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든 사나이
Man with a Movie Camera
지가 베르토프가 만든 1929년 소련 실험 다큐멘터리. 배우도 각본도 자막도 없이 모스크바, 키예프, 오데사의 하루를 찍고 잇댄 영화로, 키노-아이 이론의 정점이다. 개봉 때는 “무의미한 카메라 난동”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나 지금은 역대 최고의 다큐멘터리로 꼽힌다.
상세
줄거리가 없는 영화라고?
그렇다. 영화 첫머리부터 이렇게 선언한다. 자막 없이, 시나리오 없이, 연극 없이, 배우와 세트 없이 만든 실험이며, 연극과 문학의 언어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영화만의 국제어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보다 보면 하루가 흘러간다. 도시가 깨어나고, 전차와 사람이 거리를 메우고, 공장이 돌아가고, 부부가 혼인하고 이혼하고, 여인이 아이를 낳고, 장례 행렬이 지나고, 운동 경기가 열린다.
주인공은 카메라다. 베르토프의 형제 미하일 카우프만이 카메라를 메고 온 도시를 돌아다닌다. 산더미 같은 카메라 위에서 자기 카메라를 세우는 촬영기사가 겹쳐 나오고, 맥주잔 속에 들어앉은 그도 보인다. 삼각대 위 카메라가 혼자 일어서 걸어 나가기도 한다. 베르토프의 아내 옐리자베타 스빌로바가 편집대에서 필름을 자르는 모습이 그대로 영화의 일부가 되고, 관객은 극장에 앉아 자기가 보는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함께 본다.
무엇을 하려 했나?
베르토프는 극영화를 “대중의 새로운 아편”이라고 공격했고, 키노키 운동의 동료들과 함께 비다큐멘터리 영화를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카메라가 인간의 눈이 놓치는 것까지 잡을 수 있으며, 그 조각들을 편집으로 재조립할 때 진실이 드러난다고 믿었다. 키노-아이 이론의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전작 《세계의 6분의 1》이 자막을 지나치게 쓴다는 비판을 듣고 내놓은 대답이 이 영화다.
이중 노출, 빠른 동작과 느린 동작, 정지 화면, 분할 화면, 기운 앵글, 극단적 클로즈업, 역재생, 스톱모션까지 당시 알려진 거의 모든 기법을 시험했고, 몇몇은 직접 개척했다. 당시 평균 장편의 네 배가 넘는 속도로 약 1775컷이 지나간다. 평론가 짐 호버먼은 이 도시 교향곡을 영화판 『율리시스』라 불렀고, 편집 밀도가 가장 높은 영화의 유력한 후보라고 했다. 제작은 전우크라이나 사진영화국(VUFKU)이 맡았다.
그때는 왜 욕을 먹었나?
형식이 내용을 집어삼켰다는 것이었다. 베르토프 본인이 공격한 극영화 진영은 물론이고, 같은 몽타주 영화인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도 “무의미한 카메라 난동”이라고 비웃었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폴 로사는 “영국에서 베르토프는 농담거리였다”고 회상했고, 《뉴욕 타임스》 평자는 사람의 눈이 무언가를 붙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독이 고려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영화가 배우를 쓰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과 달리 카메라맨의 몸짓이나 옷 입는 여인처럼 연출된 장면이 일부 있다는 점도 흠으로 지적된다.
어떻게 복권되었나?
1970년대 초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가 핵심 소장작으로 뽑았고, 2012년 《사이트 앤드 사운드》 평론가 투표에서 역대 8위(2022년 9위), 2014년 같은 잡지 투표에서 역대 최고의 다큐멘터리로 뽑혔다. 2021년에는 우크라이나 영화 100선에서 3위에 올랐다. 무성영화라 음악이 자유로워서 얼로이 오케스트라(1995), 시네마틱 오케스트라(2002), 마이클 나이먼(2002) 등 십여 가지 음악이 입혀졌고, 2015년 네덜란드 EYE 필름 인스티튜트가 유일한 완전판을 바탕으로 복원했다.
베르토프 자신은 끝내 이 성공을 보지 못했다. 1943년 말 만든 영화는 3등급 판정을 받아 아주 좁게 상영되었고, 그 뒤의 기획은 모두 거절되었다. 1944년부터 죽을 때까지 뉴스 영화 《노보스티 드냐》의 편집을 맡았고, 1954년 2월 12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