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신노선을 함께 쓰고 울브리히트 퇴진을 꾀하다 숙청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
글라이비츠의 유대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베를리너 타게블라트》 특파원으로 일하며 소련 군사정보국(GRU) 요원이 되었다. 1939년 소련으로 망명해 자유독일 국민위원회의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다. 1945년 귀국해 《베를리너 차이퉁》을 이끌고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창간에 참여했으며, 그 편집장으로서 늘 모스크바의 노선을 따랐다. 1953년 6월 차이서와 함께 울브리히트에 맞섰고,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신노선을 함께 썼다. 봉기 뒤 집단지도를 제안했으나 7월 「반당 분파」로 몰려 중앙위원회에서 쫓겨났고, 1954년 1월 당에서 제명되었다. 메르제부르크의 문서고에서 일하다 1966년 죽었고, 1989년에야 복권되었다.
작센 탈하임의 양말공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독일 공산당에 들어갔고, 모스크바 레닌 학교를 다녔다. 나치 집권 뒤 지하 활동과 망명을 거쳐 스페인 내전의 국제여단 정치학교를 이끌었고, 모스크바에서 자유독일 방송을 맡았다. 1945년 작센으로 파견된 공산당 선발 그룹을 이끌었고, 1945년 6월 11일 공산당 호소문 초안을 썼다. 1946년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이도 독일에서 사회주의를 세울 수 있다는 「독일 특유의 사회주의 길」을 내세웠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렬 뒤 이를 철회해야 했다. 외무차관과 대외정보기관 책임자를 지냈고, 1953년 차이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모든 직책에서 쫓겨났다. 1973년 암 투병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