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03–1921.03

벨라루스 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벨로루시

서부 전선의 후방이던 벨라루스에서 1918년 독일 점령 아래 선포된 벨라루스 인민공화국과 1919년의 소비에트 벨로루시는 어떻게 경쟁했고, 왜 1921년 리가 조약은 이 땅을 폴란드와 소비에트 사이에 나누었나?

1917년 벨라루스 민족운동이 일어났지만 민스크의 실권은 서부 전선의 볼셰비키가 쥐었고, 12월 전벨라루스 대회는 해산되었다. 1918년 3월 독일 점령 아래 라다가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고, 독일군이 물러난 1919년 1월에는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어 곧 리투아니아와 합쳐 리트벨이 되었다. 폴란드의 진격과 반격 속에 라다는 갈라졌고, 1920년 소비에트 벨로루시가 다시 선포된 뒤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서벨라루스는 폴란드에 넘어갔다.

벨라루스러시아1917년: 서부 전선의 후방과 민족운동

1915년 8~9월 러시아군의 대퇴각으로 그로드노현과 빌뉴스현 대부분이 독일군에 점령되었고, 전선은 민스크 서쪽 약 100킬로미터에서 굳었다. 1916년 봄 나로치 호수 공세와 여름 바라노비치 부근의 공격도 전선을 움직이지 못했다. 오늘날의 벨라루스 땅은 이렇게 러시아 서부 전선의 후방이자 병영이 되었다. 벨라루스 민족운동의 뿌리는 그보다 앞선다. 1902~1903년 결성된 벨라루스 혁명 흐라마다는 곧 벨라루스 사회주의 흐라마다로 이름을 바꾸었고, 빌뉴스에 의회를 두는 러시아 연방 안의 정치적 자치를 내걸었다. 1906년부터 1915년까지 빌뉴스에서 나온 신문 『나샤 니바』는 민족 엘리트를 길러 낸 산실이었다. 흐라마다 창립자의 한 사람인 안톤 루츠케비치는 형 이반과 함께 이 출판 사업을 이끌었고, 1915년 독일 점령 아래의 빌뉴스에서는 전쟁 피해자 구호 단체를 앞세워 비밀 조직 「벨라루스 민중위원회」를 이끌었다. 바츨라우 라스토우스키도 1915년부터 러시아와 폴란드 양쪽에서의 독립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다만 영어 출처는 이 무렵 민족 정당들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민족운동은 작고 분열된 지식인층에 머물렀다고 평가한다. 1 2 3 4 5

2월 혁명으로 차르가 물러나자 벨라루스에서도 정치 활동이 살아났다. 1917년 여름 흐라마다의 주도로 열린 벨라루스 민족 단체 대회는 민주공화국 러시아 안에서의 자치를 목표로 정했고, 7월 8~10일 민스크에서 벨라루스 단체 중앙 라다가 대벨라루스 라다로 개편되었다. 대벨라루스 라다는 스스로를 「벨라루스 민족 전체의 수호자」라 부르며 계급을 넘어선 민족 연합을 자처했지만, 다수는 러시아 공화국 안의 자치에 머물자는 온건파였고 독립을 원한 것은 가장 급진적인 일부였다. 흐라마다 자체도 그해 여름 벨라루스 사회혁명당, 벨라루스 사회민주당, 사회주의 연방주의자당 등으로 분화했다. 민족운동 바깥에도 여러 세력이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의 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 안에는 벨라루스 지역위원회가 있었고, 동부 출신이 많은 그 지지자들은 러시아와의 연합을 중시했다. 민스크에서는 1917년 5월 「민스크 땅 폴란드 라다」가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벨라루스 자치를 지지했으나 10월 혁명 뒤에는 민스크 일대의 폴란드 편입을 주장했다. 여름에는 최대 5만 명의 폴란드 제1군단이 편성되었다. 유대인 노동자 정당 분트도 기독교 민주주의 세력과 함께 벨라루스 중앙 라다에 참여했다. 도시 주민의 상당수는 유대인이었고 일부 도시에서는 다수를 이루었다. 2 6 3 7 1

10월 혁명 당일인 1917년 11월 7일 민스크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도시 행정을 장악했다. 서부 전선의 볼셰비키를 이끈 사람은 아르메니아계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였다. 그는 2월 혁명 직후 민스크에 와 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미하일 프룬제와 함께 볼셰비키 분파를 이끌었고, 9월 볼셰비키 북서부 지역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10월 혁명 소식이 오자 곧바로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피를 흘리지 않고 민스크의 권력을 잡았고, 11월에는 병사 대회에서 서부 전선 총사령관으로 뽑혔다. 11월 민스크에서 열린 서부 주 소비에트 대회, 민스크·빌뉴스현 농민 대회, 서부 전선 군 대회는 하나의 권력 기관을 만들기로 했고, 12월 9일(구력 11월 26일) 서부 주와 전선의 집행위원회가 합쳐 서부 주 집행위원회가 되었다. 서부 주 정부의 의장은 카를 란데르였다. 새 권력은 「토지에 관한 법령」에 따라 지주의 땅을 농민에게 나누고 8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서부 주의 볼셰비키 지도부는 벨라루스를 러시아 공화국의 한 지역으로 보았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이들은 벨라루스인이 아직 뚜렷한 민족의식을 갖춘 독자적 민족이 아니므로 민족자결 원칙이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대벨라루스 라다는 서부 주 집행위원회를 전선의 군사 기구일 뿐이라며 인정하지 않았고, 독립 국가 건설에 협력하자는 라다의 제안은 란데르와 빌헬름 크노린에게 거절당했다. 1 8 9 10 11 6 2

벨라루스소련1917년 12월: 제1차 전벨라루스 대회와 그 해산

대벨라루스 라다는 11월 호소문 「모든 벨라루스 민중에게」를 내, 벨라루스를 민주공화국으로 선포하고 모든 권력을 지역 라다에 넘길 대회를 열자고 했다. 페트로그라드의 벨라루스 지역위원회와 모스크바의 벨라루스 인민 흐라마다도 따로 준비하던 대회 계획을 접고 합류했다. 제1차 전벨라루스 대회는 1917년 12월 18일(구력 12월 5일) 민스크 시립극장에서 열렸다. 첫 회의에 나온 대의원은 1,872명, 그 가운데 의결권을 가진 사람이 1,167명이었다. 민스크·모길료프·비텝스크·그로드노·스몰렌스크·빌뉴스의 향우회, 우파와 좌파 사회혁명당,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흐라마다, 젬스트보와 시의회, 노동조합, 병사와 피란민 대표, 소비에트 대표까지 거의 모든 세력이 모였고, 대의원 다수는 농민 출신이었다. 한 장군은 뒤에 벨라루스 말과 노래를 듣고 무대의 벨라루스 연극을 보며 「모든 마음이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대회는 얀 세라다를 의장으로 71명의 대회 라다와 그 집행위원회를 뽑았다. 세라다는 바르샤바에서 수의학을 공부한 수의사이자 농업학교 교사로, 흐라마다의 활동가였다. 12 13 2 6 14

논쟁의 핵심은 러시아와의 관계였다. 흐라마다와 서부 출신 대의원들은 넓은 자치나 독립까지 주장했고, 동부 출신이 많은 이른바 「지역파」는 러시아와의 연합을 지키자고 했다. 대회 라다와 분파 지도자들이 오랜 토론 끝에 만든 15개 항의 결의안은 「자치 벨라루스」라는 말조차 쓰지 않는 타협안이었다. 첫 항은 민족자결권과 공화제를 확인하고, 고향 땅이 나뉘거나 러시아 민주 연방 공화국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농민·병사·노동자 대표의 전벨라루스 소비에트를 즉시 지역 권력 기관으로 세운다고 했다. 이 기관은 벨라루스 민족의 운명을 정할 제헌 회의를 서둘러 소집해야 했다. 12월 31일(구력 12월 18일) 새벽 1시 15분 결의안이 낭독되었고, 대의원들은 첫 항만 만장일치로 채택할 수 있었다. 그때 적위대가 건물을 에워쌌다. 서부 주 내무위원 류드비크 레자프스키가 들어와 대회 해산과 의장단 체포를 선언했다. 대의원들은 의장단을 다시 뽑고 무대 앞에 바리케이드를 쳤으며 주먹다짐까지 벌어졌지만, 얀 세라다를 포함한 의장단 27명이 체포되고 대의원들은 쫓겨났다. 12 13 2

대회 라다는 이튿날 비밀리에 다시 모였고, 1918년 1월 2일 17명의 집행위원회를 뽑아 지하 활동을 이어 갔다. 대의원 일부는 페트로그라드의 중앙정부가 민스크 볼셰비키의 탄압을 용인하지 않으리라 기대했지만, 소브나르콤도 자결과 연방제에 바탕한 해법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서부 주의 볼셰비키는 중앙에 사건을 왜곡해 보고했다. 란데르는 소브나르콤과 민족인민위원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에서, 그리고 『프라우다』 편집부에 보낸 설명에서도 대회를 크게 일그러뜨려 묘사했다. 같은 출처는 해산의 주된 이유를 서부 주 정부와 집행위원회가 권력을 나누기 싫어했다는 데서 찾고, 법적 근거는 없었다고 본다. 당시 현장에 있던 알렉산드르 체르뱌코프, 즈미체르 질루노비치, 빌헬름 크노린도 뒤에 해산이 꼭 필요했는지 의문을 나타냈다. 벨라루스 측 저자들에 따르면 해산은 국제 문제가 되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회담에서 소비에트 측이 이 일로 비판받았고 독일·스위스 언론과 볼셰비키가 아닌 러시아 언론도 이를 다루었다. 볼셰비키는 1919년 2월 같은 장소에서 거의 같은 이름의 「제1차 전벨로루시 노동자·농민·붉은 군대 대표 소비에트 대회」를 열어 소비에트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게 된다. 13 12 15

벨라루스독일1918년: 독일 점령과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회담이 깨지자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918년 2월 18일 공세를 재개했고, 그날 저녁 민스크에서 65킬로미터 떨어진 몰로데치노에 이르렀다. 볼셰비키는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밤 저항하지 않고 스몰렌스크로 철수하기로 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는 민스크 방어도 유격전도 조직하지 못했지만 포와 탄약의 대부분은 미리 빼냈다. 19일 볼셰비키가 가두었던 벨라루스 중앙 군사 라다 위원들이 혼란을 틈타 감옥에서 나와 도시 장악을 결의했고, 의장 콘스탄틴 예조비토프가 도시 사령관이 되었다. 폴란드 군사조직도 따로 사령관을 세웠다. 그날 밤 벨라루스 부대는 무기고와 지사 관저를 차지하고 서부 주 집행위원회와 체카, 적위대 본부가 있던 호텔 「예우로파」로 쳐들어갔지만 란데르 등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곧 폴란드 부대가 벨라루스 부대를 무장해제하기 시작하고 유제프 도브보르-무시니츠키 장군의 폴란드 군단이 올 때까지 질서를 맡겠다고 나서면서 두 민족운동이 부딪쳤다. 2월 21일 대회 집행위원회는 「벨라루스 민족들에게」 보내는 제1헌장을 내 스스로를 벨라루스의 임시 권력으로 선언하고, 이반 바론카를 의장으로 인민서기국을 세웠다. 같은 날 오전 11시 독일군이 민스크에 들어왔다. 2 9 7 13

3월 3일 조인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벨라루스 땅을 독일 점령 지역과 러시아 쪽으로 갈랐다. 집행위원회는 3월 9일 제2헌장에서 「벨라루스인이 거주하고 수적으로 우세한 경계 안의 벨라루스」를 인민공화국으로 선포했고, 영어 출처에 따르면 토지 사유권 폐지도 담았다. 대회 라다는 확대되어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라다가 되었다. 3월 25일 기준 라다 위원은 77명으로, 대회에서 뽑힌 36명, 빌뉴스 벨라루스인 대표 6명, 러시아인·폴란드인·유대인 등 소수민족 대표 15명, 지방 자치단체와 대도시 대표 각 10명이었다. 안톤 루츠케비치와 바츨라우 라스토우스키는 빌뉴스 벨라루스 평의회의 대표로 합류했다. 3월 25일 아침 8시 민스크의 농민토지은행 건물에서 라다는 제3헌장을 채택했다. 「이제 우리,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라다는 러시아 차르들이 우리의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에 강제로 씌운 국가적 예속의 마지막 멍에를 벗어 던진다.」 헌장은 공화국을 독립되고 자유로운 국가로 선포하고, 장래의 국가 관계는 벨라루스 민족들이 스스로 정한다고 했다. 영토로는 모길료프현 전체와 민스크·그로드노(비아위스토크 포함)·빌뉴스·비텝스크·스몰렌스크·체르니고프현의 벨라루스인 지역을 내세웠다. 공용어는 벨라루스어, 수도는 민스크였고, 흰색·빨간색·흰색의 삼색기와 리투아니아 대공국 문장에서 온 「파호냐」가 국가 상징이 되었다. 2 7 15 16 4 5

독일 정부도 점령 당국도 독립국 벨라루스에는 관심이 없었다. 독일에게 벨라루스는 중부 유럽 완충국 구상의 일부였을 뿐이고, 독립 선포는 브레스트 조약의 조건과도 어긋났다. 라다는 승인을 얻으려고 3월 25일 같은 날 빌헬름 2세에게 전보를 보내, 독일군이 벨라루스를 「외국의 무정부와 억압」에서 해방해 준 데 감사하고 「독일 제국과의 동맹 속에서」 독립과 불가분성을 강화하도록 보호해 달라고 청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이 전보에는 라다 의장 얀 세라다와 인민서기국 의장 바론카 등이 서명했다. 전보는 라다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당 계열은 정부에서 물러났고, 흐라마다도 갈라져 항의의 뜻으로 인민서기국을 떠난 팔루타 바두노바 등은 벨라루스 사회혁명당으로 갔다. 그 뒤 우파가 꾸린 정부도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은 끝내 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고, 정부가 얻은 것은 문화 분야의 제한된 권한뿐이었다. 영어 출처는 독일이 1918년 봄 민족주의자들의 사회주의 성향을 못마땅하게 여겨 지도부 교체를 강요했고, 점령 당국의 억압이 커지면서 일어난 농민 반란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적는다. 8월 27일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맺은 베를린 보충조약은 베레지나강 동쪽에서 독일군이 철수하고 독일이 지역 분리주의 운동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정해, 사실상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을 버렸다. 7 2 15 1 17

한계 속에서도 라다는 국가의 틀을 만들려 했다. 영어 출처에 따르면 150~350개 학교가 세워지고 민스크 대학 설립이 준비되었다. 1918년 5월 벨라루스 국립극장과 막심 바흐다노비치의 이름을 딴 벨라루스 인민회관이 문을 열었고, 국적 제도와 국새, 우표도 생겼다. 4월에는 라다 대표단이 키예프로 가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를 비공식으로 만났다. 우크라이나 측은 제3헌장에 호의를 보이며 우호적인 중립국을 원했지만 독립을 승인하지는 않았다. 파울로 스코로파츠키의 헤트만 정권과는 영사를 주고받았고, 영어 출처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서 식량을 들여와 기근을 막았다. 국경 문제는 벨라루스가 우크라이나 통제 아래의 폴레시아를 요구해 풀리지 않았다. 10월 12일 총리가 된 안톤 루츠케비치는 9~11월 우크라이나에서 스코로파츠키를 만나고 볼셰비키 크리스티안 라콥스키와도 비밀리에 접촉했지만, 소비에트 러시아가 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러시아어 출처는 공화국에 국적·국새·교육 제도가 있었지만, 점령된 영토에 대한 주권도, 강제력도, 조세와 폭력의 독점도, 지방 행정과 사법 체계도 없었다고 정리한다. 인민서기국 의장 바론카도 1919년 「벨라루스를 작은 나라들 사이에라도 세우려던 벨라루스 활동가들의 초인적인 노력은 아무 성과도 없었다」고 썼다. 7 2 4

벨라루스소련리투아니아1919년: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과 리트벨

볼셰비키 안에서도 벨라루스 문제는 갈렸다. 1918년 1월 31일 민족인민위원부 안에 벨라루스 민족위원부(벨나츠콤)가 만들어졌고, 알렉산드르 체르뱌코프와 즈미체르 질루노비치가 이끌었다. 질루노비치는 코필의 농민 집안 출신으로, 페트로그라드 공장에서 일하며 「치시카 하르트니」라는 필명으로 시를 쓴 노동자 시인이었다. 벨나츠콤은 피란민들로 꾸려진 러시아 공산당 벨라루스 지부들과 함께 벨로루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모스크바에서 벨라루스 피란민 대회를 두 번 열었다. 반대편에는 스몰렌스크로 옮긴 서부 주 집행위원회와 볼셰비키 북서부 지역위원회가 있었다.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와 빌헬름 크노린은 벨라루스를 러시아 공화국의 한 지역으로 보았고, 1918년에는 스몰렌스크·비텝스크·모길료프·체르니고프·민스크·빌뉴스·코브노현을 묶는 「서부 코뮌」 구상이 나왔다. 러시아어 출처는 3월 25일의 독립 선포가 오히려 민족 공화국의 필요를 일깨운 중요한 계기였다고 본다. 11월 독일이 패하자 소비에트 러시아는 13일 브레스트 조약을 폐기하고 17일 서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라다와 정부는 12월 3일 민스크를 떠나 빌뉴스로, 27일에는 그로드노로 옮겼고, 독일군과 10~15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따라가던 붉은 군대는 12월 10일 민스크에 들어왔다. 11 18 10 1 2

11월 모스크바는 지역 단위 소비에트 연합을 없애기로 했고, 12월 21~23일 모스크바의 러시아 공산당 벨라루스 지부 회의는 서부 주에 벨라루스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기로 결의했다. 12월 25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에게 당 중앙위원회가 여러 이유로 공화국 구상에서 벨라루스인들에게 동의했다고 알렸다. 12월 30~31일 스몰렌스크에서 열린 서부 주 당 조직의 제6차 회의는 스스로를 벨로루시 공산당(볼셰비키) 창립 대회로 선언했고, 1919년 1월 1일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임시 노동자·농민 정부의 수반은 질루노비치였고, 정부는 1월 초 민스크로 옮겼다. 그러나 1월 16일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와의 통합, 그리고 비텝스크·스몰렌스크·모길료프현을 러시아로 넘기는 두 결의를 내렸다. 1월 22일 모스크바 대표로 민스크에 온 아돌프 이오페에게 벨라루스 지도자들은 두 결정을 거부하고 그가 무능하다고 항의했다. 2월 2~3일 민스크의 제1차 전벨로루시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야코프 스베르들로프가 리투아니아와의 단결을 호소하자 모길료프·스몰렌스크·비텝스크 대표단은 퇴장했다. 대회는 헌법을 채택하고 영토를 민스크·그로드노현으로 줄였는데, 전쟁 상황에서 정부가 실제로 다스린 곳은 민스크현의 6개 군뿐이었다. 질루노비치는 2월 초 정부 수반에서 물러났고, 2월 4일부터 먀스니코프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11 10 19 1 8 18

2월 27일 빌뉴스에서 두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의 합동 회의가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곧 리트벨을 세웠다. 수도는 빌뉴스였고 정부 수반은 빈차스 카프수카스였다. 지그마스 안가리에티스가 내무, 이오시프 운쉴리흐트가 군사, 모이세이 칼마노비치가 식량 인민위원을 맡았다. 영어 출처에 따르면 이오페가 핵심 각료를 직접 골랐고, 통합에 반대한 현지 지도자들은 요직에서 밀려났으며, 벨라루스인은 대개 2선의 자리에 머물렀다. 역사가 보르젱츠키는 리트벨 정부에 벨라루스인이 한 명도 없었다고 본다. 공화국은 러시아어·벨라루스어·리투아니아어·폴란드어·이디시어를 공용어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어가 지배했다. 3월 당 통합 대회는 몰수한 대농장을 농민에게 나누지 않고 국영 농장으로 만들기로 해 농민과의 관계를 망쳤다. 18~40세 남성 징집령은 거센 저항에 부딪혀, 6월 민스크현의 탈영병이 약 3만 3천 명에 이르렀다. 평가는 엇갈린다. 폴란드와 서방의 여러 역사가는 리트벨을 소비에트 러시아의 괴뢰국이나 「종이 국가」로 보고, 소비에트 역사학은 반혁명에 맞선 방어 조치이자 두 민족의 역사적 유대의 표현으로 서술했다. 리트벨이 옛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부활처럼 제시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19 20 1

벨라루스폴란드폴란드의 진격과 라다의 분열

리트벨이 서자마자 서쪽에서 폴란드군이 다가왔다. 2월 중순 벨라루스 서부에서 두 정규군이 처음 맞붙었고, 폴란드는 2월 19일 새로 차지한 땅을 다스릴 동부 지역 민정청을 세웠다. 4월 19~21일 폴란드군은 사흘의 시가전 끝에 빌뉴스를 차지했고, 리트벨 정부는 다우가프필스를 거쳐 민스크로, 5월에는 보브루이스크로 물러났다. 4월 22일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옛 리투아니아 대공국 주민에게」 보내는 포고문에서 정복지를 군정이 아닌 민정 아래 두겠다고 했고, 영어 출처에 따르면 벨라루스 지도부는 이 포고문을 반겼다. 리트벨의 권한은 영토와 함께 사라졌다. 5월 30일 군사·경제 업무를 러시아 정부에 넘겼고, 6월 1일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군사·정치 동맹에 들어갔다. 7월 13일 서부 전선을 감독하러 온 스탈린은 리트벨의 국방회의와 정부를 해산하자고 했고, 국방회의는 7월 17일 해산되었다. 8월 8일 폴란드군이 민스크를 점령했고, 9월에는 다우가바강·프티치강·베레지나강 선에서 전선이 멎었다. 폴란드 세임은 이 선까지의 점령지를 민스크를 포함해 폴란드에 편입하기로 의결했다. 피우수트스키가 진격을 멈춘 이유와 데니킨과의 관계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항목이 자세히 다룬다. 21 22 23 15 19

라다 사람들은 1919년 8~9월 폴란드군을 따라 민스크로 돌아왔다. 9월 민스크에 온 피우수트스키를 볼셰비키를 뺀 모든 벨라루스 정당이 환영했다. 안톤 루츠케비치는 1월 22일자 각서로 파리 강화회의 참가를 요구하고 대표단을 이끌고 파리에 갔으며, 7월 폴란드 총리 이그나치 파데레프스키에게 「두 주권국가 벨라루스 인민공화국과 폴란드 공화국의 연합」 조약안을 건넸다. 그러나 폴란드 외무부는 벨라루스 여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피우수트스키와의 회담도 지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영어 출처에 따르면 피우수트스키는 벨라루스 정부의 기능을 문화 문제로 한정하자고 했고 루츠케비치가 이를 거부했다. 점령 당국은 공산주의자들이 몰수한 땅을 지주에게 돌려주고 폴란드어를 공용어로 도입했다. 반감이 커지면서 1919년 12월 라다는 둘로 갈라졌다. 루츠케비치의 「최고 라다」는 폴란드와의 연방에서 국가성을 찾으려 했고, 그렇게 하면 동쪽으로 스몰렌스크까지의 땅을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바츨라우 라스토우스키의 「인민 라다」는 폴란드의 「식민주의 정책」에 항의하며 발트 국가들을 동맹으로 보았다. 라스토우스키는 총리에 임명된 뒤 12월 17일 민스크에서 폴란드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1920년 2월 풀려나 리가로 갔다. 루츠케비치도 폴란드와 합의하지 못하고 2월 28일 사임해 빌뉴스로 갔다. 2 4 15 1 5 16

두 라다는 서로 자신만이 벨라루스를 대표한다며 국제무대에서 다투었다. 공화국의 외교·군사 대표부와 영사관은 카우나스, 리가, 키예프, 오데사, 프라하, 베를린, 코펜하겐 등지에서 일했지만 법적 승인은 받지 못했다. 영어 출처는 1919년 10월 에스토니아, 12월 핀란드가 공화국을 공식 승인했다고 적는다. 러시아어 출처는 같은 일을 다르게 전한다. 12월 28일 프라하의 영사가 바르샤바의 루츠케비치에게서 받은 전보에 따르면, 라트비아 주재 대표가 에스토니아-소비에트 휴전 회의가 열린 타르투에서 회의 자체와 핀란드가 벨라루스 독립을 「승인」했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핀란드 주재 대표부는 1920년 백군 장군 출신의 벨라루스인이 맡았다가 가을에 에스토니아로 옮겼다. 1920년 1월 3일 루츠케비치는 바르샤바에서 피우수트스키를 다시 만났다. 강대국들은 벨라루스에 자치를 주는 것조차 검토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프랑스 외교관들은 루츠케비치에게 「당신들이 주인 노릇을 하는 땅이 한 조각이라도 있었다면 독립의 국제적 승인 문제는 긍정적으로 풀렸을 것이고 도움도 받았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1920년 말 라다는 모스크바의 볼셰비키와도 다시 협상해 독립 승인과 정치범 석방을 요구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7 2 15 4

벨라루스소련폴란드1920년: 소비에트 벨로루시의 재선포와 흩어진 민족운동

1920년 4월 폴란드의 키예프 공세가 시작되었지만 벨라루스 쪽에서 폴란드군의 즐로빈·오르샤 공격은 5월에 격퇴되었다. 6월 6일 리투아니아의 중립을 지키려고 망명 리트벨 정부가 해산되었다. 7월 4일 서부 전선군 사령관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두 번째 북부 공세가 시작되었고, 제3기병군단이 폴란드 전선을 무너뜨렸다. 7월 11일 붉은 군대가 민스크를 되찾았고, 12일 소비에트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와 강화했다. 7월 30일 크노린과 이오시프 아다모비치, 체르뱌코프가 대표한 리투아니아·벨로루시 공산당, 프세볼로트 이그나톱스키의 벨로루시 공산주의 조직, 아론 바인시테인의 분트가 만나 소비에트 공화국을 다시 세우기로 하고 비상 임시 권력으로 벨로루시 군사혁명위원회를 꾸렸다. 이튿날인 7월 31일 민스크에서 공화국 재건이 선포되었다. 같은 날 신문 「소비에트 벨로루시」에 실린 독립 선언의 영역은 민스크현의 6개 군에도 못 미쳤고, 비텝스크·고멜·모길료프는 러시아에 남았다. 지도자는 민스크 군사혁명위원회를 이끈 체르뱌코프와 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장 크노린이었다. 붉은 군대가 폴란드로 넘어가자 공화국은 영토를 더 넓히려 했으나, 8월 바르샤바 전투의 패배와 9월 네만강 전투로 다시 수세에 몰렸다. 10월 12일 서명된 휴전은 18일 발효되었다. 1 21 19 11

국경이 새로 그어지는 동안 벨라루스 민족운동은 더 흩어졌다. 7월 폴란드군이 민스크를 떠나자 최고 라다는 폴란드로, 인민 라다 지지자 대부분은 카우나스로 갔다. 10월 8일 폴란드 장군 루치안 젤리고프스키가 「항명」을 내세워 빌뉴스를 차지하자, 리투아니아 정부는 분쟁 지역의 벨라루스 주민을 끌어들이려 했다. 11월 11일 리투아니아 정부와 라스토우스키 정부는 비밀 조약을 맺었다. 리투아니아는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정부와 빌뉴스 지방·그로드노 북부의 벨라루스 단체에 자금을 대고, 인민 라다는 주민투표에서 리투아니아를 지지하고 벨라루스 부대를 리투아니아가 쓰도록 허용하며, 그 지역의 벨라루스어권은 연방 원칙에 따라 리투아니아 안의 자치 지역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의 동부 벨라루스는 조약에 나오지 않았다. 라다 위원 알략산다르 츠비케비치는 「리투아니아 정부는 빌뉴스를 둘러싼 폴란드와의 싸움에 우리를 쓰기로 했고, 우리는 독립 투쟁에 「리투아니아 기지」를 쓰기로 했다」고 회고했다. 앞서 10월 20일 라스토우스키는 리가의 벨라루스 회의에서 「소비에트 권력과 폴란드 점령에 맞서는」 벨라루스 정당 연합을 발의했다. 폴란드 쪽에서는 스타니스와프 부와크-바와호비치의 부대가 휴전 뒤인 11월 모지르를 며칠 차지했다. 그는 벨라루스 독립과 16일 새 정부 수립을 선포했으나 점령지에서 유대인 포그롬이 일어났고, 18일 붉은 군대에 쫓겨난 부대는 폴란드에서 억류되고 무장해제되었다. 2 15 5 21

벨라루스소련폴란드슬루츠크 봉기(1920년 11~12월)

10월 12일 예비 강화의 군사분계선은 슬루츠크군 대부분을 소비에트 벨로루시 쪽에 두었다. 그해 가을 민스크현 곳곳에서 「폴란드군과 소비에트군 모두에게서 벨라루스를 평화적으로 해방하자」는 결의가 나왔다. 11월 15일 벨로루시 군사혁명위원회 보고서는 일부 볼로스치 주민이 존재하지 않는 「독립 벨라루스」 정부 말고는 어떤 권력도 인정하지 않으며, 권력은 모스크바가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출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슬루츠크에서는 1918년 파벨 자브리트의 벨라루스 민족위원회가 세워졌고, 폴란드 점령 당국은 친폴란드 성향의 이 위원회에 기댔다. 독립 지지자 대부분은 벨라루스 사회혁명당 슬루츠크 위원회에 모였다. 이들의 전단은 벨라루스 땅을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가 나누는 것이 불법이며, 소비에트 벨로루시의 독립은 「러시아 중앙집권주의의 점령을 가리는」 허구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어 출처는 봉기의 주력이 전시 공산주의 정책에 저항한 농민이었고 지역 지식인과 소귀족이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11월 15일 시작된 슬루츠크군 대회에는 105~132명의 대의원이 모였고, 폴란드 제11사단 장교 2명과 부와크-바와호비치 부대 대표 몇 명도 나왔다. 대회는 슬루츠크 일대에서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권력을 선포하고 「볼셰비키 점령」에 항의했으며, 사회혁명당원 블라디미르 프라쿨레비치를 의장으로 17명의 슬루츠크 라다를 뽑았다. 24 25 1

슬루츠크 라다는 16~50세 남성의 총동원을 선포하고 사흘 만에 제1슬루츠크 연대와 제2그로조보 연대로 이루어진 슬루츠크 여단을 꾸렸다. 러시아어 출처가 인용한 서술에 따르면 병력은 약 4천 명이었다. 무기와 돈의 출처를 두고는 벨라루스 역사가들의 견해가 갈린다. 폴란드군 사령부가 무기와 자금을 댔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부와크-바와호비치만이 보잘것없는 물자를 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폴란드군은 11월 24일 슬루츠크를 떠났고, 여단도 뒤따라 서쪽 세메제보로 본부를 옮겼다. 전투는 11월 27일 시작되었다. 반군은 바실치치 부근에서 붉은 군대를 물리치고 티모코비치에서 몰아냈지만, 붉은 군대가 제8·제17사단을 슬루츠크군에 투입하자 형세가 기울었다. 12월 7일 세메제보를 빼앗긴 반군은 12일 많은 포탄과 함께 되찾았으나, 19일 비즈나에서, 20일 세메제보에서 물러났다. 무기와 장교, 식량이 모자랐고 발진티푸스가 돌았다. 12월 28일 탄약이 떨어진 여단은 새 국경이 된 모로치강을 건너 무기를 내려놓고 폴란드에 억류되었다. 영어 출처는 붉은 군대가 거의 한 달 동안의 저항을 꺾으려고 2개 사단을 동원해야 했다고 적는다. 24 1

슬루츠크 봉기의 의미는 지금도 다툼거리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벨라루스 학계에서 가장 널리 퍼진 견해는 봉기를 「신화」로 본다. 군사분계선에 따라 폴란드군이 물러나기로 한 지역에는 아직 붉은 군대도 소비에트 권력도 없었으므로 맞설 상대가 없었고, 대회는 서벨라루스가 폴란드에 남는 데는 항의하지 않으면서 슬루츠크를 폴란드 쪽에 두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여단 지휘를 넘겨받은 안톤 소콜-쿠틸롭스키도 「슬루츠크군에는 어떤 봉기도 없었다」고 단언했고, 슬루츠크 라다 위원이던 유리 리스타파트는 폴란드 총참모부가 내준 돈을 받으러 바르샤바에 다녀왔다고 밝혔다. 반대로 일부 역사가는 봉기를 「폴란드 지주도 모스크바 공산주의자도 아니다」라는 구호 아래 벨라루스인이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일으킨 무장 독립 투쟁으로 본다. 1980년대 말 민족 부흥 이후 벨라루스 인민전선 등은 11월 27일을 「영웅의 날」로 기리지만, 루카셴코 정부는 이 사건을 중요하게 인정하지 않는다. 망명 라다와의 관계도 출처마다 다르다. 영어 출처는 리투아니아에 있던 라다가 장교를 보내 저항 조직을 도왔다고 쓴다. 러시아어 출처는 봉기와 라다 사이의 연결이 역사가들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벨라루스 군사 라다가 군사 전문가 20명을 보냈으나 3명만 슬루츠크에 닿았다고 전한다. 바실 비카우의 소설 『검은 화전 위에서』가 이 사건을 다루었다. 24 25 7 2

벨라루스폴란드소련리가 조약과 벨라루스의 분할

강화 회담은 1920년 8월 17일 민스크에서 시작해 9월 21일 리가에서 재개되었다. 소비에트 대표단은 아돌프 이오페, 폴란드 대표단은 얀 돔프스키가 이끌었다. 슬루츠크 봉기를 다룬 출처들에 따르면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은 물론 소비에트 벨로루시의 대표도 회담에 초청되지 않았고, 조약은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소비에트 벨로루시를 대신해 서명했다. 벨라루스 역사가 아나톨 흐리츠케비치에 따르면 이오페는 우크라이나에서 영토 양보를 받는 대가로 소비에트 벨로루시 전체를 폴란드에 넘기자고 제안했으나 폴란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폴란드 대표단은 피우수트스키의 정적인 국가민주당이 주도했다. 이들은 비폴란드계 소수민족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넘지 않기를 바랐다. 동쪽 변경의 농촌에서는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이 폴란드인보다 많았고, 그곳 유권자는 피우수트스키를 지지했기 때문에 국경이 너무 동쪽으로 가는 것은 선거에서도 불리했다. 세임 의원 6명으로 꾸려진 특별 대표단은 국가민주당 이념가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의 압력 아래, 민스크를 폴란드 쪽에 두었을 약 100킬로미터의 추가 영토를 거절했다. 영어 출처는 피우수트스키나 그의 동맹들이 리가 회담 때에야 민스크를 수도로 하는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을 폴란드와 결합된 국가로 내세우려 했다고 적는다. 결국 민스크는 소비에트 쪽에 남았다. 26 25 24 21

1921년 3월 18일 리가 조약이 폴란드와, 소비에트 벨로루시를 대리한 소비에트 러시아, 그리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사이에 조인되었다. 폴란드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와 소비에트 벨로루시를 승인하고 리투아니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와 연방을 맺지 않기로 했으며, 소비에트 측은 국경선 서쪽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그로드노현과 민스크현 서부 등, 이른바 서벨라루스가 폴란드로 넘어갔다. 영어 출처들은 새 국경을 커즌선 동쪽 약 200~250킬로미터로 적고, 폴란드에 넘어간 지역의 벨라루스인을 100만 명 넘게 잡는다. 1921년 폴란드 인구조사는 벨라루스인을 약 100만 명으로 셌지만 170만~200만 명으로 보는 추산도 있다. 조약 제7조는 모든 민족에게 지적 발전과 민족 언어 사용, 종교 생활의 자유를 보장했다. 소비에트 벨로루시에 남은 것은 면적 5만 2,400제곱킬로미터, 인구 154만 4천 명의 작은 공화국이었고, 고멜·비텝스크와 스몰렌스크현 일부는 러시아가 관할했다. 벨라루스 활동가들은 조약을 비극적인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민스크를 잃은 폴란드의 벨라루스인은 주로 농촌의 주변화된 집단이 되었고, 그들 중 많은 이에게 동쪽의 소비에트 공화국은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다. 1921년 가을 프라하의 벨라루스 대표자 대회는 분할을 규탄하고 벨라루스 통일을 위해 싸우자는 결의를 채택했다. 26 27 21 16 1

소비에트 벨로루시의 지위는 그 뒤에 정해졌다. 1921년 1월 16일 러시아와 벨로루시는 서로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하는 「노동자·농민 동맹 조약」을 맺었고, 1922년 12월 30일 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의 창립 공화국이 되었다. 영어 출처는 작은 영토와 약한 민족의식만 보면 러시아에 흡수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리가 조약을 일시적 후퇴로 본 레프 트로츠키 등 세계혁명론자들에게 이 공화국은 장래 서쪽 진출의 교두보이자 폴란드 안 소수민족을 끌어당길 자석이었으므로 완전한 연방 구성 공화국의 지위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1924년 3월 러시아가 비텝스크·모길료프현 대부분과 스몰렌스크현 일부를 넘기면서 면적은 11만 600제곱킬로미터, 인구는 420만 명으로 늘었다. 1920년대 소비에트 연방은 벨라루스 문화를 지원해 여러 국가 기관과 수천 개의 벨라루스어 학교를 세웠지만, 이 성과는 1930년대 스탈린 아래에서 대부분 무너졌다. 서벨라루스에서는 폴란드 세임의 벨라루스계 의원들이 1925년 벨라루스 농민·노동자 흐라마다를 만들어 서벨라루스의 자치, 벨라루스어의 제2공용어 인정, 폴란드 정착민의 「식민」 중단을 요구했다. 이 당은 소련의 도움과 코민테른의 자금을 받았다. 11 1 21 28

벨라루스망명 라다와 그 뒤, 그리고 평가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라다는 1919년부터 망명 기구가 되었다. 1922년 3월 폴란드 세임이 빌뉴스 지방 편입을 비준하자 리투아니아는 라다에 대한 관심을 잃고 지원을 끊었고, 1923년 11월 정부는 카우나스를 떠나 프라하로 갔다. 라스토우스키도 그해 총리직을 내려놓았다. 1924년 소비에트 측이 벨라루스 땅 일부를 소비에트 벨로루시에 넘기자 서벨라루스와 망명자들 사이에 친소 분위기가 커졌다. 1925년 10월 베를린의 제2차 벨라루스 정치 회의에서 츠비케비치가 이끄는 정부는 권한을 소비에트 벨로루시 정부에 넘기고 민스크를 유일한 문화·정치 중심으로 인정하며 스스로 해산하기로 했다. 라다 의장 피오트라 크레체우스키는 이를 「독립에 대한 배신」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고, 라다는 소비에트 벨로루시를 공식 인정하지 않은 채 망명지에 남았다. 귀국한 사람들의 운명은 비극적이었다. 1927년 소비에트 벨로루시로 간 라스토우스키는 국립박물관장과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나 1930년 「벨라루스 해방동맹」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라토프로 유배되었고, 1937년 다시 체포되어 1938년 1월 처형되었다. 소비에트 벨로루시 농업 부문에서 일하던 얀 세라다도 같은 사건으로 1930년 체포되어 유형과 굴라크를 거쳤고, 1943년 석방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공산당원이던 즈미체르 질루노비치도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모길료프의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2 7 15 5 14 18

서벨라루스에 남은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았다. 안톤 루츠케비치는 빌뉴스에서 『나샤 니바』를 다시 내고 벨라루스 학교와 박물관 일을 이끌었지만, 1927년 폴란드 당국에 독일·소비에트 정보기관 협력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다. 1930년대에는 그가 이끈 출판협회 활동이 금지되었고, 소비에트 벨로루시에서는 1937년 그의 책을 불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939년 소련이 서벨라루스를 점령하자 그는 빌뉴스에서 체포되어 8년형을 받았고, 1942년 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죽었다. 소비에트 쪽 지도자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는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정부를 이끌다 1925년 트빌리시 부근의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망명 라다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라하에 있었는데, 의장 바실 자하르카와 나치 독일의 관계를 두고는 출처마다 평가가 엇갈린다. 전후 라다는 서방에서 활동을 이어 갔다. 1990년 벨라루스가 주권을 선언했을 때 라다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에 지위를 넘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지만, 1994년 이후 알략산드르 루카셴코 정권이 들어서자 그 뜻을 접었다. 권한을 넘긴 이웃 나라 망명정부들과 달리 라다는 지금도 가장 오래된 망명정부로 남아 있다. 4 9 8 7 2 15

이 시기 벨라루스의 국가 건설을 어떻게 볼지도 진영마다 다르다. 볼셰비키는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을 부르주아·지주 세력이 벨라루스를 러시아에서 떼어 내려던 시도로 규정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흐라마다를 「좌파 인민주의 성향의 민족주의 소부르주아 정당」이라 불렀다. 서부 주 제2차 소비에트 대회는 라다를 반혁명적이고 반소비에트적이라고 선언했다. 러시아어 출처는 공화국이 짧은 기간에 진짜 국가가 되지 못했고, 민족 주권에 바탕한 독립 국가 구상이 벨라루스 땅 주민 전체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반대로 1980년대 말부터 벨라루스 민족민주 야당은 3월 25일을 「자유의 날」로 기념하며 공화국을 독립 국가의 출발점으로 본다. 소련 역사학은 1919년 1월 1일의 선포를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첫 수립으로 보았고,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벨라루스 역사학도 이를 근대 벨라루스 국가성의 연속으로 다룬다. 연구자 타냐 라파스는 두 국가 모두 독일·러시아·폴란드가 이 땅을 차지하려던 경쟁에서 거의 「청하지도 않은」 채 태어났다고 평했다. 리가 조약이 그은 국경은 1939년 9월 소련의 폴란드 침공 때까지 유지되었다. 2 3 7 11 16

결과

1921년 3월 리가 조약으로 벨라루스는 폴란드의 서벨라루스와 소비에트 벨로루시로 나뉘었다.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라다는 망명지에서 이어졌고, 소비에트 벨로루시는 1922년 소련 결성에 참여했다.

연표와 지도

민스크 빌뉴스 슬루츠크 브레스트 모지르 9 빌뉴스 10 빌뉴스 1 민스크 2 민스크 3 민스크 4 민스크 6 민스크 7 민스크 8 민스크 11 민스크 12 민스크 13 민스크 14 민스크 16 슬루츠크 5 브레스트 15 모지르
  1. 11917.07.08–07.10벨라루스
    대벨라루스 라다 결성

    민스크에서 벨라루스 단체 중앙 라다가 대벨라루스 라다로 개편되었다. 다수는 러시아 공화국 안의 자치를 원했다.

  2. 21917.11.07벨라루스소련
    민스크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

    10월 혁명 당일 민스크 소비에트가 도시 행정을 장악했다.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의 군사혁명위원회가 피를 흘리지 않고 권력을 잡았다.

  3. 1917.12.09벨라루스소련
    서부 주 집행위원회

    서부 주와 서부 전선의 집행위원회가 합쳐 하나의 권력 기관이 되었다.

  4. 31917.12.18–12.31벨라루스소련
    제1차 전벨라루스 대회와 해산

    대의원 1,872명이 모인 대회가 첫 결의를 채택한 직후, 31일 새벽 적위대가 대회를 해산하고 의장단을 체포했다.

  5. 41918.02.21벨라루스독일
    제1헌장과 독일군의 민스크 입성

    대회 집행위원회가 임시 권력을 선언하고 인민서기국을 세웠다. 같은 날 오전 독일군이 민스크에 들어왔다.

  6. 51918.03.03소련독일벨라루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소비에트 러시아와 동맹국의 강화로 벨라루스 땅이 독일 점령 지역과 러시아 쪽으로 갈렸다.

  7. 61918.03.25벨라루스독일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독립 선언

    라다가 제3헌장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같은 날 빌헬름 2세에게 보낸 감사 전보가 라다를 분열시켰다.

  8. 1918.08.27독일소련
    베를린 보충조약

    독일은 베레지나강 동쪽에서 철수하고 지역 분리주의 운동을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9. 71918.12.10소련벨라루스
    붉은 군대의 민스크 입성

    라다와 정부는 12월 3일 빌뉴스로 떠났고, 붉은 군대가 철수하는 독일군을 따라 민스크에 들어왔다.

  10. 1919.01.01벨라루스소련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선포

    스몰렌스크에서 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고, 즈미체르 질루노비치가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11. 81919.02.02–02.03벨라루스소련
    제1차 전벨로루시 소비에트 대회

    민스크의 대회가 헌법을 채택하고 영토를 민스크·그로드노현으로 줄였으며 리투아니아와의 통합을 결의했다.

  12. 91919.02.27소련리투아니아벨라루스
    리트벨 수립

    빌뉴스에서 리투아니아와 벨로루시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합쳐 빈차스 카프수카스의 정부를 세웠다.

  13. 101919.04.19–04.21폴란드소련
    폴란드군의 빌뉴스 점령

    사흘의 시가전 끝에 폴란드군이 리트벨의 수도를 차지했다. 22일 피우수트스키가 옛 리투아니아 대공국 주민에게 포고문을 냈다.

  14. 111919.08.08폴란드벨라루스
    폴란드군의 민스크 점령

    폴란드군이 민스크를 점령했고, 라다 사람들이 폴란드군을 따라 돌아왔다.

  15. 121919.12벨라루스폴란드
    라다의 분열

    라다가 친폴란드 「최고 라다」와 라스토우스키의 「인민 라다」로 갈라졌다. 라스토우스키는 17일 민스크에서 폴란드 당국에 체포되었다.

  16. 131920.07.11소련폴란드
    붉은 군대의 민스크 탈환

    투하쳅스키의 서부 전선군이 7월 4일 시작한 공세로 민스크를 되찾았다.

  17. 141920.07.31벨라루스소련
    소비에트 공화국 재선포

    민스크에서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의 재건이 선포되었다. 영토는 민스크현의 6개 군에도 못 미쳤다.

  18. 1920.10.12폴란드소련
    휴전과 예비 강화

    리가에서 서명된 휴전이 18일 발효되었다. 벨라루스 대표는 회담에 초청되지 않았다.

  19. 151920.11.09–11.18벨라루스소련폴란드
    부와크-바와호비치의 모지르 원정

    부와크-바와호비치가 모지르를 차지하고 벨라루스 독립을 선포했으나 18일 쫓겨났다. 점령지에서 포그롬이 일어났다.

  20. 1920.11.11벨라루스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와의 비밀 조약

    라스토우스키 정부와 리투아니아가 빌뉴스 지방 벨라루스인의 지지와 자금 지원을 맞바꾸는 비밀 조약을 맺었다.

  21. 161920.11.15–12.28벨라루스소련
    슬루츠크 봉기

    슬루츠크군 대회가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권력을 선포하고 여단을 꾸렸다. 11월 27일부터 붉은 군대와 싸운 여단은 12월 28일 모로치강을 건너 억류되었다.

  22. 1921.03.18폴란드소련벨라루스
    리가 조약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소비에트 우크라이나가 강화했다. 서벨라루스는 폴란드로 넘어가고 민스크는 소비에트 쪽에 남았다.

관련 인물 24명

소비에트 세력15명

참여11

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장빌헬름 크노린1890–1938

1917년 대벨라루스 라다의 협력 제안을 거절했고 벨라루스 공화국 구상에 반대했다. 1920년 공화국 재선포에 참여해 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리트벨 내무 인민위원지그마스 안가리에티스1882–1940

1919년 리트벨 정부의 내무 인민위원을 지냈다.

리트벨 군사 인민위원이오시프 운쉴리흐트1879–1938

리트벨의 군사 인민위원이자 중앙집행위원회 부의장으로 국방회의에 들어갔다.

리트벨 식량 인민위원모이세이 칼마노비치1888–1937

1917~1918년 서부 주에서 활동했고, 1919년 리트벨의 식량 인민위원이자 국방회의 위원이었다.

모스크바 대표·리가 회담 수석대표아돌프 이오페1883–1927

1919년 1월 민스크에 와 리트벨 통합을 밀어붙이고 각료를 골랐다. 1920~1921년 리가 강화 회담에서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었다.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야코프 스베르들로프1885–1919

1919년 2월 제1차 전벨로루시 소비에트 대회에서 리투아니아와의 통합을 호소했다.

민족인민위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그의 인민위원부 안에 벨라루스 민족위원부가 만들어졌다. 1918년 12월 먀스니코프에게 공화국 수립 동의를 알렸고, 1919년 7월 리트벨 기구의 해산을 제안했다.

소브나르콤 의장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

흐라마다를 민족주의 소부르주아 정당이라 불렀다. 질루노비치는 공화국 수립 투쟁에서 레닌과 스탈린의 지지를 얻었다.

볼셰비키 외교관크리스티안 라콥스키1873–1941

1918년 루츠케비치와 비밀리에 만나 소비에트 러시아가 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으리라는 인상을 남겼다.

서부 전선군 사령관미하일 투하쳅스키1893–1937

1920년 7월 공세로 민스크를 되찾았고, 민스크 사령부에서 바르샤바 진격을 지휘했다.

리투아니아-벨로루시군 사령관안드레이 스네사레프1865–1937

1919년 5월 말까지 리트벨의 군대를 지휘했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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