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1–1991

민족문제(에리트레아)

National question (Eritrea)

에티오피아 혁명(1974)이 토지·계급 문제를 다루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자기결정권 문제를 가리킨다. 에리트레아는 1952년 UN 결의 390A(V)로 에티오피아와 연방을 이뤘고, 1962년 하일레 셀라시에가 연방을 일방적으로 해체·병합하자 무장투쟁이 시작됐다. 데르그는 1974년 말 정전과 정치적 해결을 포기하고 군사적 진압으로 돌아섰다.

상세

식민지에서 연방으로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식민지(1880년대–1941), 영국 군정(1941–1951), 연방(1952), 병합(1962)을 거쳤다. 1950년 12월 UN 총회 결의 390A(V)에 따라 에리트레아는 자체 행정·사법·기 및 경찰·지방행정·과세를 갖는 연방 주가 됐으나 외교·국방·재정·교통은 연방정부가 장악했고, 결의는 에리트레아인의 독립 요구를 무시했다. 1950년대에는 연방주의(Unionist) 세력이 에리트레아 의회에서 득세하며 자치가 점차 축소됐다.

무장투쟁의 개시

1958년 에리트레아 해방운동(ELM)이 학생·전문직·지식인 중심으로 결성됐고, 1961년 카이로에서 망명 에리트레아인들이 이드리스 무함마드 아담의 지도로 에리트레아 해방전선(ELF)을 결성했다. 1961년 9월 1일 하미드 이드리스 아와테와 동료들이 아달 전투에서 에티오피아 육군·경찰과 교전하며 무장투쟁이 시작됐다. 1962년 황제는 에리트레아 의회를 일방적으로 해산하고 병합했다.

1975년 토지개혁과 계속된 전쟁

이 민족문제의 핵심은 1975년 농촌 토지 국유화와 별개로 에리트레아 전쟁이 계속됐다는 구분이다. 에리트레아는 9개 공인 민족집단이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다민족 국가로, 고지대 기독교도와 저지대 무슬림이 갈라져 있었다. ELF의 초기 네 개 구역사령부는 저지대 무슬림 중심이었고 기독교도들은 무슬림 지배를 우려해 초기 가담이 적었으며, 이후 고지대 기독교도 자원자가 유입되며 제5사령부가 열렸고 내부 갈등과 종파 폭력으로 분열됐다. 1970년 ELF 내분으로 이사이아스 아프웨르키가 이끄는 기독교 전투원 등을 포함한 세 그룹이 이탈해 인민해방군(PLF)을 결성했고, 1973년 8월 두 그룹이 통합돼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이 됐다.

데르그의 정책 전환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 폐위 후 데르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군사 정권이 됐다. 1974년 6월부터 11월 중순까지 에리트레아계 장군 아만 안돔의 통제 아래 정전이 선언되어 정치적 해결이 모색됐으나 군사적·정치적 해결을 둘러싼 지도부 갈등이 있었고, 1974년 11월 24일 아만 암살로 정치적 해결 추구가 끝났다. 1974년 말까지 아스마라에서 50명 이상이 군부에 의해 살해됐다. 1975년 데르그는 10만 명 규모의 농민군을 에리트레아 진압에 투입했으나 국경을 넘은 후 대부분 궤멸됐고 이후 수년간 연이어 패배했다. 인구를 무력만으로 통제할 수 없어 공포 조성 임무가 파견됐고, 셰에브·히르기고·엘라바레드·옴하지르 등 주로 무슬림 지역에서 학살이 있었고 기독교 지역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인종·종교·계급을 가리지 않은 민간인 대량 학살은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던 많은 에리트레아인들이 탈출하거나 전선에 합류하는 계기가 됐다.

국제적 조건과 전선의 우세

이스라엘은 1960년대 초부터 ELF에 반대하는 작전을 지원했고 카운터인서전시 부대를 훈련시켰으며, 에리트레아 총독 아스라테 메드힌 카사에게는 이스라엘 군사무관이 고문으로 있었고 데카마레의 에티오피아 군사훈련학교는 이스라엘 대령이 책임졌다. 미국은 1960년대~1970년대 초 하일레 셀라시에 정권의 진압을 지원했고 아스마라·마사와에 군사고문을 두었으나 에티오피아 혁명 후 지원을 철회했다. 이스라엘-에티오피아 협력은 에리트레아 반군이 반시온주의 수사를 쓰고 아랍·이슬람권의 물질적 지원을 동원하는 계기가 됐다. 이라크·시리아·리비아·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등 다수 아랍 국가·기구가 ELF와 EPLF에 상이한 수준의 지원을 제공했고, 수단은 시기별 편차가 컸으며 소말리아는 물질적 지원이 거의 무의미한 수준이었다. 1975~1977년 ELF와 EPLF는 에티오피아군보다 병력이 많았고 나크파 포위전에서 수비대를 제압했으며, 아스마라·마사와·아사브·바렌투를 제외한 전역을 장악했다. 1977년 EPLF는 ELF를 축출하며 제1의 해방조직으로 부상했고, 오가덴 전쟁이 끝난 직후 쿠바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군이 에리트레아로 전환해 해방 지역 상당부를 되찾았다.

소련·쿠바 지원과 반격

1974년 혁명 후 데르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국가를 세우고 소련과 다른 공산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에리트레아와 싸웠다. 소련·쿠바는 오가덴 전쟁 후 병력·무기·훈련·조언·계획을 제공했고 소련 지원은 1970년대 말 주요 도시 탈환에 결정적이었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반미 노선을 표방한 EPLF에게 특히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1978년 5월 에티오피아 공군은 새로 완성된 티그라이 메켈레 비행장을 이용해 에리트레아 내 ELF·EPLF 거점에 대한 포화 폭격을 시작했고 도시·마을·가축도 공격됐다. 7월 지상공세로 몇 주 만에 남·중부 에리트레아의 도시들이 탈환됐고, 1978년 11월 두 번째 공세는 더 큰 병력과 대규모 장갑전력을 투입했으며 11월 25~26일 엘라보레드에서 이틀간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EPLF는 큰 타격을 입고 케렌과 인근 도시를 버리고 사헬 산악으로 후퇴('전략적 후퇴')했으며, 새 해방구에서 철수하기를 거부하고 계속 교전한 ELF는 군사적 패배를 자초했다.

해방과 독립

1988년 아파베트 전투에서 EPLF가 아파베트와 주변 지역, 북동부 에티오피아군 사령부를 점령해 에티오피아군이 테세네이·바렌투·아고르다트 수비대에서 철수했고 서부·북부 전역이 EPLF 손에 들어갔다. 1990년 2월 EPLF는 펜킬 작전으로 마사와를 점령했고, 1991년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이 수도로 진격해 멩기스투를 축출했으며, 아스마라 수비대가 붕괴해 EPLF가 5월 24일 아스마라에 입성하고 5월 25일 아사브에서 마지막 전투로 정부 잔여세력을 격파했다. 1991년 7월 1~5일 아디스아바바 회의에서 EPLF는 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해 에티오피아 과도정부와 에리트레아의 지위를 협상했고,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의 독립 국민투표 실시 권리를 인정했다. 국민투표는 1993년 4월 23~25일 실시되어 99.83%가 독립에 찬성했고(투표율 98% 초과), UNOVER가 결의 47/114(1992.12.16)에 따라 투표의 자유·공정·공평을 검증했으며, 1993년 4월 27일 독립이 선언되고 1993년 5월 28일 UN에 182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혁명사에서의 위치

에티오피아 혁명기 민간 좌파 조직들과 달리 에리트레아 민족해방운동은 에티오피아 국가 개조가 아니라 에리트레아의 자기결정권과 분리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데르그와 타협 불가능한 대립을 이뤘다. 혁명이 토지·계급 문제를 다루는 동안에도 이 민족문제는 미해결로 남아 약 30년 전쟁(1961~1991)을 낳았다.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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