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 테제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문구를 레닌의 말로 잘못 인용한 사건은 스테파코프가 아지트프롭에서 축출되는 공식 명분이자 셸레핀 계열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브레즈네프 초기 5년간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을 맡아 당의 일상적 이념 장치를 운영했다. 수슬로프·데미체프가 서기국에서 이념을 총괄하는 동안 레닌 탄생 100주년과 프라하의 봄 대응 선전을 지휘한 실무자였다. 역사학 박사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선전론을 체계화했으며,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어 1970년 레닌 테제 오류 사건으로 축출된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옮겼다.
은퇴 후 그는 『배신자 고르바초프』라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스타브로폴에서 길을 열어준 후임자를 향해 "양면적인 자들의 동맹"이라 쏘아붙였다.
농업기계화 기술자로 출발한 예프레모프는 전시 항공공업과 쿠이비셰프 당 기구를 거쳐 흐루쇼프 시기 쿠르스크·고리키·스타브로폴 당 조직을 차례로 이끈 지역 간부로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CPSU 상임위 후보위원과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을 지내며, 연방 구조 안에서 러시아 공화국을 별도 관리하려는 당 구도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실각 후 스타브로폴로 되돌아갔고, 1970년 그 자리를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넘겨준 것이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훗날 그는 회고록 『배신자 고르바초프』에서 후임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18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일하다 1988년 연방급 연금생활자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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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41보로네시 농업기계화연구소 졸업 → 항공공장 기술자, 독일 통상대표부 장비 인수원
KGB 의장 세미차스트니는 훗날 회고했다: “내가 맡고 있던 KGB 의장 자리는 원래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조직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청년기 친구였으며,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1959–1964)으로서 KGB·내무·군·검찰·법원을 총괄 감독한 흐루쇼프 시대 후기의 실세였다. 1964년 반흐루쇼프 음모에서 중앙위원과 군·보안 간부들을 직접 포섭하며 쿠데타의 실무를 조직했고, 브레즈네프 집권 후 KGB 의장으로 내정되었으나 취임 직전 베오그라드 근교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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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5정치장교·군 선전선동 담당, 255소총병사단에서 복무하며 부상, 소령으로 종전
1945–1951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선전부, 키로보그라드 주당 서기 등 우크라이나 당직 역임
각 공산당은 자기 인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모스크바철학문학역사연구소와 고등당학교를 거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을 지낸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론가이다. 1965년부터 『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며 1968년 9월 26일 「사회주의 나라들의 주권과 국제적 의무」를 기고,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사회주의 공동체 수호'라는 국제주의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 글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최초이자 가장 권위 있는 정식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그는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과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하며 윤리학·공산주의 교양론 분야의 저작을 남겼다.
사빈킨이 3년 넘게 부장 대행에 머물자 부서 평직원들조차 조바심을 냈다. 경찰 중장 치간니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직원들조차 그의 임명이 이례적으로 지연되는 데 지쳐 초조하게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1968년부터 1987년까지 CPSU 중앙위 행정기관부장을 지내며 KGB·내무부·국방부·검찰·법원의 고위 간부 임명을 통제한 군사정치 간부다. 1935년 붉은 군대 입대 후 정치장교로 참전했고, 1950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행정기관 부문 경력을 쌓았다. 1964년 전임자 미로노프의 급사로 부장 대행이 되었고, 3년 넘는 대행 끝에 1968년 정식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으로 기억되며, 국방부 인사에 집중했고 1987년 퇴직할 때까지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세 서기장을 거치며 전력 기관 인사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당시 그리신은 일리초프와 함께 흐루쇼프의 사임 성명 초안을 작성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정치적 죽음이 담긴 그 서류에 서명했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렸다.
브레즈네프 시대 보수파의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 18년간(1967~1985) 수도를 통치했다. 1971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고,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사후 두 차례 서기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85년 고르바초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모스크바 인근 원전 건설을 저지해 체르노빌 이후 선견지명을 인정받았고, 1980년 올림픽 인프라를 총괄했다. 1992년 연금 재등록을 위해 구청 사회보장과를 찾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후기 소비에트 체제의 안정과 정체를 동시에 체현했다.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보로네시 제1서기 시절, 흐루쇼프의 시찰을 앞두고 국영농장과 콜호스에 명령을 내렸다. 노동자들은 예비선로의 레일을 뜯어내 트랙터 뒤에 묶고 들판을 가로질러 끌며 수확이 끝난 것처럼 연출했다.
페름 공장에서 10년간 엔지니어로 일한 뒤 전쟁 중 당 기구에 진입했다. 흐루쇼프 시절 탐보프·보로네시·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3개 주에서 1서기를 지내며 지역 산업과 농업을 지휘했고, 보로네시에서는 수확 과시를 위해 들판에 레일을 끌게 한 일화로 유명하다. 1964년 10월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흐루쇼프의 농업 정책과 당 기구 분할을 비판하며 그의 축출에 한몫했다. 이후 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1965~1974)을 거쳐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1974~1987)으로 국가 감독 기구를 13년간 이끌며 브레즈네프 체제의 행정 통제를 담당했다.
1976년, 당대회 보고서 초안을 본 브레즈네프가 격노했다 — 「카피토노프 자신은 아무것도 쓸 줄 모른다. 그런데도 서기다. 그의 지시로 이 잡담을 꾸며낸 것이다. 당장 불러서 뼈저리게 야단쳐라!」 체르냐예프의 일기 속 한 장면이다.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중앙위 서기 겸 조직당사업부장에 올랐고, 이후 21년간 소련 간부 임명 체계 전체를 실무적으로 관장했다.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를 거치며 당 서기국을 지킨 최장수 서기였으나, 정작 정치국원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고 브레즈네프는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정체기 당관료제의 충성 네트워크와 인사 정체를 가장 오래 떠받친 기술자형 인사관리자다.
1970년, 아무런 외교 경력도 없던 레닌그라드 당 수장이 갑자기 주중 대사로 발령받았다. 브레즈네프는 그의 독립적 성향과 전쟁 영웅으로서의 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전후 레닌그라드 복구사업에 투신했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로 발탁되어 1965년 경제개혁의 도시 적용을 주도하고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1970년 느닷없이 주중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는데, 이는 그의 독자적 권위를 견제하려는 브레즈네프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로 평가된다. 외교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베이징에서 중소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무적 대화 통로를 유지했으며, 이후 주네덜란드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1956년 10월 타슈켄트 제1차 우즈베크 지식인대회에서 소련 최초로 스탈린 시기 대량 탄압의 실상과 피해자 이름을 공개석상에서 밝혔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우즈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통신으로 협동조합대학을 졸업하고 붉은군대에서 정치·무선정찰 장교로 복무하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전후 우즈베키스탄 당에서 급속히 승진해 1955년 우즈베크 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57년 중앙아시아 출신 최초로 CPSU 프레지디움 정위원 겸 중앙위 서기에 올랐다. 흐루쇼프 해빙기 동안 우즈베크 내 대규모 정치 재활, 강제이주 민족 귀환, 타슈켄트 핵물리연구소 설립을 주도하며 민족정책을 현장에서 실행했다. 1961년 흐루쇼프와의 정책적 이견으로 중앙직을 떠난 뒤 시리아 대사 등을 지내고 90세로 사망했다.
1961년 10월, 모스크바 시당 국 회의에서 데미체프는 단호히 말했다. '스탈린의 시신을 마우솔레움에 두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며칠 뒤 10월 31일 밤, 시신은 비밀리에 옮겨져 크렘린 벽 아래 묻혔다.
흐루쇼프의 보좌관에서 출발해 24년간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낸 핵심 이념 관료였다. 1961년 스탈린 시신의 마우솔레움 철거를 직접 발의한 탈스탈린화의 주역이었으나, 브레즈네프기 문화장관으로서는 보수적 통제를 행사했다.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면서도 글라주노프·솔로우힌 같은 향토주의 문인들을 후원하는 복합적 면모를 지녔으며, 소련 말기까지 문화·이념 영역의 핵심 관리자로 남았다.
1978년 4월 농업 전원회의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농업 담당 정치국원 겸 서기인 쿨라코프를 위원회에조차 넣지 않았다. 석 달 뒤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농민 출신으로 농업 전문가 경로를 밟아 올라온 당 간부로, 1965년부터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를 맡으며 브레즈네프·수슬로프·키릴렌코와 함께 서기국과 정치국을 겸한 4인 중 하나였다. 스타브로폴 제1서기 시절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발탁해 후원했으며, 1971년 정치국 위원에 오른 후 서방 분석가들은 그를 유력한 후계자로 꼽았다. 그러나 1978년 농업 정책을 둘러싼 당내 비판 속에 급서하면서 그의 서기국 자리는 고르바초프에게 넘어갔고, 이는 소련 지도부 세대교체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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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탐보프 주 사탕무 국영농장 조수, 펜자 주 사탕공장 농업기사
1941–1944펜자 주 지구 콤소몰 제1서기, 지구 집행위원회 의장, 현급 당위 제1서기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서 연방회의 의장까지, 브레즈네프 체제의 공보 엘리트이자 최고 입법기관의 얼굴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잡자, 톨쿠노프는 한때 중앙위에서 함께 일했던 그에게 신문 복귀를 요청했다. 안드로포프는 『프라우다』를 제안했지만 톨쿠노프는 『이즈베스티야』를 택했다.
철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38년 『프라우다』 기자로 출발한 소련의 언론인·국가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 특파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고, 1960년대 초부터 CPSU 중앙위원회 사회주의국가연락부에서 근무하며 당의 대외 선전 라인을 관리했다. 1965년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 취임해 11년간 신문을 이끌었고, 1976년 노보스티 통신사 사장으로 전출된 뒤 1983년 안드로포프 집권과 함께 『이즈베스티야』로 복귀했다. 1984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88년까지 재임하며 입법부의 제도적 수장 역할을 수행했다.
1973년 출간한 저서에서 "화학공업 없이는 단 하나의 국가적 과제도 최적의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전면적 화학화를 당 노선으로 정당화했다.
모스크바 화학기계공학 연구소를 졸업하고 고스플란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소련 화학공업의 중앙계획과 당적 지도를 아우른 관료이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화학공업부장으로 재임하며 코시긴 개혁기 화학공업 현대화(합성고무·플라스틱·광물비료·석유화학의 대규모 확장)를 당 라인에서 주관했다.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중앙감사위원회 위원으로서 당내 재정·문서 감사 역할을 겸했으며, RSFSR 최고회의 대의원도 3선 지냈다. 그의 저서 『24차 당대회 결정에 비추어 본 화학공업』(1973)은 브레즈네프기 화학공업 정책의 대표적 당 문헌이다.
츠카노프가 말한 '세 개의 못' 원칙: "브레즈네프의 지시는 곧바로 실행하지 않고 상상의 첫 번째 못에 걸어둡니다. 재촉이 오면 두 번째 못으로. 세 번째 못까지 와야 비로소 전화를 들죠. 실제 실행되는 것은 10분의 1도 안 됩니다."
야금 기술자 출신으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수석 보좌관을 20년 가까이 지낸 당 기구의 핵심 인물이다.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업대학을 같은 해 졸업한 브레즈네프와 인연을 맺어, 1958년 중앙위원회 기구에 합류한 뒤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으로 있는 전 기간 동안 그의 비서실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정치국 자료와 지시 사항을 필터링하며 총서기가 접하는 정보의 흐름을 통제했고, 이른바 '세 개의 못' 원칙으로 대변되는 특유의 실용주의로 방대한 관료적 업무를 관리했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매일 브레즈네프를 대면하는 몇 안 되는 인물로서 정체기 소비에트 정치의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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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58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첼랴빈스크 지역 철강 기업에서 근무,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장 주임기사 역임
정치국에서 스탈린이 유리 즈다노프에게 던진 말: "뭐라고, 리센코가 우리 농업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는 걸 모르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이자 스탈린의 사위였던 유리 즈다노프는 1947년 28세의 나이로 중앙위원회 과학부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기 과학 정책의 핵심 관료가 되었다. 1948년 4월, 리센코의 이론을 공개 비판하는 강연으로 스탈린의 분노를 샀고, 정치국에서 질책을 들은 뒤 《프라우다》에 굴복의 편지를 발표해야 했다. 1950년에는 유대인 과학자들을 겨냥한 반유대주의 캠페인에 가담했으나, 스탈린 사후 로스토프 국립대학 총장(1957–1988)으로 31년간 재임하며 이 지방대학을 소련 최상위권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시켰다. 유기화학자로서 800여 편의 논문을 남겼고, 말년에는 북카프카스 과학센터를 이끌며 과학행정가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67년 6월 전원회의 연단에서 브레즈네프의 면전에 '수도의 방공은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 그 순간, 모스크바 시당위원장으로서의 정치 경력은 끝났다.
니콜라이 예고리체프는 1962년부터 1967년까지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를 지낸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그의 재임기 모스크바에서는 대규모 주택 건설로 300만 명 이상이 새 보금자리를 얻었고, 그의 주도로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무명용사 묘가 조성되었으며 트리움프 개선문이 복원되었다. 196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모스크바 방공 체계의 취약성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브레즈네프 지도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콤소몰 그룹'(셸레핀 파벌)의 일원으로 간주되던 그 발언 직후 해임되었다. 이후 덴마크 대사(1970~1984)와 아프가니스탄 대사(1988)를 지내며 소련군 철수 시기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1953년 재검토반의 결론은 명확했다. “의사 사건은 조작되었고, 의사들은 무죄이므로 석방해야 한다.”
니콜라이 메샤체프는 전후 소련의 콤소몰·국가기관·방송을 거친 관료로, 정치적 명령과 사실 조사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1953년 말렌코프의 지시로 의사 사건과 아바쿠모프 사건을 재검토했고, 의사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신속히 판정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훗날 스탈린도 생전에 재검토를 지시했다고 회고했지만, 이 주장은 다른 사료와 함께 검토해야 하는 논쟁적 증언으로 남아 있다. 이후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를 이끌며 오스탄키노 방송센터 건설과 다중 프로그램 방송 확대를 추진했다.
1990년 2월 6일 전원회의에서 사퇴 압박을 받은 리가초프는 '지독하게도 일하고 싶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가 며칠 후 정치국에서 밀려난 것은 아니다.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은 것은 1990년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였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톰스크주 제1서기로 17년간 재임하며 석유·가스 채굴을 키우고 스트레제보이와 케드로비 신도시를 세웠다. 1979년 오비강이 콜파셰보 야르에서 대숙청 희생자 집단매장지를 드러내자 주 당국은 유골과 흔적을 없애려 했고, 그는 관여를 부인했다. 1983년 4월 안드로포프의 발탁으로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기, 1985년 4월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1985~1988년 사실상 제2인자로서 개혁 초기를 뒷받침하고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었으며, 훗날 그 전략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1990년 7월 중앙위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출신으로, 1976년부터 1989년까지 13년간 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아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최종 수문장으로 군림했다. 재임 중 《프라우다》 발행부수는 1,060만 부로 정점을 찍었고, 소련 언론인연맹 의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을 겸하며 당의 공식 입장을 신문 지면에 충실히 구현했다. 1989년 옐친의 음주 의혹을 다룬 이탈리아 기사를 전재했다가 사상 초유의 사과문을 게재하고 해임되었으며, 이는 글라스노스트 시대에 구시대적 편집 노선이 붕괴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자먀틴은 카터 행정부를 향해 '미국은 세계 헌병 역할에 나서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하며, 하피줄라 아민이 CIA 요원이었다는 주장을 소련 고위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공개 제기했다. — FRUS, 1980년 1월 28일
소련의 외교관이자 당 선전 책임자로, TASS 사무총장과 중앙위 국제정보부장을 거치며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의 해외 정보·선전 체계를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의 집필진을 이끌어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말년에는 주영 대사로 부임했다가 1991년 8월 쿠데타를 규탄하기를 거부하여 해임되었다. 냉전기 소련의 대외 이미지와 정보 통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1983년 5월 19일, 온타리오 주 애머스트버그의 유진 웰런 농장. 옥수수와 콩밭 사이 길을 걸으며 야코블레프는 훗날 "조심을 내던졌다"고 말했고, 외교의 어처구니없는 실책들을 털어놓았다. 그 산책 끝에 둘은 개혁의 동지가 되었다.
1923년 12월 2일 야로슬라블현 코롤료보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1년 징집되어 해병여단 소대장으로 볼호프 전선에서 싸우다 1942년 8월 양다리에 중상을 입고 1943년 2월 제대했다. 1944년 당에 입당했고, 1953년 중앙위 기구로 옮겨 1958~59년 컬럼비아대학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1972년 11월 국수주의를 비판한 논설로 당 기구에서 밀려나 1973년부터 10년간 캐나다 대사로 있었다. 1983년 8월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이 되었고, 1985년 선전부장, 1987년 정치국원으로서 글라스노스트를 밀어붙였다. 2005년 10월 18일 오랜 지병 끝에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아무도 고르바초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다음 날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모든 일을 끝내 놓았다. 정치국 규칙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토록 빨랐다! 이미 그들 모두와 비밀리에 거래를 마친 것이다.» — 1985년 3월 체르넨코 사후 승계 과정을 회고하며.
레닌그라드 조선기술자 출신으로, 1970년부터 13년간 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대규모 주택 건설, 지하철 확장, 레닌그라드 원전 및 방조제 착공 등 도시 기반을 재편했다. 군수공업을 관장하는 중앙위 서기와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고,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 모두 그를 차기 서기장 후보로 주목했다. 1985년 체르넨코 사후 고르바초프와의 승계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소련 말기 역사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