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ébiscite des 20 et 21 décembre 1851 · 1851.12.20–21

1851년 프랑스 국민투표

1851 French plebiscite

상위 항목 1851년 12월 2일 쿠데타

1851년 12월 20~21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2월 2일 쿠데타를 승인받으려고 치른 국민투표. 그의 권력을 유지하고 새 헌법을 만들 권한을 맡긴다는 물음에 찬성 748만 1,231표(유효표의 92.03%), 반대 64만 7,292표가 나왔다. 남성 보통선거를 되살려 치렀지만, 국토의 3분의 1이 계엄 아래 있었고 찬성 투표용지만 인쇄되는 등 자유로운 투표가 아니었다.

상세

12월 2일 쿠데타 포고에서 보나파르트는 1850년 5월 31일 선거법을 없애고 남성 보통선거를 되살린다고 알리며 인민에게 직접 호소했다. 마지막 저항 거점을 없앤 지 열흘 만인 12월 20~21일, 프랑스인은 이렇게 물음을 받았다. “프랑스 인민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권력 유지를 원하며, 12월 2일 포고에서 제안한 기초 위에 헌법을 세우는 데 필요한 권한을 그에게 맡긴다.” 21세 넘은 남자로서 6개월 넘게 한곳에 산 사람이면 투표할 수 있었다.

투표는 공포 속에서 치러졌다. 국토의 3분의 1이 아직 계엄 아래 있었고, 국민투표를 지지하는 신문만 나올 수 있었으며, 쿠데타와 투표 사이에 선거인 명부가 손질되었다. 민간인은 비밀투표를 했지만 육군과 해군은 공개 명부에 이름을 적었다. 당국은 「찬성」 투표용지만 찍었고, 반대하려면 투표용지를 직접 써 와야 했다. 쿠데타 반대 봉기를 진압하는 가운데 반대 운동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대통령은 농민 사이에서 실제로 인기가 있었고, 성직자와 12월 2일에 체포되었던 질서당 의원 상당수도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1852년 1월 14일 확정 결과는 찬성 748만 1,231표, 반대 64만 7,292표, 기권 187만 1,477명이었다. 반대표는 주로 큰 도시에서 나왔고, 농촌 캉통 가운데 반대가 다수였던 곳은 아르데슈 도의 베르누 하나뿐이었다. 빅토르 위고 같은 반대파는 집계와 투표의 자유를 의심했다. 같은 날 새 헌법이 공포되었고, 1852년 11월 21~22일 두 번째 국민투표는 찬성 782만 4,189표로 제정 부활을 승인했다. 보나파르트는 그 뒤로도 1870년까지 국민투표로 인민과 직접 이어진다는 정치를 이어 갔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 7장에서 이 투표를 분할지 농민으로 설명했다. “프랑스 농민의 사정은 12월 20일과 21일의 보통선거라는 수수께끼를 풀어 준다. 이 선거는 두 번째 보나파르트를 시나이산으로 이끌었다. 율법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내려 주라는 것이었다.” 흩어져 살아 스스로를 대표하지 못하는 농민이 자기들 위에 선 권력자에게 대표를 맡겼다는 것이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fr.wikipedia.org
  2. 위키백과 (영문)
  3. fr.wikipedia.org
  4. fr.wikipedia.org
  5.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