États généraux · 1302–1789

삼부회

Estates General

구체제 프랑스에서 성직자·귀족·평민 세 신분의 대표가 각각 따로 모여 국왕의 자문과 세금 동의를 맡았던 신분제 의회. 국왕이 소집하고 해산했으며, 영국 의회와 달리 과세나 입법을 승인할 권한이 없었다. 1614년 이후 175년간 열리지 않다가 1789년 재정 위기로 소집되었고, 표결 방식을 둘러싼 대립 끝에 제3신분이 국민의회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해산되었다.

상세

세 신분의 사회적 구성

삼부회를 이루는 세 신분은 구체제 프랑스 사회의 법적 편성 자체였다. 국왕은 어느 신분에도 속하지 않았고, 제1신분은 성직자, 제2신분은 귀족, 제3신분은 평민이었다. 1789년 기준으로 제1신분은 가톨릭 성직자 11만 5천~15만 명(인구의 1% 미만)으로 프랑스 토지의 5~10%를 소유하고 면세되었고, 제2신분은 인구의 약 1.5%(여성·아동 포함 약 40만 명, 다른 집계로는 12만~40만 명)로 토지의 약 25~30%를 차지하며 taille 등 대부분의 세금에서 면제되었다. 제3신분은 약 2,500만~2,800만 명으로 인구의 약 98%였고, 임금노동자·자유농민·농노를 포함한 이들이 세금 부담을 홀로 졌다.

기원과 잠복기

삼부회는 1302년 필리프 4세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분쟁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각 신분 대표를 소집한 데서 시작되었고, 1303년에 두 번째 회의가 열렸다. 이후 주된 소집 사유는 보조금(subsides) 승인이었다. 14세기에 그 권한은 상당하여 일반세 동의가 필요했으나, 14세기 후반부터 상비적 왕실 과세가 발달하고 15세기 후반 taille·aides·gabelle이 상설화되면서 실질 권한은 줄었다. 초기 형태에서는 제3신분 대표만 선거로 선출되었고 그것도 특권 도시(bonnes villes)에 한정되어 농촌 지역은 대표를 보내지 못했다.

1614년에서 1789년까지

삼부회는 16세기 후반 종교전쟁과 재정 궁핍 속에 다시 열렸고(1560년 오를레앙, 1561년 퐁투아즈, 1576년과 1588년 블루아), 1588년 회의는 앙리 3세의 쿠데타로 끝났다. 1614년 파리 회의는 세 신분의 불화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해산했고, 이후 1789년까지 175년간 소집되지 않았다.

하나의 회의인가 세 개의 회의인가

삼부회가 단일 의회인지 세 개의 방인지는 헌정적으로 확정된 적이 없었다. 1484년에는 공동으로 선거와 결의가 이루어졌으나 1560년 이후에는 각 신분이 따로 심의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고, 1789년 6월 23일 왕의 선언은 세 신분이 서로 다른 세 개의 방을 이룬다고까지 규정했다. 표결 단위 역시 개인별 표가 아니라 각 신분의 바이이아주·세네쇼세 단위로 한 표였고, 16세기에는 구베르느망 단위로 한 표였다. 실질적 작업은 대부분 분과에서 이루어졌고, 각 신분의 진정서를 모은 카이에 총괄 작성이 회기의 핵심 사업으로 여겨졌다.

1789년 소집

1789년 삼부회는 파산적 재정 위기를 풀기 위한 최후의 시도였다. 보편적 토지세를 포함한 구조 개혁 시도는 1787년 명사회와 파를르망에 의해 막혔고, 이 기구들은 새 세금을 승인할 권한은 삼부회에만 있다고 주장했다. 브리엔이 토지세와 인지세를 등록에 부치자 1787년 8월 6일 왕은 리 드 주스티스를 열어 강제 등록했고, 8월 7일 파리 파를르망은 그 등록을 불법이며 리 드 주스티스는 무효라고 선언하며 삼부회 소집을 요구했다. 1788년 5월 3일 파를르망의 선언 이후 루이 16세가 물러섰고, 1788년 8월 8일 전원회의가 취소되고 이듬해 5월 삼부회 소집이 예정되었다. 8월 24일 브리엔 사임 뒤 복귀한 네케르는 파를르망을 복원했다. 소집은 1789년 1월 24일자 왕의 칙령으로 이루어졌으며, 5월 4일 대행렬에 이어 5월 5일 루이 16세가 베르사유 메뉴 플레지르에서 개회하고 네케르가 재정 연설을 했다.

선거의 기본 단위는 옛 바이이아주·세네쇼세 사법구였고, 각 선거구마다 신분별 선거회가 따로 열렸다. 25세 이상 남성 납세자는 1차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고, 제3신분 최종 선거에서는 100가구당 2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모든 선거회는 카이에 드 돌레앙스를 작성했으며, 600만 명 이상이 선거 과정에 참여하고 2만 5천 건 이상의 카이에가 작성되었다.

표결 방식 논쟁과 붕괴

1614년 형식을 따르면 각 신분의 대표 수가 같고 신분별로 한 표씩이어서 상위 두 신분이 제3신분을 항상 누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두 배 대표'(제3신분 대표의 두 배 증원)와 '머리수 표결'(개별 대의원 투표로 결정) 요구가 나왔다. 제3신분은 두 배 대표를 얻어 성직자 303명, 귀족 282명에 맞서 578명을 배정받았으나(1788년 11월 제2차 명사회는 증원에 반대했고 네케르가 이를 뒤집었다), 표결이 신분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578명의 집단 표는 훨씬 적은 두 신분 각각의 표와 같은 무게였다. 배정 인원과 실제 착석 인원은 집계 기준이 달라 578명 대 609~611명으로 갈리며, 전체 대의원도 1,219명(착석 1,208명)으로 집계가 나뉜다.

개회 직후 논쟁이 걸렸다. 1789년 5월 6일 제2신분은 제3신분과의 공동 자격 심사를 188대 46으로 거부했다. 제3신분은 별도 신분으로 조직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코뮌'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6월 17일 시에예스의 제안 뒤 491대 89로 국민의회 명칭을 채택하고 과세 동의 권한을 주장하면서 다른 신분에 합류를 요청했다. 6월 20일 회의장이 닫히자 대의원들은 헌법 제정 전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코트의 서약을 했고, 7월 9일 국민제헌의회로 재편되었다. 표결 방식 논쟁은 6주간 회의를 마비시켰고, 이 교착이 1789년 재정 위기를 주권의 위기로 바꾸었다.

다른 시대·다른 나라의 동명 회의와의 구별

삼부회는 유럽 각국의 신분제 회의와 유사하다. 네덜란드의 삼부회, 잉글랜드 의회, 스코틀랜드 의회의 삼신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세임, 포르투갈·스페인의 코르테스, 신성로마제국의 제국회의, 헝가리의 공의회, 스웨덴의 신분제 릭스다그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삼부회는 국왕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소집했을 뿐 상설 입법기관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르고, 항소법원으로 출발해 뒤에 입법 기능을 주장한 파를르망(파리 파를르망이 가장 강력했다)과도 구별된다. 잉글랜드에서는 귀족과 성직자가 하나의 상원 신분으로 합쳐지고 평민이 하원을 이루는 이원 구조가 형성되었으며, 스코틀랜드의 삼신분은 성직자·귀족·셔 위원(또는 도시 대표)으로 스코틀랜드 의회를 구성했다. 프랑스 삼부회는 상설 의회가 아니라 국왕의 소집에 따라 열리는 회의로 남았다.

각 신분의 이해관계

회의에서 각 신분은 자기 이해를 관철하려 했다. 귀족과 성직자는 국왕의 요구에 동의하는 대가로 자신들의 수입원인 농민에 대한 영주권을 강화하려 했고, 도시 대표들은 세금을 내는 대가로 경제적 특권을 요구했다. 새 국왕은 삼부회를 통한 즉위 선물 수령을 권리로 여겼으나(1484년 회의는 샤를 8세 즉위에 30만 리브르를 주었다), 점차 대의원들은 국왕이 자기들의 동의를 얻는 일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다.

종말의 시점

사료는 단일한 해산 연도를 제시하지 않는다. 삼부회는 1614년까지 간헐적으로 열렸고 그 뒤 1789년에 한 번 더 열렸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에야 완전히 소멸했다. 1789년 마지막 회의는 제3신분의 표결 요구 속에 실질적으로 와해되었고, 여기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한국어)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영문)
  4. 위키백과 (영문)
  5. worldhisto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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