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피야티
Pripyat
소련 우크라이나 키예프주에 1970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노동자의 주거도시로 건설된 계획도시로,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참사 이후 36시간이 지난 4월 27일 약 5만 명 전 주민이 대피했다. 소련의 9번째 아토모그라드(원자력 도시)로서 '평화로운 원자'의 선전 모델이었으나, 사고 이후 체제 은폐의 상징이자 유령 도시로 남았다.
상세
건설과 성장
프리피야티는 1970년 2월 4일 정착지로 세워져 1972년 첫 주택이 들어섰고, 1979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결정으로 도시 지위를 얻었다. 건설의 직접적 이유는 유럽에서 가장 큰 원자력발전소 가운데 하나인 체르노빌 원전이었고, 발전소는 이 도시의 도시형성 기업이 되었다. 이 때문에 프리피야티는 소련에서 아홉 번째 '아토모그라드'(원자력 도시)로 불렸다. 도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내내 대규모 건설 현장이었으며, 도시 전체가 화려한 조명과 장식용 도자기로 장식된 완충지대 계획도시로 설계됐다. 전소련 콤소몰 건설 현장으로 지정되고 각지에서 젊은 건설 인력이 몰려들었으며, 인구는 해마다 1,500명 넘게 늘어 1,500여 명 중 약 800명이 신생아였다. 대피 전 마지막 조사인 1985년 11월 기준으로 인구는 47,500명, 민족 구성은 27개 민족이었다. 도시 설계 인구는 75,000~85,000명이었다.
'평화로운 원자'의 모델 도시
프리피야티는 소련이 원자력발전소를 다른 발전소보다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다른 군사적 중요 도시와 달리 출입이 제한되지 않았다. 원자력발전소는 소련 공학의 성과이자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이용으로 선전됐고, 당시 '평화로운 원자'(러시아어: мирный атом)라는 구호가 유행했다. 원래 계획은 발전소를 키이우에서 불과 25km 떨어진 곳에 짓는 것이었으나,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등이 너무 가깝다는 우려를 제기해 발전소와 프리피야티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도시 건설에는 니콜라이 오스토젠코가 이끈 모스크바 건축가 그룹이 개발한 '삼각형' 배치 원칙이 적용됐고, 키이우 건축가들이 수정을 더해 최종 승인됐다. 이 배치는 당시로서는 독특했지만 동시에 쿠르차토프, 세미팔라틴스크-21, 볼고돈스크, 톨리야티 등 다른 도시 건설에도 쓰였다. 프리피야티는 거리와 대로가 등각으로 배치되어 교통 정체를 피하도록 계획됐고, 주거동 사이의 여유 공간과 조망을 중시했다. 도시 중심에는 시 소비에트 청사, 영화관 '프로메테우스', 문화궁전 '에네르게티크', 호텔 '폴레시예' 등이 자리했다. 거리 이름은 레닌 대로, 민족우호 거리, 스탈린그라드 영웅 거리처럼 소련 시대의 관례를 따랐고, 우크라이나 시인 레샤 우크라인카의 이름을 딴 거리와 원자력 과학자 쿠르차토프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었다.
체르노빌 참사와 대피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전 4호기 폭발로 프리피야티는 방사능 오염 지역이 됐다. 대피 결정은 셰르비나가 이끄는 정부위원회가 내렸고, 대피 방송은 사고 발생 36시간 뒤인 4월 27일 오후 1시 10분에 지역 라디오로 전달됐다. 주민들은 1,225대의 버스와 250대의 트럭으로 같은 날 오후 5시까지 소개됐으며, 도시의 전 주민이 대피했다. 이는 소련 당국이 사고 초기에 정보를 축소하고 대피를 늦춘 사례로 기록된다. 프리피야티를 대신할 도시로 원전에서 50km 떨어진 곳에 슬라부티치가 세워졌다.
폐허가 된 도시
프리피야티는 지금도 체르노빌 제외구역 안에 있다. 행정적으로는 처음 이반키우 라이온에 속했다가 2020년부터 키이우주 비슈호로드 라이온에 들어갔다. 제염 작업으로 방사능 준위는 크게 낮아졌고, 오늘날 프리피야티는 야외 박물관 같은 도시이자 산업 관광과 연구의 대상이다. 다만 불법으로 들어오는 이른바 '스토커'들도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전소와 주변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져 같은 날 러시아군이 장악했고, 3월 31일 우크라이나 통제로 돌아왔다.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founding date (4 Feb 1970), population (~47,500), evacuation date and timing (27 April 1986, 13:10 announcement, 36 hours after accident), atomograd status (ninth in USSR)
- 위키백과 (영문) city proclaimed in 1979, population 49,360, evacuation details, Slavutych as replacement city
- latimes.com Soviet admission that evacuation was delayed 36+ hours; Shcherbina's news conference confirming evacuation began 2 p.m. April 27
- chernobylgallery.com timeline of events including bus arrivals at midnight and evacuation order on 27 April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