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 1920

니콜라옙스크 사건

Nikolayevsk incident

1920년 아무르강 하구의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에서 야코프 트랴피친이 이끈 파르티잔 부대가 일본 수비대와 거류민, 그리고 수천 명의 러시아 주민을 죽이고 도시를 불태운 사건. 좁게는 3월 일본군과의 전투 뒤인 5월 하순 일본인 포로와 남은 수감자를 처형한 일을 가리키며, 일본은 이 사건을 북사할린 점령의 명분으로 삼았다.

상세

1918년 9월부터 일본군이 주둔한 니콜라옙스크에는 1920년 초 일본 제14사단의 수비대 350명과 일본 민간인 약 450명, 백군 약 300명이 있었다. 1920년 1월 트랴피친의 파르티잔(러시아어 문헌은 3천 명)이 도시를 포위했고, 외곽의 츠니라흐 요새를 차지해 포격을 시작했다. 2월 28일 휴전에 따라 파르티잔이 입성했지만, 곧 미리 만든 명단에 따라 부유층과 유력자를 체포하고 처형하기 시작했다. 3월 12일 새벽 일본군이 파르티잔 지휘부를 기습해 전투가 벌어졌고, 15일 남은 일본군이 항복할 때까지 수비대 대부분이 전사했다. 5월 하순 일본 원군이 다가오자 트랴피친의 지휘부는 주민을 케르비로 소개하고, 수감되어 있던 일본인 포로 129명과 수감자들을 처형한 뒤 도시와 요새를 폭파하고 불태웠다. 러시아어 문헌에 따르면 주거용 건물 1,165채 가운데 35채만 남았다. 7월 7일 트랴피친과 참모들은 케르비에서 체포되어 9일 총살되었다.

희생자 수는 지금도 엇갈린다. 영어 문헌이 인용한 사할린주 당국의 추산은 굶주림과 궁핍으로 죽은 사람을 포함해 지역 전체에서 적어도 1만~1만 5천 명이 사라졌다는 것이고, 재판 판결과 볼셰비키 문서는 주민의 절반이 죽었다고 적었다. 당시 일본은 일본인 희생을 부풀리고 수천 명의 러시아인 희생은 언급하지 않아, 이 사건은 오랫동안 「일본인 학살」로 잘못 알려졌다.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소련은 사건의 본질을 제네바 협약을 어긴 일본인 포로 처형으로 보고, 모든 책임을 「아나키스트」로 규정된 트랴피친 개인에게 돌렸다. 오늘날 여러 역사가는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수천 명을 죽인 이 일을 그 전쟁에서 유례가 없는 잔혹 행위로 본다. 일본은 사건을 이유로 북사할린을 점령해 1925년까지 머물렀는데, 러시아어 문헌은 점령이 5월의 처형보다 앞선 1920년 4월 22일에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러시아어)
  3. 위키백과 (영문)
  4. 위키백과 (러시아어)
  5.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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