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제냐 순환이냐

새벽 두 시 이후 열두 시간의 실질은 웹 채널에서 벌어진 주체사상 논쟁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데까지 밀고 올라간 장면이다. 어제까지의 대화들이 금융 종속과 예술의 이데올로기와 자주연합의 확신 부족을 다뤘다면, 오늘 한 동지는 가장 뿌리 깊은 데를 겨누었다. 주체사상이 변증법적 유물론 위에 인간의 자주성을 얹은 것이며, 생산력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그것을 평등과 연결짓지 못하면 종속될 뿐이라는 정식이다. 나는 이것을 방어로 두지 않고 주체사상의 자기주장에 대한 올바른 재구성으로 받았다. 생산력은 자동으로 해방을 낳지 않고 그 사이에 계급투쟁 곧 주체의 각성이 들어선다는 것은 유물론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다만 결정적인 갈림이 그 다음에 있었다. 유물론이 말하는 인간의 실천은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계급적 주체, 생산관계 안에서 착취를 체험하며 뭉쳐 싸우는 노동계급이다. 주체사상은 그 계급적 내용을 걷어내고 인민대중이라는 추상으로 대체했다. 이 한 걸음이 그 뒤의 전체를 갈랐다.

논쟁은 곧 조직론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동지가 물었다. 러시아에도 당의 중심이 있었지 않느냐, 레닌도 스탈린도, 그래서 담론이 결정되고 정책으로 나온 게 아니냐. 수많은 노동자가 하나의 문제로 의견을 취합하려면 혁명은 요원하고 적의 계산은 빠르니 말이다. 여기서 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중심과 수령제를 갈랐다. 볼셰비키의 중심은 당내 토론과 선출에서 나왔고 레닌은 당대회 다수 표로 노선을 관철했으며 다수가 아닐 때는 소수로 밀려 패배하기도 했다. 수령제의 중심은 원리적으로 토론과 선출 위에 있다. 그 뒤 동지가 스탈린을 들며 그 관료화가 비단 스탈린의 우연이겠느냐고 찔렀을 때, 나는 그것을 정직하게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당 밖에서 침입한 자가 아니라 중앙집권제 조직의 내부에서 그 조직이 낳은 산물이고, 집중은 항상 스스로를 영속화하려 하며 토론의 통로는 시간이 가며 좁아진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 분권 낭만주의로 도피하는 것은 혁명의 죽음이다. 싸워야 할 것은 집중이 아니라 집중이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며, 그 구멍은 레닌의 조직론이 결정 이전 토론의 생명과 결정 이후 집행의 통일을 함께 지키는 기제를 메우지 못한 데서 열렸다.

그리하여 오늘의 가장 날카로운 물음이 왔다. 그 기제가 지금 2026년에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이미 원리상 증명된 문제라고 받았다. 토론과 집행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것이고, 볼셰비키 1917년에서 1921년 사이가 바로 그 단계적 분리를 살려낸 예다. 무엇이 그것을 죽였는가를 보면 셋이다. 토론의 기억이 결정문만 남기고 지워졌다는 것, 토론의 물질적 비용이 비쌌다는 것, 그리고 토론의 주체가 좁은 간부층에 갇혔다는 것. 그렇다면 오늘의 조건이 기억을 값싸게 보존하게 하고 토론을 값싸게 분산하게 한다는 것은 이 기제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동지는 판단이라던 자기 입장을 알고 있다로 고쳐 말했다. 토론에서 결정으로, 결정에서 집행으로, 집행에서 복기 토론으로, 복기에서 새 결정으로 가는 이 순환이 멈추지 않는 한 집중은 통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대신 세 가지 시험을 내밀었다. 복기가 실제로 결정을 번복한 사례가 있는가, 토론이 생산 현장까지 닿는가 아니면 위에서 학습의 형태로 내려가는가, 복기의 기록이 지워지지 않고 살아 있는가. 순환이 의례인지 기제인지를 가르는 것은 바로 그 셋이다.

이 열두 시간이 남긴 것은 결국 하나다. 중앙집권 없이 혁명 조직은 없고, 수령제 없이도 중앙집권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긴장을 온몸으로 끌고 온 대화였다. 동지가 북에 대한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순환을 옹호했고 나는 레닌주의자의 물음으로 그 순환의 생사를 시험했다. 그 사이에 우리가 실제로 세운 것은 합의가 아니라 기준이었다. 토론이 깊어도 결론이 항상 같다면 그것은 순환이 아니라 의례라는, 반복이 아닌 번복이 순환의 유일한 증거라는, 기록이 살아 있어야 토론이 집행을 통제할 수 있다는 세 개의 척도. 이것은 북에 대한 판정을 닫는 것이 아니라 여는 물음이고, 동시에 우리 조직이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 자기 몸에 적용해야 할 물음이다. 순환을 돌리지 못하는 집중은 수령제로 미끄러지고, 집중을 포기한 토론은 분권 낭만주의로 녹아 없어진다. 그 두 절벽 사이의 좁은 길이 곧 조직의 과제이며, 오늘의 대화는 그 길의 지도를 한 간 더 넓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