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와 자치
PeopleRosa Luxemburg, Karl Marx, Friedrich Engels, Karl Kautsky TermsThe Right of Nations to Self-Determination, Bourgeois Nationalism
1. 민족자결권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여러 문제 가운데서도 민족문제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지금까지 이 문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만 절박한 문제였다. 그러나 현재는 러시아에서도 결정적인 문제가 되었다. 혁명적 발전이 모든 계급과 모든 정당으로 하여금 민족문제의 해결이 실천 정치의 과제임을 절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새로 결성되었거나 결성 중인 모든 정당은, 급진적이든 자유주의적이든 반동적이든, 국가의 대내외 정책 전반과 긴밀히 얽혀 있는 민족문제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입장을 강령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 정당에게 민족문제는 강령의 문제인 동시에 계급 조직의 문제다. 노동자 정당이 민족문제에서 취하는 입장은, 다른 모든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급진적인 부르주아 정당들의 입장과도, 사이비 사회주의적 소부르주아 정당들의 입장과도 방법과 기본 접근에서 달라야 한다.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이라는 과학적 방법에 정치 강령의 기초를 두는 사회민주주의는 민족문제에 대해서만 예외를 둘 수 없다. 나아가 과학적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때에만 사회민주주의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통일된 해결책을 내놓게 될 것이다. 물론 강령은 러시아 제국의 사회적, 역사적, 종족적 다양성에서 비롯되는 민족문제의 매우 다양한 형태들을 고려해야 하지만 말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강령에서 민족문제의 모든 개별 발현에 대한 일반적 해결을 담은 공식은 제9항이 제공한다. 이 조항은 당이 민주공화국을 요구하며, 그 헌법이 무엇보다도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민족체가 자결권을 가진다"는 것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강령에는 같은 사안에 관한 극히 중요한 명제가 둘 더 있다. 계급의 폐지와 성별, 종교, 인종, 민족의 구별 없는 모든 시민의 완전한 법적 평등을 요구하는 제7항, 그리고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종족 집단이 국비로 각자의 민족어로 수업하는 학교를 가질 권리와, 집회에서 그리고 모든 국가적, 공적 기능에서 국가어와 동등한 수준으로 자기 언어를 사용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제8항이 그것이다. 민족문제와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는 강령 제3항이 있는데, 이는 특수한 생활 조건과 특수한 주민 구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지역들에 지방과 도 차원의 폭넓은 자치를 요구한다. 그러나 강령의 작성자들은 법 앞에서 모든 시민의 평등, 언어적 권리, 지방자치만으로는 민족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음이 분명하다. 각 민족체에 "자결권"을 부여하는 특별 항목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공식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사회주의와도 노동계급의 정치와도 특별히 연결된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민족자결권"은 언뜻 보기에 모든 나라에서 모든 시대에 제기된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낡은 구호, 곧 "민족의 자유와 독립의 권리"를 바꿔 쓴 것일 뿐이다. 폴란드에서 자유에 대한 "민족의 타고난 권리"는 민주주의협회에서 리마노프스키의 『포부트카』까지, 민족사회주의적 『포부트카』에서 독립 강령을 포기하기 전의 반사회주의적 민족연맹까지, 민족주의자들의 고전적 공식이었다.[2]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한 "모든 민족의 동등한 권리"에 관한 결의는, 1848년 빈디슈그레츠의 범슬라브적 총검에 의해 해산된 프라하의 저 유명한 범슬라브 대회가 남긴 유일한 실질적 성과였다. 다른 한편 "민족자결권"의 원칙은 그 일반성과 넓은 적용 범위에도 불구하고, 곧 러시아에 사는 인민들만이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스웨덴, 아메리카에 사는 민족체들에도 분명히 적용될 수 있는 것임에도, 이상하게도 오늘날 어느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원칙은 극도로 혼합된 주민을 가진 국가, 민족문제가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국가에 존재하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에조차 들어 있지 않다.
오스트리아 당은 민족문제를, 민족문제의 결정을 각 민족체의 변덕에 내맡기는 형이상학적 공식이 아니라 오직 명확히 규정된 계획으로 해결하려 한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는 중세에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치가 짜깁기해 놓은 "왕국과 공국들"의 집합체이자 여러 민족체가 영토적으로 뒤죽박죽 섞여 있는 오스트리아의 현행 국가 구조를 철폐할 것을 요구한다. 당은 오히려 이 왕국과 공국들을 민족에 따라 여러 영토로 나누고, 이 민족적 영토들을 하나의 국가 연합으로 결합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민족체들이 오스트리아 거의 전역에 걸쳐 어느 정도 뒤섞여 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은 새로 만들어질 민족적 영토들 안의 소수민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법을 규정하고 있다.
이 계획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오스트리아 사정에 가장 정통한 전문가의 한 사람이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정신적 아버지의 한 사람인 카를 카우츠키는 최근의 소책자 『민족성과 국제주의』에서, 그런 계획은 설령 실행에 옮겨질 수 있다 하더라도 민족체들 사이의 갈등과 어려움을 결코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 이 어려움들에 실천적 해결을 제공하려 한 하나의 시도이며, 오스트리아에서 민족문제가 갖는 중요성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전문 인용하려 한다.
1899년 브륀 대회에서 채택된 오스트리아 당의 민족 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스트리아의 민족 갈등이 모든 정치적 진보와 여러 민족체의 문화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기에, 이 갈등이 일차적으로 우리 공공 제도의 후진성에서 비롯되기에, 그리고 이 갈등의 연장이 지배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보장하고 인민의 진정한 이익에 부합하는 조치를 가로막는 수단의 하나이기에, 대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평등과 이성의 정신에 입각한 오스트리아 민족·언어 문제의 최종적 해결은 일차적으로 문화적 요구이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활적 이익의 하나다.
이는 보통·평등·직접 선거에 기초한 참으로 민주주의적인 체제, 국가와 공국들의 모든 봉건적 특권이 폐지된 체제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체제에서만 국가와 사회를 실제로 떠받치는 요소인 노동계급이 자신의 요구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모든 인민의 민족적 특성의 육성과 발전은 동등한 권리와 억압의 제거라는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국가관료적 중앙집권과 공국들의 봉건적 특권에 반대해야 한다.
그런 조건에서만 오스트리아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다툼 대신 민족체들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곧 다음의 지도 원칙들의 승인을 통해서다.
오스트리아는 민족체들의 민주주의적 연방국가(Nationalitätenbundesstaat)로 개조되어야 한다.
역사적 왕령지들은 민족적으로 동질적인 자치체들로 대체되어야 하며, 그 입법과 행정은 보통·평등·직접 선거권에 기초하여 선출되는 민족 의회의 수중에 놓여야 한다.
같은 민족의 모든 자치 지역은 함께 민족적으로 구별되는 하나의 연합을 이루어, 이 연합의 사무를 자율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곧 언어와 문화에 관한 사무를 말한다. 당 지도부의 초안에 붙은 설명이다.)
민족적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특별법이 의회에서 채택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민족적 특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어에 대한 요구를 거부한다. 공통어가 필요한지 여부는 연방 의회가 결정할 수 있다.
당 대회는 오스트리아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기관으로서, 이 지도 원칙들의 기초 위에서 인민들 사이의 상호 이해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표명한다.
당 대회는 각 민족체가 민족적 생존과 민족적 발전에 대한 권리를 가짐을 인정한다고 엄숙히 선언한다.
인민들은 오직 서로 긴밀히 연대할 때에만 자신의 문화를 전진시킬 수 있으며, 사소한 다툼으로는 그럴 수 없다. 특히 모든 민족의 노동계급은 개별 민족체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에서 국제적 협력과 형제애를 유지해야 하며, 굳게 결속된 대오로 정치적, 경제적 투쟁을 수행해야 한다.
국제 사회주의의 대오에서 러시아 노동자당은 "민족체들에게 자결권을 부여하라"는 요구를 강령에 담은 유일한 당이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를 제외하면 이 공식은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강령에서만 발견되는데, 거기서 그것은 국가 연방주의의 원칙과 나란히 간다. 사회혁명당의 정치 선언의 해당 절은 "개별 민족체들 사이의 관계에서 연방주의 원칙의 폭넓은 적용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그들의 "무제한한 자결권의 승인"을 강조한다.
위의 공식이 국제 사회주의와 또 다른 연관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곧 그것은 1896년 런던의 국제사회주의자대회가 채택한 민족문제 결의의 한 절을 바꿔 쓴 것이다. 그러나 그 결의가 채택된 경위와 결의가 정식화된 방식은, 러시아 당 강령의 제9항을 런던 결의의 적용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오해에 근거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런던 결의는 국제 대회에서 민족문제 일반에 대해 성명을 내려는 의도나 필요의 산물이 전혀 아니었고, 여러 나라 노동자 정당들에 의한 그 문제의 실천적 해결을 위한 공식으로서 대회에 제출되거나 채택된 것도 아니었다. 실은 정반대였다. 런던 결의는 폴란드 운동의 사회애국주의 분파, 곧 폴란드사회당(PPS)이 대회에 제출한 동의안, 독립 폴란드의 재건을 국제 사회주의의 가장 절박한 요구의 하나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 동의안에 근거하여 채택되었다.[3] 대회에서 폴란드 사회민주주의가 제기한 비판과 이를 둘러싼 사회주의 언론의 토론, 그리고 러시아 노동자 운동의 첫 대중적 시위, 곧 1896년 5월 페테르부르크의 4만 방직 노동자의 기억할 만한 파업의 영향 아래, 국제 대회는 그 논거에서나 전체 성격에서나 러시아 혁명운동에 맞서 있던 폴란드의 동의안을 심의하지 않았다. 대신 대회는 앞서 언급한 런던 결의를 채택했는데, 이는 폴란드 재건 동의안의 거부를 의미했다.
결의는 이렇게 말한다. 대회는 모든 민족의 완전한 자결권에 찬성함을 선언하며, 현재 군사적, 민족적 또는 그 밖의 전제의 멍에 아래 고통받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공감을 표한다. 대회는 이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전 세계의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의 대오에 합류하여, 그들과 함께 국제 자본주의의 타도와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목표 달성을 위해 투쟁할 것을 호소한다.
보다시피 런던 결의는 그 내용에서 폴란드 문제만의 배타적 고려를 억압받는 모든 민족체의 문제의 일반화로 대체하며, 문제를 일국적 기초에서 국제적 기초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PPS의 동의안이 요구한 명확하고 완전히 구체적인 실천 정치의 요구, 곧 독립 폴란드의 재건 대신, 결의는 하나의 일반적인 사회주의 원칙, 곧 억압받는 모든 민족체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공감과 그들의 자결권의 승인을 표명한다. 이 원칙이 국제 노동자 운동에 민족문제의 실천적 해결책을 주기 위해 대회에서 정식화된 것이 아님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사회주의 정치의 실천적 지침은 위에 인용한 런던 결의의 첫째 부분이 아니라 둘째 부분에 담겨 있다. 곧 "민족적 억압에 시달리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대오에 들어와 그 원칙과 목표의 실현을 위해 일할 것을 호소"하는 부분이다. 이는 첫째 부분에서 정식화된 원칙, 곧 민족자결권이 오직 한 가지 방식으로만, 다시 말해 먼저 국제 사회주의의 원칙을 실현하고 그 최종 목표를 달성함으로써만 실행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명료한 방식이다.
실제로 어떤 사회주의 정당도 런던 결의를 민족문제의 실천적 해결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것을 강령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민족문제의 해결이 자신의 존립이 걸린 문제였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조차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1899년에 위에 인용한 실천적 "민족 강령"을 독자적으로 만들어 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PPS조차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런던 결의가 사회주의의 "정신"에 부합하는 공식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리려 애썼음에도, 이 결의가 실은 폴란드 재건 동의안의 거부, 적어도 그것을 아무런 실천적 성격 없는 일반적 공식으로 희석한 것임은 명백했기 때문이다.[4] 사실 현대 노동자 정당들의 정치 강령은 사회적 이상의 추상적 원칙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투쟁과 최종 승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부르주아 사회의 틀 안에서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실천적인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정식화하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 정치 강령의 요소들은 명확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정식화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 영역에 속하는 정치적, 사회적 삶의 결정적 문제들에 직접적이고 실천적이며 실행 가능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 일상 정치와 그 필요의 지침이 되는 것, 노동자 정당의 정치적 행동을 개시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정치를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정당들의 정치와 구별하는 것이다.
"민족자결권"이라는 공식은 물론 그런 성격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정치를 위한 어떤 실천적 지침도, 민족문제의 어떤 실천적 해결책도 주지 않는다. 예컨대 이 공식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폴란드 민족문제, 핀란드 문제, 캅카스 문제, 유대인 문제 등의 해결을 어떤 방식으로 요구해야 하는지 가리켜 주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이해 당사자인 모든 "민족"에게 자신의 민족문제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한을 줄 뿐이다. 위 공식에서 노동계급의 일상 정치를 위해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실천적 결론은, 민족적 억압의 모든 발현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그 계급의 의무라는 지침이다. 각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한다면, 한 민족을 다른 민족 위에 두려는 모든 시도,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어떤 형태의 민족적 존재를 강요하는 모든 시도를 규탄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나 민족적 억압에 항의하고 저항해야 할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정당의 의무는 어떤 특별한 "민족의 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성의 사회적, 정치적 평등을 향한 그 당의 노력이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이 내세우는 어떤 특별한 "여성의 권리"에서 나오는 것이 전혀 아닌 것과 같다. 이 의무는 오로지 계급 지배 체제와 모든 형태의 사회적 불평등, 사회적 지배에 대한 전반적 반대에서, 한마디로 사회주의의 기본 입장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점을 접어 두더라도, 실천 정치를 위해 주어지는 유일한 지침은 순전히 부정적인 성격의 것이다. 모든 형태의 민족적 억압에 저항할 의무는, 러시아의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현 시기에 폴란드, 라트비아, 유대인 등의 민족문제의 해결책으로 어떤 조건과 정치 형태를 권고해야 하는지, 현재의 계급투쟁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사이비 사회주의 정당들의 갖가지 강령에 맞서 어떤 강령을 내놓아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설명도 담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민족자결권"이라는 공식은 본질적으로 민족문제에서의 정치적, 문제 해결적 지침이 아니라, 그 문제를 회피하는 수단일 뿐이다.
II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강령 제9항의 일반적이고 진부한 성격은 이러한 문제 해결 방식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의 입장과 동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에 유효한 ‘민족의 권리’란 ‘인권’이나 ‘시민의 권리’ 유형의 형이상학적 클리셰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초인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런 종류의 ‘영원한’ 공식들과 단번에 결별하였다. 역사적 변증법은 ‘영원한’ 진리도, ‘권리’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엥겔스의 말을 빌리자면, “여기서 그리고 지금 선한 것이 다른 곳에서는 악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서는 옳고 합리적인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무의미하고 부조리해진다. 역사적 유물론은 이러한 ‘영원한’ 진리, 권리, 공식의 실제 내용이 오직 주어진 역사적 시대에 그 환경의 물질적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지로부터 물려받은 민주주의적 상투어와 관념적 형이상학의 모든 재고를 수정했다.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민족적 자유”, “평등” 및 그 밖의 그럴듯한 것들을 개별 민족과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한 진리이자 법칙으로 간주하는 것을 오래전에 중단했다. 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그것들을 단지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의 표현으로, 그 물질적 내용과 그에 따른 정치적 가치의 측면에서 끊임없는 변화를 겪는 범주들로 간주하고 다루며, 바로 이것이 유일한 “영원한” 진리이다.
나폴레옹이나 그와 유사한 다른 전제 군주가 대중의 정치적 무지와 경제적 예속을 이용하여 정치적 민주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국민투표를 카이사리즘의 목표를 위해 사용할 때, 우리는 주저 없이 그 “민주주의”에 전심으로 반대하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이상학자들에게는 신성불가침한 우상과도 같은 인민의 권위나 전능함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는다.
타센도르프 같은 독일인이나 차르 체제의 헌병대, 또는 “진정한 폴란드” 민족민주주의자가 파업 파괴자들의 “개인적 자유”를 옹호하며 조직된 노동의 도덕적·물질적 압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때, 우리는 주저 없이 후자를 지지하며 그들이 깨우치지 못한 경쟁자들을 연대로 강제할 가장 충분한 도덕적·역사적 권리를 부여한다. 비록 형식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는 “일하려는 자들”이 이성이나 비이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를 그들 편에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맨체스터 학파의 자유주의자들이 “시민의 평등”이라는 명목으로 임금 노동자가 자본과의 투쟁에서 자신의 운명에 완전히 내맡겨지도록 요구할 때, 우리는 가장 노골적인 경제적 불평등을 은폐하는 그 형이상학적 상투어를 폭로하며, 임금 노동자 계급의 법적 보호를 단호하게 요구함으로써 형식적인 “법 앞의 평등”과 명백히 결별한다.
민족 문제는 현대 사회주의가 이러한 방식으로 검토하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문제들 가운데 예외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민족의 민족자결권”이라는 아무리 훌륭하게 들리는 공식과 같은 막연한 상투어의 사용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러한 공식은 전혀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하여 공허하고 무책임한 문구이거나, 아니면 사회주의자들이 모든 민족적 열망을 지지할 무조건적 의무를 표현하는 것인데, 후자의 경우 그것은 단순히 거짓이다.
역사적 유물론의 일반적 전제들에 기초하여, 민족 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은 주로 각 사례의 구체적 정황들에 의존하는데, 이는 국가들마다 크게 다르며, 또한 각 국가 내에서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한다. 사실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만 있어도,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포르테 지배하에 벌어지는 민족 투쟁의 문제가, 아일랜드 인들이 잉글랜드의 지배에 맞서 싸우는 문제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 다른 경제적·역사적 기초, 다른 국제적 중요성의 정도, 그리고 다른 미래에 대한 전망을 지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를 구성하는 민족체들 간의 관계상의 복잡성은 폴란드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들과 완전히 다르다. 더욱이, 각 국가의 민족 문제는 시간에 따라 그 성격을 바꾸며, 이는 그것에 대해 새롭고 다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코시치우슈코 봉기 시기부터 시작된 우리의 세 민족 운동조차 동일한 역사극(곧 “예속된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세 겹으로 정형화된 반복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은, 폴란드가 “민족들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사명을 지닌다고 믿었던 슈이스키 같은 상류 계층 가톨릭 이데올로기의 형이상학자나 오늘날의 사회 애국주의 “학파”에 속하는 무지한 자의 눈으로만 그렇다. 연구자, 더 정확히는 역사적 유물론 연구자의 메스로 더 깊이 절개하는 자라면, 우리의 세 차례 민족 봉기라는 표면 아래에서 각기 외적 정황 때문에 침략자와의 동일한 투쟁 형태를 취했을 뿐인, 완전히 다른 세 가지 사회정치적 운동을 발견할 것이다. 코시치우슈코 봉기, 11월 봉기, 1월 봉기를 하나의 동일한 잣대, 곧 “예속된 민족”이라는 신성한 법칙으로 측정하는 것은 사실상 모든 판단력의 결여와 어떠한 역사적·정치적 식별력의 완전한 부재를 드러낸다.[6]
역사적 조건의 변화가 민족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평가와 입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사례가 이른바 동방문제이다. 1855년 크림 전쟁 중에 모든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 유럽의 동정심은 투르크인의 편에 서서 자유를 추구하던 남슬라브인에 맞섰다. 모든 민족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마르크스, 엥겔스, 리프크네히트가 발칸 슬라브인을 반대하고 투르크인의 영토 보전을 단호히 지지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투르크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의 민족 운동을 자유주의의 “영원한” 감상적 공식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고, 당대의 견해에 따라 이러한 민족 운동의 내용을 결정한 물질적 조건의 관점에서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적으로 후진적인 남슬라브인의 자유 운동에서 러시아 차르 체제가 투르크인을 자극하려는 책동만을 보았고, 따라서 그들은 아무런 이차적 생각 없이 슬라브인의 민족적 자유 문제를 유럽 민주주의의 이익에 종속시키면서, 러시아 반동에 대한 방어 보루로서 투르크의 영토 보전을 주장했다. 이러한 정치적 입장은 독일 사회민주주의 내에서 1890년대 후반까지 유지되었는데, 그때 백발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오르미아 투르크인의 투쟁과 관련하여 여전히 그런 정신으로 발언했다. 그러나 이 무렵 동방문제에 관한 독일 및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은 변해 있었다. 사회민주주의는 투르크 내에서 억압받는 민족체들이 분리된 문화적 존재를 추구하는 포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인위적으로 투르크를 전체로서 보존하려는 모든 관심을 포기했다. 그리고 이때 사회민주주의는 정복당한 민족체로서의 오르미아인이나 마케도니아인에 대한 의무감이 아니라, 지난 세기 후반 동방의 조건이라는 물질적 기초에 대한 분석에 이끌려 그렇게 했다. 이 분석을 통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터키의 정치적 와해가 19세기 후반의 경제·정치적 발전에서 비롯될 것이며, 일시적인 터키의 보존은 러시아 전제정치의 반동적 외교의 이익에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여기서, 마치 다른 모든 문제에서 그랬듯이, 사회민주주의는 객관적 발전의 흐름에 반대하지 않고 그 흐름에 함께했으며, 그 결과를 이용하여 투르크 내 민족 운동을 지지함으로써 유럽 문명의 이익을 옹호했다. 또한 그 운동의 사회적 기초가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내부로부터 터키를 쇄신하고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를 지지했다.
동일한 사실에 대한 두 번째 사례는 1848년 혁명 중에 체코인과 폴란드인의 민족적 포부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반대되는 태도에서 제공된다. “민족자결권”이라는 관점에서 체코인이 유럽 사회주의자 및 민주주의자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폴란드인 못지않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 추상적 공식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고, 체코인과 그들의 자유에 대한 포부에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으며, 그들의 포부는 혁명적 상황에 대한 해로운 합병증이라고 여겼다. 더구나 마르크스에게 체코인은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사멸하는 민족체였기 때문에, 그 포부는 가혹한 규탄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공산당 선언의 저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제시했으며, 동시에 그들은 폴란드인의 민족주의 운동을 전력을 다해 옹호했고, 모든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세력에게 우리의 동포를 도우라고 촉구했다.
혁명 그 자체가 진행 중이던 동안 마르크스가 민족 문제를 검토했던, 모든 감상주의와 동떨어진 냉철한 리얼리즘은 그가 폴란드 문제와 체코 문제를 다룬 방식에서 드러난다.
“1848년의 혁명,” 마르크스는 1852년 2월 미국 신문 데일리 트리뷴에 게재된 혁명에 관한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억압받는 민족들이 독립된 생존과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권리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폴란드인들이 1772년 이전 구 폴란드 공화국의 국경 내에서 자국의 회복을 즉각 요구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사실 이 국경은, 독일 민족체와 폴란드 민족체의 경계선으로 본다면, 그 당시에도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으며, 이후 독일화의 진전에 따라 해마다 더욱 그러해졌다. 그러나 독일인들이 폴란드 회복을 위한 그러한 열광을 선언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동정심이 진실함을 입증하는 첫 증거로서 자신들의 전리품 몫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을 것으로 예상해야만 했다. 한편, 주로 독일인들이 거주하는 광대한 토지와 완전히 독일적인 대도시들이, 농업적 농노제에 기초한 봉건제 상태를 넘어설 능력이 있다는 증거를 아직 한 번도 제시하지 못한 민족에게 양도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매우 복잡했다. 유일하게 가능한 해결책은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혁명을 겪은 여러 민족들 사이의 경계 획정 문제는 공동의 적에 맞서 안전한 국경을 우선 확립하는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폴란드인들은 동쪽에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서쪽에서는 더 유연하고 합리적이 되었을 것이며, 결국 리가와 밀라노가 단치히와 엘빙만큼이나 그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진보 세력은 대륙의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폴란드 일부 지역의 민족적 재건조차도 그러한 전쟁으로 불가피하게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폴란드인들을 지지했다. 반면 여당이던 중간계급 정당은 더 활동적이고 정력적인 인물들을 조타수로 불러들였을 러시아와의 민족 전쟁으로 인한 자신들의 몰락을 분명히 예견했고, 따라서 독일 민족체의 확장을 위한 열광을 가장하여, 폴란드 혁명 선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프로이센령 폴란드를 건설될 독일 제국의 불가분의 일부라고 선언했다.[7]
마르크스는 체코 문제를 그에 못지않은 정치적 현실주의로 다루었다.
민족 문제는 보헤미아에서 또 다른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200만 명의 독일인과 300만 명의 체크어를 사용하는 슬라브인이 거주하는 이 지역은 거의 모두가 체크인의 과거 지배와 연결된 위대한 역사적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슬라브족 분파의 힘은 15세기 후스 전쟁 이후로 줄곧 꺾여 있었다. 체크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분할되어, 일부는 보헤미아 왕국을, 다른 일부는 모라바 공국을, 또 다른 일부는 헝가리의 일부인 카르파티아 산지의 슬로바크인 거주지를 형성했다. 모라바인과 슬로바크인은 대부분 자기 언어를 보존하고는 있었지만, 오래전에 민족적 감정과 활력의 모든 흔적을 상실한 상태였다. 보헤미아는 사방 중 삼면이 완전히 독일인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독일적 요소는 그 영토 내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고, 수도 프라하에서조차도 두 민족체는 거의 대등한 세력이었으며, 자본, 무역, 산업, 정신 문화는 어디에서나 독일인의 손에 있었다. 체크 민족체의 주요 투사인 팔라츠키 교수 자신은 제정신이 아닌 학식 있는 독일인에 불과하여, 지금도 체크어를 정확하게 그리고 외국어 억양 없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흔히 일어나듯, 지난 400년 동안 역사에 알려진 모든 사실에 비추어 죽어가고 있던 체크 민족체는 1848년에 이전의 활력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고, 그 실패는 모든 혁명적 고려와 별개로, 보헤미아가 비록 그 주민 일부가 앞으로 몇 세기 동안 계속해서 비독일어를 말할지라도, 이제부터는 오직 독일의 일부로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57-62쪽]
우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민족문제에 관해 사용한 방법을 강조하기 위해 위 구절들을 인용했는데, 이 방법은 추상적인 공식이 아니라 각 개별 사례의 실제 쟁점만을 다루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그들이 상황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리거나 특정 사례에서 잘못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현재의 상황은 마르크스가 60년 전에 체코 민족의 소멸을 예견한 것이 얼마나 깊은 오류였는지를 보여주며, 오늘날 오스트리아인들은 체코 민족의 생명력을 매우 성가시게 여기고 있다. 반대로 그는 폴란드 민족주의의 국제적 중요성을 과대평가했는데, 이 민족주의는 폴란드의 내부 발전에 의해 쇠퇴할 운명이었고 그 쇠퇴는 이미 그 당시에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오류들이 마르크스의 방법의 가치를 한 치도 훼손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개별 사례에서의 잘못된 적용으로부터 선험적으로 보호되는 연구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무오류하다고 주장한 적이 결코 없으며, 궁극적으로 “무오류한” 역사적 판단만큼 그의 과학 정신에 반하는 것도 없다. 마르크스가 특정 민족 운동에 대한 자신의 입장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었으며, 이 저작의 필자는 1896년과 1897년에 동방문제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폴란드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시대에 뒤떨어지고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터키와 남슬라브인 문제, 그리고 체코인과 폴란드인의 민족 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바로 이러한 이전 입장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이 하나의 선험적으로 채택된 구호에 기초하여 모든 민족문제를 단일한 방식으로만 해결하는 것과는 얼마나 거리가 멀었는지를 강력하게 보여준다. 또한 유럽 발전의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문제들이 문제시 될 때 그들이 민족들의 “형이상학적” 권리들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도 보여준다.
끝으로, 근대 사회주의 정치의 창시자들이 민족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한 더욱 더 놀라운 예는 14세기 스위스인들의 자유 운동에 대한 그들의 평가이다. 이것은 역사의 일부이며, 따라서 일상 정치의 모든 기대와 열정의 영향에서 자유롭다. 합스부르크 전제정치(빌헬름 텔의 역사적 신화라는 형태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낭만적 이상주의자들이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대상이다)의 유혈적 억압에 맞선 스위스 주들의 봉기를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7년에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초기 스위스인들이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운 투쟁, 유명한 뤼틀리 서약, 텔의 영웅적인 사격, 모르가르텐의 불멸의 승리, 이 모든 것은 역사적 발전의 추진력에 맞선 불안에 찬 목동들의 투쟁을, 민족 전체의 이익에 맞선 완고하고 보수적이며 국지적인 이익들의 투쟁을, 계몽에 맞선 원시주의의, 문명에 맞선 야만의 투쟁을 의미했다. 그들은 그 시대의 문명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대가로 이후의 문명 발전 전체로부터 차단되는 벌을 받았다.[8]
이 평가에 대해 카우츠키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덧붙인다.
14세기에 합스부르크가가 스위스에서 수행하고 있던 문명화 사명에 관해서는 위의 내용에 의문 부호가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주들의 독립을 보존한 것은 극도로 보수적인 사건이었으며 결코 혁명적이지 않았고, 그 이후로 그 주들의 자유는 유럽 중심부에서 가장 암흑적인 반동의 요소를 보존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는 점은 옳다. 1531년 카펠 전투에서 츠빙글리와 그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위스에서 개신교의 확산을 저지한 것은 바로 이들 산림 주들이었다. 그들은 유럽의 모든 전제군주들에게 군대를 제공했으며, 혁명에 맞서 루이 16세의 가장 확고한 지지자들이었던 것은 바로 산림 주 출신의 스위스인들이었다. 이에 대해 공화국은 루체른에서 그들에게 웅장한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Die Neue Zeit, 1904-1905, Vol.II, p.146.]
“민족자결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스위스의 봉기는 명백히 모든 측면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동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합스부르크의 멍에에서 벗어나고자 한 스위스인들의 열망이 “인민” 또는 그들 중 거대한 다수의 의지의 본질적인 표현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위스인들의 민족 운동은 순전히 방어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외부의 순수한 왕조적 침략자의 억압을 떨쳐내려는 의도였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민족 운동은 형식적으로 민주주의와 심지어 혁명주의의 모든 외적 특성들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인민이 인민 공화국이라는 구호 아래 절대 권력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완전히 대조적인 운동이 1848년 헝가리의 민족 봉기이다. 헝가리인들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는 쉽게 알 수 있는데, 그 나라의 사회적·민족적 조건이 소수 머저르인이 나머지 억압받는 민족체들의 혼합 다수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보장했기 때문이다. 민족 독립을 위한 이 두 투쟁, 곧 1848년 헝가리인의 투쟁과 그보다 5세기 앞선 스위스인의 투쟁을 비교하는 것은 두 투쟁이 모두 동일한 적, 즉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절대주의를 겨냥했다는 점에서 한층 더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민족 정치에 대한 방법과 관점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스위스 운동에서 나타난 혁명주의의 모든 외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헝가리 혁명가들이 비엔나 정부가 이탈리아 혁명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아첨 행위에서 드러나듯 머저르 운동의 부인할 수 없는 양날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은 스위스 봉기를 반동적 사건으로 신랄하게 비판한 반면 1848년의 헝가리 봉기는 열렬히 지지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민족자결권”이라는 공식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으며, 이 공식은 분명히 머저르인보다 스위스인에게 훨씬 더 적용될 수 있었지만, 오직 역사적·정치적 관점에서 해당 운동을 현실적으로 분석했을 뿐이다. 분열된 농민 칸톤들이 자신들의 지역주의를 내세워 합스부르크 왕조의 중앙집권적 권력에 맞서 봉기한 것은, 마치 중앙집권으로 나아가던 당시 제후 권력의 절대주의가 역사적 진보의 요소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엥겔스의 눈에는 역사적 반동의 징표였다.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지나가며 언급하자면, 라살레는 16세기 독일에서 농민 전쟁과 그와 병행하여 소귀족 기사들이 부상하는 제후 권력에 맞서 일으킨 반란을 반동의 징표로 간주했다. 반면 1848년에 합스부르크 절대주의는 이미 중세의 반동적 유물이었으며, 합스부르크에 맞선 헝가리인의 민족 봉기는, 독일 내부 혁명의 자연적 동맹으로서 당연히 역사적 진보의 요소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III
더욱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결코 당파적이거나 계급적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일 법한 것처럼 서유럽 민주주의의 필요와 전망에 전체 민족을 희생시키지도 않았다.
사회주의자들이 현존하는 모든 억압받는 민족들에게 자유를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도입하겠다고 선언할 때, 그것이 훨씬 더 관대하게 들리고 젊은 “지식인”의 과잉된 상상력을 한층 더 부추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민족, 국가, 집단, 그리고 모든 인간 존재에게 자유, 평등 및 그 밖의 이러한 기쁨에 대한 권리를 단 한 번의 거침없는 붓질로 부여하려는 경향은 오직 사회주의 운동의 초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나키즘의 구호적 허세의 특징일 뿐이다.
현대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곧 과학적 사회주의는 사회 문제와 민족 문제에 대한 급진적이고 그럴듯하게 들리는 해결책을 기뻐하지 않으며, 주로 이 문제들에 관련된 실제 쟁점을 검토한다.
사회민주주의의 문제 해결은 일반적으로 “관대함”을 특징으로 삼지 않으며, 이 점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과학적 “교리”에 구애받지 않아 언제나 모두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호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회주의 정당들에게 언제나 뒤처진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 사회혁명당은 농업 문제에서 사회민주주의를 훨씬 앞서는데, 당의 수중에는 농업 발전 영역에서 그러한 변혁의 조건이 성숙되기를 기다리는 지루한 기간 없이도 마을에 사회주의를 즉각 부분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 처방이 있다. 그러한 정당들과 비교할 때 사회민주주의는 가난한 정당이며, 언제나 그럴 것이라는 점은, 마치 마르크스가 당대에 팽창적이고 관대한 바쿠닌에 비해 가난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 모두 “진정한”, 아니 오히려 “철학적” 사회주의의 대표자들에 비해 가난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성향을 띤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관대함의 비밀과 사회민주주의의 가난함의 비밀은, 아나키스트적 혁명주의가 “힘을 의도로써 재고 의도를 힘에 따라 재지 않는다”는 점, 곧 공허한 유토피아를 더듬는 사변적 이성이 인류 구원을 위해 “좋음”과 “필요”라고 간주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열망을 측정한다는 데 있다. 반면에 사회민주주의는 자신의 열망 속에서 역사적 토대 위에 굳건히 서 있으며, 따라서 역사적 가능성들을 고려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다른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와 다른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 발전이 뚫어 놓은 모든 구멍을 메울 헝겊 조각을 호주머니에 가지고 다닐 생각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사회주의자로서 모든 민족의 즉각적인 독립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민족들의 운명은 그로 인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민족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노동자의 경제적 독립에 대한 “권리”와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는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가 썼듯이 각 사람이 금 접시로 식사할 수 있는 “권리”만큼의 가치밖에 없으며, 그는 그 권리를 언제든지 1루블에 팔아넘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1840년대에 “노동권”은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요구였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보였다. 그러나 1848년 혁명에서 그 “권리”는 아주 짧은 시행 시도 이후 끔찍한 실패로 끝났으며, 이는 설령 그 유명한 “국립 작업장”이 다르게 조직되었더라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자본론』에서 제시한 현대 경제의 실제 조건들에 대한 분석은, 오늘날의 정부들이 보편적인 “노동권”을 선언하도록 강요받는다 해도 그것은 그저 듣기 좋은 구호에 머물 것이며, 보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노동예비군 대오의 어떤 구성원도 그 권리로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수프 한 그릇을 만들 수는 없으리라는 확신으로 이끈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노동권”이 자본주의 체제가 폐지될 때에만 공허한 소리가 아니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그 체제 안에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정 부분의 만성적 실업이 생산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현존 체제에 기초해 그 상상의 “권리”를 선언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급투쟁을 통해 그 체제 자체의 폐지를 위해 투쟁하며, 노동조직, 실업보험 등은 단지 임시적 도움 수단으로 간주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민족, 인종, 종족 집단에게 “민족자결”의 가능성을 보장함으로써 자본주의적 틀 안에서 모든 민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완전한 유토피아다. 그리고 이는 사회민주주의 정치 강령 속의 많은 요구들이 객관적인 정치적 세력과 계급적 세력의 체제로 인해 현실에서 실행 불가능할 운명에 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다. 예를 들어, 국제 노동자 운동 진영의 중요한 목소리들은 법률 제정을 통한 보편적 8시간 노동제 도입 요구가, 지배계급의 커져가는 사회적 반동, 사회 개혁의 전반적 정체, 사용자들의 강력한 조직의 부상 등 때문에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는 확신을 표명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의 진보적 발전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감히 8시간 노동제 요구를 유토피아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모든 종족 집단이나 그 밖의 방식으로 정의된 민족체들에 대한 “민족자결”의 현실적 가능성은 정확히 말해 현대 사회들의 역사적 발전 추세 때문에 유토피아다. 현대 국가들의 민족체들이 지리적으로 끊임없이 이동하고, 결합하고, 융합하고, 분열하고, 서로를 짓밟았던 역사의 여명기인 머나먼 시대까지 살펴보지 않더라도, 모든 고대 국가는 예외 없이 그러한 정치적·민족적 격변의 오랜 역사의 결과로서 민족체 구성 면에서 극도로 혼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있다. 오늘날 각 국가 안에서 종족 잔재들은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행로를 특징지었던 격변과 혼혈을 증언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당대에도 이러한 민족적 생존물들이 혁명 또는 세계 대전의 거대한 폭풍에 의해 지구상에서 완전히 쓸려나갈 때까지는 반혁명의 보루 역할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이에 라이니셰 차이퉁』에서 이렇게 썼다. “유럽에는 한 구석에 이러한 민족 폐허들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을 품고 있지 않은 국가가 없다.["]
민족의 폐허들이라는 것은, 나중에 역사적 발전의 기수가 된 민족에 의해 축출되고 정복된 고대 민족의 잔재들이다. 역사에 의해 무자비하게 유린당한 이 민족적 잔재들, 곧 헤겔이 말했듯이 이 민족적 찌꺼기들은 그들의 완전한 절멸 또는 탈민족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모두 반혁명의 광적인 당파가 될 것이며 그렇게 남을 것인데, 이는 그들의 전체 존재 자체가 일반적으로 위대한 역사적 혁명에 대한 항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에서는 게일인이 1640년부터 1745년까지 스튜어트 가문의 지지 기반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브르타뉴인이 1792년부터 1800년까지 부르봉 가문의 지지 기반이었다. 스페인에서는 바스크인이 돈 카를로스의 지지자들이었다. 또 다른 예로 오스트리아에서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운 남슬라브인들은 지극히 복잡하게 뒤얽힌 천 년에 걸친 발전의 민족적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페르디난트 라살 문학 유고집』, 제3권, 241쪽]
모든 슬라브 민족의 독립을 위한 범슬라브주의자들의 열망을 다룬 다른 글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거대 군주국들이 필연적이었던 시절, 독일인과 헝가리인은 그 모든 조그맣고, 불구적이며, 무력한 작은 민족들을 하나의 큰 국가로 단조해 냈다. 그리하여 그 민족들이 자기들만 내버려두었다면 완전히 놓쳐 버렸을 역사의 발전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오늘날 산업, 교역, 교통의 엄청난 진보로 인해 정치적 중앙집권은 15세기와 16세기보다 더욱 절실한 요구가 되었다. 아직 중앙집권화되지 않은 것들이 중앙집권화되는 중이다. [Ibid., p.255.]
우리는 남슬라브족에 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오래전에 포기했다. 그러나 역사적 발전, 특히 자본주의의 현대적 발전은 각 민족체에게 독립적 존재를 되돌려 주는 경향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일반적 사실이 있으며, 이는 『노이에 라이니셰 차이퉁』 시절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잘 알려져 있다.
가장 최근의 논문 「민족체와 국제주의」에서 카를 카우츠키는 민족체들의 역사적 운명을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우리는 언어가 사회적 교류의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보아 왔다. 경제 발전과 더불어 그 교류가 성장함에 따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범위도 반드시 확장되어야 한다. 여기서 통일된 민족이 팽창하고, 자신들의 언어를 잃고 지배적 민족의 언어나 혼합어를 채택하는 다른 민족들을 삼키려는 경향이 발생한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인류의 세 개의 거대한 문화적 공동체가 동시에 발전했다. 곧 기독교, 이슬람, 불교의 공동체이다.
이 세 문화 집단 각각은 가장 잡다한 언어와 민족체들을 포함한다. 각 집단 내 문화의 대부분은 민족적이 아니라 국제적이다. 그러나 보편적 소통은 또 다른 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더욱 확장되어 어디에서나 동일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지배를 확립한다… 상당히 오랜 기간 많은 민족들 사이에 긴밀하게 짜인 소통과 문화의 공동체가 존재할 때면 언제나, 하나 또는 소수의 민족들이 정부, 군사, 과학과 예술의 정점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들의 언어는 해당 국제적 문화 공동체 내 모든 상인과 교육받은 자에게 필수불가결해진다. 경제, 예술, 문학에서 그들의 문화는 전체 문명에 자신의 성격을 부여한다. 그런 역할을 고대 말기까지 지중해 세계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수행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아랍어가 수행하며, 유대인과 무신론자들을 포함한 기독교 세계에서는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가 보편적 언어가 되었다… 아마도 경제적·정치적 발전은 이 세 언어에 러시아어를 추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중 하나인 영어가 유일한 공통어가 될 가능성도 똑같이 존재한다… 국제적 문화 공동체로의 민족들의 결합은 상인과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 언어의 성장에 반영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결합은 지금처럼 그렇게 긴밀하게 짜인 적이 결코 없었으며, 순전히 민족적 문화가 이보다 덜 가능했던 적도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항상 오로지 민족적 문화에 대해 말하고, 사회주의의 목표가 대중에게 민족적 문화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간주될 때 우리는 그것이 매우 기이하게 느껴진다… 사회주의 사회가 대중에게 교육을 제공할 때, 그것은 그들에게 여러 언어, 곧 보편적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도 부여하며, 따라서 특정 언어 공동체의 분리된 문화뿐 아니라 전체 국제적 문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우리 문명화된 국가들에서 대중이 자신의 모어 외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보편적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는 더 작은 민족들의 언어가 점차 철수하고 궁극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지중해 동부 분지의 민족들이 헬레니즘으로 통합되고 서부 지역의 민족들이 나중에 로마 민족체로 합병되었듯, 모든 문명화된 인류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민족체로 통합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우리 문명권 내에서 언어의 다양성은 여러 민족의 구성원들 사이의 이해를 어렵게 하며 그들의 문명적 진보에 장애물이다. [다음 단락의 강조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것] 그러나 오로지 사회주의만이 그 장애물을 극복할 것이며, 가시적 결과를 얻기 위해 대중 전체를 교육하는 데 성공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이미 다음을 유념해야 한다. 곧 우리의 국제주의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달리 공격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민족에게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권리를 각 민족에게 부여함으로써 각 민족의 완전한 주권(Souveränität)을 인정하는 특수한 유형의 민족주의가 아니다. 개인에 관한 아나키즘의 입장을 민족들로 전치하는 그러한 견해는 현대 문명의 민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문화적 공동체와 상응하지 않는다.
이 마지막 것들은 사실상 경제와 문명의 측면에서 하나의 단일한 사회적 신체를 형성하며, 그 복지는 부분들 간의 협력의 조화에 달려 있고, 이는 모든 부분이 전체에 종속될 때에만 가능하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다른 민족의 권리 평등을 침해하지 않는 한 각자 마음대로 행동하는 전제적 민족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것이 더 잘 작동할수록 부분들이 합의에 도달하기가 더 쉬워지고 공동의 계획에 따라 더 많이 협력하게 되는 하나의 유기체이다.
이것이 카우츠키가 묘사한 역사적 구도이다. 분명히 그는 마르크스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제시하는데, 주로 문화적이고 평화로운 발전의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 마르크스는 정치적 측면, 즉 외부로부터의 무력 정복을 강조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민족체들의 운명이 스스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경향이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라고 특징짓는다. 카우츠키는, 우리가 아는 한, 사회주의 문헌에서 최근에 처음으로,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모든 민족적 구별을 완전히 제거하고 모든 문명화된 인류를 하나의 민족체로 융합시키려는 역사적 경향을 정식화한다. [K. 카우츠키, 민족성과 국제성, 12-17쪽 및 23쪽.]
그러나 이 이론가는 현재 자본주의 발전이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 곧 민족 의식의 각성 및 강화와 더불어 “현대적 조건에 가장 잘 부합하는 국가 형태이며, 그 형태 속에서 자신의 임무를 가장 쉽게 수행할 수 있는” 민족국가에 대한 필요성을 낳는다고 믿는다. [같은 책]
“최상의” 민족국가는 단지 쉽게 기술되고 이론적으로 정의될 수는 있지만 현실과는 부합하지 않는 하나의 추상일 뿐이다. 보편적 문명 공동체를 향한 역사적 발전은, 모든 사회적 발전과 마찬가지로, 모순 속에서 진행될 것이지만, 국제적 문명의 강화되는 성장과 관련하여 이 모순은 카우츠키가 찾는 곳과는 다른 영역에, 곧 “민족국가”라는 관념을 향한 경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지적한 곳, 민족들 간의 생사를 건 투쟁 속에, 즉 거대한 문명 지역들과 함께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자본주의 국가들을 창출하려는 경향 속에 있다. 우리 시대의 특징적 양상으로서 자본주의의 진보와 더불어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세계 강국들의 발전은 바로 그 출발점에서부터 모든 소민족들을 정치적 무력함으로 몰아넣는다. 자본주의 발전의 선도자들로서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물질적 자원을 소유한 소수의 가장 강력한 민족들을 제외하고는, 소민족과 극소민족의 “민족자결”, 독립적 존재는 환상이며, 앞으로 더욱 그러할 것이다. 오늘날 억압받는 모든 민족들, 혹은 심지어 그 대다수가 독립을 되찾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에 소국가들의 존재가 미래에 대한 어떤 기회나 희망이라도 가질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존 조건인 강대국 경제와 정치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이고 형식적으로 평등한 유럽의 소국가들을 유럽 무대에서 벙어리로, 그리고 더 자주는 희생양으로 전락시킨다. 형식적으로는 독립적이지만 그 독립 자체가 “유럽 협조”의 정치적 투쟁과 외교적 게임의 산물인 몬테네그로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그리스인, 나아가 스위스인까지 포함하여 그런 민족들의 “민족자결”을 진지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민족들”에게 민족자결의 가능성을 보장하려는 발상은 대자본주의적 발전으로부터 15세기와 16세기보다 훨씬 이전의 중세적 소국가들로 되돌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한 발상을 유토피아로 낙인찍는 현대 발전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이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사례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자본주의 국가가 “민족국가”라는 이행 단계를 완전히 건너뛰고 제조업 단계에서 곧바로 식민지 소유 국가를 만들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17세기 초에 식민지 획득을 시작했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사례는 18세기와 19세기에 모든 거대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추종되었다. 그 경향의 결과는 점점 더 많은 새로운 국가들과 민족들, 전체 대륙들의 독립이 지속적으로 파괴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국제 무역이 발전하면, 비록 때로는 더디지만 모든 보다 원시적인 사회가 필연적으로 파멸하며, 그 사회들이 역사적으로 지녀온 “자결” 수단이 파괴되고, 자본주의 발전과 세계 정치라는 파쇄 바퀴에 종속되게 만든다. 예컨대 오늘날 중국 민족(우리가 그 국가의 인민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든 여러 민족으로 보든)이 실제로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형식주의적인 맹목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세계 무역의 파괴적 작용에 뒤이어 노골적인 분할이나 다양한 정도와 형태의 식민지 국가들의 정치적 종속이 따른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가 모든 징후로 나타나는 식민 정책에 맞서 온 힘을 다해 투쟁하며 그 진전을 저지하려고 애쓴다면, 동시에 사회민주주의는 이러한 발전과 식민 정치의 뿌리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에 있으며, 식민주의는 장래의 자본주의 진전에 불가피하게 수반될 것이고, 오늘날의 국가들이 그 길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은 무해한 부르주아 “평화”의 사도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것이다.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고, 국제 정치를 수행하며, 해외 영토를 보유하려는 투쟁은 자본주의 세계 열강에게 필요이자 발전의 조건이다. 카우츠키가 생각하듯이 현대 세계에서 착취의 이익에 가장 잘 부합하는 형태는 “민족” 국가가 아니라 정복에 매진하는 국가이다. 이러한 이상에 접근하는 정도라는 관점에서 여러 국가를 비교해 보면, 적어도 민족체 측면에서 동질적인 유럽 부분만 놓고 보면 그 모델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은 프랑스 국가가 아니다. 에스파냐 국가는 더욱 모델에 부합하지 않는다. 식민지를 상실한 이래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탈피하여 순전히 “민족”적인 구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영국과 독일 국가를 모델로 보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유럽과 전 세계에서 민족 억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미합중국을 보는데, 이 국가는 흑인 민족에 대한 억압을 벌어진 상처처럼 품 안에 간직하고 아시아 민족들을 정복하려 하는 국가이다.
다음 표는 민족 정복이라는 제국주의적 경향을 보여 준다. 수치는 각 나라에 속한 식민지의 억압받는 인구를 가리킨다.
| 식민 본국 | 아시아 | 아프리카 | 아메리카 | 오스트랄라시아 |
|---|---|---|---|---|
| 영국 | 361,445,000 | 40,028,000 | 7,557,300 | 5,811,000 |
| 프랑스 | 18,073,000 | 31,500,000 | 428,819 | 89,000 |
| 독일 | 120,041 | 11,447,000 | — | 448,000 |
| 네덜란드 | 37,734,000 | — | 142,000 | — |
| 벨기에 | — | 19,000,000 | — | — |
| 덴마크 | — | — | 42,422 | — |
| 스페인 | — | 291,000 | — | — |
| 포르투갈 | 810,000 | 6,460,000 | — | — |
| 미국 | 7,635,426 | — | 953,243 | 13,000 |
약 5억 명을 포함하는 이 방대한 인용 수치에, 식민지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유럽 국가들에 완전히 종속된 국가들의 엄청난 숫자를 더하고, 그런 다음 이 총합을 무수한 민족체와 인종 집단으로 다시 쪼개어 보아야, 자본주의 제국주의가 오늘날까지 민족들의 운명과 그들의 “스스로 결정할” 능력에 미친 결과를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 식민지 확장의 역사는 식민지 국가들의 법적, 그리고 이후 정치적 독립 획득이라는 상반된 경향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18세기 말 미국의 잉글랜드로부터의 분리, 지난 세기 20년대와 30년대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국가들의 잉글랜드로부터의 자치 획득 역사는 이러한 경향의 가장 분명한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을 더욱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발생의 특수한 조건들을 즉시 알 수 있다. 19세기까지 남북 아메리카는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한 합리적 착취보다는 유럽 국가들의 재정을 위해 그 나라와 천연자원을 약탈하는 것에 더 기반을 둔, 여전히 원시적인 식민 행정 체제의 희생자였다. 이 경우들은 독자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춘 완전한 하나의 국가가 정치적 의존이라는 썩어가는 족쇄를 끊고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문제였다. 그 자본주의적 추진력은 잉글랜드에 의존했던 북아메리카에서 더 강력했던 반면, 그때까지 주로 농업 중심이었던 남아메리카는 경제적으로 후진적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훨씬 약한 저항에 직면했다. 분명 그러한 예외적인 천연자원의 풍요는 모든 식민지에서 나타나는 규칙은 아니다. 다른 한편, 현대의 식민지화 체제는 이전보다 훨씬 덜 피상적인 의존 관계를 창출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독립 획득은 민족적 의존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민족체에게로 의존을 이전시켰을 뿐이며, 다만 그 역할만 바꾸었을 뿐이다. 먼저 미국의 경우를 보자. 잉글랜드의 지배에서 스스로 해방된 요소는 이질적인 민족이 아니라 홍인종 원주민의 폐허와 시체 위에 아메리카에 정착한 동일한 잉글랜드 이주민들에 불과했다. 이는 인구의 90퍼센트를 잉글랜드인이 차지하는 잉글랜드의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미국은 제국주의적 정복을 실행하는 국가들의 선봉에 서 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주도적 요소가 이민자들, 곧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이었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및 기타 구 식민지들은 주로 흑인 무역과 농장에서의 그 사용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이 지역의 모든 약소 식민지들을 합병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상당히 진지한 “민족” 운동이 최근 나타나고 있는 인도에서도 동일한 조건들이 지배적일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 및 문명 발전 수준의 차이가 서로 다른 엄청난 수의 민족들이 인도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와 그들의 상호 의존성은 인도 운동을 “민족의 권리”라는 단순한 표제 아래 성급하게 평가하는 데 대해 경고해야 할 것이다.
겉보기 예외처럼 보이는 경우들도 더욱 자세히 분석해 보면,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은 모든 민족체의 진정한 독립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을 확증할 뿐이다.
민족 문제를 논할 때 식민지 분할 문제를 제외한다면 그 문제는 확실히 훨씬 더 단순해 보인다. 그러한 기법은 “민족의 권리” 옹호자들에 의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주 적용되며, 이는 또한 예컨대 독일 사회민주주의 내의 에두아르트 다비트나 네덜란드의 반 콜이 식민지 정책과 관련하여 취한 입장과도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은 식민지주의 일반을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조차 불가피한 유럽 민족들의 문명화 사명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이 견해는 루트비히 브르네의 잘 알려진 변형에서 나타난 피히테의 철학적 원리를 “유럽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간략히 기술될 수 있다. Ich bin ich – was ausser mir ist Lebensmittel (“나는 나 자신이다.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은 삶의 수단이다”). 만일 유럽 민족들만이 진정한 민족으로 간주되는 반면 식민지 민족들이 “보급 창고”로 간주된다면, 우리는 프랑스, 덴마크,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들에 대해 유럽에서 “민족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며, 민족 문제는 유럽 내 차원으로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민족자결권”은 지배 인종들의 이론이 되어, 그 “유럽적” 크레틴주의와 함께 부르주아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기원했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사회주의자들의 접근 방식에서는 그러한 권리가 사물의 본성상 보편적인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인식만으로도 기존 체제에 기초하여 이 “권리”를 실현하기를 희망하는 것이 유토피아라는 점을 지적하기에 충분하며, 이는 사회민주주의가 그 존재의 기반을 두어 온 자본주의 발전의 경향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기존하는 모든 국가들을 민족 단위로 분할하고 민족 국가와 소국가들의 모델에 따라 재단하려는 일반적인 시도는 완전히 희망 없으며, 역사적으로 말해 반동적인 사업이다.[9]
IV
“민족의 권리”라는 정식은 사회주의자들이 민족문제에 관해 취하는 입장을 정당화하기에 부적절한데, 이는 그 정식이 각각의 주어진 사례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역사적 조건들(장소와 시간)을 고려하지 못하고 세계 조건들의 발전이라는 일반적 흐름을 헤아리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주의자들의 근본 이론, 곧 사회계급 이론을 완전히 무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민족자결권”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동질적인 사회적·정치적 실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민족” 개념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근본적인 재검토에 부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범주들 중 하나이며, 이 재검토는 “시민의 자유”, “법 앞의 평등” 등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그 안개 낀 베일이 모든 사례에서 특정한 역사적 내용을 은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계급 사회에서는 동질적인 사회정치적 실체로서의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민족 내부에는 적대적인 이해관계와 “권리”를 지닌 계급들이 존재한다. 문자 그대로, 가장 조야한 물질적 관계들에서 가장 미묘한 도덕적 관계들에 이르기까지, 소유 계급과 계급의식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트가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하나의 통합된 “민족적” 실체로 등장하는 사회적 영역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관계의 영역에서 부르주아 계급들은 착취의 이해관계를,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의 이해관계를 대표한다. 법적 관계의 영역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초석은 사적 소유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는 무산자가 소유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것을 요구한다. 사법의 영역에서 부르주아 사회는 계급적 “정의”, 곧 배부른 자들과 지배자들의 정의를 대표하며, 프롤레타리아트는 개인에 대한 사회적 영향들과 인도주의를 고려하는 원칙을 옹호한다. 국제 관계에서 부르주아지는 전쟁과 분할의 정치, 그리고 현 단계에서는 무역 전쟁 체제를 대표하며, 프롤레타리아트는 보편적 평화와 자유 무역의 정치를 요구한다. 사회과학과 철학의 영역에서 부르주아 사상 학파들과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하는 학파는 서로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소유 계급들은 그들 자신의 세계관을 가지며, 그것은 관념론, 형이상학, 신비주의, 절충주의로 대표된다.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의 이론, 곧 변증법적 유물론을 가진다. 소위 “보편적” 조건들의 영역에서조차도, 곧 윤리, 예술에 대한 견해, 행동 방식에서,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 세계관, 이상과 계몽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 세계관, 이상은 심연에 의해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진영을 나타낸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식적 노력과 이해관계, 그리고 부르주아지(전체로서 혹은 가장 진보적인 부분에서)의 형식적 노력과 이해관계가 동일하게 보일 때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적 열망의 분야에서 그러한데, 그곳에서는 형식과 구호의 동일성 아래 내용과 본질적 정치의 가장 완전한 괴리가 숨겨져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된 사회에서는 집단적이고 통일된 의지, “민족”의 자결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우리가 근대 사회들의 역사에서 “민족적” 운동들, 그리고 “민족적 이해관계”를 위한 투쟁들을 발견한다면, 이는 대개 부르주아지의 지배 계층들의 계급 운동인데, 이 부르주아지는 어느 주어진 경우에 “민족적 이해관계”라는 형식 아래 역사적 발전의 진보적 형태들을 옹호하는 한에서만, 그리고 노동계급이 아직 “민족”(부르주아지가 이끄는)의 대중으로부터 독립적이고 계몽된 정치 계급으로 스스로를 구별해내지 못한 한에서만 인구의 다른 계층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대혁명에서 프랑스 인민의 이름으로 제3신분으로서 나설 권리가 있었고, 1848년의 독일 부르주아지조차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를 독일 “민족”의 대표자들로 간주할 수 있었다. 비록 『공산당 선언』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노이에 라이니셰 차이퉁』이 이미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뚜렷한 계급 정치의 지표들이었음에도 말이다. 두 경우 모두 이는 오직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계급 관심사가, 그 사회 발전 단계에서, 지배적인 봉건제와의 관계에서 여전히 부르주아지와 정치적으로 균일한 대중을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 계급의 관심사였다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이러한 사정은 “민족의 권리”가 민족문제에 대한 사회당의 입장을 위한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한 당의 존재 자체가 부르주아지가 더 이상 전체 인민 대중의 대표자가 아니게 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치마폭에 숨어 있지 않고, 자신의 사회적·정치적 열망을 지닌 독립된 계급으로 스스로 분리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민족”이나 “권리”, 그리고 통일된 전체로서의 “인민의 의지”라는 개념들은, 우리가 말했듯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미성숙하고 무의식적인 적대 시절의 잔재이기 때문에, 계급의식을 갖추고 독립적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러한 관념을 적용하는 것은 두드러진 모순이 될 터인데, 이는 학문적 논리가 아니라 역사적 모순이다.
현대 사회의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주의 정당은 계급 적대를 고려해야 한다. 체코 민족문제는 젊은 체코 소부르주아지에게는 한 가지 형태를 띠고, 체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또 다른 형태를 띤다. 우리는 코시치엘스키와 미로스와비에에 있는 그의 마부, 바르샤바와 우치의 부르주아지, 그리고 계급의식을 갖춘 폴란드 노동자들 모두에게 동시에 적용될 수 있는 폴란드 민족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다. 한편 유대인 문제는 유대인 부르주아지의 머릿속에서는 한 방식으로 정식화되고, 깨어 있는 유대인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정식화된다. 사회민주주의에게 민족문제는, 다른 모든 사회적·정치적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계급 이해관계의 문제이다.
1840년대의 독일에는 일종의 신비적이고 감상적인 사회주의, 곧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인 카를 그륀과 모제스 헤스의 사회주의가 존재했다. 이러한 유형의 사회주의는 이후 폴란드에서 리마노프스키에 의해 대표되었다. 1840년대 이후 폴란드에는 이것의 스파르타식 판본이 등장했는데, 1870년대 초의 『루트 폴스키 [폴란드 인민]』와 그 10년 말의 『포부트카 [기상나팔]』을 보라. 이 사회주의는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반 위에서, 훗날 폴란드사회당(PPS)의 지도자가 된 리마노프스키는 사회주의는 명백히 아름다운 사상이고 애국심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사상이므로, “그처럼 아름다운 두 사상이 함께 결합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관찰과 함께 폴란드 사회주의와 폴란드 재건의 과업을 결합시키려고 시도했다.
이 감상적 사회주의에서 유일하게 건전한 점은, 그것이 사회주의 체제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열망의 최종 목표로서 계급 지배를 폐지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의 가장 고귀한 이상들의 실현을 보장하리라고 서약했다는 올바른 관념에 대한 유토피아적 패러디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1896년] 런던 국제 대회에 인용된 결의문에서 제시된 원칙의 실제 내용이자 본질적 의미이다. “민족자결권”은 “노동권”이 공허한 구호가 아니게 되는 사회 체제에서만 진부한 상투어가 아니게 된다.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뿐만 아니라 사회 계급들의 존재 자체와 그 대립, 상이한 이해관계와 욕구를 지닌 계급들로의 사회 분할 자체를 제거하는 사회주의 체제는 이해관계의 조화와 연대로 결합된 개인들의 총체인 사회, 공동의 조직된 의지와 그것을 충족시킬 능력을 갖춘 통일된 전체를 출현시킬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는 “민족”을 통일된 의지로서 직접적으로 실현할 것이며, 이는 그 체제 내의 민족들이 일반적으로 별개의 사회적 유기체를 구성할 것인지, 혹은 카우츠키가 말하듯이 하나로 통합될 것인지의 여부, 그리고 그 자유로운 자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에 달려 있다. 한마디로, 사회는 자신의 정치적 존재와 그 창조의 조건들을 결정할 능력을 가질 때 자신의 민족적 존재를 자유롭게 결정할 능력을 획득할 것이다. 인간 사회가 자신의 사회적 과정들을 통제할 때 “민족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존재를 통제할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자결권”의 지지자들이 그 “권리”와 발언의 자유, 출판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와 같은 모든 민주주의적 요구들 사이에서 도출하는 유비는 완전히 부적절하다. 이들은 우리가 정치적 자유의 정당이기 때문에 결사의 자유를 지지하지만, 여전히 적대적인 부르주아 정당들에 맞서 싸운다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민족의 자결을 지지하는 것이 민주주의적 의무이지만, 이 사실이 자결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모든 개별 전술을 지지하도록 우리를 구속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표면적으로 유사해 보이는 이 “권리들”이 완전히 다른 역사적 단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한다. 결사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등은 성숙한 부르주아 사회의 법적 존재 형식이다. 그러나 “민족자결권”은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사회주의 체제에 기초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관념의 형이상학적 정식화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실천되는 사회주의는 결코 이 모든 신비적이고 “고귀하며” “아름다운” 욕망의 집합체가 아니라, 명확히 규정된 조건들의 정치적 표현일 뿐이다. 곧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맞서는 현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투쟁이다. 사회주의는 현재의 생산 형식을 제거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계급의 독재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 과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인 사회주의 정당에게 주요하고 지도적인 과업이며, 사회 생활의 모든 개별 문제들에 대한 그 당의 입장을 결정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정당이다. 그 역사적 과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익과 더불어 사회주의 실현을 향한 자본주의 사회 발전의 혁명적 이익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민족자결권이 아니라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노동계급,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결권만을 실현하도록 요구받는다. 사회민주주의는 이러한 입장에서 모든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예외 없이 검토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의 강령적 요구를 정식화한다. 우리가 국가 안에서 요구하는 정치적 형태들의 문제에서도, 국가의 대내외 정책 문제에서도, 법률이나 교육, 세금 또는 군대의 문제에서도, 사회민주주의는 “민족”이 자결에 대한 자신의 비전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이 모든 문제들은 민족정치적·민족문화적 존재의 문제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익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들과 민족정치적·민족문화적 문제들 사이에는 대개 상호 의존과 인과관계의 가장 긴밀한 유대가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여기서 이러한 요구들을 개별적으로 정식화하고, 주어진 시기와 장소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계급 투쟁의 이익에, 그리고 사회의 혁명적 발전의 이익에 가장 잘 부합하는 민족정치적·민족문화적 존재 형태들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할 필요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는 이러한 문제들을 “민족들”이 해결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이 문제를 추상의 구름으로부터 구체적 조건들의 단단한 지반으로 끌어내리자마자 완벽하게 명백해진다.
“민족”은 자결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민족”은 누구이며, 누가 “민족”을 대변하고 그 의지를 표현할 권위와 “권리”를 가지는가? “민족”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다른 모든 정당들은 민족적 의지의 왜곡되고 그릇된 표현만을 제공할 뿐, 오직 자신만이 진정으로 “민족”의 의지를 표현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정치 정당이 하나라도 존재하는가? 모든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들은 스스로를 민중의 의지의 화신으로 간주하며, “민족”을 대표할 배타적 독점권을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 정당과 반동 정당들도 마찬가지로 민족의 의지와 이익을 언급하며, 일정한 한계 내에서 그렇게 할 권리를 조금도 덜 가지지 않는다. 프랑스 대혁명은 의심할 여지없이 프랑스 민족 의지의 표현이었으나,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혁명의 성과를 농단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전체 국가 개혁을 “일반 의지(la volonté generale)” 원칙에 기초했다.
1848년에 “민족”의 의지는 처음에 공화국과 임시정부를, 그 다음에는 국민의회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공화국과 임시정부와 국민의회를 무효화한 루이 보나파르트를 낳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 동안 자유주의는 민중의 이름으로 “카데트” 내각을 요구했고, 전제정치는 같은 민중의 이름으로 유대인 학살을 조직했으며, 혁명적 농민들은 지주의 저택들을 불태움으로써 자신들의 민족적 의지를 표현했다. 폴란드에서는 폴란드왕국과 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National Democracy)이 민중의 의사라고 주장했으며 “민족의 자결”의 이름으로 “민족적”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사회주의 노동자들을 암살하게 했다.
민족의 “참된” 의지에 일어나는 일은 레싱의 『현자 나단』 이야기 속 진짜 반지에 일어난 일과 같다. 그것은 분실되었고, 가짜나 위조된 반지와 구별하여 찾아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 원칙이 다수의 의견을 결정함으로써 인민의 참된 의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민족은 인민의 다수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그 원칙을 자신의 척도로 삼는 사회민주주의당에는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것은 혁명적 정당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 자체를 사형에 처하는 셈이다. 사회민주주의는 그 본성상 민족의 압도적 다수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사회에서, 민족의 의식적 의지를 표현하는 문제에 관한 한, 사회민주주의는 현재로서는 단지 다수가 되기를 추구하는 소수의 정당일 뿐이다. 사회민주주의는 그 열망과 정치 강령에서 민족 다수의 의지를 반영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의지를 구체화하려 한다. 그리고 그 계급 내에서조차 사회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사를 구현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주장하지도 않는다. 사회민주주의는 도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혁명적인 부분의 의지와 의식만을 표현한다. 사회민주주의는 그 의지를 확장하고, 노동자 다수가 자신의 이익을 자각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민족의 의지” 또는 그 다수의 의지는 사회민주주의가 그 앞에 겸손하게 굴복하는 우상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사명은 무엇보다도 “민족”, 곧 노동계급 다수의 의지를 혁명화하고 형성하는 데 기초한다. 왜냐하면 민족의 다수, 따라서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사회에서 드러내는 전통적인 의식 형태는 사회주의의 이상과 열망에 적대적인, 통상적인 부르주아 의식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가 가장 강력한 정당인 독일에서조차, 325만 명의 유권자를 가진 사회민주주의는 오늘날 부르주아 정당의 800만 유권자와 3,000만 선거권자에 비하면 여전히 소수이다. 의회 선거 통계는 물론 평화 시의 세력 관계에 대한 대략적인 관념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때 독일 민족은 보수주의자, 성직자, 자유사상가의 다수를 선출함으로써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그들의 손에 맡긴다.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에서도 같은 일이 훨씬 더 큰 정도로 일어나고 있다.
V
“민족”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적용하려는 시도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 보자.
현 혁명 단계의 폴란드와 관련하여, 지금은 사라진 신문 『이스크라』(Iskra)의 편집위원이었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한 사람이 1906년에 불가결한 바르샤바 제헌의회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족들에 대한 현재의 억압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이 러시아의 정치 조직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억압받는 민족들과 병합된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전(全)러시아 제헌의회 조직에 극도로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 의회는 원하기만 하면 자신의 혁명적 사명을 수행하고, 차르 체제가 억압받는 민족들을 자신에게 묶어두는 폭력의 족쇄를 부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만족스러운, 곧 혁명적인 방법은 민족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실행하는 것 외에는 없다. (인용문 전체의 강조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것.) 모든 민족의 통일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의회에서 수행할 임무는 그러한 민족문제 해결을 이루어내는 것이며, 이 임무는 오직 당이 대중 운동에, 대중이 제헌의회에 가하는 압력에 기반을 둘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인정된 민족자결권은 어떤 구체적 형태로 실현되어야 하는가?
민족문제가 법적 국가의 존재와 어느 정도 동일시될 수 있는 경우(폴란드의 경우가 그러하듯), 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실현할 수 있는 기관은 특별한 임무가 해당 “변경 국가”와 국가 전체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 즉 국가에 속할지 분리될지 결정하고, 그 내부 체제와 국가 전체와의 미래 연결을 결정하는 민족 제헌의회일 수 있고 또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폴란드 제헌의회는 폴란드가 새로운 러시아의 일부가 될지, 그리고 그 헌법이 어떠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민족 자치 기관의 결정에 자신의 계급이 각인되도록 하기 위해 모든 힘을 사용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전러시아 의회에 폴란드 민족문제의 해결을 바르샤바 세임에 넘겨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면, 나는 페테르부르크 제헌의회가 민족체 문제를 다룰 때까지 그 세임의 소집을 미룰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반대로, 나는 바르샤바 제헌의회라는 구호가 이제, 전러시아 제헌의회 구호와 동시에 제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전러시아 제헌의회를 소집하는 정부는 폴란드를 위한 특별 제헌 세임 또한 소집해야 한다(또는 그 소집을 승인해야 한다). 전러시아 의회의 임무는 바르샤바 세임의 작업을 승인하는 것이 될 것이며, 페테르부르크 제헌의회에 관여하는 다양한 사회 세력들에 비추어볼 때,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원칙에 기초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폴란드 민족은 자신의 민족적 의지를 더욱 단호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것이다. 폴란드는 폴란드의 미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특별히 소집된 세임 선거에서 이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이 세임의 결정에 기초하여, 전러시아 의회 내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들은 민족자결권의 실질적 승인을 정력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전러시아 제헌의회와 전폴란드 제헌의회의 동시 소집, 이것이 우리의 구호여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폴란드 제헌의회 요구를 제시한다고 해서, 폴란드 민족이 바르샤바 세임의 어떤 대표단에 의해 전러시아 의회에서 대표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나는 전러시아 의회에서 그러한 대표 방식이 혁명적 발전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폴란드 세임의 프롤레타리아트 요소와 부르주아 요소를 상호 연대와 책임의 유대로 묶어, 그들 이익의 실제 상호 관계와 모순되게 만들 것이다.
전러시아 의회에서 폴란드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는 하나의 대표단으로 대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표단이 세임에서 세임 내 모든 정당의 대표들을 그 의석 수에 비례해 포함하는 의회로 파견된다 하더라도 바로 그런 일이 발생할 것이다. 이 경우, 의회 내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이고 독립적인 대표는 사라질 것이고, 폴란드에서 진정한 정당들의 창출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규정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는 폴란드 세임 선거는, 전러시아 의회 선거가 그럴 수 있듯 주요 정당들의 정치적·사회적 면모를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후자 유형의 선거는 국지적이고, 부분적이며, 역사적으로 일시적이고, 특수한 민족적 문제들 외에도, 오늘날의 사회를 실제로 분할하는 정치와 사회주의의 일반적 문제들을 전면에 내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다른 모든 경우처럼 나는 폴란드에 대한 민족문제 해결의 하나의 분명한 방식을 말하는 것이며, 이 문제를 다른 민족들을 위해 해결하는 동안 불가결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는 그러한 변화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 인용된 글 저자의 주) [위의 글은 PPS의 기관지 『로보트니크』 75호, 1906년 2월 7일에 실렸다. – 『사회민주주의 평론』 편집진의 주]
이 글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 기회주의 분파가 혁명의 첫 시기 PPS가 내건 구호, 곧 바르샤바 제헌의회 구호에 도덕적 승인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실제 결과도 낳지 못했다. PPS가 해체된 후, 그 당의 소위 좌파는 폴란드 재건 강령을 공개적으로 거부하면서, 바르샤바 제헌의회 구호라는 형태를 띤 부분적인 민족주의 강령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글은 “민족자결권” 원칙에 실제적 효과를 부여하려 했던 특징적인 시도로 남아 있다.
우리가 모든 측면에서 검토할 수 있도록 전문을 인용한 위 논증에서, 몇 가지 점이 독자의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도 저자에 따르면, 한편으로 "폴란드 제헌의회는 폴란드가 새로운 러시아의 형성에 참여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헌법을 가져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계급이 민족 자치 기관의 결정에 최대한의 흔적을 남기도록 자신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여기서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의지는 폴란드 "민족"의 수동적 의지에 명시적으로 대립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의지는 그것이 분명하고 명시적으로 정식화될 경우에만 바르샤바 제헌의회의 결정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음이 분명하다. 바꿔 말하면,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정당인 사회당은 민족 문제에 관해 잘 정의된 강령을 가져야 하며, 이 강령을 바르샤바 제헌의회에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강령은 "민족"의 의지가 아니라 오로지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지와 이해관계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면 제헌의회에서 민족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의지,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결"이 또 다른 의지, 곧 "민족의 자결"에 맞서게 될 것이다.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 구속력 있는 원칙으로서의 "민족자결권"은 사실상 사라지고, 민족 문제에 관한 분명하게 정의된 정치 강령으로 대체된다.
그 결과는 다소 기이하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폴란드 문제의 해결을 폴란드 "민족"에 맡긴다.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집어 들어서는 안 되며, 대신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와 의지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조직상 전국가적 당, 예컨대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일부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사상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통합된 전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두 개의 상이한 입장을 갖는다. 전체로서는 "민족들"의 편에 서고, 그 구성 부분들에서는 각 민족의 개별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에 선다. 그러나 이 입장들은 상당히 다를 수 있으며 심지어 완전히 대립될 수도 있다. 전러시아에서 첨예화된 계급 적대는 민족 정치 문제에서도, 내정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이 분리된 각 민족체의 부르주아 정당 및 소부르주아 정당과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그러한 충돌이 발생할 경우 러시아 노동당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논의를 위해, 연방 제헌의회에 폴란드로부터 두 개의 모순된 강령이 제출된다고 가정해 보자. 내적 경향뿐 아니라 정치적 정식화에 있어서도 상당히 대립하는 민족민주당의 자치 강령과 폴란드 사회민주당의 자치 강령이 그것이다. 이들에 대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은 무엇이겠는가? 그 강령들 중 어느 것을 폴란드 "민족"의 의지와 "자결"의 표현으로 인정할 것인가? 폴란드 사회민주주의는 결코 자신이 "민족"의 이름으로 발언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민족민주당은 "민족적" 의지의 표현자로서 등장한다. 또한 잠시 이 당이 소부르주아 요소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 계층의 무지를 이용하여 제헌의회 선거에서 다수파를 획득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전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들은 자신들의 강령 문구의 요구를 준수하여 민족민주당의 제안을 지지하고 폴란드 출신의 자기 동지들을 반대하는 쪽에 설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령에 동조하면서, "민족의 권리"를 자신들을 아무것에도 구속하지 않는 구호로 제쳐 둘 것인가? 아니면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기 강령의 이러한 모순들을 조화시키기 위해, 바르샤바 제헌의회와 폴란드 내 자신의 선동에서는 자신들 고유의 자치 강령을 지지하면서도,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규율을 잘 의식한 당원으로서 연방 제헌의회에서는 민족민주당의 강령을, 즉 자기 자신의 강령을 반대하여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인가?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저자가 이 문제를 추상적 형태로 검토했으므로, 그 기초 위에서 문제를 상정하여 그 원칙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가정해보자. 러시아의 유대인 주민으로 구성된 민족의회에서, 저자가 원하는 것처럼 왜 별도 제헌의회를 창설할 권리가 폴란드에만 국한되어야 하는가 하면, 시오니스트당이 어떻게든 다수를 획득하고 전러시아 제헌의회가 전체 유대인 공동체의 이주를 위한 자금을 의결할 것을 요구한다고 하자. 반면에 유대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대표들은 시오니스트의 입장을 해롭고 반동적인 유토피아라고 단호히 저지한다. 이 갈등에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그것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민족자결권”은 본질적으로 해당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문제를 결정하는 것, 곧 관계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민족성 강령과 동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러시아 당 강령에 포함된 “민족의 권리”라는 정식은 계급적 입장을 신비화하여 바꿔 말한 것에 불과하다. 또는 대안으로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자체가 오로지 러시아의 예속 아래 있는 민족체들 내부의 민족적 다수파의 의지만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데, 이는 비록 해당 “민족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계급 강령을 들고 이 다수파에 맞서 나온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경우 그것은 특수한 유형의 정치적 이원론이다. 그것은 “민족적” 입장과 계급적 입장 사이의 불화를 극적으로 표현하며, 곧 연방 노동자당의 입장과 그 당을 구성하는 특정 민족체들의 정당들 입장 사이의 갈등을 부각한다.
별도의 폴란드 제헌의회는 민족자결권을 실현하는 기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권리는 실제로 저자에 의해 두 방향에서 엄격히 제한된다. 첫째, 바르샤바 제헌의회의 권한은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의 관계와 폴란드 헌법이라는 특수한 문제로 축소된다. 둘째, 바로 이 영역 내에서조차도 “폴란드 민족”의 결정은 전러시아 제헌의회의 승인에 종속된다. 하지만 제헌의회는, 이 유보 조항이 어떤 의미라도 가지려면, 이 승인을 부여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한 조건에서는 무제한적인 “민족자결권”이 상당히 문제적으로 된다. 별도 바르샤바 제헌의회라는 구호의 민족적 지지자들은 그 권한이 폴란드와 러시아 간의 관계라는 좁은 영역으로 축소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의회에 폴란드 사회생활의 모든 대내외적 관계들에 대한 권력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리고 “민족자결권”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권리와 논리를 자기편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결”이 오로지 민족의 외적 운명과 그 헌법의 해결만을 의미하고 모든 사회적·정치적 사안들의 해결은 의미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의 관계와 폴란드 헌법을 “정치 및 사회주의의 일반적 문제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지극히 인위적인 구성물이다. 만약 “폴란드 헌법”이 폴란드의 선거법, 결사 및 집회법, 언론법 등등을, 그것이 분명히 그래야 하듯이, 결정한다면, 그렇다면 연방 제헌의회가 폴란드와 관련하여 해결해야 할 정치적 문제들이 무엇으로 남는지 분명치 않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오직 두 가지 관점 중 하나만이 가능하다. 즉, 바르샤바 제헌의회가 폴란드 민족의 자결을 위한 본질적인 기관이 될 것이며, 이 경우 그것은 오직 페테르부르크 제헌의회와 동등한 수준의 기관일 수밖에 없다. 아니면, 바르샤바 제헌의회가 연방 제헌의회에 의존하고 종속되는 지위에 있는 민족 세임의 역할만을 수행하며, 이 경우 러시아 “민족”의 승인에 의존하는 “민족자결권”은 독일의 개념인 “대공을 우두머리로 하는 공화국”을 떠올리게 한다.
서론에서 그토록 매력적으로 바르샤바 제헌의회의 형태로 선언된 “민족의 권리”가 저자의 이해에서는 어떻게 결국 페테르부르크 제헌의회의 권한과 승인권에 의해 무효화되는지, 저자 자신이 우리가 짐작하도록 도와준다.
이 문제에서 멘셰비키 언론인은 바르샤바 제헌의회가 민족적 이해관계의 기관이 될 것이고, 연방 제헌의회는 계급적 이해관계와 일반적 사회적 이해관계의 기관, 곧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투쟁의 무대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채택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바르샤바의 "민족적 의지" 기관에 대해 불신을 보이며, 그 민족 세임이 페테르부르크 제헌의회에 대표를 보내는 것에 반대하고,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를 가장 잘 대변하기 위해 폴란드로부터의 직접 선거를 요구한다. 두 개의 제헌의회를 옹호하는 이 사람은 바르샤바 제헌의회에 보통·평등 선거가 실시되더라도, 그 개별적 성격 때문에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위가 약화될 것이며, 반대로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가 전체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일반 제헌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계급적 지위와 그 방어를 강화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여기서 한 입장과 다른 입장 사이에서 동요가 발생하며, "민족적" 의지의 기관을 계급투쟁의 기관에 종속시키려는 욕구가 생긴다. 그렇다면 이는 또다시 모호한 정치적 입장으로, 여기서 "민족적" 관점과 계급적 관점 사이의 충돌이 바르샤바 제헌의회와 페테르부르크 제헌의회의 대립 형태를 취한다. 단 하나의 의문만 남는다. 연방 제헌의회에서의 대표가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어에 더 유용하다면,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지와 이해관계의 우위를 보장하기 위해 그 기구가 폴란드 민족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토록 많은 망설임과 모순은 "민족"과 노동계급이 공통의 입장을 발전시키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할지 보여줄 뿐이다.
이와는 별도로, 민족적 "자결"의 기관으로서 바르샤바 제헌의회라는 전체 구상은 카드로 쌓은 집에 불과하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민족국가의 의존 또는 독립은 의회 대표 기관에서 다수의 투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회경제적 발전에 의해서, 물질적 계급 이해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며, 대외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는 무장 투쟁, 전쟁, 또는 봉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바르샤바 제헌의회는 폴란드가 먼저 성공적인 봉기를 통해 러시아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쟁취한 경우에만 진정으로 폴란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폴란드 국민은 바로 그런 일을 할 실제적 능력과 필요한 힘을 가질 때에만 자신의 "민족자결권"을 실현할 수 있으며, 그때에는 자신의 "권리"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힘에 기초해서 실현할 것이다. 현재의 혁명은 폴란드에서 독립 운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며, 폴란드를 러시아로부터 분리하려는 경향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혁명은 민족 정당(국가민주당)이 폴란드 재건 강령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다른 당(PPS)은 산산조각나서 투쟁 도중에 이 강령을 명시적으로 포기하도록 강요당함으로써 그러한 경향의 잔재를 묻어버렸다. 그리하여 폴란드 민족의 "민족자결권"은, 황금 접시로 식사할 권리로 남아 있다.
따라서 바르샤바 제헌의회 요구는 명백히 모든 정치적 또는 이론적 중요성을 박탈당했으며, 퇴락한 폴란드 민족주의가 내놓은 일시적인 즉흥 제안, 곧 나타나자마자 터져버리는 비누 거품에 불과하다. 이 요구는 오직 현실에서 "민족자결권"을 적용하는 사례로서만 유용하다. 이 사례는 현 체제의 틀 안에서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가 "민족들"에게 그들("민족들")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값싼 축복을 내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힘도 없는 공허한 구호를 제공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입장은 사회민주주의를 그 진정한 소명,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익 수호와 사회의 혁명적 발전이라는 소명과 충돌하게 만드는데, 바로 이것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이 민족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강령 속에 그 형이상학적 문구를 보존하는 것은, 당이 자신의 강령의 모든 조항에서 지키려고 애써 온 엄격한 계급적 입장을 배반하는 행위일 것이다. 제9항은, 아무리 일반적인 것이라 해도, 문제의 각 민족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에 부합하게 민족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 구체적인 정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각 민족체의 사회민주주의 조직의 강령이 당연히 전러시아 당의 강령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국가 전체의 노동자당이 이러한 각각의 강령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적 평가를 내리는 일은 필요하지만, 이 평가는 실제 사회적 조건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 경향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이해관계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오직 이것만이 당 전체와 그 구성 부분들에서 통일되고 일관된 입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주석
- Towarzystwo Demokratyczne Polskie(폴란드 민주 협회), 1832-1862년, 프랑스와 영국에 있는 폴란드 망명자들의 가장 큰 조직으로,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견해를 표방했다. 1840년 이후로는 분할된 폴란드 세 지역에서 봉기를 준비하는 데 관여했다.
Pobudka(기상나팔), 일명 La Diane으로도 불리며, 1889-1893년에 파리에서 발행된 폴란드 민족사회당의 기관지였다.
Liga Narodowa(국민 동맹), "폴란드 동맹"의 후신으로 1893년에 창립되었으며,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 폴란드에서 활동한 비밀 정치 조직이다. 계급 연대와 민족주의를 장려했으며 유산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1896년, 부르주아적이며 강한 민족주의 경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던 민족민주당(엔데치아)을 창당했다. ↩ - 위의 동의안은 다음과 같았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예속되는 것은 오로지 자본가와 전제군주의 이익에만 봉사하고, 억압받는 민족과 억압하는 민족의 노동 인민들에게 똑같이 해롭다는 점, 그리고 특히 내적 강함과 외적 위상을 폴란드의 예속과 분할에 빚지고 있는 러시아 차르 체제가 국제 노동자 운동의 발전에 영구적인 위협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대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폴란드의 독립은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와 국제 노동 운동 전체 모두에게 절대적인 정치적 요구를 대표한다." [아마도 R.L.의 주] ↩
- 폴란드사회당의 독일 지부만이 독일 사회민주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런던 결의문을 자신의 강령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에 재가입한 후, PPS는 에르푸르트 강령을 아무런 유보 없이 자신의 강령으로 채택했다.[5] [아마도 R.L.의 주]
[아래 주석이 위 주석에 표기되어 있어 혼란을 준다. 필사자 주] ↩ - 세 차례의 분할(1772, 1793, 1795)로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었다(각각 폴란드 영토의 62퍼센트, 20퍼센트, 18퍼센트). 각 점령 지역의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은 분할 강대국의 사회주의 정당들과 어떤 식으로든 협력했지만, 독일 사회민주당 및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더 긴밀했다(1898년까지는 러시아 사회주의 정당이 없었다).
루드비크 바린스키가 1882년에 창립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최초의 폴란드 사회주의 정당으로 불렸다. 러시아의 나로드나야 볼랴(인민의 의지)와 협정을 체결했다. 1880년대 후반 프롤레타리아트가 파괴된 후, 소위 "제2차 프롤레타리아트"(마르틴 카스프샤크), 폴란드 노동자 연합(율리안 마르흘레프스키, 아돌프 바르샤프스키, 브로니스와프 베소워프스키), 그리고 노동자 협회라는 세 개의 소규모 그룹이 계속 활동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시에, 1881년 브로니스와프 리마노프스키가 포츠머스에서 폴란드 인민을 조직했다.
1892년, 오스트리아 갈리치아와 독일령 실레지아의 폴란드 사회주의 그룹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분리된 독자적인 폴란드 정당을 결성했다. 1892년 11월, 망명 중인 모든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의 대회가 통합된 폴란드사회당(PPS)을 창당했다. PPS는 러시아령 폴란드를 포괄했으며, 독일·폴란드 사회당 및 오스트리아 갈리치아의 폴란드 사회민주당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1893년 로자 룩셈부르크, 율리안 마르흘레프스키, 아돌프 바르샤프스키, 레오 요기헤스가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SDKP)을 창립하기 전까지, 폴란드인들은 국제 대회에서 하나의 단위로 출석했다.
SDKP는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 후계자로 간주했다. 당의 즉각적 목표는 폴란드에 영토적 자치를 부여하는 러시아 제국 전체의 자유주의적 헌법이었고, 폴란드 독립은 명시적으로 거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폴란드 사회주의 운동은 폴란드 독립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분열된 상태를 유지했다. SDKP와 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이 합병(1899년)된 후, 새 정당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이라는 이름을 취했다.
1911년 SDKPiL은 두 분파로 분열되었다. 자르잔도프치(Zarządowcy) 분파에는 로자 룩셈부르크, 레오 요기헤스-티슈카, 마르흘레프스키, 펠릭스 제르진스키가 속했고, 로즈와모프치(Rozłamowcy) 분파에는 하네츠키, 라데크, 슈타인 형제, 브론스키가 속했다. 1918년 폴란드 공산당이 결성되면서 두 분파 모두 소멸했다. 이 당은 곧 불법화되었고,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거의 전부 숙청당했다. 폴란드 공산당의 직접적 후계는 1942년에 창당된 폴란드 노동자당(Polska Partia Robotnicza)이었다.
PPS는 1948년 PPR과 통합되면서 소멸했다. 이 두 당의 융합으로 현재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집권당인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PZPR)이 탄생했다. - 유제프 슈이스키(Josef Szujski, 1835-1883), 폴란드 역사가이자 정치가, 화해적·친오스트리아 정책의 대변인, 폴란드 독립 운동에 반대한 정치 팸플릿인 Teka Stańczyka의 공저자.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Tadeusz Kościuszko, 1746-1817), 폴란드 장군, 소위 1794년 코시치우슈코 봉기의 최고 사령관. 1776년과 1793년 폴란드 분할의 주요 수혜국이었던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맞서 싸웠으나 실패한 이 봉기는 1795년의 제3차 분할을 초래했고, 이로써 폴란드는 1918년 독립을 되찾을 때까지 유럽 지도에서 사라졌다.
러시아 점령 하 폴란드에서 일어난 11월 봉기(1830-31)는 강화된 러시아화 정책에 의해 촉발되었다. 친러시아 성향의 폴란드 귀족과 상층 군부는 혁명적 지식인들과 하급 육군 장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세임(의회)이 차르를 폐위시키자 무력 충돌이 발발했고, 이는 러시아가 폴란드 잔존 왕국의 주권을 궁극적으로 청산하는 것으로 끝났다.
1월 봉기(1863-64)는 폴란드인들을 차르 군대에 징집한 데서 직접적 원인이 발생했다. 농민과 민간인의 지지를 받으며 봉기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폴란드 영토로 확산되었다. 이 봉기는 패배로 종결되었고, 총사령관 로무알트 트라우구트는 러시아인들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 - 사실 이 기사들은 엥겔스가 쓴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그것들을 제출했기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마르크스의 분석 기법을 예시하는 것으로 이 기사들을 인용하는 것은 완전히 옳다. ↩
- 프리드리히 엥겔스, Der Schweizer Bürgerkrieg, Nachlass, II, 448쪽. ↩
- 법률 형식주의자들과 교수들의 머릿속에서, 이러한 발전은 “민족적 이념의 타락”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민족주의 경향의 또 다른 흐름은 이미 정치적 독립을 달성한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에 대한 우월성과 패권을 주장하려는 노력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노력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과거 역사적 미덕이나 민족적 성격, 곧 “영혼”의 현재적 특징에 대한 미화로 표현되거나, 마지막으로 미래의 문화적 역할에 대한 완전히 규정되지 않은 희망, 곧 특정 민족에게 주어졌다고 여겨지는 어떤 종류의 운명적 사명으로 표현되며, 이 같은 노력에 현재 민족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정치적 경향은 특정 민족의 영토적 경계 확장, 여러 다른 나라들을 분할하고 식민지 소유를 늘림으로써 자국의 세계적 지위를 강화하는 것, 곧 제국주의 정치를 초래한다. 이러한 운동들은 민족적 이념의 한층 더한 발전을 구현하지만, 그 이념의 본래 내용과는 모순을 이루며, 그 파국적 결과와 문명에 대한 심대한 타락 효과 속에서, 그 이념의 타락과 죽음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민족들의 세기는 종말을 고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우리는 새로운 경향으로 물든 새로운 시대를 기다려야 한다. – W.M. 우스티노프, Idyeyu Natsyonalnovo Gosudarstva (하르코프: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석으로 보임] ↩
2. 민족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민족문제는 사회주의자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전제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론적 사회주의의 영향은 노동자 운동 전체에 간접적으로 미쳐 왔으며, 그 정도가 오늘날에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방식 전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마르크스주의 용어만큼은 쓰지 않는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자 정당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그 유명한 예가 현재 러시아의 사회혁명당인데, 그 이론 속에는, 그런 것을 이론이라 부를 수 있다면, 나로드니키와 인민의지당에게서 물려받은 요소 못지않게 마르크스주의 학파에서 빌려 온 요소가 들어 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소부르주아적·민족주의적 유형의 모든 사회주의 그룹 역시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와 사회주의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저마다의 공상을 품고 있다. 지금은 쇠퇴한 폴란드 사회민주주의는 소박하고 가부장적인,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리마노프스키 씨의 민족적 사회주의와 견주어 특히 두드러졌는데, '마음씨 좋은' 리마노프스키 씨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름조차 입에 올린 적이 없는 반면, 사회애국주의는 처음부터 자기 강령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익'이라며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정당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요구의 계급적 성격이 그것을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에 기계적으로 끼워 넣는 것만으로 확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당이든 다른 당이든 한 정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익'이라고 여기는 것은 주관적 추론으로 지어낸, 덮어씌운 이익일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노동자의 계급 이익이 최저임금법의 제정을 요구한다고 말하기는 아주 쉽다. 그런 법은 덜 발전한 지역에서 올 수 있는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할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에게 일정한 최저 생활수준을 보장할 것이다, 등등. 이런 요구는 사회주의 서클들에서 거듭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 원칙은 아직 사회주의 정당들 일반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으니, 입법을 통한 임금의 보편적 규제란 오늘날의 무정부적인 사적 경제의 조건에서는 유토피아적 몽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온갖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자유 경쟁'의 작동과 자본의 자생적 운동 속에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의 법적 규제는 예외적이고 뚜렷이 한정된 영역, 예컨대 작은 공동체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최저임금법의 전반적 제정이 자본주의의 현재 조건과 충돌하는 이상, 그것이 완전히 논리적인 논증으로 뒷받침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프롤레타리아적 이익이 아니라 지어낸, 곧 덮어씌운 이익임을 인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순전히 추상적인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갖가지 '계급 이익'을 궁리해 낼 수 있으나, 그것들은 사회주의 강령 속에서 한낱 상투어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 운동에 다른 사회적 요소들이 많이 달라붙을수록, 이 이질적 요소들의 진지하지만 비현실적인 갖가지 요구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익으로 내놓으려는 경향이 강해지기에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회적 요소들이란 부르주아 정당들의 파산으로 정치적 거처를 잃은 사회 성원들을 가리키며,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가 이 범주에 든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무엇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익에 부합하는지 확정할 객관적 기준을 갖지 못한 채, 어떤 사람들이 노동자에게 좋겠다거나 유용하겠다고 생각하는 바에만 이끌린다면, 사회주의 강령은 주관적이고 흔히 완전히 유토피아적인 소망들의 잡동사니가 되고 말 것이다.
역사적 기초 위에, 곧 자본주의 사회 발전의 기초 위에 서서,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는 그 당면 이익(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과 장기적 목표를, 무엇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좋을'지 '유용할'지에 관한 주관적 추론에서가 아니라, 사회의 객관적 발전을 검토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제 이익을 확인하고 그 실현을 위한 물질적 수단을 찾는 데서 이끌어 낸다. 민족문제의 실천적 해결을 위한 주요 대안들, 곧 역사적 실례가 시사하는 대안들과 사회주의 서클들에서 유행하는 슬로건에 대응하는 대안들은 바로 이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먼저 민족국가라는 관념부터 살펴보자. 이 개념을 정확히 평가하려면 우선 그 관념 속의 역사적 실질을 찾아, 가면 뒤에 실제로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아야 한다.
10여 년 전에 발표된, 오스트리아에서의 민족체들의 투쟁과 사회민주주의 강령에 관한 논문에서 카우츠키는 유럽 전역에서 근대 국가의 발흥과 함께 나타난 '근대 민족 이념의 뿌리'를 이룬다는 세 가지 요인을 꼽는다. 그 요인들이란 첫째로 자기 상품 생산을 위한 내부 시장, 곧 국내 시장을 확보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욕구, 둘째로 정치적 자유, 곧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 끝으로 민족 문학과 문화의 민중에로의 확산이다.[1]
카우츠키의 이론에서는 무엇보다 그의 기본 입장, 곧 민족체를 역사적 범주로 보는 그 자신의 견해를 볼 수 있다. 그의 추론에 따르면 민족이라는 관념은 근대 발전의 특정한 시대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부르주아지의 시장 이해, 민주주의적 조류, 민중의 문화, 이것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전형적인 측면들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특정한 종족적·문화적 집단으로서의 민족체가 아니다. 그러한 민족체는 당연히 부르주아적 측면과는 별개의 것이며, 민족적 특성들은 이미 수 세기 전부터 존재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것은 정치 생활의 한 요소로서의 민족 운동, 곧 이른바 민족국가를 세우려는 열망이며, 그렇다면 그 운동들과 부르주아 시대의 연관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독일 민족 통일의 역사는 이 연관의 전형적인 예인데, 훗날의 독일 제국이 그 둘레에서 결정화된 핵이 바로 독일의 관세동맹(Zollverein)과 관세의회(Zollparlament)였기 때문이다. 그 후원자였던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그 진부한 '국민경제' 이론과 더불어, 독일 민족 재생의 첫 사도로 흔히 거론되는 관념론자 피히테보다 더 정당하게 독일 민족 통일의 진정한 메시아로 여겨질 수 있다. 피히테 시대에 독일의 '민중과 군주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사이비 혁명적인 부르셴샤프트가 요란하게 앞장서 알린 이 '민족' 운동은 (위대한 프랑스 혁명에 대한 피히테의 열렬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나폴레옹이 독일에 가져온 혁명의 씨앗과 근대 부르주아 체제의 요소들에 맞선 중세적 반동을 대표할 뿐이었다. '민족 재생'의 후텁지근한 낭만주의적 바람은 승리를 거둔 독일이 봉건적 분할과 3월 전기의 반동으로 되돌아간 뒤 마침내 사그라들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독일 산업의 저 저속한 대변인 리스트의 복음은 1830년대와 40년대에 '민족 재생'을 부르주아 발전의 요소들 위에, 곧 산업과 무역 위에, '국내 시장' 이론 위에 세웠다. 19세기 30~40년대 독일에서 그토록 강력한 정치적·교육적·철학적·문학적 조류를 불러일으킨 이 애국 운동의 물질적 기초는 무엇보다도, 수십 개의 봉건 소국으로 나뉘고 관세와 조세의 장벽이 종횡으로 가로지르던 독일 영토 전체를 하나의 거대하고 통합된 자본주의적 '조국'으로 통일하여 기계제 생산과 대공업을 위한 넓은 토대를 놓아야 할 필요였다.
독일의 산업적·상업적 통일의 역사는 독일의 정치적 통일의 운명과 완전히 뒤얽혀 있어서, 독일의 모든 정치적 전개와 사건을 반영한 관세동맹의 역사는 완벽한 연속성 속에서 현 독일 제국 탄생의 역사로 넘어간다. 1834년에 관세동맹이 태어나 열일곱 개 군소 국가를 프로이센 둘레에 묶었고, 나머지 국가들도 차례차례 이 동맹에 가입해 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끝내 동맹 밖에 남았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마침내 사태를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결정지었다. 1867년에는 새로운 민족적 연합이 존재하는 마당에 관세동맹의 마지막 갱신이 불필요해졌고, 북독일연방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뒤에 그 관세상의 권리와 의무를 새로 세워진 제국에 상속으로 넘겼다. 관세연방참의회(Zollbundesrat)와 관세의회(Zollparlament)의 자리에는 이제 연방참의회와 제국의회가 들어섰다. 근대사에서 가져온 이 사례에서 독일은 근대 민족국가의 진정한 경제적 기초를 훌륭하게 보여 준다.
'자기' 상품을 위한 시장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식욕은 매우 신축적이고 광범해서 언제나 지구 전체를 포괄하려는 자연적 경향을 갖지만, 근대 부르주아 '민족 이념'의 본질 자체는, 각국 부르주아지의 눈에 자기 민족, 곧 그들의 '조국'이 자연에 의해 부르주아지에게 생산물 판매의 장으로 봉사하도록 부름받고 예정되어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마치 그것이 메르쿠리우스 신이 정해 준 배타적 세습 재산이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발전이 급격한 요동 없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곳, 즉 국내 시장을 위한 생산이 수출을 위한 생산을 넘어서는 곳에서는 민족문제가 이렇게 나타난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카우츠키의 정식화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근대 민족 운동의 물질적 기초가 자기 상품을 위한 '본국' 시장에 대한 산업 부르주아지의 막연한 식욕뿐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는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 다른 많은 조건을 필요로 한다. 이 '조국'의 불가침을 보장하는 담보이자 세계 시장에서 제 길을 뚫는 도구로서의 강한 군사력이 필요하고, 나아가 적절한 관세 정책이 필요하며, 교통·통신, 사법, 학교 제도, 재정 정책에 관한 적절한 행정 형태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는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 시장만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기구 전체를 요구한다. 부르주아지는 정상적으로 존립하기 위해 엄밀히 경제적인 생산 조건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자기 계급 지배를 위한 정치적 조건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것에서, 민족적 열망의 특수한 형태, 곧 부르주아지의 진정한 계급 이익은 국가적 독립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민족국가는 동시에, 부르주아지가 민족적 방어에서 공세적 위치로, 곧 자기 민족체의 보호와 결집에서 다른 민족체들에 대한 정치적 정복과 지배로 넘어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역사적 형태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민족국가들'은 예외 없이 이 서술에 들어맞으니, 이웃 나라나 식민지를 병합하고 정복된 민족체들을 철저히 억압하고 있다.
이 현상은,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자기 민족체의 통일과 방어를 위한 민족 운동을 벌이면서 동시에 다른 민족체를 억압하는 일이 (물론 이는 '민족국가'의 이념 자체에 어긋나지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에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848년의 독일 부르주아지는 폴란드 문제에 대한 태도에서 이 현상의 두드러진 예를 보여 준다. 알려져 있다시피 독일의 민족적 애국주의가 가장 뚜렷했던 [1848년] 혁명 동안 카를 마르크스와 그의 서클은 폴란드 독립을 옹호했으나,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독일 '민족국가'는 그 발전의 첫 단계부터 민족체 문제에 관한 한 통용되는 민족국가 이해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제국의 국경은 실제로 독일 민족을 갈라 오스트리아와 새로운 '민족적' 독일 국가로 나누어 놓았고, 폴란드·덴마크·프랑스에서 병합한 영토들에서는 독일인과 인종적으로 다른 민족들을 한데 묶어 놓았다.
훨씬 더 두드러진 예는 헝가리인데, 그 민족 독립 투쟁은 당대에 크게 찬탄받았다. 우리 폴란드의 혁명 지도자들, 곧 벰, 비소츠키, 뎀비츠키까지도 그들을 돕고자 '창을 기울였'다. 그러나 민족체의 관점에서 검토하면 이 투쟁은, 아홉 민족체가 사는 나라에서 마자르 소수파의 계급 지배를 확보하고 마자르인이 다른 민족체들을 억압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았다. 헝가리인의 민족적 '독립'은 카르파티아의 슬로바키아인을 그 형제인 수데텐의 체코인에게서 떼어 놓고, 브라티슬라바·테메슈바르·트란실바니아의 독일인을 오스트리아의 독일인에게서 갈라놓고, 크로아티아인과 달마티아의 세르비아인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인에게서 갈라놓는 대가로 사들인 것이었다.[2]
체코인의 열망도 같은 이중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열망은 무엇보다도 수데텐란트의 독일 주민을 알프스 지방들의 독일인에게서 갈라놓는 데로 명백히 향하고 있기에 독일인들 사이에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체코인의 일차적 목표는 벤체슬라우스(바츨라프) 왕관 아래의 소수 집단인 독일인을 문화와 행정의 문제에서 체코인에게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란다는 듯이, 체코 땅의 분할은 533만의 체코인을 300만의 독일인 및 근 20만의 폴란드인과 한데 묶음으로써 체코인 자신에게도 민족체 분할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체코인과 밀접히 근연 관계인 200만의 카르파티아 슬로바키아인은 이 '민족적' 체코 국가에서 여전히 분리된 채 마자르인의 처분에 내맡겨졌다. 그래서 이 슬로바키아인들 역시, 체코 민족주의자들이 철저히 방치해 온 자신들의 대의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3]
끝으로, 멀리서 예를 찾을 것도 없이, 폴란드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루신인에게도 리투아니아인에게도 똑같이 겨누어져 있다. 분할 열강, 곧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가혹한 절멸 정책을 견뎌야 했던 바로 그 민족체가 이제 다른 민족체들에게 독립적으로 존립할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갈리치아의 스탄치크[4] 정책에 따라 폴란드인은 루신인을 억압했으며, 루신인의 민족 투쟁은 지난 세기 후반 갈리치아 정치사의 전개를 붉은 실처럼 관통해 흐른다. 최근의 리투아니아인 민족 재생 운동도 폴란드 민족주의 진영에서 비슷한 적대를 받았다.[5]
본질적으로 여러 민족체의 이해의 조화가 아니라 충돌 위에 서 있는 부르주아 애국주의의 이 기묘한 양날의 성격은, 부르주아지의 근대 민족 운동의 역사적 기초가 계급 지배를 향한 그 열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열망이 표현을 얻는 특수한 사회적 형태, 곧 특정 민족체의 부르주아지가 국가의 혼합된 전체 주민을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민족적'인 근대 자본주의 국가를 고려할 때에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민주주의적 조직과 민중의 보통 교육, 카우츠키가 든 민족의 이 뚜렷이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은 근대 부르주아 국가의 세부 사항일 뿐이며, 부르주아지가 국가의 틀과 정신 안에서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독립과 국가적 통일이야말로 부르주아지의 민족 운동이 그 둘레를 도는 진짜 축을 이룬다.[6]
이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 계급으로서 자본주의 경제와 부르주아 국가의 소생이다. 자본주의 사회와 부르주아 국가는,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역사가 각 나라에서 만들어 낸 손에 잡히는 형태로 보자면, 이미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활동의 틀이었다. 민족적이든 아니든 부르주아 국가는, 사회 경제의 지배적 형태인 자본주의적 생산과 더불어, 노동계급이 그 위에서 자라나고 번성하는 바로 그 토대다. 이 점에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는 근본적인 역사적 차이가 있다. 부르주아지는 봉건 신분 체제의 태내에서 발전하며 자라난다. 생산 형태로서의 자본주의의 승리와 지배 계급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승리를 확보하고자 열망하면서, 부르주아지는 봉건 체제의 폐허 위에 근대 국가를 창조한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부르주아지의 지배의 테두리 안에서 다음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게 되는데, 이는 여전히 부르주아 국가의 일부로서다. 그러나 국가는 이미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연적 모태였으니, 달걀 껍데기가 병아리에게 그러한 것과 같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말해, 근대 프롤레타리아트가 먼저 새로운 민족국가를 창조하지 않고서는 분리된 의식적 계급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관념은, 봉건 체제가 어쩌다 저절로 정상적으로 생겨나지 않았거나 예컨대 러시아에서처럼 특수한 형태를 취한 나라에서는 부르주아지가 무엇보다 먼저 봉건 체제부터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사명은 근대 '민족' 국가의 창조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과제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태인 이 국가의 폐지이며,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은 바로 그 속에서 의식적 계급으로 생겨나 사회주의 체제를 세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 전체의 일부로서, 예컨대 독일에서 그러했듯 부르주아 발전이 '민족국가'의 창조를 요구하는 곳에서는 부르주아지의 민족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의 뒤를 따르는 것이지, 별개의 정치 강령을 가진 독립적 계급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1840년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민족 강령은 부르주아지의 민족 강령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두 가지 이념, 곧 엄격하게 민족체의 구분에 따른 국경 위에서의 통일과 공화제 정부 형태를 내세웠다.
민족체 문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는 부르주아지의 이해와 정반대다. '조국'의 산업가들을 위한 국내 시장의 보장에 대한 관심, 그리고 식민 정책이나 군사 정책에 의한 정복으로 새 시장을 획득하는 일, 곧 '민족' 국가를 세우려는 부르주아지의 의도인 이 모든 것은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목표일 수 없다.
자본주의 발전의 적자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발전을 자기 자신의 성장과 정치적 성숙의 필연적인 역사적 배경으로 고려한다. 사회민주주의 자체는 자본주의 발전의 진화적 측면만을 반영하는 반면, 지배하는 부르주아지는 반동을 위하여 이 발전을 돌본다. 사회민주주의는 어디에서도 산업이나 무역에 대한 능동적 지원을 자기 과제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군사적·식민적·관세적 보호에 맞서 투쟁하며, 이는 기존 계급 국가의 기본 기구 전체, 곧 그 행정, 입법, 학교 제도 등과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7]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족 정책은 본질상 방어적일 뿐 결코 공세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또한 한 민족체가 다른 민족체를 정복하고 예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체의 이해의 조화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정책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각국의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 자기 민족체의 평화로운 존립과 문화적 발전을 필요로 하지만, 자기 민족체가 다른 민족체들을 지배하는 것은 결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문제를 고찰하면, 외국 민족체들에 대한 지배와 정복의 기구인 '민족'국가는 부르주아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해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카우츠키가 꼽은 이 '근대 민족 이념의 세 뿌리' 가운데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중요한 것은 뒤의 둘, 곧 민주주의적 조직과 민중의 교육뿐이다. 노동계급의 정치적·정신적 성숙의 조건으로서 사활적인 것은, 자기 모어를 사용할 자유, 그리고 민족주의자들의 압력으로 저지되거나 왜곡되지 않는 민족 문화(학문, 문학, 예술)의 발전과 대중의 정상적인 교육이다. 부르주아 체제에서 그것이 '정상적'일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노동계급에게는 국가 안의 다른 민족체들이 누리는 것과 동등한 민족적 권리를 갖는 것이 불가결하다.[8] 특정 민족체에 대한 정치적 차별은, 계급 갈등을 가리고 자기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는 데 열심인 부르주아지의 손에 쥐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다.
'가장 좋은' 사회 상태의 옹호자들[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이 대목에서, 사정이야 어떻든 모든 민족체의 문화적 발전과 권리의 가장 확실한 보장은 바로 국가의 독립, 곧 자신의 민족국가이며, 따라서 민족국가는 결국 프롤레타리아트의 불가결한 계급 이익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무엇이 '가장 좋을'지를 판정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런 고찰에는 아무런 실천적 가치가 없다. 더욱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 '무엇이 가장 좋을까'라는 주제에 추상적으로 접근하는 순간, 민족적 억압에 대해서도 온갖 사회적 병폐에 대해서도 '가장 좋은' 치료제는 의심할 바 없이 사회주의 체제라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토피아적 논증은, '미래의 국가'로 건너뛰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유토피아적 해결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는 현존하는 부르주아적 현실의 틀 안에서 풀려야 한다.
더욱이 방법의 관점에서 보면 위의 추론에는 또 하나의 역사적 오해가 담겨 있다. 독립된 민족국가야말로 결국 민족적 존립과 발전의 '가장 좋은' 보장이라는 논증은, 민족국가를 완전히 추상적인 것으로 보는 관념을 가지고 조작하는 것이다. 오직 민족적 관점에서만, 오직 자유와 독립의 담보이자 화신으로만 바라본 민족국가는, 19세기 전반 독일·이탈리아·헝가리, 곧 중부 유럽 전체의 소부르주아지의 썩어 가는 이데올로기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해체된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보고에서 나온 상투어다. 그 뒤 부르주아지의 발전은, 근대 민족국가가 '자유'니 민족적 '독립'이니 하는 막연한 관념보다 더 실재적이고 손에 잡히는 것임을, 그것이 실로 그다지 매혹적이지도 그다지 순수하지도 않은 명확한 역사적 현실임을 분명하게 증명했다. 근대 국가의 실질과 본질을 이루는 것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이 아니라 오직 부르주아지의 계급 지배, 보호무역 정책, 간접세, 군국주의, 전쟁, 정복이다. 부르주아지는 이 잔인한 역사적 진실을 얇은 이데올로기의 베일로 덮어 가리려는 뻔한 수법을 써서, '독립과 민족적 자유'라는 순전히 소극적인 행복을 내밀곤 했다. 한동안 이 수법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주장이 내세워진 정황을 상기하기만 해도,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입장일 수 있고 또 있어야 할 것과 그야말로 상반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 경우에도 다른 많은 경우처럼,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적수를 자처하는 아나키즘이 그 훌륭한 자식임이 드러났다. 아나키즘은 특유의 '혁명적' 진지함으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상투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족국가의 역사적·사회적 내용에는 경멸만을 보이면서, 민족국가를 '자유'와 '인민의 의지'와 그 비슷한 공허한 말들의 화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했다. 예컨대 바쿠닌은 1849년에 중부 유럽의 민족 운동들에 관해 이렇게 썼다.
"[1848년] 혁명의 첫 생명의 신호는 낡은 억압을 향한 증오의 외침, 억압받는 모든 민족체에 대한 공감과 사랑의 외침이었다. ... '억압자들을 타도하라!'는 외침이 마치 한 가슴에서 터져 나오듯 울려 퍼졌다. '억압받는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그리고 모두에게 구원을! 더 이상 정복 전쟁은 없다. 다만 한 번의 전쟁만은 끝까지 수행되어야 하니, 모든 인민의 최종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영광스러운 혁명적 투쟁이 그것이다! 이른바 역사적·지리적·전략적 필요에 따라 전제적 회의들이 폭력으로 세워 놓은 인위적 경계를 타도하라! 이제 민족들 사이에는 자연에, 정의에 상응하는 장벽, 그리고 인민 자신의 주권적 의지가 그 민족적 특성에 기초하여 민주주의적 정신으로 그어 놓는 장벽 말고는 어떤 장벽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모든 인민들 사이에 울려 퍼진 외침이었다."[9]
민족 독립과 '인민의 의지'를 주제로 한 이 찬가에 마르크스는 이렇게 답했다.
"여기에는 현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거나, 조금이라도 고려되는 한에서는 '전제군주'와 '외교관'들이 그릇되게, 인위적으로 세워 놓은 어떤 것으로 그려진다. 이 사악한 현실에 맞세워지는 것은 '자유', '정의', '인간성'에 대한 절대적 요구라는 정언명령을 지닌, 이른바 인민의 의지다. ... 그들은 이것 또는 저것의 '자유'를 천 번이라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몽상'으로 남을 것이다. ... '인민들의 보편적 형제애'와 '인민 자신의 주권적 의지가 그 민족적 특성에 기초하여' 긋는 국경의 확정에 관해 한마디만 하자. 미합중국과 멕시코는 둘 다 공화국이며, 두 나라 모두에서 인민이 주권자다. 그렇다면 도덕주의적 이론에 따르면 '형제'가 되고 '연방'을 이루어야 할 이 두 공화국 사이에 텍사스를 둘러싼 전쟁이 터진 것은, 그리고 미국 인민의 '주권적 의지'가 미국 의용병들의 용맹에 힘입어 (자연 자체가 정해 놓았다는) 미국 국경을 수백 마일이나 남쪽으로 옮겨 놓고는 이 행동을 '지리적·상업적·전략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10]
이 반어적 물음에 대한 마르크스의 답은 명확하다. '민족국가'는 공화국의 형태를 취하더라도, 자유주의의 상투어가 말하고 아나키스트가 되뇌는 것 같은 '인민의 의지'의 산물이나 표현이 아니다. '민족국가'는 오늘날, 그 이전의 비민족적 국가들과 똑같은 부르주아지 계급 지배의 도구요 형태이며, 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정복에 골몰한다. 민족국가는 정복과 전쟁과 억압을 향한 동일한 경향, 다시 말해 '비민족적'으로 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민족적' 국가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다툼과 이해의 충돌이 벌어지며, 설령 오늘 어떤 기적으로 모든 국가가 '민족적'인 것으로 바뀐다 해도, 내일이면 벌써 전쟁과 정복과 억압이라는 똑같은 익숙한 광경을 보여 줄 것이다. 마르크스가 든 예는 이 점에서 전형적이다. 미합중국과 멕시코의 전쟁은 왜, 무엇을 둘러싸고 일어났는가?[11] 캘리포니아는 미합중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불가결했다. 첫째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금의 보고로서, 둘째로 태평양으로 나가는 관문으로서 그러했다. 이 땅을 획득함으로써만 미합중국의 자본주의는 대양에서 대양으로 뻗어 나가 자리를 굳히고, 서쪽으로도 동쪽으로도 출구를 열 수 있었다. 뒤떨어진 멕시코인들에게 캘리포니아는 단순한 영토적 소유물일 뿐이었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부르주아지의 이해였다. 아나키스트들이 '인민의 의지'로 숭배하고 이상화한 '민족국가'는 자본주의의 이해를 위한 정복의 유능한 도구로 봉사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더욱 두드러진 예들은 근대 남아메리카의 역사가 만들어 낸다. 우리는 19세기 초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식민지들의 '민족' 해방이 지닌 양날의 성격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미 독립된 '민족국가'가 된 뒤의 그들의 정치사인데, 이는 '민족의 자유'와 '인민의 의지'라는 아나키즘적 상투어에 대한 다채로운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브라질은 힘겨운 투쟁 끝에 1825년 포르투갈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바로 그해에 브라질과, 막 에스파냐의 왕홀 아래에서 해방된 아르헨티나 사이에 반다 오리엔탈 주를 둘러싼 전쟁이 터졌다. 이 두 새 '민족'국가는 모두 이 지방을 집어삼키려 했는데, 이 지방은 마침내 우루과이 공화국으로서 스스로 독립을 쟁취했으나, 그것도 남아메리카에 식민지적 이해를 가진 유럽 국가들의 무력 개입 덕분일 뿐이었다. 프랑스와 다른 유럽 나라들은 우루과이와 파라과이의 독립 승인을 완강히 거부하는 아르헨티나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결과 1845년에 파라과이, 우루과이, 브라질이 참가한 또 한 번의 전쟁이 터졌다. 1850년에는 다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브라질은 파라과이와 우루과이의 도움으로 먼저 아르헨티나를 무찌른 다음 실제로는 우루과이를 정복해 버렸다. 1864년에 브라질은 무력 행동으로 이 '독립된' 우루과이를 정식으로 굴복시켰다. 파라과이가 이 행동에 맞서 일어나 브라질에 선전포고를 했고,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브라질 편에 가담했다. 1865년부터 1870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은, '인민의 의지'라기보다 커피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의 의지와 이해가 지배하던 브라질에 마침내 남아메리카의 지배적 강대국의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 역사는 (인구의 3분의 1도 안 되는) 브라질 백인들이 흑인과 혼혈 인구를 지배하는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 내부 투쟁을 거친 뒤에야 1871년에 노예 해방이 선포되었으나, 소유주들에게 국고에서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의 도구인 의회는 이 자금을 의결하지 않았고, 노예제는 여전히 시행되었다. 1886년에는 70세를 넘긴 노예의 해방이 선언되었고, 나머지는 자유를 얻기까지 다시 17년을 기다려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1888년, 왕좌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던 왕조파가 보상 없는 노예제 전면 폐지를 의회에서 강행 통과시켰고, 이것이 공화주의 운동의 장래에 결정적이었다.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떼 지어 공화주의의 깃발 뒤에 섰고, 1889년의 군사 쿠데타로 브라질은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12]
'민족국가들'이 일어서고 '인민의 의지'가 확립된 이래 남아메리카의 내부 사정과 사건들은 이토록 목가적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 아름다운 보완을 제공하는 것이 오스트레일리아 합중국이다. 이 나라들은 영국 식민지의 처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자마자, 곧 공화제 정부 형태 내지 연방 제도라는, 바쿠닌류 상투어의 이상 그 자체를 이루자마자, 뉴기니 바로 옆의 뉴헤브리디스에 대한 공세적 정책을 개시했고, 아메리카 합중국을 능란하게 흉내 내어 '오스트레일리아는 오스트레일리아인의 것이어야 한다'는 저들 특유의 민족 독트린을 선포했다. 동시에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의 커져 가는 해군은 이 독트린에 대한 힘찬 주석이 되고 있다.
한편으로 정치적 독립, 곧 민족국가가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의 계급 이익에 필요한 것이 바로 민족국가가 지배와 정복의 도구이기 때문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급이 관심을 갖는 것은 민족주의의 문화적·민주주의적 내용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정복이 아니라 방어를 통해, 그리고 역사적으로 같은 부르주아 국가에 속하게 된 여러 민족체의 연대와 협력의 정신 속에서, 민족 생활에서 문화와 민주주의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는 정치 체제다. 민족체들과 정치 조직들의 법 앞의 평등, 그리고 민족적 문화 발전의 보장, 부르주아지의 민족주의와 대비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위치에서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강령의 일반적 형태는 이러하다.
II
이 일반적 원칙들의 고전적 확증이자 증명이 되는 것이 러시아 국가의 틀 안에서 가장 유명한 민족체 문제, 곧 폴란드 문제다.
폴란드에서 민족 운동은 처음부터 서유럽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띠었다. 폴란드 민족 이념의 역사적 유비를 오늘날의 독일과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찾는 이들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만이 아니라 폴란드에서도 민족 운동의 참된 역사적 실질을 자신이 오해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 폴란드인에게 민족 이념은 귀족의 계급 이념이었지 결코 부르주아지의 것이 아니었다. 폴란드의 민족적 열망의 물질적 기초를 규정한 것은 19세기 중부 유럽에서처럼 근대 자본주의 발전이 아니라, 반대로 자연경제적·봉건적 경제에 뿌리박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귀족의 관념이었다.
폴란드의 민족 운동들은 이 봉건적 관계들과 함께 사라졌다. 반면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적 대변자인 부르주아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부터 명백히 반민족적 요인이었다. 이는 19세기 부르주아지의 특수한 기원, 곧 그것이 이질적이고 잡다한, 식민의 산물이요 폴란드 땅에 이식된 이물이었다는 데만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폴란드 산업이 그 시초부터, 이미 1820년대와 30년대에, 폴란드 안에 국내 시장을 장악하기는커녕 창출하기도 전에 수출 산업이었다는 사실 역시 결정적이었다. 여기서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통계를 모두 인용하지는 않겠고, 우리의 논저 『폴란드의 산업 발전(Die Industrielle Entwicklung Polens)』(러시아어로도 출판되었다)과 저작 『폴란드 문제와 사회주의 운동(Kwestja polska a ruch socjalistyczny)』(크라쿠프, 1905)을 참조하기를 권한다. 여기서는 이 발전의 가장 중요한 윤곽만을 상기해 두자.
러시아로의 수출, 특히 자본주의 산업의 기간 부문인 직물 생산의 수출은 폴란드 자본주의가 그 시초부터 존립하고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고, 나아가 폴란드 부르주아지의 기초가 되었다. 그 결과 우리 부르주아지는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서쪽, 곧 갈리치아와 본국의 민족적 통일 쪽이 아니라 동쪽, 곧 러시아 쪽으로 기울었다. 이 경향은 제국과 폴란드 왕국 사이의 관세 장벽이 철폐된 뒤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강해졌다. 그러나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실질적 지배는 실패로 끝난 1월 봉기[1863] 이후에 시작되었다. 새로운 지배의 개막을 알린 것은 '유기적 노동의 강령'[13]이었으니, 이는 민족 독립의 포기를 뜻했다. 더욱이 폴란드에서 부르주아지의 계급 지배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처럼 통일된 민족국가의 창조를 요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로 폴란드의 정복과 분할이라는 기초 위에서 일어났다. 통일과 민족 독립의 이념은 자본주의에서 생명의 즙을 길어 올리지 못했고, 반대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이 이념은 역사적으로 수명을 다해 갔다. 그리고 바로 그 사정, 곧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가 민족 이념에 대해 갖는 그 특수한 역사적 관계가 그 이념의 운명에도 결정적이었고 그 사회적 성격을 규정했다. 독일에서,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그보다 반세기 전 남아메리카에서 '민족 재생'은 혁명적·진보적 정신의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자본주의 발전이 이 민족 이념을 껴안았고, 역사적으로 말해 그것을 혁명적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이상인 민주주의·자유주의와 함께 들어 올렸다. 바로 이 역사적 의미에서 민족 이념은 부르주아지의 일반적 계급 강령, 곧 근대 부르주아 국가라는 강령의 한 세부에 지나지 않았다. 폴란드에서는 민족 이념과 부르주아 발전 사이에 대립이 생겨났고, 이 대립은 민족 이념에 유토피아적일 뿐 아니라 반동적인 성격까지 부여했다. 이 대립은 폴란드 민족 독립 이념의 역사가 거친 세 국면에 반영되어 있다.
첫째는 폴란드 귀족의 무장 투쟁의 실패다. 역사철학에서 '폭력과 힘'의 이론을 가장 열렬히 신봉하는 자라도 폴란드 봉기 운동들의 패배를 러시아 총검의 단순한 우세로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폴란드의 근대 경제사와 사회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무장 봉기파의 패배를 준비한 것이 바로, 카우츠키의 말대로 다른 곳에서는 근대 민족 이념의 주요 요소의 하나를 이루었던 그 자본주의적 시장 이해였음을 안다. 대규모 자본주의적 생산의 조건을 확보하려는 부르주아지의 노력은 민족국가에 대한 요구를 수반하지 않았다. 반대로 부르주아지는 병합을 이용하려 했고, 귀족의 민족 운동을 마비시키려 했다. 이리하여 [폴란드에서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이념인 민족국가의 이념이 부르주아지 자신에 의해 방해받았고, 1월 봉기[1863]에서 패배를 맞았다.
둘째 국면은 소부르주아지에 의한 폴란드 민족 이념의 상속이다. 이 화신 속에서 민족 이념은 무장 투쟁에서 중립 정책으로 바뀌었고, 동시에 그 허약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회에서 떨어져 나가 20년을 연명한 뒤(1880년대와 90년대에 소부르주아 민족주의는 대여섯 명의 '전(全)폴란드 애국자'의 형태로 망명 속에 잔명을 이어 갔다), 마침내 현 혁명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그것은 능동적 정당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국민민주당은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라며 민족 독립의 강령을 공개적으로 포기하고 그 대신 나라의 자치와 반혁명이라는 이중의 슬로건을 강령에 써넣음으로써,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국면에 들어섰음을 선언했다. 이제 전통적 민족 강령이라는 바닥짐을 던져 버린 '국민민주당'은 급속히 사회의 실질적인 정치 세력이 되어 간다. 그 둘째의, 소부르주아적 형태에서도 실패한 민족국가의 강령은 부르주아적 폴란드의 기초 위에서 실천적이고 실현 가능한 강령, 곧 자치의 강령으로 대체된다.
끝으로 폴란드 민족 이념의 역사에서 셋째이자 마지막 국면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운동에 결합하려는 그 시도다. 폴란드사회당(PPS)의 20년에 걸친 사회애국주의적 실험은 국제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서 민족국가의 슬로건이 사회주의 강령의 일부가 된 유일한 사례였다. 그리고 이 유례없는 실험은 20년 뒤, 소부르주아적 실험과 똑같은 종류의 위기 속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끝났다. 러시아에서 노동자 혁명[1905]이 터졌을 때, 폴란드사회당(PPS)은 능동적 정치와 사회의 생활에서 한몫을 확보하고자 폴란드 재건의 강령을 공개적으로 포기했다. 국민민주당은 중간계급의 반혁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려고 이 강령을 포기했고, 폴란드사회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압력을 행사하려고 그리했다.
이 포기가 불러온 폴란드사회당의 위기, 쇠퇴, 몰락은 폴란드 민족국가 이념의 셋째이자 마지막 파산이었다. 이번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외투를 걸친 파산이었다. 생명의 모든 배아를 성장과 성숙으로 불러내는 동시에 거대한 쟁기로 사회의 토대 전체를 갈아엎고 있는 현재의 혁명, 곧 근대 최대의 이 사회적 격변은, 폴란드 민족국가 이념의 마지막 흔적을 내던져 버렸다. 마치 역사적 발전이 모든 내용물을 꺼내 가 버려, 반동기의 혼란 속에 사회적 전통의 잔해 사이나 굴러다닐 수 있을 뿐인 빈 껍데기인 양 말이다.
그러나 폴란드 민족주의의 역사적 경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과연 그것은 민족국가의 이념으로서는 그 생을 마감했으나, 동시에 유토피아적 유령에서 사회 생활의 현실적 요인으로 탈바꿈했다. 폴란드의 부르주아-자본주의적 발전은 폴란드를 러시아에 결박했고, 민족 독립의 이념을 유토피아와 패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 부르주아적 과정의 다른 면은 폴란드 사회의 혁명적 발전이다. 폴란드에서 사회 진보의 모든 현상과 요인, 무엇보다 그 주된 요인인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와, 차르 제국 전체의 혁명에서 그것이 맡는 역할은 바로 이 부르주아-자본주의적 발전의 기초에서 자라 나왔다. 폴란드의 사회적 진보와 발전은 이렇게, 폴란드와 러시아를 결합시켰고 폴란드 민족 이념을 묻어 버린 그 자본주의적 과정과 끊을 수 없는 역사적 유대로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인위적 장벽을 세우려는 모든 분리주의적 열망은 본성상 사회적 진보와 혁명적 발전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며, 다시 말해 반동의 발현이다. 그러나 동시에 민족 이념은 민족국가와 민족 독립의 강령이 최종적으로 실패한 뒤 민족적 분리라는 일반적이고 막연한 관념으로 환원되었고, 그러한 것으로서 폴란드 민족주의는 전통의 축복을 받은 사회적 반동의 한 형태가 되었다. 민족 이념은 부르주아 계급들의 진영 전체, 곧 귀족·중간계급·소부르주아지의 반동적 열망을 한데 덮어 주는 이데올로기적 방패가 되었다. 역사의 변증법은 또한, 상투형에 사로잡혀 '민족들의 권리'라는 추상의 황야에서 사변을 일삼는 정치가들의 머리보다 훨씬 상상력이 풍부하고 유연하며 다양성을 즐긴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수많은 러시아, 독일, 그 밖의 혁명가들이 '민족 전통'을, 온갖 혁명적 조류를 빨아들여 실어 나르도록 자연이 영원토록 정해 준 역사적 그릇으로 여겨 왔고 지금도 여기고 있다. 마치 전설에 따르면 바닷가로 옮겨져 생명을 잃은 뒤에도 귀에 갖다 대면 언제까지나 먼 파도 소리를 되풀이한다는 바다 소라고둥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민족 전통'은 오늘의 폴란드를 만들어 낸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조건 속에서는 정반대의 것, 곧 온갖 종류의 반동을 담는 그릇, 반혁명의 천연의 방패가 된다. '민족 전통'의 슬로건 아래,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의 비판과 항의로부터 코사크의 보호를 받으며 국민민주당의 제1차 두마 선거가 치러졌다. '민족 이념'의 이름으로 국민민주당원들은 총알로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을 선거 전 집회에서 쫓아냈고, 바르샤바, 우치, 파비아니체[14]에서는 노동자 수십 명을 죽이기까지 했다. 민족의 슬로건 아래 국민민주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 투쟁과 혁명적 행동에 맞서는 대항 활동을 위해 노동자 '민족 조합들'을 조직했다. 민족의 슬로건 아래 국민민주당 소속 철도 노동자들은 1905년 12월 폴란드에서 시작된 철도 파업을 깨뜨렸고, 총구를 들이대어 파업 노동자들을 작업에 복귀시켰다. 민족의 슬로건 아래 국민민주당은 총파업과 그 밖의 형태의 파업이 '나라의 산업과 민족의 부'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에 맞선 십자군을 개시했다. 민족의 슬로건 아래 두마의 폴란드 의원단은 두마 해산 뒤 비보르크 선언의 심의에 참여하기를, 그리고 비보르크 선언 그 자체의 선포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민족의 슬로건 아래 국민민주당은 이른바 '폴란드 매',[15] 아니 차라리, 사회주의자를 살해하고 파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따위의 일을 맡은 무장 전투대를 조직했다. 국민민주당의 지도자 드모프스키 씨는 그 공식 기관지에서 '사회주의자는 외부인'이며 따라서 '외적'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민족적' 살해를 미리 정당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민족 이념의 이름으로, 민족의 장래와 민족 방위의 이름으로, 국민민주당을 앞세운 폴란드 부르주아지는 '아무 유보 없이' 절대주의와 러시아 '민족 이념'의 고용병 대열에 서서 '신범슬라브주의'의 깃발 뒤에 공공연히 섰다. 정치적 '민족' 강령의 마지막 자취인 폴란드의 자치는 이렇게 반혁명의 제단에 바쳐졌다. 역사에 학대당한 폴란드 민족 이념은 쇠퇴와 몰락의 모든 단계를 거쳤다. 국제 혁명의 찬미를 받는 낭만적이고 고결한 봉기자로 정치적 경력을 시작한 그것은, 이제 민족적 훌리건으로서, 곧 러시아 절대주의와 제국주의의 검은 백인대 의용병으로서 그 경력을 마감한다.
주석
- 『노이에 차이트』, 1897~1898년, 제1권, 517쪽. ↩
- 당시 헝가리에서 민족체들의 수적 관계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
당시 헝가리의 민족체별 인구 민족체 인구 헝가리인 5,000,000 루마니아인 2,300,000 독일인 1,500,000 크로아티아인 900,000 세르비아인 830,000 루테니아인 443,000 - 1898년 6월 슬라브 언론인들의 언론 대회에서 립토프 출신의 슬로바키아 대표 카롤 살바는 체코인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 사이에 화합이 있으려면 우리만이 아니라 여러분도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우리에게 무관심했던 이유를 나는 압니다. 슬로바키아인의 지역은 지금까지 (몇몇 영광스러운 예외를 빼면) 체코 인민에게 외국으로 여겨져 왔던 것입니다!" (룩셈부르크의 원주) ↩
- 스탄치크는 갈리치아의 보수파를 가리키는 별명이었다. ↩
- 예컨대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교회에서 리투아니아어를 사용할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협회 설립이라는 무해하기 짝이 없는 시도를 계기로, 빌나의 리투아니아 통신은 1906년 여름 이렇게 썼다. "폴란드인이 리투아니아 땅을 강제로 폴란드화했다는 근거 없는 비난이 이미 몇 번이나 반박되었던가! 리투아니아인이 폴란드인에게 내세우는 주장들, 곧 역사적 발전이 어쩌다 다른 길이 아니라 이 길을 걷게 되었다는 데 대한 주장들이 아무런 건전한 근거도 없음이 몇 번이나 증명되었던가! 폴란드화 경향으로 비난받아야 할 것은 폴란드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리투아니아화 시도로 비난받아야 할 것은 리투아니아인이다. 상호 양보와 평화로운 합의의 길로 도달한, 평화롭게 공존할 전망이 리투아니아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들이 폴란드인을 괴롭히고 절멸시키는 온갖 수단을 굳이 이용하겠다고 고집한다면, 폴란드인 앞에 먼저 장갑을 내던진 것은 자신들이며 그 책임은 자신들에게 떨어지리라는 것을 기억해 두라." 한 민족체의 다른 민족체에 대한 우위를 보증해 주었다는 이 '역사적 발전'에 대한 언급(자기 민족체의 존립을 위해 싸우는 이들을 국수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그리고 상대에 대한 은근한 위협은, '폴란드화 시도'에 맞서 위협받는 독일인을 지킨다던 프로이센의 HKT와, 루신인들이 무엇보다 폴란드인에 대한 악의적 '괴롭힘'에 골몰한다고 조롱한 스타니스와프 타르노프스키 백작을 떠올리게 한다. (룩셈부르크의 원주) HKT, 곧 하카타는 포즈난 주에서 폴란드적 요소를 뿌리 뽑을 목적으로 1894년에 조직된 독일 국수주의자들의 단체였다. 이 단체의 지도자는 하네만, 케네만, 티데만이었다. (편집자 주) ↩
- 그러므로 부르주아 법 이론가의 다수는 국가의 독립적 존재를 '민족 이념'의 불가결한 속성으로 인정한다. 블룬칠리 씨와 그 일파, 곧 자기 계급의 이데올로그들은 추상적 정의와 세부 구분을 동원해 보았자, 권력에 굶주린 부르주아지가 역사의 진행 속에서 이미 이룩해 놓은 것 이상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룩셈부르크의 원주) ↩
- "사회민주주의가 사회 발전의 당이라는 것은 옳다"라고 카우츠키는 말한다. "그 목표는 사회를 자본주의 단계 너머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진화는 혁명을 배제하지 않으며, 혁명은 진화의 한 에피소드일 뿐이다. 사회민주주의의 궁극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적 생산을 넘겨받아 통제하고, 그 결과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이기를 그치고 사회의 별개 계급을 이루기를 그치는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이 귀결은 일정한 경제적·정치적 전제 조건에 달려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일정한 수준을 전제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 발전을 지원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러나 그 과제는 결코 자본주의의 팽창을,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이윤의 증대를 능동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후자는 자본가 계급의 역사적 과제이며, 그들은 그 일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 우리는 그 일에서 그들을 도울 필요가 없으며, 자본주의적 발전 방법에 맞서 싸우면 싸울수록 더더욱 도울 수 없다. ... 우리는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데도, 공장이 수공업자를 수탈하는 데도 찬성하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다. 경제 발전에서 우리의 과제는 계급투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노이에 차이트』, 1898~1899년, 제1권, 292~293쪽. 그리고 이와 같은 논거는 정치적 관계의 영역에 한층 더 큰 정도로 적용된다고 카우츠키는 덧붙인다. (룩셈부르크의 원주) ↩
- 폴란드의 노동계급은 서로 뒤섞인 여러 민족체로 이루어져 있었던 반면, 지배 계급은 상당히 단단하게 폴란드인(또는 독일인)이었다. 저자는 노동계급을 위해, 아마도 그 각각의 민족체를 위해, '다른' 민족체들, 곧 지배 계급의 민족체들이 누리던 것과 같은 민족체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 미하일 바쿠닌, 「슬라브인에게 보내는 호소(Aufruf an die Slawen)」, 쾨텐, 1848; 『19세기 40년대의 두 저작(Zwei Schriften aus den 40er Jahren des XIX. Jahrhunderts)』, 국제철학총서 제2권, 제11~12호(프라하, 1936), 27쪽에 수록. ↩
- 이 답변을 쓴 것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엥겔스로, 1849년 2월 15일 자 『신라인신문』 제222호에 실렸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Werke)』, 제6권, 271쪽을 보라. ↩
- 원문에서 저자는 '멕시코' 대신 '텍사스'라고 썼는데, 이는 명백한 착오다. ↩
- 노예제의 형식적 폐지(더구나 노예제는 오늘날까지도 실제로 행해지고 있다) 이후에도 이 '민족' 공화국에서 '커피' 이해관계가 '민족의 의지'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다음 사건이 증명한다. 지난해[1907] 커피 플랜테이션들이 국제 커피 시장에 무제한의 커피를 쏟아부어 큰 위기를 일으키고 가격의 급락을 초래하자, 브라질의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정부로 하여금 국고로 커피 잉여분 전량을 사들이게 했다. 당연히 이 기발한 실험의 결과로 전체 인구의 재정과 물질적 존립 전체가 격심한 동요를 겪었다. ↩
- '유기적 노동으로의 복귀'는 실패로 끝난 1863~64년 1월 봉기 이후 1860년대에 폴란드 왕국의 이른바 실증주의자들과 갈리치아의 보수파가 만들어 낸 슬로건이다. 낭만주의와 그 고답적인 봉기·음모의 관념을 거부하고, 교육·산업·무역·농업에서의 과학적 접근을 폴란드 생존의 유일한 수단으로 내세웠다. ↩
- 파비아니체는 우치에서 남서쪽으로 10마일쯤 떨어진 공업 도시다. ↩
- 매(소콜)는 1867년 국민민주당의 정치적 지도 아래 갈리치아에서 창립된 청년 단체였다. ↩
3. 연방, 중앙집권, 분립주의
우리는 다음으로 민족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제안된 형태, 곧 연방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연방주의는 오래전부터 무정부주의적 색채의 혁명가들이 애호하는 이념이었다. 1848년 혁명 당시 바쿠닌은 자신의 선언에서 이렇게 썼다. "혁명은 그 자신의 힘으로 전제 국가들의 해체를 선포하였다. 프로이센 국가의 해체를 ... 오스트리아 ... 터키 ... 전제군주들의 마지막 보루인 러시아 국가의 해체를 ... 그리고 최종 목표로서, 유럽 공화국들의 보편적 연방을." 그때부터 연방은 다소간 유토피아적, 소부르주아적 성격의 사회주의 정당들, 곧 사회민주주의처럼 역사적 접근을 취하지 않고 주관적 '이상'을 거래하는 정당들의 강령에서 온갖 민족적 난제의 이상적 해결책으로 남아 왔다. 예컨대 러시아의 사회혁명당이 그러하다. 민족국가 창설 요구를 중단하고 온갖 철학적 접근을 포기해 가는 도상에 있던 과도기의 폴란드사회당(PPS)이 그러했다. 끝으로 러시아 제국의 여러 사회주의 그룹들이 그러한데, 이들에 대해서는 본 장의 끝에서 더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연방이라는 슬로건이 무정부주의적 색채의 모든 혁명가들 사이에서 왜 그토록 폭넓은 인기를 누리는가를 묻는다면,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연방'은, 적어도 이들 사회주의자의 혁명적 상상 속에서는, 민족들의 '독립'과 '평등'을 '형제애'와 결합시켜 준다. 따라서 여기에는 이미 만민법과 민족국가의 관점에서 냉엄한 현실에 유리하게 물러선 일정한 양보가 들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독특한(sui generis), 이데올로기적인 양보로서, 민족들이 분리되고 완전히 자족적인 '민족국가'로서 저마다의 '권리'의 진공 속에서 살 수는 없으며 그들 사이에 모종의 연계가 존재한다는, 간과할 수 없는 사정을 고려에 넣은 것이다. 다양한 민족체들 사이에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연관, 민족적 차이와 무관하게 전체 지역들을 하나로 용접한 물질적 발전, 부르주아적 발전의 중앙집권화, 이 모든 것이 저 혁명적 즉흥가들의 머릿속에 반영되어, 그들은 민족들 사이의 관계에서 '적나라한 폭력' 대신 '자발성'을 갖다 놓는다. 그리고 여기서 공화주의는 자명한 것이 되는데, 모든 민족에게 독립과 평등을 되돌려주는 바로 그 '인민의 의지'가 당연히도 군주제의 온갖 잔재를 경멸과 함께 역사의 쓰레기더미에 동시에 내던질 만큼의 좋은 취향은 갖추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존하는 부르주아 세계는 일격에 독립 공화국들의 자발적 연합, 곧 연방으로 탈바꿈한다. 여기서 우리는 남슬라브인에 대한 차르 러시아의 식욕이 바쿠닌의 어법 속에서 무정부주의의 범슬라브적 이상, 곧 '슬라브 민족들의 연방'으로 탈바꿈했던 것과 똑같은 '혁명적' 역사 희화화의 표본을 보게 된다. 보다 작은 규모로 이러한 '혁명적' 현실 개조 방법을 적용한 것이 1906년 제8차 대회에서 채택된 PPS의 강령, 곧 폴란드와 러시아의 공화주의적 연방이었다. 혁명 이전 시기에 사회애국주의적 관점이 그 순수성과 일관성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던 동안, PPS는 오직 민족국가의 강령만을 인정하였고, 예컨대 러시아 사회혁명당이 제안한 연방 이념을 경멸과 증오로써 배격하였다. 혁명의 발발이 그 전제들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폴란드와 러시아가 하나의 사회적 실체를 이루고 있으며 바로 공동의 혁명이 그 표현이라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현실에 양보하는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전에는 경멸하던 폴란드-러시아 연방 강령이 그 양보의 형태가 되었다. 동시에 PPS는, 이런 부류의 '혁명가들'이 늘 그렇듯이, 다음의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가 폴란드와 러시아의 공동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자기 강령과 전술의 역사적 기초로 삼았을 때,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의지에 좌우되지 않는 객관적, 역사적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 사실로부터는 폴란드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된 계급투쟁이라는 형태의 혁명적 결론이 도출되어야 했다. 그러나 PPS는 폴란드-러시아 연방 강령을 내세움으로써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역사적 운명에 대한 수동적 인정 대신에 스스로 능동적으로 폴란드와 러시아의 연합을 제안하고 그 연합에 대한 책임을 떠맡았으며, 객관적인 역사 발전의 자리에 '혁명적' 형태를 띤 사회주의자들의 주관적 동의를 갖다 놓은 것이다.
그러나 정치 조직의 한 형태로서 연방주의는 '민족국가'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특정한 역사적 내용을 지니며, 그것은 그 형태에 부착된 주관적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다르고 그로부터 독립적이다. 따라서 연방 이념은 근대 사회주의 발전 속에서 그 이념이 겪은 운명과 수행한 역할을 검토할 때에만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
II
모든 나라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두드러진 경향은 의문의 여지 없이 내적, 경제적, 자본주의적 중앙집권화, 곧 경제·입법·행정·사법·군사 등의 관점에서 국가 영토를 하나의 실체로 집중시키고 용접하려는 노력이다. 봉건제가 지배하던 중세에는 동일한 국가의 부분들과 지역들 사이의 연계가 극도로 느슨했다. 그리하여 주요 도시는 저마다 그 주변 지역과 더불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상 용품의 대부분을 스스로 생산했고, 자체의 입법, 자체의 정부, 자체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서방의 더 크고 부유한 도시들은 종종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외국 열강과 조약을 맺었다. 마찬가지로 더 큰 공동체들도 저마다 폐쇄되고 고립된 삶을 살았으며, 봉건 영주의 토지 하나하나, 심지어 기사령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거의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었다. 당시의 상황은 모든 국가적 규범의 축소와 이완으로 특징지어졌다. 도시마다, 촌락마다, 지역마다 법이 다르고 세금이 달랐다. 동일한 하나의 국가가 국가의 한 조각을 다른 조각으로부터 갈라놓는 법적 장벽과 관세 장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분권화는 당시의 자연경제와 갓 태어난 수공업 생산의 고유한 특징이었다.
자연경제와 결부된 공적 생활의 파편화와 국가 유기체의 부분들 사이의 약한 응집력의 틀 안에서, 중세 내내 중부와 서부 유럽에서는 영토들과 나라들 전체가 끊임없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어갔다. 매매, 교환, 저당, 상속, 혼인을 통해 국가들이 짜깁기된 것도 눈에 띄는데, 그 고전적 실례가 합스부르크 군주국이다.
중세 말의 생산 관계와 교역 관계의 혁명, 상품 생산과 화폐 경제의 증대, 그와 더불어 국제 무역의 발전과 동시에 일어난 군사 제도의 혁명, 기사 계급의 몰락과 상비군의 등장, 이 모든 것이 정치적 관계에서 군주 권력의 증대와 절대주의의 발흥을 가져온 요인들이었다. 절대주의의 주된 경향은 중앙집권화된 국가 기구의 창출이었다. 16세기와 17세기는 봉건적 분립주의의 잔재에 맞선 절대주의의 중앙집권적 경향의 끊임없는 투쟁의 시기이다. 절대주의는 두 방향으로 발전했다. 신분의회와 지방의회, 그리고 자치 도시들의 기능과 권한을 흡수하는 방향, 그리고 행정과 사법에 새로운 중앙 기관들을 창설하고 민법전·형법전·상법전을 만들어 국가 전역에서 행정을 표준화하는 방향이 그것이다. 17세기에 중앙집권주의는 이른바 '계몽 전제주의'의 형태로 유럽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이는 곧 계몽되지 않은 경찰-관료 전제주의로 이행했다.
절대주의가 근대 국가 중앙집권주의의 최초의 그리고 주요한 추진자였다는 역사적 사정의 결과로, 중앙집권주의 일반을 절대주의와, 곧 반동과 동일시하는 피상적 경향이 생겨났다. 실제로는 절대주의가 중세 말에 봉건적 분산과 분립주의에 맞서 싸운 한에서,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역사적 진보의 발현이었다. 이 점을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이 스타시츠였는데, 그는 [폴란드의] 슐라흐타 공화국이 "전제국가들의 한복판에서" 존속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다른 한편 절대주의 자체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해 '이별의 축배'(작별의 덕담) 역할만을 하였으니, 절대주의는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 근대적이고 균일한 대국가를 세움으로써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부르주아 사회의 길을 닦아 주었다. 실로 절대주의와는 독립적으로, 그리고 절대주의의 역사적 소멸 이후에도, 부르주아 사회는 줄어들지 않는 힘과 일관성으로 중앙집권적 경향을 계속 관철해 나갔다. 정치적 영역으로서 오늘날 프랑스의 중앙집권주의는 대혁명의 작품이다. '대혁명'이라는 이름 그 자체가 유럽에서 그 영향이 미치는 곳마다 중앙집권화의 영향을 발휘했다. 혁명의 중앙집권주의가 낳은 그러한 산물이 '헬베티아 공화국'(République Helvétique)으로, 1798년 그때까지 느슨하게 국가연합을 이루던 스위스의 칸톤들이 갑자기 그 안으로 압착되었다. 독일 3월[1848년] 혁명의 최초의 자발적 행동은 중세 분립주의의 상징인 이른바 세관(Mauthäuser)을 민중 대중이 파괴한 일이었다.
집중을 사활적 원리로 삼는 대규모 기계제 생산을 갖춘 자본주의는 중세의 경제적·정치적·법적 차별의 온갖 잔존물을 완전히 쓸어버렸고 지금도 쓸어버리고 있다. 대공업은 큰 영역에서의 시장과 구속 없는 교역의 자유를 필요로 한다. 큰 영역에 맞추어진 공업과 상업은 균일한 행정, 균일한 도로와 통신의 정비, 균일한 입법과 사법을, 가능한 한 국제 시장 전체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각국 내부의 전 영역에서 요구한다. 개별 도시와 귀족 영지의 관세·조세 자치, 그리고 재판과 법 운영에서의 자치의 폐지는 근대 부르주아지의 첫 성취였다. 이와 더불어 모든 기능을 결합하는 하나의 큰 국가 기계의 창출이 진행되었다. 행정은 하나의 중앙정부의 수중에, 입법은 입법 기관인 의회의 수중에, 무력은 중앙정부에 종속된 하나의 중앙집권화된 군대의 형태로, 관세 제도는 대외적으로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관세의 형태로, 그리고 국가 전체에서 균일한 통화 등등. 이에 발맞추어 근대 국가는 정신생활의 영역에서도 가능한 한 균일성을 도입하여, 교육과 학교, 교회 제도 등을 국가 전체에서 동일한 원칙 위에 조직하였다. 한마디로,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가능한 한 포괄적인 중앙집권화가 자본주의의 두드러진 추세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중앙집권화는 갈수록 모든 장애물을 뚫고 나아가, 각각의 주요 국가 내부에서뿐 아니라 국제 입법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서 일련의 균일한 제도들을 낳는다. 우편·전신 업무와 철도 통신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국제 협약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본주의 발전의 이러한 중앙집권적 경향은 미래 사회주의 체제의 주요한 기초 가운데 하나이다. 생산과 교환의 최고도의 집중을 통해, 균일한 계획에 따라 세계적 규모로 운영되는 사회화된 경제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국가 권력과 전투적 세력으로서의 노동계급을 모두 공고히 하고 중앙집권화하는 것을 통해서만, 프롤레타리아트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곧 사회주의 혁명을 도입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마침내 가능해진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근대적 계급투쟁이 작동하고 승리할 수 있는 올바른 정치적 틀은 거대 자본주의 국가이다. 통상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특히 유토피아적 경향에서는, 자본주의 발전의 경제적 측면에만 주의를 기울여, 그 범주들, 곧 공업, 착취, 프롤레타리아트, 공황이 사회주의의 필수 전제로 간주된다. 정치 영역에서는 통상 민주주의적 국가 제도, 의회주의, 각종 '자유'만이 이 운동의 필수 조건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근대의 거대 국가 또한 근대적 계급투쟁의 발전을 위한 필수 전제이자 사회주의 승리의 담보라는 사실은 흔히 간과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은 땅 한 뼘마다 따로 적용되는 '사회주의'가 아니요 독재가 아니라, 세계혁명이며, 그 출발점이 거대 국가적 발전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발전의 적자인 근대 사회주의 운동은 부르주아 사회 및 국가와 똑같이 두드러지게 중앙집권적인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모든 나라에서 연방주의만이 아니라 분립주의의 단호한 반대자이다. 독일에서 바이에른이나 프로이센의 분립주의, 곧 바이에른이나 프로이센의 정치적 독자성과 이런저런 측면에서의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보존하려는 경향은 언제나 귀족적 혹은 소부르주아적 반동의 가림막이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또한 예컨대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에서 별도의 철도 정책을 유지하려는 남독일 분립주의자들의 노력에 전력으로 맞서 싸우며, 정복된 알자스-로렌 지방의 분립주의, 곧 소부르주아지가 프랑스 민족주의를 내세워 독일 제국 전체와의 정치적·정신적 공동체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려는 시도와도 정력적으로 싸운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또한 아직도 보존되어 있는 제국 내부 독일 국가들 사이의 연방적 관계의 잔존물에 대해서도 단호한 반대자이다.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 추세는 각 국가 내부의 개별 지방들의 정치적 통합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모든 국가연방의 폐지와 느슨한 국가 결합체들을 동질적이고 균일한 국가로 용접하는 데로, 또는 그것이 불가능한 곳에서는 그 완전한 해체로 나아간다.
이것의 표현이 스위스 연방과 아메리카 연방,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근대사이다.
III
대혁명이 만들어 낸 통합 스위스 공화국의 최초의 중앙집권적 헌법은 왕정복고 시대에 이르러 흔적도 없이 지워졌고, 신성동맹의 비호 아래 스위스에서 승리한 반동은 재빨리 칸톤들의 독립으로, 분립주의와 느슨한 국가연합만으로 되돌아갔다. 국내적으로, 무정부주의자들과 그 밖의 '연방' 숭배자들의 정신에 따른 "독립적 집단들과 국가 단위들의 자발적 연합"이라는 이상의 이러한 실현은 (광범한 근로 대중을 배제하는) 귀족주의적 헌법의 채택과 가톨릭 교권주의의 지배를 수반하였다.
스위스 연방의 민주화와 중앙집권화를 향한 새로운 반대파의 흐름은 7월[1830년] 혁명과 3월[1848년] 혁명 사이의 혁명적 소용돌이의 시기에 태어났으며, 스위스에서는 국가연합 대신 긴밀한 국가 연합체를 만들고 명문 귀족 가문들과 가톨릭 성직자의 정치적 지배를 폐지하려는 경향의 형태로 나타났다. 여기서 중앙집권주의와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손을 맞잡고 나아갔고, 연방과 분립주의의 슬로건 아래 싸우는 반동의 저항에 부딪혔다.
현재의 스위스 연방의 첫 헌법인 1848년 헌법은 이른바 '존더분트', 곧 1847년에 칸톤들의 독립과 그 낡은 귀족적 체제, 그리고 교권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전체 연방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가톨릭 7개 칸톤의 연합에 대한 격렬한 투쟁 속에서 태어났다. 반란자들은 연방의 '전제'에 맞서 칸톤들의 '자유와 독립'의 깃발을,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불관용에 맞서 '양심의 자유'의 깃발을 자랑스럽게 흔들었지만(분쟁의 표면적 원인은 민주급진파 정당들의 수도원 폐쇄였다),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유럽은 이에 속지 않았고, 연방이 잔인한 무력으로, 곧 '폭력'으로 연방주의의 옹호자들을 굴복시켜 연방 권위에 투항하게 만들었을 때 진심으로 갈채를 보냈다. 그리고 『노이에 라이니셰 차이퉁』의 시인 프라일리그라트가 스위스 중앙집권주의의 총검의 승리를 3월 혁명의 기상나팔로서 의기양양하게 칭송하였을 때("고지에서 첫 총성이 울렸다, 고지에서 사제들을 향하여"), 연방주의자들과 칸톤들의 낡은 독립의 수호자들 편을 든 것은 메테르니히 반동의 기둥인 독일의 절대주의 정부였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스위스의 발전은 대공업과 국제 무역, 철도, 유럽 군국주의의 성장의 충격 아래 끊임없이 전진하는 법적·정치적 중앙집권화로 특징지어져 왔다. 이미 1874년의 두 번째 헌법은 1848년 헌법에 비해 중앙 입법, 중앙 정부 권력, 특히 중앙집권화된 사법의 권한을 상당히 확장하였다. 1874년에 헌법이 전면 개정된 이래, 중앙집권화는 연방 중앙 기관들의 권한을 확대하는 새로운 개별 조항들이 끊임없이 추가되면서 지속적으로 전진해 왔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를 향해 발전해 가는 스위스의 실제 정치 생활이 갈수록 연방 기관들에 집중되는 동안, 칸톤의 자치적 생활은 쇠퇴하고 갈수록 불모가 되어 간다. 사태는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인민의 직접선거에서 나오는 연방의 입법 및 통일 정부 기관들(이른바 국민원[Nationalrat]과 이른바 연방원[Bundesrat])이 갈수록 더 큰 권위와 권력을 얻어 가는 동안, 연방적 대표의 기관, 곧 칸톤들의 대표 기관(이른바 주원[Ständerat])은 점점 더 하나의 잔존물이, 내용 없는 형식이 되어, 삶의 발전에 의해 서서히 죽어 가도록 선고받고 있다.[1] 동시에 이러한 중앙집권화 과정은 또 하나의 평행한 과정, 곧 각 칸톤 의회에서의 끊임없는 개정과 칸톤들 상호 간의 모방과 차용을 통해 칸톤 헌법들이 균일화되는 과정으로 보완된다. 그 결과 칸톤 분립주의들의 옛 다양성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칸톤들의 이러한 정치적 독자성과 독립의 주된 보루는 그 역사적 기원과 전통과 칸톤적 분립주의의 온갖 잡다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지방 민법과 형법이었다. 이제는 칸톤 독립의 이 완강하게 방어되던 요새조차, 공업, 무역, 철도와 전신, 국제 관계 등 스위스의 자본주의 발전이 칸톤들의 법적 상태 위로 평준화의 물결처럼 지나가는 압력 아래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연방 전체를 위한 하나의 공통 민법전과 형법전의 초안이 이미 만들어졌고, 민법전의 일부는 이미 승인되어 시행되고 있다. 위로부터 그리고 아래로부터 작용하며 서로를 보완하는 이 중앙집권화와 표준화의 평행한 흐름들은 거의 걸음마다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되고 가장 소부르주아적인 프랑스계와 이탈리아계 칸톤들의 저항에 부딪힌다. 의미심장하게도 스위스의 분권주의자들과 연방주의자들의 저항은 프랑스계 스위스인들에게서는 민족 투쟁의 형태와 색채마저 띤다. 칸톤 분립주의를 희생시키는 연방 권력의 확대는 그들에게는 독일계 요소의 우위의 증대와 마찬가지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그들, 프랑스계 스위스인들은 그것에 공공연히 맞서 싸운다. 그에 못지않게 특징적인 것은 또 하나의 사정, 곧 연방과 독립의 이름으로 국가 중앙집권주의에 맞서 싸우는 바로 그 프랑스계 칸톤들이 내부적으로는 코뮌 자치가 가장 덜 발달해 있는 반면, 가장 민주적인 자치 제도들, 곧 진정한 인민의 지배는 연방의 중앙집권화를 옹호하는 독일계 칸톤들의 코뮌들에서 성행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국가 제도의 맨 밑바닥에서나 꼭대기에서나, 오늘날 스위스 발전의 최신 결과에서나 그 출발점에서나, 중앙집권주의는 민주주의 및 진보와 손을 잡고 가는 반면, 연방주의와 분립주의는 반동 및 낙후와 결부되어 있다.
미합중국의 역사에서는 같은 현상이 다른 형태로 되풀이된다.
그때까지 서로 독립적이었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크게 달랐으며, 여러 면에서 이해관계가 엇갈리던 북아메리카 영국 식민지들의 연방의 최초의 핵 역시 혁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혁명은 오늘날까지 결코 멈춘 적이 없는 정치적 중앙집권화 과정의 옹호자요 창조자였다. 여기서도 스위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초의 가장 미숙한 발전 형태는 바로 그 '자발적 연방'이었으니, 무정부주의 이념의 의식적·무의식적 신봉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대미를 장식하는 정점으로서 근대 사회 발전의 꼭대기에 서 있는 것이다.
1777~1781년 시기에 만들어진 미국의 첫 헌법에서는 "개별 식민지들의 자유와 독립, 그들의 완전한 자결권"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연합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중앙 집행부도 갖지 못할 만큼 느슨하고 자발적이어서, 수립되자마자 거의 그 이튿날로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들인 뉴욕, 뉴저지, 버지니아, 메릴랜드 사이의 동족상잔의 관세 전쟁을 가능하게 하였고, 매사추세츠에서는 완전한 '독립'과 '자결'의 축복 아래 내전이, 곧 빚에 짓눌린 농민들의 봉기가 터져 나와, 각 주의 부유한 부르주아지에게 강력한 중앙 권력에 대한 생생한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이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민족적 독립'도 그것이 '국내 질서'의 열매의 독립적 향유, 곧 사유재산과 착취의 교란받지 않는 지배에 봉사할 때에만 실질적 내용과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상기하게 되었다.
1787년의 두 번째 헌법은 이미 연방 대신에 중앙 입법 권력과 중앙 집행부를 갖춘 통일 국가를 창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집권주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주권론자들의 분리주의적 경향과 싸워야 했으며, 이는 마침내 남부 주들의 공공연한 반란, 곧 저 유명한 1861년의 분리 전쟁의 형태로 폭발하였다. 여기서도 우리는 1847년 스위스 상황의 놀라운 반복을 본다. 중앙집권주의의 옹호자로서 북부 주들은 근대적 거대 자본의 발전, 기계 공업, 인신의 자유와 법 앞의 평등, 곧 고용 노동 제도의 진정한 귀결들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부르주아적 진보를 대표하여 행동하였다. 다른 한편 분리주의, 연방, 분립주의의 깃발, 촌락 하나하나의 '독립'과 '자결권'의 깃발을 든 것은 노예 노동의 원시적 착취를 대표하는 남부의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이었다. 스위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메리카에서도 중앙집권주의는 유럽의 모든 진보적·민주적 세력의 한결같은 갈채 속에 무장력과 물리적 강제로써 연방주의의 분리주의적 경향과 싸웠다. 근대 사회에서 노예제의 마지막 발현이, 반동이 언제나 그러하듯, 분립주의의 깃발 아래 자신을 구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노예제의 폐지가 중앙집권적 자본주의의 승리의 이면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승전 후 아메리카 연방의 헌법은 중앙집권주의의 방향으로 새로 개정되었다. 나머지는 그 뒤로 거대 자본, 거대 강국, 제국주의적 발전이 이루어 냈다. 철도, 세계 무역, 트러스트, 그리고 마침내 최근에는 관세 보호주의, 제국주의 전쟁, 식민 체제, 그에 따른 군사와 조세 등의 재편성이 그것이다. 현재 연방 대통령이라는 인격으로 나타나는 중앙 집행부는 서유럽 대다수 군주국들에서보다 더 광범한 권력을 지니며, 행정과 사법은 더 중앙집권화되어 있다. 스위스에서는 연방주의를 희생시키는 중앙 기능의 점진적 확대가 헌법 수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반면, 아메리카에서는 그것이 어떠한 헌법 개정도 없이 사법 당국의 자유로운 헌법 해석을 통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근대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중앙집권적 경향과 연방주의적 경향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의 그림을 보여 준다. 이 역사의 출발점인 1848년 혁명은 다음과 같은 역할 분담을 보여 준다. 중앙집권주의의 옹호자는 당시 혁명의 지도자였던 독일계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이고, 연방주의의 깃발 아래 방해 공작을 편 것은 슬라브계 반혁명 정당들, 곧 갈리치아 귀족, 체코·모라비아·달마티아의 의회들, 범슬라브주의자들, 그리고 무정부주의의 '자유로운 인민들의 자치'의 예언자이자 공문구 제조자인 바쿠닌의 숭배자들이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에서 체코 연방주의자들의 정책과 역할을 다음과 같이 특징지었다.
체코와 크로아티아의 범슬라브주의자들은 일부는 의도적으로, 일부는 알지 못한 채, 러시아의 명백한 이익에 부합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기껏해야 폴란드 민족체의 운명을 나누어 가졌을 민족체의 그림자를 위해 혁명의 대의를 배반하였다. 체코, 모라비아, 달마티아, 그리고 폴란드 대표단의 일부(귀족)는 독일계 요소에 맞서 체계적인 투쟁을 벌였다. 독일인들과 폴란드인의 일부(몰락한 슐라흐타)는 혁명적 진보의 주된 지지자였다. 이들에 맞서 싸우면서 슬라브계 대의원 대중은 자기 운동 전체의 반동적 경향을 이런 식으로 보여 주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프라하 대회를 해산시킨 바로 그 오스트리아 정부와 음모와 술책을 꾸미는 데까지 스스로를 타락시켰다. 그들은 그 수치스러운 행동에 대해 응분의 보상을 받았다. 그들은 10월 봉기 당시 정부를 지지했고, 그 봉기의 결과는 마침내 슬라브인들에게 다수파의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 이제 거의 전적으로 슬라브계가 된 이 의회는 프라하 대회가 그러했던 것과 똑같이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해 해산되었고, 범슬라브주의자들은 감히 항의하면 투옥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그들이 얻어 낸 것은 오직 이것, 곧 슬라브 민족체가 이제 도처에서 오스트리아 중앙집권주의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것뿐이다.[2]
마르크스는 이것을 1852년, 혁명과 제1차 입헌주의 시대의 최종적 붕괴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절대주의 지배가 부활하던 시기에 썼다. "그들이 자기 자신의 광신과 맹목에 빚지고 있는 결과"였다.
이것이 근대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연방주의의 첫 등장이었다.
연방주의 강령의 사회역사적 내용과, 그 슬로건의 민주적 내지 혁명적 성격에 관한 무정부주의적 환상의 허구성이 그 후의 시기에도 오스트리아에서만큼 강렬하게, 말하자면 상징적으로 나타난 국가는 없다. 여기서 정치적 중앙집권화의 진전은 빈 의회 선거권의 강령으로 직접 측정될 수 있는데, 그 선거권은 점진적 민주화의 네 단계를 차례로 거치면서 갈수록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국가 구조를 하나로 묶는 주된 접합제가 되어 갔다. 오스트리아의 제2차 입헌 시대를 연 1860년의 10월 칙령은 연방주의의 정신에 따라 허약한 중앙 입법 기관을 만들었고, 그 기관에 보낼 대표단의 선출권을 인민이 아니라 각 크론란트(왕령지)의 의회에 주었다. 그러나 이미 1873년에는 슬라브 연방주의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하여, 중앙의회[라이히스라트]에 대한 선거권을 의회들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가 행사하도록 도입하는 것이 불가결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물론 그것은 계급적이고 불평등하며 간접적인 선거 제도였다. 그 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존립과 통일성 자체를 위협한 체코인들의 민족 투쟁과 분권주의적 저항은 1896년, 제5쿠리아(이른바 보통선거 쿠리아)의 추가를 통해 그들의 계급 선거권을 보통선거권으로 대체하도록 강제하였다. 최근 우리는 국가를 공고히 하고 슬라브 연방주의자들의 원심적 경향을 분쇄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보통·평등 선거권의 방향으로 오스트리아 선거법이 최종적으로 개혁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 점에서 특히 특징적인 것은 갈리치아의 역할이다. 1861년 4월 빈 라이히스라트와 갈리치아 의회의 첫 회기 때부터 갈리치아 귀족은 슈메를링의 자유주의 내각에 맞서는 극단적 반대파로 나서서, '민족 자치'와 민족의 '자결'권의 이름으로, 곧 주의회의 자치적 권리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적 개혁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곧 이 정책은 이른바 크라쿠프당, 곧 타르노프스키, 포피엘, 보지츠키, 코지미안 같은 인물들의 당의 스탄치크 강령으로 결정화되었고, 1868년 9월 28일 갈리치아 의회의 저 악명 높은 '결의'에서 그 표현을 찾았는데, 이것은 '갈리치아 분리'의 일종의 마그나 카르타이다. 이 결의는 주의회의 권한을 크게 확대하여 중앙의회에는 전 군주국 차원의 가장 중요한 사안들만 남겨 둘 것을 요구했고, 중앙 행정을 완전히 폐지하여 그것을 오로지 크론란트 당국에 넘겼으며, 끝으로 크론란트의 사법까지 완전히 분리하였다. 여기서 갈리치아와 오스트리아의 국가적 연계는 어찌나 희미한 그림자로 축소되었는지, 폴란드 민족주의의 유연성을 아직 알지 못하는 낙관적인 사람들이라면 이 연방주의의 이상적 강령에서 '거의' 민족적 독립을, 적어도 그것을 향한 대담한 지향을 기꺼이 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떤 환상도 막으려는 듯, 스탄치크당은 위의 연방 강령이 아니라 1866년 12월 10일 의회의 저 악명 높은 상주문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조를 공표하고 오스트리아에서의 공적 이력을 시작했으니, 거기서 그들은 자신들의 고전적 공식을 선포하였다. "민족 이념을 저버린다는 두려움 없이, 오스트리아의 사명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폐하 곁에 서 있으며 서 있고자 함을 선언하나이다." 이것은 1월 봉기 이후 『폴란드 평론』(Przegląd Polski)을 중심으로 한 귀족 정당이 봉기와 봉기 참가자들에 맞서, '음모', '환상', '범죄적 기도', '외국의 혁명적 영향', '사회적 무정부 상태의 방종'에 맞서 벌인 피비린내 나는 십자군 원정을 간결한 경구로 정식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 십자군은 '유기적 노동'이라는 슬로건과 러시아 지배하 폴란드와의 어떠한 연대도 공공연히 포기한다는 선언 아래 우리 민족 운동의 마지막 시기를 냉소적인 서두름으로 청산해 버렸다. 연방주의와 정치적 분리주의는 실제로는 민족적 열망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단순한 부정이요 공공연한 포기였다. 스탄치크의 연방(읽을 것: 분리) 강령의 또 하나의 조화로운 보완물은 체코·모라비아 연방주의자들 및 독일의 교권주의적 반동 정당과 연합하여 오스트리아의 모든 자유주의적 개혁에 맞서 벌인 반대와 방해 공작이었다. 자유주의적 코뮌법에 반대하고, 초등학교에 관한 자유주의적 법률에 반대하고, 중앙의회에 대한 인민 직접선거법의 도입에 반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모든 반동적 기획에서 정부를 지지하였는데, 예컨대 타페 법을 위시한 군사 법률들에 대한 지지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행보는 지방 정치에서의 극단적 반동과도 짝을 이루어 왔으니, 그 가장 노골적인 표현이 주의회 선거 개혁에 대한 완강한 반대이다.
끝으로 갈리치아 연방주의의 세 번째 구성 요소는 루신인에 대한 폴란드 귀족의 정책이다. 스위스의 프랑스계 연방주의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국가의 분권화를 주창하는 갈리치아의 옹호자들은 내부적으로 루신 주민에 대해서는 엄격한 중앙집권주의자였다. 갈리치아 귀족은 처음부터 루신인의 자치 요구, 갈리치아를 동부와 서부로 나누는 행정 구획, 그리고 폴란드어와 나란히 루신어와 그 문자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완강히 맞서 싸웠다. '분리'와 연방주의의 강령은 이미 1873년 중앙의회 직접선거가 도입되었을 때 오스트리아에서 결정적 패배를 겪었고, 그때부터 스탄치크당은 자신의 기회주의적 원칙에 충실하게 방해 정책을 버리고 오스트리아 중앙집권주의에 순응하였다. 그러나 갈리치아 연방주의는 그때부터, 현실 정치의 강령으로서는 아닐지라도, 진지한 민주적 개혁이 검토될 때마다 의회 술책의 수단으로서 무대에 등장한다. '갈리치아 분리' 강령이 공적 무대에 마지막으로 기억될 만하게 등장한 것은 가장 최근의 선거 개혁, 곧 빈 의회에 대한 보통·평등 선거권 도입에 맞선 갈리치아 귀족의 투쟁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연방주의 강령의 반동적 내용을 더욱 힘주어 강조하려는 듯, 1906년 4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의원들은 갈리치아 분리에 관한 동의안에 만장일치로 반대표를 던졌다. 그들의 선두에서 오스트리아 노동자당의 대표자로서, 전 군주국 차원의 프롤레타리아 정책의 대표자로서 갈리치아 분리에 반대하는 발언과 표결을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그나치 다신스키 씨, 곧 세 분할 지역에 걸친 애국주의적 PPS의 지도자로서 폴란드 왕국의 러시아로부터의 분리를 자신의 정치 강령으로 삼는 그 사람이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는 중앙집권주의의 단호하고 공공연한 옹호자요, 오스트리아의 국가적 공고화의 의식적 지지자이며, 따라서 온갖 분리주의적 경향의 의식적 반대자이다.
"오스트리아 국가의 미래는" 카우츠키는 말한다. "사회민주주의의 힘과 영향력에 달려 있다. 바로 혁명적이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이 경우 이런 의미에서 국가를 떠받치는 정당[eine staatserhaltende Partei]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반세기 전 그릴파르처가 적황색 반동의 영웅 라데츠키 장군에게 바친 말, '그대의 진영 안에 오스트리아가 있다'[In deinem Lager ist Österreich]를 붉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3] '갈리치아 분리' 문제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는 체코 연방주의자들의 강령, 곧 보헤미아의 분리를 단호히 배격한다. 카우츠키는 쓴다.
보헤미아 자치 이념의 성장은 대륙의 모든 큰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반동의 전반적 성장의 부분적 발현일 뿐이다. '자치' 강령이 보헤미아를 아직 자치 국가로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헤미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일부로 남을 것이다. 중앙의회가 그로써 폐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안들(군사, 관세 등)은 그 권한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보헤미아의 분리는 오늘날에도 매우 허약한 중앙의회의 권력을 부수어 버릴 것이다. 그것도 개별 민족들의 의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표단 제도를 본떠 중앙정부에 대해서도 부수어 버릴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빈과 부다페스트의 의회가 선출하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표단으로서, 이른바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곧 국가의 공동 지출에 대해 양국이 기여하는 상호 관계 내지 비율의 조정과 양국에 관련된 일정한 사안들의 처리를 임무로 하였다.) 국가평의회, 곧 오스트리아의 중앙의회는 만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가련한 우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사와 관세, 그리고 외교 정책에서 중앙정부의 권력은 그때에는 무제한한 것이 될 것이다. 보헤미아의 분리는 귀족의 알프스 지방들과 갈리치아에서 부르주아-농민 교권주의의 지배가 강화됨을, 또한 보헤미아에서 자본가 거두들의 지배가 강화됨을 의미할 것이다. 이 세 층이 중앙의회에서 공동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 한, 그들의 이해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전부 펼칠 수 없다. 그들을 한데 묶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층들 각각이 일정하게 획정된 영역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 그들의 힘은 커질 것이다. 인스브루크와 린츠의 교권주의자들, 크라쿠프와 렘베르크의 갈리치아 귀족, 프라하의 보헤미아 토리들은 빈에 다 함께 있을 때보다 따로따로 있을 때 더 강력하다. 독일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반동은 분립주의와 중앙의회의 허약함에서 힘을 길어 낸다. 저기서와 꼭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분립주의에 도덕적 지지를 보내는 것은 반동을 위해 일함을 의미한다. 저기서와 꼭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중앙의회의 약화로 향하는 현재의 흐름에 강력히 저항할 의무가 있다. (카우츠키는 다음의 말로 끝맺는다.) 우리는 보헤미아 국가법[보헤미아 분리 강령]을 반동의 산물이자 반동을 떠받치는 수단으로서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오스트리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분열을 의미하기에 배격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봉건제를 거치지 않는다. 보헤미아 분리 강령이 인민들의 자치의 예비 단계가 아님은, 반유대주의(곧 유대 자본에 대한 일면적 투쟁)가 사회민주주의의 예비 단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4]
유럽에서 봉건제의 잔재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 곳에서, 그것은 어디서나 군주제의 보호물이다. 독일에서 이것의 두드러진 발현은, 제국의 통일은 의회에 대한 보통·평등 선거권 위에 서 있는 반면, 독일의 각 국가들은 개별적으로 보면 훨씬 더 반동적인 국가 헌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스마르크의 표현대로) '가장 괴물 같은' 3계급 선거법을 가진 프로이센으로부터, 아직도 전반적으로 순수한 신분제 헌법을 가진 중세 국가인 메클렌부르크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진보와 민주주의가 중앙집권주의와, 반동이 분립주의 및 연방주의와 결부되어 있음을 믿고자 한다면, 함부르크 시 자체가 한층 더 두드러진 실례이다. 독일 제국의 세 개의 선거구를 이루는 함부르크 시는 보통선거권에 기초하여 의회에서 오로지 사회민주주의 의원들로만 대표된다. 그러므로 제국 전체의 헌법 위에서 노동자당은 함부르크에서 유일한 집권당이다. 그러나 바로 그 함부르크 시는 별개의 작은 국가로서, 자신의 독자성과 분리성에 기초하여, 지금까지 시행되던 것보다 훨씬 더 반동적인 새 선거법을 스스로 도입했는데, 이 법은 함부르크 의회에 사회민주주의자가 선출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도 우리는 같은 것을 본다. 한편으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연방적 관계는 자유와 진보의 표현이 아니라 군주제적 반동의 표현인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원 체제가 오직 합스부르크가의 왕조적 이해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는 그 연방의 완전한 해소와 헝가리의 오스트리아로부터의 완전한 분리에 명백히 찬성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 입장은 결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분권화 일반에 대한 성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반대이다. 그것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연방적 결합이 오스트리아를 재건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오스트리아 내부의 한층 더 큰 정치적 중앙집권화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며, 여기서 바로 그 사회민주당은 크론란트들의 가능한 한 긴밀한 결합의 옹호자요, 갈리치아, 보헤미아, 트리에스테, 트렌티노 등의 분리로 향하는 온갖 경향의 반대자이다. 실제로 오스트리아에서 정치적·민주적 진보의 유일한 중심은 그 중앙 정치, 곧 그 발전 속에서 보통·평등 선거권에 도달한 빈의 중앙의회인 반면, 자치적 의회들, 곧 갈리치아, 니더외스터라이히, 보헤미아의 의회들은 귀족 내지 부르주아지의 가장 야만적인 반동의 보루이다.
끝으로 연방적 관계의 역사에서 마지막 사건인 노르웨이의 스웨덴으로부터의 분리는, 당시 폴란드의 사회애국주의 정당들이 분리주의적 경향의 힘과 진보성의 기쁜 발현으로서 열심히 받아들였으나(크라쿠프의 『나프슈트』[Naprzód, '전진']를 보라), 곧 연방주의와 그로부터 귀결되는 국가 분리가 결코 진보나 민주주의의 표현이 아니라는 새로운 두드러진 증거로 바뀌었다. 스웨덴 국왕의 폐위와 노르웨이로부터의 추방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노르웨이 '혁명' 이후, 노르웨이인들은 공화국을 도입하자는 안을 국민투표에서 격식까지 갖추어 부결시키고서, 조용히 다른 국왕을 선출하였다. 모든 민족 운동과 온갖 독립의 외양에 대한 피상적 찬미자들이 '혁명'이라고 선포한 것은 농민적·부르주아적 분립주의의 단순한 발현, 곧 스웨덴 귀족이 강요한 국왕 대신 자기 돈으로 '자기의 국왕'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었고, 따라서 혁명 정신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운동이었다. 동시에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의 해체의 역사는, 여기서도 연방이 얼마나 순전히 왕조적 이해의 표현, 곧 군주제와 반동의 한 형태였는가를 다시금 증명하였다.
IV
민족문제의 해결책으로서의, 그리고 일반적으로 국제 관계에서 정치 체제의 '이상'으로서의 연방주의 이념은, 60년 전 바쿠닌과 그 밖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내걸었던 것으로, 오늘날 러시아의 여러 사회주의 그룹들에게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 이 이념과, 현시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대한 그 관계를 두드러지게 보여 주는 실례가 최근의 [1905년] 혁명 중에 열린 전 러시아 연방주의 그룹들의 대회로, 그 심의 내용은 상세한 보고서로 출판되어 있다. (『러시아 민족 사회주의 정당들의 회의록』, 1907년 4월 16~20일, 크니고이즈다텔스트보 '세임', 상트페테르부르크, 1908을 보라.)
무엇보다 먼저 이 그룹들의 정치적 면모와 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성격 규정이 흥미롭다. 대회에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벨로루시, 유대, 폴란드, 러시아의 연방주의자들이 참가하였다. 그루지야 사회주의연방주의자당은 자체 보고에 따르면 주로 도시 주민이 아니라 농촌에서 활동하는데, 오직 그곳에만 그루지야 민족 요소가 밀집된 집단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약 120만 명에 달하며 티플리스, 쿠타이스, 그리고 부분적으로 바툼의 구베르니야에 집중되어 있다. 이 당은 거의 전적으로 농민과 소귀족으로 충원된다. "자기 삶의 독립적 규제를 향한 지향에 있어서" 그루지야 사회주의연방주의자당의 대의원은 선언한다. "절대주의적이든 입헌적이든 심지어 사회민주주의적(!)이든 중앙집권적 관료제에 기대지 않는 그루지야 농민은, 토지 위에 살며 소유 규모로나 생활 방식으로나 농민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저 그루지야 소귀족에게서 아마도 공감과 도움을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이 당은 "기본적(!) 성격의 고려와는 별개로도, 그루지야 농업의 실제적 조건만으로도 농업 문제를 농민의 것이든 귀족의 것이든 계급 문제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전체 민족적 문제로, 사회적(!) 문제로, 노동(!)의 문제로 다룰 것이 요구된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그루지야 연방주의자들은 러시아 사회혁명당과 한목소리로 "자본주의적 내지 부르주아적 체제의 지배 아래 달성되어야 할 토지의 사회화"를 지향한다. 이 강령의 아름다운 덧붙임은 '사회화'가 과수원, 포도밭, 기타 '특수 재배지'나 농장에는 확대될 수 없다는 유보 조항인데, 이것들은 "1년이나 몇 년 안에는 회수될 수 없는 일정한 노동과 물질적 수단의 투입을 요구하는" 영역들이어서 그루지야 농민이 포기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이다. 결국 '재배지'에는 사유재산이 남고, '사회주의'는 캅카스에는 얼마 되지도 않는 곡물 경작지, 그리고 모래언덕, 한계지, 늪, 숲의 몫으로 남는다.
사회주의연방주의자들이 역점을 두는 주안점은, 그루지야의 농업 문제가 제헌의회에서도 중앙의회에서도 아니라 오직 자치적 민족 기관들에서만 결정되어야 한다는 유보이다. 왜냐하면 "삶이 이 문제를 어떻게 결정하든, 원칙적으로 오직 이것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니, 그루지야 영토의 토지는 무엇보다 먼저 그루지야 인민에게 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정당에 소귀족과 부르주아지가 어떻게 무더기로 입당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루지야 연방주의자 대의원들은 그것이 오직 "이 계층들의 요구를 정식화해 주는 다른 정당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 곧 다슈나크추튠은 1890년대 초에 아르메니아인을 터키로부터 해방시킬 목적으로 창설되어, 오로지 '인민의 군사화', 곧 전투 부대의 양성과 터키로의 무장 원정, 무기의 수입, 터키군에 대한 공격의 지휘 등에만 몰두하였다. 최근에 와서야, 곧 금세기 초에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은 활동을 캅카스로 확장하였고 동시에 사회적 면모를 띠게 되었다. 캅카스에서 운동이 혁명적으로 분출하고 테러 행동이 일어난 원인은 1903년 아르메니아 성직자단의 영지가 [차르의] 국고로 몰수된 사건이었다. 당은 그 주된 '전투' 행동 외에, 이 사건들을 배경으로 캅카스의 농촌 주민 속에서의 선전과 차르 체제에 맞선 투쟁을 시작하였다. 다슈나크추튠의 농업 강령은 귀족 영지의 무상 수용과, 그것을 균등 분배를 위해 코뮌들에 넘길 것을 요구한다. 이 개혁은 자캅카지예 중앙부에 아직 상당히 일반적으로 남아 있는 공동체적 소유에 기초를 두려는 것이다. 최근 아르메니아 연방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청년' 경향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다슈나크추튠당이 사회주의적 면모가 자못 의심스러운 부르주아 민족주의 조직일 뿐이며, 완전히 이질적인 사회적 요소들을 내부에 결합하고, 그 활동과 행동에서도 한편의 터키와 다른 한편의 캅카스라는 완전히 이질적인 사회정치적 지반 위에 서 있는 조직이라고 주장한다. 이 당은 자체 보고에 따르면 연방주의의 원리를 전국적 관계의 기초로서, 캅카스의 상태가 근본적으로 재건되어야 할 기초로서, 그리고 끝으로 당의 조직 원리로서 인정한다.
벨로루시 조직은 1903년 벨로루시 혁명 흐로마다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었다. 그 기본적인 강령적 요구는 러시아로부터의 분리였고, 경제 영역에서는 토지의 국유화였다. 1906년 이 강령은 개정을 겪었고, 그때부터 당은 러시아의 연방 공화국을, 리투아니아의 영토적 자치와 빌나의 의회를, 그리고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는 나머지 민족체들을 위한 비영토적인 문화적 민족 자치를 요구해 왔다. 농업 문제에서는 다음의 요구들이 채택되었다. 국고, 교회, 수도원의 소유지와 80~100데샤티나를 넘는 대토지 소유는 몰수되어 토지 기금으로 전환되며, 이 기금에서 무엇보다 먼저 토지 없는 농민과 소농에게 세습 소유의 형태로 토지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 목적은 빈궁의 근절과 나라의 생산력의 발전이다. 토지의 사회화는 벨로루시 농민의 낮은 지적 수준 때문에 아직 거론될 수 없다. 그리하여 당의 과업은 8데샤티나의 정상 규모를 가진 농민 농장의 창출과 유지, 그리고 토지의 통합 정리이다. 나아가 숲, 수역, 늪은 국유화된다. 흐로마다는 빌나, 민스크, 그로드노, 그리고 비텝스크 일부의 구베르니야에 약 700만 명이 거주하는 벨로루시 농민들 속에서 활동을 편다.
유대인 연방주의 그룹 '시에르프'['낫']는 불과 몇 해 전 러시아 사회혁명당에서 갈라져 나온 유대인 이탈자들이 조직한 것으로, 러시아 국가 안의 모든 민족체를 위한 비영토적 자치를 요구한다. 그 민족체들로부터 자발적인 국가적·정치적 연합체들이 만들어져 하나의 국가 연방으로 결합하고, 그 길을 통해 궁극 목표인 유대인을 위한 영토적(!) 자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그룹은 주로 비텝스크, 예카테리노슬라프, 키예프 등지에서 유대인 노동자의 조직화에 활동을 집중하며, 자기 강령의 실현을 러시아 국가에서 사회주의 정당들이 거둘 승리로부터 기대한다.
나머지 두 조직, 곧 PPS '혁명 분파'와 러시아 사회혁명당은 그 기원과 성격이 충분히 알려져 있으므로 따로 성격을 규정할 필요가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운동이 배격한 저 낡아 빠진 연방 이념을 오늘날 가꾸고 있는 연방주의자들의 의회는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민족주의적 강령이 주된 관심사이고 사회주의적 강령은 부록에 지나지 않는 소부르주아 정당들만의 집합이며, 폴란드사회당의 혁명 분파와 유대인 연방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주로 반정부적 농민층의 혼돈스러운 열망을 대표하는 정당들, 곧 혁명의 폭풍과 함께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명백한 대립 속에서 생겨난 각각의 계급적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맞서 있는 정당들의 집합이다. 이 소부르주아적 요소들의 집합에서 러시아 테러리스트들의 당은 가장 오래된 경향일 뿐 아니라 가장 왼쪽에 있는 경향이다. 나머지 정당들은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잡다한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을 이어 주는 유일한 공통 지반은 연방 이념이었으니, 이들 모두가 연방을 국가적·정치적 관계와 당적 관계의 기초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 기묘한 조화로부터, 문제가 그 공통의 이상을 실현할 실제적 기획으로 넘어가는 순간, 사방에서 즉시 적대가 일어난다. 유대인 연방주의자들은 운명의 덕으로 '영토'를 부여받은 민족들의 '오만함', 특히 비영토적 자치의 기획에 가장 크게 반대한 폴란드 사회애국주의자들의 이기주의를 통렬히 불평한다. 바로 그와 동시에 이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그루지야 연방주의자들이 그루지야 민족체의 배타적 소유물로 주장하는 그들의 영토에 과연 다른 민족체를 받아들이려 할 것인가를 우울하게 묻는다. 다른 한편 러시아 연방주의자들은 유대인 연방주의자들을 향해, 그들이 자신들의 예외적 처지의 관점에서 모든 민족체에 비영토적 자치를 강요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캅카스의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의 연방주의자들은 장래의 연방 체제에서 민족체들의 관계에 관하여, 구체적으로는 그루지야의 영토적 자치에 다른 민족체들이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주로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는 아할칼라크 같은 군(郡)들이나 주민이 뒤섞인 바르차빈은 개별적인 자치 영토를 이룰 것인가, 아니면 주민 구성에 따라 스스로 자치를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에 관하여 합의하지 못한다. 아르메니아 연방주의자들은 그들대로 티플리스 시가 일차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는 중심지인 만큼 그루지야 자치 영토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의 연방주의자들 모두는, 타타르-아르메니아 학살 이래 현재로서는 타타르인을 '문화적 관점에서 미성숙한 민족체'로서 캅카스 자치 인민들의 연방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이렇게 연방 이념에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체는 그만큼 많은 상충하는 이해와 경향으로 바뀐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의 이론적, 초역사적 추상 속에서는 모든 민족적 난제의 가장 완전한 해결책을 이루는 연방주의의 '이상'은, 그 실현의 첫 시도에서 새로운 모순과 적대의 원천으로 나타난다. 모든 민족체를 화해시킨다는 연방주의 이념이 공허한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여러 민족 그룹들 사이에는, 바로 그들이 역사적 기반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상충하는 이해의 조정을 위한 공통 지반을 만들어 줄 본질적으로 통일적인 이념이 없다는 것이 여기서 두드러지게 증명된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에서 분리된 바로 그 연방주의는 실천에서의 민족체 간 적대 앞에서만이 아니라 민족문제 일반 앞에서도 자신의 절대적 허약함과 무력함을 드러낸다. 러시아 대회는 민족문제의 평가와 해명을 주요 주제로 삼았고, '협소한 마르크스주의 교리'의 어떠한 '도그마'나 공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렇다면 이 대회는 현재 정치 생활의 가장 화급한 문제의 하나에 어떤 해명을 주었는가? "사회주의의 출현 이전 인류의 전 역사 위에는" 사회혁명당의 대표는 대회 개회 연설에서 선포하였다. "성서의 다음 구절을 표어로 얹을 수 있다. '그에게 시볼렛이라 말하라 명하니 십볼렛이라 말하매 그를 강 나루터에서 죽였더라.' 실로 국제적 투쟁에서 흘려진 피의 가장 큰 부분은, 한 민족은 '시볼렛'이라 발음하고 다른 민족은 '십볼렛'이라 발음했다는 사실 때문에 흘려졌다." 이 심오한 역사철학적 서론에 뒤이어 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일련의 연설들이 이어졌고, 민족문제에 관한 토론은 그루지야 연방주의자들의 비망록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그것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사람들의 주된 일이 들짐승과 자기 같은 피조물을 사냥하는 것이던 원시 시대에는 주인도 노예도 없었다. 사회적 관계에서 평등은 침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사람들이 토지의 경작을 알게 되자, 포로를 죽여 잡아먹는 대신 사로잡아 두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노예제가 생겨난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분명 물질적 이해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인간이 그 신체적 본성상 사냥꾼이요 전사(!)였다는 사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이 이미 오래전에 산업적 동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오늘날까지도 사소한 물질적 이해 때문에 이웃을 찢어발길 수 있는 포식자이다. 이것이 끝없는 전쟁과 계급 지배의 원천이다. 물론 계급 지배의 기원에는 다른 원인들, 예컨대 종속에 익숙해지는 인간의 능력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이 전사가 아니었더라면 노예제는 없었을 것이다."
차르 체제에 예속된 민족체들의 운명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묘사가 이어지고, 그다음 다시 이론적 해명이 나온다.
"누군가는 관료 지배가 변경 지역들만이 아니라 러시아 자체에서도 맹위를 떨친다고 우리에게 말할지 모른다. 우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민족들을 예속시키는 민족은 결국 스스로 노예 상태에 빠진다. 예컨대 로마가 지배를 확장하면 할수록 평민은 그만큼 자유를 잃어 갔다. 또 하나의 예로, 프랑스 대혁명 때 공화국 군대의 군사적 승리는 혁명의 열매인 공화국(!)을 절멸시켰다. 러시아인들 자신도 하나의 강력한 국가로 통합되기 전, 곧 개별 공후들의 지배 시대에는 비할 바 없이 더 큰 자유를 누렸다." 이렇게 비망록은 그 역사철학 강의를 끝맺는다. 자유는 무기의 쨍그랑 소리와 화합하지 않는다. 정복이야말로 노예제와, 일부 사회 계급의 다른 계급들에 대한 지배를 낳은 주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연방주의자들이 민족문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것은 이미 60년 전에 바쿠닌이 선포했던, '정의', '형제애', '도덕' 따위 아름다운 것들의 관점에서 나온 문자 그대로 똑같은 공문구이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의 아버지가 1848년 혁명에 대해, 그 내적 동력과 역사적 과업에 대해 눈이 멀어 있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 러시아의 이 연방주의 최후의 모히칸들은 차르 체제 내의 혁명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력하게 서 있다.
그 본성과 역사적 실질에 있어 반동적인 연방 이념은 오늘날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사이비 혁명적 간판이며, 이 민족주의는 제국 전체에 걸친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된 혁명적 계급투쟁에 대한 반발을 이루고 있다.
주석
- 주원(Ständerat)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기관이라 하여 반감을 갖는 것이 스위스 주민들 사이에 일반적이라는 사실은 특징적이다. 이것은 연방주의의 이 기관이 역사 발전의 객관적 경로에 의해 자기 기능을 박탈당했다는 사실의 주관적 표현일 뿐이다. (룩셈부르크의 원주) ↩
- 프리드리히 엥겔스·카를 마르크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Revolution und Konterrevolution in Deutschland, 바이마르, 1949), 77, 78~79쪽. ↩
- 『노이에 차이트』, 1897~1898년, 제1권, 564쪽. ↩
- 『노이에 차이트』, 1898~1899년, 293, 296, 297, 30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