Ярославское восстание · 1918.07.06–21

야로슬라블 봉기

Yaroslavl Uprising

1918년 7월 6일부터 21일까지 볼가강 연안 도시 야로슬라블에서 보리스 사빈코프의 지하 조직 「조국과 자유 수호 동맹」이 일으킨 반볼셰비키 무장봉기. 알렉산드르 페르후로프 대령이 이끈 장교들이 시 중심부를 장악하고 소비에트 기관을 폐지했지만, 함께 계획된 리빈스크·무롬 봉기가 곧바로 진압되고 기대했던 연합군의 아르한겔스크 상륙도 8월에야 이루어져 고립되었다. 붉은 군대의 포격과 항공 폭격으로 시가 대부분이 파괴된 뒤 봉기군은 7월 21일 항복했고, 곧이어 대규모 처형이 뒤따랐다.

상세

사빈코프는 의용군 지휘부인 코르닐로프와 알렉세예프의 승인을 받아 동맹을 만들고, 그 참모장 페르후로프를 야로슬라블에 보냈다. 7월 6일 새벽 100여 명의 음모자가 무기고를 습격했고 시 민병대와 장갑차 부대가 그들 편으로 넘어오면서, 아침까지 현청사와 우체국, 전신국이 봉기군 손에 들어갔다. 볼셰비키 지도자 세묜 나힘손과 다비트 자크게임은 첫날 재판 없이 살해되었고, 200여 명의 공산당원과 소비에트 일꾼은 볼가강 한가운데 닻을 내린 이른바 「죽음의 바지선」에 갇혔다. 페르후로프는 스스로 북부의용군 집단 사령관을 칭하고 7월 13일 소비에트 권력의 모든 기관과 법령을 폐지했으며, 제헌의회 소집과 브레스트 강화 파기를 내걸었다. 자원자는 6천 명가량 등록했지만 실제로 싸운 인원은 그 일부였고, 대포 2문과 기관총 15정밖에 없어 방어전에 머물렀다.

붉은 군대는 라트비아 소총병과 각지의 적위대, 국제주의자 부대를 끌어모아 코토롤강 건너편과 철도역에서 포격을 퍼부었고, 비행기로 폭탄을 떨어뜨렸다. 페르후로프는 7월 15~16일 밤 증원을 구한다며 50명과 함께 기선으로 빠져나갔고, 남은 봉기군은 7월 21일 시내에 억류되어 있던 독일 전쟁포로 위원회에 항복했지만 위원회는 이들을 곧바로 붉은 군대에 넘겼다. 첫날에만 428명이 총살되었고, 봉기 지역 건물의 최대 80퍼센트와 가옥 2,147채, 데미도프 법률 리체이가 파괴되어 2만 8천 명이 집을 잃었다. 소련 역사학은 1930년대부터 이 사건을 「반란」으로 불렀고, 1924년 재판에서 사빈코프는 야로슬라블을 “헛되고 피비린내 나는 시도”라고 부르며 책임을 졌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