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베티아 공화국
Helvetic Republic
헬베티아 공화국은 프랑스 혁명 전쟁 중이던 1798년부터 1803년까지 존속한 프랑스의 자매 공화국이다.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고(舊)스위스 연방이 해체된 뒤 세워졌으며, 주권을 폐지하고 프랑스 혁명 사상에 기초한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해 스위스 구체제의 종말을 열었다. 1803년 2월 19일 나폴레옹의 중재법으로 폐지되고 칸톤이 복원되었다.
상세
프랑스 혁명 전쟁기인 1798년 3월 5일 프랑스군이 스위스를 제압하면서 고(舊)스위스 연방이 무너졌고, 같은 해 4월 12일 121명의 주 대표자들이 헬베티아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새 정권은 주권과 봉건적 권리를 폐지하고 프랑스 혁명 사상에 바탕한 중앙집권 국가를 세웠다. 헌법은 대개 바젤 출신 행정관 페터 옥스가 설계했으며, 칸톤별 8명으로 구성된 대의회와 칸톤별 4명의 상원이라는 양원제 입법부, 5명의 집행부 총재정부를 두었다. 또한 출생 칸톤의 시민권과 구별되는 스위스 시민권을 처음으로 규정했으나, 공동체 토지와 재산은 부르거게마인데에 모인 기존 지역 유권자들에게 남았다.
지방 자치와 전통적 자유에 대한 간섭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보다 전통적인 가톨릭 칸톤에서 저항이 가장 거셌다. 예배의 자유를 제한한 데 맞서 우리·슈비츠·니트발덴은 알로이스 폰 레딩 지휘 아래 약 1만 명의 군대를 일으켰다. 로트투름·모르가르텐에서 승리했으나 레딩의 부대는 자텔 부근에서 슈아우엔부르크 장군에게 제지되었고, 5월 4일 슈비츠 시의회가 항복한 뒤 5월 13일 정전이 성립했다.
스위스의 장래를 둘러싼 일반적 합의는 없었다. 통일 공화국을 원하는 위니테르와 구귀족을 대표해 칸톤 주권의 복원을 요구한 연방주의자로 주도 세력이 갈렸다. 쿠데타 시도가 잦아졌고 정권은 존속을 프랑스에 의존해야 했다. 점령군의 부대 숙영 요구와 8월 19일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은 중립의 전통을 깨고 경제를 고갈시켰다. 1799년 스위스는 프랑스·오스트리아·제정 러시아 군대가 맞붙는 사실상의 전장이 되었고, 주민들은 대체로 후자 두 나라를 지지하며 헬베티아 공화국의 이름으로 프랑스 편에서 싸우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불안정은 1802~1803년 부를라-파페 봉기와 1802년 슈테클리크리크 내전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1802년 7월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 연방주의 성향이 강한 농촌 주민들이 봉기했고, 레만 칸톤의 부를라-파페 봉기는 양보로 진정되었으나 슈테클리크리크가 공화국의 붕괴를 불러왔다. 8월 28일 필라투스의 렝크파스 전투, 9월 베른과 취리히에 대한 포격, 10월 3일 파우그 교전을 거쳐 중앙정부는 9월 18일 군사적으로 항복하고 베른에서 로잔으로 물러났다가 완전히 붕괴했다. 공화국은 초기 국고 600만 프랑에 대해 1200만 프랑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양측을 파리로 소집했고(헬베티아 협의회), 1803년 2월 19일 중재법이 공화국을 폐지하고 칸톤을 복원했다.
헬베티아라는 이름은 고대 스위스 고원에 살던 갈리아계 헬베티족에서 나왔으며, 17세기 이래 인문주의 라틴어로 스위스 연방을 이르던 공화국 명칭과 1672년 처음 등장한 스위스의 의인화 헬베티아에서 유래한다. 이후 칸톤 간의 협력 필요는 1848년 스위스 연방 헌법으로 귀결되었고, 공화국의 5인 총재정부는 오늘날 7인 스위스 연방각의와 유사하다. 헬베티아 공화국은 스위스 안에서 논쟁적인 시기로 남아 있다. 카를 힐티는 이 시기를 스위스 영토에서의 첫 민주주의 경험이라고 평했으나, 보수주의 진영은 국가적 약화와 독립 상실의 시기로 본다. 보주·투르가우·티치노 같은 칸톤에는 정치적 자유의 시기였고, 베른·슈비츠·니트발덴에는 군사적 패배를 뜻했다. 헬베티아 시기는 근대 연방국가로 나아가는 핵심적 단계였으며, 주민을 특정 칸톤의 거주자가 아니라 처음으로 스위스인으로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