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09.28–1876.07.15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과 분열

영국 노동조합원과 프랑스 상호주의자, 망명 혁명가들이 함께 세운 노동자의 첫 국제 조직은 무엇을 했으며, 왜 파리 코뮌 뒤 마르크스파와 바쿠닌파로 갈라져 해산했는가?

국제노동자협회는 1864년 9월 28일 런던 세인트마틴 홀 집회에서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와 프랑스 프루동주의 노동자들이 주도해 창립되었고, 마르크스가 「창립 선언」과 규약을 썼다. 런던의 총평의회와 해마다 열린 대회를 통해 파업을 지원하고 8시간 노동일과 토지 공유를 결의했으며, 제네바·로잔·브뤼셀 대회에서 집산주의자가 상호주의자를 누르고 바젤 대회에서는 바쿠닌파가 힘을 키웠다. 파리 코뮌 뒤 각국 정부의 탄압이 거세지는 가운데 1871년 런던 협의회가 노동계급 정당 결의를 채택하자 갈등이 터졌고, 1872년 헤이그 대회는 바쿠닌과 기욤을 제명하고 총평의회를 뉴욕으로 옮겼다. 반권위주의 연맹들은 생티미에에서 따로 인터내셔널을 세웠고, 뉴욕의 협회는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해산했다.

영국프랑스런던 세인트마틴 홀, 1864년 9월 28일

노동자의 국제 연대라는 생각은 새롭지 않았다. 1840년대 파리의 망명자들 사이에서 생긴 공산주의자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공산당 선언』을 맡겼고, 런던에서는 1844년 망명자들과 차티스트 지도자 조지 줄리언 하니가 「형제 민주주의자회」를 세워 “모든 인간은 형제다”를 표어로 삼았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이 진압된 뒤 1850년대는 사회주의 사상에 “거의 죽은 시기”였다. 1850년대 말과 1860년대 초의 정치·경제 위기 속에서 유럽의 노동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영국에서는 「정크」라 불린 새 세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가리발디의 이탈리아 독립 투쟁 지지, 러시아의 폴란드 탄압 반대, 미국 남북전쟁의 북부 지지 같은 연대 행동을 조직했다. 1

프랑스에서는 노동조합이 불법이었지만 공제조합의 모습으로 묵인되었다. 프루동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은 독자적인 정치 대표를 찾기 시작했고, 1864년 청동 조각공 앙리 톨랭이 쓴 「60인 선언」은 별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있다고 선언했다.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정부 지원으로 파견된 프랑스 노동자 대표단은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접촉했고, 이 만남은 1863년 7월 폴란드 봉기를 지지하는 런던 집회로 이어졌다. 런던 노동조합평의회 서기인 제화공 조지 오저가 쓴 「영국 노동자가 프랑스 노동자에게 보내는 글」은 노동시간을 줄이거나 임금을 올리려 할 때마다 고용주들이 “프랑스인, 독일인, 벨기에인”을 데려와 더 싼 임금으로 일을 시킨다며, 모든 나라 노동자 사이의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연락을 요구했다. 1 2 3 4

1864년 9월 28일 런던 세인트마틴 홀에서 약 2,000명의 노동자가 모인 국제 집회가 열렸다. 오저와 톨랭 등 영국과 프랑스 노동 지도자들이 함께 준비하고 실증주의자 교수 에드워드 스펜서 비즐리가 사회를 본 이 집회는, 국제 노동자 조직을 세우고 그 중앙위원회를 런던에 두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규약과 강령을 마련할 21인 위원회에는 오저, 윌리엄 랜들 크리머, 조지 하월 같은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 톨랭과 샤를 리무쟁 같은 프랑스 대표, 마치니파 이탈리아인 루이지 볼프,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가 들어갔다. 마르크스는 발언하지 않는 자격으로 연단에 앉아 있었을 뿐이지만, 런던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하던 독일인 재단사 요한 게오르크 에카리우스의 권유로 위원회에 들어가 처음부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 5

영국미국「창립 선언」과 규약

마르크스는 협회의 두 기초 문서인 「국제노동자협회 창립 선언」과 「임시 규약」을 썼다. 마치니파와 오언주의자의 초안이 거부된 뒤 그의 글이 열렬히 채택되었다. 창립 선언은 1848년부터 1864년까지 산업과 상업이 유례없이 발전했는데도 노동 대중의 비참은 줄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마르크스는 다양한 창립자들을 멀어지게 할 표현을 피하면서, 영국의 10시간 노동법과 협동조합 운동을 “노동계급의 정치경제학”이 거둔 두 승리로 꼽았다. 그리고 토지와 자본의 주인들은 경제적 독점을 지키는 데 언제나 정치적 특권을 쓸 것이므로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큰 의무가 되었다”고 결론짓고, 『공산당 선언』의 구호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로 끝맺었다. 1 6

규약 전문은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이 쟁취해야 한다는 원칙과, 노동계급의 경제적 해방은 “모든 정치 운동이 수단으로서 종속되어야 할 큰 목적”이라는 원칙을 세웠다. 이 전문은 1871년 판 「국제노동자협회 일반규약」에도 이어졌다. 조직은 런던에 상설 중앙위원회, 곧 총평의회를 두고 각국의 지부와 연맹이 해마다 대회에 대의원을 보내는 구조였다. 오저가 총평의회의 초대 의장을 맡았고, 목수 출신의 노조 조직가 랜들 크리머가 1865년 서기로 뽑혔다가 1867년 협회가 여성에게 회원 자격을 주기로 하자 물러났다. 같은 해 로버트 쇼가 사임하자 에카리우스가 총서기로 뽑혀 1871년까지 맡았다. 1 7 4 8 5

인터내셔널은 창립 직후부터 유럽 밖의 정치에도 목소리를 냈다. 마르크스가 1864년 11월 말에 쓴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보내는 글」은 링컨의 재선을 축하하며, 첫 당선의 숨은 구호가 노예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재선의 함성은 “노예제에 죽음을”이라고 썼다. 글은 남북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유럽의 노동자들이 성조기에 자기 계급의 운명이 걸려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고 했고, 1865년 1월 28일 주영 미국 공사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에게 전달되었다. 9

영국스위스아일랜드폴란드파업 지원과 국제 연대

인터내셔널이 노동자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쓸모 있었던 일은 파업 지원이었다. 1866년 제네바 대회를 위해 마르크스가 쓴 총평의회 대의원 지침은, 파업과 직장폐쇄 때 외국인 노동자를 본국 노동자에 맞서는 도구로 쓰려는 자본가의 술책을 막는 것이 협회가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해 온” 특별한 기능이라고 썼다. 협회는 대륙 곳곳의 파업에 돈과 조직을 지원하고 파업 파괴자의 유입을 막아 노동계급 사이에서 명성을 높였다. 10 1

1869년 바젤 대회에 낸 총평의회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대륙을 흔든 파업들을 자본과 노동의 “게릴라전”이라 부르며, 정부와 언론이 이를 노동자의 빈곤이나 자본가의 전횡이 아니라 인터내셔널의 비밀 음모 탓으로 돌렸다고 썼다. 바젤에서는 1868년 11월 9일 미카엘제 휴일을 요구한 리본 직공들을 공장주가 쫓아내면서 직장폐쇄와 파업이 이듬해 봄까지 이어졌다. 직공들은 회사 사택에서도 쫓겨났고, 공장주들은 상점에 그들에게 외상을 주지 말라는 회람을 돌렸다. 1869년 3월에는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제네바의 건설 노동자와 식자공이 파업에 들어갔다. 11

영국에서 인터내셔널의 노조 지도자들은 1865년 2월 세워진 남성 보통선거 운동 단체 개혁동맹의 지도부를 이루었다. 하월, 오저, 크리머, 벤저민 러크래프트가 그 중심이었고, 이 운동은 1867년 도시 노동계급 일부에게 선거권을 준 선거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총평의회는 1867년 1월 22일 런던에서 1863년 폴란드 봉기를 기념하는 집회를 열었다. 1869년 가을 아일랜드 페니언 정치범의 사면 운동이 일자, 총평의회 위원들은 영국에서 두 번째 페니언 옹호 운동을 조직했다. 10월 24일 런던에서는 약 20만 명의 노동자가 항의 시위를 벌였고, 총평의회는 11월 마르크스가 낸 초안으로 영국 정부의 아일랜드 정치범 정책을 비판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2 4 13 14

스위스벨기에프랑스제네바에서 바젤까지: 상호주의자와 집산주의자

인터내셔널의 프랑스 회원은 처음에 프루동을 따르는 상호주의자가 다수였다. 상호주의는 소생산자들 사이의 “무상 신용”과 “공정한 교환”에 기댄 시장 사회주의로, 정치 행동과 파업, 노동조합, 재산의 공동 소유에 반대했고, 국가를 장악할 대상이 아니라 무시할 억압 기구로 보았다. 1865년 1월 그라빌리에 거리에 사무실을 연 파리 지부에서는 톨랭이 세 서기 가운데 한 사람으로 1867년까지 런던 총평의회와의 연락을 맡았다. 이 노선은 공산주의 강령과 독자 노동자 정당을 통한 정치 행동, 계급투쟁의 무기로서 파업을 주장한 마르크스와 총평의회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1 2

1866년 9월 3일부터 8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첫 대회에는 22개 지부를 대표하는 정식 대의원 46명과 우애 대의원 14명이 모였다. 대회는 노동일의 법적 제한을 노동계급의 개선과 해방을 위한 “모든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예비 조건으로 규정하고 8시간을 법정 노동일로 제안했다. 마르크스가 쓴 총평의회 지침은 노동조합이 임금과 노동시간을 둘러싼 일상의 “게릴라전”에 필요할 뿐 아니라 “임금노동과 자본 지배의 체제 자체를 대체하기 위한 조직된 기관”으로서 더욱 중요하다고 썼다. 상호주의자들은 이 대회에서 대체로 패했다. 3 10 1

1867년 로잔 대회는 재산 문제를 다루어 운송과 교환 수단의 국가 소유를 지지하는 첫 결의를 냈고, “노동자의 사회적 해방은 정치적 해방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결의했다. 1868년 브뤼셀 대회에서는 벨기에의 의사 세자르 드 파프가 이끈 집산주의자들이 광산·채석장·철도와 경작지를 사회의 공동 재산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의를 통과시켰고, 톨랭은 끝까지 상호주의와 사적 소유를 변호했다. 다만 당시 대의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브뤼셀에서 승인된 공산주의는 국가사회주의가 아니라 생산자 협동조합과 연합한 코뮌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1 15 16 2

1869년 9월 바젤 대회는 토지 공유 결의를 재확인했지만 상속권을 두고 크게 맞섰다. 바쿠닌은 상속권의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폐지를 사회 변혁의 전제로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쓴 총평의회 보고서는 상속법이 생산수단의 사유에 바탕을 둔 경제 조직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므로, 생산수단이 사회적 소유로 바뀌면 상속권은 저절로 사라진다고 보고 상속세 인상 같은 과도적 조치를 제안했다. 바쿠닌의 안은 찬성 32, 반대 23, 기권 13으로 필요한 과반에 못 미쳤고, 총평의회 안은 찬성 19, 반대 37, 기권 6으로 부결되었다. 같은 대회에서 바쿠닌은 협회의 이익에 반하는 지부를 정지할 권한을 총평의회에 주는 안에 찬성했다. 1 17

스위스스페인이탈리아바쿠닌과 국제사회주의민주동맹

1867년 스위스로 옮긴 러시아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은 1868년 인터내셔널 제네바 지부에 가입했다. 그와 지지자들은 재산의 집단 소유라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와 같았지만, 국가와 정치 행동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갈라졌다. 바쿠닌은 국가와 모든 정치적 권위의 완전한 폐지를 주장했고, “노동자 국가”라도 새로운 폭정이 될 수밖에 없다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거부했다. 그에게 사회 변혁의 주된 수단은 조직된 정치 행동이 아니라 대중, 특히 농민과 룸펜프롤레타리아의 자생적 혁명 본능이었다. 1 18

1868년 10월 28일 바쿠닌은 79명과 함께 제네바에서 국제사회주의민주동맹을 세우고, 인터내셔널 안의 한 조직으로 가입을 신청했다. 총평의회는 12월 22일 마르크스가 프랑스어로 쓴 결의로 이를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결의는 동맹이 인터내셔널 “안에” 세워졌다면서 동시에 그 밖에 스스로 임명한 중앙위원회와 별도의 대회를 두려 한다고 지적하고, 인터내셔널 안팎에서 움직이는 두 번째 국제 조직은 협회를 해체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되어 협회를 “모든 인종과 국적의 음모가들의 노리개”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동맹은 1869년 봄 공식 해산하고 지부들이 일반 지부로 인터내셔널에 들어갔지만, 마르크스파는 비밀 연결망이 계속 움직이며 인터내셔널을 바쿠닌의 강령으로 끌어가려 한다고 보았다. 19 20 1

바쿠닌의 영향은 스페인과 스위스 쥐라에서 특히 컸다. 1868년 10월 바쿠닌의 후원을 받은 이탈리아 혁명가 주세페 파넬리가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돌며 노동자들에게 인터내셔널을 소개했고, 1870년 6월 바르셀로나 노동자 대회는 인터내셔널 가입을 결의했다. 이렇게 생긴 스페인 지역 연맹은 1873년 회원이 2만 9천 명을 넘어 인터내셔널의 가장 큰 지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870년 4월 무렵 바르셀로나의 라파엘 파르가 펠리세르 등은 제네바 동맹과 같은 강령과 규약을 가진 비밀 그룹을 따로 만들었다. 시계 장인이 많은 스위스 쥐라에서는 1869년 1월 로망드 연맹 대회 때부터 바쿠닌파가 갈라져 나오기 시작했다. 21 22 19 23

프랑스독일영국전쟁과 코뮌

바젤 대회 뒤의 시기는 인터내셔널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때였지만, 프랑스에서는 탄압이 거세졌다. 1870년 국민투표를 앞두고 나폴레옹 3세 정부는 인터내셔널이 황제 암살을 꾸미는 비밀결사라며 파리·리옹·루앙·마르세유·브레스트 등지의 지부 운영위원들을 일제히 잡아들였다. 그 혐의는 곧 정부 쪽 법정에서조차 터무니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프랑스 지부들의 실제 “죄”는 국민투표에 찬성하는 것이 국내의 전제와 국외의 전쟁에 찬성하는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호소한 데 있었다. 24 1

1870년 7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자 마르크스가 쓴 총평의회의 첫 담화(7월 23일)는 이를 왕조 전쟁으로 규정하고, 독일 노동계급이 전쟁의 “엄격히 방어적인 성격”을 잃고 프랑스 인민에 대한 전쟁으로 타락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승리든 패배든 똑같이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담화는 파리 회원들의 반전 선언과 함께 브라운슈바이크 노동자 집회, 그리고 작센 노동자 5만 명을 대표한 켐니츠 대의원 회의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를 되새기며 보낸 응답을 실었다. 9월 9일의 두 번째 담화는 스당 항복과 공화국 선포 뒤 프로이센이 정복 전쟁으로 돌아섰다고 비판하고 알자스·로렌 합병에 반대했다. 1869년 아이제나흐에서 세워진 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첫 전쟁 공채 표결에 기권했고, 원칙적인 반전 입장 때문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24 25 26 1

1871년 파리 코뮌은 인터내셔널이 일으킨 것이 아니었지만, 그 파리 회원들은 큰 역할을 했다. 코뮌 평의회 의원의 약 3분의 1이 인터내셔널 회원이었고, 외젠 바를랭, 브누아 말롱, 레오 프랑켈이 그 가운데 있었다. 이들은 순수한 정치·군사 조치에 집중한 자코뱅·블랑키파 다수에 맞서 사회·경제 개혁을 주장한 소수파에 속했다. 반면 2월 선거에서 인터내셔널 명단으로 센 도 의원에 당선된 톨랭은 코뮌을 부인했다. 파리 지부 연맹평의회가 그를 제명하자 총평의회는 4월 25일 이를 확인하며, 프랑스 회원의 자리는 “베르사유의 찬탈적이고 반혁명적인 의회”가 아니라 파리 코뮌 쪽에 있다고 선언했다. 1 2 27

코뮌이 무너진 직후 마르크스는 총평의회의 이름으로 『프랑스 내전』을 내놓았다. 5월 말까지 쓴 이 글은 6월 13일 무렵 런던에서 35쪽짜리 소책자로 나와 곧 팔려 나갔고, 그해와 이듬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6월 6일 프랑스 외무장관 쥘 파브르는 유럽 모든 열강에 인터내셔널을 추적하라고 요구하는 회람을 보냈고, 프랑스에서는 인터내셔널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혁명가였던 적이 없는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마르크스의 코뮌 옹호에 반발해 조직과 거리를 두었다. 엥겔스는 1874년 코뮌이 “지적으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인터내셔널의 자식”이었지만 인터내셔널은 그것을 만들려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며, 그래도 그 책임을 지게 된 것은 정당했다고 썼다. 28 29 1 30

영국스위스스페인네덜란드런던 협의회에서 헤이그 대회로

1871년 9월 17일부터 23일까지 런던에서 열린 대의원 협의회는 노동계급의 정치 행동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결의는 창립 선언과 규약 전문, 로잔 대회 결의를 근거로 들며, 유산계급의 집단적 권력에 맞서 노동계급은 “모든 낡은 정당과 구별되고 대립하는 정당으로 스스로를 구성함으로써만” 계급으로서 행동할 수 있으며, 이것이 사회혁명과 그 궁극 목적인 계급 폐지의 승리에 필수적이라고 했다. 경제 투쟁으로 이룬 힘의 결합은 동시에 지주와 자본가의 정치권력에 맞서는 지렛대가 되어야 했다. 총평의회는 10월 24일 1871년 판 일반규약을 펴냈다. 1 15 7

이 결의는 정치 행동을 거부한 아나키스트들에게 정면 도전이었다. 1871년 11월 12일 송빌리에 대회로 정식 출범한 쥐라 연맹은 모든 연맹에 보낸 회람에서 런던 협의회의 결정을 “권위주의적인” 독일 공산주의 교리의 강요라고 비난하고, 중앙집권적인 총평의회 대신 “자율적 그룹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요구했다. 바쿠닌의 영향이 강한 스페인·이탈리아·벨기에 연맹이 쥐라 쪽으로 기울었다. 총평의회는 1872년 3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비공개 회람 『인터내셔널의 이른바 분열』로 맞서, 동맹이 인터내셔널에 적대적인 결사이며 혼란을 일부러 유지하려 한다고 공격했다. 1 23 19 31

분열은 각국 연맹 안에서도 벌어졌다. 마르크스가 사위 폴 라파르그를 보낸 스페인에서는 바쿠닌파가 우세했다. 1872년 6월 라파르그와 가까운 마르크스파가 스페인 연맹에서 쫓겨나 「새 마드리드 연맹」을 세웠지만, 남은 연맹의 1만 5천 명에 비해 수백 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이탈리아 연맹은 1872년 여름 리미니 대회에서 총평의회와 관계를 끊기로 결의했다. 총평의회가 다음 대회 장소로 헤이그를 고르자 바쿠닌파는 이것이 자기 쪽 연맹들의 참가를 어렵게 하려는 선택이라고 보았고, 프랑스와 독일 경찰의 수배를 받던 바쿠닌은 갈 수 없었다. 22 32

1872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열린 헤이그 대회에는 유럽과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65명의 대의원이 모였다. 마르크스파는 런던에서 여러 단체의 위임장을 가진 대의원단 덕에 다수를 확보했는데, 이 다수의 정당성은 지금도 논란이다. 대회는 런던 협의회의 정치 행동 결의를 규약 제7a조로 넣는 안을 찬성 29, 반대 5, 기권 8로 통과시켰고, 총평의회에 지부와 연맹을 다음 대회까지 정지할 권한을 주었다. 동맹 조사위원회는 비밀 동맹이 “인터내셔널과 완전히 반대되는 규약”으로 세워졌다고 보고하며, 동맹의 창립자로서, 그리고 「개인적인 일」을 이유로 바쿠닌의 제명을 제안했다. 이 「개인적인 일」은 『자본』 러시아어 번역과 관련한 협박 사건이었다. 대회는 바쿠닌을 찬성 27, 반대 6, 기권 7로, 제임스 기욤을 찬성 25, 반대 9, 기권 8로 제명했고, 아데마르 슈비츠게벨의 제명안은 찬성 15, 반대 16으로 부결되었다. 이 표결은 많은 프랑스·독일 대의원이 이미 떠난 뒤에 이루어졌다. 1 33 32

대회는 엥겔스의 제안으로 총평의회를 뉴욕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전 여부는 찬성 26, 반대 23, 기권 9로 겨우 통과되었고, 장소는 뉴욕이 30표, 런던이 14표를 얻었다. 이 결정은 총평의회가 블랑키파나 아나키스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인터내셔널이 유럽의 대중 조직으로서 끝났음을 뜻했다. 대회 직후인 9월 8일 암스테르담 집회에서 마르크스는 미국과 영국, 어쩌면 네덜란드처럼 노동자가 평화적 수단으로 목표에 이를 수 있는 나라가 있지만, 대륙의 대다수 나라에서는 혁명의 지렛대가 무력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1 33 34

스위스미국스페인이탈리아벨기에두 인터내셔널과 해산

헤이그 대회가 끝나고 1주일 남짓 지난 1872년 9월 15~16일, 스위스 생티미에에 스페인·이탈리아·쥐라 연맹과 프랑스의 비밀 지부들, 미국 지부를 대표한 대의원 15명이 모였다. 대회는 헤이그 결의와 새 총평의회를 거부하고 연맹들 사이의 “우애·연대·상호 방위 협약”을 맺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정치 행동에 관한 결의는 “모든 정치권력의 파괴가 프롤레타리아의 첫째 의무”이며, 그 파괴를 위해 이른바 임시적·혁명적 정치권력을 조직하는 것은 “또 하나의 기만”일 뿐 오늘날의 모든 정부만큼 프롤레타리아에게 위험하다고 선언했다. 역사학은 이 조직을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이라 부르며 아나키즘 운동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35 36

뉴욕의 총평의회는 프리드리히 아돌프 조르게가 1872년부터 1874년까지 총서기로 이끌었지만, 유럽 노동운동의 흐름에서 떨어져 영향력을 빠르게 잃었다. 영국에서는 운동이 갈라져 무너졌고,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국내 조직에 힘을 쏟았다. 1873년 9월 제네바에서는 두 인터내셔널이 각각 대회를 열었는데, 총평의회 쪽 대회는 거의 스위스 대의원뿐이었고 마르크스는 이를 “피할 수 없는 대실패”라 불렀다. 1876년 7월 15일 필라델피아 협의회는 총평의회를 폐지했다. 협의회의 선언은 부르주아지가 “인터내셔널은 죽었다!”고 외치겠지만 그 원칙은 진보적 노동자들이 인정하고 지키고 있다며, 미국의 동지들이 다시 모든 나라 노동자가 함께 싸울 날까지 그 성과를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로 끝맺었다. 1 37 38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은 1873년 제네바, 1874년 브뤼셀, 1876년 베른에서 대회를 열었다. 바쿠닌은 1874년 볼로냐 봉기를 준비했으나 실패했고, 1876년 7월 1일 베른에서 죽었다. 1877년 베르비에 대회는 「행동에 의한 선전」 쪽으로 기울었고, 바쿠닌의 집산주의와 크로폿킨·말라테스타·엘리제 르클뤼의 아나키스트 공산주의 사이의 논쟁을 처음 열었다. 스페인의 안셀모 로렌소는 뒤에 국제노동자협회가 베르비에 대회에서 물질적으로 존재하기를 멈췄다고 회고했다. 쥐라 연맹은 젊은 표트르 크로폿킨을 아나키즘으로 이끌었다. 그는 1872년 쥐라의 시계공들 사이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견해가 정해졌다. 나는 아나키스트였다”고 썼다. 36 18 23

평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갈림길

엥겔스는 1874년 조르게에게 보낸 편지에서 옛 인터내셔널이 제2제정의 시대에 속했다고 썼다. 1849년부터 1864년까지 유럽을 짓누른 억압이 막 깨어나는 노동운동에 단결과 내부 논쟁의 자제를 강요했기에 모든 분파가 한데 모일 수 있었지만, 코뮌이라는 첫 큰 성공이 이 “순진한 결합”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인터내셔널이 10년 동안 유럽사의 “미래가 있는 쪽”을 지배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옛 형태로는 수명을 다했다고 보았고, 다음 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의 저작이 몇 해 영향을 미친 뒤 “직접 공산주의적”인 것이 되리라고 내다보았다. 30

분열의 쟁점은 그 뒤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엥겔스는 1872년 「권위에 대하여」에서 반권위주의자들이 정치적 국가를 그것을 낳은 사회적 조건보다 먼저 단번에 폐지하라고 요구한다고 비판하며, “혁명은 분명히 가장 권위주의적인 것”이고 파리 코뮌도 무장한 인민의 권위를 쓰지 않았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바쿠닌은 헤이그 대회 한 달 뒤인 10월 5일 쓰다 만 「《리베르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에 대한 “파문”에 항의하고, 마르크스의 혁명적 독재와 과도기, 임시정부 이론을 비판하며 아래로부터의 연방적·분권적 조직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39 40

짧게 존속했지만 제1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유럽과 아메리카에 퍼뜨린 첫 대중적 국제 노동운동이었고, 혁명적 공산주의·온건 사회주의·아나키즘이라는 세 흐름의 이론적 바탕을 마련했다. 현대 연구는 1871~1872년 절정기의 회원을 약 15만 명으로 보지만, 1870년 파리 검사는 프랑스에만 80만 명이 있다고 주장했고 《타임스》는 1871년 유럽 전체에 250만 명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 힘은 개인 회원보다 가맹 노동조합에 있었다. 1889년 제2인터내셔널 창립 대회에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새 조직이 “바로 국제노동자협회의 자손”이라고 말했고, 레닌은 1919년 제1인터내셔널이 “사회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투쟁의 기초를 놓았다”고 썼다. 1 41

결과

제1인터내셔널은 정치 행동과 국가를 둘러싼 대립 끝에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이 조직적으로 갈라지는 자리가 되었다. 총평의회 쪽 협회는 1876년 해산했고,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은 1877년 베르비에 대회 뒤 사실상 활동을 멈췄다.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은 프랑스에서 독일의 국민 정당으로 옮겨 갔고, 1889년 창립된 제2인터내셔널이 그 원칙을 이어받았다.

연표와 지도

런던 헤이그 브뤼셀 파리 바젤 생티미에 로잔 제네바 바르셀로나 뉴욕 필라델피아 7 헤이그 1 세인트마틴 홀 4 브뤼셀 10 베르비에 5 바젤 8 생티미에 3 로잔 2 제네바 6 바르셀로나 9 필라델피아
  1. 11864.09.28영국프랑스
    세인트마틴 홀 창립 집회

    약 2,000명의 노동자가 모여 국제 노동자 조직을 세우고 중앙위원회를 런던에 두기로 결의했다.

  2. 1864.11영국
    「창립 선언」과 임시 규약

    마르크스가 쓴 두 기초 문서가 채택되었다.

  3. 1865.01.28영국미국
    링컨에게 보내는 글 전달

    링컨의 재선을 축하하는 글이 주영 미국 공사에게 전달되었다.

  4. 21866.09.03–08스위스
    제네바 대회

    첫 대회가 8시간 노동일을 협회의 요구로 삼았다.

  5. 31867.09.02–08스위스
    로잔 대회

    사회적 해방은 정치적 해방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결의했다.

  6. 41868.09.06–13벨기에
    브뤼셀 대회

    드 파프가 이끈 집산주의자들이 토지·광산·철도의 공유 결의를 통과시켰다.

  7. 1868.10.28스위스
    국제사회주의민주동맹 창립

    바쿠닌과 79명이 제네바에서 동맹을 세웠다.

  8. 1868.12.22영국
    총평의회, 동맹의 가입 거부

    두 번째 국제 조직은 협회를 해체한다며 동맹의 가입을 거부했다.

  9. 51869.09.06–12스위스
    바젤 대회

    토지 공유를 재확인했고 상속권 표결에서 바쿠닌 안과 총평의회 안이 모두 과반에 못 미쳤다.

  10. 1869.10.24영국아일랜드
    페니언 사면 요구 런던 시위

    약 20만 명의 노동자가 아일랜드 정치범 사면을 요구했다.

  11. 61870.06스페인
    스페인 지역 연맹 결성

    바르셀로나 노동자 대회가 인터내셔널 가입을 결의했다.

  12. 1870.07.23영국프랑스독일
    전쟁에 관한 첫 담화

    총평의회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왕조 전쟁으로 규정했다.

  13. 1870.09.09영국독일
    전쟁에 관한 두 번째 담화

    알자스·로렌 합병에 반대하고, 명예로운 강화와 프랑스 공화국 승인을 요구한 독일 노동자들의 성명을 실었다.

  14. 1871.04.25영국프랑스
    톨랭 제명 확인

    코뮌을 부인한 톨랭의 제명을 총평의회가 확인했다.

  15. 1871.06영국
    『프랑스 내전』 출간

    총평의회의 이름으로 쓴 코뮌 옹호문이 런던에서 나왔다.

  16. 1871.06.06프랑스
    파브르의 회람

    프랑스 외무장관이 유럽 열강에 인터내셔널 탄압을 요구했다.

  17. 1871.09.17–23영국
    런던 협의회

    노동계급이 독자 정당으로 스스로를 구성해야 한다는 정치 행동 결의를 채택했다.

  18. 1871.11.12스위스
    송빌리에 대회

    쥐라 연맹이 정식 출범해 런던 결의를 비난하는 회람을 냈다.

  19. 71872.09.02–07네덜란드
    헤이그 대회

    정치 행동 조항을 규약에 넣고 바쿠닌과 기욤을 제명했으며 총평의회를 뉴욕으로 옮겼다.

  20. 81872.09.15–16스위스
    생티미에 대회

    반권위주의 연맹들이 헤이그 결의를 거부하고 연대 협약을 맺었다.

  21. 1873.09스위스
    제네바의 두 대회

    두 인터내셔널이 같은 도시에서 따로 대회를 열었다.

  22. 1874.09.12영국
    엥겔스가 조르게에게 보낸 편지

    옛 인터내셔널이 제 시대를 다했다고 썼다.

  23. 1876.07.01스위스
    바쿠닌 사망

    바쿠닌이 베른에서 죽었다.

  24. 91876.07.15미국
    필라델피아 해산

    필라델피아 협의회가 총평의회를 폐지했다.

  25. 101877.09.06–08벨기에
    베르비에 대회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의 사실상 마지막 대회였다.

관련 인물 20명

총평의회와 마르크스파8명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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