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기의 망명자(에미그레)
French revolutionary émigrés
프랑스 혁명기에 정치적 불화나 신변의 위협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 주로 영국·독일·오스트리아·프로이센·스페인 등에 정착한 약 14만 명의 프랑스인을 가리킨다. 귀족·성직자가 44%로 다수를 이루었지만 평민 출신도 상당수인 이질적 집단이었고, 국경 밖에서 반혁명 부대를 결성해 1792년 이후 대프랑스 전쟁에 가담했다.
상세
프랑스 혁명기의 망명은 1789년부터 1815년까지 이어진 장기 현상이다. 정치적 망명은 바스티유 함락 직후 시작되어, 1789년 7월의 사건에 대한 공포로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프랑스를 떠났고 아르투아 백작(국왕의 동생)과 콩데 공작이 초기 망명자에 포함되었다. 루이 16세의 고모 마담 아델라이드와 빅투아르도 1791년 2월 19일 로마로 떠난 대표적 망명자였으며, 이들의 이동은 국왕 일가도 곧 뒤따를 것이라는 공포를 낳아 국민의회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망명은 대체로 1791~1794년,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고 혁명이 급진화된 1792년에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반혁명적 망명이었으나 혁명이 급진화되면서 1789년의 변화를 지지했던 인물들(1792년 8월 '조국에 대한 반역자'로 선포된 라파예트 등)도 합류했고, 1792년 8월 10일 이후와 9월 학살, 공포정치 초기에는 모든 사회계층의 공화국 반대자들이 망명했다. 망명자들은 주로 귀족과 성직자였으나(44%) 장교 4%, 부르주아 17%, 농민 20%, 노동자·장인·상인 15%를 차지했고, 전쟁으로 밀려난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재산이 적거나 없었다. 성직자 기본법 서약을 거부한 비서약 성직자들도 재산 몰수와 1792년 8월 법령에 따라 망명하거나 프랑스령 기아나로 추방되었다. 정착지는 영국(주로 런던·소호)과 영국령 북미(몬트리올·퀘벡시, 요크 북쪽 등), 미국이었고, 영국에는 1792년 가을에 유입이 정점에 이르러 9월 한 달에만 약 4,000명이 도착했으며 1793년 외국인법이 이민을 규제·감축했다. 망명지에서 생계를 꾸려야 했고, 영국 등지의 가난한 망명자 집단은 과부·부상병·노인·성직자·지방 귀족·하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망명자들은 국경 밖에서 반혁명 부대를 결성했고, 이는 1792년 4월 20일 이후 연합국의 대프랑스 전쟁을 지원했다. 여러 이질적인 단위로 조직되었으며, 콩데 공작 휘하의 망명 부대는 1792~1797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오스트리아와 함께 참전해 처음에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지휘의 연합군 프랑스 침공에 가담했고 1801년 해산될 때까지 스페인·포르투갈·나폴리·영국·러시아의 지원을 받았다. 이에 대응해 프랑스 정부들은 제재를 강화해 1791년 11월 모든 귀족 망명자에게 1792년 1월 1일까지 귀국할 것을 요구하고 불응하면 토지의 몰수·매각, 이후 입국 시도는 사형에 처했다. 1802년 제1집정 나폴레옹은 남은 망명자 전체에 일반 사면을 선포했지만 망명군 또는 프랑스 공화국과 교전한 유럽 군대의 장교로 복무한 약 1,000명은 제외했다.
망명 귀족은 외교적으로도 프랑스 혁명 전쟁 발화의 직접적 요인과 연결된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는 바렌느 사건(1791년 6월) 직후 망명 귀족과 연계해 반혁명 십자군 결성을 호소했고, 레오폴트 2세는 망명 귀족인 아르투아 백작의 중재로 프로이센과 함께 필니츠 선언(1791년 8월 27일, 드레스덴 근교)을 발표해 루이 16세에 대한 공동 지원을 선언했다. 프랑스 국민의회는 이를 위협으로 해석했고, 이는 1792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이어졌다. 1792년 7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콩데 공작이 주로 작성한 선언을 파리 시민에게 발표해 왕정 복고를 반대하는 자를 처형하겠다고 위협했고, 국왕과 왕비는 공개 이틀 전 사본을 승인했다. 이 선언은 파리를 위협해 복종시키려는 의도였으나 오히려 혁명을 더 급진화시켜 8월 10일 튈르리 습격과 왕권 정지로 이어졌다는 것이 통설이며, 최근 연구는 그 영향을 더 제한적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