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인물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 샤를 푸리에, 페르디난트 라살레, 오토 폰 비스마르크, 리하르트 바그너,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용어사적 유물론, 국가의 사멸 학습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 1장 가족에도 역사가 있다, 2장 친족 호칭이라는 화석, 3장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4장 문명사회의 세포 형태, 5장 계급도 국가도 없는 사회, 6장 국가가 발명되었다, 7장 로마의 국가, 독일인의 미개, 8장 물레와 청동 도끼 곁으로
VI · 로마의 씨족과 국가
로마 건국 전설에 따르면, 첫 정착은 한 부족으로 뭉친 라티움 씨족 여럿(전설로는 백 개)이 이루었다. 곧 사벨리족의 한 부족이 여기에 합류했는데, 이 부족도 씨족 백 개를 헤아렸다고 한다. 끝으로 여러 요소로 이루어진 셋째 부족이 합류했는데, 이 역시 씨족이 백 개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 전체를 보면 여기서 자연발생적인 것은 씨족 말고는 거의 없었고, 씨족조차 어떤 경우에는 옛 고향에 남아 있는 모씨족의 분가에 지나지 않았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부족들은 인위적으로 짜 맞춘 것이라는 낙인을 이마에 달고 있다. 그러나 대개는 서로 친족인 요소들로, 그리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라난 옛 부족을 본떠 짜였다. 그렇다고 세 부족 각각의 핵심이 진짜 옛 부족이었을 가능성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중간 고리인 프라트리아는 씨족 열 개로 이루어졌고 쿠리아라 불렸다. 그러니 쿠리아는 서른 개였다.
로마의 씨족이 그리스의 씨족과 같은 제도였다는 것은 인정되어 있다. 그리스의 씨족이 아메리카 홍인종이 그 원형을 보여 주는 사회적 단위가 발전한 것이라면, 로마의 씨족도 당연히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더 짧게 다룰 수 있다.
로마의 씨족은 적어도 도시의 가장 오랜 시기에 다음과 같은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1. 씨족원들 사이의 상호 상속권. 재산은 씨족 안에 남았다. 로마의 씨족에서도 그리스의 씨족에서처럼 이미 부권이 지배했으므로 여계의 자손은 제외되었다. 우리가 아는 가장 오랜 성문 로마법인 12표법에 따르면, 먼저 자식들이 직계 상속인으로 상속했다. 자식이 없으면 남계 친족(아그나티, 남성 계통의 친척)이, 남계 친족도 없으면 씨족원들이 상속했다. 어느 경우에나 재산은 씨족 안에 남았다. 여기서 우리는 늘어난 부와 일부일처제가 불러온 새로운 법 규정이 씨족 관습 속으로 차츰 파고드는 것을 본다. 씨족원들의 원래의 평등한 상속권은 처음에는 — 앞에서 말했듯 아마 일찍부터 — 관행으로 남계 친족에게 제한되고, 마침내 자식들과 그 남계 자손에게 제한된다. 12표법에서는 이것이 당연히 거꾸로 된 순서로 나타난다.
2. 공동 묘지의 소유. 귀족 씨족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레길리에서 로마로 이주할 때 자기 몫으로 땅 한 뙈기를 배정받았고, 거기에 더해 도시 안에 공동 묘지를 받았다. 아우구스투스 때에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전사한 바루스의 머리가 로마로 오자 씨족 무덤(gentilitius tumulus)에 묻혔다. 그러니 그 씨족(퀸크틸리우스 씨족)은 그때까지도 자기 무덤 언덕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3. 공동의 종교 의례. 이것, 곧 씨족 제사(sacra gentilitia)는 잘 알려져 있다.
4. 씨족 안에서 혼인하지 않을 의무. 이것은 로마에서 성문법이 된 적은 없는 것 같지만 관습은 남았다. 이름이 전해지는 수많은 로마 부부 가운데 남편과 아내의 씨족명이 같은 경우는 하나도 없다. 상속권도 이 규칙을 증명한다. 아내는 혼인으로 남계 친족으로서의 권리를 잃고 자기 씨족에서 나간다. 그녀도 그녀의 자식들도 그녀의 아버지나 그 형제들에게서 상속받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 씨족의 상속분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내가 씨족원과 혼인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뜻이 있다.
5. 공동 토지 소유. 이것은 원시 시대에 부족의 땅이 나뉘기 시작하자 언제나 있었다. 라티움 부족들에서는 토지가 일부는 부족의, 일부는 씨족의, 일부는 살림들의 소유였는데, 이 살림들은 그때 개별 가족이었을 리가 없다. 로물루스가 처음으로 개인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한 사람에 약 1헥타르(2유게라)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에도 씨족의 손에 있는 토지를 볼 수 있다. 공화정의 내부 역사 전체가 그것을 둘러싸고 돌아간 국유지는 말할 것도 없다.
6. 씨족원들이 서로 보호하고 도울 의무. 기록된 역사는 이에 대해 잔해만을 보여 준다. 로마 국가는 처음부터 압도적인 힘으로 등장해, 불법에 맞서 보호하는 권리가 국가로 넘어갔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체포되었을 때 그의 씨족 전체가, 그의 개인적인 적들까지 상복을 입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씨족들은 전쟁 포로가 된 씨족원들을 몸값을 치르고 데려오려고 서로 손을 잡았다. 원로원은 이것을 그들에게 금지했다.
7. 씨족명을 쓸 권리. 이것은 제정 시대까지 남았다. 해방 노예에게는 예전 주인의 씨족명을 쓰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씨족원의 권리는 없었다.
8. 외부인을 씨족에 입양할 권리. 이것은 (인디언에게서처럼) 한 가족에 입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씨족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수반했다.
9. 우두머리를 뽑고 물러나게 할 권리는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로마 초기에는 선출 왕부터 아래로 모든 관직이 선거나 임명으로 채워졌고, 쿠리아의 사제들도 쿠리아가 뽑았다. 그러므로 씨족의 우두머리(principes)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가정해도 된다. 씨족 안에서 한 가문에서 뽑는 것이 이미 아무리 규칙이 되어 있었다 해도 그렇다.
이것이 로마 씨족의 권한이었다. 이미 끝난 부권으로의 이행을 빼면, 이것들은 이로쿼이 씨족의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비추는 거울이다. 여기서도 “이로쿼이인이 틀림없이 내다보인다.”
로마의 씨족 질서에 대해 오늘날까지 가장 인정받는 우리 역사가들 사이에서조차 얼마나 혼란이 있는지, 그 예를 하나만 들겠다. 공화정 시대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 고유명사에 관한 몸젠의 논문(『로마 연구』(Römische Forschungen), 베를린, 1864, 제1권)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모든 남성 씨족원 말고도, 물론 노예는 빼고 그러나 식객과 피보호자는 포함하여, 씨족명은 여성에게도 주어진다 … 부족은”(몸젠은 여기서 gens를 이렇게 옮긴다) “… 공통의 — 실제의, 추정된, 또는 꾸며 낸 — 혈통에서 생겨나 제사, 묘지, 상속의 공동체로 결합된 공동체다. 개인적으로 자유로운 모든 개인, 따라서 여성도 여기에 속한다고 여길 수 있고 또 여겨야 한다. 그런데 어려움을 낳는 것은 기혼 여성의 씨족명을 정하는 일이다. 물론 이 어려움은 여성이 같은 씨족원과만 혼인할 수 있었던 동안에는 없다. 그리고 여성에게는 오랫동안 씨족 안에서보다 밖에서 혼인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래서 그 권리, 곧 씨족 밖 혼인(gentis enuptio)이 6세기에도 상으로 주는 개인적 특권으로 부여되었던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씨족 밖 혼인이 일어난 곳에서는 가장 오랜 시대에 여성이 그로써 남편의 부족으로 넘어갔음이 틀림없다. 옛 종교적 혼인에서 여성이 남편의 법적·종교적 공동체에 완전히 들어가고 자기 공동체에서 나온다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기혼 여성이 자기 씨족원들에 대해 상속할 권리와 상속받을 권리를 잃고, 그 대신 남편과 자식들과 남편의 씨족원들과 상속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그리고 여성이 남편에게 딸의 자리에 서고 남편의 가족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남편의 씨족에서 떨어져 있을 수 있겠는가?”(8~11쪽)
그러니까 몸젠은 씨족에 속한 로마 여성들이 원래 자기 씨족 안에서만 혼인할 수 있었고, 따라서 로마의 씨족은 외혼이 아니라 내혼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민족들에서 얻은 모든 경험과 어긋나는 이 견해는 오로지는 아니더라도 주로 리비우스의 논란 많은 한 구절(제39권 19장)에 기대고 있다. 그에 따르면 원로원은 로마 건국 568년, 기원전 186년에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uti Feceniae Hispalae datio, deminutio, gentis enuptio, tutoris optio item esset quasi ei vir testamento dedisset; utique ei ingenuo nubere liceret, neu quid ei qui eam duxisset, ob id fraudi ignominiaeve esset). 곧 페케니아 히스팔라는 마치 그녀의 (죽은) 남편이 유언으로 이 권리를 넘겨준 것처럼 자기 재산을 처분하고, 줄이고, 씨족 밖에서 혼인하고, 후견인을 고를 권리를 가진다. 그녀는 완전한 자유인과 혼인해도 된다. 그녀를 아내로 맞는 사람에게 이것이 나쁜 행위나 수치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해방 노예인 페케니아에게 씨족 밖에서 혼인할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남편이 유언으로 아내에게 자기가 죽은 뒤 씨족 밖에서 혼인할 권리를 넘겨줄 권리가 있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느 씨족 밖인가?
몸젠이 생각하듯 여성이 자기 씨족 안에서 혼인해야 했다면, 그녀는 혼인 뒤에도 이 씨족에 남았다. 그러나 첫째, 씨족의 이 내혼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여성이 씨족 안에서 혼인해야 했다면 당연히 남성도 그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남성은 아내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남편이 자기 자신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갖지 못한 권리를 유언으로 아내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법적 모순에 이르는 것이다. 몸젠도 이것을 느끼고 그래서 이렇게 추측한다.
“씨족 밖으로 혼인하려면 법적으로 아마 가장권 보유자의 동의뿐 아니라 씨족원 모두의 동의가 필요했을 것이다.”(10쪽, 주)
이것은 첫째 아주 대담한 추측이고, 둘째 그 구절의 명백한 문구와 어긋난다. 원로원은 그녀에게 이 권리를 남편을 대신하여 준다. 원로원은 남편이 줄 수 있었을 것보다 더도 덜도 아닌 것을 분명히 준다. 그러나 원로원이 주는 것은 다른 어떤 제한에도 매이지 않는 절대적 권리다. 그래서 그녀가 그 권리를 쓰더라도 그녀의 새 남편도 그 때문에 손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원로원은 심지어 현재와 미래의 집정관과 법무관에게 그녀가 이 일로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도록 하라고 명한다. 그러므로 몸젠의 가정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어 보인다.
아니면 이렇다. 여성은 다른 씨족의 남성과 혼인했지만 자기는 태어난 씨족에 남았다. 그렇다면 위의 구절에 따라 남편은 아내가 그녀 자신의 씨족 밖으로 혼인하도록 허락할 권리를 가졌던 셈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가 전혀 속하지 않은 씨족의 일에 대해 처분할 권리를 가졌던 셈이다.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남는 가정은 하나뿐이다. 여성은 첫 혼인에서 다른 씨족의 남성과 혼인했고, 혼인과 함께 곧바로 남편의 씨족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몸젠도 실제로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이것을 인정한다. 그러면 모든 맥락이 곧바로 풀린다. 혼인으로 옛 씨족에서 떨어져 나와 남편의 새 씨족 결합에 받아들여진 여성은 거기서 아주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 그녀는 씨족원이기는 하지만 혈연은 아니다. 그녀가 받아들여진 방식 때문에 그녀는 처음부터 씨족 안의 모든 혼인 금지에서 벗어나 있다. 바로 그 씨족 안으로 혼인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녀는 씨족의 혼인 결합에 받아들여졌고, 남편이 죽으면 그의 재산, 곧 씨족원의 재산을 상속한다. 이 재산이 씨족 안에 남아야 하고, 따라서 그녀가 첫 남편의 씨족원과 혼인해야 하며 다른 사람과는 혼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그리고 예외를 두어야 한다면, 그녀에게 이 재산을 물려준 사람, 곧 첫 남편보다 그렇게 하도록 그녀에게 권한을 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그가 그녀에게 재산 일부를 물려주면서 동시에 혼인으로 또는 혼인의 결과로 이 재산 일부를 다른 씨족에 옮기도록 허락하는 순간, 이 재산은 아직 그의 것이다. 그러니 그는 문자 그대로 자기 재산만을 처분하는 것이다. 여성 자신과 그녀가 남편의 씨족과 맺는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자유로운 의지의 행위 — 혼인 — 로 그녀를 이 씨족에 들인 사람은 그다. 그러므로 그가 그녀에게 재혼으로 이 씨족에서 나가도록 권한을 주기에 알맞은 사람이라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요컨대 로마 씨족이 내혼이었다는 기묘한 생각을 버리고, 모건과 함께 그것을 원래 외혼이었다고 보면 문제는 간단하고 자명해 보인다.
마지막 가정이 하나 더 남아 있는데, 이 가정도 지지자를 얻었고 아마 가장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그 구절이 말하는 것은 다만
“해방된 여자 노예(libertae)는 특별한 허가 없이는 씨족 밖에서 혼인하거나(e gente enubere) 그 밖에 가장 작은 신분 상실(capitis deminutio minima)과 결부되어 해방 여자 노예가 씨족 결합에서 나가게 만들었을 행위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라는 가정이다.(랑게, 『로마 고대사』(Römische Alterthümer), 베를린, 1856, 제1권 195쪽. 여기서 랑게는 우리가 다루는 리비우스의 구절에 대해 후슈케를 끌어온다.)
이 가정이 옳다면, 그 구절은 완전한 자유인인 로마 여성의 형편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그들이 씨족 안에서 혼인할 의무가 있었다는 말은 더더욱 할 수 없다.
씨족 밖 혼인(enuptio gentis)이라는 표현은 이 한 구절에만 나오고 로마 문헌 전체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밖으로 시집간다(enubere)는 낱말은 세 번만 나오는데, 이것도 리비우스에게서이고 그때는 씨족과 관련되지 않는다. 로마 여성이 씨족 안에서만 혼인할 수 있었다는 환상은 오로지 이 한 구절 덕분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 환상은 절대로 유지될 수 없다. 이 구절이 해방 노예에 대한 특별한 제한과 관련된다면 완전한 자유인 여성(ingenuae)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아니면 이 구절이 완전한 자유인 여성에게도 해당된다면, 오히려 여성이 대개 자기 씨족 밖에서 혼인했지만 혼인과 함께 남편의 씨족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 몸젠에게 불리하고 모건에게 유리하다. —
로마 건국 뒤 거의 삼백 년이 지나서도 씨족 유대는 매우 강해서, 귀족 씨족인 파비우스 씨족이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이웃 도시 베이이를 상대로 독자적으로 원정을 벌일 수 있었다. 파비우스 씨족 306명이 출정하여 매복에 걸려 모두 죽었다고 한다. 뒤에 남은 소년 하나가 씨족의 대를 이었다고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씨족 열 개가 프라트리아 하나를 이루었다. 여기서는 그것을 쿠리아라 불렀고, 그리스의 프라트리아보다 더 중요한 공적 권한을 가졌다. 각 쿠리아는 자기 종교 의례와 성소와 사제를 가졌다. 이 사제들은 전체로서 로마의 사제단 가운데 하나를 이루었다. 쿠리아 열 개가 한 부족을 이루었다. 부족은 아마 다른 라티움 부족들처럼 원래 선출된 우두머리 — 군사 지도자이자 최고 사제 — 를 가졌을 것이다. 세 부족 전체가 로마 인민(Populus Romanus)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씨족의 성원이고 씨족을 통해 쿠리아와 부족의 성원인 사람만 로마 인민에 속할 수 있었다. 이 인민의 첫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공적 업무는 우선 원로원이 처리했다. 니부어가 처음으로 옳게 보았듯이 원로원은 씨족 삼백 개의 우두머리들로 이루어졌다. 바로 그 때문에, 곧 씨족의 원로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들(patres)이라 불렸고 그들 전체는 원로원(senatus, 원로들의 평의회, senex 곧 ‘늙은’에서 온 말)이라 불렸다. 각 씨족에서 늘 같은 가문을 뽑는 관습은 여기서도 최초의 부족 귀족을 낳았다. 이 가문들은 스스로 파트리키라 일컫고, 원로원과 다른 모든 관직에 들어갈 독점적 권리를 주장했다. 인민이 시간이 지나며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그것이 진짜 권리로 바뀌었다는 것을, 전설은 로물루스가 첫 원로원 의원들과 그 자손에게 파트리키 신분과 그 특권을 주었다는 이야기로 나타낸다. 원로원은 아테네의 불레처럼 많은 일을 결정했고, 더 중요한 일, 특히 새 법률은 미리 심의했다. 새 법률은 쿠리아 민회(comitia curiata, 쿠리아들의 집회)라 불리는 민회가 결정했다. 인민은 쿠리아별로, 각 쿠리아 안에서는 아마 씨족별로 모였고, 결정할 때 서른 개 쿠리아가 각각 한 표를 가졌다. 쿠리아 민회는 모든 법률을 채택하거나 거부했고, 렉스(rex, 이른바 왕)를 비롯한 모든 고위 관리를 뽑았으며, 전쟁을 선포했고(그러나 강화는 원로원이 맺었다), 로마 시민에 대한 사형이 문제가 되는 모든 경우에 당사자가 상소하면 최고 법정으로서 판결했다. — 끝으로 원로원과 민회 곁에 렉스가 있었다. 렉스는 그리스의 바실레우스와 정확히 일치했고, 몸젠이 그리는 것 같은 거의 절대적인 왕이 결코 아니었다.[1] 그 역시 군사 지도자, 최고 사제, 일부 법정의 의장이었다. 시민의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민사적 권한이나 권력은, 군사 지도자의 징계권이나 법정 의장의 판결 집행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한, 그에게 전혀 없었다. 렉스 직은 세습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마 전임자의 추천에 따라 먼저 쿠리아 민회에서 뽑히고, 두 번째 집회에서 엄숙하게 취임했다. 그를 물러나게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은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운명이 증명한다.
그러므로 영웅 시대의 그리스인처럼 이른바 왕정 시대의 로마인은 씨족, 프라트리아, 부족에 기초하고 그것들에서 발전한 군사적 민주주의 속에서 살았다. 쿠리아와 부족이 일부 인위적인 형성물이었다 해도, 그것들은 자기들이 생겨나 왔고 여전히 사방에서 자기들을 둘러싸고 있던 사회의 진짜 자연발생적 모범을 따라 만들어졌다. 자연발생적인 파트리키 귀족이 이미 발판을 얻었다 해도, 렉스들이 자기 권한을 차츰 넓히려 했다 해도, 그것은 제도의 원래 기본 성격을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그사이 로마 시와, 정복으로 넓어진 로마 영토의 주민은 일부는 이주로, 일부는 정복당한 지역, 대개 라티움 지역의 주민으로 늘어났다. 이 새로운 국가 구성원들은 모두(피호민 문제는 여기서 제쳐 둔다) 옛 씨족, 쿠리아, 부족 밖에 서 있었고, 따라서 본래의 로마 인민인 포풀루스 로마누스(populus romanus)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이었고,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조세와 병역을 져야 했다. 그러나 관직을 맡을 수 없었고, 쿠리아 민회에도, 정복한 국유지의 분배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든 공적 권리에서 배제된 플레브스를 이루었다. 늘어만 가는 수와 군사 훈련과 무장 때문에 그들은, 이제 밖에서 들어오는 어떤 증원에도 굳게 문을 닫은 옛 포풀루스에 맞서는 위협적인 세력이 되었다. 게다가 토지 소유는 포풀루스와 플레브스 사이에 꽤 고르게 나뉘어 있었던 것 같다. 반면 아직 그리 발달하지는 않았던 상업과 산업의 부는 아마 주로 플레브스에게 있었을 것이다.
로마의 순전히 전설적인 원시사는 깊은 어둠에 싸여 있다. 이 어둠은 후대의 법학 교육을 받은 원전 저자들의 합리주의적·실용주의적 해석 시도와 보고 때문에 훨씬 더 짙어졌다. 그래서 옛 씨족 제도에 끝을 낸 혁명의 시기에 대해서도, 경과에 대해서도, 계기에 대해서도 확실한 것을 말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 원인이 플레브스와 포풀루스 사이의 투쟁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렉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만들었다고 하며 그리스의 모범, 특히 솔론에 기댄 새 제도는 새로운 민회를 만들었다. 이 민회는 포풀루스와 평민을 가리지 않고 병역을 지느냐 아니냐에 따라 받아들이거나 배제했다. 무기를 들 의무가 있는 남자 전체가 재산에 따라 여섯 계급으로 나뉘었다. 다섯 계급 각각의 최소 재산은 I. 10만 아스, II. 7만 5천, III. 5만, IV. 2만 5천, V. 1만 1천 아스였다. 뒤로 드 라 말에 따르면 대략 1만 4천, 1만 500, 7천, 3,600, 1,570마르크에 해당한다. 여섯째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는 재산이 더 적어 병역과 조세를 면제받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켄투리아 민회(comitia centuriata)라는 새 민회에서 시민들은 군대식으로, 백 명씩의 켄투리아로 중대별로 모였고, 각 켄투리아가 한 표를 가졌다. 그런데 첫째 계급이 80켄투리아를 냈고, 둘째가 22, 셋째가 20, 넷째가 22, 다섯째가 30, 여섯째도 체면상 하나를 냈다. 여기에 가장 부유한 자들로 이루어진 기병이 18켄투리아로 더해져 모두 193이었다. 과반수는 97표였다. 그런데 기병과 첫째 계급만 합쳐도 98표, 곧 과반수였다. 그들이 한뜻이면 나머지에게는 아예 묻지도 않았다. 유효한 결의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예전 쿠리아 민회의 모든 정치적 권리(이름뿐인 몇 가지를 빼고)가 이 새 켄투리아 민회로 넘어갔다. 그 때문에 쿠리아와 그것을 이루는 씨족들은 아테네에서처럼 단순한 사적·종교적 단체로 격하되었고, 그런 것으로서 오래도록 명맥을 이었다. 한편 쿠리아 민회는 곧 완전히 잠들어 버렸다. 옛 세 씨족 부족도 국가에서 밀어내기 위해 지역 부족 넷이 도입되었다. 각 지역 부족은 도시의 4분의 1에 살았고, 여러 정치적 권리를 가졌다.
이렇게 해서 로마에서도 이른바 왕정이 폐지되기 전에 이미 개인적 혈연 유대에 기초한 옛 사회질서가 깨지고, 지역 구분과 재산 차이에 기초한 새롭고 진짜인 국가 제도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여기서 공적 권력은 병역 의무가 있는 시민층이었고, 그것은 노예뿐 아니라 병역과 무장에서 배제된 이른바 프롤레타리아에도 맞서 있었다.
진짜 왕권을 찬탈한 마지막 렉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쫓아내고, 렉스를 같은 직권을 가진 두 군사 지도자(집정관)로 (이로쿼이족에게서처럼) 바꾸었을 때, 이 새 제도는 더 발전했을 뿐이다. 이 제도 안에서 로마 공화정의 역사 전체가 움직인다. 관직에 오를 권리와 국유지의 몫을 둘러싼 파트리키와 평민의 모든 투쟁이 그 안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파트리키 귀족은 대토지 소유자와 대화폐 소유자라는 새 계급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 계급은 병역으로 몰락한 농민의 토지를 차츰 모두 빨아들였고, 그렇게 생겨난 거대한 농장을 노예로 경작했으며, 이탈리아의 인구를 줄였다. 그렇게 해서 제정에 문을 열어 주었을 뿐 아니라 제정의 후계자인 독일 미개인들에게도 문을 열어 주었다.
주석
- 라틴어의 렉스(rex)는 켈트-아일랜드어의 리(righ, 부족 우두머리)이며 고트어의 레익스(reiks)다. 이 말이 우리 독일어의 퓌르스트(Fürst, 곧 영어 first, 덴마크어 forste처럼 ‘첫째’라는 뜻)가 원래 그랬듯이 씨족이나 부족의 우두머리를 뜻했다는 것은, 고트족이 이미 4세기에 나중의 왕, 곧 한 민족 전체의 군사 지도자를 가리키는 특별한 낱말 티우단스(thiudans)를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울필라스의 성서 번역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와 헤롯은 결코 레익스라 불리지 않고 티우단스라 불리며, 티베리우스 황제의 제국도 레이키(reiki)가 아니라 티우디나수스(thiudinassus)라 불린다. 고트족의 티우단스, 또는 우리가 부정확하게 옮기듯 왕인 티우다레익스(Thiudareiks), 곧 테오도리크, 곧 디트리히의 이름에서 두 명칭이 하나로 합쳐진다. ↩
VII · 켈트인과 독일인의 씨족
지면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지금도 매우 다양한 야만 민족과 미개 민족에게 더 순수하거나 더 흐려진 형태로 남아 있는 씨족 제도들이나, 아시아 문화 민족들의 더 오랜 역사에 남은 그 흔적들은 다루지 않겠다. 이런 것이든 저런 것이든 어디서나 발견된다. 몇 가지 예만 들겠다. 씨족이 아직 인식되기도 전에, 씨족을 오해하려고 가장 애쓴 사람인 매클레넌이 칼미크인, 체르케스인, 사모예드인과 인도의 세 민족인 와랄족, 마가르족, 마니푸르족에게서 씨족을 확인했고 대체로 올바르게 기술했다. 최근에는 M. 코발렙스키가 프샤브인, 헤브수르인, 스반인과 그 밖의 캅카스 부족들에게서 씨족을 발견하고 기술했다. 여기서는 켈트인과 게르만인에게서 씨족이 나타나는 모습에 관해 짧은 메모 몇 가지만 적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켈트 법률들은 씨족이 아직 생생히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아일랜드에서는 잉글랜드인이 씨족을 폭력으로 해체한 뒤에도 씨족이 오늘날까지 적어도 본능적으로는 민중 의식 속에 살아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씨족이 지난 세기 중엽에도 한창 번성했고, 여기서도 오직 잉글랜드인의 무기와 입법과 법정에 굴복했을 뿐이다.
옛 웨일스 법률은 잉글랜드의 정복보다 몇 세기 앞서, 늦어도 11세기에 기록되었다. 이 법률은 아직도 마을 전체가 함께 농사를 짓는 공동 농경을 보여 준다. 다만 그것은 예전의 보편적 관습이 예외적으로 남은 것일 뿐이다. 가족마다 자기가 경작할 5에이커씩을 가졌고, 그 밖에 한 구획을 함께 경작해 그 수확을 나누었다. 이 마을 공동체들이 씨족이나 씨족의 하위 단위를 나타낸다는 것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비추어 보면 의심할 수 없다. 웨일스 법률을 새로 검토해 보아도 이것이 직접 증명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검토를 할 시간이 내게는 없다(내 발췌는 1869년에 한 것이다). 그러나 웨일스 자료와 이와 함께 아일랜드 자료가 직접 증명하는 것은, 켈트인에게서 11세기에도 대우혼이 결코 아직 일부일처제로 밀려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웨일스에서 혼인은 7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풀 수 없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해약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7년에서 사흘 밤만 모자라도 부부는 헤어질 수 있었다. 그러면 재산을 나누었다. 아내가 나누고, 남편이 제 몫을 골랐다. 가구는 일정한, 매우 익살스러운 규칙에 따라 나누었다. 남편이 혼인을 해소하면 아내에게 지참금과 그 밖의 몇 가지를 돌려주어야 했다. 아내가 해소하면 아내가 받는 몫은 더 적었다. 아이들 가운데 남편이 둘을, 아내가 하나를 가졌는데, 아내 몫은 가운데 아이였다. 이혼한 뒤 아내가 다른 남편을 맞았는데 첫 남편이 그녀를 도로 데려가려 하면, 그녀는 새 혼인 침대에 이미 한 발을 올려놓았더라도 그를 따라가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7년을 함께 살았다면, 미리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부부였다. 결혼 전 처녀의 정절은 결코 엄격히 지켜지거나 요구되지 않았다. 이에 관한 규정들은 지극히 경박한 성격의 것이어서 부르주아 도덕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아내가 간통하면 남편은 그녀를 때릴 수 있었다(남편에게 이것이 허락된 세 경우 가운데 하나이며, 그 밖의 경우에 때리면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더 이상 보상을 요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같은 잘못에 대해서는 속죄든 복수든 어느 하나만 있어야 하며, 둘이 함께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내가 재산 분할에서 자기 몫을 잃지 않고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사유는 매우 폭넓었다. 남편의 입 냄새만으로도 충분했다. 부족 추장이나 왕에게 초야권을 면하는 대가로 치르는 속전(gobr merch. 여기서 중세의 이름 마르케타(marcheta), 프랑스어로 마르케트(marquette)가 나왔다)은 이 법전에서 큰 역할을 한다. 여성들은 민회에서 투표권을 가졌다. 여기에 덧붙이자. 아일랜드에서도 비슷한 관계가 증언된다. 그곳에서도 기한부 혼인이 아주 흔했고, 헤어질 때 아내에게 정확히 규정된 큰 혜택이, 심지어 집안일에 대한 보상까지 보장되었다. 그곳에는 다른 아내들 곁에 “첫째 아내”가 나타나고, 유산을 나눌 때 혼인으로 난 자식과 혼인 밖에서 난 자식 사이에 차별이 없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대우혼의 한 모습을 얻는다. 그에 견주면 북아메리카에서 통용되는 혼인 형태가 엄격해 보일 정도다. 그러나 카이사르 시대에도 아직 군혼 속에 살던 민족이니, 11세기에 이런 모습이라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아일랜드 씨족(셉트(sept). 부족은 클레인(clainne), 곧 클랜(clan)이라 한다)은 옛 법률서들뿐 아니라, 클랜의 땅을 잉글랜드 왕의 영지로 바꾸려고 건너온 17세기 잉글랜드 법률가들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기술된다. 땅은 바로 이 시기까지 클랜, 곧 씨족의 공동 소유였다. 다만 추장들이 이미 자기 사유 영지로 바꾸어 버린 땅은 예외였다. 씨족원 하나가 죽어서 살림 하나가 없어지면, 우두머리(잉글랜드 법률가들은 그를 카푸트 코그나티오니스(caput cognationis)라고 불렀다)가 전체 영역의 땅을 나머지 살림들 사이에 새로 나누었다. 이 분배는 대체로 독일에서 통용되던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다. 지금도 이른바 런데일(rundale) 방식의 마을 경지가 몇 군데 남아 있다. 40~50년 전에는 그런 곳이 매우 많았다. 농민들은 예전에 씨족이 함께 소유했으나 잉글랜드 정복자가 빼앗은 땅의 개별 소작인으로서, 저마다 자기 몫의 소작료를 낸다. 그러나 모든 몫의 경작지와 풀밭을 한데 모아, 위치와 질에 따라 모젤 지방에서 말하는 “게반”으로 나누고, 각 게반마다 각자에게 제 몫을 준다. 습지와 목초지는 함께 쓴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때때로, 때로는 해마다 새로 나누었다. 이런 런데일 마을의 경지 지도는 모젤 지방이나 호흐발트의 독일 게회퍼샤프트의 지도와 꼭 같아 보인다. 씨족은 “파벌(factions)” 속에서도 살아남아 있다. 아일랜드 농민들은 흔히 여러 당파로 갈라진다. 이 당파들은 겉보기에 전혀 터무니없거나 무의미한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잉글랜드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한 파가 다른 파에 맞서 벌이는, 그들이 즐기는 성대한 패싸움 말고는 다른 목적이 없는 듯하다. 이것들은 인위적으로 되살린 것, 흩어진 씨족을 뒤늦게 대신하는 것으로서, 물려받은 씨족 본능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저 나름의 방식으로 보여 준다. 덧붙여 말하면, 몇몇 지방에서는 씨족원들이 아직도 꽤 옛 영역에 모여 산다. 그래서 1830년대에도 모너핸 주민의 대다수가 성씨를 네 개만 가졌다. 곧 네 씨족, 네 클랜에서 나왔던 것이다.[1]
스코틀랜드에서 씨족 질서의 몰락은 1745년 봉기가 진압된 때부터 시작된다. 스코틀랜드 클랜이 이 질서의 어느 마디를 특히 나타내는지는 아직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런 마디 하나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월터 스콧의 소설들에서 우리는 이 하일랜드 클랜을 눈앞에 생생히 본다. 모건은 이렇게 말한다. 클랜은
“조직에서나 정신에서나 씨족의 훌륭한 본보기이며, 씨족원에 대한 씨족 생활의 지배를 보여 주는 뚜렷한 예다. … 그들의 반목과 피의 복수에서, 클랜별 영역 분배에서, 땅의 공동 이용에서, 클랜 구성원이 추장에게 또 서로에게 바치는 충성에서, 우리는 어디서나 되풀이되는 씨족 사회의 특징들을 발견한다. … 혈통은 부권에 따라 셈했다. 그래서 남자들의 자식은 그 클랜에 남았고, 여자들의 자식은 아버지의 클랜으로 옮겨 갔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 예전에 모권이 지배했다는 것은, 베다에 따르면 픽트인 왕가에서 여계 계승이 통용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그뿐 아니라 웨일스인에게서처럼 스코트인에게서도 푸날루아 가족의 한 조각이 중세까지 보존되었다. 그것은 초야권이다. 클랜 추장이나 왕은 예전 공동 남편들의 마지막 대표자로서, 속전으로 면제받지 않는 한 모든 신부에게 이 권리를 행사할 자격이 있었다.
독일인이 민족 대이동 때까지 씨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들이 도나우강, 라인강, 비스와강과 북쪽 바다들 사이의 지역을 차지한 것은 우리 기원보다 겨우 몇 세기 전일 수밖에 없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은 아직 한창 이동 중이었고, 수에비족은 카이사르 시대에 와서야 고정된 거주지를 찾았다.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에 대해, 그들이 씨족과 친족별로(gentibus cognationibusque) 정착했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율리우스 씨족(gens Julia)에 속한 로마인의 입에서 나온 이 젠티부스(gentibus)라는 말은, 어떻게 논증해도 지워 버릴 수 없는 일정한 뜻을 지닌다. 이것은 모든 독일인에게 해당했다. 정복한 로마 속주에 정착할 때에도 여전히 씨족별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알라만 부족법은 이 민족이 도나우강 남쪽의 정복한 땅에 혈족(genealogiae)별로 정착했음을 확인해 준다. 게네알로기아(genealogia)는 나중의 마르크 공동체나 촌락 공동체와 완전히 같은 뜻으로 쓰인다. 최근에 코발렙스키는, 이 게네알로기아이가 땅을 나누어 받은 큰 가족 공동체였고 촌락 공동체는 나중에야 이것에서 발전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것은 파라(fara)에도 들어맞을 것이다. 부르군트족과 랑고바르드족, 곧 고트계 부족 하나와 헤르미노네스계, 다시 말해 고지 독일계 부족 하나에게서 이 낱말은 알라만 법전의 게네알로기아와 거의, 아니 정확히 같은 것을 가리킨다. 여기 실제로 있는 것이 씨족인지 가족 공동체인지는 더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독일인 모두에게 씨족을 가리키는 공통된 표현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느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어 유물이 우리를 의심 속에 남겨 둔다. 어원으로 보면 그리스어 게노스(genos), 라틴어 겐스(gens)에 해당하는 것은 고트어 쿠니(kuni), 중세 고지 독일어 퀴네(künne)이며, 같은 뜻으로도 쓰인다. 여자를 가리키는 이름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모권 시대를 가리킨다. 그리스어 귀네(gyne), 슬라브어 제나(žena), 고트어 크비노(qvino), 고대 노르드어 코나(kona), 쿠나(kuna)가 그렇다. — 랑고바르드족과 부르군트족에게서는, 앞서 말했듯이 파라(fara)가 보인다. 그림은 이것을 ‘낳다’를 뜻하는 가정된 뿌리 피산(fisan)에서 끌어낸다. 나는 차라리 더 손에 잡히는 어원인 파란(faran), 곧 ‘가다, 떠돌다’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 그러면 파라는 이동 행렬의 고정된 한 부대, 거의 당연히 친족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이 이름이 처음에는 동쪽으로, 다음에는 서쪽으로 몇백 년에 걸친 이동을 거치면서 차츰 혈족 공동체 자체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 또 고트어 시비야(sibja), 앵글로색슨어 시브(sib), 고대 고지 독일어 시피아(sippia), 시파(sippa), 곧 지페(Sippe)가 있다. 고대 노르드어에서는 ‘친척들’을 뜻하는 복수형 시프야르(sifjar)만 나오고, 단수형은 여신의 이름 시프(Sif)로만 나온다. — 끝으로 「힐데브란트의 노래」에 또 다른 표현이 하나 나온다. 힐데브란트가 하두브란트에게 묻는 대목이다.
“민족의 사내들 가운데 네 아비가 누구인지 … 또는 너는 어느 혈족인지”(eddo huêlihhes cnuosles du sîs).
독일인에게 씨족을 가리키는 공통된 이름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고트어로 쿠니(kuni)였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친족 언어들의 해당 표현과 같다는 점만이 아니다. 왕을 뜻하는 쿠닝(kuning)이라는 낱말이 이 말에서 나왔고, 이 낱말이 본래 씨족이나 부족의 우두머리를 뜻했다는 점도 그렇다. 시비야, 곧 지페는 고려에서 빠지는 듯하다. 적어도 고대 노르드어에서 시프야르는 혈족뿐 아니라 인척도 뜻하므로, 최소한 두 씨족의 구성원을 아우른다. 그러니 시프 자체가 씨족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을 수는 없다.
멕시코인과 그리스인에게서처럼 독일인에게서도 전투 대형은, 기병 부대든 보병의 쐐기 대형이든 씨족 집단에 따라 짜였다. 타키투스가 가족과 친족에 따라 짜였다고 말할 때 이 막연한 표현은, 그의 시대에 로마에서 씨족이 생생한 결합체이기를 그만둔 지 오래였다는 데서 설명된다.
결정적인 것은 타키투스의 한 구절이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한다. 외삼촌은 조카를 제 아들처럼 여긴다. 어떤 이들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의 핏줄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핏줄보다 더 신성하고 긴밀하게 여긴다. 그래서 인질을 요구할 때는 묶어 두려는 사람의 친아들보다 그 누이의 아들이 더 큰 담보로 여겨진다. 여기서 우리는 모권에 따라 조직된, 따라서 본래의 씨족에서 나온 생생한 한 조각을 본다. 더구나 그것은 독일인을 특히 두드러지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2] 그런 씨족의 일원이 자기 친아들을 서약의 담보로 내주었다가 아버지가 약속을 어겨 아들이 희생되었다면, 그것은 아버지가 스스로 감당할 일이었다. 그러나 희생된 것이 누이의 아들이었다면, 가장 신성한 씨족법이 침해된 것이다. 그 소년이나 청년을 다른 누구보다 앞서 지킬 의무가 있던 가장 가까운 씨족 친척이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다. 그는 아이를 담보로 내주지 말았어야 했거나, 아니면 약속을 지켰어야 했다. 독일인에게서 씨족 제도의 흔적을 이것 말고는 하나도 찾지 못한다 해도, 이 한 구절로 충분할 것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약 800년 뒤의 것이기 때문에, 신들의 황혼과 세계의 멸망을 노래한 고대 노르드어 시 「뵐루스파」의 한 구절이다. 이 「여예언자의 환상」에는, 이제 방과 부게가 증명했듯이 그리스도교적 요소도 섞여 짜여 있다. 거기서 큰 파국에 앞서는 전반적 타락과 부패의 시대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한다.
Broedhr munu berjask munu systrungar
ok at bönum verdask, sifjum spilla.
“형제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의 살인자가 되리라. 자매의 자식들이 혈족의 유대를 깨뜨리리라.”
시스트룽르(systrungr)는 이모의 아들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혈연을 부인하는 것이, 시인에게는 형제 살해라는 범죄보다도 더한 일로 여겨진다. 그 고조는 어머니 쪽 친족 관계를 강조하는 시스트룽가르(systrungar)라는 말에 있다. 그 대신 ‘형제자매의 자식들’을 뜻하는 쉬스키나뵈른(syskina-börn)이나 ‘형제자매의 아들들’을 뜻하는 쉬스키나쉬니르(syskina-synir)가 놓였다면, 둘째 행은 첫째 행보다 고조된 것이 아니라 약해지는 하강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뵐루스파」가 생겨난 바이킹 시대에도 스칸디나비아에서 모권에 대한 기억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그 밖의 점에서는 타키투스 시대에, 적어도 그가 비교적 잘 알던 독일인에게서는 모권이 이미 부권에 자리를 내주었다. 자식들이 아버지에게서 상속했고, 자식이 없으면 형제들과 아버지 쪽, 어머니 쪽 삼촌들이 상속했다. 외삼촌이 상속에 참여하는 것은 방금 말한 관습이 보존된 것과 관련이 있으며, 그 무렵 독일인에게서 부권이 아직 얼마나 젊었는지를 마찬가지로 증명한다. 중세 깊숙이까지도 모권의 흔적이 보인다. 그때에도 사람들은, 특히 농노의 경우 누가 아버지인지를 그다지 믿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봉건 영주가 어떤 도시에 도망친 농노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면, 예컨대 아우크스부르크, 바젤,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는 피고가 농노 신분임을 그의 가장 가까운 혈족 여섯 명이, 그것도 오로지 어머니 쪽 혈족이 맹세로 확인해야 했다(마우러, 『도시 제도사』(Städteverfassung), 제1권, 381쪽).
이제 막 사라져 가던 모권이 남긴 또 하나의 흔적은, 로마인으로서는 거의 이해할 수 없었던 독일인의 여성 존중이다. 귀한 집안의 처녀들은 독일인과 조약을 맺을 때 가장 구속력 있는 인질로 여겨졌다. 자기 아내와 딸들이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끔찍한 일이며, 무엇보다도 전투에서 그들의 용기를 북돋운다. 그들은 여성에게서 무언가 신성하고 예언적인 것을 보며, 가장 중요한 일에서도 여성의 조언에 귀를 기울인다. 리페강 가의 브룩테리족 여사제 벨레다가 바타비족 봉기 전체를 이끈 영혼이었던 것도 그런 예다. 이 봉기에서 키빌리스는 독일인과 벨가이족을 이끌고 갈리아의 로마 지배 전체를 뒤흔들었다. 집 안에서는 여성의 지배가 다툼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물론 여성과 노인과 아이들이 모든 일을 맡아야 하고, 남자는 사냥하고 술 마시거나 빈둥거린다. 타키투스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는 누가 밭을 가는지는 말하지 않으며, 노예들은 공물만 바칠 뿐 부역은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힌다. 그러니 농사에 필요한 얼마 안 되는 일은 결국 성인 남자 대다수가 해야 했을 것이다.
혼인 형태는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차츰 일부일처제에 다가가는 대우혼이었다. 아직 엄격한 일부일처제는 아니었다. 귀한 자들에게는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처녀의 정절은 엄격히 지켜졌고(켈트인과 대조적으로), 타키투스는 독일인에게서 혼인의 끈이 깨지지 않는다는 점을 특별한 온기를 담아 이야기한다. 그는 이혼 사유로 아내의 간통만을 든다. 그러나 그의 보고는 이 점에서 빈틈이 많고, 그렇지 않아도 방탕한 로마인들에게 들이대는 덕의 거울을 너무 드러내 놓고 내보인다. 이만큼은 확실하다. 독일인이 숲속에서 이런 예외적인 덕의 기사들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을 나머지 유럽 보통 사람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데에는 바깥 세계와의 조금의 접촉만으로 충분했다. 엄격한 풍속의 마지막 흔적은 로마 세계 한가운데서 독일어보다도 훨씬 더 빨리 사라졌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를 읽어 보기만 하면 된다. 독일의 원시림에서 로마에서처럼 세련된 관능의 사치가 지배할 수 없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니 이 점에서도 독일인은 로마 세계보다 나은 점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언제 어디서도 한 민족 전체에게서 지배한 적이 없는 육체적 금욕을 굳이 그들에게 지어 붙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씨족 제도에서 나온 것으로는, 아버지나 친척의 우정과 마찬가지로 그 적대도 물려받을 의무가 있다. 또 살해나 상해에 대해 피의 복수 대신 치르는 배상금, 곧 속죄금도 그렇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독일 특유의 제도로 여겨지던 이 속죄금은, 이제 수백 민족에게서 씨족 질서에서 나오는 피의 복수를 누그러뜨리는 일반적 형태로 확인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손님 접대 의무와 마찬가지로 이를테면 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도 발견한다. 타키투스(『게르마니아』, 21장)가 손님 접대가 어떻게 행해졌는지 묘사한 것은, 모건이 자기 인디언들에 대해 전하는 것과 세부까지 거의 같다.
타키투스의 독일인이 이미 경작지를 최종적으로 나누었는지 아닌지, 그리고 관련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뜨겁고 끝없는 논쟁은 이제 지나간 일이다. 씨족에 의한, 나중에는 공산주의적 가족 공동체에 의한 경작지의 공동 경작이 거의 모든 민족에게서 확인되었다.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에게서 아직 이것을 증언한다. 그 뒤를 이은 것, 곧 땅을 개별 가족에게 배정하고 주기적으로 새로 나누는 것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경작지의 이런 주기적 재분배가 독일 자체에서도 곳곳에서 오늘날까지 유지되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그 뒤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독일인이 카이사르가 수에비족에게 분명히 돌린 공동 경작에서(그들에게는 나누어진 밭이나 사유 밭이 전혀 없다고 그는 말한다) 타키투스에 이르기까지 150년 동안 해마다 땅을 새로 나누는 개별 경작으로 넘어갔다면,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충분한 진보다. 그 짧은 사이에 아무런 외부 간섭도 없이 저 단계에서 땅의 완전한 사유재산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타키투스에게서 그가 메마른 말로 말하는 것만 읽는다. 그들은 경작지를 해마다 바꾸며(또는 새로 나누며), 그러고도 공유지가 넉넉히 남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독일인의 씨족 제도에 정확히 대응하는 농경과 토지 점유의 단계다.
위의 마지막 단락은 이전 판들에 있던 그대로 고치지 않고 둔다. 그사이 문제는 다른 쪽으로 돌아섰다. 모권적 공산주의 가족과 근대의 고립된 가족 사이의 중간 단계로서 가부장제 가족 공동체가, 보편적이지는 않더라도 널리 퍼져 있었음을 코발렙스키가 증명한 뒤로(앞의 II장 참조), 문제는 더 이상 마우러와 바이츠 사이에서처럼 땅의 공동 소유냐 사유재산이냐가 아니라, 공동 소유의 형태가 무엇이냐다. 카이사르 시대에 수에비족에게 공동 소유뿐 아니라 공동 계산에 따른 공동 경작도 있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경제 단위가 씨족이었는지, 가족 공동체였는지, 둘 사이에 있는 공산주의적 친족 집단이었는지, 아니면 토지 사정에 따라 세 집단이 모두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오래 다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코발렙스키는, 타키투스가 묘사한 상태는 마르크 공동체나 촌락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를 전제로 하며, 촌락 공동체는 인구가 늘어난 결과 훨씬 나중에야 이 가족 공동체에서 발전해 나왔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독일인이 로마 시대에 차지한 땅에서든 나중에 로마인에게서 빼앗은 땅에서든, 그들의 정착지는 마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큰 가족 공동체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공동체는 여러 세대를 아우르며, 그에 맞는 땅을 경작하고, 둘레의 황무지는 이웃과 함께 공동 마르크로 이용했다. 그렇다면 경작지를 바꾼다는 타키투스의 구절은 실제로 농학적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공동체가 해마다 다른 땅을 갈아엎고, 전해의 경작지는 묵히거나 아예 다시 거칠어지게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다. 인구가 희박했으므로 땅 소유를 둘러싼 다툼이 필요 없을 만큼 황무지가 언제나 넉넉히 남았을 것이다. 몇 세기가 지나 가족 공동체의 식구 수가, 당시의 생산 조건에서는 공동 경제가 더는 불가능할 만큼 불어난 뒤에야 공동체가 해체되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공동으로 쓰던 밭과 풀밭은 잘 알려진 방식으로 이제 생겨나는 개별 살림들에 나누어졌는데, 처음에는 기한부로, 나중에는 영구히 나누어졌다. 한편 숲과 목초지와 물은 공동의 것으로 남았다.
러시아에서는 이 발전 과정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듯하다. 독일과 그다음으로 나머지 게르만 나라들에 대해서도, 이 가정이 여러 면에서 기존의 가정, 곧 촌락 공동체를 타키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가정보다 자료를 더 잘 설명하고 난점을 더 쉽게 푼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컨대 『로르슈 문서집』(Codex Laureshamensis)의 가장 오래된 문서들은 대체로 촌락 마르크 공동체보다 가족 공동체를 빌릴 때 훨씬 더 잘 설명된다. 다른 한편 이 가정은 또 새로운 난점과 새로 풀어야 할 문제들을 연다. 여기서는 새로운 연구만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가족 공동체라는 중간 단계가 독일, 스칸디나비아, 잉글랜드에 대해서도 매우 그럴듯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카이사르에게서 독일인은 일부는 막 고정된 거주지를 얻었고 일부는 아직 거주지를 찾고 있는 반면, 타키투스 시대에는 이미 꼬박 한 세기를 정착해 살았다. 이에 맞게 생활 수단의 생산에서 진보가 뚜렷하다. 그들은 통나무집에 산다. 그들의 옷은 아직 매우 숲 냄새 나는 원시적인 것이다. 거친 모직 외투, 짐승 가죽, 여성과 귀한 자들에게는 아마포 속옷이다. 그들의 음식은 젖, 고기, 들열매, 그리고 플리니우스가 덧붙이듯 귀리죽이다(지금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켈트인의 민족 음식이다). 그들의 부는 가축에 있다. 그러나 가축은 품종이 나쁘다. 소는 작고 볼품없으며 뿔이 없고, 말은 작은 조랑말이어서 잘 달리지 못한다. 화폐는 드물게, 조금씩만 쓰였고, 그것도 로마 화폐뿐이었다. 그들은 금과 은을 가공하지 않았고 귀히 여기지도 않았다. 철은 드물었고, 적어도 라인강과 도나우강 가의 부족들에게서는 거의 수입품일 뿐 스스로 얻은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룬 문자(그리스 문자나 라틴 문자를 본뜬 것)는 비밀 문자로만 알려져 있었고 종교적 주술에만 쓰였다. 인신 공양이 아직 행해졌다. 요컨대 여기서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미개의 중간 단계에서 막 높은 단계로 올라선 민족이다. 그런데 로마인과 바로 맞닿은 부족들은 로마 공산품을 쉽게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금속 공업과 직물 공업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반면 북동쪽, 발트해 연안에서는 그런 공업이 의심할 여지 없이 형성되었다. 슐레스비히의 늪지에서 발견된 무구들, 곧 긴 철검, 사슬 갑옷, 은 투구 등은 2세기 말의 로마 주화와 함께 나왔다. 이것들과 민족 대이동으로 퍼진 독일의 금속 제품들은, 본래 로마의 본보기를 따른 경우에도 결코 낮지 않은 수준의 아주 독특한 유형을 보여 준다. 문명화된 로마 제국으로 옮겨 가면서 이 토착 공업은 잉글랜드를 빼고는 어디서나 끝장났다. 이 공업이 얼마나 하나로 생겨나 발전했는지는, 예컨대 청동 브로치가 보여 준다. 부르고뉴, 루마니아, 아조프해 연안에서 발견된 것들은 잉글랜드와 스웨덴에서 발견된 것들과 같은 공방에서 나왔다고 해도 될 만하며, 마찬가지로 의심할 여지 없이 게르만에서 비롯한 것이다.
제도 역시 미개의 높은 단계에 맞는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어디서나 우두머리들(principes)의 평의회가 있었다. 평의회는 작은 일은 스스로 결정했고, 더 중요한 일은 민회가 결정하도록 준비했다. 민회 자체는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는, 적어도 우리가 아는 곳인 아메리카인에게서는 아직 씨족에만 있고 부족이나 부족 연맹에는 아직 없다. 우두머리들(principes)은 이로쿼이족에게서와 똑같이 군사 지도자들(duces)과 아직 뚜렷이 구별된다. 우두머리들은 벌써 일부는 부족원들이 바치는 가축, 곡식 등의 명예 선물로 살아간다. 그들은 아메리카에서처럼 대개 같은 가족에서 선출된다. 부권으로의 이행은 그리스와 로마에서처럼 선출을 차츰 세습으로 바꾸고, 그와 함께 각 씨족 안에 귀족 가문 하나가 형성되는 것을 돕는다. 이 옛 귀족, 이른바 부족 귀족은 대개 민족 대이동 때나 그 직후에 몰락했다. 군사 지도자는 혈통과 상관없이 오로지 능력에 따라 선출되었다. 그들은 권력이 적었고 본보기로 사람들을 움직여야 했다. 군대 안의 본래 징계권을 타키투스는 분명히 사제들에게 돌린다. 실제 권력은 민회에 있었다. 왕이나 부족 우두머리가 의장을 맡고, 인민이 결정한다. 반대는 웅성거림으로, 찬성은 환호와 무기 부딪는 소리로 한다. 민회는 동시에 재판 집회이기도 하다. 여기서 고소가 제기되고 판결되며, 여기서 사형 판결이 내려진다. 사형은 오직 비겁, 민족 반역, 자연에 어긋나는 음욕에만 내려진다. 씨족과 그 밖의 하위 단위에서도 우두머리의 주재 아래 구성원 전체가 재판한다. 모든 독일의 본래 재판에서처럼 이 우두머리는 심리를 이끌고 묻는 사람일 뿐이었을 것이다. 판결을 찾아내는 것은 독일인에게서 예로부터 어디서나 구성원 전체였다.
카이사르 시대 이래 부족 연맹들이 형성되었다. 그 가운데 몇몇에는 이미 왕이 있었다. 최고 군사 지도자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서처럼 벌써 참주정을 노렸고, 때로는 그것을 손에 넣었다. 이렇게 성공한 찬탈자들도 결코 무제한의 지배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벌써 씨족 제도의 족쇄를 깨뜨리기 시작했다. 다른 경우라면 해방 노예는 어떤 씨족에도 속할 수 없었으므로 낮은 지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새 왕들 곁에서는 그런 총신들이 자주 지위와 부와 명예를 얻었다. 로마 제국을 정복한 뒤, 이제 큰 나라의 왕이 된 군사 지도자들 곁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프랑크족에게서는 왕의 노예와 해방 노예가 처음에는 궁정에서, 다음에는 국가에서 큰 역할을 했다. 새 귀족의 상당 부분이 그들에게서 나왔다.
왕권이 생겨나는 것을 도운 제도가 하나 있었다. 종사단이다. 우리는 이미 아메리카 홍인종에게서, 씨족 제도와 나란히 제멋대로 전쟁을 벌이기 위한 사적 결사들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이런 사적 결사들은 독일인에게서는 이미 상설 단체가 되어 있었다. 명성을 얻은 군사 지도자는 노획물을 탐내는 젊은이 한 무리를 주위에 모았다. 그들은 그에게 개인적 충성을 지킬 의무가 있었고, 그도 그들에게 그러했다. 지도자는 그들을 먹이고 선물을 주었으며 위계에 따라 편성했다. 그들은 작은 원정에서는 친위대이자 언제든 싸울 수 있는 부대였고, 큰 원정에서는 이미 갖추어진 장교단이었다. 이 종사단은 약했을 것이 틀림없고, 예컨대 나중에 이탈리아의 오도아케르에게서도 약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종사단은 이미 옛 민족 자유가 무너지는 싹이었고, 민족 대이동 때와 그 뒤에 그 싹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첫째로 종사단은 왕권이 생겨나는 것을 도왔기 때문이다. 둘째로, 타키투스도 이미 지적하듯이, 종사단은 끊임없는 전쟁과 약탈 원정으로만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탈이 목적이 되었다. 종사단의 주인이 가까운 곳에서 할 일이 없으면, 그는 무리를 이끌고 전쟁이 있고 노획물을 얻을 전망이 있는 다른 민족에게로 갔다. 로마의 깃발 아래 독일인에 맞서서까지 대거 싸운 독일인 보조군도 일부는 이런 종사단으로 모은 것이었다. 독일인의 치욕이자 저주인 란츠크네히트 제도가 여기서 이미 첫 꼴을 갖추고 있었다. 로마 제국을 정복한 뒤, 왕의 이 종사들은 부자유인과 로마인 궁정 시종들과 함께 나중 귀족의 두 번째 주요 구성 부분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대체로, 민족으로 연합한 독일 부족들에게는 영웅시대의 그리스인과 이른바 왕정 시대의 로마인에게서 발전한 것과 같은 제도가 통용된다. 곧 민회, 씨족 우두머리들의 평의회, 그리고 이미 실제 왕권을 노리는 군사 지도자다. 그것은 씨족 질서가 대체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가장 완성된 제도였다. 그것은 미개의 높은 단계의 모범적 제도였다. 사회가 이 제도로 충분했던 한계를 넘어서자 씨족 질서는 끝장났다. 씨족 질서는 깨어지고 국가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주석
- 제4판에 붙여. 아일랜드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그곳 농촌 사람들이 아직도 얼마나 씨족 시대의 관념 속에 살고 있는지가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농민은 지주의 소작인인데, 농민에게 지주는 여전히 일종의 클랜 우두머리로 여겨진다. 지주는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땅을 관리해야 하며, 농민은 소작료라는 형태로 그에게 공물을 바치지만, 어려울 때에는 그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조금이라도 더 넉넉한 사람은 누구나, 가난한 이웃이 어려움에 빠지면 곧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도움은 동냥이 아니다. 그것은 더 가난한 클랜원이 더 부유한 클랜원이나 클랜 우두머리에게서 당연한 권리로 받는 것이다. 그러니 아일랜드 농민에게 근대 부르주아적 소유의 개념을 가르칠 수 없다는 정치경제학자와 법률가들의 한탄도 이해가 간다.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소유란 아일랜드인의 머리에는 도무지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순진한 씨족 관념을 지닌 아일랜드인이 갑자기 잉글랜드나 아메리카의 대도시로, 전혀 다른 도덕관과 법관념을 지닌 주민 사이로 떠밀려 오면 어떻게 되는지도 이해가 간다. 그런 아일랜드인은 그곳에서 쉽게 도덕과 법에 대해 완전히 갈피를 잃고 모든 버팀목을 잃으며, 흔히 무더기로 타락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 모권 시대에서 비롯한, 외삼촌과 조카 사이의 특히 긴밀한 유대는 많은 민족에게서 나타나는데, 그리스인은 이것을 영웅시대의 신화에서만 안다. 디오도로스(제4권, 34)에 따르면 멜레아그로스는 테스티오스의 아들들, 곧 자기 어머니 알타이아의 형제들을 쳐 죽인다. 알타이아는 이 행위를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여겨, 살인자인 자기 아들을 저주하고 그가 죽기를 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들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어 멜레아그로스의 목숨을 끊었다.” 같은 디오도로스(제4권, 44)에 따르면 헤라클레스가 이끄는 아르고 원정대가 트라키아에 상륙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피네우스가, 쫓아낸 아내인 보레아스의 딸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새 아내의 부추김을 받아 모질게 학대하는 것을 본다. 그런데 아르고 원정대 가운데에는 보레아스의 아들들, 곧 클레오파트라의 형제들이 있어서, 학대받는 아이들의 외삼촌이었다. 그들은 곧바로 조카들의 편을 들어 그들을 풀어 주고 감시자들을 쳐 죽인다. ↩
VIII · 독일인의 국가 형성
타키투스에 따르면 독일인은 매우 수가 많은 민족이었다. 개별 독일 민족들의 규모에 대해서는 카이사르에게서 대략적인 생각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라인강 왼쪽 기슭에 나타난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의 수를 여자와 아이를 포함해 18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니 개별 민족 하나당 약 10만 명이다.[1] 이것은 이미, 예컨대 이로쿼이족 전체보다도 훨씬 많다. 이로쿼이족은 전성기에 2만 명도 안 되었지만, 오대호에서 오하이오강과 포토맥강에 이르는 온 땅의 공포였다. 라인강 근처에 자리 잡아 비교적 잘 알려진 민족들을 보고에 따라 지도 위에 묶어 보면, 이런 개별 민족 하나는 평균적으로 프로이센 행정구 하나쯤의 넓이, 곧 약 1만 제곱킬로미터, 182 지리 제곱마일을 차지한다. 그런데 비스와강까지 이르는 로마인의 대게르마니아(Germania Magna)는 어림잡아 5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개별 민족의 평균 인구를 10만으로 잡으면 대게르마니아 전체 인구는 500만이 된다. 미개 민족 집단으로서는 상당한 수이지만, 우리 사정에 비하면 1제곱킬로미터에 10명, 1지리 제곱마일에 550명으로 지극히 적다. 그러나 이것으로 당시 살던 독일인의 수가 결코 다 셈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기로 카르파티아산맥을 따라 도나우강 하구까지 고트계 독일 민족들, 곧 바스타르나이족, 페우키니족 등이 살았다. 이들은 수가 아주 많아서 플리니우스는 이들로 독일인의 다섯째 주요 부족을 이루었다. 이들은 이미 기원전 180년에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의 용병으로 등장했고, 아우구스투스 치세 초기에도 아드리아노플 근처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들을 100만으로만 쳐도, 우리 기원 초 독일인의 수는 적어도 600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게르마니아에 정착한 뒤 인구는 점점 빠르게 늘었음이 틀림없다. 앞에서 말한 공업의 진보만으로도 이것이 증명될 것이다. 슐레스비히의 늪지 출토품은 함께 나온 로마 주화로 보아 3세기의 것이다. 그러니 이 무렵 발트해 연안에는 이미 발달한 금속 공업과 직물 공업, 로마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 부유한 자들 사이의 어느 정도의 사치가 있었다. 모두 인구가 더 조밀해졌다는 흔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 북해에서 흑해까지, 라인강과 로마 국경 방벽과 도나우강의 전선 전체에서 독일인의 전면적 공격전도 시작된다. 점점 불어나 밖으로 밀고 나가는 인구를 직접 증명하는 것이다. 싸움은 300년 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고트계 민족들의 주요 부족 전체(스칸디나비아의 고트족과 부르군트족을 빼고)가 남동쪽으로 이동해 거대한 공격선의 왼쪽 날개를 이루었다. 그 중앙에서는 고지 독일인(헤르미노네스)이 도나우강 상류에서, 오른쪽 날개에서는 이제 프랑크족이라 불리는 이스카이보네스가 라인강에서 밀고 나아갔다. 브리타니아 정복은 잉가이보네스의 몫이 되었다. 5세기 말에 로마 제국은 기진맥진하고 피가 마르고 속수무책인 채, 밀려드는 독일인 앞에 열려 있었다.
앞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요람 곁에 서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 관 곁에 서 있다. 지중해 유역의 모든 나라 위로 로마 세계 지배라는 평준화의 대패가 지나갔고, 그것도 몇 세기 동안 그러했다. 그리스어가 저항한 곳이 아니면 모든 민족어가 타락한 라틴어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민족적 차이는 더 이상 없었다. 갈리아인도, 이베리아인도, 리구리아인도, 노리쿰인도 더는 없었고, 모두 로마인이 되었다. 로마의 행정과 로마법은 어디서나 옛 혈족 결합체들을 해체했고, 그와 함께 지방적·민족적 자주성의 마지막 잔재도 해체했다. 새로 구워 낸 로마인다움은 그 대신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어떤 민족성도 표현하지 않았고, 오직 민족성의 결여를 표현했을 뿐이다. 새 민족들의 요소는 어디에나 있었다. 여러 속주의 라틴어 방언은 점점 더 갈라졌다. 예전에 이탈리아, 갈리아, 에스파냐, 아프리카를 독자적인 지역으로 만들었던 자연적 경계는 아직 있었고, 아직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을 새 민족들로 묶어 낼 힘은 어디에도 없었다. 발전할 능력이나 저항할 힘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창조할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다. 거대한 영역의 거대한 인간 무리를 하나로 묶는 끈은 하나뿐이었다. 로마 국가다. 그리고 이 국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가장 나쁜 적이자 억압자가 되었다. 속주들이 로마를 없애 버렸다. 로마 자체는 다른 도시들과 같은 속주 도시가 되었다. 특권은 있었지만 더는 지배하지 않았고, 더는 세계 제국의 중심이 아니었으며, 황제와 부황제의 거처조차 더는 아니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트리어, 밀라노에 살았다. 로마 국가는 오로지 신민을 짜내기 위한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가 되었다. 조세, 국가 부역, 온갖 공납이 주민 대다수를 점점 더 깊은 가난으로 몰아넣었다. 총독, 징세인, 병사들의 착취가 이 압박을 견딜 수 없을 만큼 키웠다. 로마 국가가 세계 지배로 이른 곳이 바로 여기였다. 그것은 안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밖으로 야만인을 막는다는 데에 자기 존재의 권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 질서는 가장 심한 무질서보다 더 나빴고, 그것이 시민을 지켜 준다고 내세운 그 야만인을 시민들은 구원자로 고대했다.
사회 상태도 그에 못지않게 절망적이었다. 이미 공화정 말기부터 로마의 지배는 정복한 속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제정은 이 착취를 없애지 않았고, 거꾸로 규칙으로 정했다. 제국이 쇠퇴할수록 조세와 부담은 더 높아졌고, 관리들은 더 뻔뻔하게 약탈하고 갈취했다. 상업과 공업은 여러 민족을 지배한 로마인의 일이었던 적이 없다. 오직 이자 고리대에서만 그들은 앞뒤 어느 시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상업 가운데 있던 것과 남아 있던 것은 관리들의 갈취 아래 망해 버렸다. 그래도 버텨 낸 것은 제국의 동쪽, 그리스 쪽에 속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고찰 밖에 있다. 전반적 빈곤화, 교류와 수공업과 기예의 후퇴, 인구 감소, 도시의 쇠락, 농경이 더 낮은 단계로 되돌아감 — 이것이 로마 세계 지배의 최종 결과였다.
고대 세계 전체에서 결정적 생산 부문이던 농경은 다시 어느 때보다도 더 그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공화정 말기 이래 거의 온 영역을 차지한 거대한 대농장 복합체(라티푼디움)가 두 가지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하나는 목초지로서, 여기서는 사람 대신 양과 소가 들어섰고, 그것들을 돌보는 데에는 노예 몇 명만 있으면 되었다. 다른 하나는 빌라로서, 많은 노예를 부려 큰 규모로 원경을 했다. 일부는 소유자의 사치를 위해, 일부는 도시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였다. 큰 목초지는 유지되었고 아마 더 넓어지기까지 했다. 빌라 농장과 그 원경은 소유자들이 가난해지고 도시가 쇠락하면서 황폐해졌다. 노예 노동에 바탕을 둔 대농장 경영은 더 이상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대농업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였다. 다시 소농만이 수지가 맞는 형태가 되었다. 빌라가 하나씩 작은 필지로 쪼개져 넘겨졌다. 정해진 금액을 내는 세습 소작인에게, 또는 소작인이라기보다 관리인에 가까워 자기 일의 대가로 한 해 생산물의 6분의 1, 심지어 9분의 1만 받는 파르티아리이(partiarii)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이 작은 경작 필지는 주로 콜로누스에게 내주어졌다. 콜로누스는 그 대가로 해마다 정해진 액수를 냈고, 땅에 묶여 있어서 자기 필지와 함께 팔릴 수 있었다. 그들은 노예는 아니었지만 자유인도 아니었다. 자유인과 결혼할 수 없었고, 그들끼리의 혼인은 완전한 혼인으로 인정되지 않고 노예의 혼인처럼 단순한 동거(contubernium)로 여겨졌다. 그들은 중세 농노의 선구자였다.
고대 노예제는 수명을 다했다. 시골의 대농업에서든 도시의 매뉴팩처에서든 노예제는 더 이상 수고할 가치가 있는 수익을 내지 못했다. 그 생산물의 시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국 전성기의 거대한 생산이 쪼그라들어 남은 소농경과 소수공업에는 많은 노예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사회에서는 부자들의 가내 노예와 사치 노예를 위한 자리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죽어 가는 노예제도, 모든 생산적 노동을 노예의 일로, 자유로운 로마인 — 이제는 누구나 그러했다 — 에게 걸맞지 않은 일로 보이게 하기에는 여전히 충분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쓸모없어 짐이 된 노예를 풀어 주는 일이 점점 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서는 콜로누스가, 저기서는 몰락한 자유인(옛 노예주 아메리카 주들의 가난한 백인(poor whites)과 비슷한)이 늘었다. 그리스도교는 고대 노예제가 차츰 사라진 데에 전혀 아무런 공로가 없다. 그리스도교는 몇 세기 동안 로마 제국에서 노예제에 함께 가담했고, 나중에도 그리스도교도의 노예무역을 막은 적이 없다. 북쪽 독일인의 노예무역도, 지중해 베네치아인의 노예무역도, 그 뒤의 흑인 노예무역도 막지 않았다.[2] 노예제는 더 이상 수지가 맞지 않았고, 그래서 사라졌다. 그러나 죽어 가는 노예제는 자유인의 생산적 노동을 천시하는 데에 독침을 남겼다. 로마 세계가 빠져 있던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이 바로 여기였다. 노예제는 경제적으로 불가능했고, 자유인의 노동은 도덕적으로 천시되었다. 앞의 것은 더 이상, 뒤의 것은 아직 사회적 생산의 기본 형태가 될 수 없었다. 여기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완전한 혁명뿐이었다.
속주들의 사정도 나을 것이 없었다. 우리에게 가장 많은 소식이 남은 곳은 갈리아다. 이곳에는 콜로누스 말고도 아직 자유로운 소농이 있었다. 이들은 관리, 재판관, 고리대금업자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하려고 흔히 권세 있는 자의 보호, 곧 후견 아래로 들어갔다. 그것도 개인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그렇게 해서, 황제들은 4세기에 여러 차례 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보호를 찾는 자들에게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었는가? 후견인은 그들의 땅의 소유권을 자기에게 넘기라는 조건을 붙였고, 그 대신 평생 이용권을 보장했다. 이것은 거룩한 교회가 잘 기억해 두었다가 9세기와 10세기에 하느님 나라와 제 땅을 늘리기 위해 실컷 흉내 낸 수법이다. 물론 그 무렵, 475년 무렵에는 마르세유의 주교 살비아누스가 아직 이런 도둑질에 분개해 열을 올린다. 그는 로마 관리들과 대지주들의 압박이 너무 심해져서 많은 “로마인”이 이미 야만인이 차지한 지역으로 달아났고, 그곳에 자리 잡은 로마 시민들은 다시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만큼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고 전한다. 그 무렵 부모가 가난 때문에 자식을 노예로 파는 일이 잦았다는 것은 이를 금지한 법률이 증명한다.
독일 야만인들은 로마인을 그들 자신의 국가에서 해방해 준 대가로 전체 토지의 3분의 2를 빼앗아 자기들끼리 나누었다. 분배는 씨족 제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정복자의 수가 비교적 적었으므로 아주 넓은 땅이 나누어지지 않고 남았다. 그것은 일부는 민족 전체의, 일부는 개별 부족과 씨족의 소유였다. 각 씨족 안에서 경작지와 풀밭은 개별 살림들에 똑같은 몫으로 제비뽑기로 나누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재분배가 되풀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로마 속주에서는 재분배가 곧 사라졌고, 개별 몫은 양도할 수 있는 사유재산, 곧 알로드가 되었다. 숲과 목초지는 나누지 않고 공동으로 이용했다. 이 이용과, 나누어진 경지의 경작 방식은 옛 관습과 구성원 전체의 결의에 따라 규제되었다. 씨족이 자기 마을에 오래 자리 잡을수록, 그리고 독일인과 로마인이 차츰 섞일수록, 결합의 친족적 성격은 지역적 성격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씨족은 마르크 공동체 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마르크 공동체에서는 구성원들이 친족 관계에서 비롯했다는 흔적이 아직도 꽤 자주 보인다. 이렇게 하여 씨족 제도는, 적어도 마르크 공동체가 유지된 나라들 — 북프랑스, 잉글랜드, 독일, 스칸디나비아 — 에서는 눈에 띄지 않게 지역 제도로 넘어갔고, 그로써 국가에 끼워 맞춰질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씨족 제도 전체를 특징짓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민주적 성격을 그대로 간직했다. 그리하여 나중에 강요된 변질 속에서도 씨족 제도의 한 조각을 간직했고, 그와 함께 피억압자의 손에 들린 무기 하나를 가장 최근 시대까지 살아 있게 했다.
이처럼 씨족 안의 핏줄이 곧 사라졌다면, 그것은 정복의 결과로 부족과 민족 전체에서도 씨족 제도의 기관들이 변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피정복자에 대한 지배는 씨족 제도와 양립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큰 규모로 본다. 로마 속주의 주인이 된 독일 민족들은 이 정복지를 조직해야 했다. 그러나 로마인 대중을 씨족 집단에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씨족 집단을 통해 그들을 지배할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그대로 존속한 로마의 지방 행정 기구들 위에 로마 국가를 대신할 무언가를 세워야 했고, 그것은 다른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씨족 제도의 기관들은 국가 기관으로 바뀌어야 했고, 사정의 압박에 따라 그것도 아주 빨리 바뀌어야 했다. 그런데 정복 민족의 가장 가까운 대표자는 군사 지도자였다. 정복한 영역을 안팎으로 지키려면 그의 권력을 강화해야 했다. 군사 지도자의 지위가 왕권으로 바뀔 순간이 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루어졌다.
프랑크 왕국을 보자. 이곳에서는 승리한 살리 프랑크족에게 광대한 로마 국유지뿐 아니라, 크고 작은 가우 공동체와 마르크 공동체에 나누어지지 않은 매우 넓은 땅, 특히 큰 숲 지대 전부가 완전한 소유로 떨어졌다. 단순한 최고 군사 지도자에서 실제 영주로 바뀐 프랑크 왕이 맨 먼저 한 일은, 이 민족 소유를 왕의 재산으로 바꾸어 민족에게서 훔치고, 자기 종사들에게 선물하거나 빌려주는 것이었다. 이 종사 집단은 본래 왕의 개인적 전쟁 종사단과 군대의 나머지 하급 지휘관들이었다. 이 집단은 곧 로마인, 곧 로마화된 갈리아인으로 보강되었다. 이들은 글 쓰는 기술, 교양, 로망스계 지방어와 라틴 문어에 대한 지식, 그리고 지방법에 대한 지식 덕분에 곧 왕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또 노예, 농노, 해방 노예로도 보강되었다. 이들은 왕의 궁정을 이루었고, 왕은 이들 가운데서 총신을 골랐다. 이 모든 자에게 민족의 땅 조각들이 처음에는 대개 선물로 주어졌고, 나중에는 은대지의 형태로, 처음에는 대개 왕의 생애 동안 빌려주어졌다. 이렇게 하여 민족을 희생시켜 새 귀족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넓게 펼쳐진 왕국은 옛 씨족 제도의 수단으로는 다스릴 수 없었다. 우두머리들의 평의회는, 이미 오래전에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모일 수 없었을 것이며, 곧 왕의 상설 측근으로 대체되었다. 옛 민회는 겉으로만 존속했지만, 이것도 점점 더 군대의 하급 지휘관들과 새로 일어난 권세가들의 집회가 되어 갔다. 프랑크 민족의 대중인 땅을 가진 자유 농민은 끝없는 내전과 정복 전쟁, 특히 카롤루스 대제 치하의 정복 전쟁으로, 예전에 공화정 말기의 로마 농민이 그랬던 것과 꼭 같이 지치고 몰락했다. 본래 군대 전체를 이루었고 프랑스 정복 뒤에도 그 핵심을 이루었던 그들이, 9세기 초에는 너무 가난해져서 다섯 사람에 한 사람도 출정하기 어려웠다. 왕이 직접 소집하던 자유 농민의 소집군 대신, 새로 일어난 권세가들의 가신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들어섰다. 그 가운데에는 예속 농민도 있었다. 이들은 예전에는 왕 말고는 주인을 몰랐고, 그보다 더 전에는 아무 주인도, 왕조차도 몰랐던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카롤루스의 후계자들 아래에서 프랑크 농민층의 몰락은 내전으로, 왕권의 약화와 이에 따른 권세가들의 월권으로, 끝으로 노르만인의 침입으로 완성되었다. 이 권세가들 가운데에는 이제 카롤루스가 임명했으며 직위의 세습을 노리던 가우 백작들도 끼게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50년 뒤 프랑크 왕국은, 400년 전 로마 제국이 프랑크인의 발아래 놓였던 것과 똑같이 저항할 힘도 없이 노르만인의 발아래 놓였다.
밖으로의 무력함만이 아니라 안의 사회 질서, 아니 오히려 사회 무질서도 거의 같았다. 자유로운 프랑크 농민들은 그 선배인 로마 콜로누스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전쟁과 약탈로 몰락한 그들은 새로 일어난 권세가나 교회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야 했다. 왕권은 그들을 보호하기에는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보호를 비싸게 사야 했다. 예전의 갈리아 농민처럼 그들은 자기 땅의 소유권을 보호자에게 넘기고, 그것을 여러 가지로 바뀌는 형태의 공조지로 돌려받아야 했는데, 언제나 부역과 공납을 바치는 대가로만 돌려받았다. 한번 이런 형태의 예속에 빠지자 그들은 차츰 인신의 자유도 잃었다. 몇 세대가 지나자 그들은 대부분 이미 농노였다. 자유 농민층의 몰락이 얼마나 빨리 이루어졌는지는, 당시에는 파리 근교에 있었고 지금은 파리 안에 있는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이르미노 토지 대장이 보여 준다. 근방에 흩어져 있던 이 수도원의 넓은 토지에는 그 무렵, 아직 카롤루스 대제의 생전에 2,788호의 살림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거의 예외 없이 독일식 이름을 가진 프랑크인이었다. 그 가운데 2,080호가 콜로누스, 35호가 리텐, 220호가 노예였고, 자유로운 소작 농민은 겨우 8호였다! 보호자가 농민의 땅을 자기 소유로 넘겨받고 그것을 평생 이용하도록만 돌려주는 관행을 살비아누스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짓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교회가 농민들에게 두루 이 관행을 행했다. 이제 점점 더 쓰이게 된 부역은 로마의 앙가리아(angariae), 곧 국가를 위한 강제 부역을 본보기로 삼았던 것만큼이나, 독일 마르크 공동체 구성원들이 다리와 길을 놓는 일과 그 밖의 공동 목적을 위해 하던 봉사도 본보기로 삼았다. 그러니 겉으로 보면 주민 대중은 400년 뒤에 완전히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만 증명했다. 첫째, 쇠퇴하는 로마 제국의 사회적 편제와 소유 분배가 당시 농경과 공업의 생산 단계에 완전히 맞았고, 따라서 피할 수 없었다는 것. 둘째, 이 생산 단계가 그 뒤 400년 동안 본질적으로 떨어지지도 높아지지도 않았고, 따라서 같은 필연성으로 같은 소유 분배와 같은 주민 계급들을 다시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마지막 몇 세기 동안 도시는 농촌에 대한 예전의 지배를 잃었고, 독일인 지배의 처음 몇 세기 동안에도 그것을 되찾지 못했다. 이것은 농경과 공업이 모두 낮은 발전 단계에 있음을 전제한다. 이런 전체 상황은 필연적으로 지배하는 대토지 소유자와 예속된 소농을 낳는다. 이런 사회에 한편으로는 노예를 부리는 로마의 대농장 경영을, 다른 한편으로는 부역 노동에 의한 새로운 대농업을 접붙이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했는지는, 유명한 황제 직영지(villae)를 두고 카롤루스 대제가 벌인 거대하지만 거의 흔적도 없이 지나가 버린 실험들이 증명한다. 이 실험은 수도원들만 이어 갔고 수도원들에게만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수도원은 독신에 바탕을 둔 비정상적 사회 조직이었다. 그것은 예외적인 일을 해낼 수 있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예외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400년 동안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끝에 와서 처음과 거의 같은 주요 계급들을 다시 발견한다 하더라도, 이 계급들을 이루는 사람들은 달라져 있었다. 고대 노예제는 사라졌다. 노동을 노예의 일이라 경멸하던 몰락한 가난한 자유인들도 사라졌다. 로마 콜로누스와 새로운 예속민 사이에는 자유로운 프랑크 농민이 있었다. 쇠망하는 로마 세계의 “쓸데없는 회상과 헛된 다툼”은 죽어서 묻혔다. 9세기의 사회 계급들은 몰락하는 문명의 늪 속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 산고 속에서 형성되었다. 새 세대는 주인이든 종이든 로마인 선배들에 견주면 사내다운 세대였다. 권세 있는 지주와 봉사하는 농민의 관계는, 로마인에게는 고대 세계가 출구 없이 몰락해 간 형태였지만, 이제 새 세대에게는 새로운 발전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이 400년이 아무리 비생산적으로 보이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큰 산물을 남겼다. 근대 민족들, 곧 앞으로의 역사를 위한 서유럽 인류의 새 형성과 편제다. 독일인은 실제로 유럽을 새로 살려 냈다. 그렇기에 게르만 시대의 국가 해체는 노르만인과 사라센인의 예속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은대지와 보호 위탁(탁신, commendatio)이 봉건제로 발전하는 것으로, 그리고 겨우 200년 뒤에 십자군의 큰 출혈을 해 없이 견딜 만큼 엄청난 인구 증가로 끝났다.
그렇다면 독일인이 죽어 가는 유럽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그 신비로운 마법의 수단은 무엇이었는가? 우리의 쇼비니즘적 역사 서술이 지어내 들려주듯, 독일 종족에게 타고난 기적의 힘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독일인은, 특히 그 무렵에는, 재능이 뛰어난 아리아계 종족이었고 한창 생생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을 젊게 만든 것은 그들의 특유한 민족적 성질이 아니라 그저 — 그들의 미개, 그들의 씨족 제도였다.
그들의 개인적 능력과 용맹, 그들의 자유 감각, 그리고 모든 공적인 일을 자기 일로 여기던 민주적 본능, 요컨대 로마인이 잃어버렸고 오직 그것만이 로마 세계의 진창에서 새 국가들을 만들고 새 민족들을 자라나게 할 수 있었던 모든 성질 — 이것들은 높은 단계의 미개인이 지닌 성격 특징, 그의 씨족 제도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고대 형태의 일부일처제를 바꾸어 놓고, 가족 안의 남성 지배를 누그러뜨리고, 여성에게 고전 세계가 일찍이 알지 못한 높은 지위를 주었다면, 무엇이 그들에게 그렇게 할 능력을 주었는가? 그들의 미개, 그들의 씨족 관습, 모권 시대에서 아직 살아 있던 그들의 유산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그들이 적어도 가장 중요한 나라 셋, 곧 독일, 북프랑스, 잉글랜드에서 진정한 씨족 제도의 한 조각을 마르크 공동체의 형태로 봉건 국가 안에 건져 넣었다면, 그리고 그로써 피억압 계급인 농민에게 중세의 가장 가혹한 농노제 아래에서도 지역적 결속과 저항 수단, 곧 고대의 노예도 근대의 프롤레타리아도 이미 갖추어진 채로 찾아내지 못한 그런 것을 주었다면 — 이것은 무엇 덕분이었는가? 그들의 미개, 혈족별로 정착하는 그들의 오로지 미개적인 정착 방식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그리고 끝으로, 그들이 이미 고향에서 행하던 더 온건한 형태의 예속을 발전시켜 유일한 형태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 덕분인가? 로마 제국에서도 노예제는 점점 더 이 형태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 형태는 푸리에가 처음으로 강조했듯이, 예속된 자들에게 계급으로서 차츰 해방될 수단을 준다(경작자들에게 집단적이고 점진적인 해방의 수단을 제공한다(fournit aux cultivateurs des moyens d'affranchissement collectif et progressif)). 이 형태는 이로써 노예제보다 훨씬 높은 곳에 선다. 노예제에서는 과도기 없이 개인을 곧바로 풀어 주는 것만 가능하다(승리한 반란으로 노예제를 폐지한 일을 고대는 알지 못한다). 반면 실제로 중세의 농노들은 차츰 계급으로서 자신의 해방을 이루어 냈다. 이것을 우리는 무엇 덕분이라 하겠는가? 그들의 미개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미개 때문에 그들은 아직 완성된 노예제, 곧 고대의 노동 노예제에도 동양의 가내 노예제에도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독일인이 로마 세계에 심어 넣은 생명력 있고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은 모두 미개였다. 실제로 죽어 가는 문명에 시달리는 세계를 젊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미개인뿐이다. 그리고 독일인이 민족 대이동 전에 그곳까지, 그리고 그 안에서 힘써 올라선 미개의 가장 높은 단계는 바로 이 과정에 가장 유리한 단계였다. 이것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주석
- 여기서 가정한 수는 갈리아의 켈트인에 관한 디오도로스의 한 구절로 확인된다. “갈리아에는 크기가 고르지 않은 많은 부족이 산다. 가장 큰 부족의 인구는 약 20만이고, 가장 작은 부족은 5만이다.”(시칠리아의 디오도로스, 제5권, 25.) 그러니 평균 12만 5천이다. 갈리아의 개별 민족들은 더 높은 발전 단계에 있었으므로 독일의 개별 민족들보다 다소 수가 많았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
- 크레모나의 주교 리우트프란드에 따르면, 10세기에 베르됭, 곧 신성한 독일 제국 안에서 주요 산업 부문은 환관 제조였다. 환관들은 큰 이윤을 남기고 에스파냐로, 무어인의 하렘으로 수출되었다. ↩
IX · 미개와 문명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인, 로마인, 독일인이라는 세 가지 큰 개별 사례에서 씨족 제도가 해체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끝으로,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 이미 씨족적 사회 조직을 허물어뜨렸고 문명이 시작되면서 그것을 완전히 없애 버린 일반적인 경제적 조건들을 살펴보자. 여기서는 모건의 책만큼이나 마르크스의 『자본』이 필요할 것이다.
씨족은 야만의 중간 단계에서 생겨나 높은 단계에서 더 발전했고, 우리 자료로 판단할 수 있는 한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전성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이 발전 단계에서부터 시작하자.
여기서 우리는 아메리카 홍인종을 예로 삼을 수밖에 없는데, 이들에게서 씨족 제도가 완전히 발달한 모습을 본다. 한 부족은 여러 개, 대개 두 개의 씨족으로 나뉘어 있다. 인구가 늘면 이 본래의 씨족들은 저마다 여러 딸씨족으로 갈라지고, 어머니 씨족은 딸씨족들에 대해 프라트리아로 나타난다. 부족 자체도 여러 부족으로 쪼개지며, 그 각각에서 우리는 옛 씨족들을 대부분 다시 발견한다. 적어도 몇몇 경우에는 하나의 연맹이 친족 부족들을 아우른다. 이 단순한 조직은 그것을 낳은 사회 상태에 완전히 들어맞는다. 그것은 그 사회 상태 자체의 자연발생적인 짜임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게 조직된 사회 안에서 생겨날 수 있는 모든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 밖으로는 전쟁이 조정한다. 전쟁은 부족의 절멸로 끝날 수는 있어도 결코 부족의 예속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지배와 예속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 바로 이것이 씨족 제도의 위대한 점이자 한계다. 안으로는 아직 권리와 의무의 구별이 없다. 공적인 일에 참여하는 것, 피의 복수나 그 속죄가 권리인가 의무인가 하는 물음은 인디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물음은 그에게, 먹고 자고 사냥하는 것이 권리인가 의무인가 하는 물음만큼이나 터무니없게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족과 씨족이 서로 다른 계급으로 갈라지는 일도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이 상태의 경제적 토대를 살피는 데로 이끈다.
인구는 극히 희박하다. 인구는 부족의 거주지에만 모여 있고, 그 둘레에 넓게 먼저 사냥터가 있고, 그다음에 그 부족을 다른 부족들과 갈라놓는 중립적인 방어림이 있다. 분업은 순전히 자연발생적이다. 분업은 두 성 사이에만 있다. 남자는 전쟁을 하고, 사냥과 고기잡이를 나가며, 식량의 원료와 그에 필요한 도구를 마련한다. 여자는 집안을 돌보고 음식과 옷을 장만하며, 요리하고 길쌈하고 바느질한다. 둘은 저마다 자기 영역의 주인이다. 남자는 숲에서, 여자는 집에서. 저마다 자기가 만들고 쓰는 도구의 소유자다. 남자는 무기와 사냥·고기잡이 도구의, 여자는 살림 도구의 소유자다. 살림은 여러 가족, 흔히 많은 가족이 함께하는 공산주의적 살림이다.[1] 함께 만들고 함께 쓰는 것은 공동 소유다. 집, 텃밭, 긴 배가 그렇다. 그러므로 문명사회의 법률가와 경제학자들이 지어낸 “스스로 일해서 얻은 소유”는 여기서만, 그리고 오직 여기서만 아직 들어맞는다. 그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소유가 아직도 기대고 있는 마지막 거짓 법적 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디서나 이 단계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아시아에서 그들은 길들일 수 있고, 길들인 뒤 계속 번식시킬 수 있는 동물들을 발견했다. 야생 들소 암컷은 사냥해서 잡아야 했지만, 길들인 암소는 해마다 송아지 한 마리를 낳았고 덤으로 젖까지 주었다. 가장 앞선 부족들 가운데 몇몇은 — 아리아인, 셈인, 어쩌면 벌써 투란인도 — 처음에는 가축을 길들이는 일을, 나중에는 가축을 번식시키고 돌보는 일만을 주된 노동 부문으로 삼았다. 유목 부족들이 나머지 미개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이것이 최초의 큰 사회적 분업이다. 유목 부족들은 나머지 미개인보다 더 많이 생산했을 뿐 아니라, 다른 생활 수단도 생산했다. 그들은 젖과 젖 제품과 고기를 더 많이 가졌을 뿐 아니라, 가죽, 양모, 염소 털, 그리고 원료가 늘어남에 따라 함께 늘어나는 실과 직물도 가졌다. 이로써 처음으로 규칙적인 교환이 가능해졌다. 이전 단계에서는 우연한 교환만 일어날 수 있다.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 특별한 솜씨가 일시적인 분업으로 이어질 수는 있다. 그래서 후기 석기 시대의 석기 작업장 유적이 여러 곳에서 틀림없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솜씨를 기른 장인들은, 오늘날 인도 씨족 공동체의 상주 수공업자들이 그러하듯, 아마 공동체 전체의 몫으로 일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단계에서는 부족 안의 교환 말고 다른 교환은 생겨날 수 없었고, 그 교환도 예외적인 일에 머물렀다. 이와 달리 여기, 유목 부족들이 떨어져 나온 뒤에는 서로 다른 부족의 성원들 사이에 교환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발전하여 규칙적인 제도로 굳어질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처음에는 부족과 부족이 서로의 씨족장을 통해 교환했다. 그러나 가축 떼가 개별 소유로 넘어가기 시작하자, 개인 사이의 교환이 점점 우세해졌고 마침내 유일한 형태가 되었다. 그런데 유목 부족들이 이웃에게 교환으로 내준 주된 품목은 가축이었다. 가축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값을 매기는 상품이 되었고, 어디서나 그 상품들과 바꾸어 기꺼이 받는 상품이 되었다. 요컨대 가축은 이 단계에서 이미 화폐의 기능을 얻었고 화폐 노릇을 했다. 상품 교환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부터 화폐 상품에 대한 필요는 이처럼 필연적으로, 이처럼 빠르게 발전했다.
원경은 낮은 단계의 아시아 미개인에게는 아마 낯선 것이었겠지만, 늦어도 중간 단계에는 그들에게서 밭농사의 선구로 나타났다. 투란 고원의 기후는 길고 혹독한 겨울을 날 사료를 비축하지 않고는 유목 생활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풀밭을 가꾸고 곡물을 재배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흑해 북쪽의 초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곡물을 일단 가축을 위해 거두게 되자, 곡물은 곧 사람의 식량도 되었다. 경작지는 아직 부족의 소유로 남았고, 처음에는 씨족에게, 나중에는 씨족이 가족 공동체에게, 마침내 개인에게 이용하도록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그 땅에 일정한 점유권을 가졌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 단계의 산업적 성과 가운데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첫째는 베틀이고, 둘째는 금속 광석을 녹이는 일과 금속을 가공하는 일이다. 구리와 주석, 그리고 이 둘을 섞은 청동이 단연 가장 중요했다. 청동은 쓸 만한 도구와 무기를 주었지만 석기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철만이 할 수 있었고, 철을 얻는 법은 아직 몰랐다. 금과 은이 장신구와 장식에 쓰이기 시작했고, 구리와 청동에 비해 이미 가치가 높았을 것이다.
모든 부문 — 목축, 농경, 가내 수공업 — 에서 생산이 늘어나자, 인간의 노동력은 자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 낼 능력을 얻었다. 동시에 생산 증대는 씨족이나 세대 공동체나 개별 가족의 성원 각자에게 떨어지는 하루 노동량도 늘렸다. 새로운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바람직해졌다. 전쟁이 그것을 공급했다. 전쟁 포로가 노예로 바뀌었다. 최초의 큰 사회적 분업은 노동 생산성, 곧 부를 높이고 생산 영역을 넓혔으므로, 주어진 역사적 조건 전체 아래서 필연적으로 노예제를 뒤따르게 했다. 최초의 큰 사회적 분업에서 사회가 처음으로 크게 두 계급으로 갈라지는 일이 생겨났다. 주인과 노예, 착취자와 피착취자로.
가축 떼가 어떻게, 언제 부족이나 씨족의 공동 점유에서 개별 가장들의 소유로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일은 본질적으로 이 단계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가축 떼와 그 밖의 새로운 부와 함께 가족에 혁명이 닥쳤다. 생계 획득은 언제나 남자의 일이었고, 생계를 얻는 수단도 남자가 생산했으며 남자의 소유였다. 가축 떼는 새로운 생계 수단이었고, 처음에 그것을 길들이고 나중에 돌보는 것도 남자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가축은 남자의 것이었고, 가축과 바꾼 상품과 노예도 남자의 것이었다. 이제 생계 활동이 내놓는 잉여는 모두 남자에게 돌아갔다. 여자도 그것을 함께 누렸지만, 소유에는 아무 몫이 없었다. “거친” 전사이자 사냥꾼은 집에서 여자 다음의 둘째 자리에 만족했다. “더 온순한” 목자는 자기 부를 내세워 첫째 자리로 밀고 나섰고 여자를 둘째 자리로 밀어냈다. 그리고 여자는 불평할 수 없었다. 가족 안의 분업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소유 분배를 규정해 왔다. 그 분업은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이제 그것은 지금까지의 가정 내 관계를 뒤집어 놓았다. 오로지 가족 밖의 분업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여자에게 집안에서의 지배를 보장해 준 바로 그 원인, 곧 여자가 가사 노동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 이제는 바로 그 원인으로 남자의 집안 지배를 보장했다. 여자의 가사 노동은 이제 남자의 생계 노동 곁에서 빛을 잃었다. 후자가 전부였고, 전자는 하찮은 덧붙이였다. 여기서 이미 드러난다. 여자가 사회적 생산 노동에서 배제되어 있고 가정의 사적 노동에 갇혀 있는 한, 여성의 해방, 여자와 남자의 평등은 불가능하며 앞으로도 불가능하다. 여성의 해방은 여자가 큰 사회적 규모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고 가사 노동이 여자를 하찮은 정도로만 붙잡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대공업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대공업은 여성 노동을 대규모로 허용할 뿐 아니라 그야말로 요구하며, 사적인 가사 노동마저 점점 공적인 산업으로 해소하려 한다.
남자가 집안에서 사실상 지배하게 되자, 그의 단독 지배를 가로막던 마지막 장벽이 무너졌다. 이 단독 지배는 모권의 전복, 부권의 도입,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로의 점진적 이행으로 확인되고 영구화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옛 씨족 질서에 균열이 생겼다. 개별 가족이 하나의 세력이 되어 씨족에 맞서 위협적으로 일어섰다.
다음 걸음은 우리를 미개의 높은 단계로 이끈다. 모든 문화 민족이 저마다 영웅 시대를 거치는 시기, 철검의 시대이자 철 보습과 철 도끼의 시대다. 철이 인간에게 쓰이게 되었다. 역사를 뒤엎는 역할을 한 모든 원료 가운데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원료였다. 마지막이다 — 감자를 빼면. 철은 더 넓은 땅에서 밭농사를 가능하게 했고, 더 넓은 숲을 개간하게 했다. 철은 수공업자에게, 어떤 돌도 어떤 다른 알려진 금속도 버틸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주었다. 이 모든 일은 서서히 이루어졌다. 최초의 철은 흔히 청동보다도 물렀다. 그래서 돌 무기는 천천히 사라졌을 뿐이다. 『힐데브란트의 노래』에서뿐 아니라 1066년 헤이스팅스에서도 아직 돌도끼가 싸움에 쓰였다. 그러나 이제 진보는 거침없이, 덜 끊기며, 더 빠르게 나아갔다. 돌로 된 성벽과 탑과 총안으로 돌집이나 벽돌집을 둘러싼 도시가 부족이나 부족 연맹의 중심지가 되었다. 건축술의 엄청난 진보였지만, 위험이 커지고 방어가 더 필요해졌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부는 빠르게 늘었지만, 개인의 부로서 늘었다. 직조, 금속 가공, 그리고 점점 더 갈라져 나가는 다른 수공업들은 생산의 다양성과 기술을 갈수록 높였다. 농업은 곡물, 콩류, 과일 말고도 이제 기름과 포도주를 내놓았다. 그것을 만드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더는 한 개인이 다 해낼 수 없었다. 두 번째 큰 분업이 일어났다. 수공업이 농경에서 갈라져 나왔다. 생산과 그에 따라 노동 생산성이 끊임없이 높아지자 인간 노동력의 가치가 올라갔다. 앞 단계에서는 아직 생겨나는 중이고 드문드문했던 노예제가 이제 사회 체계의 본질적 구성 요소가 된다. 노예는 단순한 일손이기를 그치고, 밭과 작업장에서 수십 명씩 몰려 일하게 된다. 생산이 농경과 수공업이라는 두 개의 큰 주요 부문으로 갈라지면서, 곧바로 교환을 위한 생산, 곧 상품생산이 생겨난다. 그와 함께 상업이 생겨난다. 안에서와 부족 경계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바다 건너로도.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직 매우 덜 발달해 있다. 귀금속이 주된 일반적 화폐 상품이 되기 시작하지만, 아직 주조되지 않아 맨 무게로만 교환된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자유민과 노예의 차이 곁에 들어선다. 새로운 분업과 함께 사회가 새로이 계급으로 갈라진 것이다. 개별 가장들 사이의 재산 차이는 옛 공산주의적 세대 공동체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곳이면 어디서나 그것을 깨뜨린다. 그와 함께 이 공동체의 몫으로 땅을 함께 경작하던 일도 깨진다. 경작지는 개별 가족에게 처음에는 일정 기간, 나중에는 아주 영구히 이용하도록 나누어 주어진다. 완전한 사유재산으로의 이행은 서서히,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로의 이행과 나란히 이루어진다.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가 되기 시작한다.
인구가 조밀해지면서 안으로나 밖으로나 더 긴밀하게 뭉쳐야 했다. 친족 부족들의 연맹은 어디서나 필요해진다. 곧 그들의 융합도 필요해지고, 그와 함께 따로 떨어진 부족 영역들이 민족 전체의 영역으로 융합된다. 민족의 군사 지도자 — 렉스(rex), 바실레우스(basileus), 티우단스(thiudans) — 는 없어서는 안 될 상설 관리가 된다. 민회가 아직 없던 곳에서는 민회가 생겨난다. 군사 지도자, 평의회, 민회가 군사적 민주주의로 발전한 씨족 사회의 기관들을 이룬다. 군사적이라 함은 전쟁과 전쟁을 위한 조직이 이제 민족 생활의 정규 기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웃의 부는, 부를 얻는 것이 이미 삶의 으뜸가는 목적 가운데 하나로 보이는 민족들의 탐욕을 자극한다. 그들은 미개인이다. 그들에게는 약탈이 일해서 얻는 것보다 더 쉽고 심지어 더 명예로운 일로 여겨진다. 전쟁은 예전에는 침해에 대한 복수나 모자라게 된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만 벌였지만, 이제는 순전히 약탈을 위해 벌어지고, 상시적인 생계 부문이 된다. 새로 요새화된 도시들 둘레에 위협적인 성벽이 공연히 솟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해자 속에는 씨족 제도의 무덤이 입을 벌리고 있고, 그 탑들은 이미 문명 속으로 솟아 있다.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약탈 전쟁은 최고 군사 지도자의 권력도, 하위 지도자들의 권력도 키운다. 같은 가문에서 후계자를 뽑던 관습은, 특히 부권이 도입된 뒤로, 처음에는 묵인되고 다음에는 요구되며 마침내 찬탈된 세습제로 차츰 넘어간다. 세습 왕권과 세습 귀족의 토대가 놓인다. 이렇게 씨족 제도의 기관들은 민족 속에, 씨족·프라트리아·부족 속에 있던 뿌리에서 차츰 떨어져 나오고, 씨족 제도 전체가 그 반대물로 뒤집힌다. 부족들이 자기 일을 자유롭게 처리하던 조직에서 이웃을 약탈하고 억누르는 조직이 되며, 그에 따라 그 기관들도 민족 의지의 도구에서 제 민족에 맞서는 지배와 억압의 독립된 기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에 대한 탐욕이 씨족원들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 가르지 않았다면, “같은 씨족 안의 재산 차이가 이해의 통일을 씨족원들 사이의 적대로 바꾸어 놓지”(마르크스) 않았다면, 그리고 노예제의 확대가 이미, 일해서 생계를 얻는 것을 노예에게나 어울리는 일로, 약탈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게 만들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로써 우리는 문명의 문턱에 이르렀다. 문명은 분업의 새로운 진전으로 열린다. 가장 낮은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기 필요를 위해서만 직접 생산했다. 이따금 있던 교환 행위는 드문드문했고, 우연히 생긴 남는 것에만 관련되었다. 미개의 중간 단계에서 우리는 유목 민족들에게서 이미 가축이라는 점유물을 본다. 가축 떼가 일정한 크기에 이르면 그것은 자기 필요를 넘는 잉여를 규칙적으로 내놓는다. 동시에 유목 민족과 가축 떼가 없는 뒤처진 부족 사이의 분업, 따라서 나란히 존재하는 서로 다른 두 생산 단계, 따라서 규칙적인 교환의 조건을 본다. 미개의 높은 단계는 농경과 수공업 사이의 더 나아간 분업을 보여 준다. 그와 함께 노동 생산물 가운데 끊임없이 커지는 부분이 곧바로 교환을 위해 생산되고, 그와 함께 개별 생산자들 사이의 교환이 사회의 생활필수 조건으로 올라선다. 문명은 이미 있던 이 모든 분업을 굳히고 강화한다. 특히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날카롭게 함으로써 그렇게 한다(이때 고대에서처럼 도시가 경제적으로 농촌을 지배할 수도 있고, 중세에서처럼 농촌이 도시를 지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문명 고유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세 번째 분업을 보탠다. 문명은 더는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생산물의 교환에만 종사하는 계급, 곧 상인을 만들어 낸다. 지금까지 계급 형성의 모든 싹은 오로지 생산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지휘하는 자와 실행하는 자로, 또는 큰 규모의 생산자와 작은 규모의 생산자로 갈랐다. 여기서 처음으로 생산에 아무런 몫도 맡지 않으면서 생산의 지휘권을 대체로 장악하고 생산자들을 경제적으로 굴복시키는 계급이 나타난다. 이 계급은 어느 두 생산자 사이에서나 없어서는 안 될 중개자가 되어 둘을 다 착취한다. 생산자들에게서 교환의 수고와 위험을 덜어 주고, 그들의 생산물 판로를 먼 시장까지 넓혀 주며, 그럼으로써 인구 가운데 가장 쓸모 있는 계급이 된다는 구실 아래, 기생자 계급, 진짜 사회적 기생충들의 계급이 형성된다. 이 계급은 아주 보잘것없는 실제 기여의 대가로 국내 생산과 외국 생산 양쪽에서 알짜를 걷어 가고, 순식간에 막대한 부와 그에 걸맞은 사회적 영향력을 얻는다. 바로 그 때문에 이 계급은 문명 시기 내내 늘 새로운 영예와 갈수록 더 큰 생산 지배를 누리도록 부름받는다. 마침내 그들 스스로 자기 고유의 생산물을 내놓을 때까지. 주기적인 상업 공황이 그것이다.
물론 우리가 지금 다루는 발전 단계에서 갓 생겨난 상인층은 자기 앞에 놓인 큰일들을 아직 전혀 짐작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형성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금속화폐, 곧 주조 화폐가 형성되고, 금속화폐와 함께 비생산자가 생산자와 그의 생산을 지배하는 새로운 수단이 생겨난다. 상품 중의 상품, 다른 모든 상품을 몰래 제 안에 품고 있는 상품이 발견되었다. 마음대로 바람직한 것, 바라는 것이면 무엇으로든 바뀔 수 있는 요술 수단이었다. 그것을 가진 자가 생산의 세계를 지배했다.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누구보다 많이 가졌는가? 상인이다. 그의 손에서 화폐 숭배는 안전했다. 그는 모든 상품이, 따라서 모든 상품생산자가 화폐 앞에서 얼마나 엎드려 경배해야 하는지가 드러나게 했다. 그는 부의 다른 모든 형태가 부 그 자체의 이 화신 앞에서 얼마나 한낱 허깨비가 되는지를 실제로 증명했다. 화폐의 힘이 이 청년기에서처럼 원초적인 조야함과 폭력성으로 나타난 적은 다시 없었다. 화폐를 받고 상품을 파는 일 다음에는 화폐 대부가 왔고, 그와 함께 이자와 고리대가 왔다. 그리고 후대의 어떤 입법도 고대 아테네와 고대 로마의 입법만큼 채무자를 고리대 채권자의 발아래 그토록 가차 없이, 구제할 길 없이 내던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두 입법은 경제적 강제 말고는 아무 강제 없이, 관습법으로 저절로 생겨났다.
상품과 노예의 부, 화폐의 부 곁에 이제 토지 소유의 부도 나타났다. 원래 씨족이나 부족이 개인에게 맡겨 준 땅뙈기에 대한 개인의 점유권은 이제 그 땅뙈기가 상속 재산으로 그들에게 속할 만큼 굳어졌다. 그들이 최근에 무엇보다 애써 얻으려 한 것은 땅뙈기에 대한 씨족 공동체의 권리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 권리가 그들에게 족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족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곧이어 새로운 토지 소유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땅에 대한 완전하고 자유로운 소유란, 땅을 줄어들지 않고 제한 없이 점유할 수 있다는 뜻일 뿐 아니라 땅을 팔아넘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땅이 씨족 소유였던 동안에는 이런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새 토지 소유자가 씨족과 부족의 상급 소유권이라는 족쇄를 마침내 벗어던졌을 때, 그는 지금까지 자기를 땅에 떼려야 뗄 수 없게 묶어 두던 끈도 끊어 버렸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토지 사유재산과 동시에 발명된 화폐가 그에게 똑똑히 알려 주었다. 땅은 이제 팔고 저당 잡히는 상품이 될 수 있었다. 토지 소유가 도입되자마자 저당도 벌써 발명되었다(아테네를 보라). 헤테리즘과 매춘이 일부일처제의 발꿈치에 달라붙듯이, 이제부터 저당은 토지 소유의 발꿈치에 달라붙는다. 너희는 완전하고 자유로운, 팔아넘길 수 있는 토지 소유를 원했다. 좋다, 이제 가졌다 — “네가 원한 일이다, 조르주 당댕!(tu l'as voulu, George Dandin!)”
이렇게 상업의 확대, 화폐와 화폐 고리대, 토지 소유와 저당과 함께, 부가 수가 적은 한 계급의 손에 집적되고 집중되는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곁에서 대중의 빈곤화가 심해지고 빈민의 무리가 늘어났다. 새로운 부의 귀족은, 처음부터 옛 부족 귀족과 겹치지 않은 한, 옛 귀족을 마침내 뒷전으로 밀어냈다(아테네에서, 로마에서, 독일인에게서). 그리고 자유민이 부에 따라 계급으로 나뉘는 이 일과 나란히, 특히 그리스에서 노예 수가 엄청나게 늘었다.[2] 노예의 강제 노동은 사회 전체의 상부구조가 그 위에 세워진 토대였다.
이제 이 사회적 변혁 속에서 씨족 제도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씨족 제도는 자기가 손쓰지 않았는데도 자라난 새로운 요소들 앞에서 무력했다. 씨족 제도의 전제는 한 씨족, 적어도 한 부족의 성원들이 같은 영역에 모여 살며 그곳에 자기들끼리만 산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래전에 끝났다. 어디서나 씨족과 부족이 뒤섞였고, 어디서나 노예, 보호민, 이방인이 시민들 한가운데 살았다. 미개의 중간 단계 끝 무렵에야 얻은 정착 생활은, 상업과 생업의 변화와 토지 소유자의 교체에서 비롯한 거주지의 이동성과 가변성으로 거듭 깨졌다. 씨족 단체의 성원들은 더는 자기들 공동의 일을 처리하려고 함께 모일 수 없었다. 종교 축제 같은 중요하지 않은 일만 그럭저럭 치러졌다. 씨족 단체가 지키도록 맡고 지킬 능력이 있던 필요와 이해 곁에, 생업 관계의 변혁과 그에 따른 사회 구성의 변화에서 새로운 필요와 이해가 생겨났다. 그것들은 옛 씨족 질서에 낯설 뿐 아니라 온갖 방식으로 그것과 어긋났다. 분업으로 생겨난 수공업자 집단들의 이해, 농촌과 대립하는 도시의 특수한 필요는 새로운 기관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집단들은 저마다 아주 다양한 씨족, 프라트리아, 부족 출신 사람들로 이루어졌고, 이방인까지 포함했다. 그러므로 이 기관들은 씨족 제도 바깥에서, 그것과 나란히, 따라서 그것에 맞서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 또 씨족 단체마다 안에서 이 이해 충돌이 나타났다. 그 충돌은 같은 씨족, 같은 부족 안에 부자와 빈자, 고리대금업자와 채무자가 함께 있는 데서 절정에 이르렀다. — 여기에 씨족 공동체에 낯선 새 인구의 무리가 더해졌다. 그들은 로마에서처럼 나라 안에서 하나의 세력이 될 수 있었고, 또 혈연으로 맺어진 씨족과 부족에 차츰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 많았다. 이 무리 앞에서 씨족 공동체들은 닫힌 특권 단체로 맞서 있었다. 원래의 자연발생적 민주주의는 미움받는 귀족정으로 뒤바뀌었다. — 끝으로, 씨족 제도는 내부 대립을 모르는 사회에서 자라났고 그런 사회에만 맞았다. 씨족 제도에는 여론 말고는 아무 강제 수단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기 경제적 생활 조건 전체 때문에 자유민과 노예로, 착취하는 부자와 착취당하는 빈자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던 사회가 생겨났다. 그것은 이 대립들을 다시 화해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갈수록 극단으로 몰아붙일 수밖에 없는 사회였다. 이런 사회는 이 계급들이 서로 끊임없이 공공연하게 싸우거나, 아니면 제3의 권력의 지배 아래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이 제3의 권력은 겉보기에 서로 다투는 계급들 위에 서서 그들의 공공연한 충돌을 억누르고, 계급투쟁은 기껏해야 경제 영역에서, 이른바 합법적 형태로만 벌어지게 했다. 씨족 제도는 수명을 다했다. 씨족 제도는 분업과 그 결과인 사회의 계급 분열로 깨졌다. 그 자리를 국가가 차지했다.
국가가 씨족 제도의 폐허 위에 일어서는 세 가지 주요 형태를 우리는 앞에서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아테네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전적인 형태를 보여 준다. 여기서 국가는 씨족 사회 자체 안에서 발전하는 계급 대립에서 직접, 그리고 주로 생겨난다. 로마에서 씨족 사회는, 자기 바깥에 서 있고 권리는 없되 의무는 지는 수많은 플레브스 한가운데서 닫힌 귀족층이 된다. 플레브스의 승리는 옛 씨족 제도를 깨뜨리고 그 폐허 위에 국가를 세운다. 그 국가 속에서 씨족 귀족과 플레브스는 곧 둘 다 완전히 녹아 없어진다. 끝으로 로마 제국을 정복한 독일인에게서는, 국가가 넓은 외국 영토의 정복에서 직접 생겨난다. 그 영토를 지배할 수단을 씨족 제도는 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정복에는 옛 주민과의 진지한 싸움도, 더 진전된 분업도 따르지 않는다. 피정복자와 정복자의 경제 발전 단계가 거의 같고, 따라서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그대로 남는다. 그 때문에 씨족 제도는 바뀐 지역적 모습으로, 곧 마르크 제도로 오랜 세기 동안 살아남을 수 있고, 후대의 귀족 가문과 도시 귀족 가문에서, 심지어 디트마르셴에서처럼 농민 가문에서도 한동안 약해진 형태로 다시 젊어질 수 있다.[3]
그러므로 국가는 결코 밖에서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국가는 헤겔이 주장하듯 “인륜적 이념의 현실태”, “이성의 형상이자 현실태”도 아니다. 국가는 오히려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른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이 사회가 자기 자신과 풀 수 없는 모순에 얽혀 들었으며, 몰아낼 힘이 없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들로 갈라졌다는 고백이다. 그런데 이 대립들, 곧 경제적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계급들이 쓸데없는 싸움으로 자신과 사회를 집어삼키지 않게 하려면, 겉보기에 사회 위에 서서 충돌을 누그러뜨리고 “질서”의 테두리 안에 붙잡아 둘 권력이 필요해졌다. 사회에서 나왔지만 사회 위에 서고 사회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이 권력이 바로 국가다.
옛 씨족 조직과 비교할 때 국가의 특징은 첫째, 국가 구성원을 지역에 따라 나누는 데 있다. 앞에서 보았듯, 혈연의 끈으로 형성되고 결속된 옛 씨족 공동체들은 쓸모없게 되었다. 대부분 그것들이 성원들이 일정한 영역에 묶여 있는 것을 전제했는데, 그런 결속은 오래전에 끝났기 때문이다. 영역은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은 이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역 구분을 출발점으로 삼고, 시민들이 씨족과 부족에 상관없이 자기가 자리 잡은 곳에서 공적 권리와 의무를 다하게 했다. 국가 구성원을 거주지에 따라 이렇게 조직하는 것은 모든 국가에 공통된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아테네와 로마에서 혈족에 따른 옛 조직을 대신하기까지 얼마나 힘겹고 오랜 싸움이 필요했는지 보았다.
둘째는 공적 권력의 설치다. 이 공적 권력은 스스로를 무장력으로 조직하는 주민과 더는 직접 일치하지 않는다. 이 특수한 공적 권력이 필요한 것은, 계급으로 갈라진 뒤로는 주민이 스스로 움직이는 무장 조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노예도 주민에 속한다. 아테네 시민 9만 명은 노예 36만 5천 명에 맞서 하나의 특권 계급을 이룰 뿐이다. 아테네 민주정의 인민 군대는 노예들에 맞선 귀족적 공적 권력이었고, 노예들을 억눌렀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시민들을 억누르기 위해서도 헌병대가 필요해졌다. 이 공적 권력은 모든 국가에 존재한다. 그것은 무장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씨족 사회가 전혀 몰랐던 물적 부속물들, 곧 감옥과 온갖 강제 시설로도 이루어진다. 계급 대립이 아직 덜 발달한 사회나 외진 지역에서는,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어떤 때 어떤 곳에서 그렇듯, 공적 권력이 아주 보잘것없어 거의 사라질 지경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 안의 계급 대립이 날카로워지고 서로 맞닿은 국가들이 커지고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공적 권력은 강해진다. 오늘날 우리 유럽만 보라. 여기서는 계급투쟁과 정복 경쟁이 공적 권력을 사회 전체와 국가 자체마저 삼킬 듯한 높이로 끌어올려 놓았다.
이 공적 권력을 유지하려면 국가 시민의 부담금, 곧 조세가 필요하다. 씨족 사회는 조세를 전혀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그것에 대해 할 이야기가 넘친다. 문명이 진전하면 조세로도 모자란다. 국가는 미래를 담보로 어음을 발행하고, 차입을 하고, 국채를 진다. 이에 대해서도 늙은 유럽은 노래 한 자락쯤 부를 수 있다.
공적 권력과 조세 징수권을 쥔 관리들은 이제 사회의 기관으로서 사회 위에 선다. 씨족 제도의 기관들에 바쳐지던 자유롭고 자발적인 존경은, 설령 그들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 해도 그들에게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와 멀어지는 권력의 담지자로서 그들은 예외법으로 존경받게 되어야 한다. 그 예외법 덕분에 그들은 특별한 신성함과 불가침성을 누린다. 문명국가의 가장 하찮은 경찰 졸개도 씨족 사회의 모든 기관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문명의 가장 강력한 군주와 가장 위대한 정치가나 장군도, 가장 낮은 씨족장이 받는 강요되지 않고 다툼 없는 존경을 부러워할 수 있다. 한쪽은 사회 한가운데 서 있다. 다른 쪽은 사회 바깥에서, 사회 위에서 무언가를 대변하려 들 수밖에 없다.
국가는 계급 대립을 억눌러 둘 필요에서 생겨났지만, 동시에 이 계급들의 충돌 한가운데서 생겨났다. 그러므로 국가는 대개 가장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다. 이 계급은 국가를 통해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이 되고, 그리하여 피억압 계급을 억누르고 착취할 새로운 수단을 얻는다. 그래서 고대 국가는 무엇보다 먼저 노예를 억누르기 위한 노예 소유자의 국가였다. 마찬가지로 봉건국가는 농노와 예속 농민을 억누르기 위한 귀족의 기관이었고, 현대의 대의제 국가는 자본이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도구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싸우는 계급들이 서로 거의 균형을 이루어 국가권력이 겉보기에 중재자로서 순간적으로 양쪽에 대해 어느 정도 독립성을 얻는 시기들이 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절대왕정이 그러했다. 그것은 귀족과 시민계급을 서로 맞서게 하여 균형을 잡았다. 제1제정과 특히 제2제정 프랑스의 보나파르트주의도 그러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지에, 부르주아지를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게 해서 이용했다. 이런 종류의 가장 새로운 업적, 곧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똑같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업적은 비스마르크 민족의 새 독일 제국이다. 여기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서로 맞서게 하여 균형을 잡고, 똑같이 속여서 몰락한 프로이센 시골 융커들의 이익으로 삼는다.
게다가 역사상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국가 시민에게 허락된 권리가 재산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이로써 국가가 가진 자 계급이 가지지 못한 자에 맞서 자기를 지키는 조직임이 곧바로 공언된다. 아테네와 로마의 재산 등급에서 이미 그러했다. 정치적 권력 지위가 토지 소유에 따라 짜인 중세 봉건국가에서도 그러했다. 현대 대의제 국가의 선거 재산 자격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재산 차이를 이렇게 정치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결코 본질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 발전의 낮은 단계를 나타낸다. 가장 높은 국가 형태인 민주공화국은 우리 현대의 사회관계 속에서 점점 더 피할 수 없는 필연이 되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마지막 결전이 오직 그 안에서만 끝까지 치러질 수 있는 국가 형태다. 이 민주공화국은 공식적으로는 재산 차이를 더는 알지 못한다. 민주공화국에서 부는 간접적으로, 그러나 그만큼 더 확실하게 권력을 행사한다. 한편으로는 관리의 직접적 부패라는 형태로 그렇게 한다. 아메리카가 그 고전적 본보기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와 증권거래소의 동맹이라는 형태로 그렇게 한다. 이 동맹은 국채가 늘어날수록, 그리고 주식회사들이 운수만이 아니라 생산 자체까지 제 손에 집중하고 그 중심을 다시 증권거래소에 둘수록 더 쉽게 이루어진다. 그 뚜렷한 예로는 아메리카 말고도 최근의 프랑스 공화국이 있고, 고지식한 스위스도 이 분야에서 제 몫을 해냈다. 그러나 정부와 증권거래소의 이 형제 동맹에 민주공화국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은 영국 말고도 새 독일 제국이 증명한다. 거기서는 보통선거권이 누구를 더 높이 들어 올렸는지, 비스마르크인지 블라이히뢰더인지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끝으로 가진 자 계급은 보통선거권을 통해 직접 지배한다. 피억압 계급, 곧 우리의 경우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해방할 만큼 아직 성숙하지 못한 동안은, 그 계급은 대다수가 기존 사회질서를 유일하게 가능한 질서로 여기고, 정치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의 꼬리, 그 맨 왼쪽 날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계급이 자기 해방을 향해 성숙해 가는 만큼, 그만큼 그 계급은 독자적인 당으로 자기를 구성하고, 자본가의 대표가 아닌 자기 대표를 뽑는다. 이렇게 보통선거권은 노동자계급의 성숙도를 재는 눈금이다. 오늘날의 국가에서 보통선거권은 그 이상일 수 없고 결코 그 이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보통선거권이라는 온도계가 노동자들에게서 끓는점을 가리키는 날, 노동자들도 자본가들도 자기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므로 국가는 영원한 옛날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국가 없이 살아간 사회, 국가와 국가권력을 전혀 몰랐던 사회들이 있었다. 사회의 계급 분열과 필연적으로 결부된 경제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이 분열 때문에 국가는 필연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빠른 걸음으로 생산의 한 발전 단계로 다가가고 있다. 그 단계에서는 이 계급들의 존재가 필연이기를 그쳤을 뿐 아니라 생산의 적극적인 장애물이 된다. 계급들은 예전에 생겨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이 무너질 것이다. 계급과 함께 국가도 피할 수 없이 무너진다.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을 바탕으로 생산을 새로 조직하는 사회는, 국가 기구 전체를 그때 그것이 있어야 할 곳으로 옮겨 놓을 것이다. 물레와 청동 도끼 곁, 고대 유물 박물관으로.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문명은 사회의 발전 단계로서, 이 단계에서 분업과, 분업에서 생겨나는 개인 사이의 교환과, 이 둘을 아우르는 상품생산이 완전히 펼쳐지고 이전 사회 전체를 뒤엎는다.
이전 모든 사회 단계의 생산은 본질적으로 공동 생산이었다. 소비도 크고 작은 공산주의적 공동체 안에서 생산물을 직접 분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생산의 공동성은 아주 좁은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생산자들이 자기 생산 과정과 생산물을 지배한다는 것을 수반했다. 생산자들은 생산물이 어떻게 되는지 안다. 그들은 그것을 소비하며, 생산물은 그들의 손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생산이 이런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한, 생산은 생산자들의 손을 벗어나 버릴 수 없으며, 문명에서 규칙적으로 그리고 피할 수 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산자들에 맞서는 유령 같은 낯선 힘들을 낳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생산 과정 속으로 분업이 서서히 끼어든다. 분업은 생산과 취득의 공동성을 허물고, 개인에 의한 취득을 지배적 규칙으로 끌어올리며, 그럼으로써 개인 사이의 교환을 낳는다. 그 과정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차츰 상품생산이 지배적 형태가 된다.
상품생산, 곧 더는 자기 소비가 아니라 교환을 위한 생산과 함께, 생산물은 필연적으로 주인을 바꾼다. 생산자는 자기 생산물을 교환으로 넘겨주고, 그것이 어떻게 되는지 더는 알지 못한다. 화폐가, 그리고 화폐와 함께 상인이 생산자들 사이에 중개자로 들어서면, 교환 과정은 더 얽히고 생산물의 최종 운명은 더 불확실해진다. 상인은 많고, 그 누구도 다른 상인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이제 상품은 손에서 손으로만이 아니라 시장에서 시장으로도 옮겨 간다. 생산자들은 자기 생활권의 생산 전체에 대한 지배를 잃었고, 상인들은 그것을 넘겨받지 못했다. 생산물과 생산은 우연에 내맡겨진다.
그러나 우연이란 하나의 연관의 한쪽 극일 뿐이고, 그 연관의 다른 쪽 극은 필연이라 불린다. 우연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에서, 우리는 오래전에 각 분야마다 이 우연 속에서 관철되는 내적 필연성과 법칙성을 증명했다. 그런데 자연에 맞는 것은 사회에도 맞는다. 어떤 사회적 활동, 일련의 사회적 과정이 인간의 의식적 통제를 벗어날 만큼 강력해지고 인간의 손을 벗어날수록, 그리고 그것이 순전한 우연에 내맡겨진 것처럼 보일수록, 그만큼 더 이 우연 속에서 그것 고유의 내재적 법칙들이 마치 자연필연성처럼 관철된다. 그러한 법칙들이 상품생산과 상품 교환의 우연성도 지배한다. 개별 생산자와 교환자에게 그 법칙들은 낯선 힘으로, 처음에는 알려지지조차 않은 힘으로 맞선다. 그 본성은 애써 연구하고 밝혀내야 비로소 드러난다. 상품생산의 이 경제 법칙들은 이 생산 형태의 서로 다른 발전 단계에 따라 변용된다. 그러나 대체로 문명의 시기 전체가 그 지배 아래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생산물이 생산자를 지배한다. 오늘날에도 사회의 생산 전체는 함께 숙고한 계획이 아니라 맹목적인 법칙들로 규제된다. 이 법칙들은 자연력 같은 힘으로 관철되며, 최종적으로는 주기적인 상업 공황이라는 뇌우 속에서 관철된다.
앞에서 보았듯이, 생산의 꽤 이른 발전 단계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생산자의 생계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생산물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발전 단계는 주로 분업과 개인 사이의 교환이 생겨나는 단계와 같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인간도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위대한 “진리”가 발견되었다. 사람을 노예로 바꾸면 인간의 힘을 교환할 수 있고 써먹을 수 있다는 진리였다. 사람들이 교환을 시작하자마자 그들 자신이 벌써 교환되었다. 능동이 수동이 되었다.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문명 아래서 가장 완전하게 펼쳐진 노예제와 함께, 사회는 처음으로 크게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계급으로 갈라졌다. 이 분열은 문명 시기 내내 이어졌다. 노예제는 착취의 첫 형태이며 고대 세계에 고유한 형태다. 그 뒤를 중세의 농노제, 근대의 임금노동이 잇는다. 이것들은 문명의 세 큰 시대를 특징짓는 예속의 세 큰 형태다. 공공연한 노예제, 그리고 요즘에는 위장된 노예제가 늘 그 곁에 함께 간다.
문명이 시작되는 상품생산 단계는 경제적으로 다음 것들의 도입으로 특징지어진다. 1. 금속화폐, 그와 함께 화폐자본, 이자, 고리대. 2. 생산자들 사이를 중개하는 계급으로서의 상인. 3. 토지 사유재산과 저당. 4. 지배적 생산 형태로서의 노예 노동. 문명에 대응하고 문명과 함께 결정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가족 형태는 일부일처제, 곧 남자의 여자 지배이며,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서의 개별 가족이다. 문명사회를 총괄하는 것은 국가다. 국가는 모든 전형적인 시기에 예외 없이 지배계급의 국가이며, 모든 경우에 본질적으로 피억압·피착취 계급을 억누르는 기계로 남는다. 문명의 특징으로는 또 다음이 있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분업 전체의 토대로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고정된 것, 다른 한편으로는 유언의 도입이다. 유언으로 소유자는 죽은 뒤에도 자기 소유를 처분할 수 있다. 옛 씨족 제도의 얼굴을 정면으로 후려치는 이 제도는 아테네에서는 솔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일찍이 도입되었지만, 언제인지는 알지 못한다.[4] 독일인에게서는 사제 나부랭이들이 그것을 도입했다. 고지식한 독일인이 자기 유산을 거리낌 없이 교회에 물려줄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본 구조를 가지고 문명은 옛 씨족 사회가 감히 견줄 수도 없는 일들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문명은 인간의 가장 더러운 충동과 열정을 움직여, 인간의 나머지 모든 소질을 희생시켜 가며 그것들을 키움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천박한 탐욕이 문명 첫날부터 오늘까지 문명을 움직이는 영혼이었다. 부, 다시 부, 세 번째도 부, 사회의 부가 아니라 이 하찮은 개인 하나의 부가 문명의 유일한 결정적 목표였다. 그 과정에서 과학의 발전이 점점 높아지고, 여러 차례 예술이 최고로 꽃피는 일이 문명의 품에 떨어졌다면, 그것은 오직 과학과 예술 없이는 우리 시대의 부의 성취를 다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일 뿐이다.
문명의 토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것이므로, 문명의 발전 전체는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움직인다. 생산의 진보는 모두 동시에 피억압 계급, 곧 대다수의 처지에서는 퇴보다. 한쪽에 이로운 것은 모두 필연적으로 다른 쪽에 해로우며, 한 계급의 새로운 해방은 모두 다른 계급에게는 새로운 억압이다. 그 가장 뚜렷한 증거는 기계의 도입이다. 그 영향은 오늘날 온 세상이 안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 미개인에게서는 권리와 의무의 구별이 아직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다면, 문명은 한 계급에게는 거의 모든 권리를, 다른 계급에게는 거의 모든 의무를 떠맡김으로써 둘의 구별과 대립을 가장 우둔한 자에게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은, 지배계급이 자기와 동일시하는 사회 전체에도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이 진전할수록, 문명은 자기가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 폐해를 사랑의 외투로 덮고, 꾸미거나 아예 없다고 우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요컨대 관습적 위선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 위선은 이전의 사회 형태도, 문명의 첫 단계들조차도 몰랐던 것이며, 마침내 이런 주장에서 절정에 이른다. 착취하는 계급이 피억압 계급을 착취하는 것은 오로지 착취당하는 계급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착취당하는 계급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반항하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은인들, 곧 착취자들에 대한 더없이 비열한 배은망덕이라는 것이다.[5]
그리고 이제 끝으로 문명에 대한 모건의 판단을 보자.
“문명이 시작된 뒤로 부의 증대는 엄청나졌고,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해졌으며, 그 쓰임은 매우 넓어졌고, 그 관리는 소유자의 이익에 맞게 매우 능숙해졌다. 그래서 이 부는 인민에 맞서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되었다. 인간 정신은 자기가 만든 것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홀린 듯 서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이 부를 지배할 만큼 강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이성은 국가와 국가가 보호하는 소유 사이의 관계도, 소유자 권리의 한계도 정할 것이다. 사회의 이익은 개별 이익에 절대적으로 앞서며, 둘은 정당하고 조화로운 관계 속에 놓여야 한다. 진보가 과거에 그러했듯 미래의 법칙으로 남는다면, 한낱 부를 좇는 것은 인류의 최종 사명이 아니다. 문명이 시작된 뒤로 흐른 시간은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작은 조각일 뿐이며, 인류 앞에 아직 놓인 시간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부를 유일한 최종 목표로 삼는 역사적 경로의 끝으로서 사회의 해체가 위협적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런 경로는 자기 파멸의 요소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에서의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우애, 권리의 평등, 보편 교육이 사회의 다음 더 높은 단계를 열 것이며, 경험과 이성과 과학이 꾸준히 그 단계를 향해 일하고 있다. 그것은 옛 씨족들의 자유, 평등, 우애의 부활이 될 것이다 — 그러나 더 높은 형태로.” (모건, 『고대 사회』(Ancient Society), 552쪽.)
주석
- 특히 아메리카 북서 해안에서 그렇다. 밴크로프트를 보라. 퀸샬럿섬의 하이다족에게는 한 지붕 아래 700명에 이르는 살림이 있다. 누트카족에게서는 부족 전체가 한 지붕 아래 살았다. ↩
- 아테네의 노예 수는 앞의 V장을 보라. 코린토스에서는 도시의 전성기에 46만 명, 아이기나에서는 47만 명이었다. 두 경우 모두 자유 시민 인구의 열 배였다. ↩
- 씨족의 본질에 대해 적어도 어렴풋하게나마 생각을 가졌던 최초의 역사가는 니부어였다. 그는 그것을 — 그리고 그와 함께 고스란히 옮겨 온 그의 오류도 — 디트마르셴 씨족들을 알았던 덕분에 얻었다. ↩
- 라살레의 『획득된 권리의 체계』(System der erworbenen Rechte) 제2부는 주로 다음 명제를 중심으로 돈다. 로마의 유언은 로마 자체만큼 오래되었고, 로마 역사에는 “유언이 없던 시대”가 결코 없었으며, 유언은 오히려 로마 이전 시대에 죽은 이의 숭배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라살레는 신실한 구헤겔학파로서 로마의 법 규정을 로마인의 사회관계에서가 아니라 의지라는 “사변적 개념”에서 끌어내며, 그러다가 이 완전히 비역사적인 주장에 이른다. 같은 사변적 개념에 근거해, 로마의 상속에서 재산의 이전은 순전히 부차적인 일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책에서라면 이것이 놀랄 일도 아니다. 라살레는 로마 법률가들, 특히 초기 법률가들의 환상을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한술 더 뜬다. ↩
- 나는 처음에 샤를 푸리에의 저작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명에 대한 빼어난 비판을 모건의 비판과 내 비판 곁에 나란히 놓으려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럴 시간이 없다. 다만 푸리에에게서 이미 일부일처제와 토지 소유가 문명의 주된 특징으로 여겨지며, 그가 문명을 부자가 빈자에게 벌이는 전쟁이라고 부른다는 점만 덧붙인다. 또 모든 결함 있는, 대립으로 갈라진 사회에서는 개별 가족(les familles incohérentes)이 경제적 단위라는 깊은 통찰도 이미 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