Слуцкае паўстанне · 1920

슬루츠크 봉기

Slutsk uprising

1920년 11~12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끝나갈 무렵 슬루츠크 일대에서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에 충성하는 비정규 부대가 붉은 군대에 맞서 독립 벨라루스를 세우려 한 무장 시도. 「슬루츠크 무장 투쟁」이라고도 한다. 리가 예비 강화가 슬루츠크군을 소비에트 쪽에 넘기자 지역 대회가 봉기를 결정했고, 반군은 12월 28일 새 국경을 넘어 무기를 내려놓았다.

상세

1920년 10월 12일 리가에서 맺은 예비 강화는 오늘날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땅을 둘로 나누는 국경을 정했고, 그 경계선에 따라 슬루츠크군은 벨로루시 소비에트 공화국에 넘어가게 되었다. 회담에는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대표도, 소비에트 벨로루시 대표도 초청되지 않았다. 그해 가을 민스크현에서는 벨라루스 민족운동이 퍼져, 어떤 볼로스트 주민들은 모스크바가 임명한 혁명위원회를 거부했다. 슬루츠크에는 1918년 파벨 자브리트의 벨라루스 민족위원회가 세워졌고, 독립 운동의 지지자 대부분은 벨라루스 사회혁명당 슬루츠크 위원회에 모였다. 러시아어 출처는 봉기의 주력이 전시 공산주의에 저항한 농민이었고 지역 지식인과 소귀족이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폴란드군이 물러가며 고장 난 소총 500정을 남겼고, 억류된 부와크-바와호비치 부대의 잔존 병력이 소총과 기관총, 탄약을 넘겼다. 11월 15일 슬루츠크와 15개 볼로스트의 대의원 105~132명이 모인 대회는 이 일대에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권력을 선포하고 「볼셰비키 점령」에 항의했으며, 사회혁명당원 블라디미르 프라쿨레비치를 의장으로 17명의 슬루츠크 라다를 뽑았다. 라다는 16~50세 남성의 총동원을 선포하고 사흘 만에 제1슬루츠크 연대와 제2그로조보 연대로 슬루츠크 여단을 꾸렸다. 무기와 자금을 폴란드군 사령부가 댔는지, 부와크-바와호비치만이 보잘것없는 도움을 주었는지는 벨라루스 역사가들 사이에서 엇갈린다.

폴란드군은 11월 24일 슬루츠크를 떠났고 여단도 서쪽 세메제보로 물러났다. 전투는 11월 27일 시작되어 반군이 바실치치 부근에서 붉은 군대를 물리쳤지만, 붉은 군대 제8·17사단이 들어오자 12월 7일 세메제보를 잃었다. 반군은 12일 많은 포탄과 함께 세메제보를 되찾고 17일 비즈나를 차지했으나, 19일 비즈나에서, 20일 세메제보에서 물러났다. 무기와 장교, 식량이 모자랐고 발진티푸스가 돌았다. 12월 28일 탄약이 떨어진 여단은 새 국경이 된 모로치강을 건너 무기를 내려놓고 폴란드에 억류되었다. 평가는 엇갈린다. 러시아어 출처가 인용한 벨라루스 학계의 한 견해는 폴란드군이 철수하는 땅에 아직 붉은 군대도 소비에트 권력도 없었으므로 봉기라 할 수 없다고 보고, 지휘관이었던 안톤 소콜-쿠틸롭스키도 「봉기는 없었다」고 썼다. 반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벨라루스 인민전선 등은 11월 27일을 「영웅의 날」로 기념해 왔으나, 루카셴코 정부는 이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1948년 독일 미텐발트에 망명자들이 기념비를 세웠고, 바실 비카우의 소설 『검은 화전 위에서』와 1995년의 영화가 이 사건을 다루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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