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틀로반
The Foundation Pit
안드레이 플라토노프가 1930년에 쓴 중편소설. 노동자들이 모두가 살 거대한 ‘일반 프롤레타리아의 집’을 짓겠다며 땅을 파는 동안, 희망의 상징인 고아 소녀는 병들어 죽어 그 구덩이에 묻힌다. 제1차 5개년 계획과 농업 집단화를 그린 소설로, 작가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했고 소련에서는 1987년에야 나왔다.
상세
무슨 이야기인가?
서른 살의 노동자 보셰프는 일하다 생각에 잠긴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해고된다. 그는 옆 도시로 가서 삽을 들고, 온 도시의 프롤레타리아가 들어가 살 ‘일반 프롤레타리아의 집’ 터를 파는 일꾼들에 낀다. 그의 이유는 간단하다. 삶의 의미를 알고 싶었고, 이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꾼들은 “삶의 잉여 없이” 살아간다. 기사 프루셉스키는 죽음을 꿈꾸고, 활동가 사프로노프는 진리가 계급의 적이 아닌지 의심하며, 코즐로프는 동료들을 밀고한다. 다리 없는 상이군인 자체프는 그들에게 빌붙어 산다.
일꾼들이 고아 소녀 나스탸를 데려온다. 부르주아 출신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숨기겠다고 약속한 아이는 구호를 입에 달고 다닌다. 일꾼들은 아이를 귀여워하고, 치클린은 옆 마을에서 징발한 관을 장난감 상자로 내준다. 나스탸는 이 모든 일이 향하는 미래가 된다.
겨울이 되어 공사가 멈추자 사프로노프와 코즐로프가 마을로 “자본주의의 그루터기와의 계급투쟁”을 하러 갔다가 살해당한다. 이어 집단화가 시작된다. “일반 노선 콜호스”에서 가축은 공유화되고, 개인농은 콜호스에 들어가거나 뗏목에 실려 강을 따라 쫓겨난다. 쿨라크를 찾아내는 데 곰이 앞장선다. 옛날에 쿨라크의 방앗간에서 매를 맞던 곰이 대장간 망치꾼으로 일하다 그들의 냄새를 찾아내는 것이다. 쿨라크들을 내쫓은 뒤 가난한 농민들은 라디오에 맞춰 춤을 춘다.
위에서 온 지시가 활동가를 “왼쪽의 수렁으로 달려간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자, 그는 모든 일이 시들해져서 나스탸가 죽건 말건 상관없다고 말하고, 힘센 노동자 치클린의 손에 죽는다. 나스탸는 병들어 죽는다. 치클린은 구덩이 속에 나스탸를 묻는다. 콜호스를 떠난 농민들은 “프롤레타리아에 등록”되어 구덩이를 파러 온다.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집은 아직 없다.
왜 이렇게 이상하게 읽히나?
플라토노프의 문장이 그렇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공문서의 언어로 마음을 말한다. 사랑을 “청산”하고, 슬픔을 “무효화”하며, “상급 기관”으로 간다.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이것을 플라토노프가 “최초의 진지한 초현실주의자”인 이유로 꼽았다. 초현실주의가 미학이 아니라 “철학적 광기의 형식, 막다른 심리의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소설이 무서운 것은 작가가 혁명을 믿었기 때문이다. 플라토노프는 망명자가 아니라 소련 안에 사는 사람이었고, 사회주의가 파시즘에서 세계를 지킬 것이라 믿었다. 그는 소련의 집단화를 비인간적이라고 처음으로 비판한 러시아 사상가 가운데 하나지만, 비판은 사랑에서 나왔다. 그가 남긴 짧은 글이 그것을 말해 준다. “우리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나스탸처럼 죽을 것인가, 아니면 온전한 인간으로, 새로운 역사적 사회로 자라날 것인가? 어쩌면 작가가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잘못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지나친 불안에서 나왔다.”
어떻게 살아남았나?
플라토노프가 살아 있을 때는 출판되지 못했고, 필사본으로 돌았다. 그것을 가진 사람들은 탄압을 받았다. 처음 나온 곳은 1969년 프랑크푸르트의 『그라니』와 런던의 『스투덴트』다. 1973년 미국 아르디스 판에는 브로드스키의 서문이 붙었다.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이던 1987년 『신세계』 6호에 실렸다. 한국어로는 『코틀로반』과 『구덩이』로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