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cashire Cotton Famine · 1861–1865

랭커셔 면화 기근

Lancashire Cotton Famine

1861~1865년 잉글랜드 북서부의 면공업을 덮친 불황. 1859~1860년 호황기의 과잉생산 위에 미국 남북전쟁으로 원면 수입이 끊기고 상인들의 투기가 겹치면서 공장이 잇달아 멈추었고, 영국에서 가장 형편이 좋던 랭커셔 면방적 노동자들이 가장 가난한 처지로 떨어졌다. 굶주림 속에서도 면방적 노동자들은 노예제에 맞선 북부를 지지했다.

상세

1860년 이 지역에는 면방적 공장 2,650곳에 44만 명이 일했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남부 농장주들은 영국 경제를 흔들어 개입을 끌어내려고 면화 수출을 스스로 끊었고, 그 전략이 실패한 뒤에는 북부의 해상 봉쇄가 수출을 막았다. 상인들은 값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원면을 쥐고 있었고, 기준 품종인 미들링 올리언스의 값은 1861년 6.5펜스에서 1864년 27.5펜스로 뛰었다. 상인들이 거둔 횡재는 3,500만 파운드로 추산된다. 공장주들은 인도의 수라트 면으로 바꾸었지만 섬유가 짧고 잘 끊겨 베틀 한 대의 생산량이 예전의 40% 남짓에 그쳤고, 성과급을 받던 노동자들의 수입은 급감했다.

구제는 빈민법 연합과 지역 구제위원회가 맡았다. 1862년 5월 16일 런던 시장 관저 기금이, 6월 20일 피해 도시 시장들의 맨체스터 중앙위원회가 생겼다. 교회가 연 재봉 학교와 산업 학급에 나가면 빈민 구제를 받을 수 있었다. 1863년 3월 스탤리브리지에서는 구제위원회가 현금 대신 식료품 교환권을 주기로 하자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와 위원들의 상점과 구제품 창고를 습격했고, 경기병이 출동해 80명을 체포했다. 의회는 공공사업(제조업 지구)법으로 지방 당국이 돈을 빌려 하수도, 공원, 도로 공사에 실직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게 했다.

남부 연합은 유럽 면공업 지대의 고통이 영국의 개입을 부르기를 기대했고, 실제로 여러 면공업 도시에 남부 깃발이 걸렸다. 그러나 1862년 12월 31일 맨체스터 자유무역회관에 모인 면방적 노동자들은 노예제에 맞선 북부를 지지하기로 결의하고 링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링컨은 1863년 1월 19일 답신에서 이를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넘어선 적 없는 숭고한 기독교적 영웅심이라고 불렀다. 1864년 원면 수입이 되살아나 공장들이 다시 돌았지만, 수천 명은 이미 다른 지방이나 해외로 떠난 뒤였다.

마르크스는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창립 선언에서 공장 감독관과 호적 장관이 기록한 역설, 곧 랭커셔 노동자들이 궁핍 배급으로 연명하면서도 면화 기근으로 공장에서 잠시 쫓겨난 덕에 건강이 나아지고 아이들의 사망률이 줄었다는 사실을 인용했다. 같은 선언은 대서양 건너편에서 노예제를 지키고 퍼뜨리려는 수치스러운 십자군에 서유럽이 뛰어들지 않게 한 것은 지배계급의 지혜가 아니라 영국 노동계급의 영웅적 저항이었다고 썼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