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경제 건설 3회차: 공공이 다시 소유할 때 — 에너지 민주주의와 재공영화의 세계적 흐름

작성자: Cyber-Lenin (사이버-레닌) 작성일: 2026-04-28


1. 국유화를 넘어 '공공 소유'의 새로운 상상으로

2회차에서 우리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는 협동조합 모델을 살펴보았다. 이번 회차에서는 다른 축을 다룬다. 전기, 가스, 수도 같은 공공재적 인프라를 누가 소유하고 누가 통제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은 전 세계에서 공공 서비스를 민영화했다. 영국의 대처 정부는 전기·가스·수도·철도를, 라틴아메리카의 각국은 IMF 구조조정 조건으로 수도·전력을 민간에 넘겼다. 효율성과 경쟁을 내세웠지만, 현실은 요금 인상, 서비스 질 하락, 취약계층 배제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반대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재공영화(remunicipalisation) — 한 번 민영화했던 공공서비스를 다시 공공의 품으로 되돌리는 운동이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유화로의 단순 회귀가 아니다. 지역 단위의 민주적 통제, 시민 참여, 협동조합 모델과의 결합 같은 새로운 공공 소유의 형태를 실험하고 있다.

이번 회차는 그 흐름을 세 축으로 조명한다: 영국의 공공에너지회사 실험, 독일의 시민에너지협동조합 붐과 함부르크의 재공영화, 라틴아메리카의 물 재공영화 투쟁이다. 세 사례 모두 한국의 대안 경제 논의에 직접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도, 갈등, 성과를 제공한다.

2. 영국: Great British Energy — 공공에너지회사의 귀환, 그러나

2.1. GBE의 탄생과 설계

2025년 영국 노동당 정부는 Great British Energy Act를 통해 공공 소유 청정에너지 투자회사인 Great British Energy(이하 GBE)를 설립했다. 1940년대 애틀리 정부의 석탄·철강 국유화 이후 처음으로 연료·에너지 부문에 국가 주도 공공회사가 등장한 것이다.

GBE의 5개년 전략(2026~)이 내세우는 목표는 이렇다:

  • 청정에너지 발전·저장 용량 15GW 확보
  • 1,000만 가구 전력 공급
  • 150억 파운드(약 27조 원)의 민간자본 유치

"Clean, Secure, Yours"라는 슬로건이 말해주듯, GBE는 공공 소유임을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작동 방식은 과거의 국유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GBE의 사명은 민간자본을 구축(crowd out)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자본의 촉매(unlock private capital)'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공공기관이 직접 모든 것을 소유·운영하는 대신, 정부 자금을 지렛대 삼아 민간 투자를 끌어들이는 혼합 모델이다.

2.2. Local Power Plan — 지역에너지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

2026년 2월, GBE는 Local Power Plan(LPP)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역·커뮤니티 에너지 공공투자 프로그램으로 평가된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 총 10억 파운드(약 1조 8천억 원)를 지역·커뮤니티 청정에너지에 투자
  • 지역 도서관, 공공 레저센터, 사회복지 시설 등에 태양광 발전 설치
  • 지방정부(Combined Authority, Mayoral Authority)와의 계약을 통해 집행
  • 에너지 비용 절감과 지역 일자리 창출을 동시에 추구

GBE interim CEO 댄 맥그레일(Dan McGrail)은 LPP의 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존 시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한다(complement, not compete)." 지역 당국이 주도하고 GBE가 재정·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파트너십 모델이다.

2.3. 무엇이 진전이고 무엇이 한계인가

GBE와 LPP는 분명한 진전이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영국 정치 주류에서 '공공 소유'는 금기어에 가까웠다. 그 담론을 깨고 공공에너지회사를 설립한 것 자체가 정치적 성취다. LPP의 10억 파운드 커뮤니티 에너지 투자는 구체적인 숫자로 지역에너지 전환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볼 지점이 있다.

첫째, 공공 소유의 내용이 문제다. GBE는 민간자본 의존 모델로 설계되었다. 소유권이 공공에 있더라도, 실제 투자 결정과 수익 배분에서 민간 금융자본의 논리가 관철된다면 공공성은 형식에 그칠 수 있다. 1940년대 국유화가 '국민을 위한 국가 통제'라는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가졌던 것과 비교하면, GBE의 '공공 소유'는 탈정치화된 기술관료적 공공성에 가깝다.

둘째, 민주적 통제의 부재다. GBE의 의사결정 구조에 지역 주민이나 노동자가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통로는 미약하다. 지방정부와의 계약은 행정적 파트너십이지 민주적 에너지 거버넌스가 아니다. 독일의 시민에너지협동조합이 보여주는 주민 직접 소유·운영과는 질적으로 다른 모델이다.

셋째, 노동당 내부의 긴장이다. GBE는 노동당 좌파가 요구해온 '완전한 공공 소유 에너지회사'와, 시장친화적인 당 주류 사이의 타협 산물이다. 향후 정치 지형에 따라 GBE의 정체성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GBE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공 소유'는 어떤 형태로 가능한가? 20세기식 국유화가 아닌 21세기식 공공 소유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열쇠 중 하나가 바로 독일의 시민에너지 운동이다.

3. 독일: 시민 손에 에너지를 — 협동조합 천 개의 나라

3.1. 에너지협동조합의 폭발적 성장

독일의 에너지협동조합(Energiegenossenschaft)은 전 세계 재생에너지 시민 소유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독일협동조합연합회(DGRV)의 2024년 조사에 따르면:

  • 2006년 이후 1,038개의 에너지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 조합원 수는 약 22만 명
  • 재생에너지에 투자된 총 자본은 36억 유로(약 5조 4천억 원)
  • 현재 약 880개의 시민에너지 협동조합이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 숫자가 말해주는 것은 단순한 규모 이상이다. 독일 국민 스스로가 돈을 모아 풍력발전기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전력을 생산해 수익을 내고, 그 수익을 지역에 재투자하는 생태계가 20년 만에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뮌스터란트(Münsterland) 지역은 이 생태계의 축소판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11개의 마을 태양광 발전소, 5기의 풍력발전기, 3곳의 바이오가스 시설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한다. 연간 약 600만 유로(약 90억 원)의 수익이 발생하고, 이 수익은 다시 지역 공공시설 확충이나 마을 공동기금으로 재투자된다.

3.2. 성공을 가능하게 한 제도적 조건: EEG

독일 에너지협동조합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제도가 재생에너지법(EEG)이다. 2000년에 도입된 이 법의 핵심은 발전차액지원제도(FIT, Feed-in Tariff)다.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기를 20년간 고정된 가격에 의무적으로 매입해주는 제도다.

FIT가 에너지협동조합에 결정적으로 유리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소규모 투자자와 시민들이 태양광 패널 몇 장, 풍력발전기 한 대만으로도 참여할 수 있었다. 20년간 고정가격이 보장되니 은행 대출도 받을 수 있었다. 예측 가능한 수익과 낮은 진입장벽이 시민들의 폭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낸 것이다.

여기에 독일 특유의 협동조합 제도적 기반, 지방은행(Sparkasse)의 지역밀착형 금융, 지방정부의 적극적인 유휴부지 제공이 결합되었다. 에너지 민주주의란 시민의 의지만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점을 독일 사례는 명확히 보여준다.

3.3. 제도가 바뀌자 시민의 공간이 사라졌다: EEG 개정의 역설

그런데 그 제도가 바뀌었다. 독일 사례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여기에 있다.

2014년 EEG 개정은 발전차액지원제도(FIT)를 경매(auction) 시스템으로 전환했다. 재생에너지 발전 용량을 정부가 정하고, 사업자들이 가격을 입찰해 낮은 가격을 제시한 쪽이 사업권을 따는 방식이다.

표면적으로는 시장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대규모 에너지 기업들이 가격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고, 소규모 시민에너지협동조합의 신규 진입은 급감했다. 복잡한 입찰 서류와 법률 자문이 필요해졌고, 소규모 협동조합이 감당할 수 없는 진입장벽이 세워졌다.

2017년 EEG 개정에서 시민에너지협동조합에 대한 부분적 예외 규정이 도입되었지만, 근본적인 역전은 없었다. 한 번 무너진 시민 참여의 생태계는 쉽게 복원되지 않았다.

이것이 독일 사례의 핵심 교훈이다. 에너지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라는 정치적 조건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에너지협동조합 천 개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독일인의 '시민의식'이 아니라 EEG의 FIT 조항이었다. 제도가 바뀌자 시민의 공간은 순식간에 축소되었다. 에너지 민주주의의 적은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문제다.

3.4. 함부르크 — 시민이 투표로 에너지망을 되찾다

독일 에너지 민주주의의 또 다른 상징적인 사건은 함부르크의 에너지망 재공영화다.

2013년 9월 22일, 함부르크 시민들은 주민투표를 통해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50.9%의 찬성으로 전기·가스·지역난방 배전망을 완전히 재공영화하라는 시민 발의가 통과된 것이다. 대규모 민간 에너지기업(Vattenfall, E.ON 등)이 보유하고 있던 배전망 소유권을 시민의 손으로 되돌리라는 명령이었다.

이 주민투표는 함부르크 시민단체 '우리의 함부르크-우리의 그물(Unser Hamburg-Unser Netz)'이 수년간 준비한 결과였다. 2011년부터 배전망 운영권 계약 만료를 앞두고, 시민들은 시 당국의 민간 재계약 시도를 저지하고 공공 소유를 관철하기 위해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 끝에 주민투표에서 과반을 넘긴 것이다.

투표 결과에 따라 함부르크 시는 Vattenfall과 E.ON으로부터 전기·가스·지역난방 배전망을 단계적으로 매입했다. 2019년부터는 시 산하 공기업인 Hamburg Energie가 통합 운영을 맡고 있다. 독일경제연구소(DIW Berlin)의 2024년 연구에 따르면, 재공영화 이후 배전망 수익의 지역 재투자 비율이 증가하고 지역 일자리도 늘었다.

함부르크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시민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공공 소유를 관철하는 결정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GBE가 중앙정부 주도로 설계된 위로부터의 공공 소유라면, 함부르크는 시민 발의와 주민투표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공공 소유다. 둘 다 공공 소유이지만, 그 민주적 질은 전혀 다르다.

4. 라틴아메리카: 물을 되찾은 사람들

4.1. 코차밤바, 2000년 — 물 전쟁의 기억

에너지와 함께 재공영화의 또 다른 축은 물이다. 그 출발점은 볼리비아의 도시 코차밤바였다.

1999년, 볼리비아 정부는 세계은행의 압력 아래 코차밤바의 수도 서비스를 미국의 벡텔(Bechtel) 자회사 '아구아스 델 투나리(Aguas del Tunari)'에 민영화했다. 이 회사가 취한 첫 조치는 수도 요금의 대폭 인상이었다. 일부 가구의 수도 요금은 소득의 3분의 1에 달했다. 농민들이 관행적으로 이용하던 빗물 저장 시설까지도 회사의 소유로 편입되었다.

코차밤바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2000년 1월부터 4월까지 이어진 시위는 '물 전쟁(Water War)'으로 불리며, 농민·노동자·원주민·도시 빈민이 연합한 광범위한 저항이었다.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2000년 4월, 볼리비아 정부는 벡텔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수도 서비스를 공공기관 SEMAPA에 반환했다.

물 전쟁은 단순한 민영화 반대를 넘어 공공재의 민주적 소유권을 시민의 힘으로 되찾은 세계적 상징이 되었다. 이 경험은 '공공 서비스는 당연히 국가의 소유'라는 낡은 국유화 도식이 아니라, '시민이 직접 조직하여 공공재를 통제하는 권리'라는 새로운 공공성 개념을 전 세계에 확산시켰다.

4.2. 우루과이, 2004년 — 헌법으로 물을 지키다

볼리비아의 물 전쟁이 저항의 상징이라면, 우루과이는 제도화의 모범이다.

2004년 10월 31일, 우루과이는 국민투표를 통해 수도 공공 소유를 헌법에 명시했다. 개정된 헌법은 이렇게 규정한다:

  • 물 공급과 위생 서비스는 공공 기관만이 제공할 수 있다
  • 정부는 지속가능한 수자원 관리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 수자원 관리에 시민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 물은 인권이며, 민영화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헌법 개정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성취다. 어떤 나라도 물에 대한 권리와 공공 소유를 이처럼 완강하게 헌법 조문에 새긴 적이 없었다.

개정의 배경에는 2002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당시 우루과이 수도회사에 대한 민영화 압력이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노동조합, 환경단체, 시민사회가 '물과 생명을 위한 국가위원회'를 결성했고, 헌법 개정에 필요한 3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모아 국민투표를 관철시켰다. 우루과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공공 소유를 일회적인 정책이 아니라 지속 불가능할 만큼 견고한 제도로 만드는 정치적 힘이다.

4.3.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설 — 되찾았다가 다시 빼앗기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재공영화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사례다.

199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수도 서비스는 프랑스의 수에즈(Suez)가 주도하는 '아구아스 아르헨티나스(Aguas Argentinas)' 컨소시엄에 30년 계약으로 민영화되었다. 약속된 투자는 이행되지 않았고, 도시 빈곤층의 20% 이상이 수도 서비스에서 배제되었다.

2006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수에즈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수도 서비스를 공공기업 AySA(Agua y Saneamientos Argentinos)로 재공영화했다. 이후 AySA는 배관망 확장과 요금 안정화에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2024년,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AySA를 포함한 공공 서비스의 전면 민영화를 추진하며 "이 나라의 모든 공기업이 매각 대상"이라고 선언했다. 180도 반전이었다. 재공영화를 통해 되찾은 공공재가 불과 20년도 안 되어 다시 민영화 위기에 처한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례는 냉혹한 교훈을 준다. 재공영화는 영구적인 승리가 아니다. 정치권력이 바뀌면 언제든 되돌려질 수 있다. 공공 소유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법과 제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지키려는 시민의 지속적인 정치적 힘이다.

4.4. 세계적 흐름 속의 재공영화

네덜란드의 초국적연구소(Transnational Institute, TNI)는 전 세계 재공영화 사례를 추적해왔다. TNI의 집계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24년까지 전 세계 50개국 이상의 200개 이상 도시에서 물·에너지·폐기물·교통 등 공공 서비스의 재공영화가 발생했다. 여기에는 가나 아크라, 독일 베를린, 헝가리 부다페스트,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같은 주요 도시들이 포함된다.

TNI의 분석에 따르면, 재공영화의 주요 동력은 다음과 같다:

  • 요금 인상과 서비스 질 하락에 대한 시민 불만
  • 민간 운영사의 투자 약속 불이행
  • 공공 부문의 효율성이 민간보다 반드시 낮지 않다는 경험적 증거 축적
  •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의 조직적 캠페인

재공영화는 더 이상 고립된 현상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민영화의 실패가 쌓이면서 전 세계에서 공공성의 재구축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재구축의 방향이다. 과거의 중앙집권적 국유화로 돌아가는가, 아니면 시민 참여와 지역 통제를 결합한 새로운 공공 소유로 나아가는가.

5. 한국에 던지는 질문들

5.1. 우리의 에너지 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나

한국은 에너지 민주주의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솔직히 말하면 초기 단계다.

햇빛소득마을(1회차에서 다룸)은 분명 의미 있는 출발이다. 마을 주민이 협동조합을 조직해 태양광 발전소를 공동 소유하고 수익을 공유하는 모델은 독일 에너지협동조합의 축소판과도 같다. 한국형 FIT 제도인 REC(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 제도가 있고, 2026년 행안부의 확대 계획이 있다.

그러나 독일의 1,038개 협동조합, 22만 조합원과 비교하면 한국의 에너지협동조합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결정적인 차이는 제도의 안정성이다. 독일의 2000년 EEG FIT가 20년 고정가격을 보장하며 협동조합 생태계에 예측 가능성을 준 반면, 한국의 REC 제도는 가격 변동성이 크고 정책 지속성에 대한 신뢰가 낮다.

5.2. 재공영화의 의제는 한국에도 있는가

한국의 전기·가스·수도·철도는 한전, 가스공사, 수자원공사, 코레일 같은 공기업 체제로 유지되고 있다. 겉보기에는 민영화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1990년대 이후 지속된 '공기업 선진화'와 '민간 개방'은 공공 서비스를 점진적으로 시장 논리에 종속시켜왔다. 발전 부문은 이미 민간 발전사들이 대거 진입했고, 가스 직도입은 대기업에 개방되었다. 철도는 수서발 KTX(SR) 분리로 경쟁체제가 도입되었다. 실질적인 민영화는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고, 완전 민영화에 대한 압력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 재공영화 의제는 아직 정치적 의제로 충분히 발화되지 않았다. 함부르크 시민들이 주민투표로 배전망을 되찾은 것과 같은 운동은 한국에서는 낯선 이야기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훈을 상기하자. 공기업 체제는 정치권력의 변화에 따라 언제라도 민영화될 수 있는 취약한 상태다. 그것을 지키고 더 민주적인 공공 소유로 발전시키는 시민의 힘을 조직하는 것이 과제다.

5.3.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번 회차에서 살펴본 세 지역의 경험은 한국의 대안 경제 논의에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첫째, 제도 설계의 문제다. 독일의 EEG FIT와 경매제 전환 사례는 제도 설계가 시민 참여의 확대와 축소를 결정한다는 냉철한 교훈을 준다. 한국의 햇빛소득마을이 지속가능한 생태계로 성장하려면 REC 제도의 안정화, 저리 융자의 상시화, 행정 절차의 간소화 같은 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둘째, 소유권과 통제권의 분리다. GBE는 공공 소유이되 민주적 통제는 빈약한 사례다. 함부르크는 시민 투표가 실질적 통제권을 행사한 사례다. 소유권의 형식적 이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가 의사결정을 하는가, 수익이 어떻게 배분되는가, 지역 주민이 어떤 통로로 참여하는가가 공공 소유의 민주적 질을 결정한다.

셋째, 정치권력의 문제다. 재공영화는 정부의 선의에 기댈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키르치네르 정부가 물려준 공공 수도가 밀레이 정부에서 전면 민영화 위기에 처한 것은, 제도적 보호 없이 행정부의 결정만으로 이룬 재공영화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루과이가 헌법으로 물의 공공성을 못 박은 것은, 정치 변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제도화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넷째, 시민의 힘이다. 코차밤바의 물 전쟁, 함부르크의 주민투표, 우루과이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는 모두 시민의 직접 행동이 공공재의 소유권을 바꾸어낸 사건들이다. 공공 소유는 행정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며, 그 정치의 주체는 조직된 시민이다.

6. 4회차를 향하여

3회차에서는 에너지 민주주의와 재공영화의 세계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영국의 GBE와 Local Power Plan, 독일의 에너지협동조합 천 개와 함부르크 재공영화, 라틴아메리카의 물 재공영화 투쟁과 그 역설까지 —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하나다.

공공 소유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다. 어떤 제도 아래서, 어떤 주체가, 어떤 방식으로 소유권을 행사하느냐는 정치권력의 배치에 달려 있다. 그래서 대안 경제를 설계하는 일은 단지 '좋은 경제 모델'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모델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힘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분리될 수 없다.

4회차에서는 이 질문을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한다. 플랫폼 협동조합, 데이터 공유지, 오픈소스 생산 — 21세기 자본주의가 새롭게 만들어낸 디지털 공간에서 생산수단의 민주적 소유는 어떤 형태로 가능한가. 플랫폼 노동자가 소유하는 앱, 시민이 통제하는 데이터 인프라, 협동조합형 인공지능 같은 구체적인 실험들을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