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자결권에 대하여
PeopleVladimir Lenin, Rosa Luxemburg, Karl Marx, Friedrich Engels, Karl Kautsky, Georgi Plekhanov, Julius Martov, Leon Trotsky TermsThe Right of Nations to Self-Determination, Liquidationism, August Bloc GenealogyThe Course of Soviet Nationality Policy
민족자결권을 말하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강령 제9항은 최근(『프로스베셰니예』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기회주의자들의 일대 원정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의 청산파 셈콥스키는 페테르부르크의 청산파 신문에서, 분트주의자 리브만과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사회주의자 유르케비치는 저마다의 기관지에서 이 조항을 덮치며 더없이 깔보는 태도로 그것을 다루었다. 기회주의의 이 '열두 언어의 침공'이 우리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향한 것은 오늘날의 민족주의적 동요 일반과 긴밀히 묶여 있음이 의심할 바 없다. 그러므로 제기된 문제를 자세히 따져 보는 일이 시의적절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 두자면, 위에 든 기회주의자들 가운데 누구도 독자적인 논거는 단 하나도 내놓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8~1909년의 긴 폴란드어 논문 「민족문제와 자치」에서 말한 것을 되풀이할 뿐이다. 우리의 서술에서도 가장 자주 상대하게 될 것은 이 마지막 저자의 '독창적인' 논거들이다.
1. 민족자결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자결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살펴보려는 시도를 할 때 첫머리에 서는 것이 이 문제임은 자연스럽다. 자결을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온갖 '일반 개념'에서 끌어낸 법학적 정의(定義)에서 답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민족 운동에 대한 역사적·경제적 연구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가?
셈콥스키류, 리브만류, 유르케비치류의 신사들이 이 문제를 제기할 생각조차 못 하고 마르크스주의 강령의 '불명확성'을 놓고 낄낄거리는 것으로 일을 때운 것은 놀랍지 않다. 그들은 순진하게도, 민족자결을 말하는 것이 1903년의 러시아 강령만이 아니라 1896년 런던 국제 대회의 결정이기도 하다는 것(이에 대해서는 제자리에서 자세히 다룬다)조차 모르는 모양이다. 훨씬 놀라운 것은, 이 조항이 추상적이니 형이상학적이니 하고 낭송을 늘어놓는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이 바로 그 추상성과 형이상학성의 죄에 빠졌다는 점이다. 바로 로자 룩셈부르크야말로 자결에 대한 일반론(민족의 의사를 어떻게 알아내는가에 대한 아주 우스운 궁리에 이르기까지)으로 끊임없이 빠져들면서, 문제의 핵심이 법학적 정의에 있는가 아니면 전 세계 민족 운동의 경험에 있는가 하는 물음을 어디에서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세우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피할 수 없는 이 물음을 정확히 세우기만 해도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거의 9할은 당장 무너질 것이다. 민족 운동이 러시아에서 처음 생겨난 것도 아니고 러시아에만 고유한 것도 아니다. 전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봉건제에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시대는 민족 운동과 묶여 있었다. 이 운동들의 경제적 기초는 이런 것이다. 상품 생산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부르주아지의 국내 시장 정복이 필요하며, 같은 언어로 말하는 주민이 사는 영토들이 국가적으로 결집하는 것, 그러면서 이 언어의 발전과 문학에서의 정착을 가로막는 온갖 장애가 치워지는 것이 필요하다. 언어는 인간 교류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언어의 통일과 거침없는 발전은, 현대 자본주의에 걸맞은 참으로 자유롭고 넓은 상품 유통의, 각각의 모든 계급으로 주민이 자유롭고 넓게 무리 짓는 것의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이며, 끝으로 시장이 크고 작은 모든 업주와, 파는 이와 사는 이와 긴밀히 이어지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본주의의 이 요구를 가장 잘 채워 주는 민족국가의 형성은 모든 민족 운동의 경향(지향)이다. 가장 깊은 경제적 요인들이 그리로 밀어붙이며, 따라서 서유럽 전체에서, 아니 그 이상으로 문명 세계 전체에서 자본주의 시기에 전형적이고 정상적인 것은 민족국가다.
따라서 법학적 정의 놀음을 하지 않고, 추상적 정의를 '지어내지' 않고, 민족 운동의 역사적·경제적 조건을 따져 봄으로써 민족자결의 의의를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이런 결론에 이른다. 민족자결이란 다른 민족의 집합체들로부터의 국가적 분리를 뜻하며, 독립된 민족국가의 형성을 뜻한다.
자결권을 개별적인 국가적 존립의 권리 말고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왜 옳지 않은가 하는 또 다른 이유들은 아래에서 보게 될 것이다. 지금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민족국가를 향한 지향의 깊은 경제적 근거라는 피할 수 없는 결론에서 어떻게 '몸을 빼려' 했는가에 머물러 보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카우츠키의 소책자 『민족성과 국제성』(『노이에 차이트』 1907~1908년 제1호 부록; 러시아어 번역은 리가의 잡지 『과학 사상』 1908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카우츠키가[1] 이 소책자 제4절에서 민족국가 문제를 자세히 따진 끝에, 오토 바우어가 "민족국가를 만들려는 지향의 힘을 과소평가한다"(인용한 소책자 23쪽)는 결론에 이르렀음을 알고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이 카우츠키의 말을 인용한다. "민족국가는 현대의"(곧 자본주의적·문명적이며, 중세적·전자본주의적인 것 따위와 구별되어 경제적으로 진보적인) "조건에 가장 잘 맞는 국가 형태이며, 국가가 자기 과제를"(곧 자본주의의 가장 자유롭고 넓고 빠른 발전이라는 과제를) "가장 쉽게 수행할 수 있는 형태다." 여기에 카우츠키의 한층 정확한 맺음말도 덧붙여야 한다. 민족적으로 얼룩덜룩한 국가들(민족국가와 구별되는 이른바 민족체들의 국가)은 "언제나, 그 내부 구조가 이런저런 까닭으로 비정상인 채로 또는 덜 발달한 채로(뒤떨어진 채로) 남은 국가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카우츠키가 말하는 비정상이란 오로지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요구에 가장 잘 맞는 것과 어긋난다는 뜻에서의 비정상이다.
이제 묻거니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카우츠키의 이 역사적·경제적 결론을 어떻게 대했는가? 그 결론은 옳은가 그른가? 역사적·경제적 이론의 카우츠키가 옳은가, 아니면 그 이론이 기본에서 심리학적인 바우어가 옳은가? 바우어의 의심할 바 없는 '민족적 기회주의', 그의 문화적 민족 자치 옹호, 그의 민족주의적 심취("군데군데서 민족적 계기의 강화"라고 카우츠키는 표현했다), 그의 "민족적 계기의 거대한 과장과 국제적 계기의 완전한 망각"(카우츠키)은, 민족국가를 만들려는 지향의 힘에 대한 그의 과소평가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물음을 세우지조차 않았다. 그는 이 연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바우어의 이론적 견해의 전체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민족문제에서 역사적·경제적 이론과 심리학적 이론을 맞세워 보는 일조차 아예 하지 않았다. 그는 카우츠키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은 지적에 머물렀다.
"...이 '가장 좋은' 민족국가란 이론적으로 발전시키고 이론적으로 옹호하기는 쉽지만 현실에는 맞지 않는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사회민주주의 평론』[2] 1908년 제6호, 499쪽)
그리고 이 단호한 선언을 뒷받침한다며, 거대 자본주의 열강의 발전과 제국주의가 작은 인민들의 '자결권'을 환상으로 만든다는 논의가 이어진다. "형식적으로 독립해 있는 몬테네그로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그리스인, 부분적으로는 심지어 스위스인의 '자결'을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외친다. "그들의 독립 자체가 정치 투쟁과 '유럽 협조 체제'의 외교 놀음의 산물인데?!"(500쪽) 조건에 가장 잘 맞는 것은 "카우츠키가 생각하듯 민족국가가 아니라 약탈 국가"라는 것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등이 가진 식민지의 크기에 대한 수십 개의 숫자가 제시된다.
이런 논의를 읽으면, 무엇이 어디에 관계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저자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작은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큰 국가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부르주아 국가들 사이에서 다른 민족들을 약탈적으로 억누르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제국주의와 식민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짐짓 무게 잡고 카우츠키에게 가르치려 들다니. 이것은 우습고 유치한 잔재주다. 이 모든 것이 문제와는 털끝만큼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작은 국가들만이 아니라 예컨대 러시아도 '부유한' 부르주아 나라들의 제국주의적 금융자본의 위력에 경제적으로 온통 종속되어 있다. 발칸의 미니어처 국가들만이 아니라 19세기의 아메리카도 경제적으로는 유럽의 식민지였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카우츠키도 어느 마르크스주의자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민족 운동과 민족국가의 문제에서 그것은 정말이지 동문서답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민족의 정치적 자결의 문제, 민족의 국가적 독립의 문제를 민족의 경제적 자립과 독립의 문제로 바꿔치기했다. 이것은 마치 부르주아 국가에서 의회, 곧 인민 대표 회의의 최고 지위라는 강령 요구를 논의하는 사람이, 부르주아 나라에서는 어떤 질서에서든 대자본이 최고 지위를 차지한다는 자기의 전적으로 옳은 확신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영리한 짓이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인 아시아의 대부분이 '열강'의 식민지이거나 극도로 종속되고 민족적으로 억압받는 국가의 처지에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널리 알려진 사정이, 아시아 자체에서 상품 생산의 가장 완전한 발전과 자본주의의 가장 자유롭고 넓고 빠른 성장의 조건이 오직 일본에서만, 곧 오직 독립된 민족국가에서만 만들어졌다는 다툼 없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흔드는가? 이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이며, 그래서 그 자신이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고 식민지를 예속시키기 시작했다. 자본주의가 무너지기 전에 아시아가 유럽처럼 독립된 민족국가들의 체계로 짜일 수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아시아를 깨워 그곳 어디에서나 민족 운동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이 운동들의 경향이 아시아에 민족국가들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 자본주의 발전의 가장 좋은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그런 국가라는 것은 논박할 수 없이 남는다. 아시아의 본보기는 카우츠키에게 유리하게,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불리하게 말한다.
발칸 국가들의 본보기도 그에게 불리하게 말한다. 발칸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가장 좋은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은 바로 이 반도에 독립된 민족국가들이 만들어지는 그만큼이라는 것을 지금은 누구나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앞선 문명 인류의 본보기도, 발칸의 본보기도, 아시아의 본보기도, 로자 룩셈부르크를 거슬러 카우츠키의 명제가 무조건 옳음을 증명한다. 민족국가는 자본주의의 규칙이요 '규범'이며, 민족적으로 얼룩덜룩한 국가는 뒤떨어짐이거나 예외다. 민족 관계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에 가장 좋은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민족국가다. 물론 이것은 그런 국가가 부르주아적 관계의 토대 위에서 민족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없앨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민족국가를 만들려는 지향을 낳는 강력한 경제적 요인들을 시야에서 놓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강령에서 '민족자결'이 역사적·경제적 관점에서 정치적 자결, 국가적 독립, 민족국가의 형성 말고 다른 뜻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곧 계급적·프롤레타리아적 관점에서 '민족국가'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요구에 대한 지지에 어떤 조건이 붙는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말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결'의 개념 정의에 머물면서 한 가지만 더 짚어 두면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개념의 내용('민족국가')을 알고 있지만, 그의 기회주의적 지지자들, 리브만류, 셈콥스키류, 유르케비치류는 그것조차 모른다!
2. 문제의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제기
어떤 사회적 문제든 그것을 따져 볼 때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무조건적 요구는, 문제를 일정한 역사적 틀 안에 세우는 것, 그다음에 한 나라의 이야기라면(예컨대 그 나라를 위한 민족 강령이라면) 같은 역사 시대 안에서 그 나라를 다른 나라들과 구별해 주는 구체적 특수성을 셈에 넣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이 무조건적 요구를 우리의 문제에 적용하면 무엇을 뜻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민족 운동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자본주의의 두 시대를 엄격히 갈라야 할 필요를 뜻한다. 한쪽에는 봉건제와 절대주의가 무너지는 시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사회와 국가가 짜이는 시대가 있다. 이때 민족 운동은 처음으로 대중적인 것이 되어, 출판과 대의 기관 참여 따위를 통해 주민의 모든 계급을 어떤 식으로든 정치에 끌어들인다. 다른 쪽에는 완전히 짜인 자본주의 국가들의 시대, 입헌 제도가 자리 잡은 지 오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적대가 크게 발전한 시대, 자본주의 붕괴의 전야라 부를 수 있는 시대가 있다.
첫째 시대에 전형적인 것은 민족 운동의 각성이며, 정치적 자유 일반과 특히 민족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 맞물려 주민 가운데 가장 수가 많고 가장 '움직이기 무거운' 층인 농민이 그 운동에 끌려 들어오는 것이다. 둘째 시대에 전형적인 것은 대중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의 부재다. 이때 발전한 자본주의는 이미 상품 유통에 완전히 끌려 들어온 민족들을 갈수록 가깝게 하고 뒤섞으면서, 국제적으로 융합된 자본과 국제적 노동운동의 적대를 앞자리에 세운다.
물론 두 시대는 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도적 고리로 이어져 있으며, 게다가 나라마다 민족적 발전의 속도, 주민의 민족적 구성과 분포 등이 다르다. 이 모든 일반 역사적 조건과 구체적 국가적 조건을 셈에 넣지 않고 그 나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민족 강령에 손을 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의의 가장 약한 곳에 부딪힌다. 그는 우리 강령 제9항을 겨냥한 '거친' 낱말들의 모음으로 자기 논문을 유별난 열심으로 장식한다. 이 조항은 '두루뭉술'하다느니 '판박이'라느니 '형이상학적 문구'라느니, 끝도 없다. 형이상학(마르크스적 의미에서, 곧 반변증법)과 공허한 추상을 이렇게 훌륭하게 규탄하는 저술가라면, 문제의 구체적·역사적 고찰의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리라 기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하나의 특정한 나라 러시아의, 하나의 특정한 시대 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민족 강령이다. 그렇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가 어떤 역사적 시대를 지나고 있는가, 이 나라의 이 시대 민족문제와 민족 운동의 구체적 특수성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세우고 있으리라?
이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정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 역사적 시대에 러시아에서 민족문제가 어떻게 서 있는가, 이 점에서 러시아의 특수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석의 그림자조차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듣는 말은 이런 것이다. 발칸에서는 민족문제가 아일랜드에서와 다르게 제기된다는 것, 마르크스는 1848년의 구체적 조건에서 폴란드와 체코의 민족 운동을 이러저러하게 평가했다는 것(마르크스 발췌문 한 쪽), 엥겔스는 스위스 삼림 칸톤들의 오스트리아에 맞선 투쟁과 1315년의 모르가르텐 전투를 이러저러하게 평가했다는 것(엥겔스 인용문 한 쪽과 카우츠키의 해당 논평), 라살은 16세기 독일 농민 전쟁을 반동적이라 여겼다는 것 따위다.
이 지적과 인용 들이 새로움으로 빛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라살이 개별 나라들의 구체적·역사적 문제를 어떻게 따져 갔는가를 거듭거듭 되새기는 것은 독자에게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교훈적인 인용문들을 다시 읽노라면,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신을 얼마나 우스운 처지에 세웠는지가 유난히 또렷하게 보인다. 그는 여러 나라 여러 시기의 민족문제에 대한 구체적·역사적 분석의 필요성을 웅변으로, 성난 목소리로 설교한다. 그러면서 20세기 초의 러시아가 자본주의 발전의 어떤 역사적 단계를 지나고 있는지, 이 나라 민족문제의 특수성이 무엇인지 규정하려는 시도는 티끌만큼도 하지 않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른 이들이 문제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따진 본보기들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마치 선한 의도로 지옥 가는 길이 얼마나 자주 닦이는지를, 좋은 충고가 그것을 실제로 쓸 의사나 능력의 없음을 얼마나 자주 가려 주는지를 일부러 강조하려는 것만 같다.
교훈적인 대비 하나를 보자. 폴란드 독립이라는 구호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 공장 제품을 파는 '폴란드의 공업 발전'의 빠름을 증명한 자기의 1898년 저작을 근거로 든다. 자결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이것으로 증명된 것은 슐라흐타의 옛 폴란드의 소멸 따위뿐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와 폴란드를 묶어 주는 요인들 가운데 지금은 이미 현대 자본주의적 관계의 순전히 경제적인 요인들이 우세하다는 결론으로 어느새 슬그머니 끊임없이 넘어간다.
그러다 우리의 로자가 자치 문제로 넘어가면, 논문 제목은 '민족문제와 자치' 일반인데도 폴란드 왕국의 자치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증명하기 시작한다(이에 대해서는 『프로스베셰니예』 1913년 제12호를 보라). 폴란드의 자치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의 국가 제도를 경제적·정치적·생활적·사회학적 표지들의 총합으로 특징짓는데, 그 합이 주는 것이 '아시아적 전제(專制)'의 개념이다(『평론』 제12호, 137쪽).
이런 종류의 국가 제도가 매우 큰 견고성을 갖는 것은, 그 나라 경제에 완전히 가부장적인 전자본주의적 특징이 우세하고 상품 경제와 계급 분화의 발전이 보잘것없는 경우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국가 제도가 뚜렷이 전자본주의적 성격을 띤 나라에 자본주의가 빠르게 발전하는 민족적으로 경계 지어진 지역이 존재한다면, 이 자본주의적 발전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것과 전자본주의적 국가 제도의 모순은 커지고, 앞선 지역이 전체에서 분리될 가능성, '현대 자본주의적' 유대가 아니라 '아시아적·전제적' 유대로 전체와 묶여 있는 그 지역이 분리될 가능성은 커진다.
이렇게 로자 룩셈부르크는 부르주아적 폴란드와의 관계에서 러시아 권력의 사회적 구조라는 문제에서조차 앞뒤를 전혀 맞추지 못했고, 러시아 민족 운동의 구체적·역사적 특수성 문제는 세우지조차 않았다.
바로 이 문제에 우리는 머물러야 한다.
3. 러시아 민족문제의 구체적 특수성과 러시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개조
"...'민족자결권'이라는 원칙의 신축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순전한 상투어로서 분명 러시아에 사는 인민들만이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스웨덴,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민족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현대 사회주의 정당의 어느 강령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평론』 제6호, 483쪽)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주의 강령 제9항에 맞선 원정의 첫머리에 이렇게 쓴다. 이 강령 조항을 '순전한 상투어'로 이해하도록 우리에게 떠안기면서,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이 바로 그 죄에 빠진다. 이 조항이 "분명 러시아에도 독일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우스울 만큼 대담하게 선언하면서 말이다.
분명한 것은, 하고 우리는 답하겠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기 논문에서 김나지야 학생들의 수업 교재로 알맞을 논리적 오류 모음집을 내놓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저 장광설은 온통 얼토당토않은 소리이며 문제의 역사적·구체적 제기에 대한 조롱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어린애처럼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풀이한다면, 그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민족 운동에 관계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아주 쉽다. 그렇다면, 그리고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그러한데, 이 강령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민족 운동의 모든 경우에 '두루뭉술하게', '상투어'로서 관계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우리 강령이 그런 운동이 존재하는 경우에만 관계된다는 결론도 그에 못지않게 분명했을 것이다.
이 분명한 사정들을 생각해 보았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기가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았을 것이다. '상투어'를 내놓는다고 우리를 나무라면서 그가 우리에게 맞서 든 논거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민족 운동이 없는 나라들의 강령에는 민족자결이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랍도록 영리한 논거다!
여러 나라의 정치적·경제적 발전과 그 마르크스주의 강령들을 비교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거대한 의의를 갖는다. 현대 국가들의 공통된 자본주의적 본성도, 그 발전의 공통 법칙도 의심할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비교는 할 줄 알고 해야 한다. 그 기초 중의 기초 조건은, 비교되는 나라들의 발전의 역사적 시대가 비교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밝히는 것이다. 예컨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농업 강령을 서유럽의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루스카야 미슬』의 트루베츠코이 공작처럼) 완전한 무지렁이들뿐이다. 우리 강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농업 개조의 문제에 답을 주는데, 서방 나라들에서는 그런 것이 화제에도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민족문제도 마찬가지다. 서방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것은 오래전에 해결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서방의 강령에서 찾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여기서 바로 가장 중요한 것을 시야에서 놓쳤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개조가 오래전에 끝난 나라들과 끝나지 않은 나라들의 차이 말이다.
이 차이에 모든 핵심이 있다. 이 차이의 완전한 무시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기나긴 논문을 공허하고 알맹이 없는 상투어들의 모음으로 만드는 것이다.
서유럽 대륙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는 꽤 뚜렷한 기간, 대략 1789년부터 1871년까지를 아우른다. 바로 이 시대가 민족 운동과 민족국가 창설의 시대였다. 이 시대가 끝나자 서유럽은 짜임을 마친 부르주아 국가들의 체계로, 게다가 일반적 규칙으로서 민족적으로 단일한 국가들의 체계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지금 서유럽 사회주의자들의 강령에서 자결권을 찾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는 1905년에야 시작되었다. 러시아, 페르시아, 튀르크, 중국의 혁명들, 발칸의 전쟁들. 이것이 우리 시대 우리 '동방'의 세계적 사건들의 사슬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의 사슬에서 수많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민족 운동의 각성을, 민족적으로 독립되고 민족적으로 단일한 국가를 만들려는 지향의 각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장님뿐이다. 러시아가 이웃 나라들과 함께 바로 이 시대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오직 그 때문에 우리 강령에 민족자결권 조항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위에 든 로자 룩셈부르크의 인용문을 조금만 더 이어 가 보자.
"...특히," 그는 쓴다. "민족 구성이 몹시 얼룩덜룩한 국가에서 활동하며 민족문제가 첫째가는 역할을 하는 당의 강령, 곧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은 민족자결권의 원칙을 담고 있지 않다."(같은 곳)
그러니까 '특히' 오스트리아의 본보기로 독자를 설득하려는 것이다. 구체적·역사적 관점에서 이 본보기에 조리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보자.
첫째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결이라는 기본 문제를 세워 보자. 오스트리아에서 그것은 1848년에 시작되어 1867년에 끝났다. 그때부터 거의 반세기 동안 그곳에는 대체로 자리 잡은 부르주아 헌법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토대 위에서 합법적 노동자 정당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 발전의 내적 조건에는(곧 오스트리아 일반과 그 개별 민족들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관점에서는) 도약을 낳는 요인들, 민족적으로 독립된 국가의 형성이 그 동반물의 하나일 수 있는 그런 요인들이 없다. 자기의 비교로써 러시아가 이 점에서 비슷한 조건에 있다고 전제하면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뿌리부터 그릇된 반역사적 가정을 할 뿐만 아니라 저도 모르게 청산주의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둘째로, 우리가 다루는 문제에서 특히 큰 의의를 갖는 것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서 민족체들 사이의 관계가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는 오랫동안 독일인이 우세한 국가였을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독일인들은 독일 민족 전체 속에서의 헤게모니를 주장했다. 이 '주장'은, 상투어와 판박이와 추상을 그리도 싫어한다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부디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거니와, 1866년의 전쟁으로 부서졌다. 오스트리아에서 지배하는 민족인 독일 민족은 1871년에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독립 독일 국가의 밖에 남았다. 다른 한편, 헝가리인들이 독립된 민족국가를 만들려던 시도는 1849년에 이미 러시아 농노 군대의 타격으로 좌초했다.
이렇게 하여 몹시 독특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헝가리인들 쪽에서, 그리고 뒤이어 체코인들 쪽에서, 바로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온전함의 보존으로 향하는 지향이 생겨난 것이다. 더 약탈적이고 힘센 이웃들에게 아예 짓밟혀 버릴 수도 있는 민족적 독립을 지키려는 이해에서 말이다! 이 독특한 상황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두 중심의(이원적) 국가로 짜였고, 지금은 세 중심의(삼원적: 독일인, 헝가리인, 슬라브인) 국가로 바뀌어 가고 있다.
러시아에 이와 비슷한 것이 있는가? 우리나라에 '이민족들'이 더 나쁜 민족적 억압의 위협 때문에 대러시아인과의 결합으로 향하는 지향이 있는가?
이 물음을 세워 보기만 해도, 민족자결 문제에서 러시아를 오스트리아와 비교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무의미하고 판박이 같고 무지한 짓인지 보인다.
민족문제에 관한 러시아의 독특한 조건은 우리가 오스트리아에서 본 것과 정반대다. 러시아는 단일한 민족적 중심, 대러시아라는 중심을 가진 국가다. 대러시아인은 거대한 연속된 영토를 차지하며 수는 대략 7천만 명에 이른다. 이 민족국가의 특수성은 첫째로 '이민족들'(전체로 합치면 인구의 다수인 57퍼센트)이 바로 변경 지역들에 살고 있다는 것, 둘째로 이 이민족들에 대한 억압이 이웃 나라들(유럽 나라들만도 아니다)에서보다 훨씬 세다는 것, 셋째로 변경 지역에 사는 억압받는 민족체들이 적잖은 경우 국경 저쪽에 더 큰 민족적 독립을 누리는 동포를 갖고 있다는 것(국가의 서쪽과 남쪽 국경의 핀란드인, 스웨덴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만 떠올려 보아도 된다), 넷째로 자본주의의 발전과 문화의 전반적 수준이 '이민족' 변경 지역들에서 국가 중심에서보다 높은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끝으로, 바로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서 부르주아 혁명과 민족 운동의 시기가 시작되어 러시아 안의 친족 민족체들 일부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이렇게 바로 러시아 민족문제의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특수성이, 지금 지나고 있는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민족자결권의 인정을 유난히 절박한 것으로 만든다.
하기야 순전히 사실의 측면에서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령에 민족자결권의 인정이 없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장은 옳지 않다. 민족 강령을 채택한 브륀 대회의 의사록을 펼쳐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루신 사회민주주의자 간케비치가 우크라이나(루신) 대표단 전체의 이름으로(의사록 85쪽),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 레게르가 폴란드 대표단 전체의 이름으로(108쪽), 두 민족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기 인민의 민족적 통일과 자유와 독립을 향한 지향을 자기들의 지향의 하나로 삼는다고 선언한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는 민족자결권을 자기 강령에 직접 내걸지는 않으면서도, 당의 부분들이 민족적 독립의 요구를 내거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상 이것은 물론 민족자결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로자 룩셈부르크의 오스트리아 원용은 모든 면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불리하게 말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4. 민족문제에서의 '실무주의'
우리 강령 제9항에는 '실무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거를 기회주의자들은 유별난 열심으로 받아 물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논거에 어찌나 반했는지, 그의 논문에는 이 '구호'가 한 쪽에 여덟 번씩 되풀이되는 곳도 있다.
제9항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정치를 위한 어떤 실무적 지침도, 민족 문제들의 어떤 실무적 해결도 주지 않는다"고 그는 쓴다.
이 논거를 살펴보자. 이 논거는 또, 제9항이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거나 아니면 모든 민족적 지향을 지지할 의무를 지운다는 식으로도 정식화된다.
민족문제에서 '실무성'의 요구란 무엇을 뜻하는가?
모든 민족적 지향의 지지이거나, 각 민족의 분리 문제에 대한 '예 아니면 아니오'의 답이거나, 아니면 대체로 민족적 요구의 직접적 '실현 가능성'이다.
'실무성' 요구의 가능한 이 세 가지 뜻을 모두 살펴보자.
모든 민족 운동의 첫머리에 자연히 그 헤게몬(지도자)으로 나서는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적 지향의 지지를 실무적인 일이라 부른다. 그러나 민족문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은 (다른 문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를 일정한 방향에서 지지할 뿐, 부르주아지의 정책과 일치하는 일은 결코 없다. 노동자 계급이 부르주아지를 지지하는 것은 오직 민족 간 평화의 이익을 위해서(부르주아지는 그것을 온전히 줄 수 없으며 그것은 완전한 민주화의 정도만큼만 실현될 수 있다), 평등권의 이익을 위해서, 계급투쟁의 가장 좋은 조건을 위해서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들은 바로 부르주아지의 실무주의에 맞서 민족문제에서 원칙적 정책을 내세우며, 부르주아지를 언제나 조건부로만 지지한다. 어느 부르주아지든 민족 문제에서 바라는 것은 자기 민족을 위한 특권이거나 자기 민족의 배타적 이득이며, 바로 이것이 '실무적'이라 불린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온갖 특권에, 온갖 배타성에 반대한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실무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부르주아지에게 끌려다니라는 것, 기회주의에 빠지라는 것이다.
각 민족의 분리 문제에 '예 아니면 아니오'로 답하라? 이것은 매우 '실무적'인 요구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터무니없으며 이론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실천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지의 정책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부르주아지는 언제나 자기의 민족적 요구를 앞자리에 세운다. 무조건적으로 세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민족적 요구는 계급투쟁의 이익에 종속된다. 그 민족의 분리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마무리 지을지, 아니면 다른 민족과의 평등한 지위가 그리할지는 이론적으로 미리 장담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중요한 것은 두 경우 모두에서 자기 계급의 발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에게 중요한 것은 이 발전을 어렵게 만들고 그 과제들을 '자기' 민족의 과제들 뒤로 밀쳐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말하자면 부정적인 요구, 곧 자결권의 인정이라는 요구에 머무르며, 어느 민족에게도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고, 다른 민족의 부담으로 무엇을 주겠다는 의무도 지지 않는다.
이것이 '실무적'이 아닐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이것이 가능한 해결들 가운데 가장 민주주의적인 해결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한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이 보장만이 필요하지만, 각 민족의 부르주아지에게는 다른 민족들의 처지(있을 수 있는 손해)와 상관없는 자기 이득의 보장이 필요하다.
부르주아지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 요구의 '실현 가능성'이다. 프롤레타리아트를 희생시켜 가며 다른 민족의 부르주아지와 흥정하는 영원한 정책은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지에 맞서 자기 계급을 튼튼히 하는 것, 일관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정신으로 대중을 교육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회주의자들에게 '실무적'이 아닐지는 몰라도, 이것이 실제에서는 유일한 보장, 봉건 영주들과 민족주의적 부르주아지를 거슬러 최대한의 민족적 평등권과 평화를 이루는 보장이다.
민족문제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과제 전체는 각 민족의 민족주의적 부르주아지의 관점에서 보면 '실무적이지 않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온갖 민족주의에 적대적인 채로 '추상적' 평등권을, 아주 작은 특권도 원칙적으로 없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실무주의에 대한 자신의 지각없는 찬가로써 바로 기회주의자들에게, 특히 대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한 기회주의적 양보에 대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왜 대러시아 민족주의인가? 러시아에서 대러시아인은 억압하는 민족이고, 민족 문제에서 기회주의는 억압받는 민족들 속에서와 억압하는 민족들 속에서 자연히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민족들의 부르주아지는 자기 요구의 '실무성'의 이름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기의 지향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요청할 것이다. 이러저러한 민족의 분리에 곧바로 '예'라고 말하는 것이, 모든 민족 하나하나의 분리의 권리에 찬성하는 것보다 실무적이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런 실무주의에 반대한다. 평등권과 민족국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민족 프롤레타리아들의 동맹을 무엇보다 높이 치고 무엇보다 앞세우며, 어떤 민족적 요구든 어떤 민족적 분리든 노동자 계급투쟁의 각도에서 평가한다. 실무주의라는 구호는 실제로는 부르주아적 지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구호일 뿐이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분리의 권리를 지지함으로써 당신들은 억압받는 민족들의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렇게 말하고, 기회주의자 셈콥스키가 그를 따라 되풀이한다. 덧붙이자면 셈콥스키는 청산파 신문에서 이 문제에 대한 청산파 이념을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우리는 답한다. 아니다. 여기서 '실무적' 해결이 중요한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이고,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두 경향의 원칙적 구별이다. 억압받는 민족의 부르주아지가 억압하는 민족과 싸우는 한에서,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누구보다 단호하게 찬성한다. 우리는 억압의 가장 용감하고 일관된 적이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민족의 부르주아지가 자기의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한에서, 우리는 반대한다. 억압하는 민족의 특권과 폭력에 맞선 투쟁, 그리고 억압받는 민족 쪽의 특권 추구에 대한 어떤 묵인도 없을 것.
우리가 분리의 권리라는 구호를 내걸고 선동에서 실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르주아지만이 아니라 억압하는 민족의 봉건 영주들과 절대주의의 손에 놀아나게 된다. 이 논거는 카우츠키가 오래전에 로자 룩셈부르크에 맞서 내놓은 것이며, 이 논거는 논박할 수 없다. 폴란드의 민족주의적 부르주아지를 '도울'까 두려워한 나머지,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령에서 분리의 권리를 부정함으로써 실제로는 대러시아의 검은 백인단을 돕고 있다. 대러시아인의 특권(특권보다 더한 것)과의 기회주의적 화해를 실제로 돕고 있는 것이다.
폴란드의 민족주의와 싸우는 데 정신이 팔린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러시아인의 민족주의를 잊어버렸다. 지금 무엇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이 민족주의인데도 말이다. 바로 그것이 덜 부르주아적이고 더 봉건적이며,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주된 걸림돌이다. 억압받는 민족의 모든 부르주아 민족주의에는 억압에 맞서는 일반 민주주의적 내용이 있으며, 바로 이 내용을 우리는 무조건 지지한다. 자기 민족의 배타성을 향한 지향은 엄격히 갈라내면서, 폴란드 부르주아가 유대인을 억누르려는 지향과 싸우면서, 등등.
이것은 부르주아와 속물의 관점에서 '실무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민족문제에서 유일하게 실무적이고 원칙적이며 민주주의와 자유와 프롤레타리아 동맹을 실제로 돕는 정책이다.
모두에게 분리의 권리를 인정할 것. 분리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 하나하나는 온갖 불평등, 온갖 특권, 온갖 배타성을 없애는 관점에서 평가할 것.
억압하는 민족의 처지에서 보자. 다른 인민들을 억압하는 인민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 없다. 대러시아 주민[3]의 자유의 이익은 그런 억압과의 투쟁을 요구한다. 억압받는 민족들의 운동을 짓눌러 온 길고 긴 몇 세기의 역사, '상층' 계급들이 그런 짓누름을 체계적으로 선전해 온 역사는, 대러시아 인민 자신의 자유라는 사업에 편견 따위의 형태로 거대한 방해물을 만들어 놓았다.
대러시아의 검은 백인단은 이 편견들을 의식적으로 떠받치고 부채질한다. 대러시아 부르주아지는 그 편견들과 화해하거나 그에 맞추어 처신한다. 대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편견들과 체계적으로 싸우지 않고서는 자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고 자유를 향한 길을 닦아 낼 수 없다.
독립되고 자립적인 민족국가의 창설은 러시아에서 아직 대러시아 민족 하나만의 특권으로 남아 있다. 우리 대러시아 프롤레타리아들은 어떤 특권도 옹호하지 않으며, 이 특권도 옹호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의 국가의 토대 위에서 싸우고 지금의 국가의 모든 민족 노동자들을 통합하며, 이런저런 민족적 발전의 길을 장담할 수 없고, 모든 가능한 길을 거쳐 우리의 계급적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온갖 민족주의와 싸우지 않고서는, 여러 민족의 평등을 지키지 않고서는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예컨대 우크라이나가 독립 국가를 이룰 운명인지는 미리 알 수 없는 1000가지 요인에 달려 있다. 그리고 헛되이 '점을 치려' 들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의심할 바 없는 것 위에 굳게 서 있다. 그런 국가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권리 말이다. 우리는 이 권리를 존중하며, 우크라이나인 위에 서는 대러시아인의 특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이 권리를 인정하는 정신으로, 어느 민족의 것이든 국가적 특권을 부정하는 정신으로 대중을 교육한다.
부르주아 혁명의 시대에 모든 나라가 지나온 도약들 속에서는 민족국가의 권리를 둘러싼 충돌과 투쟁이 가능하고 또 있음 직하다. 우리 프롤레타리아들은 대러시아인의 특권의 반대자임을 미리 선언하며, 이 방향에서 우리의 모든 선전과 선동을 이끌어 간다.
'실무주의'를 뒤쫓다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른 민족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된 실천적 과제를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온갖 국가적·민족적 특권에 맞서, 모든 민족의 자기 민족국가에 대한 권리, 똑같은 권리를 위해 날마다 선동하고 선전하는 과제 말이다. 이 과제가 민족문제에서 우리의 (지금의) 주된 과제다. 오직 이 길로만 우리는 민주주의의 이익을, 온갖 민족의 모든 프롤레타리아들의 평등한 동맹의 이익을 지켜 내기 때문이다.
이 선전이 억압자 대러시아인의 관점에서도, 억압받는 민족들의 부르주아지의 관점에서도 '실무적이지 않다'고 하자(양쪽 다 확실한 예나 아니오를 요구하며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불명확'하다고 나무란다). 실제로는 바로 이 선전이, 오직 이것만이 대중의 참으로 민주주의적이고 참으로 사회주의적인 교육을 보장한다. 오직 이런 선전만이, 러시아가 얼룩덜룩한 민족국가로 남는 경우에는 민족 간 평화의 가장 큰 가능성을, 여러 민족국가로의 분할 문제가 서는 경우에는 가장 평화롭고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무해한) 분할을 보장한다.
민족문제에서 유일하게 프롤레타리아적인 이 정책을 더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대러시아 자유주의가 '민족자결'을 대하는 태도와 노르웨이의 스웨덴으로부터의 분리의 본보기를 살펴보자.
5. 민족문제에서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사회주의적 기회주의자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령에 맞선 투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기의 주된 '으뜸 패'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논거가 이런 것임을 우리는 보았다. 자결권의 인정은 억압받는 민족들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대한 지지와 같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로자 룩셈부르크는 말한다. 이 권리를 민족들에 대한 온갖 폭력에 맞선 투쟁으로만 이해한다면 특별한 강령 조항은 필요 없다. 사회민주주의는 대체로 온갖 민족적 폭력과 불평등에 반대하니 말이다.
첫째 논거는, 카우츠키가 거의 20년 전에 논박할 수 없이 지적했듯이, 민족주의의 책임을 아픈 머리에서 성한 머리로 떠넘기는 것이다. 억압받는 민족들의 부르주아지의 민족주의를 두려워한 나머지 로자 룩셈부르크는 실제로는 대러시아인의 검은 백인단 민족주의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논거는 본질에서, 민족적 평등권의 인정이 분리의 권리의 인정을 포함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에서 겁먹고 비켜서는 것이다. 포함한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우리 강령 제9항의 원칙적 올바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는 민족적 평등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얼버무림과 발뺌으로는 여기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위의 논거들과 그 비슷한 모든 논거를 검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의 여러 계급이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연구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이 검증은 의무다. 객관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 조항을 둘러싼 계급들의 상호 관계를 잡아야 한다. 이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로자 룩셈부르크는 바로 그 형이상학성, 추상성, 상투어, 두루뭉술함 따위의 죄에 빠진다. 그가 자기 논적들에게 헛되이 뒤집어씌우려 하는 그 죄에 말이다.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곧 러시아의 모든 민족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령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지배 계급들의 입장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관료층'(부정확한 낱말이라 미안하다)과 통합귀족회 유형의 봉건 지주들의 입장은 널리 알려져 있다. 민족체들의 평등권도 자결권도 무조건 부정한다. 농노제 시절에서 가져온 낡은 구호, 곧 전제(專制)·정교·인민성이 그것인데, 이때 인민성이란 오직 대러시아의 것만을 가리킨다. 우크라이나인조차 '이민족'으로 선포되고 그들의 모국어조차 박해받는다.
'6월 3일 체제'의 입법과 통치 체계에서 권력 참여에, 아주 조촐한 참여일망정 어쨌든 참여에 '부름받은' 러시아 부르주아지를 보자. 10월당이 이 문제에서 실제로 우파를 따라간다는 데는 많은 말을 허비할 것도 없다. 유감스러운 것은,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대러시아 부르주아지, 곧 진보당과 카데트의 입장에 훨씬 적은 주의를 돌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입장을 연구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민족자결권을 논의할 때 추상성과 근거 없음의 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프라브다』와 『레치』의 논전은, '불편한' 물음에 대한 직답을 외교적으로 피하는 데 그토록 능란한 카데트당의 이 주요 기관지로 하여금 그래도 몇 가지 값진 자백을 하게 만들었다. 일은 1913년 여름 리보프(르부프)에서 열린 전우크라이나 학생 대회 때문에 터졌다. 『레치』의 공인 '우크라이나통'이자 우크라이나 담당 기고가인 모길랸스키 씨는, 민족적 사회주의자 돈초프가 부르짖고 이 대회가 찬동한 우크라이나 세파라치야(분리)의 이념에 가장 골라 뽑은 욕설('헛소리', '모험주의' 등)을 퍼붓는 논설을 실었다.
『라보차야 프라브다』는 돈초프 씨와 조금도 연대하지 않으며 그가 민족적 사회주의자라는 것, 많은 우크라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바로 지적하면서도, 『레치』의 어조, 더 정확히는 『레치』의 원칙적 문제 제기가 대러시아의 민주주의자에게, 또는 민주주의자로 통하고 싶은 사람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다.[4] 『레치』더러 돈초프류를 곧바로 반박하라 하라. 그러나 짐짓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러시아 기관지가 분리의 자유를, 분리의 권리를 잊는 것은 원칙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몇 달 뒤 모길랸스키 씨는 『레치』 제331호에서 '해명'을 들고나왔다. 리보프의 우크라이나 신문 『실랴히』에서 돈초프 씨의 반박을 알게 된 것인데, 돈초프는 특히 "『레치』의 배외주의적 폭언에 제대로 낙인을 찍은 것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신문뿐"이라고 짚었다. 모길랸스키 씨의 '해명'이란 "돈초프 씨의 처방에 대한 비판"은 "민족자결권의 부정과 아무 공통점이 없다"를 세 번 되풀이한 것이었다.
"말해 두어야 할 것은," 모길랸스키 씨는 썼다. "'민족자결권'도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무슨 물신(들으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족 생활의 건강하지 못한 조건은 민족자결에서 건강하지 못한 경향들을 낳을 수 있으며, 이 경향들을 드러내는 것이 곧 민족자결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시피 '물신' 운운하는 자유주의자의 문구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문구와 완전히 같은 정신의 것이었다. 모길랸스키 씨가 정치적 자결의 권리, 곧 분리의 권리를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에 직답하기를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뻔했다.
그래서 『프롤레타르스카야 프라브다』(1913년 12월 11일 제4호)는 이 물음을 모길랸스키 씨에게도 카데트 당에도 정면으로 들이댔다.[5]
그러자 『레치』는(제340호) 서명 없는, 곧 공식 편집부 명의의 성명을 실어 이 물음에 답했다. 이 답은 세 가지로 간추려진다.
1) 카데트당 강령 제11항은 민족들의 "자유로운 문화적 자결의 권리"를 곧바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2) 『프롤레타르스카야 프라브다』는, 『레치』의 단언에 따르면, 자결을 분리주의와, 이런저런 민족의 분리와 "가망 없이 뒤섞고" 있다.
3) "실제로 카데트는 러시아 국가로부터의 '민족들의 분리'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나선 적이 결코 없다."(『프롤레타르스카야 프라브다』 1913년 12월 20일 제12호의 논설 「민족적 자유주의와 민족자결권」을 보라.)
먼저 『레치』 성명의 둘째 항에 주의를 돌려 보자. 셈콥스키류, 리브만류, 유르케비치류를 비롯한 기회주의자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잘 보여 주는가. '자결'의 뜻이 '불명확'하다느니 '불확정'하다느니 하는 그들의 아우성과 수다가 실제로는, 곧 러시아의 계급들의 객관적 상호 관계와 계급투쟁이라는 면에서 보면, 자유주의적·군주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연설들의 단순한 재탕이라는 것을!
『프롤레타르스카야 프라브다』가 『레치』의 계몽된 '입헌민주주의자' 신사들에게 세 가지 물음, 곧 1) 국제 민주주의의 전체 역사에서, 특히 19세기 중엽부터, 민족자결이 다름 아닌 정치적 자결, 독립된 민족국가를 만들 권리로 이해되어 왔음을 부정하는가? 2) 1896년 런던 국제 사회주의 대회의 알려진 결정이 같은 뜻을 가짐을 부정하는가? 3) 1902년에 이미 자결에 대해 쓴 플레하노프가 그것을 다름 아닌 정치적 자결로 이해했음을 부정하는가를 들이댔을 때, 카데트 신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한마디도 답하지 않았다. 답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르스카야 프라브다』가 무조건 옳다는 것을 침묵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결' 개념이 불명확하다느니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것을 분리주의와 '가망 없이 뒤섞는다'느니 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아우성은, 문제를 헝클어 민주주의가 널리 확립해 놓은 원칙의 인정을 피하려는 지향 말고 아무것도 아니다. 셈콥스키, 리브만, 유르케비치 같은 신사들이 그렇게 무지하지 않았다면, 노동자들 앞에 자유주의의 정신으로 나서기를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가 보자. 『프롤레타르스카야 프라브다』는 『레치』로 하여금, 카데트 강령의 '문화적' 자결이라는 말이 다름 아닌 정치적 자결의 부정이라는 뜻임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카데트는 러시아 국가로부터의 '민족들의 분리'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나선 적이 결코 없다." 『레치』의 이 말을 『프롤레타르스카야 프라브다』가 우리 카데트의 '충성'의 본보기로 『노보예 브레먀』와 『젬시나』에 추천한 것은 까닭 없는 일이 아니었다. 『노보예 브레먀』는 제13563호에서, 물론 '유대 놈'을 들먹이고 카데트에게 갖은 가시 돋친 말을 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선언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정치적 지혜의 공리를 이루는 것"(곧 민족자결권, 분리의 권리의 인정)"이 요즘 시대에는 카데트 진영에서조차 의견 대립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있다."
카데트는 "러시아 국가로부터의 민족들의 분리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나선 적이 결코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노보예 브레먀』와 원칙적으로 완전히 같은 입장에 섰다. 카데트의 민족적 자유주의의 기초의 하나가, 푸리시케비치류와의 가까움이, 이 후자들에 대한 이념적·정치적 그리고 실천적·정치적 종속이 바로 여기에 있다. "카데트 신사들은 역사를 배웠고," 『프롤레타르스카야 프라브다』는 썼다. "'잡아끌고 내놓지 않는' 푸리시케비치류의 유서 깊은 권리의 실제 적용이 얼마나, 부드럽게 말해 '포그롬을 닮은' 행동으로 이어지곤 했는지 잘 알고 있다." 푸리시케비치류의 전능의 봉건적 원천과 성격을 잘 알면서도, 카데트는 다름 아닌 이 계급이 만들어 놓은 관계와 경계의 토대 위에 통째로 올라선다. 이 계급이 만들거나 정한 관계와 경계에 유럽적이지 않은 것, 반유럽적인 것(일본인과 중국인에 대한 부당한 멸시로 들리지 않는다면 아시아적인 것이라 말했을 터이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면서도, 카데트 신사들은 그것을 넘을 수 없는 한계로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푸리시케비치류에의 순응, 그들 앞에서의 굽실거림, 그들의 지위를 흔들까 하는 두려움, 인민 운동으로부터, 민주주의로부터 그들을 지켜 주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프롤레타르스카야 프라브다』는 썼다. "이 편견들과의 체계적 투쟁 대신 농노주들의 이익과 지배 민족의 가장 악질적인 민족주의적 편견들에 순응하는 것을 뜻한다."
역사를 알고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사람들답게, 카데트는 오늘날 동유럽과 아시아를 특징짓는 민주주의 운동, 그 둘을 문명된 자본주의 나라들의 본보기를 따라 뜯어고치려는 이 운동이, 봉건 시대, 푸리시케비치류의 전능과 부르주아지·소부르주아지 넓은 층의 무권리의 시대가 정해 놓은 경계들을 반드시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르스카야 프라브다』와 『레치』의 논전이 일으킨 문제가 결코 단순한 문필상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 그것이 현실 정치의 뜨거운 쟁점을 건드렸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1914년 3월 23~25일의 카데트당 마지막 협의회가 증명해 주었다. 이 협의회에 대한 『레치』의 공식 보고(1914년 3월 26일 제83호)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는다.
"민족 문제들도 유난히 활발하게 토의되었다. 키예프에서 온 대의원들은, N. V. 네크라소프와 A. M. 콜류바킨이 이에 가세했는데, 민족문제가 무르익어 가는 큰 요인이며 전보다 더 결연하게 그것을 맞으러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F. F. 코코시킨은 지적하기를"(이 '그러나'는 셰드린의 '그러나', 곧 "귀는 이마 위로는 자라지 않는다, 자라지 않아"에 해당하는 '그러나'다) "강령도 이전의 정치적 경험도 '민족체들의 정치적 자결'이라는 '신축적인 정식'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룰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카데트 협의회의 이 더없이 주목할 만한 논의는 모든 마르크스주의자와 모든 민주주의자의 커다란 주의를 받아 마땅하다. (괄호 안에 짚어 두자면, 분명 소식에 매우 밝고 코코시킨 씨의 생각을 틀림없이 옳게 전한 『키옙스카야 미슬』은, 그가 특히, 물론 논적들에 대한 경고의 형태로, 국가 '해체'의 위협을 내세웠다고 덧붙였다.)
『레치』의 공식 보고는 장막을 되도록 조금 걷고 되도록 많이 감추도록 명수의 외교술로 작성되어 있다. 그래도 카데트 협의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기본 윤곽에서 분명하다. 우크라이나의 사정을 아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대의원들과 '좌파' 카데트는 바로 정치적 민족자결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코코시킨 씨가 이 '정식'을 '조심스럽게 다루라'고 호소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카데트 협의회 대의원들에게 물론 알려져 있었을 카데트 강령에 서 있는 것은 정치적 자결이 아니라 '문화적' 자결이다. 그러니까 코코시킨 씨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대의원들로부터, 좌파 카데트로부터 강령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자결에 맞서 '문화적' 자결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자결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국가 '해체'의 위협을 내세우면서, '정치적 자결'의 정식을 '신축적'이라 부르면서(완전히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신으로!), 코코시킨 씨가 카데트당의 더 '좌파'적이거나 더 민주주의적인 분자들에 맞서, 그리고 우크라이나 부르주아지에 맞서 대러시아의 민족적 자유주의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더없이 분명하다.
코코시킨 씨는 카데트 협의회에서 승리했다. 『레치』 보고의 배신자 같은 낱말 '그러나'가 그것을 보여 준다. 대러시아의 민족적 자유주의가 카데트 사이에서 개가를 올린 것이다. 이 승리가,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카데트를 따라 '민족체들의 정치적 자결이라는 신축적인 정식'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지각없는 몇몇 사람들의 머리를 맑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코코시킨 씨의 생각의 흐름을 본질에서 살펴보자. '이전의 정치적 경험'을 근거로 들면서(곧 분명, 대러시아 부르주아지가 자기의 민족적 특권 때문에 겁을 먹고 그 겁으로 카데트당을 겁먹게 한 1905년의 경험을 근거로), 국가 '해체'의 위협을 내세우면서, 코코시킨 씨는 정치적 자결이 분리의 권리와 독립된 민족국가 형성의 권리 말고 다른 것을 뜻할 수 없다는 것을 훌륭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묻거니와, 코코시킨 씨의 이 우려를 민주주의 일반의 관점에서, 특히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코코시킨 씨는 분리의 권리의 인정이 국가 '해체'의 위험을 키운다고 우리를 설득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잡아끌고 내놓지 않는다'를 좌우명으로 삼는 파수막지기 믜므레초프의 관점이다. 민주주의 일반의 관점에서는 정반대다. 분리의 권리의 인정은 국가 '해체'의 위험을 줄인다.
코코시킨 씨는 완전히 민족주의자들의 정신으로 논한다. 그들은 자기네 마지막 대회에서 우크라이나인 '마제파주의자들'을 후려쳤다. 우크라이나 운동은, 하고 사벤코 씨는 외쳤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유대의 약화를 위협한다. 오스트리아가 우크라이나 애호로 우크라이나인과 오스트리아의 유대를 튼튼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사벤코류가 오스트리아의 죄로 꼽는 바로 그 방법으로, 곧 우크라이나인에게 모국어의 자유, 자치제, 자치 의회 따위를 줌으로써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의 유대를 '튼튼히' 해 보려 할 수는 왜 없는가다.
사벤코류와 코코시킨류의 논의는 완전히 한 성질의 것이며, 순전히 논리의 면에서 똑같이 우습고 터무니없다. 이 나라에서든 저 나라에서든 우크라이나 민족체가 더 큰 자유를 가질수록 그 민족체와 그 나라의 유대가 더 튼튼해지리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민주주의의 모든 전제와 결정적으로 갈라서지 않고서야 이 기초 중의 기초 진리를 다툴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민족체 그 자체에게 분리의 자유보다, 독립된 민족국가를 만들 자유보다 더 큰 자유가 있을 수 있는가?
자유주의자들이 (그리고 지각없음으로 그들을 재탕하는 이들이) 헝클어 놓는 이 문제를 한층 더 밝히기 위해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이혼 문제를 보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기 논문에서, 중앙집권적 민주주의 국가는 개별 부분들의 자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도 입법의 모든 가장 중요한 분야를, 그 가운데 이혼에 대한 입법을 중앙 의회의 관할에 남겨 두어야 한다고 쓴다. 민주주의 국가의 중앙 권력으로 이혼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이 세심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반동배는 이혼의 자유에 반대하며, 그것을 '조심스럽게 다루라'고 호소하고, 그것이 '가족의 해체'를 뜻한다고 아우성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이렇게 여긴다. 반동배는 위선을 떨고 있으며, 실제로는 경찰과 관료의 전능을, 한쪽 성(性)의 특권과 여성에 대한 최악의 억압을 지키고 있다. 실제로 이혼의 자유는 가족적 유대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문명 사회에서 유일하게 가능하고 튼튼한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그 유대를 튼튼히 하는 것을 뜻한다.
자결의 자유, 곧 분리의 자유의 지지자들을 분리주의 조장이라고 나무라는 것은, 이혼의 자유의 지지자들을 가족적 유대의 파괴 조장이라고 나무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음이요 똑같은 위선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부르주아적 결혼이 그 위에 서 있는 특권과 매수의 옹호자들이 이혼의 자유에 반대하고 나서듯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결의 자유, 곧 민족들의 분리의 자유의 부정은 지배 민족의 특권과 민주주의적 통치 방법을 희생시키는 경찰적 통치 수법의 옹호를 뜻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관계가 낳는 정치 놀음이 이런저런 민족의 분리에 대한 의원들이나 정론가들의 몹시 경솔하고 심지어 그저 실없는 수다를 이따금 낳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그런 수다에 겁먹을 수 있는 것은(또는 겁먹은 체할 수 있는 것은) 반동배뿐이다. 민주주의의 관점, 곧 국가 문제를 주민 대중이 결정한다는 관점에 서는 사람은, 정치꾼들의 수다에서 대중의 결정까지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음을 잘 안다. 주민 대중은 지리적·경제적 유대의 의의를, 큰 시장과 큰 국가의 장점을 나날의 경험으로 훌륭하게 알고 있으며, 민족적 억압과 민족적 알력이 공동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온갖 경제적 관계를 가로막을 때에만 분리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자본주의적 발전과 계급투쟁의 자유의 이익이 바로 분리하는 쪽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쪽에서 코코시킨 씨의 논의에 다가가 보아도, 그것은 터무니없음의 극치이며 민주주의의 원칙들에 대한 조롱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논의에는 일정한 논리가 있다. 대러시아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익의 논리다. 코코시킨 씨는 카데트당의 다수가 그렇듯 이 부르주아지의 돈주머니의 하인이다. 그는 이 부르주아지의 특권 일반을, 특히 그 국가적 특권을 지키며, 푸리시케비치와 함께, 그와 나란히 지킨다. 다만 푸리시케비치는 농노제의 몽둥이를 더 믿고, 코코시킨과 그 일당은 이 몽둥이가 1905년에 심하게 금이 갔음을 보고서 대중을 속이는 부르주아적 수단에 더 기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컨대 '국가 해체'의 유령으로 소시민과 농민을 겁주는 것, '인민의 자유'를 역사적 토대와 결합한다는 문구로 그들을 속이는 것 말이다.
민족들의 정치적 자결의 원칙에 대한 자유주의적 적대의 현실적인 계급적 의의는 하나, 오직 하나다. 민족적 자유주의, 곧 대러시아 부르주아지의 국가적 특권의 옹호다. 그리고 바로 지금, 6월 3일 체제의 시대에 민족자결권에 맞서 무장하고 나선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속의 기회주의자들, 곧 청산파 셈콥스키, 분트주의자 리브만, 우크라이나의 소부르주아 유르케비치, 이들 모두는 실제로는 그저 민족적 자유주의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노동자 계급을 민족적 자유주의의 이념으로 타락시키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 계급과 그 반자본주의 투쟁의 이익은 모든 민족 노동자들의 완전한 연대와 가장 긴밀한 통일을 요구하며, 어느 민족체의 것이든 부르주아지의 민족주의 정책에 대한 반격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결권, 곧 억압받는 민족들의 분리의 권리를 부정하고 나서는 것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억압받는 민족들의 부르주아지의 모든 민족적 요구를 지지하는 일에 나서는 것도, 똑같이 프롤레타리아 정책의 과제로부터의 이탈이요 노동자들을 부르주아 정책에 종속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고용 노동자에게는 자기의 주된 착취자가 이민족 부르주아지보다 우선하는 대러시아 부르주아지인지, 유대인 부르주아지보다 우선하는 폴란드인 부르주아지인지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자기 계급의 이익을 깨달은 고용 노동자는 대러시아 자본가들의 국가적 특권에도, 자기들이 국가적 특권을 가지게 되면 지상 낙원이 오리라는 폴란드나 우크라이나 자본가들의 달콤한 약속에도 무심하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어떻게든, 단일한 얼룩덜룩한 국가에서도 개별 민족국가들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나아갈 것이다.
어느 경우든 고용 노동자는 착취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며, 착취에 맞선 성공적인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주의로부터 독립할 것을, 여러 민족 부르주아지들의 첫째 자리 다툼에서 프롤레타리아들이 말하자면 완전히 중립적일 것을 요구한다. 어느 한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민족 부르주아지의 특권을 조금이라도 지지하면, 그것은 다른 민족 프롤레타리아트의 불신을 반드시 불러일으키고 노동자들의 국제적 계급 연대를 약하게 만들며 부르주아지가 좋아라 하도록 노동자들을 갈라놓을 것이다. 그리고 자결권 또는 분리권의 부정은 실천에서 지배 민족의 특권에 대한 지지를 뜻할 수밖에 없다.
노르웨이의 스웨덴으로부터의 분리라는 구체적인 본보기를 들면 우리는 이것을 한층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6. 노르웨이의 스웨덴으로부터의 분리
로자 룩셈부르크는 바로 이 본보기를 들고 이렇게 논한다.
"연방적 관계의 역사에서 최근의 사건, 곧 노르웨이의 스웨덴으로부터의 분리는, 한때 사회애국주의적인 폴란드 신문(크라쿠프의 『나프시우트』를 보라)이 국가적 분리를 향한 지향의 힘과 진보성의 반가운 표현이라고 부랴부랴 받아 문 것인데, 곧바로 연방주의와 그로부터 나오는 국가적 분리가 결코 진보성이나 민주주의의 표현이 아니라는 통렬한 증거로 바뀌었다. 스웨덴 국왕을 폐하고 노르웨이에서 몰아낸 이른바 노르웨이 '혁명' 뒤에 노르웨이인들은 태연히 다른 국왕을 뽑았고, 공화국 수립안을 국민투표로 형식적으로 물리쳤다. 온갖 민족 운동과 온갖 독립 비스름한 것의 겉핥기 숭배자들이 '혁명'이라 선포한 것은, 스웨덴 귀족이 떠안긴 국왕 대신 제 돈으로 '제' 국왕을 갖고 싶다는 농민적·소부르주아적 지방주의의 단순한 표현이었으며, 따라서 혁명성과는 정말이지 아무 공통점도 없는 운동이었다. 아울러 이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파기의 역사는, 그때까지 존재한 연방이 이 경우에도 어느 정도로 순전히 왕조적 이해의 표현일 뿐이었는지, 따라서 군주주의와 반동의 한 형태였는지를 다시 한번 증명해 주었다."(『평론』)
이것이 이 조항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하는 문자 그대로 전부다!! 그리고 고백하거니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 본보기에서 한 것보다 더 도드라지게 자기 입장의 속수무책을 드러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얼룩덜룩한 민족국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자결권 또는 분리권을 인정하는 강령이 필요한가였고, 지금도 그것이다.
그렇다면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이 든 노르웨이의 본보기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의 저자는 몸을 비틀고 요리조리 빠지며 재치를 부리고 『나프시우트』를 향해 소란을 피우지만, 물음에는 답하지 않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문제의 본질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고 아무 이야기나 다 한다!!
노르웨이의 소부르주아들이 제 돈으로 제 국왕을 갖고 싶어 하며 공화국 수립안을 국민투표로 부결시킴으로써 매우 고약한 속물적 자질을 드러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나프시우트』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 역시 똑같이 고약하고 똑같이 속물적인 자질을 드러냈다는 것도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무슨 상관인가??
이야기되고 있던 것은 민족자결권과, 이 권리에 대한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였다! 그런데 왜 로자 룩셈부르크는 물음에 답하지 않고 변죽만 울리는가?
쥐에게는 고양이보다 힘센 짐승이 없다고들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보아하니 '프라키'보다 힘센 짐승이 없는 모양이다. '프라키'란 '폴란드사회당' 이른바 혁명 프락치야를 일상어로 이르는 말인데, 크라쿠프의 신문 『나프시우트』는 이 '프락치야'의 이념을 함께한다. 이 '프락치야'의 민족주의에 맞선 로자 룩셈부르크의 투쟁은 우리의 저자를 어찌나 눈멀게 했는지, 그의 시야에서 『나프시우트』 말고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
『나프시우트』가 '예'라고 말하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곧바로 '아니오'를 선포하는 것을 자기의 신성한 의무로 여긴다. 그런 수법으로 자기가 드러내는 것이 『나프시우트』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정반대로 '프라키'에 대한 우스운 종속임을, 크라쿠프 개미탑의 관점보다 조금이라도 더 깊고 넓은 관점에서 사물을 볼 능력의 없음임을 전혀 생각지 못하면서 말이다. 『나프시우트』는 물론 매우 나쁜,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은 기관지다. 그러나 그것이, 일단 노르웨이의 본보기를 들었으면 그것을 본질에서 따져 보는 일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이 본보기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따지려면, 우리는 끔찍하게 무서운 '프라키'의 고약한 자질이 아니라, 첫째로 노르웨이의 스웨덴으로부터의 분리의 구체적인 역사적 특수성에, 둘째로 이 분리 때 두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가 무엇이었는가에 머물러야 한다.
노르웨이를 스웨덴과 가깝게 하는 지리적·경제적·언어적 유대는, 많은 비(非)대러시아 슬라브 민족들과 대러시아인의 유대 못지않게 긴밀하다. 그러나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연합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로자 룩셈부르크가 '연방'을 말하는 것은 완전히 헛짚은 것이고, 그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한 말일 뿐이다. 노르웨이는 나폴레옹 전쟁 때 군주들이 노르웨이인들의 의사를 거슬러 스웨덴에 넘겨준 것이며, 스웨덴인들은 노르웨이를 복속시키기 위해 군대를 들여보내야 했다.
그 뒤 오랜 수십 년 동안, 노르웨이가 누린 몹시 넓은 자치(자기 의회 따위)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와 스웨덴 사이의 알력은 끊임없이 존재했고, 노르웨이인들은 스웨덴 귀족의 멍에를 벗어던지려 온 힘을 다해 애썼다. 1905년 8월에 그들은 마침내 그것을 벗어던졌다. 노르웨이 의회는 스웨덴 국왕이 노르웨이 국왕이기를 그쳤다고 결의했고, 뒤이어 실시된 국민투표, 곧 노르웨이 인민에게 물은 결과는 스웨덴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에 압도적 다수(수백 표에 맞선 약 20만 표)를 주었다. 스웨덴인들은 얼마간 망설인 끝에 분리의 사실과 화해했다.
이 본보기는 현대의 경제적·정치적 관계에서 민족의 분리가 어떤 토양 위에서 가능하고 실제로 일어나는지, 그리고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의 환경에서 분리가 때로 어떤 형태를 띠는지 우리에게 보여 준다.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의 문제가 자기에게 아무래도 좋다고 선언할 작정이 아니라면(그런 경우 그는 물론 사회민주주의자이기를 그칠 터이다), 어느 사회민주주의자도 다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본보기는 민족의 분리를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충돌이 1905년 노르웨이와 스웨덴 사이에서 해결된 그런 방식으로만 해결되고 '러시아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도록, 의식 있는 노동자들이 체계적으로 선전하고 준비하는 것이 의무임을 사실로써 증명한다. 바로 이것이 민족자결권 인정이라는 강령 요구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기 이론에 불편한 이 사실을, 노르웨이 속물들의 속물성과 크라쿠프의 『나프시우트』에 대한 으르렁거리는 공격으로 얼버무려 넘겨야 했다. 민족자결권이 '유토피아'라느니 '금 접시에 밥 먹을 권리'와 같다느니 하는 자기의 문구들을 이 역사적 사실이 어느 정도로 돌이킬 수 없이 반박하는지 그는 훌륭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구들은 동유럽 민족체들 사이의 현재 세력 관계가 불변이라는 옹색하고 자기만족적인 기회주의적 믿음을 표현할 뿐이다.
더 가 보자. 민족자결의 문제에서도 다른 모든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 크게, 민족 내부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결정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문제도 얌전히 비켜 갔다. 자기가 든 노르웨이의 본보기에서 이 문제를 따지는 것이 자기 '이론'에 얼마나 불편한지 느꼈던 것이다.
분리를 둘러싼 충돌에서 노르웨이와 스웨덴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은 어떠했으며 어떠해야 했는가? 노르웨이의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물론 분리 뒤에는 공화국에 투표했을 것이다.[6] 다르게 투표한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유럽 사회주의에 둔하고 속물적인 기회주의가 때로 얼마나 많은지 증명해 줄 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없으며, 우리가 이 조항을 건드리는 것은 오직 로자 룩셈부르크가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로 사태의 본질을 뭉개려 하기 때문이다. 분리 문제에 대해 노르웨이의 사회주의 강령이 노르웨이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특정한 의견을 갖도록 의무 지웠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 않았다고, 곧 노르웨이의 사회주의자들이 자유로운 계급투쟁을 위해 노르웨이의 자치가 얼마나 충분한가, 스웨덴 귀족과의 끝없는 알력과 충돌이 경제생활의 자유를 얼마나 가로막는가 하는 문제를 열어 두었다고 치자. 그러나 노르웨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귀족에 맞서 노르웨이의 농민 민주주의를 위해(농민 민주주의의 온갖 속물적 옹졸함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했다는 것은 다툴 수 없다.
그러면 스웨덴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웨덴의 지주들이 스웨덴의 사제들의 부추김을 받으며 노르웨이에 대한 전쟁을 설교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노르웨이는 스웨덴보다 훨씬 약하고, 이미 스웨덴의 침공을 겪은 바 있으며, 스웨덴 귀족은 자기 나라에서 매우 큰 무게를 갖고 있었으므로, 이 설교는 매우 심각한 위협이었다. 스웨덴의 코코시킨류가 '민족들의 정치적 자결이라는 신축적인 정식'을 '조심스럽게 다루라'는 호소로, '국가 해체'의 위험을 그럴싸하게 색칠하는 것으로, '인민의 자유'가 스웨덴 귀족의 토대와 양립할 수 있다는 단언으로 스웨덴 대중을 오래오래 부지런히 타락시켰으리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가 지주의 이데올로기·정책과도 '코코시킨류'의 이데올로기·정책과도 온 힘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면, (코코시킨류도 인정하는) 민족들의 평등권 일반에 더하여 민족자결권을, 노르웨이의 분리의 자유를 지켜 내지 않았다면, 사회주의의 사업과 민주주의의 사업을 배신한 것이 되리라는 데는 티끌만 한 의심의 여지도 없다.
노르웨이인의 분리권을 스웨덴 노동자들이 인정함으로써 노르웨이와 스웨덴 노동자들의 긴밀한 동맹, 그들의 완전한 동지적 계급 연대는 득을 보았다. 노르웨이 노동자들이, 스웨덴 노동자들은 스웨덴 민족주의에 물들지 않았으며 그들에게는 노르웨이 프롤레타리아와의 형제애가 스웨덴 부르주아지와 귀족의 특권보다 높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군주들과 스웨덴의 귀족들이 노르웨이에 떠안긴 유대의 파괴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노동자들 사이의 유대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스웨덴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정치의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부르주아적 관계의 토대 위에서는 노르웨이인을 스웨덴인에게 폭력으로 다시 복속시키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두 민족 노동자들의 완전한 평등권과 계급 연대를, 스웨덴 부르주아지에 맞선 투쟁에서도 노르웨이 부르주아지에 맞선 투쟁에서도 지키고 지켜 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덧붙이자면 여기서, '프라키'가 이따금 우리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견해차를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에 맞서 '이용'하려 드는 시도가 얼마나 근거 없고 그저 진지하지도 못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프라키'는 프롤레타리아적·사회주의적 정당이 아니라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정당, 폴란드판 사회혁명가당 비슷한 것이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이 당의 통합은 화제에 오른 적도 없고 오를 수도 없었다. 반대로,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접근과 결합을 '후회'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민족주의적 지향과 심취에 흠뻑 젖은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참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이고 참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당을 만들어 낸 거대한 역사적 공로는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의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 공로가 위대한 공로인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강령 제9항을 향해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은 그 사정 덕분이 아니라 그 슬픈 사정에도 불구하고다.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자결권'은 물론 러시아인들에게만큼 중요한 의의를 갖지 않는다. 민족주의에 눈먼 폴란드 소부르주아지와의 투쟁이 폴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유별난(때로는 아마 약간 지나친) 열심으로 '막대를 반대쪽으로 구부리게' 만들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폴란드의 분리에 반대한다는 것을 그들의 죄로 삼을 생각을 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오직,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령에서 자결권 인정의 필요를 부정하려 들 때뿐이다.
이것은 본질에서, 크라쿠프의 지평에서 이해할 수 있는 관계들을 러시아의 모든 인민과 민족, 대러시아인까지 포함한 그 규모에 옮겨 놓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 국제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뒤집힌 폴란드 민족주의자'가 된다는 뜻이다.
국제주의적 사회민주주의는 바로 민족자결권 인정의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로 넘어간다.
7. 1896년 런던 국제 대회의 결정
이 결정은 이렇게 되어 있다.
"대회는 모든 민족의 완전한 자결권(Selbstbestimmungsrecht)에 찬성함을 선언하며, 지금 군사적·민족적 또는 그 밖의 절대주의의 멍에 아래 고통받고 있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공감을 표한다. 대회는 이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전 세계의 의식 있는(Klassenbewusste, 자기 계급의 이익을 깨달은) 노동자들의 대열에 들어와, 그들과 함께 국제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목적의 실현을 위해 싸울 것을 호소한다."[7]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의 기회주의자들, 셈콥스키·리브만·유르케비치 같은 신사들은 이 결정을 아예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는 알고 있으며, 우리 강령과 같은 표현, 곧 '자결'이 서 있는 그 전문을 인용까지 한다.
묻거니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기의 '독창적인' 이론의 길에 놓인 이 장애물을 어떻게 치우는가?
오, 아주 간단하다. ...여기서 무게 중심은 결의의 둘째 부분에 있다... 그것의 선언적 성격... 오해에 의해서만 그것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우리 저자의 속수무책과 갈팡질팡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보통, 일관되게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강령 조항들의 선언적 성격을 들먹이는 것은 기회주의자들뿐이다. 그 조항들에 맞선 직접 논쟁을 겁내어 피하면서 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번에 셈콥스키·리브만·유르케비치 같은 신사들의 서글픈 무리에 끼게 된 것은 아무래도 까닭 없는 일이 아닌 모양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인용된 결의를 옳다고 여기는지 그르다고 여기는지 곧바로 선언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는 요리조리 빠지며 숨는다. 마치 결의의 둘째 부분까지 읽고 나면 첫째 부분을 잊어버리는, 또는 런던 대회 이전에 사회주의 신문에서 벌어진 논쟁을 들어 본 적도 없는 부주의하고 무지한 독자를 셈에 넣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러시아의 의식 있는 노동자들 앞에서, 중요한 원칙적 문제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결의를 비판적으로 따져 보는 수고조차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쉽게 발로 밟고 지나갈 수 있으리라 상상한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런던 대회 전의 논쟁에서는, 주로 독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잡지 『노이에 차이트』 지면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관점이 표명되었고, 이 관점은 본질에서 인터내셔널 앞에서 패배를 겪었다! 이것이 사태의 핵심이며, 러시아의 독자는 특히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논쟁은 폴란드의 독립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세 가지 관점이 표명되었다.
1) '프라키'의 관점. 그들의 이름으로 나선 것은 헤케르였다. 그들은 인터내셔널이 자기 강령으로 폴란드 독립의 요구를 인정하기를 바랐다. 이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 관점은 인터내셔널 앞에서 패배를 겪었다.
2) 로자 룩셈부르크의 관점.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폴란드의 독립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민족자결권의 선포란 말도 꺼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관점도 인터내셔널 앞에서 패배를 겪었다.
3) 그때 K. 카우츠키가 로자 룩셈부르크에 맞서 나서서 그의 유물론의 극단적 '일면성'을 증명하며 누구보다 자상하게 발전시킨 관점. 이 관점에 따르면 인터내셔널은 현재 폴란드의 독립을 자기 강령으로 세울 수 없지만,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하고 카우츠키는 말했다, 그런 요구를 얼마든지 내걸 수 있다.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민족적 억압의 환경에서 민족 해방의 과제를 무시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이다.
인터내셔널의 결의에는 바로 이 관점의 가장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명제들이 재현되어 있다. 한쪽에는 모든 민족의 완전한 자결권에 대한, 어떤 왜곡된 해석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히 직접적인 인정이, 다른 쪽에는 그에 못지않게 명료한, 노동자들에게 계급투쟁의 국제적 통일을 요구하는 호소가.
우리는 이 결의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20세기 초 동유럽과 아시아의 나라들에게 바로 이 결의가, 바로 그 두 부분의 뗄 수 없는 결합 속에서, 민족문제에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정책의 유일하게 옳은 지침을 준다고 생각한다.
위의 세 관점에 조금 더 자세히 머물러 보자.
알다시피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폴란드 독립 요구의 적극적 지지를 서유럽 민주주의 전체의, 하물며 사회민주주의의 무조건적 의무로 여겼다. 지난 세기 40~60년대의 시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의 시대, 러시아 '농민 개혁'의 시대에 이 관점은 전적으로 옳았으며 유일하게 일관되게 민주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관점이었다. 러시아와 대다수 슬라브 나라의 인민 대중이 아직 깨어날 줄 모르는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이 나라들에 독자적인 대중적 민주주의 운동이 없는 동안, 폴란드의 슐라흐타 해방 운동은 전러시아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전슬라브적, 나아가 전유럽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거대한 첫째가는 의의를 얻었던 것이다.[8]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 관점이 19세기의 둘째 3분기 또는 셋째 4분기에 전적으로 옳았다면, 20세기에 이르러 그것은 옳기를 그쳤다. 독자적인 민주주의 운동과 심지어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대다수 슬라브 나라에서, 심지어 가장 뒤떨어진 슬라브 나라의 하나인 러시아에서까지 깨어났다. 슐라흐타의 폴란드는 사라지고 자본주의적 폴란드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런 조건에서 폴란드는 자기의 예외적인 혁명적 의의를 잃지 않을 수 없었다.
1896년에 PPS('폴란드사회당', 지금의 '프라키')가 다른 시대의 마르크스의 관점을 '못 박으려' 했다면, 그것은 이미 마르크스주의의 문자를 마르크스주의의 정신에 맞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폴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폴란드 소부르주아지의 민족주의적 심취에 맞서 나서서 폴란드 노동자들에게 민족문제가 부차적 의의를 가짐을 보여 주고,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순전히 프롤레타리아적인 당을 만들고, 폴란드와 러시아 노동자의 계급투쟁에서의 가장 긴밀한 동맹이라는 더없이 중요한 원칙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전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이것이, 20세기 초의 인터내셔널이 동유럽과 아시아에 대해 민족들의 정치적 자결의 원칙을, 그들의 분리권을 남아도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는 뜻인가? 그것은 더없이 큰 부조리였을 터이니,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튀르크·러시아·중국 국가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개조가 끝났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고, (실천적으로는) 절대주의에 대한 기회주의와 같았을 것이다.
아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시작된 시대, 민족 운동이 깨어나고 날카로워지는 시대,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이 생겨나는 시대의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이 정당들의 민족 정책의 과제는 두 측면을 지녀야 한다. 모든 민족의 자결권 인정, 왜냐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개조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왜냐하면 노동자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식으로가 아니라, 코코시킨식으로가 아니라 일관되게, 진지하게, 진심으로 민족들의 평등권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국가의 모든 민족 프롤레타리아들의 계급투쟁의 가장 긴밀한, 뗄 수 없는 동맹, 그 국가의 역사의 온갖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가 개별 국가들의 경계를 어떻게 뜯어고치든 상관없이.
바로 이 두 측면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를 1896년 인터내셔널의 결의가 정식화하고 있다. 1913년 여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협의회의 결의도 그 원칙적 기초에서 바로 그러하다. 이 결의가 제4항에서는 자결권, 분리권을 인정함으로써 민족주의에 최대치를 '내주는' 듯하면서(실제로는 모든 민족의 자결권의 인정에는 민주주의의 최대치와 민족주의의 최소치가 있다), 제5항에서는 어느 부르주아지의 것이든 민족주의적 구호에 맞서 노동자들에게 경고하고 모든 민족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통일된 프롤레타리아 조직들로 통일되고 융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모순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모순'을 볼 수 있는 것은, 예컨대 스웨덴 노동자들이 노르웨이가 독립 국가로 분리할 자유를 지켜 냈을 때 스웨덴과 노르웨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과 계급 연대가 왜 득을 보았는지 이해할 능력이 없는 아주 납작한 머리들뿐이다.
8. 공상가 카를 마르크스와 실무적인 로자 룩셈부르크
폴란드의 독립을 '유토피아'라 선언하고 이것을 신물이 나도록 자주 되풀이하면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비꼬아 외친다. 아일랜드의 독립 요구는 왜 내세우지 않는가?
보아하니 '실무적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카를 마르크스가 아일랜드 독립 문제를 어떻게 대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여기에 머물러 볼 만하다. 구체적인 민족적 독립 요구에 대한, 기회주의적이 아니라 참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의 분석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마르크스는 자기가 아는 사회주의자들의 의식성과 신념을 검증하느라, 그의 표현대로 '이를 만져 보는' 버릇이 있었다. 로파틴을 알게 된 마르크스는 1870년 7월 5일 엥겔스에게 이 젊은 러시아 사회주의자에 대한 더없이 호의적인 평을 쓰면서도 이렇게 덧붙인다.
"...약한 조항은 폴란드다. 이 조항에 대해 로파틴은 잉글랜드인이, 이를테면 옛 학파의 잉글랜드 차티스트가 아일랜드에 대해 말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이 말한다."
억압하는 민족에 속한 사회주의자에게 마르크스는 억압받는 민족에 대한 그의 태도를 캐묻고, 지배 민족들(잉글랜드와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공통된 결함을 단박에 드러낸다. 짓눌린 민족들에 대한 자기의 사회주의적 의무의 몰이해, '대국' 부르주아지에게서 물려받은 편견의 되새김질 말이다.
아일랜드에 대한 마르크스의 긍정적 발언으로 넘어가기 전에 미리 말해 둘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민족문제 일반을 엄격히 비판적으로 대했으며 그 조건부 역사적 의의를 평가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엥겔스는 1851년 5월 23일 마르크스에게, 역사 연구가 폴란드에 대한 비관적 결론으로 자기를 이끈다고, 폴란드의 의의는 일시적인 것으로 러시아의 농업 혁명 때까지만이라고 썼다. 역사에서 폴란드인의 역할은 '용감한 어리석음'이다. "폴란드가 설사 러시아에 맞서서만이라도 진보를 성공적으로 대표한다거나 무슨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는 한순간도 가정할 수 없다." 러시아에는 '슐라흐타의 졸음에 겨운 폴란드'보다 문명과 교육과 공업과 부르주아지의 요소가 더 많다.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오데사 앞에서 바르샤바와 크라쿠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엥겔스는 폴란드 슐라흐타 봉기의 성공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천재적 통찰이 그리도 많이 담긴 이 모든 생각도, 12년 뒤 러시아가 아직 잠들어 있고 폴란드가 끓어오르고 있을 때,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폴란드 운동을 가장 깊고 뜨거운 공감으로 대하는 것을 조금도 가로막지 않았다.
1864년, 인터내셔널의 창립 선언을 작성하며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1864년 11월 4일), 마치니의 민족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쓴다. "선언에서 국제 정치를 이야기할 때 나는 나라들에 대해 말하지 민족체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러시아를 폭로하지 그보다 덜 중요한 국가들을 폭로하지 않는다"고 마르크스는 쓴다. '노동자 문제'에 견주어 민족문제가 종속적 의의를 갖는다는 것은 마르크스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민족 운동의 무시로부터는 하늘과 땅만큼 멀다.
1866년이 온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파리의 '프루동파 도당'에 대해 쓴다. 그들은 "민족체들을 무의미라 선언하고 비스마르크와 가리발디를 공격한다. 배외주의와의 논쟁으로서 이 전술은 유익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프루동을 믿는 자들이(여기 있는 나의 좋은 벗들, 라파르그와 롱게도 그들에 속한다), 프랑스에서 신사들이 빈곤과 무지를 폐지할 때까지 온 유럽이 제 엉덩이를 깔고 조용히 얌전히 앉아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우스꽝스럽다."(1866년 6월 7일 편지)
"어제," 마르크스는 1866년 6월 20일 쓴다. "인터내셔널 평의회에서 지금의 전쟁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토론은 예상대로 '민족체' 문제와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 문제로 귀착했다... '청년 프랑스'의 대표자들(노동자 아닌 자들)은 온갖 민족체와 민족 그 자체가 낡아 빠진 편견이라는 관점을 내세웠다. 프루동주의적 슈티르너주의다... 온 세계는 프랑스인들이 사회 혁명을 이룰 만큼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인들은 내가 연설을, 민족체들을 폐지해 버린 우리의 벗 라파르그를 비롯한 이들이 우리에게 프랑스어로, 곧 모인 사람의 10분의 9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으로 시작하자 크게 웃었다. 나아가 나는, 라파르그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민족체들의 부정을 모범적인 프랑스 민족에 의한 그것들의 흡수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고 넌지시 말해 주었다."
마르크스의 이 모든 비판적 지적에서 나오는 결론은 분명하다. 노동자 계급은 민족문제를 물신으로 만드는 일을 무엇보다 삼가야 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반드시 모든 민족을 독자적 생활로 깨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적 민족 운동이 일단 생겨난 이상, 그것을 뿌리치는 것, 그 속의 진보적인 것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는 것은 실제로는 민족주의적 편견에 굴복하는 것, 곧 '자기' 민족을 '모범 민족'으로(또는, 우리가 덧붙이자면, 국가를 세울 배타적 특권을 지닌 민족으로) 인정하는 것이다.[9]
그러나 아일랜드 문제로 돌아가자.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은 그의 편지들에서 뽑은 다음 대목들에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페니언주의를 지지하는 잉글랜드 노동자들의 시위를 나는 온갖 방법으로 불러일으키려 애썼다... 전에 나는 아일랜드의 잉글랜드로부터의 분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지금 나는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설사 분리 뒤에 일이 연방으로 간다 하더라도." 마르크스는 1867년 11월 2일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같은 해 11월 30일의 편지에서 그는 덧붙였다.
"우리는 잉글랜드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충고해야 하는가? 내 의견으로 그들은 연합의 Repeal(파기)"(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연합의 파기, 곧 아일랜드의 잉글랜드로부터의 분리) "를 자기 강령의 조항으로 삼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 1783년의 요구를, 다만 민주화하고 현대의 조건에 맞춘 것을. 이것이 아일랜드 해방의 유일하게 합법적인 형태이며, 따라서 잉글랜드 당의 강령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형태다. 두 나라 사이의 단순한 인적 연합이 오래 존속할 수 있을지는 나중에 경험이 보여 주어야 한다...
...아일랜드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이다.
1. 자치와 잉글랜드로부터의 독립.
2. 농업 혁명..."
아일랜드 문제에 거대한 중요성을 부여하며, 마르크스는 독일 노동자 연합에서 이 주제로 한 시간 반짜리 보고들을 했다(1867년 12월 17일 편지).
엥겔스는 1868년 11월 20일 편지에서 "잉글랜드 노동자들 사이의 아일랜드인에 대한 증오"를 짚고, 거의 한 해 뒤(1869년 10월 24일) 이 주제로 돌아와 쓴다.
"아일랜드에서 러시아까지는 il n'y a qu'un pas(한 걸음뿐이다)... 아일랜드 역사의 본보기에서, 한 인민이 다른 인민을 예속시켰다는 것이 그 인민에게 얼마나 큰 불행인지 볼 수 있다. 잉글랜드의 온갖 비열함은 모두 아일랜드라는 영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크롬웰 시대는 아직 더 연구해야 하지만, 어쨌든 나에게 의심할 바 없는 것은, 아일랜드를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새 귀족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었다면 잉글랜드에서도 일이 다르게 돌아갔으리라는 점이다."
지나는 길에 1869년 8월 18일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를 짚어 두자.
"포즈난에서 폴란드 노동자들이 베를린의 동지들의 도움 덕분에 승리로 파업을 이끌었다. '자본 씨'에 맞선 이 투쟁은, 파업이라는 그 낮은 형태에서조차, 민족적 편견을 부르주아 신사들 입의 평화 낭송보다 진지하게 끝장낼 것이다."
마르크스가 인터내셔널에서 아일랜드 문제로 편 정책은 다음에서 보인다.
1869년 11월 18일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아일랜드 사면에 대한 영국 내각의 태도 문제를 놓고 인터내셔널 평의회에서 1시간 15분 동안 연설했으며 다음 결의를 제안했다고 쓴다.
"결의한다.
아일랜드의 애국자들을 석방하라는 아일랜드의 요구에 대한 답변에서 글래드스턴 씨는 아일랜드 민족을 고의로 모욕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사면에, 악정의 희생자들에게나 그들이 대표하는 인민에게나 똑같이 굴욕적인 조건들을 달고 있다.
글래드스턴은 자기의 공적 지위에 묶여 있으면서도 아메리카 노예주들의 반란을 공공연히 성대하게 환영한 바 있으며, 이제 와서 아일랜드 인민에게 수동적 복종의 교리를 설교하러 나서고 있다.
아일랜드 사면에 대한 그의 정책 전체는, 글래드스턴 씨가 그 폭로로써 자기의 정적인 토리당 내각을 무너뜨렸던 바로 그 '정복의 정책'의 영락없는 표현이다.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는 아일랜드 인민이 사면 캠페인을 이끌어 가는 그 용감하고 굳세고 드높은 태도에 찬탄을 표한다.
이 결의는 국제노동자협회의 모든 지부와 협회에 연결된 유럽과 아메리카의 모든 노동자 조직에 통지되어야 한다."
1869년 12월 10일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 평의회에서 할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자기 보고가 다음과 같이 짜일 것이라고 쓴다.
"...'아일랜드에 대한 정의'라는 온갖 '국제적' 그리고 '인도주의적' 문구와는 완전히 별개로, 그런 것은 인터내셔널 평의회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는 전제이므로, 잉글랜드 노동자 계급의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이익이 아일랜드와의 지금의 연계의 파기를 요구한다. 이것이 나의 가장 깊은 확신이며, 그 근거의 일부는 잉글랜드 노동자들 자신에게조차 밝힐 수 없다. 나는 오랫동안 잉글랜드 노동자 계급의 고양으로 아일랜드의 체제를 뒤엎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뉴욕 트리뷴』"(마르크스가 오래 기고한 미국 신문) "에서 언제나 이 견해를 옹호했다. 문제를 더 깊이 연구한 결과 나는 그 반대를 확신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노동자 계급은 아일랜드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잉글랜드에서 잉글랜드 반동의 뿌리는 아일랜드의 예속에 있다."(강조는 마르크스)
이제 독자들에게 아일랜드 문제에서의 마르크스의 정책이 완전히 분명해졌을 것이다.
'공상가' 마르크스는 어찌나 '실무적이지 못한'지, 반세기 뒤에도 실현되지 않은 아일랜드의 분리에 찬성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이 정책은 무엇에서 나온 것이며, 잘못은 아니었는가?
처음에 마르크스는 아일랜드를 해방할 것은 억압받는 민족의 민족 운동이 아니라 억압하는 민족 속의 노동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민족 운동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모든 민족체의 완전한 해방을 줄 수 있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승리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민족들의 부르주아 해방 운동과 억압하는 민족 속의 프롤레타리아 해방 운동 사이의 가능한 모든 상호 관계를 미리 셈해 두는 것(바로 이 문제가 현대 러시아의 민족문제를 그토록 어렵게 만든다)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사정은, 잉글랜드 노동자 계급이 꽤 오랫동안 자유주의자들의 영향에 빠져 그들의 꼬리가 되고 자유주의적 노동 정책으로 제 머리를 잘라 버리는 쪽으로 흘러갔다. 아일랜드의 부르주아 해방 운동은 힘을 얻어 혁명적 형태들을 띠었다. 마르크스는 자기 견해를 재검토하고 바로잡는다. "한 인민이 다른 인민을 예속시켰다는 것은 그 인민에게 불행이다." 아일랜드가 잉글랜드의 억압에서 해방되기 전에는 잉글랜드의 노동자 계급도 해방되지 못한다. 잉글랜드의 반동은 아일랜드의 예속으로 튼튼해지고 길러진다(러시아의 반동이 러시아에 의한 뭇 민족의 예속으로 길러지듯이!).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에서 '아일랜드 민족', '아일랜드 인민'에 대한 공감의 결의를 통과시키며(영리한 L. Vl. 씨라면 계급투쟁을 잊었다고 가엾은 마르크스를 박살 냈으리라!), 아일랜드의 잉글랜드로부터의 분리를 설교한다. "설사 분리 뒤에 일이 연방으로 간다 하더라도."
마르크스의 이 결론의 이론적 전제는 무엇인가? 잉글랜드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이 대체로 오래전에 끝났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야 잉글랜드 자유주의자들의 개혁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처음에 기대한 만큼 빠르게 잉글랜드에서 자본주의가 뒤엎어졌다면, 아일랜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전민족적 운동이 설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단 생겨난 이상, 마르크스는 잉글랜드 노동자들에게 그것을 지지하라고, 그것에 혁명적 충격을 주라고, 자기의 자유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라고 충고한다.
1860년대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경제적 유대는 물론 러시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의 유대보다 한층 긴밀했다. 아일랜드 분리의 '실무성 없음'과 '실현 불가능성'은 (지리적 조건만으로도, 또 잉글랜드의 가없는 식민지 위력만으로도) 한눈에 들어왔다. 연방주의의 원칙적 적이면서도 마르크스는 이 경우 연방까지 허용한다.[10] 아일랜드의 해방이 개량주의의 길이 아니라 혁명의 길로, 잉글랜드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받는 아일랜드 인민 대중의 운동의 힘으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말이다. 역사적 과제의 그런 해결만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과 사회 발전의 속도에 가장 이로웠으리라는 것은 어떤 의심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일은 다르게 되었다. 아일랜드 인민도 잉글랜드 프롤레타리아트도 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잉글랜드 자유주의자들과 아일랜드 부르주아지의 초라한 흥정으로 이제야 (얼스터의 본보기가 얼마나 더디게인지 보여 주거니와) 아일랜드 문제가 (유상의) 토지 개혁과 (아직 도입되지 않은) 자치로 해결되고 있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상가'였다는, '실현 불가능한' 민족적 요구를 내세웠다는, 아일랜드의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페니언' 운동의 소부르주아적 성격은 의심할 바 없다)의 영향에 넘어갔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아일랜드 문제에서도 일관되게 프롤레타리아적인 정책을, 대중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정신으로 참으로 교육하는 정책을 폈다. 이 정책만이 아일랜드도 잉글랜드도, 필요한 개조가 반세기나 질질 끌리는 것에서, 그 개조가 반동의 비위를 맞추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불구가 되는 것에서 구할 수 있었다.
아일랜드 문제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책은, 억압하는 민족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 운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오늘날까지 거대한 실천적 의의를 간직한 가장 위대한 본보기를 주었다. 그것은 한 민족의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폭력과 특권이 만들어 낸 국가 경계의 변경을 온갖 나라, 온갖 색깔, 온갖 언어의 속물들이 서둘러 '유토피아적'이라 인정하는 그 '노예 같은 조급함'에 대한 경고를 주었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마르크스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아일랜드의 분리를 자기 구호로 세우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들 쪽의 가장 악질적인 기회주의,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과제의 망각, 잉글랜드의 반동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양보였을 것이다.
9. 1903년 강령과 그 청산파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령을 채택한 1903년 대회의 의사록은 더없이 큰 희귀품이 되었고, 오늘날 노동운동 활동가의 거대한 다수는 강령의 개별 조항들의 동기를 알지 못한다(더구나 이에 관계된 문헌이 다 합법성의 혜택을 누리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1903년 대회에서 우리가 다루는 문제가 어떻게 논의되었는지 따져 보는 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먼저 짚어 두자. '민족자결권'에 관계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문헌이 아무리 빈약할지언정, 그 문헌에서 이 권리가 언제나 분리의 권리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는 것만은 더없이 분명하게 보인다. 이것을 의심하며 제9항이 '불명확'하다는 따위를 선언하는 셈콥스키·리브만·유르케비치 같은 신사들이 '불명확성'을 떠드는 것은 오직 극도의 무지나 무심함 때문이다. 이미 1902년에 『자랴』에서 플레하노프는[11] 강령 초안의 '자결권'을 옹호하며, 이 요구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게는 의무가 아니지만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는 의무"라고 썼다. "우리가 그것을 잊는다면, 또는 대러시아 겨레인 우리 동포들의 민족적 편견을 건드릴까 두려워 그것을 내걸 엄두를 내지 못한다면," 플레하노프는 썼다. "우리 입에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외침은... 부끄러운 거짓말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문제의 조항을 지지하는 기본 논거의 매우 정곡을 찌른 특징짓기다. 어찌나 정곡을 찔렀는지, 제 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강령의 비판자들이 그것을 겁먹은 채 피해 왔고 지금도 피하는 것이 까닭 없는 일이 아니다. 이 조항의 포기는 그것을 무슨 동기로 감싸든 실제로는 대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한 '부끄러운' 양보를 뜻한다.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말하는데 왜 대러시아 민족주의인가? 대러시아인으로부터의 분리가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의 이익, 그들의 계급적 연대의 이익이 민족들의 분리권의 인정을 요구한다. 이것이 12년 전 플레하노프가 위에 인용한 말로 인정한 것이다.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면 우리의 기회주의자들은 아마 자결에 대해 그렇게 많은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플레하노프가 옹호한 이 강령 초안이 승인된 1903년 대회에서 주된 작업은 강령 위원회에 집중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의사록은 작성되지 않았다. 바로 이 조항에 대해서는 그것이 특히 흥미로웠을 터인데, 왜냐하면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표 바르샵스키와 가네츠키가 자기 견해를 옹호하며 '자결권의 인정'을 다투어 본 것은 위원회에서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거(바르샵스키의 연설과 그와 가네츠키의 성명, 의사록 134~136쪽과 388~390쪽에 서술되어 있다)를 우리가 따져 본 로자 룩셈부르크의 폴란드어 논문의 논거와 견주어 보고 싶은 독자는, 이 논거들이 완전히 같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제2차 대회의 강령 위원회는, 그곳에서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맞서 누구보다 많이 나선 것은 플레하노프였는데, 이 논거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이 논거들은 모질게 비웃음을 샀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민족자결권의 인정을 내던지라는 제안의 터무니없음이 어찌나 분명하고 또렷하게 드러났는지,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회 전체 회의에서 자기 논거를 되풀이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은 대러시아인, 유대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최고 회의 앞에서 자기 입장의 가망 없음을 확신하고 대회를 떠났다.
이 역사적 일화는 말할 것도 없이 자기 강령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대회 강령 위원회에서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거가 완전히 분쇄된 것, 그리고 그들이 대회 회의에서 자기 견해를 옹호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것은 더없이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8년의 논문에서 이에 대해 '얌전히' 입을 다문 것도 까닭 없는 일이 아니다. 대회의 기억이 어지간히도 불쾌했던 모양이다! 그는 1903년에 바르샵스키와 가네츠키가 모든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의 이름으로 내놓은, 강령 제9항을 '수정'하자는 우스울 만큼 실패작인 제안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 제안은 로자 룩셈부르크도 다른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도 되풀이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1903년의 자기 패배를 감추며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 사실들에 입을 다물었다 해도, 자기 당의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들을 알아내어 그 의의를 새겨 볼 것이다.
"...우리는 제안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벗들은 1903년 대회를 떠나면서 대회에 이렇게 썼다. "강령 초안의 제7항(지금의 제9항)에 다음의 정식을 줄 것을. 제7항: 국가를 이루는 모든 민족에게 문화 발전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기관들."(의사록 390쪽)
그러니까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때 민족문제에 대해 어찌나 불확정한 견해를 들고나왔는지, 자결 대신 사실상 다름 아닌 저 이름난 '문화적 민족 자치'의 가명을 제안했던 것이다!
거의 믿기지 않게 들리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실이다. 대회 자체에서는, 5표를 가진 분트주의자 5명과 6표를 가진 캅카스인 3명이 있었고 코스트로프의 심의권 표는 셈하지 않더라도, 자결 조항의 삭제에 던져진 표는 단 한 표도 없었다. 이 조항에 '문화적 민족 자치'를 덧붙이는 데에 3표가(골드블라트의 정식, 곧 "민족들에게 문화 발전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기관들의 창설"에 찬성), 리베르의 정식("민족들의 문화 발전의 자유에 대한 권리")에 4표가 나왔을 뿐이다.
러시아의 자유주의 정당인 카데트당이 나타난 지금, 우리는 그 강령에서 민족들의 정치적 자결이 '문화적 자결'로 바뀌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로자 룩셈부르크의 폴란드 벗들은 PPS의 민족주의와 '싸운다'면서 어찌나 성공적으로 싸웠는지,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자유주의 강령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강령을 기회주의라고 나무랐으니, 제2차 대회 강령 위원회에서 이 비난이 웃음만 산 것이 놀라운 일인가!
보았다시피 '민족자결'에 반대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제2차 대회의 대의원들은 '자결'을 어떤 뜻으로 이해했는가?
의사록에서 뽑은 다음 세 대목이 이를 증언한다.
"마르티노프는 '자결'이라는 말에 넓은 해석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것은 민족이 개별 정치적 전체로 떨어져 나올 권리를 뜻할 뿐, 결코 지역 자치제를 뜻하지 않는다."(171쪽) 마르티노프는 강령 위원회의 성원이었고, 그 위원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벗들의 논거는 반박되고 비웃음을 샀다. 마르티노프는 그때 견해상 '경제주의자'로 『이스크라』의 격렬한 반대자였다. 그가 강령 위원회 다수가 함께하지 않는 의견을 말했다면 물론 반박당했을 것이다.
위원회 작업이 끝나고 대회에서 강령 제8항(지금의 제9항)이 토의될 때 처음으로 발언한 것은 분트주의자 골드블라트였다.
"'자결권'에 대해서는," 골드블라트는 말했다. "아무것도 반박할 수 없다. 어떤 민족이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경우 거기에 반대할 수는 없다. 플레하노프 동지가 표현했듯이, 폴란드가 러시아와 합법적 결혼에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을 막을 일이 아니다. 나는 이 한도 안에서 그런 의견에 동의한다."(175~176쪽)
플레하노프는 대회 전체 회의에서는 이 조항에 대해 아예 발언하지 않았다. 골드블라트가 근거로 든 것은 강령 위원회에서 플레하노프가 한 말들인데, 거기서 '자결권'은 분리의 권리라는 뜻으로 자세하고 알기 쉽게 해설되었다. 골드블라트 다음에 발언한 리베르는 이렇게 짚었다.
"물론 어떤 민족체가 러시아의 울타리 안에서 살 수 없는 처지라면, 당은 그것을 가로막지 않을 것이다."(176쪽)
독자가 보다시피, 강령을 채택한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결이 '다만' 분리의 권리를 뜻한다는 문제에 두 가지 의견이란 없었다. 분트주의자들조차 그때는 이 진리를 제 것으로 삼았으며, 반혁명과 온갖 '변절'이 이어지는 우리의 서글픈 시대에 와서야 자기의 무지로 용감한 사람들이 나타나 강령을 '불명확'하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서글픈 '역시-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시간을 내주기 전에, 폴란드인들의 강령에 대한 태도부터 마무리 짓자.
제2차(1903년) 대회에 그들은 통합의 필요성과 절박함에 대한 성명을 들고 왔다. 그러나 강령 위원회에서의 '실패' 뒤에 그들은 대회를 떠났고, 그들의 마지막 말은 대회 의사록에 실린 서면 성명, 곧 자결을 문화적 민족 자치로 바꾸자는 위에 인용한 제안을 담은 성명이었다.
1906년에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당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들어올 때도, 그 뒤로도 단 한 번도(1907년 대회에서도, 1907년과 1908년의 협의회들에서도, 1910년의 전원회의에서도) 러시아 강령 제9항의 수정에 대한 제안은 하나도 내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온갖 문구와 단언에도 불구하고 또렷이 증명해 준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벗들은 제2차 대회 강령 위원회의 토론과 이 대회의 결정으로 문제가 끝났다고 여겼다는 것, 그들이 자기 잘못을 말없이 깨닫고 그것을 바로잡았다는 것을. 1903년에 대회를 떠났다가 1906년에 당에 들어온 뒤, 당의 경로로 강령 제9항의 재검토 문제를 제기하려는 시도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문은 1908년에 그의 서명을 달고 나왔다. 물론 당의 문필가들이 강령을 비판할 권리를 부정할 생각은 어느 누구의 머리에도 떠오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논문 뒤에도 마찬가지로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어느 공식 기관도 제9항의 재검토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트로츠키가 『보리바』 편집부의 이름으로 제2호(1914년 3월)에 이렇게 쓸 때,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부 숭배자들에게 참으로 곰의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이다.
"...폴란드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족자결권'을 정치적 내용이 전혀 없는 것으로, 강령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25쪽)
친절한 트로츠키는 적보다 위험하다! '사적인 대화'가 아니라면(곧 트로츠키가 늘 먹고사는 뒷공론이 아니라면) 그는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들' 일반을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문 하나하나의 지지자로 등록할 증거를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다. 트로츠키는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명예도 양심도 없는, 자기 신념과 자기 당의 강령을 존중할 줄조차 모르는 사람들로 내세운 것이다. 친절한 트로츠키여!
1903년에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표들이 자결권 때문에 제2차 대회를 떠났을 때라면, 트로츠키는 그들이 이 권리를 내용 없는 것으로, 강령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런 강령을 가진 당에 들어왔고, 그 재검토의 제안을 한 번도 내지 않았다.[12]
트로츠키는 왜 자기 잡지의 독자들 앞에서 이 사실들에 입을 다물었는가? 오직, 청산주의에 반대하는 폴란드인들과 러시아인들 사이의 견해차를 부채질하는 데서 투기적 이득을 챙기고 강령 문제에서 러시아 노동자들을 속이는 것이 그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어느 진지한 문제에서도 트로츠키는 확고한 의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이런저런 견해차의 '틈새로 기어들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나들었다. 지금 그는 분트주의자들과 청산파의 무리 속에 있다. 그런데 이 신사들은 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분트주의자 리브만을 보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이 신사는 쓴다. "15년 전 자기 강령에 모든 민족체의 '자결'권 조항을 내걸었을 때,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유행하는(!!) 표현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에 답은 없었다(!!). 이 말은 안개에 싸인 채로 남았다(!!). 실제로 당시에 이 안개를 걷어 내기는 어려웠다. 이 조항을 구체화할 수 있는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말했다, 당분간 안개 속에 남겨 두라(!!), 삶 자체가 이 조항에 어떤 내용을 넣을지 보여 줄 것이다."
당 강령을 조롱하는 이 '바지 없는 사내아이', 참으로 훌륭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왜 조롱하는가?
오직 그가 아무것도 배운 적 없고 당의 역사조차 읽어 본 적 없는 철저한 무지렁이로서, 당과 당성의 문제에서 벌거벗고 다니는 것이 '관례'인 청산파 언저리에 굴러들어 갔기 때문이다.
포먈롭스키의 소설에서 신학교 학생은 자기가 "양배추 절임통에 침을 뱉었다"고 자랑한다. 분트 신사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리브만류를 내보내어 이 신사들이 공공연히 자기네 절임통에 침을 뱉게 한다. 무슨 국제 대회의 결정이 있었다는 것, 자기네 당의 대회에서 자기네 분트의 대표 두 사람이(그리도 '엄격한' 비판자요 『이스크라』의 단호한 적이었는데도!) '자결'의 뜻을 이해할 완전한 능력을 보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에 동의까지 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리브만 신사들과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당의 정론가들'(농담이 아니다!)이 당의 역사와 강령을 신학교 학생처럼 다루면 당을 청산하기가 더 쉬워지지 않겠는가?
여기 둘째 '바지 없는 사내아이', 『드즈빈』의 유르케비치 씨가 있다. 유르케비치 씨는 아마 제2차 대회 의사록을 손에 들고 있었을 것이다. 골드블라트가 옮긴 플레하노프의 말을 인용하고, 자결이 분리의 권리만을 뜻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티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러시아의 '국가적 온전함'을 지지한다는(1913년 제7~8호, 83쪽 등) 중상을 우크라이나 소부르주아지 사이에 퍼뜨리는 것을 가로막지는 않는다. 물론 우크라이나 민주주의를 대러시아 민주주의로부터 떼어 놓는 데 이 중상보다 나은 방법을 유르케비치 신사들은 생각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떼어 놓기야말로,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을 특별한 민족적 조직으로 갈라내자고 설교하는 『드즈빈』 문필가 그룹의 정책 전체의 노선에 놓여 있는 것이다![13]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열시키는 민족주의적 속물 그룹에게는, 바로 이것이 『드즈빈』의 객관적 역할인데, 민족문제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혼란을 퍼뜨리는 일이 물론 딱 어울린다. 말할 것도 없이 유르케비치류와 리브만류 신사들은, '당 언저리'라고 불리면 '몹시' 서운해하는 이들인데, 분리권의 문제를 그들이라면 강령에서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문자 그대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기 셋째이자 주된 '바지 없는 사내아이', 셈콥스키 씨가 있다. 그는 청산파 신문 지면에서 대러시아 독자 앞에 강령 제9항을 '박살 내'면서, 동시에 자기는 "몇 가지 고려에서 이 조항을 삭제하자는 제안에 함께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1912년 8월 청산파 협의회는 민족문제를 공식으로 제기한다. 그로부터 1년 반 동안 제9항 문제에 대한 논문은 셈콥스키 씨의 논문 말고는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필자는 강령을 반박하면서, "몇 가지(무슨 은밀한 병이라도 되는가?) 고려에서" 강령을 고치자는 제안에 "함께하지 않는다"!! 장담하거니와, 이런 기회주의의, 아니 기회주의보다 더한 것, 곧 당의 부인과 당의 청산의 본보기를 온 세계에서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셈콥스키의 논거가 어떤 것인지는 본보기 하나로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쓴다.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국가의 틀 안에서 전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공동의 투쟁을 이끌어 가고 싶어 하는데, 폴란드 사회의 반동적 계급들은 반대로 폴란드를 러시아에서 분리하고 싶어 하여 국민투표(주민 전체의 투표)에서 이에 찬성하는 다수표를 모은다면? 우리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중앙 의회에서 우리의 폴란드 동지들과 함께 분리에 반대해 투표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결권'을 어기지 않기 위해 분리에 찬성해 투표해야 하는가?"(『노바야 라보차야 가제타』 제71호)
여기서 보이듯, 셈콥스키 씨는 무엇이 이야기되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분리의 권리는 문제의 해결을 바로 중앙 의회가 아니라 오직 분리하는 지역의 의회(세임, 국민투표 따위)가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데 그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민주주의 아래서 다수가 반동을 지지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어린애 같은 어리둥절함으로, 푸리시케비치류도 코코시킨류도 분리에 대한 생각 자체를 범죄로 여기는 현실의 살아 있는 정치의 문제가 가려진다! 아마도 온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오늘 푸리시케비치류·코코시킨류와 싸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제쳐 두고 폴란드의 반동적 계급들과 싸워야 한다는 모양이다!!
이따위 믿기지 않는 실없는 소리가 청산파의 기관지에 실린다. 그 이념적 지도자의 한 사람이 L. 마르토프 씨인 그 기관지에 말이다. 바로 그 L. 마르토프, 1903년에 강령 초안을 작성하고 그것을 통과시켰으며, 그 뒤로도 분리의 자유를 옹호하는 글을 쓴 그 마르토프다. L. 마르토프는 지금 보아하니 이런 규칙에 따라 논하는 모양이다.
거기엔 영리한 사람은 필요 없으니,
레아드나 보내 놓고,
나는 구경이나 하리라.
그는 레아드-셈콥스키를 내보내 놓고, 우리 강령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독자층 앞에서 일간지에 강령이 왜곡되고 끝없이 헝클어지는 것을 내버려 두고 있다!
그렇다, 그렇다. 청산주의는 멀리도 갔다. 매우 많은, 심지어 이름난 전(前)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서 당성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물론 리브만류, 유르케비치류, 셈콥스키류와 같은 줄에 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런 사람들이 그의 잘못을 부여잡았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기회주의에 빠졌는지를 유난히 또렷하게 증명해 준다.
10. 결론
결산을 해 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 일반의 관점에서 자결권의 문제는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1896년 런던 결의를 다투는 것도, 자결이 다만 분리의 권리를 뜻한다는 것을 다투는 것도, 독립된 민족국가의 형성이 모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변혁의 경향이라는 것을 다투는 것도 진지하게는 말이 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만드는 것은, 러시아에서 억압받는 민족들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억압하는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나란히 싸우고 있고 싸워야 한다는 사정이다. 사회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통일을 지켜 내는 것, 민족주의의 온갖 부르주아적·검은 백인단적 영향에 반격을 가하는 것, 과제는 여기에 있다. 억압받는 민족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독자적 정당으로 갈라져 나오는 일은, 때로 그 민족의 민족주의와의 투쟁이 어찌나 격렬해지는지 시각이 일그러져 억압하는 민족의 민족주의가 잊히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나 시각의 그런 일그러짐은 오래갈 수 없다. 여러 민족 프롤레타리아들의 공동 투쟁의 경험은, 우리가 정치적 문제를 '크라쿠프'의 관점이 아니라 전러시아의 관점에서 세워야 함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런데 전러시아의 정치에서 지배하는 것은 푸리시케비치류와 코코시킨류다. 그들의 이념이 군림하고 있으며, '분리주의' 때문에, 분리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이민족들을 몰아대는 그들의 사냥이 두마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병영에서, 수백 수천의 신문에서 설교되고 실행되고 있다. 바로 이 대러시아의 민족주의의 독이 전러시아의 정치적 공기 전체를 오염시키고 있다. 다른 인민들을 예속시킴으로써 온 러시아에서 반동을 튼튼하게 만드는 인민의 불행이다. 1849년과 1863년의 기억은 살아 있는 정치적 전통을 이루며, 이 전통은 아주 큰 규모의 폭풍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오랜 수십 년 동안 온갖 민주주의 운동, 특히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가로막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억압받는 민족들의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점('불행'은 때로 주민 대중이 '자'민족 해방의 이념에 눈머는 데 있다)이 이따금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러시아의 계급 세력들의 객관적 관계로 보면, 자결권 옹호의 거부는 가장 악질적인 기회주의와 같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코코시킨류의 이념에 감염시키는 것과 같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이념은 본질에서 푸리시케비치류의 이념이요 정책이다.
그러므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관점이 처음에는 특수하게 폴란드적인 '크라쿠프'의 옹졸함으로 변호될 수 있었다 하더라도,[14] 민족주의가 어디에서나, 무엇보다 먼저 정부의 민족주의, 대러시아의 민족주의가 힘을 얻고 그것이 정치를 이끌고 있는 지금, 그런 옹졸함은 이미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실제로 그것을 부여잡는 것은 모든 민족의 기회주의자들, 곧 '폭풍'과 '도약'의 이념을 꺼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변혁이 끝났다고 인정하며 코코시킨류의 자유주의를 뒤따르는 자들이다.
대러시아의 민족주의도 다른 모든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나라에서 어느 계급이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가에 따라 여러 국면을 지날 것이다. 1905년까지 우리가 안 것은 거의 민족적 반동파뿐이었다. 혁명 뒤에 우리나라에는 민족적 자유주의자들이 태어났다.
우리나라에서 10월당도 카데트(코코시킨)도, 곧 현대 부르주아지 전체가 사실상 이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대러시아의 민족적 민주주의자들의 탄생이 피할 수 없이 온다. '인민사회주의' 당의 창립자의 한 사람인 페셰호노프 씨는 (1906년 『루스코예 보가트스트보』 8월호에서) 농군의 민족주의적 편견을 조심스럽게 대하라고 호소했을 때 이미 이 관점을 표현했다. 우리 볼셰비키를 두고 농군을 '이상화'한다고 아무리 중상해도, 우리는 농군의 분별을 농군의 편견과, 푸리시케비치에 맞서는 농군의 민주주의를 사제·지주와 화해하려는 농군의 지향과 언제나 엄격히 구별해 왔고 앞으로도 구별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대러시아 농민의 민족주의를 (양보한다는 뜻이 아니라 싸운다는 뜻에서) 이미 지금 셈에 넣어야 하며, 아마 꽤 오랫동안 셈에 넣게 될 것이다.[15] 1905년 뒤에 그토록 강하게 나타난 억압받는 민족들의 민족주의의 각성은(제1대 두마의 '자치주의·연방주의자' 그룹, 우크라이나 운동의 성장, 무슬림 운동의 성장 따위만 떠올려 보아도 된다) 도시와 농촌의 대러시아 소부르주아지의 민족주의의 강화를 피할 수 없이 불러올 것이다. 러시아의 민주주의적 개조가 더디게 갈수록, 여러 민족 부르주아지들의 민족적 몰이사냥과 으르렁거림은 그만큼 끈질기고 조야하고 격렬해질 것이다. 러시아 푸리시케비치류의 유별난 반동성은 이때 이런저런 억압받는 민족들 속에 '분리주의적' 지향을 낳을(그리고 키울) 것이니, 그 민족들은 때로 이웃 국가들에서 훨씬 큰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런 사태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중의, 더 정확히는 두 측면의 과제를 세운다. 온갖 민족주의와의, 첫머리에서는 대러시아 민족주의와의 투쟁, 모든 민족 일반의 완전한 평등권만이 아니라 국가 건설에서의 평등권, 곧 민족자결권, 분리권의 인정. 그리고 이와 나란히, 바로 모든 민족의 온갖 민족주의와의 성공적인 투쟁의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투쟁과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의 통일을, 민족적 고립화를 향한 부르주아적 지향을 거슬러 그 조직들이 국제적 공동체로 가장 긴밀하게 융합하는 것을 지켜 내는 것.
민족들의 완전한 평등권. 민족들의 자결권. 모든 민족 노동자들의 융합. 마르크스주의는, 전 세계의 경험은, 그리고 러시아의 경험은 노동자들에게 이 민족 강령을 가르친다.
이 논문의 조판이 끝났을 때 나는 『나샤 라보차야 가제타』 제3호를 받았다. 거기서 Vl. 코솝스키 씨는 모든 민족의 자결권 인정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당 제1차 대회(1898년)의 결의에서 기계적으로 옮겨져 온 그것은, 제1차 대회 자신이 국제 사회주의 대회들의 결정에서 빌려 온 것인데, 토론에서 보이듯 1903년 대회에서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그것에 넣은 것과 같은 뜻으로, 곧 정치적 자결이라는 뜻, 정치적 독립의 방향에서의 민족의 자결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민족자결의 정식은 영토적 분립의 권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지금의 국가 유기체 안에서 민족적 관계를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 하는 문제, 곧 지금의 국가에서 떠날 수 없거나 떠나기를 바라지 않는 민족체들을 위한 문제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여기서 보이듯 Vl. 코솝스키 씨는 1903년 제2차 대회의 의사록을 손에 들고 있었고 자결 개념의 실제(이자 유일한) 뜻을 훌륭하게 알고 있다. 이것을, 분트의 신문 『차이트』 편집부가 리브만 씨를 내보내어 강령을 조롱하고 그것을 불명확하다고 선언하게 한다는 사실과 나란히 놓아 보라!! 분트 신사들의 이상한 '당' 풍속이다... 코솝스키가 대회의 자결 채택을 왜 기계적 옮김이라 선언하는지는 '알라나 알 일'이다. '반박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법인데, 무엇을, 어떻게, 왜, 무엇 때문에인지는 그들에게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