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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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인물 130명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세묘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Семё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6–1986 ○ 자연사

소련 유일의 노벨화학상 수상자, 연쇄반응 이론의 창시자

1927년 독일의 보덴슈타인이 제자들의 인 산화 실험 데이터를 신뢰할 수 없다고 일축하자, 세묘노프는 오히려 그것이 미지의 현상임을 직감하고 실험을 재현하여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했다.

소련 화학물리학의 창시자이자 연쇄반응 이론을 확립한 물리화학자였다. 1928년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하여 연소·폭발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고, 이 공로로 1956년 시릴 힌셜우드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1931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학연구소를 설립하여 55년간 소장으로 이끌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소·폭발 연구로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 기여했다. 과학아카데미 부총재(1963~1971)와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공동설립자로서 소련 과학 행정의 제도적 틀을 설계한 조직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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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1LFTI 전자현상연구실장, 부소장
  • 1931–1986화학물리학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41–1945연소·폭발 연구, 원자폭탄 계획 기여
  • 1944–1986모스크바대학교 화학반응속도론 강좌 주임
  • 1957–1971과학아카데미 화학부문 아카데미-서기
  • 1963–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

Трофим Денисович Лысенко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8–1976 ○ 자연사

미추린 농생물학으로 소비에트 생물학을 30년간 지배한 농학자

「당 중앙위원회가 나의 보고를 검토했고 승인했다」 —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폐막사에서. 이 한마디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우크라이나 농민가정 출신 소비에트 농학자. 추파처리(야로비자치야) 기술로 주목받아 1930년대 중반부터 소비에트 생물학계를 장악했다. 멘델유전학을 부르주아 사이비과학으로 공격하고 후천획득형질 유전을 주장했으며,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승리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감자 여름심기·기장 재배법 등 실용적 농업기술도 제안했다. 3개 스탈린상·8개 레닌 훈장·사회주의노동영웅(1945) 수상. 흐루쇼프 실각 후 1965년 해임, 197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당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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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간자 육종시험장 연구원, 추파처리(야로비자치야) 개발
  • 1929–1938오데사 전연방육종유전연구소(VSGI) 선임전문원 → 소장
  • 1938–1956, 1961–1962VASKhNIL 총재
  • 1940–1965소련 과학아카데미 유전학연구소 소장
  • 19488월 VASKhNIL 총회 — 멘델유전학 '패배' 선언, 전국 금지
  • 1965–1975'고르키 레닌스키예' 실험기지 실험실장

리디야 페오도시예브나 티마슈크

Лидия Феодосьевна Тимашук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8–1983 ○ 사망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읽고 쓴 편지 한 통이 의사들 음모 사건의 불씨가 된 크렘린 심장 전문의

크렘린 주치의가 「내 말을 믿지 티마슈크 같은 사람 말을 믿겠느냐」며 그녀의 심근경색 진단을 묵살하자, 그녀는 상부에 편지를 썼고 4년 후 의사들의 음모의 불씨가 되었다.

1926년부터 크렘린 병원에서 근무한 심장 전문의로, 1948년 8월 28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판독하고 '심근경색' 진단을 내렸으나 상급 의사들에게 묵살당했다. 이에 당과 국가보안부에 세 차례 항의 편지를 보냈고, 4년 후 이 편지들은 1953년 '의사들의 음모' 사건 조작의 근거로 부활했다. 1953년 1월 '의사-살인자들을 적발한 공로'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스탈린 사후 4월에 박탈당했고, 이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지목되며 '정보원'이라는 낙인이 평생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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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브레스트리톱스크에서 하사관의 딸로 출생
  • 1920사마라 의대 재학 중 발진티푸스·콜레라 방역에 동원
  • 1926제1모스크바대 의대 졸업, 크렘린 병원(레치산우프르) 근무 시작
  • 1943–1953NKVD-MGB 비밀정보원으로 활동
  • 1948.8기능진단과장으로서 즈다노프의 심근경색 진단 후 상부에 항의 편지 발송
  • 1953.1'의사-살인자 적발 공로'로 레닌 훈장 수훈, 전국적 영웅으로 부상
  • 1953.4스탈린 사후 레닌 훈장 박탈, 이듬해 노동적기훈장 수훈
  • 1964크렘린 병원 퇴직, 사망 시까지 명예 회복을 청원

이반 테렌티예비치 클레이묘노프

Иван Терентьевич Клеймё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99–1938 ✕ 처형

로켓 연구를 국가 기관으로 묶은 조직가

1937년 11월 2일, 그가 이끌던 연구소의 수석기사 랑게마크 체포 뒤 클레이묘노프도 체포되었다.

이반 클레이묘노프는 소련의 초기 로켓 기술을 조직한 군사공학자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기체역학연구소와 반응과학연구소를 연결해 연구를 군수 체계에 편입했고, 무연 추진제 로켓탄과 훗날 카튜샤로 이어진 기술 개발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연구기관은 대숙청 속에서 핵심 인력의 체포와 함께 붕괴했으며, 클레이묘노프 자신도 처형되었다. 1955년 무혐의로 복권되었고 199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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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RKP(b) 입당
  • 1920–1921붉은군대 군수·보급 복무
  • 1928–1930공군과학연구소 공방장
  • 1930–1932베를린 소련 무역대표부 공학부 부책임자
  • 1932–1933기체역학연구소 소장
  • 1933–1937반응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원장
  • 1937중앙공기유체역학연구소 프로펠러·엔진 부문 부소장
  • 1938처형, 1955년 무혐의 복권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네스메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Несмея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80 ○ 자연사

원소유기화학을 창시한 과학아카데미 총재

1951년 총재 S. I. 바빌로프가 사망하자 정치국원 말렌코프가 네스메야노프를 불러 총재직을 제안했다. 그는 채식주의 신념과 체포되어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 형제의 문제를 이유로 들었으나, 말렌코프는 이를 묵살했다.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네스메야노프는 1899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8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소련의 화학자이며 과학 조직가다. 1929년 금속 할로겐화물과의 디아조 반응, 즉 '네스메야노프 반응'으로 아릴수은 할로겐화물을 얻는 방법을 개발했고, 이는 탈륨·주석·납·비소 등 여러 금속의 유기화합물 합성으로 확장되었다. 소련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1939)과 정회원(1943)을 거쳐 유기화학연구소 소장(1939–1954)과 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1954–1980)을 지냈으며, 1951년부터 1961년까지 아카데미 총재로 재임했다. 1961년 이후에는 농업을 우회하는 합성식품 연구를 추진해 인공 블랙 캐비어 등의 공정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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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54유기화학연구소 소장 · AN SSSR
  • 1943화학 부문 정회원(아카데미크) · AN SSSR
  • 1946–1951화학 부문 아카데미크-서기 · AN SSSR
  • 1948–1951모스크바 국립대학 총장
  • 1951–1961과학아카데미 총재 · AN SSSR
  • 1954–1980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
  • 1950–1962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니콜라이 안토노비치 돌레잘

Николай Антонович Доллежаль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체코 1899–2000 ○ 자연사

소련 원자로 설계의 총설계사

1946년 1월 쿠르차토프가 그를 처음 만나 "최단기간 내에 산업용 우라늄 '보일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돌레잘은 이 한마디에 평생을 반응로 설계에 바쳤다.

체코계 소련 기술자로, 핵무기·원자력발전·함정추진 원자로를 모두 설계한 원자로 총설계사였다. 1946년 쿠르차토프와의 만남 이후 플루토늄 생산로 'A'를 설계해 1949년 소련 첫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제공했고, 1954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오브닌스크 AM-1 원자로를 완성했다. NIKIET을 34년간 이끌며 VVER, RBMK, 함정용 원자로 등 소련의 모든 주요 원자로 계통의 원형을 개발했으나, 체르노빌 참사 이후 RBMK 설계 결함에 대한 책임 논란 속에 1986년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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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MVTU 졸업, 기계기사
  • 1930–1932프롬파르티야 사건으로 수감; OGPU OKB-8 부수석기사
  • 1933–1942볼셰비크 공장(키예프) 수석기사 · 우랄히마쉬 수석기사
  • 1943–1952NIIkhimmash 소장 (1946년부터 원자력 사업 참여)
  • 1952–1986NII-8 / NIKIET 소장
  • 1954오브닌스크 AM-1 원자로 수석설계자 (세계 최초 원전)
  • 1961–1986MVTU '원자력기계' 학과장

미하일 클라프디예비치 티혼라보프

Михаил Клавдиевич Тихонрав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0–1974 ○ 자연사

패킷 로켓으로 우주 가는 길을 연 이론적 개척자

1948년 여름, 학술회의에서 '1000킬로미터가 로켓 사거리의 한계'라는 통념을 깨고 패킷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쏠 수 있다고 발표하자 회의장은 조소와 야유로 들끓었다. 9년 후 스푸트니크 1호가 궤도에 올랐다.

소련 우주개발의 이론적 아버지. 1933년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를 설계하고, 1948년 여러 로켓을 묶은 '패킷' 방식으로 궤도 도달이 가능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당시엔 조롱받았으나 코롤료프의 지지로 연구를 이어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 계획의 설계 기반을 닦았다. 1956년 OKB-1 제9설계국장을 맡아 인공위성과 유인우주선 설계를 총괄했으며, 라틴어에 능통한 고전적 교양인으로 '코스모넛'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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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3GIRD 여단장,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 설계
  • 1934–1938반응연구소(RNII) 부서장, 액체연료 로켓·상층대기 연구
  • 1940–1943로켓 요격기 '302' 및 카추샤 발사체 설계팀 지휘
  • 1946–1956NII-4 부소장 겸 과학고문, '티혼라보프 그룹' 지도 — 패킷 로켓 궤도 도달 이론 입증(1948)
  • 1956–1974OKB-1 제9설계국장,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행성 탐사선 설계 총괄
  • 1962–1974모스크바 항공대(MAI) 교수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라브렌티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Лаврентье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0–1980 ○ 자연사

시베리아에 아카뎀고로도크를 세운 수학자이자 폭발물 응용의 개척자

대학생들 앞에서 푸앵카레가 항해 과목을 면제받은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도 몇 과목은 면제해줘도 되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강의실 전체가 "공산당사!"를 외쳤다.

소련 수학자·유체역학자로서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시베리아 과학아카데미 분원의 창립 의장을 지내며 노보시비르스크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건설했다. 준등각사상 이론과 유체역학에서 근본적 성과를 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폭발 물리학 연구로 성형작약탄 이론에 기여했으며 이후 통제폭파를 건설에 응용하는 분야를 개척했다. 1953~1955년 아르자마스-16 핵무기 연구소의 부과학책임자를 맡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고, 소련 최초의 전자계산기 개발과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흐루쇼프 해빙기 과학의 동진(東進)을 상징하는 인물로, 20개 연구소와 대학이 하나의 숲속 공동체를 이루는 모델을 현실화한 과학 행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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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수학연구소장
  •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50–1953정밀기계·계산기술연구소장
  • 1953–1955KB-11(아르자마스-16) 부과학책임자
  • 1957–1975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원 창립 의장
  • 1957–1976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9–1966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 교수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예멜랴노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Емелья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1–1988 ○ 자연사

전시 탱크 장갑에서 평화적 원자력 외교까지 이끈 핵행정가

첫 원자폭탄 실험 후 방사능 낙진을 측정하기 위해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며, 대중의 공황을 막기 위해 브루셀라증을 조사하는 의사 행세를 했다.

소련 원자력 프로그램의 핵심 행정가로, 군수 금속공학에서 출발해 핵무기 개발과 민간 원자력 이용을 잇는 제도적 가교 역할을 했다. 금속공학자로서 전쟁 중에는 T-34 전차의 주조 포탑 기술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5년 원자력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반니코프의 제1총국에서 과학기술 부문을 총괄했다. 1957년부터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을 지휘하며 소련의 평화적 원자력 정책과 IAEA 외교를 주도했고, 흐루쇼프 시기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사회주의권 원자로 건설과 방사선 기술 보급을 진두지휘했다. 저서 『시간과 동지와 나 자신에 대하여』를 통해 스탈린의 의사결정 과정을 생생히 증언한 회고록 작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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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1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 조교·중앙기계제조기술연구소 연구실장
  • 1932–1934독일 에센·베를린 크루프 공장 소련 중공업인민위원부 전권대표
  • 1935–1937첼랴빈스크 페로합금공장 기술이사
  • 1937–1939방위산업인민위원부 제7총국장 (장갑강)
  • 1940–1946소련 인민위원회의 표준화위원회 부의장·의장
  • 1946–1953제1총국 과학기술부장·부국장 (원자력 프로젝트)
  • 1953–1955중형기계공업부 과학기술국장
  • 1955–1957중형기계공업부 차관 (신기술 담당)
  • 1957–1960소련 각료회의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 국장 · IAEA 소련 상임대표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부의장
  • 1966–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군축과학문제위원회 의장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레베데프

Сергей Алексеевич Лебеде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2–1974 ○ 자연사

MESM·BESM의 창설자, 소련 컴퓨터 산업의 아버지

1970년대 초 IBM 호환 노선이 소련 컴퓨터 산업을 장악해가자, 이미 병상에 있던 레베데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소련 컴퓨터 공학의 창시자. 1951년 키예프 외곽 폐허 수도원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MESM을 완성했고 1953년 BESM-1을 가동했다. 이후 20년간 ITMiVT 소장으로 BESM-6 등 15종의 컴퓨터를 개발했으며, 그의 기계들은 핵무기 계산과 우주비행 궤도 산출, 최초의 작전용 탄도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떠받쳤다. 1953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계산장치' 전공 정회원, 사회주의 노동영웅(1956), 레닌·스탈린·국가상을 받았다. IBM 호환 노선에 맞서 독자 병렬 아키텍처를 고수했고 제자들은 엘브루스 슈퍼컴퓨터로 계승했다. 사후 IEEE 컴퓨터 파이어니어 상(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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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6전연방 전기공학연구소(AEI) 연구원·자동화부장, 모스크바전력공학대학 교수
  • 1946–1950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전력공학연구소장 → 전기공학연구소장
  • 1948–1951MESM(소형 전자계산기) 개발 총괄 — 소련 및 유럽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완성
  • 1950–1953정밀기계·컴퓨터공학 연구소(ITMiVT) 연구실장, BESM-1 개발 완료
  • 1953–1973ITMiVT 소장 — BESM-2, M-20, BESM-6 등 15종 컴퓨터 개발 지휘
  • 195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계산장치 전공)

이고리 바실리예비치 쿠르차토프

Игорь Васильевич Курчат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3–1960 ○ 자연사

소련 원자폭탄의 과학 책임자

1942년 아내가 "면도할 거예요?"라고 묻자 쿠르차토프는 "승리한 다음에"라고 답했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이 터질 때까지 7년간 수염을 깎지 않았고, 동료들은 그를 그냥 '보로다(수염)'라고 불렀다.

소련 핵물리학 공동체를 구축하고 원자력 사업 전체를 지휘한 과학 책임자였다. 1930년대 LFTI에서 동료들과 유럽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건설했고, 1943년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 지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핵실험을 이끌었다. 그의 연구소는 이후 수소폭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오브닌스크, 1954), 원자력 쇄빙선까지 개발했다. 무기 경쟁의 한복판에서 평화적 원자력 이용을 추진한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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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60원자력 과학지도자

세묜 아리예비치 코스베르크

Семён Ариевич Косберг

3단 로켓엔진으로 루나와 가가린을 우주로 밀어올린 OKB-154 수석설계자

1941년 겨울, 베르츠크의 텅 빈 엘리베이터 건물. 밤새 기초공사를 파던 지친 직원들 앞에 갑자기 오케스트라가 나타났다. 수석설계자의 목소리: "노래는 우리가 건설하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네!"

슬루츠크의 유대인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야간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했다. 전시에는 직접분사장치를 개발해 La-5·La-7 전투기에 독일기를 압도할 상승력과 기동성을 부여했고, 이 공로로 붉은별훈장과 조국전쟁훈장을 받았다. 전후 OKB-154(현 KБХА)를 보로네시로 옮겨 액체로켓엔진으로 전환했고, 1958년 코롤료프와 만난 지 9개월 만에 세계 최초로 우주공간에서 점화되는 3단 엔진 RD-0105를 완성해 루나 1·2·3호의 탈출속도를 실현했다. 이후 RD-0109로 가가린의 보스토크 상단을 추진했고, 그의 설계국은 R-7·소유즈·프로톤 계열 전체의 상단 엔진을 공급하는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동력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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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중앙항공발동기연구소(CIAM) 입소, 직접분사장치 연구
  • 1940제33공장 OKB 부수석설계자, 직접분사 설계국장
  • 1941–46OKB-154(베르츠크) 수석설계자: ASh-82FN용 NV-3U 직접분사장치, La-5·La-7·Tu-2에 탑재
  • 1946–54OKB-154 보로네시 이전, 터보제트·터보프롭 연료장치 및 액체로켓엔진 전환
  • 1958–59RD-0105 개발(9개월): 루나 1·2·3호 3단 엔진, 세계 최초 우주 점화
  • 1960레닌상 수상, 기술과학 박사학위
  • 1961RD-0109: 보스토크 3단, 가가린 궤도 진입. 사회주의노동영웅
  • 1962–65소유즈·몰니야·프로톤 상단 엔진 개발 주도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콜모고로프

Андр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лмого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3–1987 ○ 자연사

현대 확률론의 공리적 기초를 세운 수학자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증언했다: "30년 동안 나는 콜모고로프의 논문을 읽을 때면 이것이 내 생각이라고 느낀다. 언제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바로 그 내용이다."

1933년 『확률론의 기초개념』에서 측도론 기반 공리계를 제시해 확률론을 엄밀한 수학으로 정립한 소련 수학자다. 위상수학의 코호몰로지, 고전역학의 KAM 이론, 난류 이론, 알고리즘 복잡도, 힐베르트 제13문제 해결 등 수학 전 분야에서 근본적 성과를 남겼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1935년 확률론 학과를 창설해 30년간 이끌었고, 1939년 35세로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소련 수학 올림피아드 체계와 콜모고로프 기숙학교를 설계한 영재 교육의 설계자였으며, 1964~1985년 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확률론을 포격 통계에 적용해 모스크바 방어에 기여했고, 전후 중등 수학 교육 개혁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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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87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 1935–1965모스크바 국립대학 확률론 학과장
  • 1939–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 1939–1942과학아카데미 물리수학부 아카데미크-서기
  • 1964–1966, 1974–1985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
  • 1963–1987콜모고로프 기숙학교 (제18학교) 창립자

아나톨리 페트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Анатолий Пет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3–1994 ○ 자연사

소련 원자력 해군을 창시하고 체르노빌로 생을 마감한 물리학자

체르노빌 사고 후 알렉산드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동시에 이끄는 것은 너무나 힘겨웠고, 결국 비참하게 끝났다.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때부터 내 삶도, 창조적 활동도 끝나기 시작했다."

쿠르차토프의 후계자로서 소련 원자력 연구의 최고 지도자가 된 물리학자. 제2차 세계대전 중 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체계를 개발했고, 1960년 쿠르차토프 사후 쿠르차토프 연구소장을 이어받아 28년간 이끌었다. 그의 주도로 원자력 쇄빙선과 소련 최초의 핵잠수함이 건조되었으며, RBMK와 VVER 양대 원자로 설계의 과학 책임자였다. 1975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냈으나, 1986년 체르노빌 참사로 자신이 추진해온 RBMK 노형이 붕괴하며 과학 인생의 종언을 맞았다. 세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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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LFTI 선임연구원, 고분자 물리학 및 통계적 강도 이론 연구 (물리수학 박사, 1941)
  • 1941–1943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LFTI 체계' 개발, 흑해·발트·북방 함대에 배치
  • 1943–1946제2연구소(원자폭탄 계획) 쿠르차토프 부소장
  • 1946–1955물리문제연구소 소장 (카피차 후임)
  • 1955–1960원자력연구소(IAE) 부소장
  • 1960–1988IAE/쿠르차토프 연구소 소장, 원자력 쇄빙선·핵잠수함·RBMK·VVER 원자로 총괄
  • 1975–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6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즈나이다 바실리예브나 예르쇼바

Зинаида Васильевна Ершова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03–1995 ○ 자연사

소련 원자력 계획을 개척한 방사화학자

1943년 쿠르차토프의 긴급 호출은 그녀를 피란지에서 원자력 계획의 최전선으로 돌려보냈다.

즈나이다 예르쇼바는 방사성 원소의 산업적 생산과 핵화학을 연결한 소련의 방사화학자였다. 1943년 이고리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카자흐스탄 피란지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기레드메트에서 우라늄 카바이드와 금속 우라늄 생산을 이끌었고 이 성과는 F-1 원자로 연구에 쓰였다. 이후 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기술을 발전시키며 핵무기와 우주용 동위원소 전원이라는 서로 다른 국가 사업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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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학생, 방사화학 연구
  • 1930–1937모스크바 희소원소 공장 방사늄 부문, 물리实验실장
  • 1936–1937파리 라듐연구소 연수, 이렌 졸리오퀴리 지도
  • 1938–1945기레드메트 라듐 연구실장, 우라늄 카바이드·금속 우라늄 생산
  • 1946–1948특수금속연구소 NII-9 제1방사화학연구실장
  • 1947–1954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생산 기술 연구, 스탈린상 수상
  • 1960년대–1989전러시아 무기재료연구소에서 폴로늄 화학과 동위원소 전원 연구

바실리 알렉세예비치 마흐뇨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еевич Махнё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04–1965 ○ 자연사

비밀 원자력 행정의 조직자

첫 소련 원자탄의 이름을 정할 때 마흐뇨프는 'РД'(반응 엔진)에 이니셜 'С'를 덧붙여 'РДС', 곧 '스탈린의 반응 엔진'이 되게 했다고 전해진다.

바실리 마흐뇨프는 소비에트 국가의 통제·군수 행정가로서 전쟁기의 동원 체계와 전후 원자력 프로젝트를 잇는 실무자였다. 그는 1945년 GKO 결정 9887로 설치된 특별위원회의 9인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서기로, 위원회 장치를 운영하고 과학·산업 과제를 국가 행정으로 연결했다. 그의 역할은 과학자의 발견만으로는 추진될 수 없었던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가 비밀주의와 집중 동원 속에서 작동한 방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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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4노동자·농민 감독기관에서 근무
  • 1934–1940소비에트 통제위원회 지역 전권대표
  • 1940–1941소비에트 통제위원회 부위원장, 국가통제 인민위원부 인민위원 대리
  • 1941–1945군수 인민위원부 인민위원 대리, GKO 위원 대리
  • 1945–1953소련 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위원·서기
  • 1953–1956중형기계공업부 과학기술정보·국제관계국장
  • 1956–1965원자력 이용 국가위원회 과학기술정보·전시국장

아브람 이사코비치 알리하노프

Абрам Исаакович Алиха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904–1970 ○ 자연사

중수로에서 세계 최대 가속기까지: ITEP의 23년 지휘자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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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1941LFTI 양전자연구실장
  • 1945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
  • 1945–1968제3실험실 / ITEP 소장
  • 1947–1951모스크바국립대 물리기술학부 물질구조학과장

스테판 아파나시예비치 발레진

Степан Афанасьевич Балез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4–1982 ○ 자연사

카프타노프 밑에서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린 GKO 과학실 선임보좌관

모스크바에 100명을 불러들여 입경 허가를 내고, 살 집과 배급 카드를 주고, 사이클로트론용 초고순도 철과 원자로용 99% 흑연을 구해야 했다: 바레진이 1943년 봄의 긴박했던 일상을 회고하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세에 적군에 입대한 1세대 소비에트 화학자. GKO 과학 전권위원 카프타노프의 선임보좌관으로서 1942-43년 소련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렸다: 스타리노프가 노획한 독일 장교의 '원자 수첩'을 접수해 번역을 주선하고 의미를 알아챘으며, 플료로프의 편지를 검토하고, 쿠르차토프를 먼저 면담해 카프타노프에게 데려갔다.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 건물을 물색하고 과학자 100여 명의 모스크바 출입 허가·주택·배급 카드를 해결했으며, 이오페-카프타노프 공동 청원서 초안을 작성해 1942년 9월 28일 GKO 결의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레닌 사범대로 복귀해 금속 부식 억제제 분야의 학파를 세웠고 80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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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4초등학교 교사·고아원장, 비르스크 현 콤소몰 지도자
  • 1925–1932게르첸 사범대학 졸업, 적색교수대학원 이수, 카르포프 연구소 연구원
  • 1936–1938쿠이비셰프 의과대학 물리·콜로이드 화학 주임
  • 1938–1941레닌 사범대 화학과장, 고등교육위원회 대학부장
  • 1941–1943GKO 과학 전권위원 선임보좌관: 원자폭탄 사업 출범 실무
  • 1944–1948볼셰비키당 중앙위 간부국 대학·과학기관 부부장
  • 1948–1967레닌 사범대 일반·분석화학 주임, 금속 부식 억제제 연구실 창설
  • 1967–1982유네스코 인도 교육 개혁 고문, 『학교에서의 화학』 편집위원장

율리 보리소비치 하리톤

Юлий Борисович Харито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96 ○ 자연사

46년간 소련 핵무기 설계국을 이끈 수석설계자

"우리 일에 사소한 것은 없다." 하리톤은 모든 문서의 글자 하나까지 증거를 요구했다. "어차피 전쟁하지도 않을 텐데"라는 말에 그는 분노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전부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과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수학한 물리학자. 1939–1941년 야코프 젤도비치와 함께 세계 최초로 우라늄 연쇄반응을 계산했다. 1946년부터 1992년까지 KB-11(아르자마스-16)의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로서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과 1953년 첫 수소폭탄 개발을 지휘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세 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소련 핵억지력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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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1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세묘노프 지도)
  • 1926–1928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연수 (러더퍼드·채드윅)
  • 1931–1946화학물리연구소 폭발물 연구실장
  • 1939–1941젤도비치와 우라늄 연쇄반응 최초 계산
  • 1946–1992KB-11(아르자마스-16)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
  • 1953–199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92–1996VNIIEF 명예 과학책임자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카프타노프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Кафта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5–1978 ○ 자연사

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스탈린에게 건의한 GKO 과학 전권위원

회의에서 많은 부처가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집무실을 서성인 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프타노프의 회고.

소련 고등교육과 과학행정을 관장한 국가관리로, 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으로서 이오페와 함께 1942년 스탈린에게 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건의해 9월 28일 결의를 이끌어냈다. 전쟁 전에는 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소비에트 고등교육 체계를 총괄했고, 전후 초대 고등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1950년대에는 문화부 제1차관과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을 거쳐 모교인 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으로 학계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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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6돈소다 공장 노동자, 콤소몰 조직원
  • 1931–1937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연구원·강사, 카르포프 연구소 당비서
  • 1937–1946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VKVSh) 의장
  • 1941–1945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
  • 1946–1951소련 고등교육부 장관
  • 1953–1959소련 문화부 제1차관
  • 1959–1962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
  • 1962–1973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

레오니트 미하일로비치 네메노프

Леонид Михайлович Неме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인 러시아계 1905–1980 ○ 자연사

전쟁 속에서 원자력 가속기를 세운 물리학자

“우리는 비행기로 호이노야까지 간 뒤 어둠을 기다렸다가 라도가호 상공을 저공비행했다.”

레오니트 네메노프는 핵물리학과 입자가속기 기술을 연구한 소비에트 물리학자였다. 그는 쿠르차토프의 지시로 포위된 레닌그라드에 들어가 피지테흐 사이클로트론의 핵심 부품을 회수했고, 실험실 2에서 1944년 가동한 사이클로트론 건설을 이끌었다. 이 장치는 최초의 미량 플루토늄을 얻어 화학적 분석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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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졸업
  • 1929–1939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 1939–1944대형 사이클로트론 설계와 건설 참여
  • 1943–1944실험실 2 사이클로트론 건설 책임
  • 1949공학박사 학위 취득
  • 1962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교수
  • 1968–1980가속기 물리기술·전파기술 측정 전연방연구소 소장
  • 1980모스크바에서 사망

안드라니크 멜코노비치 페트로샨츠

Андраник Мелконович Петросьянц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906–2005 ○ 자연사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 24년간 원자력 국가위원회 이끈 창립 세대

1986년 체르노빌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안드라니크 페트로샨츠는 소련 원자력 산업의 창립 세대를 대표하는 과학자·행정가로, 원자폭탄 개발을 관리한 제1총국에서 시작해 1962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이자 평화적 이용의 국제적 대변인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발언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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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9우랄중공업기계(UZTM)에서 작업반장·기술부장·수석기사 대리 역임
  • 1939–1941중공업기계제조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1–1943전차공업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3–1945국방위원회(GKO) 전차산업 담당 부위원
  • 1947–1953소련 각료회의 제1총국 부국장 — 원자력 프로젝트
  • 1955–1962중형기계공업부 차관
  • 1962–1986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레프 일리치 루시노프

Лев Ильич Руси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07–1960 ○ 자연사

핵분열과 핵이성질체를 탐구한 실험물리학자

1935년 브로민의 방사능을 연구하던 그는 쿠르차토프 형제·미솝스키와 함께 원자핵 이성질체 현상을 발견했다.

레프 루시노프는 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에서 핵물리학의 실험 기반을 넓힌 소련의 물리학자였다. 그는 1939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우라늄 핵분열에서 한 번의 분열마다 둘 이상의 중성자가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해 연쇄반응 조건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인공 방사성 핵의 이성질체와 중성자·감마선의 상호작용을 연구했으며, 전후에는 연구용 원자로 건설과 핵물리학 연구 집단의 조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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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과대학 물리기계학부 학생
  • 1930–1944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쿠르차토프 연구실 연구자
  • 1939–1940플료로프와 우라늄 핵분열 중성자 실험 수행
  • 1944핵이성질체 연구로 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 1948실험물리학 교수
  • 1946–1960소련 원자 프로젝트 및 연구용 원자로 개발 참여
  • 1950s고중성자 특성 연구용 원자로 프로젝트 과학책임자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66 ○ 자연사

수용소에서 우주로. 이름조차 국가기밀이었던 설계자

1961년 4월 12일, 바이코누르 발사대. 코롤료프의 무선 음성: "예비단계… 중간단계… 주단계… 발사!" 가가린: "출발이다!(Поехали!)" — 한 사람의 목소리와 다른 한 사람의 대답으로 인류 우주시대가 열렸다.

1938년 숙청에 걸려 콜리마 금광에서 건강과 이를 잃은 로켓 기술자. 살아 돌아와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쏘아 올린 로켓을 만들었지만, 생전에 그의 이름은 기밀이었다. 노벨상 위원회의 문의에 소련은 「수석설계자」라고만 답했다. 수용소가 망가뜨린 몸은 1966년의 수술을 견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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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제트추진연구그룹(GIRD) 출신으로 로켓연구소 창설 참여
  • 1938–40체포, 콜리마 금광
  • 1940–44옥중 설계국(샤라시카)에서 항공기 설계
  • 1946–57수석설계자: R-7 대륙간탄도미사일
  • 1957/1961스푸트니크, 보스토크(가가린) 발사
  • 1966수술 중 사망, 사후에야 실명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