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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이반 니키토비치 코제두프

Иван Никитович Кожедуб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20–1991 ○ 심장마비

연합군 최고 격추 기록의 소련 전투기 에이스

「단련되지 않은 용기는 빈 총알일 뿐이다」 — 『조국에 대한 충성』에서.

64대를 격추한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의 전투기 에이스로, 330회 출격·120회 공중전을 치르며 단 한 번도 격추되지 않았다. 200~300미터까지 접근해 명중시키는 저격술이 트레이드마크였고, 1945년 2월에는 소련 조종사 최초로 Me-262 제트전투기를 격추했다. 한국전쟁에서는 제324전투항공사단장으로 직접 출격이 금지되었으나, 휘하 조종사들이 216대를 격추하고 27대를 손실하는 탁월한 교환비를 기록했다.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부사령관(1964~1971)을 거쳐 1985년 항공원수로 진급했으며, 1990년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군대 비방을 규탄하는 '영웅들의 호소문'을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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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붉은군대 입대, 추후예프 군사항공학교 졸업 후 교관
  • 1943–1945제240전투항공연대 조종사 → 중대장 → 제176근위전투항공연대 부연대장. 64기 격추, 세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9공군사관학교(모니노) 졸업
  • 1951–1952제324전투항공사단장, 한국전쟁 참전 (암호명 '크릴로프')
  • 1956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졸업
  • 1964–1971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제1부사령관
  • 1971–1978공군 전투훈련총국 제1부국장
  • 1985항공원수 진급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레쿤코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Рекунков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검찰을 이끈 법률가, 사하로프에게 추방령을 전달한 검찰총장

1980년 1월 22일, 레쿤코프는 사하로프 앞에서 최고회의 칙령을 낭독했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와 모든 국가 훈장을 박탈하며, 폐쇄도시 고리키로 추방한다.

돈 강 유역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중상을 입은 후 검찰에 투신했다. 로스토프 지역 검사를 거쳐 1976년 소련 검찰 제1부총장, 1981년 루덴코의 후임으로 검찰총장이 되었다. 안드로포프 시기에는 '우즈베크 면화 사건'과 통상부 비리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대규모 반부패 캠페인을 주도했고, 1980년에는 사하로프에게 국가 훈장 박탈과 고리키 추방을 직접 통고했다. 퇴임 후에는 정치적 탄압 피해자 재활 부서에서 일하며 소련 검찰 제도의 복잡한 유산을 몸소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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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46로스토프주 베르흐네돈스코이 지구 검사 보좌관
  • 1947–1952로스토프주 콘스탄티놉스키·아조프 지구 검사
  • 1960–1966브랸스크주 검사
  • 1966–1971보로네시주 검사
  • 1971–1976러시아 SFSR 검찰 제1부검사장
  • 1976–1981소련 검찰 제1부총장
  • 1981–1988소련 검찰총장
  • 1981–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9–1989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 1992–1994러시아 연방 검찰청 정치탄압 피해자 재활부 검사

니콜라이 그리고리예비치 예고리체프

Николай Григорьевич Егорычев

모스크바 당 보스에서 브레즈네프에게 도전했다가 외교관으로 밀려난 인물

1967년 6월 전원회의 연단에서 브레즈네프의 면전에 '수도의 방공은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 그 순간, 모스크바 시당위원장으로서의 정치 경력은 끝났다.

니콜라이 예고리체프는 1962년부터 1967년까지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를 지낸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그의 재임기 모스크바에서는 대규모 주택 건설로 300만 명 이상이 새 보금자리를 얻었고, 그의 주도로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무명용사 묘가 조성되었으며 트리움프 개선문이 복원되었다. 196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모스크바 방공 체계의 취약성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브레즈네프 지도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콤소몰 그룹'(셸레핀 파벌)의 일원으로 간주되던 그 발언 직후 해임되었다. 이후 덴마크 대사(1970~1984)와 아프가니스탄 대사(1988)를 지내며 소련군 철수 시기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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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6모스크바 바우만 구당위원회 서기
  • 1956–1960모스크바 바우만 구당위원회 제1서기
  • 1960–1961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61–1962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2서기
  • 1962–1967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4주덴마크 소련 대사
  • 1988주아프가니스탄 소련 대사

야드가르 사디코브나 나스리디노바

Ядгар Садыковна Насриддинова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즈베키스탄 1920–2006 ↓ 퇴임 1974

우즈베크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크림 타타르인 인권운동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우즈베키스탄에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크림 반도 귀환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우즈베크 공화국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 중앙과 공화국 엘리트의 연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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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1950s우즈베크 공화국 콤소몰·당·국가 행정에서 성장
  • 1959–1970우즈베크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1970–1974민족소비에트 의장, 중앙의 공화국 대표제에서 높은 지위에 오름
  • 1974우즈베크 지도부 교체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퇴임
  • 이후공식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메샤체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Месяцев

조작된 의사 사건을 밝혀낸 관료

1953년 재검토반의 결론은 명확했다. “의사 사건은 조작되었고, 의사들은 무죄이므로 석방해야 한다.”

니콜라이 메샤체프는 전후 소련의 콤소몰·국가기관·방송을 거친 관료로, 정치적 명령과 사실 조사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1953년 말렌코프의 지시로 의사 사건과 아바쿠모프 사건을 재검토했고, 의사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신속히 판정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훗날 스탈린도 생전에 재검토를 지시했다고 회고했지만, 이 주장은 다른 사료와 함께 검토해야 하는 논쟁적 증언으로 남아 있다. 이후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를 이끌며 오스탄키노 방송센터 건설과 다중 프로그램 방송 확대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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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해군 인민위원부·내무인민위원부 특별부·스메르시 수사관
  • 1946–1952전연방 레닌주의 청년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간부
  • 1953국가보안기관 특별중요사건 수사부, 의사 사건 재검토
  • 1955–1959콤소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62–1964중국 주재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공산당 관계 부서 부부장
  • 1964–1970소련 국가텔레비전·라디오방송위원회 위원장
  • 1970–1972오스트레일리아 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2–1988사회과학정보연구원 선임연구원·역사학부장

이반 라브렌티예비치 우스티노프

Иван Лаврентьевич Устинов

브레즈네프 시기 군 방첩의 수장

1941년 포위 중 탈출을 이끌며: "동무들, 나는 군 방첩 요원이다! 내가 돌파를 조직할 것이다. 겁먹고 항복하려는 자는 조국이 내게 준 권한으로 사살하겠다."

소련의 군사방첩 지도자. 의료 교육을 받고 1939년 붉은군대에 입대했으며, 독소전 발발 직전 국가보안기관에 배속되어 전선에서 NKVD 특별부서와 스메르시에서 복무했다. 전후에는 주로 소련군 주독 집단군(GSFG)과 극동군관구에서 군 방첩 요원으로 경력을 쌓았고, 1970년 KGB 제3국장에 올라 소련 전군의 특별부서(오소비스트)를 총괄했다. 1973년 게오르기 치네프 KGB 부의장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뒤 다시 GSFG 특별부서장으로 복귀했으며, 1981년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안보 고문을 지냈다. 퇴역 후 군 방첩사에 관한 회고록을 저술했고 100세까지 생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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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북우랄 NKVD 교정노동수용소 의료진
  • 1941–1945NKVD 특별부서 · SMERSH 작전요원 (서부·발트·벨로루시 전선)
  • 1951–1957주독 소련군 MGB/MVD/KGB 방첩부서 요직
  • 1958–1963KGB 제6근위전차군 특별부서장
  • 1963–1968극동군관구 KGB 특별부서 부국장 → 국장
  • 1968–1970KGB 제3국 부국장
  • 1970–1973KGB 제3국장 (군 방첩 총괄)
  • 1973–1981주독 소련군 KGB 특별부서장
  • 1981–1991국가계획위원회 안보 고문 (KGB 예비역)

예고르 쿠즈미치 리가초프

Егор Кузьмич Лигачёв

페레스트로이카 안의 보수적 제2서기

1990년 2월 6일 전원회의에서 사퇴 압박을 받은 리가초프는 '지독하게도 일하고 싶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가 며칠 후 정치국에서 밀려난 것은 아니다.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은 것은 1990년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였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톰스크주 제1서기로 17년간 재임하며 석유·가스 채굴을 키우고 스트레제보이와 케드로비 신도시를 세웠다. 1979년 오비강이 콜파셰보 야르에서 대숙청 희생자 집단매장지를 드러내자 주 당국은 유골과 흔적을 없애려 했고, 그는 관여를 부인했다. 1983년 4월 안드로포프의 발탁으로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기, 1985년 4월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1985~1988년 사실상 제2인자로서 개혁 초기를 뒷받침하고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었으며, 훗날 그 전략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1990년 7월 중앙위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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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85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 1985–90제2서기, 페레스트로이카 내부 보수파
  • 1990제28차 당대회에서 실각

바딤 스테파노비치 티쿠노프

Вадим Степанович Тикунов

흐루쇼프기 RSFSR 경찰을 이끈 셸레핀계 내무장관

「나는 곧바로 알아챘다 — 더 가까운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물론 그랬다.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1966년 연방 MOOP 수장 자리에서 밀려난 뒤.

바딤 티쿠노프는 셸레핀의 콤소몰 인맥을 타고 KGB 부의장(1959~1961)을 거쳐 러시아공화국 내무장관(1961~1966)을 지낸 소비에트 국가보안·내무 관료다. 흐루쇼프가 연방 MVD를 폐지한 공백기 속에서, 그는 RSFSR 치안 체계를 실질적으로 이끌며 경찰의 날 제정, 무임승차권, 그리고 소련 경찰 사상 처음으로 고무곤봉·수갑·최루가스 도입을 관철했다. 1966년 브레즈네프가 연방 MOOP을 부활시키며 측근 니콜라이 셸로코프를 수장으로 앉히자 밀려났고, 이후 상부볼타·카메룬 대사로 좌천되었으며 재임 중 야운데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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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7콤소몰 악퇴빈스크 지역위원회 서기 → 에스토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47–1952블라디미르주 콤소몰 제1서기 → 블라디미르 시·주 당위원회 서기
  • 1952–1959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국가보안 담당 섹터장 → 부부장
  • 1959–1961소련 KGB 부의장
  • 1961–1966RSFSR 내무장관 (1962년부터 공공질서수호장관)
  • 1967–1969CPSU 중앙위원회 해외여행위원회 위원
  • 1969–1974주 루마니아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74–1978주 상부볼타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8–1980주 카메룬 소련 특명전권대사

안드레이 드미트리예비치 사하로프

Андрей Дмитриевич Саха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1–1989 → 유형 1980

수소폭탄을 만들고, 체제에 등을 돌린 물리학자

1986년 12월 15일 고리키의 아파트에 전화가 놓였고, 다음 날 고르바초프가 직접 전화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오십시오." 사하로프는 감사 인사와 동시에 정치범 석방을 꺼냈다. 7년 가까운 유형이 끝났지만 그는 양심의 의제를 내려놓지 않았다.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이자, 그 특권을 내려놓은 양심. 결정적 이탈은 1967년 7월 21일 미사일방어 배치에 반대한 비밀 서한과, 1968년 5월 완성되어 지하 출판으로 유통된 「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에 관한 성찰」을 거치며 이루어졌고, 그 후 무기 연구에서 배제되었다. 그해 8월 체코슬로바키아 진입도 비판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판하다 1980년 고리키로 유형당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의 전화 한 통으로 돌아와, 인민대의원 자격으로 연단에서 싸우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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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53수소폭탄 개발 참여, 1953년 실험 성공
  • 195332세에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1대기권 실험 반대를 흐루쇼프에게 직접 진언
  • 1968『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 지하 유통
  • 1975노벨평화상(출국 불허, 아내가 대리 수상)
  • 1980–86고리키 유형
  • 1989인민대의원, 12월 사망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비노그라도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Виноградов

1973년 전쟁과 이란 혁명을 내부에서 목격한 소련 중동 외교관

1979년 6월, 호메이니는 비노그라도프를 불러 직접 경고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아프가니스탄 무슬림들에게 가하는 일을 보고 있다. 소련은 이슬람에 적대적이다."

무역 외교에서 출발해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중동 외교의 핵심 현장을 두루 거친 외교관이다. 주일 대사와 외무차관을 지낸 뒤, 1970년 이집트 대사로 부임하여 나세르 말기부터 사다트의 서방 전환기까지 카이로에 주재했고, 1973년 10월 전쟁 당시 소련의 대응을 현장에서 조율했다. 1977년 이란 대사로 테헤란에 도착한 지 2년 만에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을 목격했으며, 호메이니와의 긴장된 대면을 통해 혁명 정권과 소련의 복잡한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외무장관으로 8년간 재임하며 소련 외교의 제도적 연속성을 유지했고, 퇴임 후에도 중동 평화정착을 위한 비공식 채널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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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3붉은 군대 복무
  • 1948–1950주영 소련 무역대표부 부장
  • 1950–1952주영 소련 무역대표부 부대표
  • 1952–1956대외무역부 대서방무역국 부국장
  • 1956–1962대외무역부 대서방무역국장
  • 1962–1967주일 소련 대사
  • 1967–1970소련 외무차관
  • 1970–1974주이집트 소련 대사
  • 1974–1977소련 외무부 특명대사
  • 1977–1982주이란 소련 대사
  • 1982–1990러시아공화국 외무장관
  • 1990–1997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 강의, 중동평화위원회 위원장

빅토르 게오르기예비치 쿨리코프

Виктор Георгиевич Кули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1–2013 ○ 자연사

12년간 바르샤바 조약군을 지휘한 최장수 총사령관

1941년 6월 중순, 폴란드 접경 블라디미르볼린스크의 하숙집 주인이 갓 임관한 쿨리코프 중위에게 말했다. "중위님, 저쪽에서 그러는데 22일에 전쟁이 시작된답니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전차장교로 대조국전쟁의 첫날부터 베를린까지 싸웠다. 1971년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에 올라 소련군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냉전 후기 동구권 군사 교리를 총괄했다. 1981년 폴란드 계엄령 위기 당시 소련 군사 개입을 반대해 역사의 분수령에 섰다. 소련 원수, 영웅 칭호와 레닌상을 받았으며, 퇴역 후 러시아 하원의원으로 베테랑 복지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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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붉은 군대 입대, 그로즈니 보병학교에서 훈련
  • 1941–1945전차부대 소대장·중대장에서 제143전차여단 참모장까지, 모스크바~베를린 전역 참전
  • 1953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기계화연대·사단장 역임
  • 1959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5근위전차군 부사령관
  • 1964제6제병연합군 사령관 (레닌그라드 군관구)
  • 1967–1969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9–1971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71–1977소련군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 1977–1989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 겸 국방제1차관
  • 1999–2003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통합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

아나톨리 세르게예비치 체르냐예프

Анатолий Сергеевич Черняев

고르바초프의 펜이자 양심: 신사고 외교의 설계자

1989년 11월 10일 일기, 베를린 장벽 붕괴에 대하여: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사회주의 체제 역사의 한 시대 전체가 끝났다. 이것이 고르바초프가 해낸 일이다.」 출처: 고르바초프 재단 문서고, 국가안보문서보관소 번역.

1921년 5월 25일 모스크바(마리나 로샤)에서 태어나 2017년 3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41년 7월 붉은군대에 지원해 북서전선에서 발트 해방 작전에 참전했고 1945년 제대했다.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58–1961년 프라하에서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1961년 중앙위 국제부에 들어가 1986년 3월부터 1991년까지 고르바초프의 외교 보좌관으로 일했고, 1989–1991년 인민대의원을 지냈다. 1992년부터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문서 사업을 이끌었다. 학위 연도와 국제부 부부장 재임 시기는 사료 간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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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6붉은군대: 1941년 7월 지원 입대, 제1충격군 소속 북서전선 참전, 부상, 1945–1946년 제대
  • 1938–1950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1938–1941 재학, 1947–1949 복학 후 대학원); 1950년 후보학위 논문 방어
  • 1950–1958모스크바대학 근현대사 강의, 학과장 대리
  • 1958–1961프라하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편집위원
  • 1961–1986중앙위 국제부: 포노마료프 밑의 담당관에서 부부장으로(러시아어 위키백과·RGASPI는 1970–1986년, NSA는 1972–1985년으로 기록)
  • 1986–1991고르바초프 외교정책 보좌관: 정상회담 실무, 연설문, 신사고 외교 설계
  • 1992–2011고르바초프 재단: ‘페레스트로이카 문서사’와 ‘페레스트로이카 외교정책’ 사업; 1992–2011년 재직

표트르 스테파노비치 플레샤코프

Пётр Степанович Плешаков

소련 전파전자전의 설계자

1972년 헬싱키 SALT I 회담에서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 측에 '우리 미사일은 당신들 미사일방어 체계를 버터 자르듯 뚫고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고, 미국은 곧바로 조약에 서명했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소련 라디오공업부 장관을 지낸 군수 행정가로, 소련 전파전자전(RЭБ)과 방공 레이더 체계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했다. TsNII-108 소장 시절 소련 최초의 광대역 항공 자동 무선정찰 스테이션 '롬-1'과 대레이더 수동탐지 유도 미사일 체계를 개발했으며, 장관으로서 탄도미사일의 미사일방어 돌파용 전자대응책과 우주 조기경보 시스템을 총괄했다.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응하는 '반SDI'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냉전기 전자전 경쟁의 핵심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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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5붉은군대 통신연구소(NIIIS) 기술자, 제3벨로루시·자바이칼 전선 파견
  • 1945–1950TsNII-108 선임연구원·연구실장
  • 1950–1952소련 군부 제5총국(무선정찰·전파방해) 장교, 한국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두 차례 파견
  • 1952–1958TsNII-108 부서장·섹터장, '롬-1' 정찰 스테이션·대레이더 미사일 유도 체계 개발
  • 1958–1964TsNII-108 소장, 공병대령
  • 1964–1968국가무선전자위원회 부위원장, 라디오공업 차관
  • 1968–1974라디오공업부 제1차관
  • 1974–1987라디오공업부 장관, 대장 진급

게오르기 니키토비치 볼샤코프

Георгий Никитович Больша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인 1922–1989 ○ 사망

흐루쇼프와 케네디 사이의 비밀 배후 채널을 운용한 GRU 장교

로버트 케네디는 회고록에서 볼샤코프가 전한 흐루쇼프의 '방어용 무기' 보증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거짓의 직물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썼다.

모스크바 출신의 GRU 장교. 1951년 TASS 특파원으로 첫 미국 파견을 시작해, 1959년부터는 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에서 활동했다. 1961년 5월 프랭크 홀먼의 주선으로 로버트 케네디를 만난 이후 약 1년 반 동안 50여 차례 독대하며 흐루쇼프-케네디 간 비밀 배후 채널을 운용했고, 베를린 위기와 쿠바 미사일 위기 국면에서 소련의 의도를 백악관에 전달하는 핵심 창구였다. 쿠바 위기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소련의 쿠바 군사 지원이 순수 방어용이라고 거듭 보증했으나, 미사일 발사대가 적발되며 신뢰가 붕괴되었고 1962년 12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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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군사 통역 장교, 연대 통역 및 사단 정보과 보좌관으로 카렐리야·북서 전선에서 복무
  • 1943–1950고등정보학교 및 군사외교 아카데미에서 수학
  • 1951–1955TASS 특파원 신분으로 뉴욕·워싱턴 주재 (첫 미국 파견)
  • 1955–1957주코프 국방장관 특별임무 장교
  • 1957–1959GRU 중앙기관 선임 장교
  • 1959–1962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 주재, 로버트 케네디와 약 50회 비밀 접촉
  • 1962–1989노보스티 통신사 근무, 잡지 「소비에트 연방」 편집장 역임

빅토르 그리고리예비치 아파나시예프

Виктор Григорьевич Афанасьев

프라우다 최장기 편집장이자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수문장

그는 우리 역사의 더러운 빨래를 들추어볼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출신으로, 1976년부터 1989년까지 13년간 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아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최종 수문장으로 군림했다. 재임 중 《프라우다》 발행부수는 1,060만 부로 정점을 찍었고, 소련 언론인연맹 의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을 겸하며 당의 공식 입장을 신문 지면에 충실히 구현했다. 1989년 옐친의 음주 의혹을 다룬 이탈리아 기사를 전재했다가 사상 초유의 사과문을 게재하고 해임되었으며, 이는 글라스노스트 시대에 구시대적 편집 노선이 붕괴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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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53적군 복무, 공수부대 및 SMERSH 방첩 장교
  • 1953–1960첼랴빈스크 사범대학 철학 강사·학과장
  • 1960–1968CPSU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 1968–1974《프라우다》 부편집장·제1부편집장
  • 1974–1976《콤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9《프라우다》 편집장 (역대 최장기)
  • 1976–1990소련 언론인연맹 의장, 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0–1994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주임연구원

무함메트나자르 가푸로비치 가푸로프

Мухамедназар Гапурович Гапур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투르크메니스탄 1922–1999 ○ 자연사

16년간 브레즈네프 시대 투르크메니스탄을 이끌며 면화·가스 경제를 통합한 공화국 지도자

1943년 2월 26일, 북서전선에서 상급병사 가푸로프는 총알이 다리를 꿰뚫고 파편 세 개가 오른팔을 찢는 중상을 입었다. 그 부상이 그를 교단에서 당 기구로 밀어 올린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차르조우 근처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투르크멘 당 간부로, 1941년 징집되어 북서전선에서 자동소총 분대장으로 싸우다 1943년 2월 중상을 입고 제대했다. 이후 콤소몰과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63년 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1969년 12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그의 재임기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 개발과 관개 농업 확장이 본격화된 시기로, 공화국은 소련의 면화·에너지 경제에 깊숙이 편입되었으나 동시에 지역 간 파벌 경쟁과 족벌주의도 심화되었다. 1985년 12월 고르바초프가 면화 부패 스캔들을 이유로 그를 전격 해임했고, 이후 회고록을 집필하다 1999년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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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차르조우주 8년제 학교 교사
  • 1941–1943소련군 자동소총 분대장, 북서전선 참전, 중상으로 제대
  • 1943–1944학교 교무주임·교장, 차르조우주
  • 1944–1947차르조우 지역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48–1951차르조우주 콤소몰 제1서기
  • 1951–1955투르크멘 SSR 콤소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2차르조우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62–1963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63–1969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
  • 1969–1985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1–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1966–1971 후보위원)

니콜라이 겐나디예비치 바소프

Николай Геннадиевич Бас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2–2001 ○ 자연사

메이저와 레이저의 기초를 세우고 양자전자공학을 미사일 방어로 확장한 노벨상 물리학자

1985년, 미국의 SDI 계획에 맞서 바소프는 "소련이 제안된 어떤 기술에도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냉전 말기의 기술 경쟁에서 노벨상 수상자의 말은 단순한 과학적 견해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일부였다.

소련의 라디오물리학자이자 양자전자공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1952년 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와 함께 암모니아 분자빔을 이용한 전자기파 증폭·발진 원리를 확립했고, 1954년 최초의 메이저를 제작했다. 이후 3준위 레이저, 반도체 레이저, 고출력 가스·화학 레이저로 연구를 확장했으며, 레이저 핵융합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제안했다. 이 공로로 1964년 프로호로프, 찰스 타운스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부터 15년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을 맡으며 소련 레이저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고, 그의 연구는 소련의 미사일 방어 계획에 직접 기여했다. 1985년 미국의 SDI 구상에 대해 소련도 동등한 기술력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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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붉은 군대 징집, 쿠이비셰프 군사의학아카데미 입교
  • 1943–1945제1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야전 군의관 보조로 복무
  • 1945–1950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MEPhI) 입학 및 졸업
  • 1950–1953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대학원생, 1953년 이학후보 학위
  • 1956이학박사 학위 취득, 논문 「분자 발진기」
  • 1958–1972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부소장
  • 1959프로호로프와 함께 레닌상 수상
  • 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3FIAN 양자라디오물리학 연구실 창설 및 초대 실장
  • 1964노벨 물리학상 수상 (프로호로프, 타운스와 공동)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7–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 1969첫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73–1988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
  • 1974소련 최고회의 연방회의 대의원 (제9~11기)
  • 1982두 번째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89소련 국가상 수상

바딤 알렉세예비치 키르피첸코

Вадим Алексеевич Кирпиченко

소련 대외정보 작전을 12년간 지휘한 KGB 제1총국 부국장

1979년 12월 카불, 슈토름-333 작전 개시 후 상황을 전혀 몰랐던 주아프간 소련 대사 타베예프가 전화로 해명을 요구하자, 키르피첸코는 "지금 너무 바빠서 통화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끊었다.

키르피첸코는 KGB 제1총국(대외정보)의 첫 번째 부국장으로서 1979년부터 소련 붕괴까지 12년간 소련의 해외 첩보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다. 모스크바 동양학대학 아랍어과를 수석 졸업한 후 1954년 이집트 부주재관으로 정보 경력을 시작했으며, 수에즈 위기와 욤키푸르 전쟁을 카이로 현장에서 목격했다. 1979년 12월에는 카불에 직접 파견되어 하피줄라 아민 축출 작전의 정보 부문을 지휘했고, 이후 고르바초프 시기 글라스노스트가 외국 정보기관의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은퇴 후 6권 분량의 《러시아 대외정보사》 편찬을 주도하며 소련 정보기관의 공식 기억을 정리하는 작업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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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46제103근위소총사단 복무 (헝가리·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전선)
  • 1947–1952모스크바 동양학대학 아랍어과
  • 1952–1953KGB 제101정보학교
  • 1953–1954KGB 제1총국 동방부
  • 1954–1960KGB 주이집트 부주재관
  • 1962–1964KGB 주튀니지 주재관
  • 1967–1970KGB 제1총국 아프리카부장
  • 1970–1974KGB 주이집트 주재관
  • 1974–1979KGB 제1총국 부국장 겸 'S'국장 (비합법정보)
  • 1979–1991KGB 제1총국 제1부국장
  • 1988–1989KGB 제1총국장 권한대행
  • 1991–1997러시아 대외정보국(SVR) 고문단장

올레그 겐리호비치 이바놉스키

Олег Генрихович Ивановский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22–2014 ○ 자연사

초기 우주선의 조립과 시험을 이끈 설계자

가가린은 해치 수리를 마친 이바놉스키에게 말했다. ‘그때 네 얼굴을 봤어야 해, 녹슨 금속의 온갖 색이 지나가더군.’

올레그 이바놉스키는 전쟁 경험 뒤 로켓·우주기술 설계자가 되어 소련 우주계획의 초기 체계를 현장에서 구현했다. 그는 미하일 호먀코프의 대리로 스푸트니크 1호의 조립과 시험을 이끌었고, 이어 달·행성 자동정거장과 보스토크 유인우주선 개발을 담당했다. 가가린의 첫 비행을 준비한 뒤 라보치킨 설계국에서 달 탐사와 행성 연구용 기체를 지휘했으며, 은퇴 후에는 우주기술 박물관에서 그 역사를 보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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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붉은군대 국경·기병부대 복무, 대조국전쟁 참전
  • 1947–1954NI-88 기술자·선임기술자, 모스크바 동력공학대학 졸업
  • 1954–1957OKB-1 설계자, 초기 인공위성 개발
  • 1957–1961스푸트니크 1호·2호 및 달 탐사선 설계 책임, 보스토크 수석설계자
  • 1961–1965소련 각료회의 군산문제 국가위원회 우주부문장
  • 1965–1983라보치킨 설계국 달·행성 부문 부총괄·총괄설계자
  • 1983–2014라보치킨 우주기술박물관장 및 과학고문

레오니트 미트로파노비치 자먀틴

Леонид Митрофанович Замятин

브레즈네프 체제의 정보 설계자

자먀틴은 카터 행정부를 향해 '미국은 세계 헌병 역할에 나서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하며, 하피줄라 아민이 CIA 요원이었다는 주장을 소련 고위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공개 제기했다. — FRUS, 1980년 1월 28일

소련의 외교관이자 당 선전 책임자로, TASS 사무총장과 중앙위 국제정보부장을 거치며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의 해외 정보·선전 체계를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의 집필진을 이끌어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말년에는 주영 대사로 부임했다가 1991년 8월 쿠데타를 규탄하기를 거부하여 해임되었다. 냉전기 소련의 대외 이미지와 정보 통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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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6모스크바 항공대학·고등외교학교 졸업, 외무부 입부
  • 1946–1962외무부에서 UN·IAEA 대표부 근무, IAEA 상임대표 역임
  • 1962–1970외무부 공보국장, 대외 발표와 언론 브리핑 총괄
  • 1970–1978TASS 사무총장, 소련 공식 통신사의 수장
  • 1978–1986중앙위 국제정보부장, 당의 대외 선전·정보 활동 총괄
  • 1978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 집필진 지휘, 레닌상 수상
  • 1986–1991주영 소련 대사, 8월 쿠데타 규탄 거부로 해임

조야 아나톨리예브나 코스모데먄스카야

Зоя Анатольевна Космодемьянская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1941 ✕ 처형

소련 최초의 여성 영웅, 18세에 교수대에서 「스탈린이 올 것이다」를 외친 파르티잔

목에 올가미가 걸린 채 조야는 외쳤다: 「작별이에요, 동지들! 싸우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스탈린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스탈린이 올 것입니다!」

소련의 가장 상징적인 전쟁 영웅 중 한 명. 1941년 10월 고등학생 신분으로 자원입대해 서부전선 사령부 직속 정찰·방화 공작부대 9903에 배속되었고, 독일군 후방에서 도로 매설과 통신선 절단 임무를 수행했다. 11월 27일 페트리셰보 마을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가옥 세 채에 방화한 뒤 이튿날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단 한마디도 불지 않았고, 11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프라우다』 기자 표트르 리도프의 취재로 전모가 알려지자 스탈린은 "인민의 영웅"이라 칭했고, 1942년 2월 여성 최초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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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콤소몰 가입
  • 1941.10고등학생 신분으로 자원입대, 서부전선 정찰·방화 부대 9903 배속
  • 1941.11.4–17볼로콜람스크 방면에서 도로 매설·통신선 절단 임무 수행
  • 1941.11.27페트리셰보 마을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가옥 3채 방화
  • 1941.11.28–29체포·고문 후 교수형 — 가명 「타냐」만 대고 끝까지 신원을 밝히지 않음
  • 1942.2.16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수여 (여성 최초, 추서)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글루시코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Глушк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1982 ○ 병사

OGAS라는 전국 실시간 네트워크로 계획경제를 관리하려 한 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1964년 코시긴이 OGAS 비용을 묻자 글루시코프는 200억 루블과 3차 5개년 계획을 답했다. 경제학자들은 '개혁에는 결의문 인쇄용 종잇값밖에 안 들고 결과는 더 좋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코시긴은 시장 개혁을 택했고, 소련은 컴퓨터로 계획경제를 구할 기회를 잃었다.

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1962년 키예프 사이버네틱스 연구소를 창설하고, 실시간 컴퓨터 네트워크 OGAS로 전국 경제의 최적 계획을 구상했다. 당 관료들은 통제권 상실을 우려해 이를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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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로스토프 대학 졸업, 우랄 산림공과대학 교편
  • 1951–1955물리수학 박사 (모스크바 대학) — 힐베르트 제5문제 연구
  • 1956–1962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계산센터 소장 — MESM 실험실 계승
  • 1962–1982사이버네틱스 연구소 창설 소장 겸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63–1982국가과학기술위 산하 전산기술·경제수학 도입 위원회 의장
  • 1966–1982키예프 대학 이론사이버네틱스 학과장, 사이버네틱스 학부 공동 창설
  • 1967–1982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키예프 분과 창설·지도
  • 1971–1982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제8~10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수탸긴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Сутяг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23–1986 ○ 자연사

미그 앨리의 최고 득점 소련 에이스

1951년부터 1952년까지 한국 상공에서 149회 출격해 22승을 기록했다.

니콜라이 수탸긴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련 전투기 조종사로, 제트전투기 시대의 대표적 에이스가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그-15를 몰며 149회 출격과 66회 공중전을 기록했고, 소련 자료 기준 22대의 항공기를 격추해 소련군 조종사단의 전투 성과를 상징했다. 그의 전과는 냉전 초기 소련이 조선 상공에 비밀리에 개입한 현실과, 공중전의 승리 기록이 자료와 교전 당사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긴장을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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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붉은군대 징집, 체르니고프 군사비행학교 조종사 과정
  • 1942–1947제5전투항공연대 조종사·편대장, 극동전선
  • 1945소련·일본 전쟁과 만주 전략공세에 참전
  • 1947–1951제17전투항공연대, MiG-15 전투기 전환
  • 1951–1952한국전쟁, 제17전투항공연대 부대 지휘·전술 담당, 22승
  • 1956–1964군사·총참모부 아카데미 수학, 교육부대 지휘
  • 1964–1978하르키우 항공학교장, 공군 지휘관, 베트남 항공 군사고문
  • 1978항공 소장으로 전역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아흐로메예프

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Ахроме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1991 ✕ 자살

INF 조약을 협상한 소련군 원수, 제국의 종말을 견디지 못하다

INF 사찰 대상으로 플로리다 올랜도의 공장을 제안한 아흐로메예프에게 조지 슐츠가 '거긴 디즈니랜드입니다!'라고 외치자, 그는 '그럼 사찰단이 디즈니랜드도 좀 구경하게 하시죠'라고 답했다.

1923년 러시아 탐보프주 빈드레이 마을에서 태어나 1983년 소련 원수, 1984~88년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을 지낸 군인이다. 레닌그라드에서 생도로 참전해 부상과 동상을 입은 뒤 기갑 병과로 전환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의 작전 계획 수립에 관여했다. 고르바초프의 군사 파트너로서 INF 조약 등 군축 협상을 뒷받침했으나 군사개혁과 일방적 감축에 반발해 사임했고, 이후 대통령 군사고문으로 일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유서에는 평생을 바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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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5모스크바 제1해군특별학교 졸업, 해군생도로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해 부상·동상. 전쟁 말 SU-76 자주포대대 부지휘관
  • 1945–1967기갑부대 지휘관·참모. 스탈린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1952), 참모아카데미 졸업(1967), 전차사단장
  • 1967–1974제8전차군 참모장, 제7전차군 사령관(1968~1972), 극동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74–1979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참모차장.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 입안
  • 1979–1984참모총장 제1차장. 소련원수 진급(1983). 아프가니스탄 작전 지휘
  • 1984–1988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INF 조약 등 군축 협상 주도. 고르바초프 군사개혁에 반발해 사임
  • 1988–1991국방부 총감독부 감독관 겸 대통령 군사고문. 1991년 8월 GKChP 가담,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자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