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법전
Napoleonic Code
1804년 3월 21일 시행된 프랑스 민법전(Code civil des Français)의 통칭. 나폴레옹이 1800년 꾸린 법률가 위원회가 만들었고, 지방마다 달랐던 관습법과 봉건적 특권을 하나의 성문법으로 바꾸었다. 소유권을 가장 절대적인 권리로 정하고 상속 재산을 자식들에게 똑같이 나누게 했으며, 가정에서는 남편의 우위를 못 박았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 민법의 본보기가 되었고, 여러 번 고쳐진 채 지금도 프랑스에서 쓰인다.
상세
나폴레옹 법전 이전 프랑스에는 하나로 된 법이 없었다. 법은 주로 지방의 관습이었고, 그 가운데 파리 관습법이 가장 유명했다. 왕과 영주들이 내준 면제와 특권, 특허장도 따로 있었다. 대혁명은 봉건제의 마지막 흔적을 없애고, 온 나라에 공통된 하나의 민법전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국민공회는 1793년 캉바세레스에게 초안 작성을 맡겼지만, 그가 1793년, 1794년, 1796년에 낸 초안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렝고 전투로 권력을 굳힌 나폴레옹은 1800년 8월 12일 말빌, 트롱셰, 비고 드 프레아므뇌, 포르탈리스로 위원회를 꾸렸다. 나폴레옹은 위원회 본회의의 많은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1801년 12월 입법원이 초안을 142대 139로 부결하자, 그는 모든 법안을 멈추고 의원들을 몰아붙여 다수를 얻어 냈다. 법전은 1804년 3월 21일 시행되었다. 사람, 재산, 재산을 얻는 방법의 세 편으로 짜였고, 민사 절차는 1806년 따로 법전이 되었다.
법전은 공포되고 공표된 법만 적용하게 해 비밀 법을 막고, 소급 입법을 금지했다. 판사가 법이 모자란다는 핑계로 재판을 거부하는 것도, 법률처럼 일반 규칙을 만드는 것도 금지했다. 제544조는 소유권을 「법률이나 규칙이 금지한 방식으로 쓰지만 않으면 물건을 가장 절대적인 방식으로 누리고 처분할 권리」로 정했다. 노동의 고용은 물건의 임대와 같은 「임대차」로 다루어져 당사자의 자유로운 계약에 맡겨졌다. 가정에서는 남편이 아내와 자식 위에 섰고, 결혼한 여성은 미성년자처럼 다루어졌으며, 합의 이혼은 1804년에 없어졌다. 상속 재산은 모든 자식에게 똑같이 나누어야 해서, 집안의 땅은 대마다 쪼개졌다.
법전은 유럽 전역을 겨냥한 첫 근대 법전이었다. 1819년 양시칠리아 왕국, 1837년 네덜란드, 1864년 루마니아, 1865년 이탈리아, 1867년 포르투갈, 1889년 에스파냐의 법전이 이를 본떴고, 루이지애나(1808), 아이티(1826), 로어캐나다(지금의 퀘벡, 1866)와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도 따랐다. 라인 지방에서 쓰인 경험은 독일 민법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에서는 20세기에 크게 고쳐져, 1970년 가장 자리가 없어지고 1972년 혼외자도 같은 권리를 얻었으며 1975년 합의 이혼이 다시 쉬워졌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이 법전을 두 번 비꼬았다. 한 번은 루이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지닌 것이 「“친부 조사는 금지된다(La recherche de la paternité est interdite)”고 명한 나폴레옹 법전 덕분」이라는 대목으로, 그가 나폴레옹 집안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을 겨냥했다. 또 한 번은 분할지 농민의 몰락을 말하며 「나폴레옹 법전은 이제 강제 집행과 경매와 강제 매각의 법전일 뿐이다」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