공화국 규정」은 이델-우랄과 거의 같은 국경을 가진 소비에트 공화국 구상이었고, 5월에는 술탄-갈리예프가 창립 대회를 준비했다. 그러나 내전이 계획을 덮었다. 7월 볼가 지역 비상 식량 위원으로 임명된 바히토프는 8월 백군에 맞설 병력을 모으려 카잔에 갔다가, 코무치 인민군이 카잔을 점령한 뒤 붙잡혀 8월 19일 처형되었다. 카잔 방어 조직에 참여한 술탄-갈리예프는 9월 카잔 탈환 뒤 반대파 숙청에 가담했고, 1919년 4월 콜차크의 봄 공세 때는 동부전선으로 급파되어 말미시의 타타르 제21사단 사기를 추슬렀다. 영어 출처는 그가 아흐메트제키 발리디의 바시키르를 볼셰비키 편으로 끌어들여 콜차크군의 군사력을 약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적는다. 1919년 7월 10일 그는 바시키르 공화국에 반대하는 선동과 바시키르 인민에 대한 탄압을 금지하는 명령 제10호에 서명했다. 그해 말 제2차 전러시아 동방 민족 공산주의 조직 대회에서 그는 타타르-바시키르 공화국의 부활을 밀어붙였지만 결의는 근소한 차로만 통과되었고, 바시키르 공산주의자들은 전원 반대했다. 1919년 12월 13일 정치국은 공화국을 만들지 말고 1918년 3월의 법령을 폐지하며 앞으로 그 선동도 하지 말라고 결정했다. 16 9 4 13
바시키르 자치와 바시키르 군: 두토프·콜차크와의 동맹에서 전향까지
바시키르 운동은 이델-우랄 구상에 맞서 따로 자기 영토를 요구했다. 1917년 5월 무슬림 대회에 간 바시키르 대표단은 모스크바에서 바시키르 지역국을 꾸렸고, 지역국은 6월 각 읍에 협의회(슈로)를 조직했다. 7월 오렌부르크, 8월 우파에서 열린 제1·2차 전바시키르 쿠룰타이는 「연방 러시아 안에서 민족·영토 원리에 선 민주공화국」을 목표로 정했고, 오렌부르크에 바시키르 중앙 슈로가 섰다. 그 중심인물 아흐메트제키 발리디는 1890년 스테를리타마크 군 쿠쟈노보에서 태어나 카잔의 카시미야 마드라사에서 투르크·타타르 역사를 가르친 역사가로, 1915~1917년 두마의 무슬림 의원 지원국에서 일했고 1917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가 우파 현에서 제헌의회 의원으로 뽑혔다. 러시아어 출처는 그가 1917년 이전에는 타타르 지식인으로 활동하다 바시키르 공화국 지도자로 올라서며 점점 더 바시키르 인사로 나섰다는 연구도 소개한다. 1917년 11월 28일(구력 15일) 중앙 슈로는 샤리프 마나토프 의장, 발리디 부의장 등의 서명으로 「오렌부르크·우파·사마라·페름 현의 바시키르 영토를 러시아 공화국의 자치 부분으로 선포한다」고 결의했다. 12월 21일부터 1918년 1월 2일까지 오렌부르크의 카라반사라이에서 열린 제3차(제헌) 쿠룰타이는 이를 만장일치로 승인하고, 인구 10만 명당 1명씩 22명으로 된 예비 의회 「케세 쿠룰타이」와 바시키르 정부를 세웠으며, 발리디가 이끄는 독자적인 바시키르 군을 창설하기로 했다. 이 「소(小)바시키리야」는 면적 7만 9,560㎢, 인구 125만 명에 9개 칸톤으로 나뉘었고, 바시키르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정했다. 17 8 18 19
1918년 1월 마나토프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레닌을 만났다. 레닌은 「우리는 바시키르 운동을 우리를 겨냥한 반혁명으로 보지 않는다. 동방 민족들의 민족운동은 매우 자연스럽고 매우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소비에트 정부는 자치를 승인하지 않았다. 1월 말 붉은 군대가 오렌부르크를 점령한 뒤에도 중앙 슈로는 중립을 내세우며 그곳에 남았지만, 2월 15~16일 밤(구력 3~4일) 오렌부르크 무슬림 군사혁명위원회가 바시키르 정부 위원 7명을 체포했다. 발리디도 그 가운데 있었다. 러시아어 출처는 이 체포가 아타만 알렉산드르 두토프와 공모했다는 중상에 근거해 사후에야 승인되었다고 쓴다. 2월 26일 오렌부르크 농민대회에 온 바시키르 200명은 영토 자치를 해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와 손잡겠다고 결의했지만 긴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3월 5일 오렌부르크 현 혁명위원회는 모든 바시키르 읍에 「사흘 안에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체포된 지역 협의회 전원을 총살하고, 의심되는 마을은 대포와 기관총으로 쓸어버리겠다」는 전보를 보냈고, 바시키르 정부 위원 2명이 총살되었다. 4월 3~4일 밤 아미르 카라미셰프의 바시키르 부대가 카자크와 함께 오렌부르크 감옥을 습격해 정부 위원들을 풀어냈고, 7~8일 우파의 비밀 회의는 볼셰비키에 맞선 유격전을 결정했다. 8 17 20 18
5월 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봉기로 바시키르 자치 기관은 첼랴빈스크에서 다시 일어섰다. 6월 1일 정부는 무장 투쟁을 호소하며 동원령을 내렸고, 9월에는 5개 연대로 된 바시키르 독립군단이 생겼다. 바시키르 군은 다섯 달 만에 1만 명을 넘었고, 시베리아 임시정부와의 협정에 따라 작전상 백군 통합 지휘를 받았다. 두토프는 「우리 카자크도 스스로 다스릴 것이니 당신들도 그럴 권리가 있다」며 자치를 지지했다. 5월 쿠스타나이에서는 알라시 오르다와 공동 투쟁을 논의했고, 8~9월 사마라 회의에서는 바시키리야·카자흐·중앙아시아를 묶는 「남동부 무슬림 지역 연방」 구상이 나왔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코무치는 9월 조약으로 바시키르의 민족·영토 자치를 인정했고, 바시키르 대표단은 9월 8~23일 우파 국가회의에서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창설에 참여했다. 상황을 뒤집은 것은 1918년 11월 옴스크 쿠데타였다.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는 민족·지역 자치를 인정하지 않고 바시키르 정부와 군을 없애겠다고 했으며, 바시키르 군사위원회와 군단 참모부를 해체하고 바시키르 연대들의 지휘권을 두토프에게 넘겼다. 11월 말 크라스나야 메체티에서 바시키르 정부, 무스타파 쇼카이 등 알라시 오르다 대표, 빅토르 체르노프 등 코무치 인사, 사회주의 성향 카자크 지휘관들이 반콜차크 전선을 꾸리기로 했고, 12월 초 오렌부르크에서 두토프를 체포하려는 음모가 세워졌다. 그러나 두토프가 눈치채고 충성스러운 카자크 부대로 빠져나가면서 음모는 실패했다. 8 17 20 19
갈 곳이 없어진 바시키르 정부는 붉은 군대와 협상에 들어갔다. 1919년 2월 16일 정부는 「협상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2월 18일 10시부터 소비에트 권력 편으로 넘어간다」고 결정하고, 「혁명과 자유와 민족자결의 적인 콜차크, 두토프와 모든 세계 제국주의자」에게 총부리를 돌리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비밀 명령 제70호가 바시키르 군의 전향을 지시했다. 2월 20~21일 테먀소보 마을에서 열린 제1차 전바시키르 군인 대회에는 각 연대에서 뽑힌 92명이 모였다. 대회는 전향을 승인하고 임시 바시키르 군사혁명위원회(바시레프콤)를 세웠으며, 발리디는 군사 인민위원 겸 부의장이 되었다. 한 지휘관은 대회에서 「바시키르는 여러 번 자유를 위해 싸웠고, 러시아 역사가들은 그때마다 그것을 반란이라 불렀다. 이번 자결의 시도는 88번째 반란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향은 매끄럽지 않았다. 붉은 군대 제1군 지휘부가 전향 조건을 어기고 탄압하자 일부 대대와 기병 연대가 다시 콜차크 쪽으로 넘어갔고, 개인 안전을 약속받은 뒤 일부가 돌아왔다. 뒤에 바시키르 군 출신 2천 명은 극동의 백군 망명 집단에 합류했다. 3월 콜차크군의 봄 공세로 우파가 백군에 넘어가자 바시키르 공화국은 전선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8 20 19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들: 바시키르의 1920년 위기와 타타르 자치 공화국
1919년 3월 20일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자치 바시키리야에 관한 중앙 소비에트 권력과 바시키르 정부의 협정」이 서명되었다. 소비에트 쪽에서는 블라디미르 레닌,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대행 미하일 블라디미르스키, 민족인민위원 스탈린이, 바시키르 쪽에서는 정부 의장 무하메트한(므스티슬라프) 쿨라예프 등 세 사람이 서명했다. 16개 조항의 협정은 「자치 바시키르 소비에트 공화국은 소바시키리야의 경계 안에서 형성되며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연방 구성 부분이 된다」고 정했다. 바시키르 공화국은 러시아 공화국의 첫 민족 자치 공화국이었고, 러시아어 출처는 조약으로 세워진 유일한 자치 공화국이라고 강조한다. 콜차크군이 다가오자 바시레프콤은 4~8월 사란스크로 피란했다가 8월 20일 스테를리타마크로 돌아왔다. 10월에는 백군의 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바시키르를 돕는 「바시키르 구호」 결정이 나왔다. 그러나 바시레프콤은 자치와 연방 원칙의 실행을 두고 바시키르 지역 당위원회, 바시키르 체카, 군사위원부, 식량위원부의 다수와 사사건건 부딪쳤다. 1920년 1월 15~16일 밤 바시레프콤은 바시키르 체카 간부들을 체포했고, 이 「1월 충돌」 뒤인 2월 발리디가 바시레프콤 의장이 되었다. 3월 12일 바시레프콤은 중앙이 협정을 어겼다며 자치에 반대하는 모스크바 파견원들의 소환과 당 기관의 행정 불간섭을 요구했다. 그해 겨울 모스크바에 머물던 발리디는 타타르-바시키르 공화국 부활에 반대하고 키르기스(카자흐)-바시키르 공화국안을 냈다. 21 22 19 23
모스크바의 답은 1920년 5월 19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와 소브나르콤의 「자치 소비에트 바시키르 공화국의 국가 구조에 관한」 결정이었다. 공화국 기관은 러시아 공화국 헌법에 따라 지역 소비에트,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 인민위원회의로 짜이게 되었고, 러시아어 출처는 이로써 공화국이 협정이 보장한 정치·경제적 주권을 사실상 잃었다고 평가한다. 6월 16일 발리디를 포함한 제1기 바시레프콤은 전원 사퇴했다. 발리디는 바쿠를 거쳐 투르키스탄으로 떠났고, 9월에는 레닌·스탈린·트로츠키·알렉세이 리코프에게 볼셰비키의 강대국주의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후 그는 바스마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 이야기는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전쟁에서 다룬다. 이 결정과 바시레프콤의 사퇴는 부르쟌-탕가우롭스키 등 세 칸톤의 반볼셰비키 봉기를 부른 원인 가운데 하나였고, 1921년 봄 새로운 봉기 물결이 일었다. 7월 스테를리타마크의 제1차 소비에트 대회가 바시레프콤 대신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를 세웠다. 이어진 대기근은 공화국 인구의 22%인 65만 명을 앗아 갔다. 1922년 6월 소바시키리야는 우파 현과 합쳐 「대(大)바시키리야」가 되었는데, 발리디는 회고록에서 「우파 현을 바시코르토스탄에 붙였다지만 실제로는 바시코르토스탄을 우파 현에 붙인 것」이라고 썼다. 21 22 19 18 24
타타르-바시키르 공화국 구상이 1919년 12월 폐기되자 문제는 따로 된 타타르 자치 공화국으로 넘어갔다. 1920년 3월 22일 레닌은 크렘린에서 부르한 만수로프 등 타타르 공산주의자들을 만나 타타르 공화국 수립을 논의했다. 5월 27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와 소브나르콤의 결정으로 「자치 타타르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6월 25일 카잔 현 집행위원회가 모든 권한을 임시 혁명위원회에 넘기면서 공화국이 실제로 출범했다. 혁명위원회는 9월까지 국경을 확정하고, 9월 26~27일 제헌 소비에트 대회가 타타르 중앙집행위원회와 첫 인민위원회의를 세웠다. 멘젤린스크 군도 이때 타타르 공화국에 들어갔다. 수도는 카잔이었다. 러시아 공화국 헌법은 「자치 지역 연합」이 연방 원리로 공화국에 들어올 수 있다고 정했는데, 1918년 말 볼가 독일인 노동 코뮌, 1919년 3월 바시키르, 1920년 5월 타타르 공화국, 6월 카렐리야 노동 코뮌과 추바시 자치주가 그 구체화였다. 신생 타타르 공화국도 곧 1921년 가뭄과 대기근을 맞아 1921~1922년 다른 지역에서 종자 800만 푸드와 식량 600만 푸드를 받아야 했다. 16 25 26 21

쿠룰타이와 크림 인민공화국, 노만 첼레비지한의 죽음
크림반도에서 크림 타타르는 인구의 소수였다. 영어 출처에 따르면 당시 주민의 42%가 러시아인, 11%가 우크라이나인이었다. 그러나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의 신문 「테르지만」이 키운 새 엘리트 덕에 크림 타타르는 한동안 반도의 가장 강한 정치·문화 세력이었다. 1917년 3월 25일 심페로폴의 전크림 무슬림 대회는 임시 크림 무슬림 집행위원회를 세우고 노만 첼레비지한을 의장으로 뽑았다. 그는 내무장관의 임명이 아닌 대의원 투표로 뽑힌 첫 크림 무프티이기도 했다. 1885년 장코이 근처 마을에서 태어난 첼레비지한은 이스탄불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1909년 자페르 세이다흐메트 등과 비밀 조직 「바탄」(조국)을 만들었다. 1889년생인 세이다흐메트는 1911년 이스탄불에서 『20세기의 억압받는 크림 타타르 민족』을 펴낸 뒤 러시아 정부의 체포 요구를 피해 파리 소르본에서 공부했고, 전쟁 중에는 사관 학교를 거쳐 하급 장교로 복무했다. 집행위원회는 교육 개혁과 종교·토지 행정을 맡고 신문 「밀레트」(민족)를 냈으며, 크림 타타르로 채워진 부대를 만들려 했다. 6월 23일 첼레비지한은 타타르 병사들 사이에서 반정부 선동을 했다는 혐의로 세바스토폴 요새 방첩대에 체포되었지만, 5천 명의 서명이 담긴 항의 끝에 곧 풀려났다. 7월에 생긴 타타르 당(1919년부터 「밀리 피르카」)은 11월 강령에서 민족·문화 자치를 내걸었지만, 신문 편집장 아산 사브리 아이바조프는 유럽 열강의 보호 아래 독립 공화국을 세우려는 비공식 강령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당은 곧 온건파와 볼셰비키에 가까운 좌파로 갈라졌다. 27 28 29 30 31 32
1917년 10월 크림 타타르 단체 대표 회의는 반도의 앞날을 쿠룰타이가 결정해야 한다고 정했다. 11월 30일(구력 17일) 대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12월 9일(구력 11월 26일) 바흐치사라이의 칸 궁전에서 쿠룰타이가 열렸다. 얄타·심페로폴·페오도시야·예우파토리야·페레코프의 다섯 군에서 뽑힌 76명 가운데 4명이 여성이었고, 의장은 아이바조프였다. 쿠룰타이는 40 대 20으로 다섯 명의 국장으로 된 「디렉토리」(국민 정부)를 세웠다. 첼레비지한이 의장 겸 법무, 세이다흐메트가 외무·군사를 맡았다. 12월 26일(구력 13일) 쿠룰타이는 「크림 타타르 기본법」을 승인하고 크림 인민(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첼레비지한은 개막을 앞둔 연설에서 「크림에는 장미, 백합, 튤립이 자라고 저마다 고유한 아름다움과 향기가 있다. 그 꽃이 크림에 사는 타타르, 러시아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독일인이다. 이 꽃들로 아름다운 꽃다발을 만들어 크림에 진정한 문명의 스위스를 세우는 것이 쿠룰타이의 목표」라고 말했다. 크림 타타르는 지도자가 아니라 발의자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디렉토리는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와 서로를 승인했다. 그러나 정부의 무력은 사실상 크림 타타르로 채운 기병(용기병) 연대 하나와 장교 중대 몇 개, 우크라이나·그리스·유대인·아르메니아·폴란드 부대 정도였다. 당시 크림에 있던 표트르 브란겔은 세이다흐메트에게서 군 지휘를 제안받았으나 「전형적인 케렌스키주의」라며 거절했다고 회고했다. 29 27 33 30 34 28
크림 인민공화국은 한 달 남짓 버텼다. 12월 중순 볼셰비키는 흑해 함대 사령부가 있는 세바스토폴을 장악하고 시 의회를 해산했다. 크림 정부는 12월 19일 통합 크림 사령부를 세웠고, 1918년 1월 초 지사 관저 「인민의 집」을 차지했다가 반발에 부딪혀 다음 날 물러났다. 첼레비지한은 항의의 뜻으로 의장직을 내놓았지만, 1월 10일 쿠룰타이에 볼셰비키와 협상할 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등 충돌을 막으려 애썼다. 1월 24일(구력 11일) 디렉토리는 반도 전체를 장악하려고 세바스토폴로 군을 보냈으나 이틀간의 전투에서 패했고, 1월 27일 세바스토폴 적위대와 흑해 함대 수병들의 지원을 받은 세력이 심페로폴에서 타타르 부대를 몰아냈다. 세이다흐메트는 키이우로 탈출했고, 첼레비지한은 체포되어 세바스토폴 감옥에 갇혔다. 1918년 2월 23일 그는 재판 없이 혁명 수병들에게 살해되었고 주검은 흑해에 던져졌다. 그가 쓴 시 「안트 엣켄멘」(나는 맹세했다)은 크림 타타르의 국가가 되었다. 볼셰비키는 1월 말까지 반도 전체를 차지하고 쿠룰타이와 민족대표협의회를 해산했다. 이어진 첫 적색 테러의 물결은 주로 귀족과 장교를 덮쳤는데, 러시아어 출처는 예우파토리야에서 처형을 지휘한 네미치 일가를 특히 언급한다. 27 33 35 30 31


교대하는 정권들: 타브리다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백군의 크림까지
1918년 2월 10~12일 크림 혁명위원회 회의(대의원 44명 가운데 볼셰비키 27명)는 스스로를 비상 소비에트 대회로 선언하고 민족대표협의회와 쿠룰타이의 해산을 확인했다. 3월 19일과 21일 심페로폴에서 타브리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안톤 슬루츠키가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크림 타타르 혁명가 이스마일 피르데브스가 3월 22일부터 외무·민족 인민위원이었다. 대회는 무력을 써서라도 곡물을 징발해 공업 지대와 군대에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브레스트 강화 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대가 독일군의 도움을 받아 반도로 밀고 들어왔다. 밀리 피르카는 알루시타에서 봉기했고, 4월 24일 비유크-람바트 마을 근처에서 크림 타타르 부대가 슬루츠키를 비롯한 타브리다 정부 구성원 대부분을 붙잡아 총살했다. 공화국은 4월 30일 폐지되었고, 5월 1일까지 로베르트 코슈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군 보병 3개 사단과 기병 여단이 크림 전체를 점령했다. 독일의 동방 점령 전체는 브레스트 강화에서, 우크라이나와 크림의 관계는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에서 다룬다. 36 32 37
1918년 6월 25일 독일의 후원 아래 크림 지역 정부가 섰다. 총리 겸 내무·군사 장관은 리투아니아 타타르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중장 마치에이(술레이만) 술키에비치였다. 그는 1917년 10월 러시아 임시정부가 만들려던 제1무슬림 군단을 맡았지만, 군단은 끝내 크림으로 오지 못하고 루마니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군에 무장 해제되었다. 세이다흐메트가 외무장관으로 돌아왔고, 독일인 이주민이 농업장관, 리투아니아 타타르 법률가가 법무장관이 되었으며, 아이바조프는 오스만 제국 주재 대사로 갔다. 정부 선언은 반도의 독자성과 크림 시민권을 선포하고 러시아어·크림 타타르어·독일어를 국가 언어로 정했으며 사유재산을 되돌렸다. 그러나 정부의 모든 활동은 점령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았다. 7월 베를린에 간 대표단은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 승인과 차관을 구했으나 얻지 못했고, 독일·튀르키예 보호 아래 크림 칸국을 세우자는 크림 타타르 디렉토리의 비밀 각서도 지지받지 못했다. 파울로 스코로파츠키의 우크라이나 헤트만 정부와는 처음부터 틀어졌다. 술키에비치는 자신을 「현 장관」이라 부른 우크라이나어 전보에 반발했고, 키이우는 크림을 봉쇄했다. 9~10월 키이우 협상에서 우크라이나는 넓은 자치를 조건으로 한 편입을, 크림은 연방 동맹을 제안했지만 합의는 없었다. 반도로 피란 온 러시아 관리·장교들은 이 친독일·분리주의 정부를 외면했고, 11월 철수를 앞둔 술키에비치가 도움을 청하자 안톤 데니킨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38 39 37 40 31
1918년 11월 15일 술키에비치는 크림 젬스트보가 뽑은 입헌민주당 출신 카라임인 정치가 솔로몬 크림의 제2차 크림 지역 정부에 권력을 넘겼다. 세이다흐메트는 이스탄불로 떠났고, 술키에비치는 아제르바이잔군 참모총장이 되었다가 1920년 7월 볼셰비키에게 총살되었다. 11월 말 프랑스·그리스군 중심의 연합군이 상륙했으나 오데사를 잃은 뒤 1919년 4월 철수했고, 4월 붉은 군대가 심페로폴에 들어왔다. 레닌은 크림 볼셰비키 유리 가벤에게 「이전의 잘못을 피하라. 민족 문제는 가장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5월 6일 선포된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레닌의 동생 드미트리 울리야노프가 이끌었고, 파벨 디벤코가 군사·해군 인민위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선전 인민위원을 맡았다. 공화국은 민족이 아닌 영토 단위임을 내세우면서도 인민위원회의에 크림 타타르 5명을 넣었다. 밀리 피르카 명의의 글은 당이 5~6달 전부터 타타르 근로 대중이 볼셰비키를 맞도록 준비해 왔다고 썼다. 그러나 6월 18일 야코프 슬라시초프의 백군이 콕테벨에 상륙했고, 정부는 23~26일 반도를 떠났다. 백군은 크림 타타르 민족운동을 적대했다. 8월 남러시아군 지휘관 니콜라이 실링은 크림 타타르 디렉토리를 해산하고 제정 시대의 타브리다 무슬림 종무청을 되살렸으며, 디렉토리 지도자들을 분리주의와 튀르키예와의 동맹, 볼셰비키 협력 혐의로 체포하고 「밀레트」를 폐간했다. 당은 지하로 들어갔고 주민들 사이에서는 볼셰비키에 대한 공감이 커졌다. 백군은 1920년 11월까지 반도를 지켰다. 브란겔의 마지막 방어와 페레코프 돌파는 내전과 열강의 개입에서 다룬다. 38 39 41 42 32 40

1920년 11월 이후의 크림: 적색 테러와 크림 자치 공화국
1920년 11월 11일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는 브란겔에게 무전으로, 무기를 내려놓는 모든 이에게 내전 중의 행위를 완전히 용서하고 원하는 사람은 해외로 나가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튿날 레닌은 「조건의 지나친 관대함에 크게 놀랐다. 적이 거부하면 다시는 제안하지 말고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고 전보를 쳤다. 브란겔군이 배로 떠난 뒤 붉은 군대는 11월 13일 심페로폴에 들어갔고 17일까지 모든 도시를 장악했다. 포로는 소비에트 백과사전에 따르면 5만 2,100명, 크림 역사가 브로셰반에 따르면 5만 4,696명이었다. 11월 16일 펠릭스 제르진스키는 남부전선 특별부장에게 「크림에서 백군 한 명도 본토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암호 전보를 보냈고, 이튿날 혁명위원회가 테러를 시작했다. 반도 출입 금지는 전염병 방지를 명분으로 1921년 가을까지 이어졌다. 모스크바는 게오르기 퍄타코프, 로잘리야 제믈랴치카, 쿤 벨러를 보냈다. 쿤 벨러는 「크림은 병이다. 반혁명가는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장교와 관리는 등록 명령에 따라 스스로 신고했다가 총살되거나 교수형을 당하고 바다에 수장되었으며, 병원의 부상병까지 죽임을 당했다. 1920년 12월 14일 크림 볼셰비키 유리 가벤은 당 중앙위원에게 「쿤 벨러는 여기서 대량 테러의 천재가 되었다. 나도 대량 테러에 찬성하지만, 우리 지하 활동가를 구해 준 사람들까지 죽고 있다」고 써 보냈다. 43
희생자 수는 지금도 크게 엇갈린다. 역사가 랏콥스키는 약 1만 2천 명, 크림 역사가 페트로프는 「증명할 수 있는 수」로 최소 2만 명을 제시했고, 최소 추정은 1만 5천 명이다. 1921년 봄 크림을 돌아본 술탄-갈리예프는 현지 일꾼들의 말을 빌려 총살된 브란겔군 장교가 2만~2만 5천 명, 심페로폴에서만 1만 2천 명에 이르며 소문으로는 7만 명이라고 보고했다. 망명자들 사이에서 「소비에트 공식 자료」로 돌던 5만 2천~5만 6천 명이라는 수치를 역사가 가닌은 크게 부풀려졌다고 본다. 작가 이반 시멜료프와 역사가 세르게이 멜구노프는 12만 명, 다른 동시대인은 15만 명까지 말했지만, 크림 역사가 자루빈은 2008년 12만 명을 비현실적으로 큰 수라고 평가했다. 백군 통치기의 크림에서는 1,428명이 체포되어 281명이 총살되었다는 문서 연구가 있다. 책임을 두고도 견해가 갈린다. 현대 러시아 역사학의 다수는 테러가 볼셰비키 중앙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며, 자루빈은 명령 권한을 가진 사람이 미하일 프룬제였고 그가 남부전선 특별부장 예핌 예브도키모프의 포상을 승인했다고 지적한다. 반면 제르진스키는 1923년 작가 베레사예프에게 「예외적 권한을 주어 보냈는데 그들이 그렇게 쓸 줄은 몰랐다」며 현지 집행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쿤 벨러와 제믈랴치카는 1921년 1월 소환되었지만 후임자들도 완화된 형태로 테러를 이어 갔다. 겨울 동안 8천~1만 명이 산으로 들어가 유격대를 이루었다. 43 13
크림 타타르 민족운동은 새 정권과 타협을 시도했다. 1920년 11월 25일 밀리 피르카 중앙위원회는 크림 혁명위원회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억압받는 무슬림의 첫째가는 자연스러운 벗이자 동맹」이라 부르며 당의 합법화와 종교·교육 업무 및 와크프 관리, 「밀레트」 발행을 요청했지만, 지역 당위원회는 11월 30일 이를 거부했다. 12월에는 곡물 징발이 도입되었다. 1918년 볼셰비키에 들어가 1919~1920년 캅카스 전선에서 체카 특별부 요원으로 일했던 크림 타타르 공산주의자 벨리 이브라이모프와 그 지지자들은 크림을 기근 지역으로 인정하고 징발을 멈추라고 거듭 요구했지만, 종자까지 포함한 식량 반출은 오히려 늘었다. 1921년 3월 모스크바는 제10차 당대회 기간에 술탄-갈리예프를 다른 무슬림 지도자들과 떼어 놓으려고 그를 크림에 파견했다. 한 달 반 동안 머문 그는 보고서 「크림의 상황에 관하여」에서 「첫째이자 매우 큰 잘못은 적색 테러를 지나치게 넓게 적용한 것」이라 쓰고, 노동자와 소비에트에 진심으로 봉사하려던 사람들까지 수십 명씩 발가벗겨 총살되었으며 특별부·체카·해군 특별부가 권한 구분 없이 저마다 움직인다고 고발했다. 그는 타타르 주민이 사는 남부 지역이 「말 그대로 굶주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모스크바에서 「폭탄」 같은 효과를 냈고, 5월 당 중앙위원회와 소브나르콤의 위원회가 크림으로 와 그의 결론에 동의했다. 위원회 위원 불루셰프는 스탈린에게 「크림의 권력은 모두 주민과 아무 관계없는 임명직이며, 농민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차르 체제보다 더한 착취자로 본다」고 써 보냈다. 32 44 45 43 13
1921년 5월 말부터 8월 말까지 크림에서 일한 전권 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10월 18일 러시아 공화국 안에 「자치 크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세워졌다. 경계는 장코이·예우파토리야·케르치·세바스토폴·심페로폴·페오도시야·얄타 일곱 구로 이루어진 크림반도였고, 11월 10일 첫 헌법이 채택되어 크림 타타르어와 러시아어가 국가 언어가 되었다. 민족인민위원부 기관지는 10월 25일, 크림을 단순한 주로 두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오랫동안 물질적·문화적으로 몰락해 온 크림 타타르 농촌의 신뢰를 얻으려고 원주민에게 넓은 권리를 주기로 했다고 썼다. 소비에트 정권은 크림 타타르와 카라임인을 원주민으로 인정했다. 벨리 이브라이모프는 1921년 11월 노농 감찰 인민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기근 속에서 출발했다. 1921년 가을부터 1923년 봄까지 크림에서 약 10만 명, 1921년 인구의 15%가 굶어 죽었고, 그 가운데 크림 타타르가 약 7만 6천 명이었다. 이브라이모프 자신은 사망자 11만 명 가운데 7만 6천 명이 타타르라고 추산했고, 영어 출처는 크림 타타르 사망자만 10만 명이 넘었다고 쓴다. 기근과 볼가 지역의 상황은 1921~1922년 대기근에서 다룬다. 테러는 차츰 사그라들며 1921년 11월까지 이어졌다. 46 47 44 43 28
평가: 민족자치와 소비에트 연방주의, 그리고 그 뒤
1917년 볼가·우랄과 크림의 무슬림 운동이 그린 국가는 민족·영토 원리의 연방 민주공화국이었고, 흩어져 사는 민족에게는 문화 자치를 주는 방식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러시아 민족들의 권리 선언」과 무슬림 호소문으로 분리권과 민족 평등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이델-우랄의 민족 기관과 크림 쿠룰타이, 전러시아 무슬림 협의회를 해산하고 그 자리에 당이 이끄는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을 세웠다. 바시키르(1919년 3월)는 조약으로, 타타르(1920년 5월)와 크림(1921년 10월)은 법령으로 만들어졌다. 바시키르의 경우 조약에 따른 관계가 1920년 5월 법령으로 위로부터의 결정에 따른 관계로 바뀌었다. 미국 역사가 리처드 파이프스는 1950년 논문 제목에서 바시키르 공화국을 「소비에트 민족 정책의 첫 실험」이라 불렀고, 바시키르 역사가 쿨샤리포프는 1917~1919년의 바시쿠르디스탄을 바시키르 민족의 첫 독립국가로 본다. 크림 타타르 쪽은 크림 인민공화국을 이슬람 세계 최초의 민주공화국으로 기억한다. 소비에트 역사학은 이 민족운동들을 부르주아 민족주의로 규정했고, 자치 공화국이야말로 근로 대중의 자결이 실현된 형태라고 설명했다. 스탈린은 1936년 바시키르와 타타르 공화국을 연방 공화국으로 올리지 않는 이유를 「사방이 소비에트 공화국과 주로 둘러싸여 있어 연방에서 나갈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48 23 8 28 24 21
내전이 끝난 뒤 소비에트 정권은 민족 간부를 키우고 지역 언어를 행정과 교육에 쓰는 코레니자치야 정책을 폈다. 스탈린은 1920년 10월 10일 「프라우다」에서 변경 지역의 모든 기관을 현지의 관습과 언어를 아는 사람들로 채워야 한다고 썼고, 정책은 1921년 3월과 1923년 4월의 당대회에서 체계화되었다. 1930년대 크림 자치 공화국의 20개 구 가운데 6개가 크림 타타르 민족 구였고, 바시키르 공화국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가운데 바시키르의 비율은 1925~1935년 25.8%에서 35%로 올랐다. 그러나 이 시기의 주역들은 차례로 제거되었다. 술탄-갈리예프는 식민지 민중이 단결해 스스로의 공산주의 운동을 만들지 않으면 제국 중심부의 프롤레타리아도 혁명 뒤 식민지를 계속 착취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1923년 민족주의·범이슬람주의·범투르크주의 편향으로 고발되어 체포되고 당에서 쫓겨났으며, 1928년 다시 체포된 뒤 1940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총살되었다. 「술탄갈리예프주의」는 타타르·바시키르·크림 타타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는 꼬리표가 되었다. 벨리 이브라이모프는 1924년 크림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이 되어 크림 유대인 이주 계획에 반대하다가 1928년 살인 사건과 관련된 혐의로 총살되었고, 같은 해 밀리 피르카 사건으로 58명이 유죄 판결을 받아 11명이 총살되었다. 두 사람 모두 1990년 복권되었다. 바시키르에서도 「발리도프주의」와 「술탄갈리예프주의」가 숙청의 명분이 되었다. 49 46 24 4 13 44 32
이 사건의 의미는 진영마다 다르게 읽힌다. 소비에트 쪽에서 보면 볼셰비키는 레닌의 말처럼 동방 민족운동을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으로 인정했고, 러시아 제국 안의 무슬림에게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단 공화국과 모국어 학교, 민족 간부를 주었다. 1919년 바시키르 군의 전향은 콜차크의 후방을 흔들었고, 크림의 1919년 정부와 1921년 자치 공화국에는 크림 타타르 공산주의자들이 들어갔다. 민족운동 쪽에서 보면 이델-우랄, 바시쿠르디스탄, 크림 인민공화국은 모두 선거로 뽑힌 의회와 헌법을 가진 자치 기구였고, 볼셰비키는 이것들을 무력으로 해산한 뒤 위에서 만든 자치로 바꿔 놓았다. 백군 또한 「하나의 불가분한 러시아」를 내세워 바시키르 군과 크림 타타르 디렉토리를 해체했다는 점에서 민족운동의 동맹이 될 수 없었다. 이 시기의 지도자들 가운데 사드리 막수디, 자페르 세이다흐메트, 아흐메트제키 발리디는 튀르키예에서 학자나 정치가로 생을 마쳤고, 망명자들은 냉전기 미국의 「피억압 민족」 목록에 이델-우랄을 올리게 했다. 소비에트 쪽에 섰던 바히토프와 술탄-갈리예프, 이브라이모프의 길은 내전 중의 처형에서 1920~1930년대의 숙청까지 이어졌고, 1944년 크림 타타르 전체의 강제 이주로 크림 자치 공화국도 이듬해 주로 격하되었다. 17 6 10 34 18 47 28
결과
1919년 바시키르, 1920년 타타르, 1921년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안에 세워졌다. 발리디는 1920년 소비에트와 갈라서 중앙아시아의 바스마치로 갔고, 첼레비지한은 1918년 처형되었으며, 무슬림 민족공산주의는 1923년 술탄-갈리예프의 체포로 꺾였다.
연표와 지도
- 1917.05전러시아 무슬림 대회
모스크바에 900명 넘는 대의원이 모여 라술자데의 연방안을 446 대 271로 채택하고 전러시아 무슬림 협의회를 세웠다.
- 11917.11.28바시키르 자치 선포
오렌부르크의 바시키르 중앙 슈로가 오렌부르크·우파·사마라·페름 현의 바시키르 영토를 러시아 공화국의 자치 부분으로 선포했다.
- 21917.12.09크림 타타르 쿠룰타이 개막
바흐치사라이의 칸 궁전에서 76명의 대의원이 모여 노만 첼레비지한이 이끄는 디렉토리를 세웠다.
- 31917.12.26크림 인민공화국 선포
쿠룰타이가 「크림 타타르 기본법」을 승인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 1918.01.17무슬림 업무 위원부 설립
민족인민위원부 산하에 물라누르 바히토프가 이끄는 내부 러시아 무슬림 업무 위원부(무스콤)가 세워졌다.
- 41918.01.24–01.27크림 정부군 패배
세바스토폴로 진격한 크림 정부군이 패했고, 27일 적위대와 흑해 함대 수병들이 심페로폴에서 타타르 부대를 몰아냈다.
- 51918.02.23노만 첼레비지한 살해
세바스토폴 감옥에 갇혀 있던 크림 인민공화국 초대 의장이 재판 없이 수병들에게 살해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 61918.03.01이델-우랄 국가 선포
전날 체포되었다 풀려난 무슬림 군인 대회 지도부가 카잔의 불라크 강 건너 타타르 구역에서 자치 국가를 선포했다.
- 1918.03.22타타르-바시키르 소비에트 공화국 결정
민족인민위원부가 이델-우랄의 소비에트식 대안으로 타타르-바시키르 소비에트 공화국에 관한 결정을 내렸다.
- 71918.03.28「불라크 너머 공화국」 해산
붉은 군대에 포위된 불라크 너머 정부가 큰 전투 없이 항복하고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 81918.04.24타브리다 정부 처형과 독일 점령
알루시타 근처에서 크림 타타르 부대가 타브리다 소비에트 정부 구성원 대부분을 총살했고, 5월 1일까지 독일군이 크림을 점령했다.
- 91918.06.25술키에비치의 크림 지역 정부
독일의 후원 아래 마치에이 술키에비치가 총리가 되고 자페르 세이다흐메트가 외무장관을 맡았다.
- 101918.08.19물라누르 바히토프 처형
코무치 인민군이 카잔을 점령한 뒤 무슬림 업무 위원부 의장 바히토프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 1919.02.18바시키르 군의 전향
콜차크 정부가 바시키르 자치를 없애려 하자 바시키르 정부와 군이 소비에트 쪽으로 넘어갔고, 20~21일 테먀소보에서 바시레프콤이 세워졌다.
- 1919.03.20바시키르 자치 협정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정부와 바시키르 정부가 자치 바시키르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협정에 서명했다.
- 111919.05.06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드미트리 울리야노프가 이끄는 정부가 선언을 발표했다. 인민위원회의에는 크림 타타르 5명이 들어갔다.
- 121919.06.18슬라시초프의 콕테벨 상륙
남러시아군이 상륙해 크림 소비에트 정부가 23~26일 반도를 떠났다.
- 1919.12.13타타르-바시키르 공화국 폐기
정치국이 타타르-바시키르 공화국을 만들지 않기로 하고 1918년 3월의 법령을 폐지했다.
- 131920.05.19바시키르 국가 구조 결정
모스크바가 바시키르 공화국의 권한을 줄이는 결정을 내렸고, 6월 16일 발리디를 포함한 바시레프콤이 전원 사퇴했다.
- 141920.05.27타타르 자치 공화국 선포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와 소브나르콤의 결정으로 선포되었고 6월 25일 출범했다.
- 151920.11.13–11.17붉은 군대의 크림 점령과 테러 시작
붉은 군대가 심페로폴과 모든 도시를 장악했고, 제르진스키의 16일 전보 이튿날부터 적색 테러가 시작되었다. 희생자 추정은 1만 2천~12만 명으로 엇갈린다.
- 161921.03술탄-갈리예프의 크림 파견
한 달 반 동안 크림을 조사한 술탄-갈리예프가 적색 테러와 기근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썼다.
- 171921.10.18크림 자치 공화국 수립
러시아 공화국 안에 자치 크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세워졌고, 11월 헌법이 크림 타타르어와 러시아어를 국가 언어로 정했다.
관련 인물 24명
소비에트 세력13명
지도부4
카잔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를 이끌고 1918년 1월 무스콤 의장이 되었다. 하르비 슈로 해산 법령에 서명하고 불라크 너머 공화국 진압에 수병을 불러들였으며, 1918년 8월 카잔에서 처형되었다.
중앙 무슬림 군사위원회 의장미르사이드 술탄-갈리예프1892–1940무스콤과 민족인민위원부에서 무슬림 정책을 맡아 타타르-바시키르 공화국을 밀었고, 바시키르의 전향을 도왔다. 1921년 크림의 적색 테러와 기근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썼다.
민족인민위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무스콤 설립을 제안하고 하르비 슈로와 전러시아 무슬림 협의회를 해산하는 결정에 서명했으며, 1919년 3월 바시키르 자치 협정에 서명했다.
소브나르콤 의장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1918년 1월 바시키르 운동을 「자연스럽고 필요한」 민족운동이라 했고 1919년 바시키르 협정에 서명했다. 1920년 11월 브란겔군에 대한 사면 조건을 질책하며 무자비한 처단을 지시했다.
집행 · 지휘5
1920년 11월 크림을 점령한 남부전선을 지휘했다. 역사가 자루빈은 그가 테러 집행자들에 대한 명령 권한을 가졌고 특별부장의 포상을 승인했다고 지적한다.
전러시아 체카 의장펠릭스 제르진스키1877–19261920년 11월 16일 크림에서 백군이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암호 전보를 보냈고, 1923년에는 크림 테러를 현지 집행자의 잘못으로 돌렸다.
모스크바 파견 감독자게오르기 퍄타코프1890–19371920년 11월 모스크바에서 파견되어 크림 테러 전체를 감독했고, 그가 이끈 「퍄타코프 3인조」가 학살의 상징이 되었다.
모스크바 파견 테러 조직자쿤 벨러1886–19381920년 11월 크림에 파견되어 제믈랴치카와 함께 대량 처형을 조직했다. 1921년 1월 소환되었다.
모스크바 파견 테러 조직자로잘리야 제믈랴치카1876–19471920년 11월 크림에 파견되어 쿤 벨러와 함께 적색 테러의 조직과 집행에 주된 책임을 졌다. 1921년 1월 소환되었다.
참여4
밀리 피르카 좌파 출신으로 1918년 볼셰비키에 들어갔고, 1920~1921년 크림을 기근 지역으로 인정하고 징발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1921년 11월 크림 자치 공화국의 노농 감찰 인민위원이 되었다.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대행미하일 블라디미르스키1874–19511919년 3월 20일 바시키르 자치 협정에 소비에트 쪽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다.
크림 공화국 군사·해군 인민위원파벨 디벤코1889–19381919년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군사를 맡아 크림 붉은 군대를 이끌었다.
크림 공화국 선전 인민위원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1919년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에서 선전·선동을 맡았다.
무슬림 민족운동·자치 정부6명
지도부4
1917년 바시키르 자치 선포를 이끌고 바시키르 군을 만들었으며, 1919년 2월 군을 소비에트 쪽으로 넘겼다. 1920년 5월 자치를 줄이는 결정에 반발해 6월 사퇴하고 투르키스탄으로 떠났다.
민족 행정부(밀리 이다레) 의장사드리 막수디1878–19571917년 카잔에서 선포된 무슬림 민족·문화 자치 기관을 이끌고 1918년 1월 밀리 이다레 의장이 되었다. 이델-우랄이 무너지자 핀란드로 망명했다.
크림 인민공화국 디렉토리 의장노만 첼레비지한1885–1918크림 무슬림 집행위원회와 쿠룰타이를 이끌고 1917년 12월 디렉토리 의장이 되었다. 1918년 1월 체포되어 2월 23일 세바스토폴에서 재판 없이 살해되었다.
디렉토리 외무·군사 국장자페르 세이다흐메트1889–1960크림 인민공화국의 군사와 외교를 맡았고, 1918년 술키에비치 정부의 외무장관으로 독일에 크림 독립 승인을 구했다. 독일군 철수 뒤 이스탄불로 떠났다.
백군5명
참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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