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갔고,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 뒤 맨 먼저 리투아니아군에 입대했으며 1919년 1월 1일 빌뉴스 게디미나스 탑에 리투아니아 국기를 올렸다. 1925년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1926년 쿠데타에 맞서다 물러났다. 1927~1930년과 1938~1941년 독일 주재 공사를 지냈다. 1940년 소련 점령 뒤 베를린에서 나치와 손잡고 독립을 되찾으려는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을 세웠고, 1941년 임시정부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독일은 그를 가택연금했다. 1944년 리투아니아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각서를 보냈다가 체포되었다. 전후 미국으로 건너가 의회도서관에서 일했다. 반유대적 글 때문에 그를 기리는 이름 짓기는 논란이 되었다.
팔랑가에서 태어나 1929년 카우나스 군사학교를 마친 포병 장교로, 1936~1938년 프랑스 퐁텐블로의 포병학교에서 공부했다. 1941년 6월 누이의 가족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독일 점령기에는 나치에 복무하지 않으려 전역했다. 1944년 리투아니아 지역방위군에 들어갔고, 붉은군대가 돌아오자 리투아니아 자유군과 파르티잔에 합류해 지휘관으로 올라섰다. 1949년 2월 리투아니아 자유 전사 연합을 세워 의장이 되었고 부대를 통합하고 투쟁의 법적 틀을 마련했다. 1951년 12월 뇌출혈로 마비되었고 1953년 5월 30일 체포되어 모스크바에서 베리야의 심문을 받은 뒤 1954년 부티르카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2009년 리투아니아 제4대 대통령으로 공식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