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광부노조 (영국)
National Union of Mineworkers (UK)
영국 탄광 노동자의 노동조합. 1945년 영국 광부연맹을 대신해 세워졌다. 1972년과 1974년 전국 파업에서 이겨 1974년 히스 보수당 정부의 몰락에 큰 몫을 했고, 전후 영국에서 가장 강한 노조로 꼽혔다. 1984~1985년 아서 스카길 위원장 아래 탄광 폐쇄에 맞선 파업에서 패배한 뒤 분열과 탄광 폐쇄로 작아졌다. 약 17만 명이던 조합원은 2023년 활동 조합원 196명으로 줄었다. 약칭은 NUM이며, 같은 약칭을 쓰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조와는 별개다.
상세
어디서 나온 조직인가?
앞선 조직은 1889년 웨일스 뉴포트의 회의에서 생긴 영국 광부연맹(MFGB)이다. 지역 노조들의 연합체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전국 조직을 이루었고 전성기에는 거의 100만 명을 대표했다. 광부연맹은 1926년 임금 삭감과 노동 시간 연장에 맞서 “임금은 한 푼도 깎지 말고 시간은 일 분도 늘리지 말라”고 외쳤고, 이를 지지하는 총파업이 그해 5월 4일부터 12일까지 벌어졌다. 총파업이 끝난 뒤에도 광부들은 직장 폐쇄 아래 더 버텼고 결국 졌다.
1945년 1월 광부연맹은 전국광부노조로 바뀌었다. 2년 뒤 노동당 정부가 탄광 958곳을 국유화했다. 이후의 고용주는 정부가 세운 국영 석탄공사였고, 이 때문에 탄광의 임금 분쟁은 곧 정부와의 분쟁이 되었다. 탄광 대부분에서 조합원이 아닌 사람을 쓰면 집단 행동이 벌어져, 공식 정책은 아니었어도 사실상 조합원만 고용하는 “클로즈드 숍”이었다.
어떻게 움직이는 조직이었나?
전국 조직 아래 각 탄전이 자기 위원장과 본부를 둔 지역 조직으로 상당한 자율성을 가졌다. 지역의 성향은 크게 달랐다. 스코틀랜드, 사우스웨일스, 켄트는 전투적이고 공산당원 간부도 있었던 반면, 미들랜즈는 훨씬 온건했다. 스코틀랜드 지도자 믹 맥개히는 공산당원으로 1972년 전국 부위원장이 되었다. 이 지역 차이는 뒤에 1984~1985년 파업을 갈라놓는다.
전국 파업에는 처음에 조합원 투표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해 거의 불가능했다. 1960년대 윌슨 노동당 정부 아래 수백 개 탄광이 문을 닫을 때 지도부는 별로 저항하지 않았고, 1969년 지상 노동자 임금을 둘러싼 비공식 파업이 번진 뒤 문턱이 55%로 낮아졌다. 그 뒤로 더 전투적인 후보들이 지도부에 뽑혔다.
왜 1970년대에 가장 강한 노조로 불렸나?
1960년대에 광부 임금은 다른 산업에 뒤처졌다. 1972년 1월 9일 시작된 전국 파업은 1926년 이후 처음의 공식 파업이었다. 광부들은 탄광만이 아니라 연료를 나르는 곳까지 막았다. 2월 버밍엄의 솔틀리 코크스 저장소 앞에 다른 산업 노동자까지 합쳐 1만 5,000명 넘게 모이자 경찰 서장이 “공공의 안전을 위해”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이 “솔틀리 게이트 전투”가 승리를 굳혔고, 파업은 2월 28일 임금 인상을 받아들이며 끝났다.
1973년 말 물가 상승 속에 다시 잔업을 거부하자, 전기를 아끼려 히스 정부는 1974년 1월 1일부터 상업용 전기를 주 3일로 제한했다. 노조가 전국 파업을 결의하자 히스는 조기 총선을 치렀다가 졌고, 윌슨의 새 노동당 정부는 임금 요구를 받아들였다. 노조는 힘을 증명했으나 자신들을 특별 대우하라는 요구에 대한 반감도 함께 샀고, 보수당은 복수를 준비했다.
1984년 이후 왜 무너졌나?
1981년 스카길이 위원장이 되었을 때 조합원은 약 17만 명이었다. 1984–85년 영국 광부 파업은 전국 투표 없이 진행되어 노조 내부를 쪼갰고, 합의 없는 복귀로 끝났다. 노팅엄셔와 사우스더비셔 조합원은 1985년 민주광원노조(UDM)를 만들어 떨어져 나갔다. 스카길을 따르는 쪽은 이를 파업 파괴자의 노조로 여겼고, 뒤에 드러난 바로는 그 간부들이 장관들에게 광부의 힘을 줄일 방법을 조언했다. 석탄공사는 조합원 자격을 고용 조건에서 뺐고, 이로써 클로즈드 숍도 끝났다.
노조는 1990년대 초까지도 힘이 남아 있었다. 정부가 1992년 대규모 폐쇄를 발표하자 노조는 파업 투표를 통과시키고 소송으로 법원의 긴급 금지 명령을 얻어 냈지만, 1993년 중반부터 탄광은 닫혔다. 1994년 남은 15개 탄광이 민영화되었고, 마지막 심부 탄광은 2015년 사라졌다. 2011년 1,855명이던 조합원은 2023년 활동 조합원 196명이 되었다. 2012년 법정에서는 조합비의 상당 부분이 런던 바비칸의 아파트 임대 등 스카길의 비용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나왔다.
노동운동사에서는 무엇을 남겼나?
이 노조의 역사는 전후 영국 노동운동의 흥망과 겹친다. 조직화된 노동자가 국유 산업의 고용주인 정부를 직접 흔들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바로 그 힘 때문에 대처주의의 표적이 되었다.
정치에서도 흔적을 남겼다. 노조는 노동당을 강하게 지지하며 탄광 지역 의원들을 후원했지만,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에는 1971년 대회에서 만장일치로 반대했고, 1975년 국민투표에서는 찬성 운동을 벌인 후원 의원들과 충돌했다. 1984~1985년의 “광부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과의 연대는 뒤에 이어져, 노조의 사우스웨일스 조직은 1985년 런던 성소수자 행진에 함께했고, 그해 노동당 대회에서 노조의 일괄 찬성 표가 동성애자 권리 결의를 통과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