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yades de Nantes · 1793.11–1794.2

낭트 익사형

Drownings at Nantes

1793년 11월부터 1794년 2월까지 낭트에서 국민공회 파견의원 장바티스트 카리에의 명령으로 선서 거부 사제, 방데 포로, 혐의자와 그 가족을 바닥에 구멍을 낸 배에 실어 루아르강에 가라앉힌 집단 처형. 카리에는 이를 「수직 유배」「국민의 욕조」라 불렀다. 희생자는 연구자에 따라 1,800명에서 4,800명 안팎으로 추정되며, 카리에는 1794년 12월 16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상세

1793년 가을 낭트는 방데 내전의 한복판에서 전염병과 굶주림의 위협 아래 1만 명이 넘는 포로를 먹여야 했고, 10월 8일 도착한 카리에는 군대와 도시의 보급을 맡는 한편 혁명위원회, 「마라 중대」라는 정치 경찰, 랑베르티의 무리를 동원했다. 첫 익사형은 11월 16일 밤 생도맹그 출신 병사가 섞여 「아메리카 경기병」으로 불린 마라 중대와 부관 기욤 랑베르티가 선서 거부 사제 90명을 개조한 바지선에 실어 강에 가라앉힌 것으로, 카리에는 다음 날 공회에 「새로운 종류의 사건」이 사제 수를 줄였다고 보고했다. 수영이 뛰어난 랑도 신부만 살아남았다. 두 번째는 앙제에서 온 사제 58명이었다. 12월 4~5일 카리에와 낭트 혁명위원회, 도·시 대표는 300명이 넘는 처형 명단을 짰고, 카리에는 바닥이 평평한 배에 실어 샹트네 앞 강 한가운데에서 가라앉히는 「수직 유배」를 제안했다. 12월 14~15일 밤에는 술에 취한 마라 중대가 부페 감옥에서 명단을 확인하지도 않고 죄수 129명을 둘씩 돌에 묶어 트랑트물 하류에서 익사시켰고, 12월 23일에는 남녀노소 약 800명이 두 척의 배에서 죽었다. 12월 29일부터 1794년 1월 18일까지는 항구에 묶여 있던 네덜란드 갈리오트선을 써서 한 번에 200~300명씩 죽였고, 1월 29~30일 밤 카리에가 직접 커피 창고 감옥을 비운 마지막 대규모 익사형은 약 400명이었다. 2월 27일 부르뇌프만에서 맹인 노인과 여자 12명, 소녀 12명, 아이 15명 등 41명이 죽은 것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익사형이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fr.wikipedia.org
  3. fr.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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