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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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행정 · 소련 ·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인물 6명

조건 모두 해제

표트르 게르모게노비치 스미도비치

Пётр Гермогенович Смидович
정부·행정 소련 소련 벨라루스 1874–1935 ○ 자연사

세 혁명을 관통한 이스크라 요원, 비로비잔의 국가건설을 설계한 볼셰비키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 소련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공식화한 순간이었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된 후 파리에서 전기공학을 배우고 벨기에 노동당에서 활동했다. 이스크라 요원으로 세 혁명을 관통했고, 10월 혁명기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자 모소베트 의장을 지냈다. KOMZET 위원장으로 유대인 자치주 비로비잔 실험을, 북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북방 소수민족 정책을 설계했다.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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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페테르부르크 혁명활동
  • 1902–1905이스크라 요원, 우만 지하인쇄소 공동 조직, 세 혁명 참여
  • 1917–1918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VTsIK 간부,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 1921안토노프 봉기·크론시타트 진압 참여
  • 1924–1935KOMZET 위원장: 유대인 자치주(비로비잔) 기획·추진
  • 1924–1935북방위원회 위원장: 북방 소수민족 행정·경제 기반 수립
  • 1933–1935VTsIK 자연보호구위원회 위원장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 라코바

Нестор Аполлонович Лакоба
정부·행정 소련 소련 그루지야 1893–1936 ✕ 독살

스탈린의 절친에서 베리야의 첫 희생자로: 압하지야의 붉은 군주

스탈린이 라코바에게 했다는 말 — '나는 코바, 너는 라코바.' 1936년 12월 27일 밤, 베리야의 저택에서 저녁 식사 후 극심한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운전기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베리야가 나를 죽였다'고 속삭였다고 증언한다.

압하지야 볼셰비키 지도자로,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압하지야를 통치하며 농업과 흑해 휴양지 개발을 추진했다. 스탈린의 절친이었으나 베리야에게 독살되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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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티플리스 신학교에서 혁명 선동으로 제적, 바투미에서 RSDLP(b) 입당
  • 1917–18압하지야 농민 무장대 '키아라즈' 조직, 수후미 군사혁명위 부의장
  • 1920–21바투미 지하 볼셰비키 조직 지도, RSFSR-터키 모스크바 조약 협상 참여
  • 1922–30압하지야 SSR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 1930–36압하지야 ASSR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투라르 리스쿨로비치 리스쿨로프

Турар Рыскулович Рыскулов
정부·행정 소련 소련 카자흐스탄 1894–1938 ✕ 처형

통합 투르키스탄을 주장한 카자흐인 볼셰비키 전략가, 민족 획정에 맞선 목소리

1923년 6월, 스탈린이 '범튀르크주의'라고 비난하자 리스쿨로프는 연단에서 반박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동지 스탈린이 술탄갈리예프를 혁명적 공산주의자라고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편의입니다."

카자흐인 볼셰비키 혁명가로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핵심 지도자였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어권 민족들이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민족 획정에 맞섰고, 1923년 제4차 민족공화국 간부회의에서 '범튀르크주의'라는 비난을 공개 반박했다. 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1926~1937)으로 투르크시브 철도와 카라간다 중공업 단지를 추진했으며, 1932~1933년 카자흐 대기근 때 스탈린에게 직서해 골로쇼킨의 강제집산화가 낳은 참상을 알리고 식량 원조를 이끌어냈다.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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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4메르케 러시아-카자흐 기숙학교 → 피슈페크 농업학교 졸업
  • 1916–1917중앙아시아 민족해방봉기 참가, 체포; 타슈켄트 사범학교 수학; 메르케에서 카자흐 청년 혁명조직 '부하라' 창설
  • 1919투르키스탄 공산당 무슬림국(Мусбюро) 의장
  • 1920.1–8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9바쿠 동방민족대회 대표; '동방행동평의회' 간부 선출
  • 1921–1922RSFSR 민족인민위원부(Наркомнац) 전권대표(아제르바이잔) → 부위원
  • 1922–1924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통합 투르키스탄론 주창, 1923년 스탈린과 공개 논쟁
  • 1924–1925코민테른 전권대표로 몽골 인민공화국 파견
  • 1926–1937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투르크시브 철도·카라간다 산업화 주도, 1932–1933년 카자흐 기근 구호 개입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랴시코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Ляшко
정부·행정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915–2002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우크라이나 정부를 15년간 이끈 도네츠크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관리자

«폭발이 중앙 당국에 보고된 것은 몇 시간 이내였지만, 사태의 전모는 이틀이 지나서야 분명해졌습니다.» — 1986년 5월 8일 키예프 기자회견에서 체르노빌 초기 대응의 정보 지연을 설명하며.

도네츠크 공업지대에서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한 랴시코는,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공화국 경제를 총괄했다. 15년의 임기는 이 직책 사상 최장기 재임이었으며, 브레즈네프 안정기 전체와 페레스트로이카 출범기를 관통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에는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사고 수습을 지휘했으며, 사고 발생 수 시간 내에 중앙에 보고했으나 전모 파악에는 이틀이 걸렸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셰르비츠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당·정을 분담하며 중앙의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는 제도적 안정성을 대표했고, 퇴임 후에는 4권의 회고록 《기억의 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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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하리코프 전차학교 졸업, 전차소대장으로 북캅카스 전선 참전, 이후 사마르칸트 전차학교 교관
  • 1945–1952노보크라마토르스크 기계제작공장 기술자·부공장장·당조직자
  • 1952–1954크라마토르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4–1960스탈리노(도네츠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 1960–1963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3–196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공업건설국 의장
  • 1966–196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9–1972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부의장
  • 1972–1987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86체르노빌 원전 사고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

티혼 야코블레비치 키셀료프

Тихон Яковлевич Киселёв
정부·행정 소련 소련 벨라루스 1917–1983 ○ 암

벨라루스 20년 총리에서 당 제1서기로 올랐다가 2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실무자

그는 민스크 메트로 아이디어에 매달려 모스크바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훗날 그가 직접 첫 돌을 놓았다.

고멜의 옛신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어·문학 교사로 출발한 키셀료프는, 1959년부터 거의 20년간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공업화를 주도한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민스크 메트로와 즐로빈 제철소를 모스크바 관료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해 관철시켰으며, 1978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마셰로프의 후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복귀했다. 개혁보다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으나, 취임 2년여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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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1옐스크 지역 중학교 벨라루스어·문학 교사
  • 1941–1944스탈린그라드주 크라스냔스크 학교 교장 (대피)
  • 1944–1952고멜 주당위 지도원 →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2–1955브레스트 주당위 제1서기
  • 1955–1959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59–1978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78–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0–1983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후보위원

아야즈 니야지 오글루 무탈리보프

Ајаз Нијази оғлу Мүтәллибов

연방 재편과 독립 사이에 선 마지막 소비에트 지도자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신연방조약을 지지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는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관료에서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올라선 정치가였다. 1991년 노보오가료보 9+1 회의에서 그는 공화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며,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자치공화국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카라바흐 전쟁과 국내 권력투쟁 속에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92년 축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2년 귀국했고 2022년 바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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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1977바쿠 냉장고 공장장, 바쿠 전기생활용품 생산회사 총괄
  • 1977–1979바쿠 나리마노프구 당위원회 제2서기
  • 1979–1982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지방산업장관
  • 1982–1989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국가계획위원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0–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 1991–1992아제르바이잔 초대 대통령
  • 1992–2012축출 뒤 모스크바 망명, 2012년 귀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