Пермская операция (1918—1919) · 1918.11.29–1919.01.28

페름 작전 (1918–1919)

Perm operation (1918–1919)

1918년 11월 29일부터 1919년 1월 말까지 우랄 서쪽 페름 방면에서 벌어진 싸움. 아나톨리 페펠랴예프의 중앙시베리아 제1군단을 앞세운 백군 시베리아군이 붉은 군대 제3군을 무너뜨리고 12월 21일 쿤구르, 12월 24~25일 페름을 차지했으며, 1월 19일 시작된 붉은 군대의 반격은 페름을 되찾지 못하고 멈추었다. 패배를 조사한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당 조사위원회가 「페름 파국」이라고 부른 뒤 이 이름이 널리 쓰였다.

상세

1918년 11월 붉은 군대 제3군은 400킬로미터의 전선을 맡고 있었으나 식량과 겨울옷, 신발이 모자랐고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에 연료와 수송 수단도 부족했다. 백군 예카테린부르크 집단은 붉은 군대의 공세보다 하루 앞선 11월 29일 공격에 나서 제3군의 전선을 뚫었고, 12월 21일 쿤구르를, 24~25일 밤 페름을 차지했다(영어 위키백과는 12월 24일). 붉은 군대는 페름을 싸우지 않고 버렸고, 모토빌리하의 페름 대포 공장과 많은 탄약, 식량이 백군 손에 넘어갔으며, 현지에서 모은 붉은 군대 부대는 무기를 받자마자 달아나거나 적에게 넘어갔다. 영어 위키백과는 붉은 군대의 손실을 1만 8천 명으로 적는다. 12월 24일 콜차크는 예카테린부르크 집단과 프리카마 집단을 합쳐 라돌라 가이다에게 새 시베리아군을 맡겼지만, 남쪽에서 붉은 군대 제5군이 12월 31일 우파를 되찾자 1919년 1월 6일 시베리아군에 방어로 돌아서라고 명령했다. 붉은 군대 제2군과 제3군은 1월 19일과 21일 따로따로 반격에 나섰으나 28일까지 10~40킬로미터를 나아가는 데 그쳤다.

패배 직후 총사령관 이오아킴 바체티스는 동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전원을 재판에 넘기라고 명령했고, 평의회 위원 세르게이 구세프는 거꾸로 바체티스와 트로츠키의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를 중앙위원회에 고발했다. 중앙위원회와 국방회의는 1919년 1월 1일 스탈린과 제르진스키로 당 조사위원회를 꾸렸고, 두 사람은 1월 5일 뱌트카에 와서 제3군의 보급 실패와 후방의 붕괴, 제3군 참모부에 숨어든 백군 첩자들을 원인으로 들었다. 1월 말 레닌에게 낸 보고서는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가 제2군과 제3군을 조율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트로츠키의 기관을 국방회의가 감독하자고 제안했다. 트로츠키 자신은 1919년 1월 7일 쿠르스크에서 쓴 글에서 “동부전선에서 우리는 최근 큰 실패 하나, 곧 페름의 상실과 큰 성공 하나, 곧 우파의 점령을 겪었다. 전체적으로 동부전선의 형세는 우리에게 유리하다.”라고 썼다. 1930~1940년대 소련 역사서는 스탈린의 역할을 부풀려 이 패배를 동부전선 전체의 「페름 파국」으로 그렸지만, 뒤에 『대소비에트 백과사전』은 스탈린이 도착했을 때 백군의 페름 작전은 이미 멈추고 우파 쪽으로 재편되고 있었다고 바로잡았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러시아어)
  3. 위키백과 (영문)
  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