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볼르 개입
La Baule intervention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1990년 6월 20일 제16차 프랑스-아프리카 국가원수회의(라볼르-에스쿠블라크, 6월 19~21일)에서 프랑스 원조를 수혜국의 민주화 진전에 연계하겠다고 밝힌 조치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정권에는 원조가 더 냉담해지고 민주화 단계를 밟는 국가에는 열의 있는 원조를 하겠다는 차등적 조건화였으며, 미테랑은 동시에 내정 불간섭과 설교하는 식의 식민주의 거부를 명시했다. 대표제, 자유선거, 다당제, 언론자유, 사법부 독립을 민주주의의 구체적 기준으로 제시했다.
상세
라볼르 개입은 프랑스 공적원조의 정치적 조건화를 선언한 사건이지만, 고립된 연설이 아니라 1989년부터 진행된 과정의 가장 가시적인 부분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유럽 공산정권 붕괴 직후 나온 이 연설의 논리는 '자유의 바람'이 동유럽에서 남쪽으로 확산된다는 것이었고, 롤랑 뒤마는 이를 '민주주의 없는 발전도, 발전 없는 민주주의도 없다'로 요약했다. 이전까지 냉전기 프랑스와 서방의 아프리카 관계는 반공 정권 유지와 자원 공급 안정을 우선해 인권과 민주주의 준수를 사실상 고려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입장은 1989년 11월부터 논의되어 1990년 4월 프랑스 국민의회 협의를 거쳐 공식화되었다. 같은 시기 아프리카 채무위기가 겹쳤고, 1989년 재협상된 ACP-EC 로메 IV 협정에 따라 유럽개발기금(FED) 원조에도 정치적 조건화가 도입되었으며, IMF·세계은행의 구조조정 계획과 1990년 9월 파리 제2차 유엔 최빈국회의가 이어졌다. 프랑스 정부에서는 협력장관 자크 펠르티에가 주된 설계자로 참여했고, 들로르 위원장의 유럽공동체도 관여했다. 공무원 급여를 지급해야 했던 다수의 일당제 지도자들은 다당제 전환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16차 프랑스-아프리카 정상회의의 비공식 의제는 '채무와 아프리카의 정치적 진화'였다. 연설 직후 코트디부아르, 가봉, 베냉, 콩고 인민공화국 등 여러 국가가 다당제로 전환하거나 전환을 준비했고, 1990년 2월 코토누 국가회의 같은 선행·병행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불균등했다. 다당제 형식과 자유선거가 분리되고 1990년대 선거 조작이 만연했으며, 영국 구식민지에서의 1990년대 민주주의 진전이 더 빨랐다. 프랑스는 이 지역에서 네오콜로니얼적 지위를 유지했다.
미테랑은 이후 입장을 바꾸어 1991년 11월 19~21일 프랑코포니 정상회의에서 '각국이 스스로 방식과 속도를 정한다'며 1990년의 '자유선거' 요구를 사실상 후퇴시켰고, 카메룬의 폴 비야가 국가회의를 거부하는 등 저항에 부딪혔다. 평가는 갈린다. 프랑스-아프리카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지리학자 실비 브뤼넬은 이 연설이 아프리카에서 '혼돈의 10년과 중국의 부상'을 열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다만 냉전 종식기 변혁의 복잡성을 단순화한 지적이라는 반론도 있다. 프랑사프리크 체제 안에서 프랑스 공적 재정원조가 수혜국 민주화에 조건화된 미테랑의 교리적 전환으로도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