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七大罷工 (京漢鐵路工人大罷工) · 1923.02.04–09

2·7 대파업 (1923)

February Seventh Strike (1923)

1923년 2월 징한 철도(베이징~한커우) 노동자들이 총공회 결성 대회를 금지한 직례파 군벌 우페이푸에 맞서 벌인 전 노선 총파업과, 2월 7일 군경이 노동자를 습격해 수십 명을 죽인 진압. 중국공산당의 노동조합 서기부가 이끈 첫 노동운동 고조의 마지막 대투쟁으로, 북중국의 노동 기반을 무너뜨렸고 노동자만으로는 군벌을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겨 국공합작으로 가는 배경이 되었다.

상세

배경: 하루 10~14시간을 일하고 월급 8~12위안을 받던 징한 철도 노동자들 사이에서, 1921년 창당 뒤 노동조합 서기부가 노동자 야학과 구락부를 통해 조직을 넓혔다. 창신뎬·정저우·한커우 장안이 중심이었고, 1922년부터 세 차례 준비 회의를 거쳐 1923년 2월 1일 정저우에서 징한 철도 총공회를 세우기로 했다.

파업과 진압: 철도 국장의 요청을 받은 우페이푸가 대회를 금지하고 군경이 회의장을 부수자, 총공회는 본부를 한커우 장안으로 옮기고 2월 4일부터 전 노선 총파업에 들어가 다섯 가지 요구를 내걸었다. 2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손을 놓았다. 2월 7일 우페이푸·차오쿤 등의 군대가 장안 등지에서 노동자를 습격했고, 장안 분회 위원장 린샹첸과 총공회 법률 고문 스양이 살해되었다. 노동자들은 9일 복직했고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희생과 의미: 사망자는 중국 쪽 기록으로 52명(「52열사」), 우페이푸 쪽 진압을 다룬 영어권 서술로 35명이며, 백여 명이 다치고 수천 명이 해고되거나 피신했다. 1922년 1월부터 13개월 동안 100차례가 넘는 파업에 30만 명 이상이 참가한 첫 노동운동 고조는 이로써 끝났다. 리다자오는 이 뒤 농민으로 눈을 돌렸고,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합작에 힘을 실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zh.wikipedia.org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