кондратьевщина · 1928–1930

콘드라티예프시나

Kondratievshchina

1920년대 후반 소련에서 농업경제학자 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와 그의 학파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낙인이다. 1929년 12월 마르크스주의 농업학자 회의에서 스탈린이 '차야노프시나'와 함께 '제국주의의 대리인'이자 '쿨라크의 이데올로기'로 공개 규정하면서 공식 용어가 되었다. 이후 콘드라티예프의 시장 균형과 점진적 농업 발전론은 '반혁명적 파괴 활동'으로 간주되었고, 그와 동료들은 1930년 조작된 '노동농민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상세

콘드라티예프의 작업

콘드라티예프는 경기순환 연구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경제학자였다. 그가 1920년대에 제시한 장기 파동론은 자본주의 경제가 수십 년 주기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는 가설로, 이후 콘드라티예프 파동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그는 동시에 소련 재무인민위원부와 농업 부문의 실무 연구를 담당하며 시장 조건에 근거한 농업 발전 계획을 작성했다.

정책적으로 그는 균형론의 입장에 있었다. 공업과 농업의 비례를 유지하고 농민의 시장 유인을 존중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국민경제 전체의 성장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이 입장은 실무적으로 국가계획위원회의 발생적 방법과 결합했다.

낙인의 형성

1928년부터 그의 이름이 비판 대상으로 등장했고, 1929년 12월 마르크스주의 농업경제학자 회의에서 스탈린이 차야노프시나와 함께 콘드라티예프시나를 제국주의의 대리인이자 쿨라크의 이데올로기로 규정했다. 이후 시장 균형과 점진적 발전을 옹호하는 서술 자체가 반혁명적 파괴 활동으로 다루어졌다.

장기 파동론에 대한 비판에는 이론적 논거도 포함되었다. 자본주의가 주기적 하강 이후 다시 상승 국면에 들어선다는 가설은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이 해석은 이후 서구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사건과 재평가

콘드라티예프는 1930년 노동농민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수즈달 정치격리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중에도 연구를 계속해 원고를 작성했으며, 1938년 처형되었다.

그의 장기 파동 가설은 국외에서 계속 논의되었다. 슘페터가 기술 혁신과 결합해 이 개념을 발전시켰고, 20세기 후반에는 세계체제론과 조절이론, 기술 패러다임 연구에서 참조되었다. 소련에서는 1987년 이후 복권되었고, 그가 남긴 원고들이 출간되었다. 콘드라티예프시나라는 낙인이 제거한 것이 특정 학자만이 아니라 시장 조건을 다루는 경제학적 방법 자체였다는 점이 이후 소련 경제학의 공백으로 지적된다.

관련 인물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confirms: after Stalin's speech at the December 1929 Conference of Marxist Agrarians, 'термины «чаяновщина» и «кондратьевщина» стали символами вредительства' (the terms Chayanovshchina and Kondratievshchina became symbols of wrecking); also notes a 1930 Communist Academy volume titled «Кондратьевщина»
  2. ng.ru confirms: 'в 1928 году "кондратьевщина" была осуждена как "идеология кулачества", устремленная к реставрации капитализма' (in 1928 Kondratievshchina was condemned as the ideology of the kulaks aimed at capitalist rest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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