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인물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 샤를 푸리에, 페르디난트 라살레, 오토 폰 비스마르크, 리하르트 바그너,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용어사적 유물론, 국가의 사멸 학습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 1장 가족에도 역사가 있다, 2장 친족 호칭이라는 화석, 3장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4장 문명사회의 세포 형태, 5장 계급도 국가도 없는 사회, 6장 국가가 발명되었다, 7장 로마의 국가, 독일인의 미개, 8장 물레와 청동 도끼 곁으로

1884년 초판 서문

아래의 장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언을 집행하는 일이다. 모건의 연구 결과를 자신의 — 어느 정도 한계 안에서는 우리의 것이라고 해도 될 — 유물론적 역사 연구의 성과와 연관 지어 서술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그 결과의 온전한 의의를 밝히는 일을 스스로 맡아 두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카를 마르크스였다. 실제로 모건은 마르크스가 40년 전에 발견한 유물론적 역사관을 아메리카에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 발견했고, 미개와 문명을 비교하면서 이 역사관에 이끌려 주요한 점들에서 마르크스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본』이 독일의 강단 경제학자들에게 여러 해 동안 열심히 베껴지는 만큼이나 끈질기게 묵살당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모건의 『고대 사회』(Ancient Society)[1]도 영국의 “선사” 과학의 대변자들에게 그렇게 취급당했다. 나의 작업은 세상을 떠난 나의 벗이 더는 할 수 없게 된 일을 조금 메워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나에게는 그가 모건에게서 상세히 발췌해 둔 노트에 붙인 비판적 메모가 있으니, 가능한 한 그것을 여기에 옮겨 놓는다.

유물론적 관점에 따르면 역사에서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계기는 직접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그런데 이 생산은 그 자체가 다시 두 가지다. 한편으로는 생활 수단, 곧 식량·의복·주거의 대상과 그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자신의 생산, 곧 종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대, 특정한 나라의 사람들이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회 제도는 이 두 가지 생산에 의해, 곧 한편으로는 노동의,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노동이 아직 덜 발전했을수록, 노동 생산물의 양이, 따라서 사회의 부도 제한되어 있을수록, 사회 질서는 그만큼 더 압도적으로 혈연의 유대에 지배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혈연의 유대에 바탕을 둔 이러한 사회 구성 아래에서 노동의 생산성은 점점 더 발전한다. 그와 함께 사유재산과 교환, 부의 차이, 남의 노동력을 이용할 가능성, 그리고 이로써 계급 대립의 기초가 발전한다. 이것들은 새로운 사회적 요소로서, 여러 세대에 걸쳐 낡은 사회 구조를 새로운 상태에 맞추려고 애쓰다가, 마침내 둘이 서로 양립할 수 없게 되어 완전한 변혁이 일어난다. 혈연 집단에 바탕을 둔 낡은 사회는 새로 발전한 사회 계급들의 충돌 속에서 폭파된다. 그 자리에 국가로 결집된 새로운 사회가 들어선다. 이 국가의 하위 단위는 더는 혈연 집단이 아니라 지역 집단이다. 이 사회에서는 가족 질서가 전적으로 소유 질서의 지배를 받으며, 이제 저 계급 대립과 계급 투쟁이 자유롭게 펼쳐진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록된 역사의 내용은 바로 이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기록된 역사의 이러한 선사적 기초를 그 주요한 특징에서 발견하고 복원한 것, 그리고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혈연 집단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스·로마·독일 역사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지금까지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찾아낸 것은 모건의 큰 공적이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소재를 완전히 장악하기까지 거의 40년 동안 씨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책은 우리 시대의 몇 안 되는 획기적 저작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아래의 서술에서 독자는 대체로 무엇이 모건에게서 나왔고 무엇을 내가 덧붙였는지 쉽게 가려낼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에 관한 역사 부분에서 나는 모건의 전거에 머물지 않고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덧붙였다. 켈트인과 독일인에 관한 부분은 본질적으로 내 것이다. 모건은 여기서 거의 이차 자료만 가지고 있었고, 독일의 상태에 관해서는 — 타키투스를 빼면 — 프리먼 씨의 형편없는 자유주의적 왜곡만 가지고 있었다. 경제에 관한 논의는 모건에게서는 그의 목적에는 충분했지만 내 목적에는 전혀 모자랐기에, 모두 내가 새로 다시 썼다. 끝으로, 모건을 명시적으로 인용하지 않은 한 모든 결론에 대해서는 당연히 내가 책임을 진다.

주석

  1. 『고대 사회, 또는 야만에서 미개를 거쳐 문명에 이르는 인류 진보의 경로에 관한 연구』(Ancient Society, or Researches in the Lines of Human Progress from Savagery, through Barbarism to Civilization). 루이스 H. 모건 지음. 런던, 맥밀런 출판사, 1877. 이 책은 아메리카에서 인쇄되었고 런던에서는 이상할 만큼 구하기 어렵다. 지은이는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

1891년 제4판 서문

많은 부수를 찍은 이 책의 이전 판들은 반년 가까이 전부터 절판되었고, 출판사는 이미 꽤 오래전부터 나에게 새 판을 준비해 달라고 바라 왔다. 더 급한 일들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그 일을 하지 못했다. 초판이 나온 뒤로 일곱 해가 흘렀고, 그동안 원초적 가족 형태에 관한 지식은 상당히 진보했다. 그러니 여기서는 고치고 보충하는 손을 부지런히 놀려야 했다. 더구나 지금의 본문을 연판으로 뜰 예정이어서 앞으로 한동안은 더 고칠 수 없게 될 것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래서 나는 본문 전체를 꼼꼼히 다시 검토했고, 여러 곳에 내용을 보탰다. 이로써 오늘날 학문의 수준이 마땅히 고려되었기를 바란다. 또 이 서문의 뒷부분에서는 바흐오펜에서 모건에 이르는 가족사 연구의 발전을 간략히 개관한다. 그렇게 하는 주된 이유는, 쇼비니즘에 물든 영국의 선사학파가 모건의 발견으로 이루어진 원시사 관념의 변혁을 여전히 온 힘을 다해 묵살하면서도, 모건의 연구 결과를 제 것으로 삼는 데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도 이 영국의 본보기를 곳곳에서 너무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나의 저작은 여러 외국어로 옮겨졌다. 먼저 이탈리아어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L'origine della famiglia, della proprietà privata e dello stato). 저자 교열본, 파스콸레 마르티녜티 옮김. 베네벤토, 1885. 다음으로 루마니아어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Originea familiei, propnetcii, private _i a statului). 이오안 너데지데 옮김, 이아시의 잡지 《콘템포라눌》(Contemporanul), 1885년 9월~1886년 5월. 또 덴마크어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Familjens, Privatejendommens og Statens Oprindelse). 저자가 검토한 덴마크어판, 게르손 트리에르 펴냄. 코펜하겐, 1888. 이번 독일어판을 저본으로 한 앙리 라베의 프랑스어 번역은 인쇄 중이다.


1860년대 초까지는 가족의 역사라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이 분야에서 역사학은 아직 완전히 모세 오경의 영향 아래 있었다. 거기에 다른 어느 곳보다 자세히 그려진 가부장제 가족 형태는 그냥 가장 오래된 형태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 일부다처제를 빼고 나면 — 오늘날의 부르주아 가족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실은 가족이란 애초에 아무런 역사적 발전도 거치지 않은 셈이었다. 기껏해야 태곳적에 성적 무규율의 시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정도를 인정했을 뿐이다. — 물론 사람들은 단혼 말고도 동양의 일부다처제와 인도·티베트의 일처다부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 형태는 역사적 순서로 배열되지 않았고, 서로 아무 연관 없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고대사의 몇몇 민족과 지금도 존재하는 몇몇 야만인에게서 혈통을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따졌다는 것, 곧 여계만을 유일하게 유효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 오늘날 많은 민족에게서 어떤 더 큰 집단 — 당시에는 자세히 연구되지 않은 집단 — 안에서의 혼인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풍습이 세계 어디에서나 발견된다는 것 — 이런 사실들은 알려져 있었고, 그 사례도 점점 더 많이 모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E. B. 타일러의 『인류 초기 역사 연구 등등』(Researches into the Early History of Mankind etc. etc., 1865)에서조차 그것들은 몇몇 야만인에게 있는 불붙은 나무를 쇠붙이로 건드리지 말라는 금기나 그 밖의 비슷한 종교적 허튼짓들과 나란히 그저 “기묘한 관습”으로 등장할 뿐이다.

가족의 역사는 1861년, 바흐오펜의 『모권』(Das Mutterrecht)이 나오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지은이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놓는다. 1. 인간은 처음에 제한 없는 성교 속에서 살았으며, 그는 이를 빗나간 표현으로 헤테리즘이라고 부른다. 2. 이러한 성교는 확실한 부성을 모두 배제하므로, 혈통은 여계로만 — 모권에 따라 — 따질 수 있었으며, 원래 고대의 모든 민족에게서 그러했다. 3. 그 결과 여성은 어머니로서, 곧 젊은 세대의 확실히 알려진 유일한 부모로서 높은 존경과 위신을 누렸고, 이것은 바흐오펜의 생각으로는 완전한 여성 지배(Gynaikokratie)로까지 높아졌다. 4. 여성이 한 남자에게만 속하는 단혼으로 넘어간 것은 태곳적 종교 계율을 어기는 일(곧 사실은 같은 여성에 대해 나머지 남자들이 예로부터 지녀 온 권리를 침해하는 일)을 포함했으며, 이 위반은 여성이 일정 기간 몸을 내맡김으로써 속죄하거나 그 묵인을 사들여야 했다.

바흐오펜은 이 명제들의 증거를 고전 고대 문헌에서 더없이 부지런히 찾아 모은 수많은 구절에서 발견한다. 그에 따르면 “헤테리즘”에서 일부일처제로, 모권에서 부권으로의 발전은, 특히 그리스인에게서는, 종교 관념이 더 발전한 결과로 이루어진다. 곧 새로운 관점을 대표하는 새로운 신들이 옛 관점을 대표하는 예로부터 전해 온 신들의 무리 속에 끼어들어, 옛 신들이 새 신들에게 점점 더 뒤로 밀려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흐오펜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의 상호 사회적 지위에 일어난 역사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인간의 실제 생활 조건의 발전이 아니라, 이 생활 조건이 바로 그 인간들의 머릿속에 비친 종교적 반영이다. 이에 따라 바흐오펜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를 몰락해 가는 모권과 영웅 시대에 일어나 승리하는 부권 사이의 투쟁을 극으로 그린 것이라고 설명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정부 아이기스토스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 아가멤논을 쳐 죽였다. 그러나 그녀와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쳐 죽여 아버지의 죽음을 갚는다. 그 때문에 모권의 마성적 수호자인 에리니에스가 그를 쫓는다. 모권에 따르면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가장 무겁고 가장 속죄할 수 없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탁으로 오레스테스에게 이 일을 하라고 시킨 아폴론과 재판관으로 불려 나온 아테나 — 여기서 새로운 부권적 질서를 대표하는 두 신 — 가 그를 보호한다. 아테나는 양쪽의 말을 듣는다. 이제 벌어지는 오레스테스와 에리니에스 사이의 논쟁에 쟁점 전체가 간명하게 요약되어 있다. 오레스테스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이중의 죄를 저질렀다고 내세운다. 자기 남편을 죽였고, 그로써 그의 아버지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에리니에스는 훨씬 더 죄가 큰 그녀가 아니라 그를 쫓는가? 대답은 명쾌하다.

“그녀는 자기가 죽인 남자와 혈연이 아니었다.”

혈연이 아닌 남자를 죽인 것은, 설령 그가 살인자의 남편이라 해도, 속죄할 수 있는 일이며 에리니에스와는 상관이 없다. 그들의 직분은 혈연 사이의 살인을 쫓는 것뿐이고, 그 가운데 모권에 따르면 가장 무겁고 가장 속죄할 수 없는 것이 어머니를 죽이는 일이다. 이제 아폴론이 오레스테스의 변호인으로 나선다. 아테나는 아레오파고스 재판관들 — 아테네의 배심원들 — 에게 표결하게 한다. 무죄와 유죄의 표가 같게 나온다. 그러자 아테나가 의장으로서 오레스테스 쪽에 표를 던지고 그를 무죄로 풀어 준다. 부권이 모권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고, 에리니에스 스스로 “젊은 혈통의 신들”이라고 부르는 신들이 에리니에스를 이긴다. 그리고 에리니에스도 결국 설득되어 새로운 질서에 봉사하는 새 직분을 맡는다.

『오레스테이아』에 대한 이 새롭지만 분명히 옳은 해석은 책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대목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동시에 이 해석은 바흐오펜이 에리니에스와 아폴론과 아테나를 적어도 당대의 아이스킬로스만큼은 믿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는 바로 그 신들이 그리스 영웅 시대에 부권으로 모권을 무너뜨리는 기적을 이루었다고 믿는 것이다. 종교를 세계사의 결정적 지렛대로 여기는 이런 관점이 결국 순전한 신비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바흐오펜의 두꺼운 4절판 책을 끝까지 읽어 내는 것은 고되고 결코 늘 보람 있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의 개척자적 공적을 깎아내리지는 않는다. 처음으로 그는 무규율한 성교가 행해지던 미지의 원시 상태라는 공허한 말 대신에 다음과 같은 것을 증명해 보였다. 고전 고대 문헌은 단혼 이전에 실제로 그리스인과 아시아인에게서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성교했을 뿐 아니라 한 여자가 여러 남자와 성교하면서도 관습을 어기지 않았던 상태가 있었다는 흔적을 우리에게 많이 보여 준다는 것, 이 관습은 여자들이 단혼의 권리를 사기 위해 해야 했던 제한된 몸 내맡김이라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그러므로 혈통은 원래 여계로만, 어머니에서 어머니로만 따질 수 있었다는 것, 여계만이 유효하다는 이 원칙은 부성이 확실하거나 적어도 인정된 단혼 시대에 들어와서도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것, 그리고 자식들의 유일하게 확실한 부모로서 어머니가 지녔던 이 원래의 지위가 어머니들에게, 따라서 여성 일반에게, 그 뒤로 다시는 누려 보지 못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는 것이다. 바흐오펜은 이 명제들을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 그의 신비주의적 관점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증명했고, 이는 1861년에는 완전한 혁명을 뜻했다.

바흐오펜의 두꺼운 4절판 책은 독일어로, 곧 당시 오늘날 가족의 선사에 가장 관심이 없던 민족의 언어로 쓰였다. 그래서 그 책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았다. 같은 분야에서 그의 바로 다음 후계자는 1865년에 등장했는데, 바흐오펜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이 후계자가 J. F. 매클레넌이었고, 그는 선배와 정반대였다. 천재적 신비주의자 대신 여기에는 바싹 마른 법률가가 있고, 넘쳐 나는 시적 상상력 대신 변론하는 변호사의 그럴듯한 짜맞추기가 있다. 매클레넌은 고금의 여러 야만 민족, 미개 민족, 심지어 문명 민족에게서 신랑이 혼자서 또는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그 친척들에게서 겉보기에 강제로 빼앗아 와야 하는 혼인 형식을 발견한다. 이 관습은 어떤 부족의 남자들이 바깥의 다른 부족들에게서 실제로 폭력을 써서 아내를 빼앗던 이전 관습의 잔재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약탈혼”은 어떻게 생겼는가? 남자들이 자기 부족 안에서 충분히 아내를 찾을 수 있는 동안에는 그럴 까닭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발전하지 못한 민족들에게서 어떤 집단들(1865년 무렵에는 아직 흔히 부족 자체와 동일시되던 집단들)이 있어 그 안에서는 결혼이 금지되었으며, 그래서 남자는 아내를, 여자는 남편을 집단 바깥에서 얻을 수밖에 없는 경우를 그 못지않게 자주 발견한다. 한편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어떤 집단의 남자들이 아내를 자기 집단 안에서만 얻어야 하는 관습이 있다. 매클레넌은 앞의 것을 외혼(exogam), 뒤의 것을 내혼(endogam)이라고 부르고, 곧바로 외혼 “부족”과 내혼 “부족” 사이에 굳어진 대립을 세운다. 그리고 그 자신의 외혼 연구가, 이 대립은 많은 경우에, 아니 대부분 또는 모든 경우에 그의 머릿속에만 있다는 사실을 그의 코앞에 들이미는데도, 그는 이 대립을 자기 이론 전체의 기초로 삼는다. 이에 따르면 외혼 부족은 아내를 다른 부족들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야만에 걸맞게 부족과 부족 사이에 늘 전쟁 상태가 이어지는 상황에서는 이것이 약탈로만 이루어질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매클레넌은 다시 묻는다. 이 외혼 관습은 어디서 왔는가? 혈연과 근친상간의 관념은 이것과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훨씬 나중에야 발전한 것들이다, 하고 그는 말한다. 오히려 야만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여자아이를 태어나자마자 죽이는 관습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이로써 각 부족에 남자가 남아돌게 되고, 그 필연적인 첫 결과는 여러 남자가 한 여자를 공동으로 차지하는 것, 곧 일처다부제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다시 아이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았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몰랐고, 따라서 친족 관계는 남계를 빼고 여계로만 따졌다 — 모권이다. 그리고 부족 안에서 여자가 모자란 데서 — 일처다부제로 누그러졌지만 없어지지는 않은 이 결핍에서 — 생긴 둘째 결과가 바로 다른 부족의 여자들을 체계적으로, 폭력으로 납치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외혼과 일처다부제는 같은 하나의 원인 — 두 성 사이의 수적 불균형 — 에서 생겨나므로, 우리는 모든 외혼 인종을 원래 일처다부제를 따랐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혼 인종들 사이에서 최초의 친족 체계가 어머니 쪽의 혈연만을 아는 체계였다는 것을 반박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매클레넌, 『고대사 연구』(Studies in Ancient History), 1886. 「원시 혼인」(Primitive Marriage), 124쪽.)

매클레넌의 공적은 그가 외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널리 퍼져 있고 큰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지적한 데 있다. 외혼 집단이라는 사실을 그가 발견한 것은 결코 아니며, 그것을 이해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여러 관찰자들 — 바로 매클레넌이 쓴 출처들 — 이 일찍이 띄엄띄엄 남긴 기록은 접어 두더라도, 레이섬은 『기술 민족학』(Descriptive Ethnology, 1859)에서 인도의 마가르족에게 있는 이 제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서술했고, 이 제도가 널리 퍼져 있어 세계 어디에서나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 구절은 매클레넌 자신이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모건도 이미 1847년 이로쿼이족에 관한 편지들(《아메리칸 리뷰》(American Review)에 실림)에서, 그리고 1851년 『이로쿼이 연맹』(The League of the Iroquois)에서 이 종족에게 이 제도가 있음을 밝히고 올바르게 서술했다. 반면에 매클레넌의 변호사 두뇌는, 우리가 보게 되듯이, 여기서 바흐오펜의 신비주의적 상상력이 모권 분야에서 일으킨 것보다 훨씬 큰 혼란을 일으켰다. 모권적 혈통 질서를 원래의 것으로 알아본 것도 매클레넌의 또 다른 공적이다. 물론 그 자신도 나중에 인정하듯이 이 점에서는 바흐오펜이 그보다 앞섰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늘 “여계만을 통한 친족 관계”(kinship through females only)를 말하며, 이전 단계에는 옳은 이 표현을 그 뒤의 발전 단계에도 줄곧 적용한다. 그런데 그 단계에서는 혈통과 상속이 여전히 여계로만 따져지기는 하지만, 친족 관계는 남자 쪽으로도 인정되고 표현된다. 이것은 법률가의 편협함이다. 그는 고정된 법률 용어를 하나 만들어 놓고, 그사이에 그 용어를 적용할 수 없게 만든 상태에까지 그것을 바꾸지 않고 계속 적용하는 것이다.

그럴듯하기는 했지만, 매클레넌의 이론은 지은이 자신에게도 그리 튼튼히 세워진 것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적어도 그 자신도 다음 점을 알아챈다.

“(겉보기의) 여성 약탈 형식이 가장 뚜렷하고 가장 표현력 있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남성 친족 관계(남계 혈통을 뜻한다)가 지배하는 민족들에게서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140쪽).

또 이렇게도 말한다.

“우리가 아는 한, 외혼과 가장 오래된 친족 형태가 나란히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도 영아 살해가 체계적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기묘한 사실이다”(146쪽).

두 가지 모두 그의 설명 방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실이며, 그는 이에 맞서 새로운, 더욱 얽히고설킨 가설밖에 내놓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의 이론은 영국에서 큰 갈채와 호응을 얻었다. 그곳에서 매클레넌은 가족사의 창시자이자 이 분야의 으뜸가는 권위자로 널리 인정받았다. 외혼 “부족”과 내혼 “부족”이라는 그의 대립은, 사람들이 개별적 예외와 수정을 아무리 확인했다 해도, 지배적 관점의 공인된 기초로 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연구 분야 전체를 자유롭게 내다보는 일을, 따라서 모든 결정적 진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눈가리개가 되었다. 영국에서, 그리고 영국을 본보기로 삼아 다른 곳에서도 흔해진 매클레넌 과대평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이대야 마땅하다. 그는 외혼 “부족”과 내혼 “부족”이라는 순전히 오해에서 나온 대립으로, 그의 연구가 가져다준 이로움보다 더 큰 해를 끼쳤다.

그러는 사이에 곧 그의 아담한 틀에 들어맞지 않는 사실들이 점점 더 많이 드러났다. 매클레넌은 세 가지 혼인 형태, 곧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단혼만 알았다. 그러나 일단 이 점에 주의가 쏠리자, 발전하지 못한 민족들에게 여러 남자가 여러 여자를 공동으로 차지하는 혼인 형태가 있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이 나왔다. 그리고 러벅은 『문명의 기원』(The origin of Civilisation, 1870)에서 이 군혼(Communal marriage)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

곧이어 1871년에 모건이 새롭고 여러 면에서 결정적인 자료를 들고 나왔다. 그는 이로쿼이족에게 통용되는 독특한 친족 체계가 미국의 모든 원주민에게 공통이며, 따라서 한 대륙 전체에 퍼져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 체계는 그곳에서 통용되는 혼인 체계에서 실제로 생겨나는 친족 촌수와는 정면으로 어긋나는데도 그랬다. 그는 이제 미국 연방 정부를 움직여, 자신이 직접 작성한 질문지와 표를 바탕으로 다른 민족들의 친족 체계에 관한 정보를 모으게 했다. 그리고 그 답변들에서 다음을 알아냈다. 1. 아메리카 인디언의 친족 체계는 아시아에서도, 그리고 조금 변형된 형태로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수많은 종족 사이에 통용되고 있다. 2. 이 체계는 하와이와 그 밖의 오스트레일리아 쪽 섬들에서 막 사라져 가고 있는 군혼의 한 형태로 완전히 설명된다. 3. 그런데 같은 섬들에는 이 혼인 형태와 나란히, 지금은 사라진 더욱 원초적인 군혼 형태로만 설명될 수 있는 친족 체계가 통용되고 있다. 그는 모은 정보와 그로부터 끌어낸 결론을 『혈족과 인척의 체계』(Systems of Consanguinity and Affinity, 1871)로 펴냈고, 이로써 논쟁을 한없이 더 넓은 영역으로 이끌었다. 그는 친족 체계에서 출발해 그에 대응하는 가족 형태를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연구의 길을 열었고, 인류의 선사를 더 멀리 돌아볼 수 있게 했다. 이 방법이 인정받게 되면 매클레넌의 앙증맞은 구성물은 연기처럼 흩어질 것이었다.

매클레넌은 『원시 혼인』의 새 판(『고대사 연구』(Studies in Ancient History), 1875)에서 자기 이론을 변호했다. 그는 자신은 순전히 가설만으로 가족의 역사를 극도로 인위적으로 짜 맞추면서, 러벅과 모건에게는 그들의 주장 하나하나에 증거를 요구할 뿐 아니라, 스코틀랜드 법정에서나 받아들여질 만한 반박의 여지 없는 엄밀성을 지닌 증거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바로 그 사람이, 독일인에게서 외삼촌과 누이의 아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타키투스, 『게르마니아』, 20장)에서, 브리튼인은 열 명이나 열두 명씩 아내를 공유한다는 카이사르의 보고에서, 그리고 미개인들의 아내 공유에 관한 옛 저술가들의 다른 모든 보고에서, 이 모든 민족에게 일처다부제가 지배했다는 결론을 서슴없이 끌어낸다! 마치 검사의 말을 듣는 것 같다. 검사는 자기 사건을 꾸밀 때는 무슨 자유든 누릴 수 있으면서, 변호인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장 형식적이고 법적으로 유효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다.

군혼은 순전한 상상이라고 그는 주장하며, 이로써 바흐오펜보다 훨씬 뒤로 물러난다. 모건이 말하는 친족 체계는 사교적 예의의 규칙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인디언이 낯선 사람, 백인에게도 형제나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사실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라는 호칭이 의미 없는 호칭 형식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가톨릭 성직자와 수녀원장도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불리고, 수사와 수녀, 심지어 프리메이슨 단원과 영국 노동조합원들도 엄숙한 회합에서 형제와 자매라고 불린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요컨대 매클레넌의 변호는 비참할 만큼 허약했다.

그러나 그가 아직 공격받지 않은 지점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의 체계 전체가 기대고 있던 외혼 “부족”과 내혼 “부족”의 대립은 흔들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족사 전체의 축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사람들은 이 대립을 설명하려는 매클레넌의 시도가 불충분하며 그가 스스로 열거한 사실들과도 모순된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러나 대립 그 자체, 곧 서로 배타적인 두 종류의 독립된 부족 — 한쪽은 아내를 부족 안에서 얻고, 다른 쪽은 그것이 절대적으로 금지된 — 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복음으로 통했다. 예컨대 지로-퇼롱의 『가족의 기원』(Origines de la famille, 1874)과 심지어 러벅의 『문명의 기원』(Origin of Civilisation, 제4판, 1882)을 비교해 보라.

바로 이 지점에서 모건의 주저 『고대 사회』(Ancient Society, 1877)가 시작된다. 이 책이 지금의 저작이 바탕으로 삼은 책이다. 1871년에 모건이 아직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것이 여기서는 완전히 의식적으로 전개되어 있다. 내혼과 외혼은 대립하지 않는다. 외혼 “부족”은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군혼이 아직 지배하던 시기에 — 그리고 군혼은 십중팔구 어디에서나 한때 지배했다 — 부족은 어머니 쪽으로 혈연인 여러 집단, 곧 씨족(Gentes)으로 나뉘었고, 씨족 안에서는 엄격한 혼인 금지가 지배했다. 그래서 한 씨족의 남자들은 아내를 부족 안에서 얻을 수 있었고 대개는 그렇게 했지만, 자기 씨족 바깥에서 얻어야 했다. 그러므로 씨족이 엄격하게 외혼적이었다면, 씨족 전체를 아우르는 부족은 그만큼 내혼적이었다. 이로써 매클레넌식 꾸며 내기의 마지막 찌꺼기가 끝내 처리되었다.

그러나 모건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씨족은 그가 연구한 분야에서 두 번째의 결정적 진보를 이루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모권에 따라 조직된 이 씨족에서 그는 나중의 부권적으로 조직된 씨족, 곧 고대 문화 민족들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씨족이 발전해 나온 원형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모든 역사가에게 수수께끼였던 그리스와 로마의 씨족이 인디언의 씨족으로 설명되었고, 이로써 원시사 전체를 위한 새로운 기초가 발견되었다.

원래의 모권적 씨족을 문화 민족들의 부권적 씨족의 전 단계로 이렇게 다시 발견한 것은, 원시사에 대해 다윈의 진화론이 생물학에 대해,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이 정치경제학에 대해 지니는 것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이 발견 덕분에 모건은 처음으로 가족의 역사를 그려 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적어도 고전적 발전 단계들이, 오늘날 알려진 자료가 허락하는 한에서, 대체로 잠정적으로 확정되어 있다. 이로써 원시사를 다루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 모권적 씨족은 이 학문 전체가 그 둘레를 도는 축이 되었다. 그것이 발견된 뒤로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 무엇을 찾아 연구해야 하는지, 그리고 연구한 것을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이 분야에서는 이제 모건의 책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

모건의 발견들은 이제 영국에서도 선사학자들에게 널리 인정받고 있다, 아니 차라리 그들의 것으로 전유되고 있다. 그러나 이 관점의 혁명이 모건 덕분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국에서 그의 책은 될 수 있는 대로 묵살되었고, 그 자신은 그의 예전 업적에 대한 너그러운 척하는 칭찬으로 처리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서술의 세부를 열심히 트집 잡으면서, 그의 참으로 위대한 발견에 대해서는 끈질기게 입을 다문다. 『고대 사회』의 원판은 절판되었다. 아메리카에서는 이런 책이 수지맞게 팔리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이 책이 체계적으로 억눌린 모양이다. 그리하여 이 획기적 저작 가운데 아직 서점에 유통되는 유일한 판은 — 독일어 번역본이다.

이 침묵은 어디서 오는가? 특히 우리의 공인된 선사학자들의 저술에 넘쳐 나는 수많은 의례적 인용과 그 밖의 동료 의식의 증거들과 견주어 보면, 거기서 묵살의 음모를 보지 않기란 어렵다. 혹시 모건이 미국인이기 때문인가? 영국의 선사학자들이, 자료를 긁어모으는 데서는 더없이 칭찬할 만한 부지런함을 보였으면서도, 그 자료를 정리하고 분류하는 데 적용되는 일반적 관점, 요컨대 자기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두 명의 천재적인 외국인, 바흐오펜과 모건에게 기대야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몹시 괴로운 일이기 때문인가? 독일인이라면 그래도 참을 수 있었겠지만, 미국인이라니? 미국인 앞에서는 영국인은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 나는 미국에서 그 우스운 실례를 보았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매클레넌은 말하자면 공식 임명된 영국 선사학파의 창시자이자 지도자였다. 영아 살해에서 일처다부제와 약탈혼을 거쳐 모권적 가족에 이르는 그의 꾸며 낸 역사 구성에 대해서는 최고의 경외심을 품고서만 말하는 것이 선사학계의 예의범절에 속하다시피 했다. 서로 절대적으로 배척하는 외혼 “부족”과 내혼 “부족”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것은 불경한 이단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이 모든 신성한 교리를 연기처럼 흩어 버린 모건은 일종의 신성모독을 저지른 셈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것들을, 말하기만 하면 곧바로 납득이 가는 방식으로 흩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외혼과 내혼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비틀거리던 매클레넌 숭배자들은 주먹으로 제 이마를 치며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어서 이것을 진작 스스로 찾아내지 못했단 말인가!

그리고 이것만으로는 공식 학파가 그를 냉정하게 옆으로 밀쳐 놓는 것 말고는 달리 대할 수 없을 만큼의 죄가 아직 모자랐다면, 모건은 잔을 넘치게 채웠다. 그는 문명, 곧 상품생산의 사회, 우리 오늘날 사회의 기본 형태를 푸리에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비판했을 뿐 아니라, 이 사회의 미래의 변혁에 대해 카를 마르크스가 했을 법한 말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니 매클레넌이 그에게 분개하여 “역사적 방법은 그에게 전적으로 반감을 일으킨다”고 비난하고, 제네바의 지로-퇼롱 교수 양반이 1884년에도 이를 확인해 준 것은 그로서는 마땅한 대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지로-퇼롱 양반은 1874년만 해도(『가족의 기원』(Origines de la famille)) 매클레넌식 외혼의 미로 속을 속수무책으로 헤매고 있었고, 그를 거기서 빼내 준 것이 바로 모건이었다!

모건 덕분에 원시사가 이룬 나머지 진보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룰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내 저작의 본문에 나온다. 그의 주저가 나온 뒤로 흐른 14년 동안 인류 원시 사회의 역사를 위한 우리의 자료는 크게 늘었다. 인류학자, 여행가, 직업적 선사학자에 더해 비교법학자들이 나서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소재를,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왔다. 그 결과 모건의 개별 가설 가운데 몇몇은 흔들리거나 아예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 모인 자료가 그의 위대한 주요 관점을 다른 것으로 밀어낸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가 원시사에 들여온 질서는 그 주요한 특징에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아니, 그것은 이 큰 진보의 창시자가 그였다는 사실이 숨겨지는 바로 그만큼 점점 더 일반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1]

런던, 1891년 6월 16일

프리드리히 엥겔스

주석

  1. 1888년 9월 뉴욕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로체스터 선거구의 전직 하원의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루이스 모건을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모건에 대해 나에게 해 줄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모건은 로체스터에서 공직 없이 지내며 자기 연구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그의 형제는 대령으로 워싱턴의 육군부에 근무했는데, 이 형제의 주선으로 모건은 정부가 자기 연구에 관심을 갖게 하고 저서 여러 권을 공금으로 펴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야기해 준 그 사람도 하원의원 시절에 여러 차례 이를 위해 힘을 썼다고 했다. ↩

I · 선사 시대의 문화 단계

모건은 전문 지식을 가지고 인류의 선사에 일정한 질서를 세우려고 시도한 최초의 사람이다. 크게 늘어난 자료가 변경을 강요하지 않는 한, 그의 분류는 아마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야만, 미개, 문명이라는 세 주요 시대 가운데 그가 다루는 것은 당연히 앞의 두 시대와 세 번째 시대로의 이행뿐이다. 그는 두 시대를 각각 생활 수단 생산의 진보에 따라 낮은 단계, 중간 단계, 높은 단계로 나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 생산에서의 숙련은 인간의 우월성과 자연 지배의 정도를 결정한다. 모든 존재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식량 생산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인류 진보의 모든 큰 시대는 많든 적든 직접적으로 생계 원천이 넓어진 시대와 일치한다.”

가족의 발전은 이와 나란히 진행되지만, 시기를 나누는 데 쓸 만큼 뚜렷한 표지를 보여 주지는 않는다.

1. 야만

1. 낮은 단계. 인류의 유년기. 인류는 원래의 거주지인 열대나 아열대의 숲에 아직 머물러 있었고, 적어도 일부는 나무 위에서 살았다. 큰 맹수들 앞에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래야만 설명된다. 과일, 견과, 뿌리가 식량이었다. 분절된 언어의 형성이 이 시기의 주된 성과다. 역사 시대 안에 알려진 모든 민족 가운데 이 원시 상태에 머물러 있던 민족은 하나도 없었다. 이 상태가 아무리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직접적 증거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계에서 나왔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면, 이러한 이행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2. 중간 단계. 물고기(여기에 우리는 갑각류, 조개류, 그 밖의 수생 동물도 포함시킨다)를 식량으로 이용하는 것과 불의 사용에서 시작된다. 두 가지는 함께 간다. 물고기 식량은 불이 있어야 비로소 온전히 먹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식량으로 인간은 기후와 장소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강과 해안을 따라가며 인간은 야만 상태에서도 지구의 대부분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초기 석기 시대의, 거칠게 다듬고 갈지 않은 석기, 이른바 구석기는 전부 또는 대부분 이 시기에 속하는데, 이것이 모든 대륙에 퍼져 있다는 것이 이 이주의 증거다. 새로 차지한 지대와 쉼 없이 활동하는 발견 충동은, 마찰로 불을 얻는 기술과 결합하여 새로운 식량을 가져왔다. 이를테면 뜨거운 재나 굽는 구덩이(땅 화덕)에서 구운 녹말질의 뿌리와 덩이줄기가 그렇고, 최초의 무기인 곤봉과 창이 발명되면서 이따금 식사에 보태진 사냥감이 그렇다. 책에 나오는 것 같은 순전한 수렵 민족, 곧 오로지 사냥만으로 사는 민족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그러기에는 사냥의 소득이 너무 불확실하다. 식량 원천이 늘 불안정했던 탓에 이 단계에서 식인 풍습이 생겨난 것으로 보이며, 이 풍습은 그때부터 오래 유지된다. 오스트레일리아인과 많은 폴리네시아인은 지금도 야만의 이 중간 단계에 있다.

3. 높은 단계. 활과 화살의 발명에서 시작된다. 이로써 사냥감은 정규 식량이 되었고, 사냥은 정상적인 노동 분야의 하나가 되었다. 활과 시위와 화살은 이미 매우 복합적인 도구이며, 그 발명에는 오랫동안 쌓인 경험과 날카로워진 정신 능력이, 따라서 다른 많은 발명을 동시에 알고 있었음이 전제된다. 활과 화살은 알지만 아직 토기 제작(모건은 이것으로 미개로의 이행을 잡는다)은 모르는 민족들을 비교해 보면, 실제로 우리는 이미 마을에 정착하는 일의 몇몇 시작, 생계 생산에 대한 일정한 지배, 나무 그릇과 기구, 나무껍질 섬유로 손가락으로 짜는 직조(베틀 없이), 나무껍질이나 갈대로 엮은 바구니, 간석기(신석기)를 발견한다. 대개는 불과 돌도끼로 이미 통나무배를 만들었고, 곳에 따라서는 집 지을 들보와 널판도 마련했다. 이 모든 진보를 우리는 예컨대 활과 화살은 알지만 토기는 모르는 아메리카 북서부 인디언에게서 발견한다. 야만에게 활과 화살은, 미개에게 철검이, 문명에게 화기가 그러했듯이 결정적인 무기였다.

2. 미개

1. 낮은 단계. 토기 제작의 도입에서 시작된다. 토기는 많은 경우에 입증된 대로, 그리고 아마 어디에서나, 엮어 만든 그릇이나 나무 그릇에 진흙을 발라 불에 견디게 하는 데서 생겨났다. 그러다가 곧 빚은 진흙이 안쪽 그릇 없이도 제 구실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발전 과정을 아주 일반적으로, 곧 장소와 상관없이 모든 민족의 일정한 시기에 들어맞는 것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미개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두 큰 대륙의 서로 다른 자연적 자질이 효력을 나타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미개 시기의 특징적 계기는 동물의 길들이기와 사육, 그리고 식물의 재배다. 그런데 동쪽 대륙, 이른바 구세계는 길들이기에 알맞은 거의 모든 동물과, 하나를 빼고 재배할 수 있는 모든 곡물을 가지고 있었다. 서쪽 대륙인 아메리카에는 길들일 수 있는 포유동물로는 라마뿐이었고, 그것도 남부의 일부에만 있었으며, 재배 곡물로는 단 하나,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인 옥수수만 있었다. 이러한 자연 조건의 차이 때문에 이제부터 각 반구의 주민은 저마다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고, 개별 단계의 경계를 표시하는 이정표도 두 경우에 서로 달라진다.

2. 중간 단계. 동쪽에서는 가축의 길들이기로, 서쪽에서는 관개에 의한 식용 식물 재배와, 건물에 어도비(햇볕에 말린 벽돌)와 돌을 쓰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서쪽부터 시작한다. 이곳에서는 유럽인의 정복 때까지 어디에서도 이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개의 낮은 단계에 있던 인디언들(미시시피강 동쪽에서 발견된 인디언은 모두 여기에 속했다)에게는 그들이 발견될 무렵 이미 옥수수, 그리고 아마 호박, 멜론, 그 밖의 채소를 기르는 어느 정도의 원경이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식량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공급했다. 그들은 울타리를 친 마을의 나무집에서 살았다. 북서부의 부족들, 특히 컬럼비아강 유역의 부족들은 아직 야만의 높은 단계에 있었고, 토기도 어떤 종류의 식물 재배도 알지 못했다. 반면에 뉴멕시코의 이른바 푸에블로 인디언과, 정복 당시의 멕시코인, 중앙아메리카인, 페루인은 미개의 중간 단계에 있었다. 그들은 어도비나 돌로 지은 요새 같은 집에서 살았고, 인공적으로 물을 댄 밭에서 옥수수와, 위치와 기후에 따라 다른 여러 식용 식물을 길렀다. 이것이 주된 식량 원천이었다. 그들은 몇몇 동물을 길들이기까지 했다 — 멕시코인은 칠면조와 다른 새들을, 페루인은 라마를. 또 그들은 금속 가공을 알았다 — 다만 철은 몰랐기 때문에 여전히 석제 무기와 석기 없이는 지낼 수 없었다. 그 뒤 에스파냐의 정복이 그 이상의 모든 독자적 발전을 끊어 버렸다.

동쪽에서는 미개의 중간 단계가 젖과 고기를 주는 동물의 길들이기로 시작되었다. 반면에 식물 재배는 이곳에서 이 시기의 한참 뒤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축의 길들이기와 사육, 그리고 더 큰 가축 떼의 형성이 아리아인과 셈인이 나머지 미개인 무리에서 갈라져 나온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유럽과 아시아의 아리아인은 가축의 이름은 아직 공통으로 가지고 있지만, 재배 식물의 이름은 거의 공유하지 않는다.

가축 떼의 형성은 알맞은 곳에서 유목 생활로 이어졌다. 셈인에게서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초원에서, 아리아인에게서는 인도, 옥수스강과 약사르테스강, 돈강과 드네프르강의 초원에서였다. 가축의 길들이기는 처음에 이런 목초지의 경계에서 이루어졌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에게는 유목 민족들이 인류의 요람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야만 상태의 조상에게, 심지어 미개의 낮은 단계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거의 살 수 없는 땅이었던 지역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거꾸로, 중간 단계의 이 미개인들은 일단 유목 생활에 익숙해지자, 풀이 자라는 강 유역의 평야를 떠나 조상들이 살던 숲 지대로 스스로 돌아갈 생각은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셈인과 아리아인은 북쪽과 서쪽으로 더 밀려났을 때조차도, 곡물 재배로 이 덜 좋은 땅에서 가축을 먹이고 특히 겨울을 나게 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서아시아와 유럽의 숲 지대로 옮겨 갈 수 없었다. 곡물 재배가 이곳에서 처음에는 가축의 사료가 필요해서 생겨났고, 나중에야 사람의 식량으로 중요해졌다는 것은 아주 그럴듯하다.

아리아인과 셈인의 풍부한 고기와 젖 식량, 특히 그것이 아이들의 발육에 미친 좋은 영향에 두 인종의 뛰어난 발전이 힘입은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거의 순전한 채식으로 살아가는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은 고기와 물고기를 더 많이 먹는 미개의 낮은 단계의 인디언보다 뇌가 작다. 어쨌든 이 단계에서 식인 풍습은 점차 사라지고, 종교 행위로서만, 또는 여기서는 거의 같은 것이지만 주술 수단으로서만 남는다.

3. 높은 단계. 철광석의 제련으로 시작되어, 알파벳 문자의 발명과 그것을 문헌 기록에 쓰는 일을 통해 문명으로 넘어간다. 이미 말했듯이 동쪽 반구에서만 독자적으로 거쳐 간 이 단계는, 생산의 진보에서 앞선 모든 단계를 합친 것보다 더 풍부하다. 영웅 시대의 그리스인, 로마 건국 직전의 이탈리아 부족들, 타키투스 시대의 독일인, 바이킹 시대의 노르만인이 이 단계에 속한다.

무엇보다 여기서 처음으로 가축이 끄는 쇠 보습이 나타난다. 이것이 대규모 경작, 곧 들농사를 가능하게 했고, 그로써 당시의 조건으로서는 사실상 무제한의 생활 수단 증가를 가능하게 했다. 그와 함께 숲을 개간하여 경작지와 풀밭으로 바꾸는 일도 가능해졌는데, 이것 또한 쇠도끼와 쇠삽 없이는 대규모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인구도 빠르게 늘어났고, 좁은 지역에 인구가 조밀해졌다. 들농사 이전에 50만 명이 하나의 중앙 지도 아래 결합될 수 있었다면, 아주 예외적인 사정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아마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미개의 높은 단계가 가장 활짝 핀 모습은 호메로스의 시들, 특히 『일리아스』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발달한 철제 도구, 풀무, 맷돌, 도기 물레, 기름과 포도주 만들기, 공예로 넘어가는 발달한 금속 가공, 수레와 전차, 들보와 널판을 쓰는 배 만들기, 예술로서의 건축의 시작, 탑과 성가퀴를 갖춘 성벽 도시,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신화 전체 — 이것들이 그리스인이 미개에서 문명으로 가지고 넘어간 주된 유산이다. 이것을 카이사르와 심지어 타키투스가 그린 게르만인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 게르만인은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이 더 높은 단계로 막 넘어가려던 바로 그 문화 단계의 시작에 서 있었다 — 미개의 높은 단계가 생산의 발전에서 얼마나 풍부한 것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모건을 따라 야만과 미개를 거쳐 문명의 시작에 이르는 인류의 발전을 그려 본 모습은, 새롭고, 더 중요하게는 생산에서 직접 끌어냈기에 반박할 수 없는 특징들을 이미 충분히 담고 있다. 그래도 이 모습은 우리의 여정 끝에 펼쳐질 모습에 견주면 흐릿하고 빈약해 보일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미개에서 문명으로의 이행과 둘 사이의 뚜렷한 대조를 환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당분간 우리는 모건의 구분을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수 있다. 야만 — 완성된 자연 산물의 획득이 우세한 시기. 인간이 만든 인공물은 주로 이 획득을 돕는 도구다. 미개 — 목축과 농경을 얻고, 인간의 활동으로 자연 산물의 생산을 늘리는 방법을 배우는 시기. 문명 — 자연 산물을 더 가공하는 법, 곧 본래 의미의 산업과 예술을 배우는 시기.

II · 가족

모건은 지금도 뉴욕주에 사는 이로쿼이족 사이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고 그들의 한 부족(세네카족)에 양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그들 사이에서 그들의 실제 가족 관계와 모순되는 친족 체계가 통용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양쪽 어느 편에서든 쉽게 풀 수 있는 단혼, 모건이 “대우혼 가족”이라 부르는 단혼이 지배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부의 자손은 온 세상 앞에 분명했고 인정되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누구에게 써야 하는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이 말들의 실제 쓰임은 그와 모순된다. 이로쿼이족 남자는 자기 자식뿐 아니라 자기 형제들의 자식도 자기 아들딸이라 부르고, 그들은 그를 아버지라 부른다. 반면 자기 자매들의 자식은 조카라 부르고, 그들은 그를 외삼촌이라 부른다. 거꾸로 이로쿼이족 여자는 자기 자식과 함께 자기 자매들의 자식을 아들딸이라 부르고, 그들은 그녀를 어머니라 부른다. 반면 자기 형제들의 자식은 조카라 부르고, 그녀는 그들의 고모로 불린다. 마찬가지로 형제들의 자식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고, 자매들의 자식들도 그렇다. 반면 한 여자의 자식들과 그녀의 형제의 자식들은 서로를 사촌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빈 이름이 아니라 혈연의 가깝고 멂, 같음과 다름에 대해 실제로 통용되는 관념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관념은 한 개인의 수백 가지 서로 다른 친족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완전히 다듬어진 친족 체계의 토대가 된다. 그뿐이 아니다. 이 체계는 모든 아메리카 인디언 사이에서 완전히 통용될 뿐 아니라(지금까지 예외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인도의 원주민, 곧 데칸의 드라비다계 부족들과 힌두스탄의 가우라 부족들 사이에서도 거의 그대로 통용된다. 남인도의 타밀인과 뉴욕주의 세네카 이로쿼이족의 친족 호칭은 지금도 이백 가지가 넘는 서로 다른 친족 관계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이 인도 부족들에서도, 모든 아메리카 인디언에서와 마찬가지로, 현행 가족 형태에서 생겨나는 친족 관계가 친족 체계와 모순된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친족이 모든 야만 민족과 미개 민족의 사회질서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토록 널리 퍼진 체계의 의미를 빈말로 치워 버릴 수는 없다. 아메리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아시아에서도 전혀 다른 인종의 민족들 사이에 마찬가지로 존재하며, 다소 변형된 형태가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곳곳에서 숱하게 발견되는 체계라면, 그런 체계는 역사적으로 설명되어야 하지, 예컨대 매클레넌이 시도했듯이 말로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아버지, 자식, 형제, 자매라는 호칭은 단순한 경칭이 아니라 아주 확정된, 매우 엄중한 상호 의무를 수반하며, 이 의무 전체가 그 민족들의 사회 제도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그리고 설명이 발견되었다. 샌드위치 제도(하와이)에는 금세기 전반까지도, 아메리카-고대 인도의 친족 체계가 요구하는 바로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 아들과 딸, 외삼촌과 고모, 조카들을 낳는 가족 형태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하와이에서 통용되던 친족 체계는 이번에도 그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가족 형태와 맞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형제자매의 자식이 예외 없이 모두 형제자매이며, 그들의 어머니와 그 자매들, 또는 그들의 아버지와 그 형제들의 공동 자식일 뿐 아니라, 부모의 모든 형제자매의 구별 없는 공동 자식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아메리카의 친족 체계가 아메리카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나 하와이에서는 실제로 아직 볼 수 있는 더 원시적인 가족 형태를 전제한다면, 다른 한편 하와이의 친족 체계는 더욱 근원적인 가족 형태를 가리킨다. 이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도 입증할 수 없지만, 그것은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 대응하는 친족 체계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건은 이렇게 말한다. “가족은 능동적 요소다. 그것은 결코 정지해 있지 않으며, 사회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데 따라 낮은 형태에서 높은 형태로 나아간다. 반면 친족 체계는 수동적이다. 그것은 오랜 간격을 두고서야 가족이 시간이 흐르며 이룬 진보를 기록하며, 가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을 때에만 근본적 변화를 겪는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리고 정치·법률·종교·철학 체계 일반도 마찬가지다.” 가족이 계속 살아 움직이는 동안 친족 체계는 굳어 버리고, 친족 체계가 관습적으로 존속하는 동안 가족은 그것을 넘어 자라난다. 그러나 퀴비에가 파리 근교에서 발견된 동물 골격의 유대골로부터 이것이 유대류에 속했으며 그곳에 한때 지금은 멸종한 유대류가 살았다고 추론할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은 확실성으로, 우리는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온 친족 체계로부터 그에 대응하는, 지금은 사라진 가족 형태가 존재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방금 말한 친족 체계와 가족 형태가 지금 지배적인 것과 다른 점은 모든 자식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럿 둔다는 데 있다. 하와이 가족이 대응하는 아메리카 친족 체계에서는 형제와 자매가 같은 자식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하와이 친족 체계는 거꾸로 이것이 규칙이었던 가족을 전제한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까지 흔히 유일하게 통용된다고 여겨져 온 가족 형태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일련의 가족 형태 앞에 놓인다. 전래의 관념은 단혼만을, 그 곁에 한 남자의 일부다처, 기껏해야 한 여자의 일처다부만을 안다. 그리고 도덕을 설교하는 속물에게 걸맞게, 실제 삶이 공식 사회가 정한 이 울타리를 말없이 그러나 거리낌 없이 넘어선다는 사실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반면 원시사 연구는 남자들이 일부다처로, 동시에 그 여자들이 일처다부로 살며, 따라서 공동의 자식도 그들 모두의 공동 자식으로 여겨지는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런 상태 자체도 마침내 단혼으로 해체되기까지 일련의 변화를 거친다. 이 변화는 공동의 혼인 끈이 아우르는 범위, 처음에는 매우 넓었던 그 범위가 점점 좁아져 마침내 오늘날 지배적인 개별 남녀 한 쌍만 남게 되는 그런 성격의 것이다.

모건은 이런 방식으로 가족의 역사를 거슬러 재구성하면서, 그의 동료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한 부족 안에서 무제한의 성교가 지배하여 모든 여자가 모든 남자에게,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에게 똑같이 속했던 원시 상태에 이른다. 그런 원시 상태는 이미 지난 세기부터 이야기되어 왔지만 일반적인 말투로만 그랬다. 바흐오펜이 처음으로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역사적·종교적 전승 속에서 이 상태의 흔적을 찾았다. 이것이 그의 큰 공적 가운데 하나다. 오늘날 우리는 그가 찾아낸 흔적이 결코 무규율한 성교의 사회 단계가 아니라 훨씬 뒤의 형태인 군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안다. 저 원시적 사회 단계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아주 먼 옛날에 속하므로, 사회적 화석, 곧 뒤처진 야만인들에게서 그것이 한때 존재했다는 직접적 증거를 찾으리라고는 거의 기대할 수 없다. 바흐오펜의 공적은 바로 이 문제를 연구의 전면에 내세웠다는 데 있다.[1]

요즘 인간 성생활의 이 첫 단계를 부정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인류에게 이 “치욕”을 면해 주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직접적 증거가 없다는 점 말고도 특히 다른 동물계의 예를 끌어댄다. 르투르노(『혼인과 가족의 진화』(L'evolution du mariage et de la famille), 1888)는 동물계에서 숱한 사실을 모았는데, 그에 따르면 여기서도 완전히 무규율한 성교는 낮은 단계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사실에서, 그것들이 인간과 그 원시 시대 생활 조건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결론밖에 끌어낼 수 없다. 척추동물이 오랜 기간 짝을 짓는 것은 생리적 원인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예컨대 새의 경우 알을 품는 동안 암컷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데서 설명된다. 새에게서 나타나는 충실한 일부일처제의 예는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인간은 새에게서 유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격한 일부일처제가 모든 덕의 정점이라면, 영예는 촌충에게 돌아가야 한다. 촌충은 50~200개의 편절, 곧 몸마디마다 완전한 암수 생식기를 갖추고, 그 마디마다 자기 자신과 교미하며 평생을 보낸다. 그러나 포유류로 범위를 좁히면 거기서는 성생활의 모든 형태, 곧 무규율, 군혼의 흔적, 일부다처, 단혼을 볼 수 있다. 일처다부만 없는데, 그것은 인간만이 해낼 수 있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사수류조차 수컷과 암컷의 무리 짓기에서 온갖 다양함을 보여 준다. 범위를 더 좁혀 네 종의 유인원만 살펴보면, 르투르노는 그들이 때로는 일부일처이고 때로는 일부다처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고, 지로-퇼롱이 인용하는 소쉬르는 그들이 일부일처라고 주장한다. 베스테르마르크(『인간 혼인의 역사』(The History of Human Marriage), 런던 1891)가 내놓은 유인원의 일부일처제에 관한 더 새로운 주장들도 아직 증거와는 거리가 멀다. 요컨대 보고들이 이런 형편이어서 정직한 르투르노는 이렇게 인정한다.

“덧붙이자면 포유류에서 지적 발달 정도와 성교 형태 사이에는 전혀 엄격한 관계가 없다.”

그리고 에스피나스(『동물 사회』(Des sociétés animales), 1877)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무리는 우리가 동물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사회 집단이다. 그것은 보아하니 가족들로 이루어져 있는 듯하지만, 처음부터 가족과 무리는 서로 다투며, 반비례하여 발전한다.”

위에서 이미 보았듯이, 유인원의 가족 집단과 그 밖의 사회적 집단에 대해 우리는 확실한 것을 거의 아무것도 모르며, 보고들은 서로 정면으로 모순된다. 이는 놀랄 일도 아니다. 야만 인간 부족들에 대해 우리가 가진 보고조차 얼마나 모순투성이이며, 얼마나 비판적 검토와 선별을 필요로 하는가. 그런데 원숭이 사회는 인간 사회보다 관찰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러므로 당분간 우리는 이처럼 전혀 믿을 수 없는 보고에서 끌어낸 모든 추론을 물리쳐야 한다.

반면 앞에 인용한 에스피나스의 문장은 더 나은 실마리를 준다. 고등동물에서 무리와 가족은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립한다. 에스피나스는 발정기의 수컷들의 질투가 어떻게 모든 사회적 무리를 느슨하게 하거나 일시적으로 해체하는지를 아주 멋지게 설명한다.

“가족이 단단히 결속된 곳에서는 무리가 드문 예외로만 형성된다. 반면 자유로운 성교나 일부다처제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무리가 거의 저절로 생겨난다. … 무리가 생겨나려면 가족의 끈이 느슨해지고 개체가 다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들에게서 조직된 무리를 그토록 드물게 본다. … 반면 포유류에서는 어느 정도 조직된 사회를 보는데, 바로 여기서는 개체가 가족 속에 녹아들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무리의 공동 감정은 그것이 생겨날 때 가족의 공동 감정보다 더 큰 적을 가질 수 없다. 서슴지 말고 말하자. 가족보다 높은 사회 형태가 발전했다면, 그것은 근본적 변화를 겪은 가족들을 자기 안에 받아들임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가족들이 바로 그렇게 됨으로써 나중에 한없이 더 유리한 조건 아래 새로 구성될 가능성을 얻었다는 것이 배제되지는 않는다.”(에스피나스, 앞의 책, 지로-퇼롱, 『혼인과 가족의 기원』(Origines du mariage et de la famille), 1884, 518~520쪽에서 재인용.)

여기서 드러나듯이, 동물 사회는 인간 사회를 거슬러 추론하는 데 분명 어떤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소극적 가치일 뿐이다. 고등 척추동물은 우리가 아는 한 두 가지 가족 형태, 곧 일부다처나 한 쌍의 짝짓기만을 안다. 어느 쪽에서든 다 자란 수컷은 하나, 배우자는 하나만 허용된다. 수컷의 질투는 가족의 끈이자 동시에 울타리이며, 동물 가족을 무리와 대립시킨다. 더 높은 사회적 형태인 무리는 수컷들의 질투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불가능해지고, 어떤 경우에는 느슨해지거나 발정기 동안 해체되며, 잘해야 더 이상의 발전이 가로막힌다. 이것만으로도 동물 가족과 인간의 원시 사회가 서로 맞지 않는 것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곧 동물 상태에서 힘겹게 벗어나던 원시인은 가족을 전혀 몰랐거나, 기껏해야 동물에게는 없는 가족을 알았을 뿐이다. 형성 중인 인간처럼 무기를 갖지 못한 동물도 적은 수로는 고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고립에서 가장 높은 사회적 형태는 한 쌍의 짝짓기다. 베스테르마르크가 사냥꾼들의 보고에 따라 고릴라와 침팬지에게 돌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동물 상태를 벗어나 발전하려면, 자연이 보여 주는 가장 큰 진보를 이루려면 또 하나의 요소가 필요했다. 개체에게 모자라는 방어 능력을 무리의 결합된 힘과 협동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오늘날 유인원이 사는 것과 같은 관계에서 인류로 넘어가는 것은 전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원숭이들은 오히려 길을 잘못 든 곁가지라는 인상을 준다. 그들은 점차 사멸해 가고 있으며 어쨌든 쇠퇴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가족 형태에서 원시인의 가족 형태를 유비하여 추론하는 일을 모두 물리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다 자란 수컷들이 서로를 용인하는 것, 질투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더 크고 지속적인 집단을 형성하는 첫째 조건이었다. 동물이 인간이 되는 일은 오직 그런 집단 한가운데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역사에서 부인할 수 없이 입증할 수 있고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서 연구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근원적인 가족 형태로 무엇을 발견하는가? 군혼, 곧 남자들의 집단 전체와 여자들의 집단 전체가 서로를 소유하며 질투가 끼어들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 형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뒤의 발전 단계에서 우리는 일처다부라는 예외적 형태를 발견한다. 이것은 질투의 모든 감정에 더더욱 정면으로 맞서며, 그래서 동물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군혼 형태들은 기묘하게 뒤얽힌 조건을 동반하고 있어서, 필연적으로 더 이전의 더 단순한 성적 교제 형태를 가리키며,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동물 상태에서 인간 상태로 넘어가는 시기에 해당하는 무규율한 성교의 시기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동물의 혼인을 끌어대는 논의는 우리를, 그것이 영영 떼어 놓으려 했던 바로 그 지점으로 도로 데려온다.

그렇다면 무규율한 성교란 무엇을 뜻하는가? 지금이나 이전 시대에 통용되는 금지의 울타리가 통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질투라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것은 이미 보았다. 무엇인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질투가 비교적 늦게 발달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근친상간이라는 관념도 마찬가지다. 본래 형제와 자매가 남편과 아내였을 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 사이의 성교도 오늘날까지 많은 민족에게서 허용된다. 밴크로프트(『북아메리카 태평양 연안 주들의 원주민』(The Native Races of the Pacific States of North America), 1875, 제1권)는 베링 해협의 카비아트족, 알래스카 근처의 코디액족, 영국령 북아메리카 내륙의 티네족에 대해 이를 증언한다. 르투르노는 치페와 인디언, 칠레의 쿠쿠족, 카리브족, 인도차이나의 카렌족에게서 같은 사실을 전하는 보고들을 모아 놓았다. 파르티아인, 페르시아인, 스키타이인, 훈족 등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근친상간이 발명되기 전에는(그리고 그것은 발명이다, 그것도 매우 값진 발명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성교가 서로 다른 세대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 사이의 성교보다 더 혐오스러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성교는 오늘날 가장 속물적인 나라에서도 일어나며 큰 경악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심지어 예순이 넘은 늙은 “처녀”가 넉넉히 부유하면 서른 살쯤 된 젊은 남자와 결혼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가장 근원적인 가족 형태에서 그것에 결부된 근친상간 관념, 곧 우리의 관념과 완전히 다르고 흔히 정면으로 모순되는 관념을 걷어 내면, 무규율하다고밖에 부를 수 없는 성교 형태에 이른다. 나중에 관습이 그은 제한이 아직 없었다는 의미에서 무규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상적 실천에서 뒤죽박죽 난장판이 반드시 따라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시적인 한 쌍의 짝짓기는 결코 배제되지 않으며, 실제로 군혼에서도 지금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를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원시 상태를 가장 최근에 부정한 베스테르마르크가 자손이 태어날 때까지 양성이 짝을 지어 머무는 모든 상태를 혼인이라 부른다면, 이런 종류의 혼인은 무규율한 성교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으며, 무규율, 곧 관습이 그은 성교의 울타리가 없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물론 베스테르마르크는 이런 견해에서 출발한다.

“무규율은 개인적 성향의 억압을 포함한다.” 그래서 “매춘이 그 가장 진정한 형태”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원시 상태를 사창가 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한 그것을 이해하기란 전혀 불가능하다. 우리는 군혼에서 이 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모건에 따르면, 이 무규율한 성교의 원시 상태에서 아마도 아주 이른 시기에 다음이 발전해 나왔다.

1. 혈연가족. 가족의 첫 단계다. 여기서는 혼인 집단이 세대별로 나뉜다. 가족의 범위 안에 있는 모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모두 서로 남편과 아내이며, 그들의 자식들, 곧 아버지들과 어머니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자식들은 다시 공동 배우자의 세 번째 범위를, 그 자식들, 곧 첫 세대의 증손들은 네 번째 범위를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족 형태에서는 조상과 자손, 부모와 자식만이 서로 혼인의 권리와 의무(우리 식으로 말하자면)에서 배제된다. 형제와 자매, 그리고 사촌, 육촌과 그보다 먼 사촌들은 모두 서로 형제자매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두 서로 남편이고 아내다. 이 단계에서 형제와 자매의 관계는 서로 성교를 하는 것을 저절로 포함한다.[2] 그러한 가족의 전형적 모습은 한 쌍의 자손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 안에서 다시 각 세대의 자손은 서로 형제자매이고 바로 그 때문에 서로 남편과 아내다.

혈연가족은 사멸했다. 역사가 전하는 가장 미개한 민족들조차 그것의 입증 가능한 예를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했음이 틀림없다고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이렇다. 하와이의 친족 체계, 지금도 폴리네시아 전역에서 통용되는 이 체계는 오직 이 가족 형태 아래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혈연의 촌수를 표현한다. 그리고 가족의 그 뒤 발전 전체가 이 형태를 필연적 전 단계로 전제한다.

2. 푸날루아 가족. 조직의 첫 진보가 부모와 자식을 서로의 성교에서 배제한 데 있었다면, 둘째 진보는 자매와 형제를 배제한 데 있었다. 이 진보는 당사자들의 나이가 더 비슷했기 때문에 첫째 진보보다 한없이 더 중요했지만 더 어렵기도 했다. 그것은 점차 이루어졌다. 아마도 친형제자매(곧 어머니 쪽의 형제자매)를 성교에서 배제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처음에는 개별 사례로, 차츰 규칙이 되어(하와이에서는 금세기에도 예외가 있었다), 마침내 방계 형제자매, 곧 우리 식으로 말하면 형제자매의 자식, 손자, 증손 사이의 혼인까지 금지하는 데서 끝났다. 모건에 따르면 그것은

“자연선택의 원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훌륭한 예”다.

이 진보로 근친 교배가 제한된 부족들이 형제자매 혼인이 규칙이자 계율로 남은 부족들보다 더 빠르고 더 충실하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 진보의 효과가 얼마나 강력하게 느껴졌는지는 그로부터 직접 생겨난, 목표를 훨씬 넘어선 제도인 씨족이 증명한다. 씨족은 지구상의 모든 미개 민족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회질서의 토대를 이루며, 그리스와 로마에서 우리는 씨족에서 곧바로 문명으로 넘어간다.

모든 원시 가족은 늦어도 몇 세대 뒤에는 쪼개져야 했다. 미개의 중간 단계 깊숙이까지 예외 없이 지배하는 본래의 공산주의적 공동 살림은 가족 공동체의 최대 규모를 정해 놓았다. 그 규모는 조건에 따라 달랐지만 장소마다 꽤 확정되어 있었다. 한 어머니의 자식들 사이의 성교가 온당치 않다는 관념이 생기자마자, 그 관념은 낡은 세대 공동체가 쪼개지고 새 세대 공동체가 세워질 때(이 공동체가 반드시 가족 집단과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효력을 드러내야 했다. 자매들의 한 줄 또는 여러 줄이 한쪽의 핵심이 되고, 그들의 친형제들이 다른 쪽의 핵심이 되었다. 이렇게 또는 이와 비슷하게, 혈연가족에서 모건이 푸날루아 가족이라 부른 형태가 생겨났다. 하와이의 관습에 따르면, 친자매이거나 더 먼 자매(곧 사촌, 육촌 또는 그보다 먼 자매)인 여러 자매가 그들의 공동 남편들의 공동 아내였으며, 그 남편들에서 그들의 형제는 배제되었다. 이 남자들은 이제 서로를 형제라 부르지 않았다. 더 이상 형제일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푸날루아, 곧 친밀한 동료, 말하자면 동업자(associé)라 불렀다. 마찬가지로 친형제이거나 더 먼 형제인 한 줄의 형제들이 자기 자매가 아닌 여러 여자와 공동 혼인을 맺었고, 이 여자들은 서로를 푸날루아라 불렀다. 이것이 한 가족 형태의 고전적 모습이다. 이 형태는 나중에 여러 변형을 허용했으며, 그 본질적 특징은 이러했다. 특정한 가족 범위 안에서 남자들과 여자들이 서로 공유하되, 그 범위에서 여자들의 형제는, 처음에는 친형제가, 나중에는 더 먼 형제도 배제되었고, 거꾸로 남자들의 자매도 배제되었다.

이 가족 형태는 이제 아메리카 체계가 표현하는 친족 촌수를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게 제공한다. 내 어머니의 자매들의 자식은 여전히 어머니의 자식이고, 마찬가지로 내 아버지의 형제들의 자식도 아버지의 자식이며, 그들은 모두 나의 형제자매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형제들의 자식은 이제 어머니의 조카이고, 내 아버지의 자매들의 자식은 아버지의 조카이며, 그들은 모두 나의 사촌이다. 왜냐하면 내 어머니의 자매들의 남편들은 여전히 어머니의 남편이고, 마찬가지로 내 아버지의 형제들의 아내들도 여전히 아버지의 아내이지만 — 늘 사실상은 아니더라도 법적으로는 —, 형제자매 사이의 성교를 사회가 배척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구별 없이 형제자매로 다루어지던 형제자매의 자식들이 두 부류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한쪽은 예전과 다름없이 서로 (더 먼) 형제자매로 남는다. 다른 쪽, 곧 한편으로는 형제의 자식, 다른 한편으로는 자매의 자식은 더 이상 형제자매일 수 없다. 그들은 더 이상 공동의 부모, 곧 공동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둘 다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여기서 처음으로 조카와 사촌이라는 부류가 필요해진다. 이전의 가족 질서에서라면 이 부류는 터무니없었을 것이다. 어떤 종류든 단혼에 기초한 가족 형태에서는 전혀 불합리해 보이는 아메리카 친족 체계가 푸날루아 가족에 의해 가장 작은 세부까지 합리적으로 설명되고 자연스럽게 근거를 얻는다. 이 친족 체계가 퍼져 있던 곳이라면 정확히 그만큼, 적어도 그만큼 푸날루아 가족이나 그와 비슷한 형태도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하와이에서 실제로 존재한다고 입증된 이 가족 형태는, 경건한 선교사들이 지난날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수도사들처럼 이런 반기독교적 관계에서 단순한 “가증스러운 일”[3] 이상의 것을 조금이라도 볼 줄 알았다면, 아마 폴리네시아 전역에서 우리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당시 미개의 중간 단계에 있던 브리튼인에 대해 “그들은 열 명이나 열두 명씩 아내를 공동으로 두는데, 대개 형제가 형제와, 부모가 자식과 함께 그렇게 한다”고 이야기할 때, 이것은 군혼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미개 시대의 어머니들에게 공동의 아내를 둘 만큼 자란 아들이 열 명에서 열두 명씩 있지는 않다. 그러나 푸날루아 가족에 대응하는 아메리카 친족 체계는 많은 형제를 만들어 낸다. 한 남자의 가깝고 먼 모든 사촌이 그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과 함께”라는 말은 카이사르의 잘못된 이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체계에서 아버지와 아들, 또는 어머니와 딸이 같은 혼인 집단에 속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다. 배제되는 것은 아버지와 딸, 또는 어머니와 아들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형태나 이와 비슷한 형태의 군혼은 야만 민족과 미개 민족의 아내 공유에 관한 헤로도토스와 다른 고대 저술가들의 보고를 가장 쉽게 설명해 준다. 왓슨과 케이(『인도의 사람들』(The People of India))가 아우드(갠지스강 북쪽)의 티쿠르족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큰 공동체 안에서 거의 구별 없이 함께 산다”(곧 성적으로),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혼인했다고 여겨지더라도 그 끈은 이름뿐이다.”

씨족이라는 제도는 대부분의 경우 푸날루아 가족에서 직접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오스트레일리아의 계급 체계도 그 출발점을 제공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인에게는 씨족이 있지만, 아직 푸날루아 가족은 없고 그보다 더 거친 형태의 군혼이 있다.

군혼 가족의 모든 형태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확실하다. 어머니는 공동 가족의 모든 아이를 자기 자식이라 부르고 그들에 대해 어머니의 의무를 지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서 자기가 낳은 자식을 안다. 그러므로 군혼이 존재하는 한 혈통은 어머니 쪽으로만 확인할 수 있고, 따라서 여계만 인정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실제로 모든 야만 민족과 미개의 낮은 단계에 속하는 모든 민족에게 해당한다. 그리고 이것을 처음 발견한 것이 바흐오펜의 두 번째 큰 공적이다. 그는 어머니를 따르는 혈통 계승만을 인정하는 이런 방식과 거기서 시간이 지나며 생겨나는 상속 관계를 모권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나는 간결함을 위해 이 이름을 그대로 쓴다. 그러나 이 이름은 적절치 않다. 이 사회 단계에서는 아직 법률적 의미의 권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푸날루아 가족에서 두 표본 집단 가운데 하나, 곧 친자매와 더 먼 자매(곧 친자매에게서 한 대, 두 대 또는 그보다 먼 대를 거쳐 내려온 자매)의 한 줄을, 그들의 자식들, 그리고 어머니 쪽의 친형제나 더 먼 형제(우리의 전제에 따르면 그들의 남편이 아니다)와 함께 떼어 내 보자. 그러면 나중에 이 제도의 원형에서 씨족의 성원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의 범위를 정확히 얻게 된다. 그들은 모두 한 명의 공동 시조모를 가지며, 그로부터 내려온 혈통 덕분에 여자 자손들은 세대마다 자매다. 그러나 이 자매들의 남편들은 더 이상 그들의 형제일 수 없다. 따라서 이 시조모에게서 내려오지 않았으며, 혈연 집단, 곧 나중의 씨족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자식은 이 집단에 속한다. 어머니 쪽의 혈통만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형제자매, 어머니 쪽의 가장 먼 방계 친족까지 포함한 형제자매 사이의 성교를 배척하는 것이 일단 확립되면, 위의 집단도 씨족으로 바뀐다. 곧 서로 혼인할 수 없는 여계 혈족의 확고한 범위로 구성된다. 이 범위는 이때부터 사회적·종교적 성격의 다른 공동 제도를 통해 점점 더 굳어지고 같은 부족의 다른 씨족들과 구별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다룬다. 그런데 씨족이 푸날루아 가족에서 필연적으로, 아니 당연하게 발전해 나온다는 것을 보면, 씨족 제도가 입증되는 모든 민족, 곧 거의 모든 미개 민족과 문명 민족에게서 이 가족 형태가 예전에 존재했다고 거의 확실하게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모건이 책을 쓸 때 군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직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계급으로 조직된 오스트레일리아인의 군혼에 대해 조금 알려져 있었고, 그 밖에 모건은 이미 1871년에 그가 입수한 하와이의 푸날루아 가족에 관한 보고를 발표했다. 푸날루아 가족은 한편으로 모건의 모든 연구의 출발점이었던, 아메리카 인디언 사이에서 지배하는 친족 체계를 완전히 설명해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모권적 씨족을 도출하는 완성된 출발점이 되었다. 끝으로 그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계급들보다 훨씬 높은 발전 단계를 나타냈다. 그러므로 모건이 그것을 대우혼에 필연적으로 앞서는 발전 단계로 파악하고 이전 시대에 그것이 일반적으로 퍼져 있었다고 본 것은 이해할 만했다. 그 뒤로 우리는 군혼의 다른 여러 형태를 알게 되었고, 이제는 모건이 이 점에서 지나쳤음을 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운 좋게도 푸날루아 가족에서 군혼의 가장 높은 형태, 고전적 형태, 곧 더 높은 형태로의 이행이 가장 간단히 설명되는 형태를 만났다.

군혼에 대한 우리 지식을 가장 본질적으로 넓혀 준 것은 영국인 선교사 로리머 파이슨이다. 그는 이 가족 형태를 그 고전적 토양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러 해 동안 연구했다. 그는 가장 낮은 발전 단계를 남오스트레일리아 마운트갬비어의 오스트레일리아 흑인에게서 발견했다. 여기서는 부족 전체가 크로키와 쿠미테라는 두 큰 계급으로 나뉜다. 이 계급들 각각의 안에서 성교는 엄격히 금지된다. 반면 한 계급의 모든 남자는 다른 계급의 모든 여자의 타고난 남편이고, 그 여자는 그의 타고난 아내다. 개인들이 아니라 집단 전체가, 계급과 계급이 서로 혼인해 있다. 그리고 유념할 것은, 여기서는 나이 차이나 특별한 혈연 때문에 어떤 유보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외혼 계급으로 나뉜 데서 생기는 제한만 예외다. 크로키 남자는 모든 쿠미테 여자를 정당한 아내로 둔다. 그런데 그의 친딸은 쿠미테 여자의 딸로서 모권에 따라 역시 쿠미테이므로, 그로써 모든 크로키 남자의 타고난 아내, 따라서 그녀의 아버지의 타고난 아내이기도 하다. 적어도 우리 앞에 있는 계급 조직은 이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다. 이 조직은 근친 교배를 제한하려는 막연한 충동이 있었음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성교에서 아직 특별히 끔찍한 것을 보지 못하던 시대에 생겨났을 수 있다. 그렇다면 계급 체계는 무규율한 성적 교제 상태에서 직접 생겨났을 것이다. 아니면 계급이 생겨났을 때 부모와 자식 사이의 성교는 이미 관습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그렇다면 지금의 상태는 혈연가족을 가리키며 거기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뒤의 것이 더 그럴듯하다. 내가 아는 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혼인 교제의 예는 언급되지 않으며, 외혼의 나중 형태인 모권적 씨족도 대개 이 교제의 금지를, 그것이 세워질 때 이미 있던 것으로서 말없이 전제한다.

두 계급 체계는 남오스트레일리아의 마운트갬비어 말고도 더 동쪽의 달링강 유역과 북동쪽의 퀸즐랜드에서도 발견되므로 널리 퍼져 있다. 이 체계는 형제자매 사이, 형제들의 자식 사이, 그리고 어머니 쪽 자매들의 자식 사이의 혼인만 배제한다. 이들이 같은 계급에 속하기 때문이다. 반면 자매의 자식과 형제의 자식은 혼인할 수 있다. 근친 교배를 막는 한 걸음 더 나아간 단계를 뉴사우스웨일스의 달링강 유역에 사는 카밀라로이족에게서 볼 수 있다. 거기서는 본래의 두 계급이 넷으로 쪼개져 있고, 이 네 계급도 각각 특정한 다른 계급과 통째로 혼인해 있다. 처음 두 계급은 서로 타고난 배우자다. 어머니가 첫째 계급에 속했느냐 둘째 계급에 속했느냐에 따라 자식은 셋째나 넷째 계급에 들어간다. 역시 서로 혼인해 있는 이 두 계급의 자식은 다시 첫째와 둘째 계급에 들어갔다. 그래서 언제나 한 세대는 첫째와 둘째 계급에, 다음 세대는 셋째와 넷째 계급에, 그다음 세대는 다시 첫째와 둘째 계급에 속한다. 이에 따르면 (어머니 쪽) 형제자매의 자식들은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없지만, 형제자매의 손자들은 될 수 있다. 이 기묘하게 복잡한 질서는 — 어쨌든 나중에 — 그 위에 모권적 씨족이 접붙여져 더욱 뒤얽히게 되지만, 여기서는 이에 들어갈 수 없다. 보다시피 근친 교배를 막으려는 충동은 거듭거듭 힘을 발휘하지만, 목표를 분명히 의식하지 못한 채 아주 자연발생적으로 더듬어 가며 그렇게 한다.

군혼은 여기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아직 계급혼, 곧 흔히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한 계급의 남자 전체와 똑같이 널리 퍼져 있는 한 계급의 여자 전체가 집단으로 혼인한 상태다. 이 군혼은 가까이서 보면, 사창가 살림에 익숙한 속물의 공상이 떠올리는 것만큼 그리 끔찍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존재를 짐작하기까지만도 오랜 세월이 걸렸고, 아주 최근에도 그것은 다시 부정되고 있다. 피상적인 관찰자에게 그것은 느슨한 단혼, 곳에 따라 일부다처, 그리고 이따금의 외도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보통의 유럽인에게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 혼인 상태에서 그것을 규제하는 법칙을 발견하려면, 파이슨과 호잇처럼 여러 해를 바쳐야 한다. 그 법칙에 따라, 낯선 오스트레일리아 흑인은 고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야영지에서 야영지로, 부족에서 부족으로 다니며 꺼리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고 그를 받아들이는 여자들을 드물지 않게 만난다. 또 그 법칙에 따라 아내를 여럿 둔 사람은 손님에게 그 가운데 한 명을 하룻밤 내준다. 유럽인이 방종과 무법을 보는 곳에서 실제로는 엄격한 법칙이 지배한다. 그 여자들은 낯선 남자의 혼인 계급에 속하며, 따라서 그의 타고난 아내다. 두 사람을 서로에게 맺어 주는 바로 그 관습법이, 서로 짝을 이루는 혼인 계급 바깥의 모든 성교를 추방의 벌로 금지한다. 여자를 약탈할 때조차, 그런 일은 잦고 어떤 지방에서는 규칙이기도 한데, 계급의 법칙은 꼼꼼히 지켜진다.

덧붙이자면 여자 약탈에서 이미 단혼으로, 적어도 대우혼의 형태로 이행하는 흔적이 나타난다. 젊은 남자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처녀를 약탈하거나 빼돌리면, 그녀는 그들 모두에게 차례로 성적으로 이용당하지만, 그 뒤에는 약탈을 꾸민 젊은 남자의 아내로 여겨진다. 그리고 거꾸로 약탈당한 여자가 그 남자에게서 도망쳐 다른 남자에게 붙잡히면 그녀는 그 남자의 아내가 되고, 첫 남자는 그의 우선권을 잃는다. 그러므로 대체로 존속하는 군혼과 나란히, 그리고 그 안에서 배타적 관계, 곧 길거나 짧은 기간의 짝짓기가 형성되고, 그와 함께 일부다처도 생긴다. 그래서 군혼은 여기서도 사멸해 가는 중이며, 남은 물음은 유럽의 영향 아래에서 무엇이 먼저 무대에서 사라질 것인가뿐이다. 군혼인가, 아니면 군혼을 즐기는 오스트레일리아 흑인인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배하는 것과 같은, 계급 전체에 따른 혼인은 어쨌든 군혼의 매우 낮고 근원적인 형태다. 반면 푸날루아 가족은 우리가 아는 한 군혼의 가장 높은 발전 단계다. 앞의 것은 떠돌아다니는 야만인의 사회 상태에 대응하는 형태로 보이며, 뒤의 것은 이미 공산주의적 공동체의 비교적 확고한 정착을 전제하고 곧바로 그다음의 더 높은 발전 단계로 이끈다. 둘 사이에서 우리는 분명 많은 중간 단계를 더 발견할 것이다. 여기에는 이제 겨우 열렸을 뿐 아직 거의 발을 들이지 않은 연구 영역이 놓여 있다.

3. 대우혼 가족. 길거나 짧은 기간의 어떤 짝짓기는 이미 군혼 아래에서, 또는 그보다 더 이전에도 있었다. 남자는 많은 아내 가운데 한 명의 주된 아내(아직 총애하는 아내라고 하기는 어렵다)를 두었고, 그 여자에게 그는 다른 남편들 가운데 주된 남편이었다. 이런 사정은 선교사들의 혼란에 적잖이 이바지했다. 그들은 군혼에서 어떤 때는 무규율한 아내 공유를, 어떤 때는 제멋대로인 간통을 본다. 그러나 씨족이 발달하고 서로 혼인이 이제 불가능해진 “형제”와 “자매”의 부류가 많아질수록, 그런 관습적 짝짓기는 점점 더 굳어져야 했다. 혈족 사이의 혼인을 막으려는, 씨족이 준 추진력은 더 멀리 나아갔다. 그래서 이로쿼이족과 미개의 낮은 단계에 있는 다른 대부분의 인디언에게서는, 그들의 체계가 열거하는 모든 친족 사이의 혼인이 금지되어 있음을 우리는 본다. 그 친족은 수백 가지나 된다. 이처럼 혼인 금지가 점점 뒤얽히면서 군혼은 점점 더 불가능해졌다. 군혼은 대우혼 가족에게 밀려났다. 이 단계에서는 한 남자가 한 여자와 함께 산다. 그러나 일부다처와 이따금의 부정은 남자의 권리로 남는다. 일부다처는 경제적 이유로 드물게만 일어나지만 말이다. 반면 여자에게는 함께 사는 동안 대개 가장 엄격한 정절이 요구되며, 여자의 간통은 잔혹하게 처벌된다. 그러나 혼인의 끈은 어느 쪽에서든 쉽게 풀 수 있으며, 자식은 예전과 다름없이 어머니에게만 속한다.

혈족을 혼인의 끈에서 점점 더 멀리까지 배제하는 이 과정에서도 자연선택은 계속 작용한다. 모건의 말로 하면 이렇다.

“혈연이 아닌 씨족들 사이의 혼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 강건한 종족을 낳았다. 진보하는 두 부족이 뒤섞였고, 새로운 두개골과 뇌는 양쪽의 능력을 아우를 때까지 자연스럽게 커졌다.”

그리하여 씨족 제도를 가진 부족들은 뒤처진 부족들을 압도하거나 자신들의 본보기로 그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원시사에서 가족의 발전은, 본래 부족 전체를 아우르던, 양성 사이의 혼인 공동체가 지배하는 범위가 끊임없이 좁아지는 데 있다. 처음에는 가까운 친족을, 다음에는 점점 더 먼 친족을, 마지막에는 혼인으로 맺어진 친척까지 계속 배제함으로써 마침내 모든 종류의 군혼은 실제로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결국 아직은 느슨하게 맺어진 한 쌍만 남는다. 이것은 분자이며, 그것이 해체되면 혼인 자체가 끝난다. 이것만 보아도 오늘날의 의미에서 개인적 성애가 단혼의 발생과 얼마나 관계가 없었는지 드러난다. 이 단계에 있는 모든 민족의 실천은 이를 더욱 잘 증명한다. 이전의 가족 형태에서는 남자들이 여자가 없어 곤란할 일이 결코 없었고 오히려 여자가 넘칠 지경이었지만, 이제 여자는 드물고 구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대우혼 이후로 여자의 약탈과 매매가 시작된다. 이것들은 널리 퍼진 징후이지만,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곧 이미 일어난,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는 변화의 징후일 뿐이다. 그런데 현학적인 스코틀랜드인 매클레넌은 이 징후, 여자를 손에 넣는 단순한 방법을 “약탈혼”과 “매매혼”이라는 특별한 가족 부류로 꾸며 냈다. 그 밖에도 아메리카 인디언과 다른 곳(같은 단계)에서는 혼인을 맺는 것이 당사자들의 일이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들의 일이다. 당사자들에게는 흔히 아예 묻지도 않는다. 그래서 서로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 약혼하고, 혼인할 때가 다가와서야 맺어진 거래를 통보받는 일이 잦다. 혼례 전에 신랑은 신부의 씨족 친족(곧 어머니 쪽 친족이지, 아버지와 그 친척이 아니다)에게 선물을 하는데, 이 선물은 넘겨받는 처녀의 값으로 여겨진다. 혼인은 두 배우자 어느 쪽이든 마음대로 풀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부족, 예컨대 이로쿼이족에게서는 그런 이혼을 꺼리는 여론이 차츰 형성되었다. 다툼이 생기면 양쪽의 씨족 친족이 중재에 나서며, 그것이 효과가 없을 때에야 갈라선다. 그때 자식은 아내에게 남고, 그 뒤 양쪽은 저마다 자유롭게 다시 혼인할 수 있다.

대우혼 가족은 그 자체가 너무 약하고 불안정해서 독자적인 살림을 필요한 것으로, 아니 바람직한 것으로조차 만들지 못했으므로, 이전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공산주의적 살림을 결코 해체하지 않는다. 그런데 공산주의적 살림은 집 안에서 여성의 지배를 뜻한다. 이는 친아버지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친어머니만을 인정한다는 것이 여성, 곧 어머니에 대한 높은 존경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회의 처음에 여성이 남성의 노예였다는 생각은 18세기 계몽주의에서 물려받은 가장 터무니없는 관념 가운데 하나다. 모든 야만인에게서, 그리고 낮은 단계와 중간 단계의 모든 미개인에게서, 부분적으로는 높은 단계의 미개인에게서도 여성은 자유로울 뿐 아니라 크게 존경받는 지위를 차지한다. 대우혼에서도 여전히 여성이 어떤 지위에 있는지는 세네카 이로쿼이족 사이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일한 아서 라이트가 증언해 줄 것이다.

“그들의 가족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이 아직 옛 긴 집”(여러 가족의 공산주의적 살림)“에 살던 시절에는 … 그곳에서 언제나 한 클랜”(한 씨족)“이 우세했고, 그래서 여자들은 다른 클랜”(씨족)“에서 남편을 맞았다 … 대개는 여성 쪽이 집을 다스렸다. 비축물은 공동의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게으르거나 너무 서툴러서 공동 비축물에 제 몫을 보태지 못하는 불운한 남편이나 애인에게는 화가 있을진저. 집 안에 자식이 몇이 있든, 자기 소유물이 얼마나 있든 상관없이, 그는 언제라도 보따리를 싸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맞서려 해서는 안 되었다. 집 안에서 그는 배겨 낼 수 없게 되었고, 그에게는 자기 클랜”(씨족)“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대개 그랬듯이 다른 클랜에서 새 혼인을 찾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여자들은 클랜”(씨족)“ 안에서, 그리고 그 밖의 어디서나 큰 세력이었다. 때로는 추장을 해임해 평범한 전사로 강등시키는 일도 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다.”

여자들은 대부분 또는 모두 하나의 같은 씨족에 속하고 남자들은 여러 씨족에 나뉘어 있는 공산주의적 살림이야말로, 원시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저 여성 우위의 물질적 토대다. 이 여성 우위를 발견한 것 역시 바흐오펜의 세 번째 공적이다. — 덧붙여 말해 두자면, 야만인과 미개인에게서 여자들이 지나친 노동을 짊어지고 있다는 여행자와 선교사의 보고는 지금까지 말한 것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두 성 사이의 분업은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지위와는 전혀 다른 원인으로 정해진다. 여자들이 우리 생각으로 마땅한 것보다 훨씬 많이 일해야 하는 민족들이 오히려 우리 유럽인보다 여자들을 훨씬 더 참되게 존경하는 경우가 많다. 겉치레 찬사에 둘러싸이고 모든 실제 노동에서 멀어진 문명의 귀부인은, 고되게 일하는 미개의 여자보다 사회적 지위가 한없이 낮다. 미개의 여자는 자기 민족 안에서 진정한 귀부인(lady, frowa, Frau = 여주인)으로 여겨졌고, 그 성품으로 보아도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다.

오늘날 아메리카에서 대우혼이 군혼을 완전히 몰아냈는지는, 아직 야만의 높은 단계에 있는 북서부 민족들, 특히 남아메리카 민족들을 더 자세히 조사해 보아야 판가름 날 것이다. 남아메리카 민족들에 관해서는 성적 방종의 사례가 너무도 다양하게 전해지므로, 이곳에서 옛 군혼이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그 흔적이 아직 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마흔 개의 북아메리카 부족에서는 맏언니와 혼인한 남자가 그 여동생들이 모두 정해진 나이에 이르면 그들 역시 아내로 맞을 권리를 가진다. 이는 자매 한 무리 전체가 남편들을 공유하던 일의 잔재다. 또 밴크로프트는 캘리포니아반도 주민들(야만의 높은 단계)에게 여러 “부족”이 무차별한 성교를 위해 모이는 어떤 축제가 있다고 전한다. 이 축제에서 그때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분명 씨족들이다. 곧 한 씨족의 여자들이 다른 씨족의 남자 모두를 공동의 남편으로 삼고, 거꾸로도 그러했던 때다. 같은 풍습이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아직 남아 있다. 어떤 민족들에서는 나이 든 남자들, 추장들, 주술사 겸 사제들이 아내 공유를 제 잇속에 이용하여 여자들 대부분을 독차지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들은 어떤 축제와 큰 민회 때에는 옛 공유가 다시 실제로 행해지도록 하고, 자기 아내들이 젊은 남자들과 즐기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옛 자유로운 성교가 잠시 다시 효력을 얻는 이런 주기적 사투르날리아 축제의 사례를 베스테르마르크는 한가득 든다(28~29쪽). 인도의 호족, 산탈족, 판자족, 코타르족, 몇몇 아프리카 민족 등이다. 이상하게도 베스테르마르크는 여기서, 이것이 자신이 부정하는 군혼의 잔재가 아니라 — 원시인이 다른 동물들과 함께 가졌던 발정기의 잔재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여기서 우리는 바흐오펜의 네 번째 큰 발견, 곧 군혼에서 대우혼으로 넘어가는 널리 퍼진 과도 형태의 발견에 이른다. 바흐오펜은 이것을 옛 신들의 계율을 어긴 데 대한 속죄로 묘사한다. 여성이 정조의 권리를 사들이는 속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여성이 옛 남편 공유에서 제 몸을 되사서 한 남자에게만 몸을 바칠 권리를 얻는 속죄를 신비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 속죄는 제한된 몸 내맡기기다. 바빌로니아 여성들은 한 해에 한 번 밀리타 신전에서 몸을 내맡겨야 했다. 서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은 딸들을 몇 년씩 아나이티스 신전에 보냈고, 딸들은 거기서 스스로 고른 정인들과 자유연애를 해야 했으며, 그 뒤에야 혼인할 수 있었다. 비슷하게 종교의 옷을 입은 관습이 지중해와 갠지스강 사이의 거의 모든 아시아 민족에게 공통으로 있다. 바흐오펜이 이미 지적했듯이, 몸값을 치르는 이 속죄의 제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가벼워진다.

“해마다 되풀이되던 바침은 단 한 번의 이행으로 바뀌고, 기혼 부인들의 헤테리즘 뒤에는 처녀들의 헤테리즘이, 혼인 중의 행사 뒤에는 혼인 전의 행사가, 모든 사람에게 가리지 않고 몸을 맡기던 것 뒤에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온다.”(『모권』, XIX쪽.)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종교의 옷이 없다. 몇몇 민족 — 고대의 트라키아인, 켈트인 등과, 오늘날에도 인도의 많은 원주민, 말레이 민족들, 남태평양 섬 주민들, 많은 아메리카 인디언 — 에게서는 처녀들이 혼인할 때까지 최대한의 성적 자유를 누린다. 특히 남아메리카에서는 거의 어디서나 그러하며, 그곳 내륙에 조금이라도 들어가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를 증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애거시(『브라질 여행』(A Journey in Brazil), 보스턴·뉴욕 1868, 266쪽)는 인디언 혈통의 한 부유한 가족 이야기를 전한다. 그가 그 집 딸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을 때, 그는 딸의 아버지에 관해 물었다. 파라과이와의 전쟁에 장교로 나가 있는 어머니의 남편이 아버지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없어요. 우연히 생긴 아이예요(Naõ tem pai, é filha da fortuna).”

“인디언 여성이나 혼혈 여성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부끄러움도 꺼림도 없이 자기 사생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드문 일이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가 예외인 듯하다. 아이들은 … 흔히 어머니만 안다. 모든 보살핌과 책임이 어머니에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버지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또 여성도 자기나 자기 아이들이 그 남자에게 무슨 요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하다.”

여기서 문명인에게 낯설게 보이는 것은 그저 모권과 군혼에서의 규칙일 뿐이다.

또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신랑의 친구와 친척, 또는 혼례 손님들이 혼례 자리에서 예부터 전해 온 신부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고, 신랑은 맨 마지막에야 차례가 온다. 고대에는 발레아레스 제도와 아프리카의 아우길라이인에게서, 지금도 아비시니아의 바레아족에게서 그러하다. 또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관직에 있는 사람, 곧 부족이나 씨족의 우두머리, 카시케, 샤먼, 사제, 군주, 그 밖에 무엇이라 불리든 그런 사람이 공동체를 대신해 신부에게 초야권을 행사한다. 온갖 신낭만주의적 미화에도, 이 초야권(jus primae noctis)은 군혼의 잔재로서 오늘날에도 알래스카 지역 주민 대부분(밴크로프트, 『원주민 종족』(Native Races), 1권 81쪽), 북멕시코의 타후족(같은 책 584쪽)과 다른 민족들에게 남아 있다. 그리고 적어도 본래 켈트인의 나라였고 그것이 군혼에서 곧바로 전해 내려온 곳들에서는, 이를테면 아라곤에서는 중세 내내 존속했다. 카스티야에서는 농민이 한 번도 농노였던 적이 없었던 반면, 아라곤에서는 1486년 가톨릭 왕 페르난도의 중재 판결 때까지 가장 수치스러운 농노제가 지배했다. 이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짐은 앞서 말한 영주들”(senyors, 남작들)“이 … 농민이 아내를 맞는 첫날밤에 그 여자와 잘 수 없으며, 또 지배의 표시로 혼례의 밤에 여자가 잠자리에 누운 뒤 그 침대와 그 여자 위를 넘어갈 수도 없다고 판결하고 선언한다. 또한 앞서 말한 영주들은 농민의 딸이나 아들을, 값을 치르든 치르지 않든, 그들의 뜻을 거슬러 부릴 수 없다.”(주겐하임, 『농노제』(Leibeigenschaft), 페테르부르크 1861, 35쪽에 카탈루냐어 원문으로 인용.)

바흐오펜은 그가 “헤테리즘” 또는 “늪의 생식”이라 부르는 것에서 단혼으로 넘어간 것이 본질적으로 여성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줄곧 주장하는데, 이 점에서도 그는 전적으로 옳다. 경제적 생활 조건이 발전할수록, 곧 옛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인구 밀도가 높아질수록, 예부터 내려온 남녀 관계는 숲에서 비롯한 소박한 성격을 잃어 갔다. 그럴수록 그 관계는 여성에게 굴욕적이고 짓누르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여성은 정조의 권리, 곧 한 남자하고만 맺는 일시적 또는 영속적 혼인의 권리를 구원으로서 더욱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 진보는 어차피 남성에게서 나올 수 없었다. 남성은 사실상의 군혼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생각을 한 번도, 오늘날까지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에 의해 대우혼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남성은 엄격한 일부일처제를 도입할 수 있었다 — 물론 여성에게만.

대우혼 가족은 야만과 미개의 경계에서, 대개는 이미 야만의 높은 단계에서, 곳에 따라서는 미개의 낮은 단계에 와서야 생겨났다. 군혼이 야만의, 일부일처제가 문명의 특징적 가족 형태이듯이, 대우혼 가족은 미개의 특징적 가족 형태다. 대우혼 가족이 확고한 일부일처제로 더 발전하려면, 지금까지 우리가 작용하는 것을 본 원인들과는 다른 원인이 필요했다. 대우혼에서 집단은 이미 그 마지막 단위, 곧 이원자 분자로,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줄어들어 있었다. 자연선택은 혼인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범위를 점점 넓혀 감으로써 제 일을 다 마쳤다. 이 방향으로는 자연선택이 더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회적 동력이 작용하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대우혼에서 새로운 가족 형태가 나와야 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이 동력은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대우혼 가족의 고전적 터전인 아메리카를 떠난다. 그곳에서 더 높은 가족 형태가 발전했다거나, 발견과 정복 이전에 어디서든 확고한 일부일처제가 있었다고 추론하게 하는 징후는 하나도 없다. 구세계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이곳에서는 가축을 길들이고 가축 떼를 기르게 되면서 지금까지 상상도 못 한 부의 원천이 생겨났고, 아주 새로운 사회관계가 만들어졌다. 미개의 낮은 단계까지 항구적인 부는 거의 집, 옷, 조잡한 장신구, 그리고 식량을 얻고 마련하는 도구, 곧 배와 무기와 가장 단순한 가재도구뿐이었다. 식량은 날마다 새로 얻어야 했다. 이제는 말, 낙타, 당나귀, 소, 양, 염소, 돼지 떼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던 유목 민족들 — 인도의 다섯 강 지방과 갠지스 유역, 그리고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물이 많던 옥수스강과 약사르테스강 가의 초원에 있던 아리아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가의 셈족 — 이 재산을 얻었다. 이 재산은 감독과 가장 조잡한 돌봄만 있으면 늘 불어난 수로 번식하며 젖과 고기라는 더없이 풍부한 식량을 대 주었다. 이전의 모든 식량 조달 수단은 이제 뒤로 물러났다. 전에는 필요였던 사냥이 이제는 사치가 되었다.

그러면 이 새로운 부는 누구의 것이었는가? 처음에는 틀림없이 씨족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일찍부터 가축 떼에 대한 사유재산이 발전했음이 틀림없다. 이른바 모세 제1서의 저자에게 조상 아브라함이 가족 공동체의 우두머리로서 제 권리에 따라 가축 떼를 가진 사람으로 보였는지, 아니면 사실상 세습되는 씨족장의 자격으로 가진 사람으로 보였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그를 근대적 의미의 소유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또 확실한 것은, 기록으로 확인되는 역사의 문턱에서 우리가 가축 떼를 이미 어디서나 가장들의 개별 소유로 발견한다는 것이다. 미개의 공예품, 금속 기구, 사치품, 그리고 마침내 인간 가축 — 노예가 그러했던 것과 똑같다.

이제 노예제도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의 미개인에게 노예는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아메리카 인디언은 정복한 적을 더 높은 단계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다루었다. 남자는 죽이거나 아니면 형제로서 승자의 부족에 받아들였다. 여자는 아내로 삼거나, 아니면 살아남은 자식들과 함께 역시 입양했다. 이 단계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아직 그 유지비를 넘는 이렇다 할 잉여를 낳지 못한다. 목축, 금속 가공, 직조, 그리고 마침내 경작이 도입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전에는 그토록 쉽게 얻던 아내들이 이제 교환가치를 지니게 되어 사고팔리게 되었듯이, 노동력도 그렇게 되었다. 가축 떼가 결정적으로 가족 소유로 넘어간 뒤에는 특히 그러했다. 가족은 가축만큼 빨리 불어나지 않았다. 가축을 돌보는 데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여기에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적을 쓸 수 있었고, 게다가 적은 가축과 마찬가지로 번식시킬 수도 있었다.

이런 부가 일단 가족의 사적 소유로 넘어가 거기서 빠르게 불어나자, 대우혼과 모권 씨족 위에 세워진 사회는 강력한 타격을 받았다. 대우혼은 가족 안에 새로운 요소를 들여왔다. 친어머니 옆에 확인된 친아버지를 세운 것이다. 게다가 이 아버지는 아마도 오늘날의 숱한 “아버지들”보다 더 확실하게 확인된 아버지였을 것이다. 당시 가족 안의 분업에 따라 식량과 그것을 얻는 데 필요한 노동수단을 마련하는 일은 남성의 몫이었고, 따라서 그 노동수단의 소유도 남성의 것이었다. 이혼하게 되면 여성이 가재도구를 가졌듯이 남성은 그것들을 가지고 나갔다. 그러므로 당시 사회의 관습에 따르면 남성은 새로운 식량 원천인 가축의 소유자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새로운 노동수단인 노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사회의 관습에 따르면 그의 자식들은 그에게서 상속받을 수 없었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모권에 따르면, 곧 혈통을 여계로만 따지는 동안에는, 그리고 씨족 안의 본래의 상속 관습에 따르면, 처음에는 죽은 씨족원의 재산을 그의 씨족 친족들이 상속했다. 재산은 씨족 안에 남아야 했다. 재산이라야 보잘것없었으므로, 실제로는 아마 예부터 가장 가까운 씨족 친족, 곧 어머니 쪽 혈족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남자의 자식들은 그의 씨족이 아니라 그들 어머니의 씨족에 속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어머니의 다른 혈족들과 함께, 나중에는 아마 우선적으로 어머니에게서 상속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는 상속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씨족에 속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재산은 그 씨족 안에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축 떼의 주인이 죽으면 그의 가축 떼는 우선 그의 형제자매와 그의 자매의 자식들, 또는 그의 어머니의 자매의 자손들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자식들은 상속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부가 늘어남에 따라, 부는 한편으로는 가족 안에서 남성에게 여성보다 더 중요한 지위를 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강해진 지위를 이용해 전래의 상속 순위를 자식들에게 유리하게 뒤엎으려는 충동을 낳았다. 그러나 혈통이 모권에 따라 정해지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므로 모권을 뒤엎어야 했고, 모권은 뒤엎어졌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보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이 혁명은 — 인류가 겪은 가장 깊숙이 파고든 혁명 가운데 하나지만 — 씨족의 살아 있는 구성원을 단 한 사람도 건드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씨족의 모든 성원은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일 수 있었다. 앞으로는 남성 성원의 자손은 씨족에 남고, 여성 성원의 자손은 아버지의 씨족으로 옮겨 감으로써 제외된다는 간단한 결정으로 충분했다. 이로써 여계로 혈통을 따지는 방식과 모계 상속권이 뒤엎어지고, 남계 혈통과 부계 상속권이 세워졌다. 이 혁명이 문명 민족들에게서 어떻게, 언제 일어났는지 우리는 전혀 모른다. 그것은 완전히 선사시대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특히 바흐오펜이 모은 모권의 풍부한 흔적으로 충분하고도 남게 증명된다. 그것이 얼마나 쉽게 이루어지는지는 여러 인디언 부족에게서 볼 수 있다. 이들에게서 이 혁명은 최근에야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부와 달라진 생활 방식(숲에서 초원으로의 이주)의 영향을, 다른 한편으로는 문명과 선교사의 도덕적 영향을 받았다. 미주리강 유역의 여덟 부족 가운데 여섯은 남계 혈통과 상속 순위를 가졌으나, 둘은 아직 여계를 가지고 있다. 쇼니족, 마이애미족, 델라웨어족에게서는 자식이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을 수 있도록, 아버지의 씨족에 속하는 씨족 이름을 자식에게 붙여 그 씨족으로 옮기는 풍습이 퍼졌다. “사물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사물을 바꾸려는, 인간의 타고난 궤변! 그리고 직접적 이해관계가 충분한 동기를 주는 곳에서는 전통 안에서 전통을 깨뜨릴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내는 것!”(마르크스.) 이로써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생겼고, 이 혼란은 부권으로 넘어감으로써만 바로잡을 수 있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실제로 그렇게 바로잡혔다. “이것이 대체로 가장 자연스러운 이행인 듯하다.”(마르크스.) — 이 이행이 구세계의 문명 민족들에게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관해 비교법학자들이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는 것은 — 물론 거의 가설뿐이지만 — 코발렙스키, 『가족과 소유의 기원과 진화 개관』(Tableau des origines et de l'évolution de la famille et de la propriété, 스톡홀름 1890)을 참조하라.

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성은 집 안에서도 키를 잡았고, 여성은 품위를 빼앗기고 예속되어 남성의 정욕의 노예, 아이를 낳는 단순한 도구가 되었다. 여성의 이 비천해진 지위는 특히 영웅시대, 그리고 그보다 더 고전시대의 그리스인에게서 드러나게 나타나는데, 점차 미화되고 위선으로 덮였으며 곳에 따라서는 더 부드러운 형태로 포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없어지지는 않았다.

이제 확립된 남성 단독 지배의 첫 효과는 이때 나타나는 중간 형태인 가부장제 가족에서 드러난다. 가부장제 가족을 주로 특징짓는 것은 일부다처제(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룬다)가 아니라

“가장의 부권 아래 자유인과 비자유인 여럿을 하나의 가족으로 조직한 것이다. 셈족의 형태에서는 이 가장이 일부다처제로 살고, 비자유인들도 아내와 자식을 가지며, 조직 전체의 목적은 일정한 구역에서 가축 떼를 돌보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비자유인의 편입과 부권이다. 그러므로 이 가족 형태의 완성된 전형은 로마 가족이다. 파밀리아(familia)라는 말은 본래 감상과 집안싸움으로 이루어진 오늘날 속물의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그 말은 로마인에게서 처음에는 부부와 그 자식들조차 가리키지 않았고, 오직 노예만을 가리켰다. 파물루스(famulus)는 집안 노예를 뜻하고, 파밀리아는 한 남자에게 속하는 노예 전체다. 가이우스의 시대에도 여전히 ‘파밀리아, 곧 세습 재산’(familia, id est patrimonium)이 유언으로 물려졌다. 이 표현은 로마인이 새로운 사회적 유기체를 가리키려고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 유기체의 우두머리는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노예 여럿을 로마식 부권 아래 거느렸고, 그들 모두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가졌다.

“그러므로 이 말은 라티움 부족들의 철갑 같은 가족 체계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그 체계는 경작과 법적 노예제가 도입된 뒤, 그리고 아리아계 이탈리아인이 그리스인과 갈라진 뒤에 생겨났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근대 가족은 노예제(servitus)뿐 아니라 농노제도 맹아로 품고 있다. 근대 가족은 처음부터 농경을 위한 부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 가족은 나중에 사회와 그 국가 안에서 넓게 발전하는 모든 대립을 축소판으로 제 안에 품고 있다.”

이런 가족 형태는 대우혼이 일부일처제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아내의 정절, 따라서 자식의 부성을 확실히 하려고 아내는 남편의 권력에 무조건 넘겨진다. 남편이 아내를 죽여도 그는 제 권리를 행사할 뿐이다.

가부장제 가족과 함께 우리는 기록된 역사의 영역에 들어서며, 그와 함께 비교법학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역에 들어선다. 실제로 비교법학은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진전을 가져다주었다. 막심 코발렙스키(『가족과 소유의 기원과 진화 개관』(Tableau etc. de la famille et de la propriété), 스톡홀름 1890, 60~100쪽) 덕분에 우리는 다음 사실의 증명을 얻었다. 가부장제 가족 공동체는 오늘날에도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에게서 자드루가(대략 ‘벗 맺음’으로 옮길 수 있다)나 브라츠트보(형제단)라는 이름으로, 동방 민족들에게서는 변형된 형태로 볼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군혼에서 생겨난 모권 가족과 근대 세계의 개별 가족 사이의 과도 단계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구세계의 문명 민족들, 곧 아리아인과 셈족에 대해서는 이것이 증명된 듯하다.

남슬라브의 자드루가는 이런 가족 공동체 가운데 아직 살아 있는 가장 좋은 사례다. 자드루가는 한 아버지의 자손 여러 세대와 그들의 아내들을 포괄한다. 이들은 모두 한 농가에서 함께 살고, 밭을 함께 경작하며, 공동 비축물로 먹고 입고, 수확의 잉여를 공동으로 소유한다. 공동체는 가장(domaćin)의 최고 관리 아래 있다. 가장은 대외적으로 공동체를 대표하고, 작은 물건을 처분할 수 있으며, 금고를 맡아 그것과 일상 업무의 처리에 책임을 진다. 가장은 선출되며, 반드시 최연장자일 필요는 없다. 여성들과 그들의 일은 주부(domaica)의 지휘 아래 있는데, 주부는 보통 가장의 아내다. 주부는 처녀들의 남편감을 고르는 데도 중요한, 흔히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진다. 그러나 최고 권력은 가족 회의, 곧 여자든 남자든 성인 성원 모두의 모임에 있다. 가장은 이 모임에 보고할 책임을 진다. 모임은 결정적인 의결을 하고, 성원들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하며, 어느 정도 중요한 매매, 특히 토지의 매매 등을 결정한다.

이런 큰 가족 공동체가 러시아에도 존속하고 있다는 것은 십 년쯤 전에야 비로소 증명되었다. 이제 이 가족 공동체는 옵시나, 곧 촌락 공동체와 똑같이 러시아 민중의 관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널리 인정된다. 이 가족 공동체는 러시아의 가장 오래된 법전인 야로슬라프의 『프라브다』에 달마치야 법에서와 같은 이름(베르비, werwj)으로 나오며, 폴란드와 체코의 사료에서도 확인된다.

호이슬러(『독일법 제도』(Institutionen des deutschen Rechts))에 따르면 독일인에게서도 경제 단위는 본래 근대적 의미의 개별 가족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였다. 가족 공동체는 여러 세대 또는 여러 개별 가족으로 이루어지며, 그 밖에도 비자유인을 포함하는 일이 아주 흔하다. 로마 가족도 이 유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며, 그에 따라 가장의 절대 권력과, 가장에 대한 다른 가족 구성원의 무권리 상태는 최근 강하게 의문시되고 있다. 켈트인에게서도 아일랜드에 비슷한 가족 공동체가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니베르네 지방에 파르소느리(parçonneries)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혁명 때까지 남아 있었고, 프랑슈콩테에서는 오늘날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루앙(손에루아르) 근처에서는 큰 농가를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에는 지붕까지 닿는 높은 공동 중앙 홀이 있고, 그 둘레에 침실들이 있어 여섯에서 여덟 계단을 올라 들어가는데, 이곳에 같은 가족의 여러 세대가 산다.

인도에서는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하는 가족 공동체를 이미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네아르코스가 언급했으며, 같은 지역, 곧 펀자브와 그 나라 북서부 전체에 오늘날에도 존속한다. 캅카스에서는 코발렙스키 자신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알제리에서는 카빌리아인에게 아직 남아 있다. 아메리카에서도 있었다고 하는데, 수리타가 고대 멕시코에 관해 기술한 “칼풀리”에서 그것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맞서 쿠노(《아우슬란트》, 1890, 42~44호)는 정복 시기의 페루에 일종의 마르크 제도(이상하게도 마르크를 마르카라고 불렀다)가 있었고, 경작지를 주기적으로 나누었으며, 따라서 개별 경작이 이루어졌음을 꽤 분명하게 증명했다.

어쨌든 공동 토지 소유와 공동 경작을 하는 가부장제 가족 공동체는 이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얻는다. 그것이 문명 민족들과 구세계의 다른 많은 민족들에게서 모권 가족과 개별 가족 사이에서 중요한 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 코발렙스키는 더 나아가, 가족 공동체가 또한 촌락 공동체 또는 마르크 공동체가 발전해 나온 과도 단계였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이 공동체에서는 개별 경작이 이루어지고 경작지와 목초지를 처음에는 주기적으로, 나중에는 최종적으로 나누었다. 이 결론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이런 가족 공동체 안의 가족생활에 관해서는, 적어도 러시아에서는 가장이 공동체의 젊은 여성들, 특히 며느리들에 대해 자기 지위를 심하게 남용하고 흔히 그들로 하렘을 만든다는 평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한다. 러시아 민요는 이에 관해 꽤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모권이 무너지면서 빠르게 발전한 일부일처제로 넘어가기 전에,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에 관해 몇 마디 해 두자. 두 혼인 형태는 예외일 수밖에 없고, 말하자면 역사의 사치품일 수밖에 없다. 한 나라에 둘이 나란히 존재한다면 모르겠지만, 알다시피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일부다처제에서 밀려난 남자들은 일처다부제에서 남은 여자들에게서 위안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남녀의 수는 사회제도와 상관없이 지금까지 대체로 같았다. 그러므로 이 혼인 형태들 가운데 어느 것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형태로 올라설 수 없음은 저절로 분명하다. 실제로 한 남자의 일부다처제는 분명 노예제의 산물이었으며, 몇몇 예외적 지위에 한정되었다. 셈족의 가부장제 가족에서는 족장 자신과 기껏해야 그의 아들 몇몇만 일부다처제로 살고, 나머지는 아내 하나로 만족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동방 전체가 그러하다. 일부다처제는 부자와 귀족의 특권이며, 주로 여자 노예를 사들여 채워진다. 민중 대다수는 일부일처제로 산다. 인도와 티베트의 일처다부제도 그와 같은 예외다. 그것이 군혼에서 비롯한 기원은 분명 흥미로운 것인데, 더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처다부제가 이슬람교도의 질투 어린 하렘 살림보다 훨씬 너그러운 듯하다. 적어도 인도의 나이르족에서는 남자 셋, 넷 또는 그 이상이 한 아내를 공유하지만, 그들 각자는 그 밖에 다른 남자 셋 이상과 함께 두 번째 아내를 공유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세 번째, 네 번째 아내도 가질 수 있다. 매클레넌이 여러 곳에 동시에 가입할 수 있는 이 혼인 클럽들을 스스로 기술하면서도 거기서 클럽 혼인이라는 새로운 부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 혼인 클럽 살림은 결코 진짜 일처다부제가 아니다. 지로-퇼롱이 이미 지적했듯이, 그것은 오히려 군혼의 특수한 형태다. 남자들은 일부다처제로, 여자들은 일처다부제로 산다.

4. 일부일처제 가족. 앞에서 보였듯이 일부일처제 가족은 미개의 중간 단계와 높은 단계의 경계 시기에 대우혼 가족에서 생겨난다. 그것의 최종적 승리는 문명이 시작된다는 표지 가운데 하나다. 일부일처제 가족은 남성의 지배 위에 세워지며, 그 명시적 목적은 부성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식을 낳는 것이다. 이 부성이 요구되는 까닭은, 이 자식들이 언젠가 친자 상속인으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 가족이 대우혼과 다른 점은 혼인의 끈이 훨씬 단단하다는 것인데, 이제는 그 끈을 양쪽의 뜻대로 풀 수 없다. 이제는 대개 남편만이 그 끈을 풀고 아내를 내쫓을 수 있다. 부부간 부정의 권리도 이제 적어도 관습으로는 여전히 남편에게 보장되며(나폴레옹 법전은 남편이 첩을 부부의 집에 들이지 않는 한 이 권리를 명시적으로 남편에게 인정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이 권리는 점점 더 많이 행사된다. 아내가 옛 성적 관행을 떠올려 그것을 되살리려 하면, 아내는 이전 어느 때보다 엄하게 처벌된다.

이 새로운 가족 형태는 그리스인에게서 그 가혹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마르크스가 지적하듯이, 신화 속 여신들의 지위는 여성이 아직 더 자유롭고 더 존경받는 지위를 누리던 이전 시기를 보여 준다. 그러나 영웅시대에 이르면 우리는 여성이 이미 남성의 우위와 여자 노예들과의 경쟁으로 비천해져 있음을 발견한다. 『오디세이아』에서 텔레마코스가 어머니의 말을 막고 잠자코 있으라고 하는 대목을 읽어 보라. 호메로스에게서 전리품으로 잡힌 젊은 여자들은 승자의 육욕에 내맡겨진다. 지휘관들은 차례와 서열에 따라 가장 아름다운 여자들을 골라 갖는다. 알다시피 『일리아스』 전체는 이런 여자 노예 하나를 둘러싼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다툼을 축으로 돈다. 호메로스의 웬만한 영웅마다, 그와 천막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전쟁 포로 처녀가 언급된다. 이 처녀들은 고향과 부부의 집에도 함께 데려가는데, 아이스킬로스에서 아가멤논이 카산드라를 데려가는 것이 그 예다. 이런 여자 노예에게서 낳은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산에서 작은 몫을 받고 완전한 자유인으로 여겨진다. 테우크로스가 텔라몬의 그런 서자이며,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불릴 수 있다. 본처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자신은 엄격한 정조와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킬 것이 기대된다. 영웅시대의 그리스 여성은 문명 시기의 여성보다 존경을 받기는 하지만, 결국 남편에게는 적출 상속인의 어머니, 집안의 최고 관리인, 여자 노예들의 감독자일 뿐이다. 남편은 이 여자 노예들을 마음대로 첩으로 삼을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일부일처제 곁에 노예제가 존재한다는 것, 가진 모든 것과 함께 남성에게 속하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 노예들이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일부일처제에 처음부터 특유의 성격을 새겼다. 여성에게만 일부일처제이고 남성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성격이다. 그리고 일부일처제는 오늘날에도 이 성격을 지니고 있다.

후대의 그리스인에 관해서는 도리스인과 이오니아인을 구별해야 한다. 스파르타를 고전적 사례로 하는 도리스인은 여러 면에서 호메로스가 보여 주는 것보다도 더 오래된 혼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스파르타에서는 그곳의 국가관에 따라 변형된 대우혼이 통용되는데, 여기에는 아직 군혼의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자식 없는 혼인은 해소된다. 아낙산드리다스 왕(기원전 560년 무렵)은 자식 없는 아내 외에 두 번째 아내를 얻어 두 살림을 꾸렸다. 같은 무렵 아리스톤 왕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두 아내 외에 세 번째 아내를 얻었으나, 그 대신 앞의 아내 가운데 하나를 내보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형제 여럿이 한 아내를 공유할 수 있었고, 친구의 아내가 더 마음에 드는 남자는 그 친구와 그 아내를 나눌 수 있었다. 또 비스마르크라면 말했을 법한 건장한 “종마”에게, 그가 비시민이라 하더라도 아내를 내주는 것이 점잖은 일로 여겨졌다. 플루타르코스의 한 대목에서는 한 스파르타 여성이 구애하며 자기를 따라다니는 남자에게 자기 남편에게 가 보라고 하는데, 이로 보아 — 쇠만에 따르면 — 풍속의 자유가 그보다도 더 컸던 듯하다. 그러므로 진짜 간통, 곧 남편 몰래 하는 아내의 부정은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다른 한편 스파르타에서는 적어도 그 전성기에는 집안 노예제가 알려져 있지 않았고, 농노인 헤일로타이는 영지에 따로 살았다. 그래서 스파르타 시민이 그 여자들에게 손을 댈 유혹도 적었다. 이런 모든 사정 아래서 스파르타의 여성이 다른 그리스인에게서와는 전혀 다르게 존경받는 지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달리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스파르타 여성과 아테네 헤타이라 가운데 뛰어난 이들은 고대인이 존경을 담아 이야기하고 그 말을 기록해 둘 가치가 있다고 여긴 유일한 그리스 여성들이다.

아테네가 대표하는 이오니아인에게서는 전혀 달랐다. 처녀들은 실잣기, 베 짜기, 바느질만 배웠고, 기껏해야 읽기와 쓰기를 조금 배웠다. 그들은 거의 갇혀 지냈고 다른 여자들하고만 어울렸다. 여성의 방은 집에서 따로 떨어진 곳, 위층이나 뒤채에 있었다. 남자, 특히 낯선 남자는 그곳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고, 남자 손님이 오면 여성들은 그곳으로 물러났다. 여성들은 여자 노예를 거느리지 않고는 외출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말 그대로 감시를 받았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간통하려는 자를 쫓아내려고 기르던 몰로소스 개에 관해 이야기한다. 적어도 아시아의 도시들에서는 여성을 감시하려고 환관을 두었는데, 키오스에서는 이미 헤로도토스 시대에 환관을 팔려고 만들어 냈으며, 바흐스무트에 따르면 미개인에게만 판 것이 아니었다. 에우리피데스에게서 여성은 오이쿠레마(oikurema), 곧 살림을 돌보는 물건(이 말은 중성이다)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아테네인에게 여성은 아이를 낳는 일을 빼면 다름 아닌 가장 높은 하녀였다. 남자에게는 체육 훈련과 공적 토론이 있었는데, 여기서 여성은 배제되었다. 게다가 남자는 흔히 여자 노예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고, 아테네의 전성기에는 널리 퍼진, 적어도 국가가 장려한 매춘이 있었다. 바로 이 매춘을 토대로 해서, 스파르타 여성이 성품으로 그러했듯이 정신과 예술적 교양으로 고대 여성의 일반 수준을 뛰어넘은 유일한 그리스 여성상이 발전했다. 그러나 여성이 되려면 먼저 헤타이라가 되어야 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테네 가족에 대한 가장 엄한 유죄 판결이다.

이 아테네 가족은 시간이 흐르면서 본보기가 되었다. 다른 이오니아인뿐 아니라 점점 더 본토와 식민지의 모든 그리스인이 이 본보기에 따라 자기 집안 관계를 꾸몄다. 그러나 온갖 격리와 감시에도 그리스 여성들은 남편을 속일 기회를 꽤 자주 찾아냈다.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사랑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했을 남편들은 헤타이라들과 갖가지 연애 사건으로 즐겼다. 그러나 여성의 품위 박탈은 남성에게 복수했고 남성의 품위도 떨어뜨렸다. 마침내 남성은 소년애의 추악함에 빠져들었고, 가니메데스 신화로 자신의 신들을 자기 자신만큼 타락시켰다.

이것이 우리가 고대에서 가장 문명화되고 가장 높이 발전한 민족에게서 추적할 수 있는 한에서의 일부일처제의 기원이었다. 일부일처제는 결코 개인적 성애의 열매가 아니었다. 혼인은 전과 다름없이 정략결혼이었으므로, 일부일처제는 개인적 성애와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 위에, 곧 본래의 자연 발생적 공동 소유에 대한 사유재산의 승리 위에 세워진 최초의 가족 형태였다. 가족 안에서 남편의 지배, 그리고 오직 그의 자식일 수밖에 없고 그의 부를 물려받을 상속인으로 정해진 자식을 낳는 것 — 이것만이 그리스인이 거리낌 없이 밝힌 단혼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 밖의 점에서 단혼은 그들에게 짐이었고, 신들과 국가와 조상에 대한 의무, 어쨌든 이행해야 하는 의무였다. 아테네에서는 법이 혼인뿐 아니라 남편 쪽에서 이른바 부부의 의무를 최소한 이행하는 것까지 강제했다.

그러므로 단혼은 결코 남녀의 화해로서 역사에 등장하지 않으며, 하물며 혼인의 최고 형태로서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 반대다. 단혼은 한 성이 다른 성을 굴복시키는 것으로서, 지금까지 선사 전체에 알려지지 않았던 양성 간 투쟁의 선포로서 등장한다. 1846년 마르크스와 내가 쓴 출판되지 않은 옛 원고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발견한다. “최초의 분업은 아이를 낳기 위한 남녀 사이의 분업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이렇게 덧붙일 수 있다. 역사에 나타나는 최초의 계급 대립은 단혼에서 남녀 사이의 적대가 발전하는 것과 일치하며,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일치한다. 단혼은 큰 역사적 진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단혼은 노예제, 사적 부와 함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저 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에는 모든 진보가 동시에 상대적 퇴보이며, 한쪽의 행복과 발전은 다른 쪽의 고통과 억눌림을 통해 관철된다. 단혼은 문명사회의 세포 형태이며, 우리는 이미 그 안에서 문명사회에서 활짝 펼쳐지는 대립과 모순의 본성을 연구할 수 있다.

옛날의 상대적인 성교의 자유는 대우혼이나 심지어 단혼이 승리했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옛 혼인 체계는 푸날루아 집단이 차츰 사라지면서 더 좁은 범위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발전해 가는 가족을 둘러싸고 있었고 문명이 동터 올 때까지 그 옷자락에 매달려 있었다 … 그것은 마침내 새로운 형태의 헤테리즘 속으로 사라졌는데, 이 헤테리즘은 가족 위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처럼 인류를 문명 안까지 따라다닌다.”

모건은 헤테리즘을 단혼과 나란히 존재하는, 남자들과 미혼 여자들 사이의 혼외 성교로 이해한다. 알다시피 이것은 문명 시기 전체에 걸쳐 갖가지 형태로 번성하며 점점 더 노골적인 매춘이 된다. 이 헤테리즘은 아주 직접적으로 군혼에서, 곧 여성들이 정조의 권리를 사들이던 몸 내맡기기의 제물에서 유래한다. 돈을 받고 몸을 내주는 것은 처음에는 종교적 행위였다. 그것은 사랑의 여신의 신전에서 이루어졌고, 돈은 본래 신전 금고로 들어갔다. 아르메니아의 아나이티스 신전과 코린토스의 아프로디테 신전의 히에로둘로이, 그리고 신전에 딸린 인도의 종교적 무희들, 이른바 바야데르(이 말은 포르투갈어 bailadeira, 곧 무희가 일그러진 것이다)가 최초의 매춘부였다. 몸 내맡기기는 본래 모든 여성의 의무였으나, 나중에는 이 여사제들이 다른 모든 여성을 대신해 홀로 행했다.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헤테리즘이 혼인 전의 처녀들에게 허용된 성적 자유에서 유래한다 — 이것 역시 군혼의 잔재인데, 다만 다른 길로 우리에게 전해졌을 뿐이다. 재산의 차이가 생기면서, 그러니까 이미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 임금노동이 노예노동과 나란히 산발적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그 필연적 짝으로서 자유로운 여성의 직업적 매춘이 여자 노예의 강요된 몸 내맡기기와 나란히 나타난다. 그러므로 군혼이 문명에 물려준 유산은 양면적이다. 문명이 낳는 모든 것이 양면적이고, 이중적이고, 제 안에서 갈라져 있고, 대립적이듯이 말이다. 한쪽에는 일부일처제가, 다른 쪽에는 헤테리즘과 그 극단적 형태인 매춘이 있다. 헤테리즘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제도일 뿐이다. 그것은 옛 성적 자유를 이어 간다 — 남성에게 유리하게. 실제로는 묵인될 뿐 아니라 특히 지배계급이 신나게 함께 즐기면서도, 말로는 단죄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 단죄는 결코 여기에 가담한 남성들에게 떨어지지 않고 여성들에게만 떨어진다. 여성들은 배척되고 쫓겨나며, 이로써 여성에 대한 남성의 무조건적 지배가 사회의 기본 법칙임이 다시 한번 선포된다.

그런데 이와 함께 일부일처제 안에서도 두 번째 대립이 발전한다. 헤테리즘으로 제 삶을 꾸미는 남편 곁에 버림받은 아내가 서 있다. 그리고 반쪽을 먹고 나면 온전한 사과를 손에 쥐고 있을 수 없듯이, 대립의 한쪽만 가지고 다른 쪽은 갖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남편들은 아내들이 그들을 깨우쳐 줄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던 듯하다. 단혼과 함께,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두 가지 항구적인 사회적 인물형이 등장한다. 아내의 고정된 애인과 오쟁이 진 남편이다. 남성은 여성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승리에 관을 씌우는 일은 패자들이 너그럽게 떠맡았다. 단혼과 헤테리즘과 나란히 간통이 피할 수 없는 사회제도가 되었다 — 금지되고 엄하게 처벌되지만 억누를 수 없는 제도다. 자식의 확실한 부성은 전과 다름없이 기껏해야 도덕적 확신에 기댈 뿐이었다. 그래서 이 풀 수 없는 모순을 풀려고 나폴레옹 법전 제312조는 이렇게 규정했다.

“혼인 중에 잉태된 아이의 아버지는 — 남편이다(L'enfant conçu pendant le mariage a pour père le mari).”

이것이 삼천 년 단혼의 마지막 결과다. 그러므로 개별 가족 가운데 그 역사적 기원에 충실하고, 남성의 배타적 지배로 표현되는 남녀의 투쟁을 뚜렷이 드러내는 경우에, 우리는 개별 가족에서 작은 그림 하나를 본다. 문명의 시작 이후 계급으로 갈라진 사회가 그 안에서 움직이면서도 풀지도 극복하지도 못하는 바로 그 대립과 모순의 축소판이다. 여기서 나는 물론 단혼 가운데, 부부 생활이 실제로 그 제도 전체의 본래 성격이 정한 대로 흘러가되 아내가 남편의 지배에 반항하는 경우만을 말하고 있다. 모든 혼인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독일 속물이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집 안에서의 자기 지배를 국가에서의 자기 지배보다 나을 것 없이 지킬 줄 모르며, 그래서 그의 아내는 그가 입을 자격이 없는 바지를 당연히 입는다. 그 대신 그는 자기보다 더 자주 훨씬 고약한 일을 당하는 같은 처지의 프랑스인보다 자기가 훨씬 낫다고 여긴다.

덧붙이자면 개별 가족이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인에게서 보였던 고전적이고 가혹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장차 세계를 정복할 로마인은 그리스인보다 덜 섬세하기는 해도 더 넓은 안목을 지녔는데, 그들에게서 여성은 더 자유로웠고 더 존중받았다. 로마인은 아내의 생사를 좌우하는 권력으로 혼인의 정절이 충분히 보장된다고 믿었다. 또 이곳에서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혼인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혼의 발전에서 가장 큰 진보는 분명 독일인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들에게서는, 아마 가난 탓에, 당시 일부일처제가 아직 대우혼에서 완전히 발전해 나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키투스가 언급한 세 가지 사정에서 이렇게 추론한다. 첫째, 혼인을 매우 신성하게 여겼는데도 — “그들은 한 아내로 만족하며, 여자들은 정결로 둘러싸여 산다” — 귀인과 부족장들에게는 일부다처가 허용되었다. 이는 대우혼이 행해지던 아메리카인의 상태와 비슷하다. 둘째, 모권에서 부권으로의 이행은 그보다 얼마 전에야 이루어졌을 것이다. 외삼촌 — 모권에 따른 가장 가까운 남성 씨족 친족 — 이 여전히 친아버지보다도 거의 더 가까운 친족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아메리카 인디언의 관점에 상응하는데, 마르크스는 자주 말했듯이 그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원시 시대를 이해할 열쇠를 찾았다. 셋째, 독일인 사이에서 여성은 높이 존중받았고 공적인 일에도 영향력이 있었다. 이는 일부일처제의 남성 지배와 정면으로 반대된다. 이 거의 모든 점에서 독일인은 스파르타인과 일치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스파르타인에게서도 대우혼은 아직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독일인과 함께 전혀 새로운 요소가 세계 지배에 이르렀다. 이제 로마 세계의 폐허 위에서 여러 민족이 뒤섞이며 발전한 새로운 일부일처제는 남성 지배를 더 부드러운 형태로 감쌌고, 여성에게 적어도 겉보기로는 고전 고대가 일찍이 알지 못한 훨씬 존중받고 자유로운 지위를 남겨 주었다. 이로써 비로소 가능성이 주어졌다. 일부일처제에서 — 경우에 따라 그 안에서, 그 곁에서, 그에 맞서서 — 우리가 일부일처제에 빚진 가장 큰 도덕적 진보, 곧 이전의 온 세계가 알지 못했던 근대의 개인적 성애가 발전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런데 이 진보는 분명, 독일인이 아직 대우혼 가족 속에 살고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여성의 지위를 될 수 있는 대로 일부일처제에 접붙였다는 사정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결코 전설처럼 이야기되는, 놀랍도록 풍속이 순결한 독일인의 타고난 기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 기질이라는 것은 실은 대우혼이 일부일처제처럼 날카로운 도덕적 대립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 그친다. 오히려 독일인은 이동하는 동안, 특히 남동쪽으로 흑해 연안의 초원 유목민에게 갔을 때 도덕적으로 크게 타락했다. 그들은 유목민에게서 기마술뿐 아니라 고약한 반자연적 악덕까지 받아들였다. 이는 암미아누스가 타이팔리족에 대해, 프로코피우스가 헤룰리족에 대해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일처제가 알려진 모든 가족 형태 가운데 근대적 성애가 발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형태였다고 해서, 근대적 성애가 오로지 또는 주로 일부일처제 안에서, 부부 사이의 사랑으로 발전했다는 뜻은 아니다. 남성 지배 아래의 견고한 단혼이라는 본성 전체가 그것을 가로막았다. 역사적으로 활동하는 모든 계급, 곧 모든 지배계급에게서 혼인은 대우혼 이래 그래 왔던 대로 부모가 주선하는 정략의 문제로 남았다. 그리고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성애의 형태는 열정으로서의 성애, 그것도 (적어도 지배계급의)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열정으로서, 성 충동의 가장 높은 형태로서의 성애였다. 이것이 바로 성애의 고유한 성격을 이룬다. 그런데 이 최초의 형태, 곧 중세의 기사도적 사랑은 결코 부부의 사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고전적 모습인 프로방스인의 기사도적 사랑은 돛을 활짝 펴고 간통을 향해 나아가며, 그 시인들은 간통을 찬미한다. 프로방스 연애시의 꽃은 알바(Albas), 독일어로 하면 새벽 노래다. 이 노래들은 기사가 그의 연인 — 남의 아내 — 과 침대에 누워 있고 밖에는 파수꾼이 서 있다가 첫 새벽빛(alba)이 떠오르자마자 기사가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그를 부르는 모습을 불타는 빛깔로 그린다. 그리고 이별 장면이 절정을 이룬다. 북프랑스인과 착실한 독일인도 이 시 양식을 그에 걸맞은 기사도적 사랑의 방식과 함께 받아들였다. 우리의 옛 시인 볼프람 폰 에셴바흐도 같은 야릇한 소재로 아름다운 새벽 노래 세 편을 남겼는데, 나는 그의 긴 영웅 서사시 세 편보다 이 노래들이 더 좋다.

오늘날의 부르주아적 혼인은 두 가지다. 가톨릭 나라에서는 여전히 부모가 젊은 부르주아 아들에게 걸맞은 아내를 마련해 준다. 그 결과는 물론 일부일처제에 담긴 모순이 가장 완전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남편 쪽에서는 헤테리즘이 무성하고 아내 쪽에서는 간통이 무성하다. 가톨릭 교회가 이혼을 폐지한 것도 아마 간통에는 죽음과 마찬가지로 듣는 약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나라에서는 부르주아 아들이 자기 계급 안에서 다소간 자유롭게 아내를 고르도록 허락받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사랑이 혼인의 바탕이 될 수 있고, 체면상 언제나 그렇다고 전제된다. 이는 프로테스탄트의 위선에 걸맞다. 여기서는 남편의 헤테리즘이 더 느릿하게 행해지고, 아내의 간통도 덜 일반적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혼인에서든 사람들은 혼인 전의 모습 그대로 남고, 프로테스탄트 나라의 부르주아들은 대개 속물이다. 그래서 이 프로테스탄트 일부일처제는 가장 잘된 경우들의 평균으로 보아도 기껏해야 납덩이 같은 권태의 부부 공동체에 이를 뿐이며, 사람들은 이를 가정의 행복이라고 부른다. 이 두 결혼 방식을 가장 잘 비추는 거울은 소설이다. 가톨릭 방식에는 프랑스 소설이, 프로테스탄트 방식에는 독일 소설이 그렇다. 두 소설 모두에서 “그는 그것을 얻는다”. 독일 소설에서는 젊은 남자가 아가씨를, 프랑스 소설에서는 남편이 오쟁이 진 남편의 뿔을 얻는다. 둘 중 누가 더 손해인지는 늘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프랑스 부르주아는 독일 소설의 권태에, 독일 속물이 프랑스 소설의 “부도덕”에 느끼는 것과 똑같은 전율을 느낀다. 하기야 요즘 “베를린이 세계도시가 된” 뒤로는 독일 소설도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헤테리즘과 간통을 조금은 덜 수줍게 다루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혼인은 당사자들의 계급 처지에 따라 정해지며, 그런 한에서 언제나 정략결혼이다. 이 정략결혼은 두 경우 모두 꽤 자주 가장 노골적인 매춘으로 뒤바뀐다. 때로는 양쪽 모두의 매춘이지만, 훨씬 흔하게는 아내의 매춘이다. 아내가 보통의 창부와 다른 점은 자기 몸을 임금노동자처럼 한 건씩 삯을 받고 세놓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에 노예로 팔아넘긴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모든 정략결혼에는 푸리에의 말이 들어맞는다.

“문법에서 부정 둘이 하나의 긍정이 되듯이, 결혼 도덕에서는 매춘 둘이 하나의 미덕으로 통한다.”

성애가 여성과의 관계에서 실제 규칙이 되는 것은 피억압 계급, 곧 오늘날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에서뿐이며, 오직 거기서만 그럴 수 있다. 그 관계가 공식적으로 인가받은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고전적 일부일처제의 모든 토대도 없어졌다. 여기에는 재산이 전혀 없다. 바로 그 재산을 지키고 물려주려고 일부일처제와 남성 지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남성 지배를 내세울 동기도 전혀 없다. 더 나아가 그 수단도 없다. 이 지배를 보호하는 민법은 유산자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와 맺는 거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민법은 돈이 들고, 그래서 가난 때문에 노동자가 아내를 대하는 처지에는 효력이 없다. 거기서는 전혀 다른 인격적·사회적 관계가 결정한다. 더욱이 대공업이 여성을 집에서 노동시장과 공장으로 옮겨 놓고 꽤 자주 가족의 부양자로 만든 뒤로는, 프롤레타리아의 집에서 남성 지배의 마지막 잔재도 발 디딜 땅을 모두 잃었다. 일부일처제가 도입된 이래 퍼진 여성에 대한 난폭함이 아직 얼마쯤 남아 있다면 모를까. 그래서 프롤레타리아의 가족은 두 사람 모두의 더없이 열정적인 사랑과 더없이 굳은 정절이 있더라도, 또 교회와 세속의 축복을 어떻게 받았든, 더는 엄밀한 뜻의 일부일처제 가족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부일처제의 영원한 동반자인 헤테리즘과 간통도 여기서는 거의 사라질 만큼 작은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아내는 혼인을 해소할 권리를 사실상 되찾았고, 서로 맞지 않으면 차라리 갈라선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의 혼인은 그 말의 어원적 의미에서는 일부일처제이지만, 역사적 의미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우리 법률가들은 입법의 진보가 여성에게서 불평할 이유를 점점 더 없애 준다고 여긴다. 근대 문명국의 법체계는 다음 두 가지를 점점 더 인정한다. 첫째, 혼인이 유효하려면 양쪽 당사자가 자유의사로 맺은 계약이어야 한다. 둘째, 혼인 기간에도 두 당사자는 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서로 마주해야 한다. 이 두 요구가 철저히 실현된다면 여성은 요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은 셈이 된다는 것이다.

이 참으로 법률가다운 논증은 급진적 공화주의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물리치고 잠자코 있으라고 할 때 쓰는 논증과 똑같다. 노동계약은 양쪽 당사자가 자유의사로 맺은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법이 두 당사자를 종이 위에서 평등하게 놓기만 하면 노동계약은 자유의사로 맺은 것으로 간주된다. 계급 처지의 차이가 한쪽에 주는 힘, 그것이 다른 쪽에 가하는 압박 — 두 당사자의 실제 경제적 처지 — 은 법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노동계약이 지속되는 동안 두 당사자는 어느 한쪽이 명시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한 다시 평등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 경제적 사정 때문에 노동자가 평등한 권리의 마지막 겉모양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해도, 그것 또한 법의 책임이 아니다.

혼인에 관해서는 법은, 가장 진보적인 법조차, 당사자들이 자유의사를 형식적으로 기록에 남기기만 하면 완전히 만족한다. 실제 삶이 펼쳐지는 법률의 무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 자유의사가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해서는 법도 법률가도 신경 쓸 수 없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가장 간단한 법 비교만으로도 이 자유의사가 어떤 것인지 법률가에게 드러날 것이다. 자녀에게 부모 재산의 유류분이 법으로 보장되어 자녀를 상속에서 배제할 수 없는 나라들 — 독일, 프랑스법 나라들 등 — 에서는 자녀가 혼인할 때 부모의 동의에 묶인다. 부모의 동의가 혼인의 법적 요건이 아닌 영국법 나라들에서는 부모가 자기 재산에 대해 완전한 유언의 자유를 지니며, 마음대로 자녀를 상속에서 배제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아니 바로 그 때문에, 물려받을 것이 있는 계급에서 혼인의 자유가 영국과 아메리카에서 실제로 프랑스나 독일보다 털끝만큼도 더 크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혼인에서 남성과 여성의 법적 평등도 사정이 더 낫지 않다. 앞선 사회 상태에서 우리에게 물려 내려온 두 사람의 법적 불평등은 여성이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다. 여러 부부와 그 자녀를 아우르던 옛 공산주의적 살림에서, 여성에게 맡겨진 살림 관리는 남성이 식량을 마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사회적으로 필요한 산업이었다. 가부장제 가족과 함께, 그리고 일부일처제 개별 가족과 함께 더욱더 이것이 달라졌다. 살림 관리는 공적 성격을 잃었다. 그것은 더는 사회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사적 봉사가 되었다. 아내는 으뜸 하녀가 되었고,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데서 밀려났다. 우리 시대의 대공업이 비로소 여성에게 — 그것도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만 — 사회적 생산으로 가는 길을 다시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이렇다. 여성이 가족의 사적 봉사에서 자기 의무를 다하면 공적 생산에서 배제된 채 아무것도 벌 수 없다. 그리고 공적 산업에 참여해 스스로 벌고자 하면 가족의 의무를 다할 수 없다. 공장에서처럼 모든 직업 분야에서, 의료와 변호사 일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처지는 마찬가지다. 근대의 개별 가족은 여성의 드러난 또는 감추어진 가내 노예제 위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근대 사회는 순전히 개별 가족들을 분자로 삼아 이루어진 덩어리다. 오늘날 남성은 대다수의 경우, 적어도 유산계급에서는 가족의 벌이꾼이자 부양자여야 한다. 그것이 남성에게 어떤 특별한 법적 특권도 필요 없는 지배자의 지위를 준다. 가족 안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이고, 아내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한다. 그런데 산업 세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짓누르는 경제적 억압의 고유한 성격은 자본가계급의 법적 특권이 모두 없어지고 두 계급의 완전한 법적 평등이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온전히 날카롭게 드러난다. 민주공화국은 두 계급의 대립을 없애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공화국이 비로소 그 대립이 끝까지 싸워질 바탕을 마련한다. 마찬가지로 근대 가족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고유한 성격도, 두 사람의 실질적인 사회적 평등을 이룰 필요와 그 방식도, 두 사람이 법적으로 완전히 평등해질 때에야 비로소 환한 대낮의 빛 아래 드러날 것이다. 그때 밝혀질 것이다. 여성 해방의 첫째 전제 조건은 여성 전체를 공적 산업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며, 이것은 다시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라는 성질을 없앨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혼인의 세 가지 주요 형태가 있으며, 이것들은 대체로 인류 발전의 세 주요 단계에 상응한다. 야만에는 군혼이, 미개에는 대우혼이, 문명에는 간통과 매춘으로 보완된 일부일처제가 대응한다. 대우혼과 일부일처제 사이에는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 남성이 여자 노예를 거느리는 일과 일부다처제가 끼어든다.

우리의 서술 전체가 증명했듯이, 이 순서에서 드러나는 진보는 여성에게서는 군혼의 성적 자유가 점점 더 박탈되지만 남성에게서는 그렇지 않다는 특징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군혼은 남성에게는 오늘날까지 사실상 계속 존재한다. 여성에게는 범죄이고 무거운 법적·사회적 결과를 불러오는 일이, 남성에게는 명예로운 일로, 아니면 기껏해야 즐겁게 짊어지는 가벼운 도덕적 흠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예로부터 내려온 헤테리즘이 우리 시대에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 의해 변화하고 거기에 맞추어질수록, 그것이 노골적인 매춘으로 바뀔수록, 그것은 더욱 사람을 타락시킨다. 더구나 그것은 여성보다 남성을 훨씬 더 타락시킨다. 매춘은 여성 가운데서는 거기에 빠진 불행한 이들만을 타락시키며, 그들조차 흔히 믿는 정도에는 훨씬 못 미친다. 반면에 매춘은 남성 세계 전체의 품성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특히 긴 약혼 기간은 열에 아홉은 혼인 중 부정을 위한 그야말로 예비 학교가 된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사회적 변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변혁에서는 지금까지의 일부일처제의 경제적 토대가 그 보완물인 매춘의 경제적 토대와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사라질 것이다. 일부일처제는 큰 부가 한 사람의 손에 — 그것도 한 남성의 손에 — 집중되고, 이 부를 그 남성의 자녀에게, 다른 누구의 자녀도 아닌 그의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필요에서 생겨났다. 그러려면 여성의 일부일처제가 필요했지 남성의 일부일처제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성의 이 일부일처제는 남성의 드러난 또는 감추어진 일부다처제를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가오는 사회적 변혁은 지속적이고 상속할 수 있는 부의 적어도 압도적으로 큰 부분 — 생산수단 — 을 사회적 소유로 바꿈으로써, 상속에 대한 이 모든 걱정을 최소한으로 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일처제가 경제적 원인에서 생겨났으니, 그 원인이 사라지면 일부일처제도 사라질 것인가?

이렇게 대답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부일처제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그때 비로소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생산수단이 사회적 소유로 바뀌면 임금노동, 곧 프롤레타리아트도 사라지고, 따라서 일정한 — 통계로 계산할 수 있는 — 수의 여성이 돈을 받고 몸을 내맡겨야 할 필요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매춘은 사라지고, 일부일처제는 몰락하는 대신 마침내 현실이 된다 — 남성에게도.

그러니 어쨌든 남성의 처지는 크게 바뀐다. 그러나 여성, 모든 여성의 처지도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생산수단이 공동 소유로 넘어가면 개별 가족은 사회의 경제적 단위이기를 그친다. 사적 살림은 사회적 산업으로 바뀐다. 자녀의 돌봄과 교육은 공적인 일이 된다. 사회는 혼인으로 낳았든 아니든 모든 자녀를 똑같이 돌본다. 그러면 “뒷일”에 대한 걱정이 없어진다. 이 걱정은 오늘날 아가씨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거리낌 없이 몸을 맡기지 못하게 막는 가장 본질적인 사회적 — 도덕적이자 경제적인 — 계기를 이룬다. 이것이 더 거리낌 없는 성교가 차츰 생겨나고, 그와 함께 처녀의 명예와 여성의 수치에 관한 여론이 더 느슨해지는 원인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끝으로, 우리는 근대 세계에서 일부일처제와 매춘이 대립물이기는 하지만 떼어 놓을 수 없는 대립물, 같은 사회 상태의 양극이라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매춘이 일부일처제를 함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고 사라질 수 있는가?

여기서 새로운 계기가 작용하기 시작한다. 일부일처제가 형성될 무렵에는 기껏해야 싹으로만 있던 계기, 곧 개인적 성애다.

중세 이전에는 개인적 성애를 말할 수 없다. 개인의 아름다움, 친밀한 교제, 같은 성향 등이 서로 다른 성의 사람들 사이에서 성교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그리고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누구와 이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는지가 전혀 아무래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의 성애까지는 아직 끝없이 멀다. 고대 전체에 걸쳐 혼인은 부모가 당사자를 위해 맺어 주며, 당사자들은 거기에 순순히 따른다. 고대가 아는 얼마 안 되는 부부간 사랑은 주관적 애정이 아니라 객관적 의무이며, 혼인의 근거가 아니라 혼인의 상관물이다. 근대적 의미의 연애 관계는 고대에는 공식 사회 바깥에서만 나타난다. 테오크리토스와 모스코스가 그 사랑의 기쁨과 괴로움을 노래하는 목동들도, 롱고스의 다프니스와 클로에도 모두 노예들이다. 그들은 자유 시민의 생활 영역인 국가에 아무런 몫이 없다. 노예들 말고는 연애 사건을 몰락해 가는 고대 세계의 해체 산물로서만, 그리고 역시 공식 사회 바깥에 서 있는 여성들, 곧 헤타이라, 다시 말해 외국인이나 해방 노예 여성과의 관계에서만 볼 수 있다. 아테네에서는 몰락 전야부터, 로마에서는 제정 시대에 그렇다. 자유 시민 남녀 사이에 정말로 연애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오직 간통으로서였다. 그리고 고대의 고전적 연애 시인인 늙은 아나크레온에게는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성애가 아무래도 좋았다. 얼마나 아무래도 좋았던지 사랑하는 상대의 성별조차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의 성애는 고대인의 단순한 성적 욕망, 곧 에로스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첫째, 우리의 성애는 사랑받는 상대에게 그에 응하는 사랑을 전제한다. 이 점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다. 반면에 고대의 에로스에서는 여성의 뜻을 결코 늘 묻지 않았다. 둘째, 성애는 두 당사자에게 서로를 갖지 못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큰 불행, 아니 가장 큰 불행으로 보일 만큼의 강도와 지속성을 지닌다. 서로를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은 목숨까지 거는 큰 도박을 한다. 이런 일은 고대에는 기껏해야 간통에서나 있었다. 그리고 끝으로, 성적 교제를 판단하는 새로운 도덕적 척도가 생긴다. 사람들은 그것이 혼인 안의 것인지 밖의 것인지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과 그에 응하는 사랑에서 생겨났는지도 묻는다. 물론 이 새 척도도 봉건적 또는 부르주아적 실천에서는 다른 모든 도덕적 척도보다 나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더 나쁜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다. 이 척도도 다른 척도들과 똑같이 인정받는다 — 이론에서, 종이 위에서. 그리고 당분간은 그 이상을 요구할 수 없다.

고대가 성애를 향한 시도를 멈춘 바로 그 자리, 곧 간통에서 중세가 다시 시작한다. 우리는 새벽 노래를 만들어 낸 기사도적 사랑을 이미 묘사했다. 혼인을 깨뜨리려는 이 사랑에서 혼인을 세워야 할 사랑까지는 아직 먼 길이 남아 있으며, 기사 계급은 그 길을 끝내 다 걸어가지 못한다. 경박한 로망스 민족에게서 덕성스러운 독일인에게로 넘어가 보아도 마찬가지다.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크림힐트는 남몰래 지크프리트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크프리트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 못지않다. 그런데도 군터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기사에게 그녀를 주기로 맹세했다고 알리자, 그녀는 그저 이렇게 대답한다.

“제게 청하실 필요 없습니다. 분부하시는 대로 저는 언제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군께서 제게 남편으로 주시는 분과 기꺼이 약혼하겠습니다.”

그녀는 여기서 자기 사랑이 고려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군터는 브륀힐트에게, 에첼은 크림힐트에게 한 번도 본 적 없이 구혼한다. 『구트룬』에서도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의 지게반트가 노르웨이의 우테에게, 헤겔링엔의 헤텔이 아일랜드의 힐데에게, 끝으로 모를란트의 지크프리트, 오르마니엔의 하르트무트, 제란트의 헤르비히가 구트룬에게 구혼한다. 그리고 여기서 처음으로 구트룬이 자기 뜻으로 마지막 사람을 택하는 일이 일어난다. 대개 젊은 제후의 신부는 그 부모가 살아 있으면 부모가 고르고, 그렇지 않으면 제후 자신이 큰 봉신들의 조언을 받아 고른다. 큰 봉신들은 어떤 경우에든 이 일에 무게 있는 발언권을 지닌다. 달리 될 수도 없다. 기사나 남작에게도, 영주 자신에게도 혼인은 정치적 행위이며, 새로운 동맹으로 세력을 키울 기회다. 결정해야 하는 것은 가문의 이해관계이지 개인의 마음이 아니다. 그러니 사랑이 어떻게 혼인에 대해 마지막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중세 도시의 길드 시민도 다르지 않았다. 바로 그를 보호하는 특권들, 단서가 주렁주렁 달린 길드 규약들, 그를 법적으로 여기서는 다른 길드와, 저기서는 같은 길드의 동료와, 또 거기서는 자기 직인과 도제와 갈라놓는 인위적인 경계선들이, 그가 알맞은 배우자를 찾을 수 있는 범위를 이미 충분히 좁혀 놓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누가 가장 알맞은지는 이 복잡한 체계 아래서 결코 그의 개인적 마음이 아니라 가족의 이해관계가 결정했다.

그래서 압도적 다수의 경우 혼인은 중세 말까지 처음부터 그래 왔던 대로 당사자들이 결정하지 않는 일로 남았다. 처음에는 사람이 이미 혼인한 채로 세상에 태어났다 — 다른 성의 한 집단 전체와 혼인한 채로. 군혼의 나중 형태들에서도 아마 비슷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집단이 끊임없이 좁아져 갔을 뿐이다. 대우혼에서는 어머니들이 자녀의 혼인을 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도 새로운 친족 유대에 대한 고려가 결정하는데, 이 유대는 젊은 부부에게 씨족과 부족 안에서 더 강한 지위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유재산이 공동 소유를 압도하고 상속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부권과 일부일처제가 지배하게 되자, 혼인은 더욱더 경제적 고려에 좌우되었다. 매매혼의 형식은 사라지지만, 그 실질은 점점 더 철저하게 관철된다. 그래서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값이 매겨진다 — 그의 인격적 자질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의 재산에 따라서. 당사자들의 서로에 대한 애정이 다른 무엇보다 앞서는 혼인의 근거여야 한다는 것은 지배계급의 실천에서는 처음부터 들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일은 기껏해야 낭만적 이야기에서나, 아니면 — 셈에 들지도 않는 피억압 계급에게서나 있었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리상의 발견 시대 이래 세계무역과 매뉴팩처로 세계 지배에 나서려 했을 때 마주한 상태였다. 이런 혼인 방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에 아주 잘 맞았으리라고 생각할 법하며, 실제로 그랬다. 그런데도 — 세계사의 아이러니는 헤아릴 수 없다 — 이 혼인 방식에 결정적인 돌파구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꿈으로써 전해 내려온 모든 오랜 관계를 해체했고, 물려받은 관습과 역사적 권리 대신에 매매, 곧 “자유로운” 계약을 들어앉혔다. 그래서 영국의 법률가 H. S. 메인은 우리의 모든 진보가 이전 시대에 비해 신분에서 계약으로(from Status to contract), 곧 대대로 물려받은 상태에서 자유의사로 계약을 맺은 상태로 나아간 데 있다고 말하면서 엄청난 발견을 했다고 믿었다. 물론 이것은 옳은 한에서는 이미 『공산당 선언』에 적혀 있던 것이다.

그런데 계약을 맺으려면 자기 인신, 행위, 소유물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고 서로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마주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주요 과업 가운데 하나였다. 처음에는 이것이 반쯤만 의식된, 게다가 종교의 옷을 입은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이래 다음 명제는 확고해졌다. 인간은 자기 행위를 완전히 자유로운 의지로 했을 때에만 그 행위에 온전히 책임을 지며, 부도덕한 행위를 강요하는 모든 강제에 저항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라는 명제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까지의 혼인 관행과 어떻게 맞아떨어지겠는가? 부르주아적 견해에 따르면 혼인은 계약, 법률 행위였다. 그것도 모든 법률 행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몸과 정신을 평생에 걸쳐 처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혼인은 형식상 자유의사로 맺어졌다. 당사자들의 승낙 없이는 성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승낙이 어떻게 나오는지, 실제로 혼인을 맺는 이가 누구인지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았다. 다른 모든 계약에 실제의 결정 자유가 요구된다면, 왜 이 계약에는 요구되지 않는가? 짝지어질 두 젊은이에게도 자기 자신, 자기 몸과 그 기관을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성애는 기사도를 통해 유행하게 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기사도의 간통적 사랑에 맞서 부부의 사랑이야말로 성애의 올바른 부르주아적 형태가 아닌가?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의무라면,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 혼인하고 다른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는 것도 똑같이 의무가 아닌가? 사랑하는 이들의 이 권리가 부모, 친척, 그 밖의 전통적인 혼인 중매인과 뚜쟁이의 권리보다 더 높지 않은가? 자유로운 개인적 검토의 권리가 거리낌 없이 교회와 종교에까지 밀고 들어갔는데, 그것이 어떻게 젊은 세대의 몸과 영혼, 재산, 행복과 불행을 처분하겠다는 나이 든 세대의 견딜 수 없는 요구 앞에서 멈출 수 있었겠는가?

이런 물음은 사회의 모든 옛 유대를 느슨하게 하고 물려받은 모든 관념을 흔들어 놓은 시대에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는 단번에 거의 열 배로 커졌다. 서유럽인의 눈앞에는 이제 반구의 4분의 1 대신 지구 전체가 놓였고, 그들은 나머지 일곱 개의 4분의 1을 서둘러 차지하려 했다. 그리고 옛날의 좁은 고향의 울타리와 함께, 중세의 정해진 사고방식이라는 천 년 묵은 울타리도 무너졌다. 인간의 바깥 눈에도 안의 눈에도 끝없이 넓은 지평이 열렸다. 인도의 부, 멕시코와 포토시의 금광과 은광에 이끌린 젊은이에게 점잖은 이들의 호의가, 대대로 물려받은 존경할 만한 길드 특권이 무슨 가치가 있었겠는가.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편력 기사 시대였다. 이 시대에도 그 나름의 낭만과 사랑의 열광이 있었지만, 부르주아적 토대 위에서, 최종적으로 부르주아적인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떠오르는 부르주아지는, 특히 기존 질서가 가장 크게 흔들린 프로테스탄트 나라들에서, 혼인에도 계약 체결의 자유를 점점 더 인정했고, 앞에서 묘사한 방식으로 실행했다. 혼인은 계급 혼인으로 남았지만, 계급 안에서는 당사자들에게 어느 정도 선택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그리고 종이 위에서는, 도덕 이론에서도 시적 묘사에서도, 서로 간의 성애와 부부의 참으로 자유로운 합의에 바탕을 두지 않은 혼인은 모두 부도덕하다는 것만큼 흔들림 없이 확고한 것은 없었다. 요컨대 연애결혼은 인권으로 선포되었다. 그것도 남성의 권리(droit de l'homme)로서만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여성의 권리(droit de la femme)로서도.

그러나 이 인권은 한 가지 점에서 이른바 다른 모든 인권과 달랐다. 다른 인권들은 실제로는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에게 국한되었고 피억압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깎여 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역사의 아이러니가 확인된다. 지배계급은 잘 알려진 경제적 영향에 계속 지배받으며, 그래서 참으로 자유롭게 맺은 혼인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보여 준다. 반면에 피지배 계급에서는, 앞에서 보았듯이, 그런 혼인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혼인의 완전한 자유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것이 만들어 낸 소유 관계가 없어져, 지금도 배우자 선택에 그토록 강한 영향을 미치는 부수적인 경제적 고려가 모두 제거된 뒤에야 비로소 널리 실현될 수 있다. 그때는 서로에 대한 애정 말고는 다른 어떤 동기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성애는 그 본성상 배타적이므로 — 오늘날 이 배타성은 여성에게서만 일관되게 실현되고 있지만 — 성애에 바탕을 둔 혼인은 그 본성상 단혼이다. 우리는 바흐오펜이 군혼에서 단혼으로의 진보를 주로 여성의 업적으로 보았을 때 그가 얼마나 옳았는지 보았다.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로의 진행만이 남성의 몫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본질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나빠지고 남성의 부정이 쉬워진 데 있었다. 이제 여성이 남성의 이 습관적인 부정을 감수하게 만들었던 경제적 고려 — 자기 생계에 대한 걱정, 그보다 더한 자녀의 장래에 대한 걱정 — 마저 없어진다면, 그로써 이루어진 여성의 평등은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으로 보아, 여성이 일처다부가 되는 쪽보다 남성이 참으로 일부일처가 되는 쪽으로 한없이 더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일처제에서 아주 확실히 떨어져 나갈 것은 일부일처제가 소유 관계에서 생겨난 탓에 찍힌 모든 특징이다. 그것은 첫째로 남성의 우위이고, 둘째로 해소 불가능성이다. 혼인에서 남성의 우위는 그의 경제적 우위의 단순한 결과이며, 경제적 우위와 함께 저절로 무너진다. 혼인의 해소 불가능성은 한편으로는 일부일처제가 생겨난 경제적 처지의 결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경제적 처지와 일부일처제의 연관이 아직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채 종교적으로 과장되던 시대의 전통이다. 그것은 오늘날 이미 수없이 깨져 있다. 사랑에 바탕을 둔 혼인만이 도덕적이라면, 사랑이 계속되는 혼인만이 도덕적이다. 그런데 개인적 성애가 북받치는 기간은 사람에 따라, 특히 남성에게서 무척 다르다. 그리고 애정이 확실히 끝나거나 새로운 열정적 사랑에 밀려나면, 이혼은 두 당사자에게도 사회에도 좋은 일이 된다. 다만 사람들이 이혼 소송이라는 쓸데없는 진창을 헤치고 나아가지 않아도 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소 뒤에 성 관계가 어떻게 정돈될지에 관해 오늘날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주로 소극적인 것이며, 대개 없어질 것에 국한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로 더해질 것인가? 그것은 새로운 세대가 자라났을 때 결정될 것이다. 평생 돈이나 다른 사회적 권력 수단으로 여성의 몸을 사야 할 처지에 놓여 본 적이 없는 남성들, 그리고 참된 사랑 말고 다른 어떤 고려 때문에 남성에게 몸을 맡기거나, 경제적 결과가 두려워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맡기기를 거부해야 할 처지에 놓여 본 적이 없는 여성들의 세대다.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한다고 믿는 것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실천을 만들고, 거기에 맞추어 각 개인의 실천에 관한 자기 여론을 스스로 만들 것이다 — 이상 끝.

그러나 우리가 꽤 멀리 벗어나 온 모건에게로 돌아가자. 문명 시기 동안 발전한 사회 제도들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그의 책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 일부일처제가 겪은 운명은 아주 짧게만 그를 붙잡는다. 그도 일부일처제 가족이 더 발전하는 데서 하나의 진보, 곧 두 성의 완전한 평등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지만, 그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족이 네 가지 형태를 차례로 거쳐 왔으며 지금은 다섯 번째 형태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 형태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이렇다. 가족은 사회가 진보하는 대로 진보해야 하며, 사회가 변하는 만큼 변해야 한다. 지금까지와 똑같이. 가족은 사회 체제의 산물이며 그 문화 상태를 반영할 것이다. 일부일처제 가족은 문명의 시작 이래 개선되어 왔고, 근대에 들어서는 아주 눈에 띄게 개선되었으므로, 적어도 두 성의 평등이 이루어질 때까지 더 완성될 수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먼 미래에 일부일처제 가족이 사회의 요구를 채울 수 없게 된다면, 그 뒤를 이을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일지는 미리 말할 수 없다.”

주석

  1. 바흐오펜이 자신이 발견한, 아니 오히려 짐작해 낸 것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지는 그가 이 원시 상태를 헤테리즘이라고 부른 데서 드러난다. 그리스인이 이 말을 들여왔을 때, 헤테리즘은 결혼하지 않았거나 단혼 속에 사는 남자가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 성교하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언제나 특정한 혼인 형태를 전제하고 이 성교는 그 바깥에서 이루어지며, 적어도 가능성으로서는 이미 매춘을 포함한다. 이 말은 다른 뜻으로 쓰인 적이 없으며, 나도 모건과 함께 이 뜻으로 쓴다. 바흐오펜의 매우 중요한 발견들은, 역사적으로 생겨난 남녀 관계가 사람들의 실제 생활 조건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종교적 관념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망상 때문에 어디서나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화되어 있다. ↩
  2. 마르크스는 1882년 봄의 한 편지에서 바그너의 니벨룽겐 대본을 지배하는 원시 시대의 완전한 왜곡에 대해 가장 강한 말로 의견을 밝힌다. “오라비가 누이를 신부로 껴안았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자기들의 연애 사건을 아주 현대적인 방식으로 약간의 근친상간으로 더 짜릿하게 만드는 바그너의 이 “음욕의 신들”에게 마르크스는 이렇게 답한다. “원시 시대에는 누이가 아내였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이었다.” — (제4판에 붙여.) 바그너를 숭배하는 한 프랑스인 친구는 이 주석에 동의하지 않고, 바그너가 기초로 삼은 『옛 에다』의 「에기르의 술잔치(Ögisdrecka)」에서 이미 로키가 프레이야를 이렇게 나무란다고 지적한다. “신들 앞에서 너는 네 오라비를 껴안았다.” 그러니 형제자매 혼인은 이미 그때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에기르의 술잔치」는 옛 신화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무너진 시대의 표현이다. 그것은 순전히 루키아노스풍으로 신들을 조롱하는 노래다. 거기서 메피스토 노릇을 하는 로키가 프레이야를 그렇게 나무란다면, 그것은 오히려 바그너에게 불리한 증거다. 또 로키는 몇 행 뒤에서 뇨르드에게 “네 누이와 너는 그런 아들을 낳았다”(vidh systur thinni gaztu slikan mög)고 말한다. 물론 뇨르드는 아스 신족이 아니라 바나 신족이며, 「잉글링가 사가」에서 바나란드에서는 형제자매 혼인이 관례이지만 아스 신족에게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나 신족이 아스 신족보다 오래된 신들이라는 표시일 것이다. 어쨌든 뇨르드는 아스 신족 사이에서 그들과 대등하게 살며, 그러므로 「에기르의 술잔치」는 오히려 노르웨이 신화가 생겨날 무렵 형제자매 혼인이 적어도 신들 사이에서는 아직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는 증거다. 바그너를 변호하고 싶다면 『에다』 대신 괴테를 끌어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괴테는 「신과 바야데레」라는 발라드에서 여성의 종교적 몸 내맡기기과 관련해 비슷한 잘못을 저질러, 그것을 현대의 매춘에 지나치게 가깝게 그렸다. ↩
  3. 바흐오펜이 찾아냈다고 믿는 무차별적 성교, 이른바 “늪지 생식”의 흔적은, 이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듯이, 군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흐오펜이 이 푸날루아 혼인을 ‘무법적’이라고 본다면, 그 시기의 사람은 지금의 혼인 대부분, 곧 아버지 쪽이나 어머니 쪽의 가깝고 먼 사촌 사이의 혼인을 근친상간, 곧 혈연인 형제자매 사이의 혼인으로 볼 것이다.”(마르크스.) ↩

III · 이로쿼이족의 씨족

이제 우리는 모건의 또 다른 발견으로 넘어간다. 이 발견은 친족 체계에서 원초적 가족 형태를 재구성한 일과 적어도 같은 만큼 중요하다. 모건은 다음을 입증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한 부족 안에서 동물 이름으로 불리는 혈족 집단들은 그리스인의 게네아(genea), 로마인의 겐테스(gentes)와 본질적으로 같다. 아메리카의 형태가 본래의 것이고 그리스·로마의 형태는 나중의 파생된 것이다. 원시시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사회 조직 전체는 씨족, 프라트리아, 부족이라는 구성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직과 꼭 들어맞는 짝을 이룬다. 씨족은 모든 미개인에게 문명에 들어설 때까지, 아니 그 뒤에도 공통된 제도다(지금까지 우리의 사료가 미치는 한에서). 이 입증은 단번에 가장 오래된 그리스사와 로마사의 가장 어려운 부분들을 밝혀 주었고, 동시에 원시시대의 — 국가가 도입되기 전의 — 사회 제도의 기본 특징에 대해서도 생각지도 못한 해명을 주었다. 일단 알고 나면 아무리 단순해 보이더라도, 모건은 이것을 최근에야 발견했다. 1871년에 나온 그의 앞선 저작에서 그는 아직 이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 뒤 이 비밀이 드러나자, 평소에는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영국의 원시사가들이 한동안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건이 이 혈족 집단을 가리키는 데 두루 쓰는 라틴어 낱말 겐스(gens)는 같은 뜻의 그리스어 게노스(genos)와 마찬가지로 「낳다」를 뜻하는 아리아 공통의 어근 간(gan)에서 왔다(독일어에서는 규칙상 아리아어의 g 자리에 k가 와야 하므로 칸(kan)이다). 겐스, 게노스, 산스크리트어 자나스(dschanas), 고트어(위의 규칙에 따라) 쿠니(kuni), 고대 노르드어와 앵글로색슨어 킨(kyn), 영어 킨(kin), 중세 고지 독일어 퀸네(künne)는 모두 똑같이 혈족, 혈통을 뜻한다. 그런데 라틴어의 겐스와 그리스어의 게노스는 특히 공통의 혈통(여기서는 공통의 시조로부터 나온 혈통)을 자랑하고, 일정한 사회적·종교적 제도로 묶여 하나의 특별한 공동체를 이루는 혈족 집단에 쓰인다. 그럼에도 그 기원과 본성은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역사가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앞에서 푸날루아 가족을 다룰 때 우리는 본래 형태의 씨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이미 보았다. 씨족은 푸날루아혼을 통해, 그리고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지배하는 관념에 따라, 특정한 한 여자 시조, 곧 씨족의 창시자의 공인된 자손을 이루는 모든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이 가족 형태에서는 부성이 불확실하므로 여계만 인정된다. 형제들은 자기 자매와 혼인할 수 없고 다른 혈통의 여자와만 혼인할 수 있으므로, 이 다른 혈통의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들은 모권에 따라 씨족 밖에 놓인다. 그러므로 혈족 집단 안에는 각 세대의 딸들의 자손만 남고, 아들들의 자손은 그 어머니들의 씨족으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이 혈연 집단이 한 부족 안의 비슷한 다른 집단들과 마주하여 하나의 특별한 집단으로 자리 잡게 되면 어떻게 될까?

모건은 이 본래의 씨족의 고전적 형태로 이로쿼이족, 특히 세네카 부족의 씨족을 든다. 이 부족에는 동물 이름이 붙은 여덟 씨족이 있다. 1. 늑대, 2. 곰, 3. 거북, 4. 비버, 5. 사슴, 6. 도요새, 7. 왜가리, 8. 매. 각 씨족에는 다음과 같은 관습이 있다.

1. 씨족은 자신의 사켐(평시 추장)과 추장(전쟁 지도자)을 뽑는다. 사켐은 씨족 안에서 뽑아야 했고, 그 직위는 씨족 안에서 세습되었다. 자리가 비면 곧바로 다시 채워야 했다는 의미에서다. 전쟁 지도자는 씨족 밖에서도 뽑을 수 있었고 한동안 아예 없을 수도 있었다. 이로쿼이족에게는 모권이 지배했으므로 아들은 다른 씨족에 속했고, 따라서 앞 사켐의 아들이 사켐으로 뽑히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형제나 자매의 아들이 뽑히는 일은 있었고 흔했다. 선거에는 남자와 여자 모두가 투표했다. 그러나 선거는 나머지 일곱 씨족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그런 다음에야 뽑힌 사람이 엄숙하게 취임했다. 취임은 이로쿼이 연맹 전체의 공동 평의회가 시켰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나중에 드러날 것이다. 씨족 안에서 사켐의 권한은 아버지 같은, 순전히 도덕적인 성격이었다. 그에게는 강제 수단이 없었다. 그 밖에 그는 직무상 세네카족의 부족 평의회와 이로쿼이족 전체의 연맹 평의회의 구성원이었다. 전쟁 추장은 전쟁에 나갔을 때만 명령할 권한이 있었다.

2. 씨족은 사켐과 전쟁 추장을 마음대로 해임한다. 이것도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한다. 해임된 사람은 그 뒤 다른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전사, 사인이 된다. 덧붙이자면 부족 평의회도 사켐을 해임할 수 있었고, 씨족의 뜻을 거슬러서도 그럴 수 있었다.

3. 씨족의 어떤 성원도 씨족 안에서 혼인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씨족의 기본 규칙이며 씨족을 묶어 주는 끈이다. 이것은 매우 적극적인 혈연을 소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바로 이 혈연 덕분에 그 안에 포함된 개인들이 비로소 하나의 씨족이 된다. 이 단순한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모건은 처음으로 씨족의 본성을 밝혀냈다. 지금까지 씨족이 얼마나 이해되지 못했는지는 야만인과 미개인에 관한 예전 보고들이 증명한다. 거기서는 씨족 질서를 이루는 여러 단체가 이해되지도 구별되지도 못한 채 부족, 클랜(Clan), 툼(Thum) 등으로 마구 뒤섞였고, 때로는 그런 단체 안에서 혼인이 금지되어 있다는 말도 나온다. 이리하여 구제할 길 없는 혼란이 생겼고, 매클레넌 씨는 이 혼란 속에서 나폴레옹처럼 나타나 한마디 명령으로 질서를 세울 수 있었다. 모든 부족은 그 안에서 혼인이 금지된 외혼 부족(exogame)과 허용된 내혼 부족(endogame)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을 제대로 엉클어 놓은 다음 그는 자신의 두 가지 터무니없는 분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오래되었는지, 외혼인지 내혼인지를 두고 더없이 심오한 연구에 빠져들 수 있었다. 혈연에 기초하고, 따라서 그 성원끼리는 혼인할 수 없는 씨족이 발견되자 이 헛소리는 저절로 끝났다. — 우리가 이로쿼이족을 만나는 단계에서는 씨족 안의 혼인 금지가 어김없이 지켜진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4. 죽은 사람의 재산은 나머지 씨족원에게 돌아갔다. 재산은 씨족 안에 남아야 했다. 이로쿼이족 한 사람이 남길 수 있는 물건은 보잘것없었으므로 가장 가까운 씨족 친척들이 유산을 나누어 가졌다. 남자가 죽으면 그의 친형제·친자매와 외삼촌이, 여자가 죽으면 그녀의 자식들과 친자매가 나누었고 그녀의 형제는 받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에 남편과 아내는 서로 상속할 수 없었고 자식들도 아버지에게서 상속할 수 없었다.

5. 씨족원들은 서로 도움과 보호를, 특히 외부인에게서 받은 피해에 대한 복수를 도울 의무가 있었다. 개인은 자기 안전을 씨족의 보호에 맡겼고 그럴 수 있었다. 그를 해치는 자는 씨족 전체를 해치는 것이었다. 여기서, 씨족의 피의 유대에서, 피의 복수 의무가 생겨났고 이로쿼이족은 이것을 무조건 인정했다. 씨족 밖의 사람이 씨족원을 죽이면 죽은 사람의 씨족 전체가 피의 복수를 할 의무를 졌다. 먼저 중재를 시도했다. 살해자의 씨족이 평의회를 열어 죽은 사람의 씨족 평의회에 화해를 제안했는데, 대개 유감의 뜻을 표하고 상당한 선물을 내놓았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일은 끝났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를 입은 씨족이 복수자를 한 명 또는 여럿 지명했고, 그들은 살해자를 추적하여 죽일 의무를 졌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죽임을 당한 자의 씨족은 불평할 권리가 없었고 사건은 청산되었다.

6. 씨족에는 정해진 이름이나 이름의 계열이 있어서 부족 전체에서 그 씨족만 쓸 수 있다. 그래서 개인의 이름은 곧 그가 어느 씨족에 속하는지를 말해 준다. 씨족 이름에는 처음부터 씨족의 권리가 따라붙는다.

7. 씨족은 외부인을 양자로 받아들여 부족 전체에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이지 않은 전쟁 포로는 이렇게 한 씨족에 입양되어 세네카족의 부족원이 되었고, 그로써 씨족과 부족의 완전한 권리를 얻었다. 입양은 개별 씨족원의 신청으로 이루어졌다. 남자들은 외부인을 형제나 자매로, 여자들은 자식으로 받아들였다. 이를 확정하려면 씨족에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의식이 필요했다. 흔히 예외적으로 줄어든 개별 씨족은 다른 씨족에서, 그 씨족의 동의를 얻어 대규모로 입양함으로써 새로 강화되었다. 이로쿼이족에게서 씨족에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의식은 부족 평의회의 공개 회의에서 치러졌고, 그로써 사실상 종교 의식이 되었다.

8. 인디언 씨족에게서 특별한 종교 축제를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디언의 종교 의식은 많든 적든 씨족과 이어져 있다. 이로쿼이족의 해마다 열리는 여섯 가지 종교 축제에서 각 씨족의 사켐과 전쟁 추장은 직무상 “신앙 수호자”에 속했고 사제의 직능을 맡았다.

9. 씨족에는 공동 묘지가 있다. 백인들 사이에 갇혀 사는 뉴욕주의 이로쿼이족에게는 이것이 지금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있었다. 다른 인디언에게는 아직 남아 있다. 이를테면 이로쿼이족과 가까운 친족인 투스카로라족은 기독교도이면서도 교회 묘지에 씨족마다 정해진 줄을 두고 있어서, 어머니는 자식들과 같은 줄에 묻히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이로쿼이족에게서도 죽은 사람의 씨족 전체가 장례에 가서 무덤을 마련하고 추도사 등을 맡는다.

10. 씨족에는 평의회가 있다. 이것은 성인 씨족원 남녀 모두가 모이는 민주적 집회이며, 모두가 똑같은 투표권을 가진다. 이 평의회는 사켐과 전쟁 추장을 뽑고 해임했으며, 나머지 “신앙 수호자”도 마찬가지였다. 살해된 씨족원을 두고 속죄금(Wergeld)을 받을지 피의 복수를 할지 결정했고, 외부인을 씨족에 입양했다. 요컨대 평의회는 씨족 안의 주권적 권력이었다.

이것이 전형적인 인디언 씨족의 권한이다.

“모든 성원은 자유인이며, 서로 상대의 자유를 지켜 줄 의무가 있다. 그들은 개인적 권리에서 평등하다. 사켐도 전쟁 지도자도 어떤 우위도 내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피의 유대로 묶인 형제단을 이룬다. 자유, 평등, 박애는 한 번도 명문화된 적이 없지만 씨족의 기본 원리였다. 그리고 씨족은 다시 사회 체계 전체의 단위, 조직된 인디언 사회의 기초였다. 누구나 인디언에게서 인정하는 꺾이지 않는 독립심과 몸가짐의 개인적 위엄은 이것으로 설명된다.”

발견 당시 북아메리카 전체의 인디언은 모권에 따라 씨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다코타족 같은 몇몇 부족에서만 씨족이 쇠퇴해 있었고, 오지브와족, 오마하족 같은 다른 몇몇 부족에서는 부권에 따라 조직되어 있었다.

씨족이 대여섯 개가 넘는 매우 많은 인디언 부족에서 우리는 씨족 셋, 넷 또는 그 이상이 하나의 특별한 집단으로 묶여 있는 것을 본다. 모건은 인디언의 이름을 충실히 옮겨, 그 그리스적 짝을 따라 이것을 프라트리아(형제단)라고 부른다. 그래서 세네카족에게는 프라트리아가 둘 있다. 첫째는 씨족 1~4를, 둘째는 씨족 5~8을 포함한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프라트리아는 대개 부족이 처음에 갈라져 나온 본래의 씨족들을 나타낸다. 씨족 안에서 혼인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모든 부족은 독립적으로 존속하려면 반드시 씨족을 적어도 둘은 포함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족이 불어남에 따라 각 씨족은 다시 둘 또는 여럿으로 갈라졌고, 이것들이 이제 저마다 특별한 씨족으로 나타난다. 반면 모든 딸 씨족을 포함하는 본래의 씨족은 프라트리아로 살아남는다. 세네카족과 대부분의 다른 인디언에게서 한 프라트리아의 씨족들은 서로 형제 씨족이고, 다른 프라트리아의 씨족들은 그들의 사촌 씨족이다. 이 호칭은 앞에서 보았듯이 아메리카 친족 체계에서 매우 실재적이고 뚜렷한 의미를 가진다. 본래는 세네카족 누구도 자기 프라트리아 안에서 혼인할 수 없었지만, 이것은 오래전에 쓰이지 않게 되어 씨족으로 한정되었다. 세네카족의 전승에 따르면 곰과 사슴이 본래의 두 씨족이었고 나머지는 거기서 갈라져 나왔다. 이 새로운 제도가 일단 뿌리내리자 필요에 따라 변형되었다. 한 프라트리아의 씨족들이 사라지면, 균형을 맞추려고 때때로 다른 프라트리아의 씨족을 통째로 그쪽으로 옮겼다. 그래서 여러 부족에서 같은 이름의 씨족이 프라트리아에 저마다 다르게 묶여 있는 것을 본다.

이로쿼이족에게서 프라트리아의 기능은 일부는 사회적이고 일부는 종교적이다. 1. 프라트리아끼리 공놀이 시합을 한다. 프라트리아마다 가장 뛰어난 선수들을 내보내고, 나머지는 프라트리아별로 따로 자리 잡고 구경하며 자기 쪽의 승리를 두고 서로 내기를 건다. — 2. 부족 평의회에서는 각 프라트리아의 사켐과 전쟁 지도자들이 함께 앉고 두 집단은 서로 마주 앉는다. 연설자는 누구나 각 프라트리아의 대표들을 하나의 특별한 단체로 대하며 말한다. — 3. 부족 안에서 살인이 일어났는데 살해자와 피살자가 같은 프라트리아에 속하지 않았으면, 피해를 입은 씨족은 흔히 자기 형제 씨족들에게 호소했다. 형제 씨족들은 프라트리아 평의회를 열고, 다른 프라트리아 전체에 그쪽도 평의회를 소집하여 일을 수습하자고 요청했다. 여기서 프라트리아는 다시 본래의 씨족으로 나타나며, 그 딸인 더 약한 개별 씨족보다 성공할 가망이 더 크다. — 4. 뛰어난 사람이 죽으면 반대쪽 프라트리아가 장례와 매장 의식을 맡았고, 죽은 사람의 프라트리아는 상주로서 따라갔다. 사켐이 죽으면 반대쪽 프라트리아가 그 자리가 비었음을 이로쿼이족의 연맹 평의회에 알렸다. — 5. 사켐을 뽑을 때도 프라트리아 평의회가 관여했다. 형제 씨족들의 승인은 거의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다른 프라트리아의 씨족들은 반대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경우 이 프라트리아의 평의회가 모였고, 평의회가 반대를 고수하면 선거는 무효가 되었다. — 6. 예전에 이로쿼이족에게는 백인들이 메디신 로지(medicine-lodges)라고 부른 특별한 종교 비의가 있었다. 세네카족에게서 이것은 두 종교 결사가 치렀는데, 새 성원에게는 정식 입문 의식이 있었다. 두 프라트리아에 이 결사가 하나씩 있었다. — 7. 정복 당시 틀락스칼라의 네 구역에 살던 네 리나헤(linages, 혈족)가 거의 확실하듯이 네 프라트리아였다면, 이로써 프라트리아는 그리스인에게서처럼, 그리고 독일인의 비슷한 혈족 집단처럼 군사 단위로도 쓰였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 네 리나헤는 저마다 따로 무리를 지어, 자기 제복과 깃발을 갖추고 자기 지휘자 밑에서 싸움에 나갔다.

여러 씨족이 하나의 프라트리아를 이루듯이, 고전적 형태에서는 여러 프라트리아가 하나의 부족을 이룬다. 몹시 약해진 부족에서는 중간 고리인 프라트리아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아메리카의 인디언 부족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인가?

1. 고유한 영역과 고유한 이름. 각 부족은 실제로 정착한 곳 말고도 사냥과 고기잡이를 위한 상당한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이웃 부족의 영역까지 이어지는 넓은 중립 지대가 있었는데, 언어가 가까운 부족 사이에서는 좁고 언어가 가깝지 않은 부족 사이에서는 넓었다. 이것은 독일인의 경계림, 카이사르가 말하는 수에비족이 자기 영역 둘레에 만든 황무지, 덴마크인과 독일인 사이의 이사른홀트(îsarnholt, 덴마크어 야른베드(jarnved), 덴마크 경계(limes Danicus)), 그리고 독일인과 슬라브인 사이의 작센 숲과 브란덴부르크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브라니보르(branibor, 슬라브어로 「보호림」)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불확실한 경계로 구분된 영역은 부족의 공유지였고, 이웃 부족들도 그렇게 인정했으며, 부족 자신은 침범에 맞서 이를 지켰다. 경계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대개 인구가 크게 불어난 뒤에야 실제로 불리해졌다. — 부족 이름은 대개 일부러 고른 것이라기보다 우연히 생긴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부족이 이웃 부족들에게서 스스로 쓰는 이름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흔했다. 독일인이 역사에 나오는 첫 총칭인 게르만이라는 이름을 켈트인에게서 받은 것과 비슷하다.

2. 이 부족에만 고유한 특별한 방언. 실제로 부족과 방언은 사실상 일치한다. 분열로 새 부족과 방언이 생겨나는 일은 아메리카에서 최근까지도 진행되었고 지금도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약해진 두 부족이 하나로 합쳐진 곳에서는 예외적으로 한 부족 안에서 매우 가까운 두 방언이 쓰이기도 한다. 아메리카 부족의 평균 규모는 2000명이 안 된다. 그러나 체로키족은 약 2만 6000명으로, 미국에서 같은 방언을 쓰는 인디언으로는 가장 많다.

3. 씨족들이 뽑은 사켐과 전쟁 지도자를 엄숙하게 취임시킬 권리, 그리고

4. 그들을 다시 해임할 권리. 그들의 씨족의 뜻을 거슬러서도 해임할 수 있다. 이 사켐과 전쟁 지도자들은 부족 평의회의 구성원이므로, 그들에 대한 부족의 이런 권리는 저절로 설명된다. 여러 부족이 연맹을 이루고 모든 부족이 연맹 평의회에 대표를 보내는 곳에서는 위의 권리가 연맹 평의회로 넘어갔다.

5. 공통의 종교 관념(신화)과 제의의 보유.

“인디언은 그들 나름의 미개한 방식으로 종교적인 민족이었다.”

그들의 신화는 아직 전혀 비판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종교 관념의 화신, 곧 온갖 정령을 이미 사람의 모습으로 떠올렸다. 그러나 그들이 머물던 미개의 낮은 단계는 아직 형상으로 나타낸 것, 이른바 우상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다신교로 발전해 가는 중인 자연 숭배와 원소 숭배다. 여러 부족에게는 일정한 제의 형식, 특히 춤과 놀이를 갖춘 정기적인 축제가 있었다. 특히 춤은 모든 종교 축제의 본질적 요소였다. 부족마다 자기 축제를 따로 치렀다.

6. 공동 업무를 위한 부족 평의회. 평의회는 각 씨족의 사켐과 전쟁 지도자 전원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언제든 해임될 수 있었으므로 씨족의 진정한 대표였다. 평의회는 다른 부족원들에게 둘러싸여 공개적으로 토의했고, 부족원들은 끼어들어 말하고 자기 의견을 들려줄 권리가 있었다. 결정은 평의회가 했다. 대개 출석한 사람은 누구나 원하면 발언할 수 있었고, 여자들도 자기가 고른 연설자를 통해 의견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로쿼이족에게서는 최종 결정이 만장일치여야 했는데, 독일 마르크 공동체의 몇몇 결정에서도 그러했다. 부족 평의회가 맡은 일은 특히 다른 부족들과의 관계를 정하는 것이었다. 평의회는 사절을 맞고 보냈으며, 전쟁을 선포하고 강화를 맺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대개 지원자들이 수행했다. 원칙적으로 각 부족은 명시적인 강화 조약을 맺지 않은 다른 모든 부족과 전쟁 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 적에 대한 출정은 대개 뛰어난 개별 전사들이 조직했다. 그들이 전쟁 춤을 추면, 함께 춤춘 사람은 그로써 출정에 참가하겠다고 밝힌 것이었다. 대열은 곧바로 짜여 출발했다. 침입당한 부족 영역의 방어도 마찬가지로 대개 지원자 동원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대열이 나가고 돌아올 때는 늘 공적인 축제가 벌어졌다. 이런 출정에는 부족 평의회의 허가가 필요하지 않았고, 허가를 구하지도 내주지도 않았다. 이것은 타키투스가 묘사하는 독일인 종사단의 사적인 출정과 꼭 같다. 다만 독일인에게서는 종사단이 이미 상설적 성격을 띠어, 평화 시에도 조직되는 고정된 핵심을 이루고 전쟁이 나면 나머지 지원자들이 그 둘레에 모인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전투 대열은 수가 많은 경우가 드물었다. 인디언의 가장 중요한 원정은 먼 거리에 걸친 것이라도 대수롭지 않은 병력으로 수행되었다. 이런 종사단 여럿이 큰 작전을 위해 함께 모이면 저마다 자기 지휘자에게만 복종했고, 작전 계획의 통일은 이 지휘자들의 평의회가 그럭저럭 확보했다. 이것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가 묘사하는 4세기 상라인 지방 알라만니족의 전쟁 방식이다.

7. 몇몇 부족에서는 최고 추장을 볼 수 있지만, 그 권한은 매우 작다. 그는 사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빠른 행동이 필요한 경우 평의회가 모여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임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것은 집행 권력을 가진 관리의 약한 싹이지만, 이후의 발전에서 대개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런 관리는 오히려, 앞으로 보겠지만, 모든 경우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최고 군사 지도자에게서 발전해 나왔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대다수는 부족 단위의 결합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들은 수가 적은 부족으로 나뉘어, 넓은 경계 지대로 서로 떨어지고 끝없는 전쟁으로 약해진 채, 적은 인구로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친족 부족들 사이의 동맹은 여기저기서 그때그때의 위급한 사정 때문에 생겼다가 그 사정이 사라지면 함께 무너졌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서는 본래 친족이던 부족들이 흩어진 상태에서 다시 모여 영속적인 연맹을 이루었고, 그로써 민족 형성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미국에서 그런 연맹의 가장 발전된 형태는 이로쿼이족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미시시피강 서쪽의 거주지를 떠났는데, 그곳에서 아마 큰 다코타 어족의 한 갈래를 이루었을 것이다. 오랜 이동 끝에 그들은 지금의 뉴욕주에 정착했고, 세네카족, 카유가족, 오논다가족, 오나이다족, 모호크족의 다섯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들은 물고기와 사냥감, 원시적인 원경으로 살았고, 대개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살았다. 인구는 2만 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다섯 부족 모두에 공통된 씨족이 여럿 있었고, 같은 언어의 매우 가까운 방언들을 썼으며, 이제 다섯 부족에게 나뉜 하나로 이어진 영역을 차지했다. 이 영역은 새로 정복한 것이었으므로, 쫓겨난 자들에 맞서 이 부족들이 늘 뭉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것이 늦어도 15세기 초에는 정식 “영원한 연맹”, 곧 맹약 공동체로 발전했다. 이 연맹은 새로 얻은 힘을 느끼자 곧바로 공격적 성격을 띠었고, 권력의 절정에 이른 1675년 무렵에는 주변의 넓은 지역을 정복하여 주민들을 일부는 쫓아내고 일부는 공물을 바치게 했다. 이로쿼이 연맹은 미개의 낮은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인디언들이(그러니까 멕시코인, 뉴멕시코인, 페루인을 빼고) 이룩한 가장 진보한 사회 조직을 보여 준다. 연맹의 기본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1. 혈연으로 이어진 다섯 부족이 모든 내부 부족 문제에서 완전한 평등과 자립을 바탕으로 맺는 영원한 연맹. 이 혈연이 연맹의 참된 기초였다. 다섯 부족 가운데 셋은 아버지 부족이라 불렸고 서로 형제였다. 나머지 둘은 아들 부족이라 불렸고 마찬가지로 서로 형제 부족이었다. 세 씨족은, 가장 오래된 씨족들인데, 다섯 부족 모두에 아직 살아 있었고, 다른 세 씨족은 세 부족에 살아 있었다. 이 씨족들 각각의 성원은 다섯 부족 전체에 걸쳐 모두 형제였다. 방언만 다를 뿐인 공통의 언어는 공통의 혈통을 표현하고 증명했다.

2. 연맹의 기관은 50명의 사켐으로 이루어진 연맹 평의회였다. 그들은 모두 지위와 위신이 같았다. 이 평의회가 연맹의 모든 일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3. 이 50명의 사켐 자리는 연맹을 세울 때 부족들과 씨족들에게 배분되었다. 그것은 연맹의 목적을 위해 명시적으로 만든 새 직위였다. 사켐은 자리가 빌 때마다 해당 씨족이 새로 뽑았고, 씨족은 언제든 그들을 해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직위에 취임시키는 권리는 연맹 평의회에 있었다.

4. 이 연맹 사켐들은 저마다 자기 부족에서도 사켐이었고 부족 평의회에서 의석과 투표권을 가졌다.

5. 연맹 평의회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여야 했다.

6. 투표는 부족별로 했다. 그래서 유효한 결정을 내리려면 모든 부족이, 그리고 각 부족 안에서 모든 평의회 성원이 찬성해야 했다.

7. 다섯 부족 평의회는 저마다 연맹 평의회를 소집할 수 있었지만, 연맹 평의회는 스스로를 소집할 수 없었다.

8. 회의는 모인 민중 앞에서 열렸다. 이로쿼이족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다. 결정은 평의회만 했다.

9. 연맹에는 개인으로서의 우두머리, 집행 권력의 수장이 없었다.

10. 그 대신 연맹에는 권한과 권력이 똑같은 최고 전쟁 지도자가 둘 있었다(스파르타인의 두 “왕”, 로마의 두 집정관).

이것이 이로쿼이족이 400년 넘게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공적 제도의 전부다. 내가 모건을 따라 이것을 자세히 묘사한 것은, 여기서 아직 국가를 알지 못하는 사회의 조직을 연구할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국가는 그때그때 관계된 사람들 전체와 분리된 특별한 공적 권력을 전제한다. 마우러는 올바른 직관으로 독일의 마르크 제도를 국가와 본질적으로 다른, 그 자체로 순수하게 사회적인 제도로 인식했다. 물론 이 제도는 나중에 많은 부분에서 국가의 바탕이 되기는 했다. 그래서 마우러는 자신의 모든 저작에서 공적 권력이 마르크, 마을, 농장, 도시의 본래 제도에서, 그리고 그와 나란히 점차 생겨나는 과정을 연구한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 우리는 다음을 본다. 본래 하나였던 종족이 광대한 대륙 위로 서서히 퍼져 나간다. 부족들이 분열을 통해 민족들, 곧 부족의 무리 전체가 된다. 언어들이 변하여 서로 알아들을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본래의 통일성의 흔적도 거의 다 사라진다. 그와 함께 부족들 안에서는 개별 씨족이 여럿으로 갈라지고, 옛 어머니 씨족은 프라트리아로 남는다. 그런데도 이 가장 오래된 씨족들의 이름은 멀리 떨어져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부족들에게서도 그대로 남는다. 늑대와 곰은 지금도 모든 인디언 부족의 과반수에서 씨족 이름이다. 그리고 위에서 묘사한 제도는 대체로 이 모든 부족에 들어맞는다. 다만 많은 부족이 친족 부족들의 연맹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씨족이 일단 사회적 단위로 주어지면, 씨족, 프라트리아, 부족의 제도 전체가 이 단위에서 거의 강제적인 필연성으로 — 그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 발전해 나온다는 것도 본다. 셋 모두 서로 다른 단계의 혈연 집단이며, 저마다 그 자체로 닫혀 있고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하지만, 동시에 저마다 다른 것을 보완한다. 그리고 이들이 맡는 일의 범위는 낮은 단계의 미개인의 공적인 일 전체를 아우른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에게서 씨족을 사회적 단위로 발견하면, 우리는 그 부족에게서도 여기서 묘사한 것과 비슷한 조직을 찾아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경우처럼 사료가 충분하면, 우리는 그것을 찾아낼 뿐 아니라, 사료가 우리를 저버리는 곳에서는 아메리카의 사회 제도와 비교함으로써 가장 어려운 의문과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는 것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씨족 제도는 그 온갖 어린아이 같은 소박함과 단순함에도 얼마나 놀라운 제도인가! 군인도, 헌병도, 경찰도 없이, 귀족도, 왕도, 총독도, 지사도, 재판관도 없이, 감옥도 없이, 소송도 없이 모든 일이 질서 있게 돌아간다. 모든 다툼과 분쟁은 관계된 사람들 전체, 곧 씨족이나 부족, 또는 개별 씨족들끼리가 결정한다. 마지막 수단으로, 드물게 쓰이는 피의 복수가 위협할 뿐인데, 우리의 사형도 그것의 문명화된 형태에 지나지 않으며 문명의 온갖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니고 있다. 지금보다 공동의 일이 훨씬 많은데도 — 살림은 여러 가족에게 공동이며 공산주의적이고, 땅은 부족의 소유이며, 작은 텃밭만 살림마다 잠정적으로 배정되어 있다 — 우리의 방대하고 복잡한 행정 기구는 흔적도 필요 없다. 관계된 사람들이 결정하며, 대부분의 경우 수백 년의 관습이 이미 모든 것을 정해 놓았다.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이 있을 수 없다. 공산주의적 살림과 씨족은 노인, 병자, 전쟁에서 불구가 된 사람에 대한 자기 의무를 안다.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다. 여자들도 그렇다. 노예가 들어설 자리는 아직 없고, 다른 부족을 예속시킬 자리도 대개 아직 없다. 1651년 무렵 이로쿼이족은 이리족과 “중립 민족”을 물리친 뒤, 그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가진 성원으로 연맹에 들어오라고 제안했다. 패자들이 이를 거절한 뒤에야 그들은 자기 영역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이런 사회가 어떤 남자와 여자를 길러 내는지는, 타락하지 않은 인디언과 만난 모든 백인이 이 미개인들의 개인적 위엄, 올곧음, 강인한 성격, 용맹에 감탄했다는 데서 드러난다.

용맹에 대해서는 아주 최근 아프리카에서 그 예를 보았다. 몇 해 전의 줄루 카피르인과 몇 달 전의 누비아인은 — 둘 다 씨족 제도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부족이다 — 어떤 유럽 군대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그들은 창과 투창만으로 무장하고 화기도 없이, 밀집 전투에서 세계 제일로 인정받는 영국 보병의 후장총이 퍼붓는 탄우 속을 뚫고 총검 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무기의 엄청난 차이에도, 복무 기간이라는 것도 없고 훈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영국 보병을 혼란에 빠뜨렸고 심지어 물리치기까지 했다. 그들이 무엇을 견디고 해낼 수 있는지는, 카피르인 한 사람이 24시간 동안 말보다 더 먼 길을 더 빨리 간다는 영국인들의 불평이 증명한다. 어느 영국 화가는 그들의 가장 작은 근육까지도 채찍 끈처럼 단단하고 강철 같이 불거져 있다고 말한다.

사회가 여러 계급으로 나뉘기 전에 인간과 인간 사회는 이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처지를 오늘날 문명화된 인간의 압도적 다수의 처지와 비교하면,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와 소농을 옛 자유로운 씨족원과 견줄 때 그 거리는 엄청나다.

이것이 한쪽 면이다. 그러나 이 조직이 몰락할 운명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 조직은 부족을 넘어서지 못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그리고 이로쿼이족의 예속화 시도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부족 연맹은 벌써 이 조직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부족 밖에 있는 것은 법 밖에 있었다. 명시적인 강화 조약이 없는 곳에서는 부족과 부족 사이에 전쟁이 지배했다. 그리고 전쟁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잔인함으로 치러졌으며, 이 잔인함은 나중에야 이해관계 때문에 누그러졌다. 우리가 아메리카에서 본 전성기의 씨족 제도는 극히 미발달한 생산을 전제했고, 따라서 넓은 영역에 극히 희박한 인구를 전제했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낯설게 맞서 있는, 이해되지 않는 외부 자연에 거의 완전히 지배당하는 상태를 전제했으며, 이것은 유치한 종교 관념에 반영된다. 부족은 인간에게 한계로 남았다. 부족 밖의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랬다. 부족, 씨족과 그 제도는 신성하고 침범할 수 없는 것이었고, 자연이 준 더 높은 힘이었으며, 개인은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서 무조건 이 힘에 복종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무리 당당해 보이더라도, 그들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그들은 아직 자연 발생적 공동체의 탯줄에 매달려 있다. 이 자연 발생적 공동체의 힘은 깨뜨려져야 했다. 그리고 깨뜨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타락으로, 옛 씨족 사회의 소박한 도덕적 높이에서 떨어진 타락으로 보이는 영향력으로 깨뜨려졌다. 새로운 문명 사회, 곧 계급사회의 막을 여는 것은 가장 저열한 이해관계 — 비열한 탐욕, 거친 향락욕, 더러운 인색, 공동 재산에 대한 이기적 약탈 — 이다. 옛 계급 없는 씨족 사회를 무너뜨리고 쓰러뜨리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수단 — 도둑질, 폭력, 간계, 배신 — 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 자체도, 그것이 존재해 온 2500년 내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거대한 다수를 희생하여 작은 소수가 발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그렇다.

IV · 그리스인의 씨족

그리스인도, 펠라스고이인과 그 밖의 같은 계통의 민족들도 이미 선사시대부터 아메리카인과 같은 유기적 계열에 따라 조직되어 있었다. 씨족, 프라트리아, 부족, 부족 연맹이다. 도리아인에게서처럼 프라트리아는 없을 수도 있었고, 부족 연맹이 아직 어디서나 형성되어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씨족이 단위였다. 그리스인이 역사에 등장할 무렵 그들은 문명의 문턱에 서 있다. 그들과 앞에서 이야기한 아메리카 부족들 사이에는 거의 두 개의 큰 발전 시기가 통째로 놓여 있으며, 그만큼 영웅시대의 그리스인은 이로쿼이족보다 앞서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의 씨족도 결코 더는 이로쿼이족의 원초적 씨족이 아니다. 군혼의 흔적은 크게 지워지기 시작한다. 모권은 부권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로써 떠오르는 사적인 부가 씨족 제도에 첫 구멍을 냈다. 두 번째 구멍은 첫 번째 구멍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부권이 도입된 뒤에는 부유한 상속녀의 재산이 혼인을 통해 그녀의 남편에게, 따라서 다른 씨족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씨족법의 기초를 깨뜨리고, 이 경우 처녀가 씨족 안에서 혼인하는 것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명령까지 하여 씨족에 재산을 지켜 주었다.

그로트의 그리스사에 따르면 특히 아테네의 씨족을 묶어 준 것은 다음과 같다.

1. 공동의 종교 축제, 그리고 특정한 신을 기리는 사제직의 독점적 권리. 그 신은 씨족의 시조로 여겨졌으며, 이런 자격으로 특별한 별칭으로 불렸다.

2. 공동 묘지(데모스테네스의 「에우불리데스」 참조)

3. 서로 상속할 권리.

4. 폭력을 당했을 때 서로 돕고 보호하고 지원할 의무.

5. 일정한 경우, 특히 고아 딸이나 상속녀가 관련된 경우 씨족 안에서 혼인할 상호 권리와 의무.

6. 적어도 몇몇 경우에, 자체의 아르콘(장)과 회계 담당자를 둔 공동 재산의 보유.

다음으로 프라트리아로의 결합이 여러 씨족을 묶었지만 덜 긴밀했다. 그래도 여기서도 비슷한 종류의 상호 권리와 의무를 볼 수 있다. 특히 일정한 종교 의례를 함께하는 것, 그리고 프라트리아원(phrator)이 살해되었을 때 범인을 고발할 권리다. 한 부족의 프라트리아 전체는 다시 귀족(에우파트리다이) 가운데서 뽑힌 필로바실레우스(부족장)의 주재 아래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신성한 축제를 함께했다.

그로트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덧붙인다. “그러나 그리스 씨족을 통해서도 야만인(이를테면 이로쿼이족)이 틀림없이 내비친다.” 조금만 더 살펴보면 그것은 더욱 틀림없어진다.

그리스 씨족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7. 부권에 따른 혈통.

8. 상속녀의 경우를 빼고는 씨족 안의 혼인 금지. 이 예외와 그것이 명령의 형태를 띤다는 점은 옛 규칙이 유효했음을 증명한다. 이 규칙은 아내가 혼인으로 자기 씨족의 종교 의례를 버리고 남편의 의례로 옮겨 가며, 남편의 프라트리아에도 등록되었다는, 두루 통하던 원칙에서도 나온다. 이에 따르면, 그리고 디카이아르코스의 유명한 한 구절에 따르면, 씨족 밖의 혼인이 규칙이었다. 베커는 『카리클레스』에서 아예 누구도 자기 씨족 안에서 혼인할 수 없었다고 본다.

9. 씨족에 입양할 권리. 입양은 가족에 입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공적인 절차를 거쳐야 했고 예외적으로만 이루어졌다.

10. 장을 뽑고 해임할 권리. 각 씨족에 아르콘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안다. 그 직위가 특정 가족에서 세습되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미개 시대 끝까지 추정은 언제나 엄격한 세습에 반대되는 쪽이다. 엄격한 세습은 씨족 안에서 부자와 빈자가 완전히 똑같은 권리를 가졌던 상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로트뿐 아니라 니부어, 몸젠, 그 밖에 지금까지의 모든 고전 고대 역사가가 씨족에서 좌초했다. 그들은 씨족의 많은 특징을 아주 정확히 기록했지만, 언제나 씨족을 가족들의 집단으로 보았고, 그로써 씨족의 본성과 기원을 이해할 길을 스스로 막았다. 씨족 제도 아래에서 가족은 결코 조직 단위가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남편과 아내는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두 씨족에 속했기 때문이다. 씨족은 통째로 프라트리아에, 프라트리아는 부족에 들어갔다. 가족은 절반은 남편의 씨족에, 절반은 아내의 씨족에 들어갔다. 국가도 공법에서는 가족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족은 오늘날까지 사법에만 존재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 서술 전체는, 특히 18세기에 침범할 수 없게 된 터무니없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문명보다 별로 오래되지도 않은 일부일처제 개별 가족이 핵이며, 그 둘레에 사회와 국가가 결정처럼 차츰 엉겨 붙었다는 전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끼워 넣는다. “그로트 씨에게 또한 일러둘 것은, 그리스인이 자기 씨족들을 신화에서 이끌어 내기는 하지만, 그 씨족들은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신화와 그 신들 및 반신들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모건이 그로트를 즐겨 인용하는 것은 그가 존경받으면서도 전혀 의심받을 데 없는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로트는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테네의 씨족은 저마다 시조로 여겨지는 이에게서 따온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솔론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솔론 이후에도 유언이 없는 경우에는, 죽은 사람의 씨족원(gennêtes)이 그의 재산을 상속했다. 그리고 살인이 일어나면 먼저 친척들이, 다음에 씨족원들이, 마지막으로 피살자의 프라트리아원들이 범인을 법정에 고발할 권리와 의무를 가졌다.

“가장 오래된 아테네 법에 대해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은 씨족과 프라트리아로의 구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씨족이 공통의 조상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학식만 쌓은 속물들”(마르크스)의 골치를 몹시 썩였다. 그들은 물론 이것을 순전한 신화로 치부하므로, 나란히 있던, 본래 전혀 친족이 아닌 가족들에게서 씨족이 생겨났다는 것을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도 씨족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면 이것을 해내야 한다. 그래서 제자리를 맴도는 말의 홍수가 동원되는데, 그것은 「족보는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씨족은 현실이다」라는 명제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로트에게서는 — 마르크스의 삽입구를 곁들이면 — 다음과 같이 된다.

“우리가 이 족보에 대해 듣는 일은 드물다. 이것은 특별히 엄숙한 일정한 경우에만 공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덜 알려진 씨족들도 더 유명한 씨족들과 꼭 마찬가지로 공동의 종교 의례를 가지고 있었고”(이것 참 이상하군요, 그로트 씨!) “공통의 초인적 시조와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덜 알려진 씨족들에게서 이것은 정말 이상하군요, 그로트 씨!). “기본 설계와 관념적 기초는”(이보시오, 관념적이 아니라 육체적(karnal), 독일어로(germanice) 하면 육신의 기초요!) “모든 씨족에게서 같았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한 모건의 답을 이렇게 요약한다. “본래 형태의 씨족에 대응하는 혈연 친족 체계는 — 그리고 그리스인도 다른 모든 인간처럼 한때 이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 씨족의 모든 성원 사이의 친족 관계에 대한 지식을 보존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것을 어려서부터 실제 생활을 통해 배웠다. 일부일처제 가족이 생기면서 이것은 잊혔다. 씨족 이름은 족보를 만들어 냈고, 그 옆에서 개별 가족의 족보는 하찮아 보였다. 이제 그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공통의 혈통을 가졌다는 사실을 보존하는 일은 이 이름이 맡았다. 그러나 씨족의 족보는 너무 멀리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성원들은 더 가까운 공통의 조상이 있는 한정된 몇몇 경우를 빼고는 서로의 실제 친족 관계를 더는 증명할 수 없었다. 이름 자체가 공통 혈통의 증거였고, 입양된 경우를 빼면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와 반대로 그로트와 니부어처럼 씨족원 사이의 모든 친족 관계를 사실상 부정하여 씨족을 순전히 꾸며 내고 지어낸 산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은 ‘관념적인’, 곧 방구석에 틀어박힌 서생들에게나 어울린다. 세대의 사슬이, 특히 일부일처제가 시작되면서 아득히 멀어지고 지나간 현실이 신화적 환상의 모습으로 비치게 되자, 점잖은 속물 양반들은 환상의 족보가 실제 씨족을 만들었다고 결론지었고 지금도 그렇게 결론짓는다!”

프라트리아는 아메리카인에게서처럼 여러 딸 씨족으로 갈라지면서도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 어머니 씨족이었으며, 흔히 아직도 그 모두를 공통의 시조에게서 끌어냈다. 그래서 그로트에 따르면

“헤카타이오스의 프라트리아의 같은 시대 성원들은 모두 16대 위에 같은 한 신을 시조로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프라트리아의 모든 씨족은 글자 그대로 형제 씨족이었다. 프라트리아는 호메로스에게서도 군사 단위로 나온다. 네스토르가 아가멤논에게 충고하는 유명한 구절에서다. 사람들을 부족별로, 프라트리아별로 정렬하여 프라트리아가 프라트리아를, 부족이 부족을 돕게 하라. — 그 밖에 프라트리아는 프라트리아원에게 저질러진 살인죄를 고발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따라서 더 이른 시기에는 피의 복수 의무도 가졌다. 프라트리아에는 또한 공동의 성소와 축제가 있다. 실제로 그리스 신화 전체가 함께 가지고 온 옛 아리아의 자연 숭배에서 형성되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씨족과 프라트리아에 좌우되었고 그 안에서 진행되었다. 또 프라트리아에는 장(phratriarchos)이 있었고, 드쿨랑주에 따르면 집회와 구속력 있는 결정, 재판권과 행정도 있었다. 씨족을 무시한 후대의 국가조차 프라트리아에는 일정한 공적 직무를 남겨 두었다.

여러 친족 프라트리아가 모여 부족을 이룬다. 아티카에는 부족이 넷 있었고, 각 부족은 프라트리아 셋을, 각 프라트리아는 씨족 서른을 거느렸다. 집단을 이렇게 자로 잰 듯 나눈 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질서에 의식적이고 계획적으로 손을 댔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일이 어떻게, 언제,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그리스 역사는 침묵한다. 그리스인 자신도 영웅시대까지만 기억을 간직해 왔을 뿐이다.

비교적 좁은 땅에 모여 살던 그리스인에게서는 넓은 아메리카의 숲에서보다 방언의 분화가 덜 진행되었다. 그래도 여기서도 같은 주요 방언을 쓰는 부족들만이 더 큰 전체로 결합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작은 아티카에도 특별한 방언이 있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일반적인 산문 언어로서 지배적인 방언이 되었다.

호메로스의 시에서 우리는 그리스 부족들이 대개 이미 작은 민족들로 결합해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안에서 씨족, 프라트리아, 부족은 아직 자립성을 완전히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았다. 인구는 가축 떼와 경작의 확대, 수공업의 시작과 함께 늘었다. 그와 함께 부의 차이가 커졌고, 부의 차이와 함께 옛 자연 발생적 민주정 안에서 귀족적 요소가 자라났다. 작은 민족들은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려고, 그리고 아마 약탈물 때문에도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는 것은 이미 인정된 제도였다.

이 부족들과 작은 민족들의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1. 상설 기관은 평의회, 곧 불레(bulê)였다. 이것은 본래 아마 씨족장들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나중에 그 수가 너무 많아지자 그 가운데 골라 뽑은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귀족적 요소가 형성되고 강해질 기회가 되었다. 실제로 디오니시오스는 영웅시대의 평의회가 아예 귀족(kratistoi)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말한다. 평의회는 중요한 일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이를테면 아이스킬로스에서 테베의 평의회는 주어진 상황에서 결정적인 결의를 한다. 에테오클레스는 명예롭게 묻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은 밖에 내던져 개들의 먹이가 되게 하라는 결의다. 국가가 세워지면서 이 평의회는 후대의 원로원으로 넘어갔다.

2. 민회(agora). 이로쿼이족에게서 우리는 민중이, 남자와 여자가 평의회 회의를 둘러서서 질서 있게 끼어들어 말하며 그 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을 보았다.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에게서는 이 “둘러선 무리(Umstand)”가 — 옛 독일의 법정 용어를 빌리자면 — 이미 완전한 민회로 발전해 있었다. 원시시대의 독일인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민회는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 평의회가 소집했고, 남자는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다. 결정은 거수(아이스킬로스의 『탄원하는 여인들』)나 환호로 이루어졌다. 민회는 최종적으로 주권을 가졌다. 쇠만(『그리스 고대 문물』)이 말하듯이

“민중의 협력이 있어야 실행할 수 있는 일이라면, 호메로스는 민중의 뜻을 거슬러 그들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전혀 보여 주지 않는다”.

성인 남자 부족원이 모두 전사였던 이 시대에는 민중과 분리되어 민중에게 맞세울 수 있는 공적 권력이 아직 없었다. 자연 발생적 민주정은 아직 한창 꽃피고 있었으며, 평의회와 바실레우스의 권력과 지위를 판단하는 데는 이것이 출발점으로 남아야 한다.

3. 군사 지도자(basileus).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의 학자들은 대개 타고난 군주의 시종들이라서 바실레우스를 근대적 의미의 군주로 만든다. 양키 공화주의자 모건은 이에 반대한다. 그는 번지르르한 글래드스턴과 그의 『세계의 청춘』(Juventus Mundi)에 대해 아주 비꼬면서도 정확하게 말한다.

‘글래드스턴 씨는 영웅시대 그리스의 추장들을 왕과 군주로, 게다가 신사이기까지 한 이들로 내놓는다. 그러나 그 자신도 이렇게 인정해야 한다. 대체로 우리는 장자 상속의 관습이나 법이 충분히, 그러나 지나치게 뚜렷하지는 않게 정해져 있음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단서를 잔뜩 단, 충분하되 지나치게 뚜렷하지는 않은 장자 상속이란 아예 없는 것과 똑같은 값어치라는 것은 아마 글래드스턴 씨 자신에게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이로쿼이족과 다른 인디언에게서 장의 직위가 어떻게 세습되었는지는 앞에서 보았다. 모든 직위는 대개 한 씨족 안에서 뽑는 선출직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 씨족 안에서 세습되었다. 자리가 비면 가장 가까운 씨족 친척 — 형제나 자매의 아들 — 이 차츰 우선권을 얻었다. 그를 건너뛸 이유가 없다면 그랬다. 그러므로 부권 지배 아래의 그리스인에게서 바실레우스의 직위가 대개 아들이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넘어갔다면, 그것은 여기서 아들들이 민중의 선거로 계승할 가능성을 자기 편에 두고 있었다는 증거일 뿐이며, 민중의 선거 없이 법적 효력을 가진 세습이 있었다는 증거는 결코 아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이로쿼이족과 그리스인에게서 씨족 안에 특별한 귀족 가문이 생겨나는 첫 싹이고, 그리스인에게서는 덧붙여 장래의 세습 지도권 또는 군주정의 첫 싹이다. 그러므로 그리스인에게서 바실레우스는 민중이 뽑거나, 적어도 민중의 공인된 기관 — 평의회나 아고라 — 의 승인을 받아야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유력하다. 로마의 “왕”(rex)에게도 그러했다.

『일리아스』에서 뭇 사내의 통치자 아가멤논은 그리스인의 최고 왕이 아니라, 포위된 도시 앞에 선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나타난다. 그리스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을 때 오디세우스가 그 유명한 구절에서 가리키는 것도 그의 이 자격이다. 여럿이 지휘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한 사람이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 등등(여기서 왕홀에 관한 인기 있는 시구는 후대에 덧붙인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여기서 정부 형태에 대해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최고 사령관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트로이 앞에서 군대로만 나타나는 그리스인에게서도 아고라에서는 충분히 민주적으로 일이 진행된다. 아킬레우스는 선물, 곧 약탈물의 분배에 대해 말할 때면 언제나 분배자로 아가멤논도 다른 어떤 바실레우스도 아닌 ‘아카이아인의 아들들’, 곧 민중을 내세운다. ‘제우스가 낳은’, ‘제우스가 기른’ 같은 수식어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모든 씨족이 한 신에게서 나왔고, 부족장의 씨족은 벌써 ‘더 높은’ 신, 여기서는 제우스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 같은, 인격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이들조차 ‘신과 같은’(dioi, theioi) 이들이며, 그것도 『오디세이아』에서, 그러니까 『일리아스』보다 훨씬 나중 시대에 그렇다. 같은 『오디세이아』에서 영웅(Heros)이라는 이름은 전령 물리오스에게도, 눈먼 가인 데모도코스에게도 붙는다. 요컨대 그리스 저술가들이 호메로스의 이른바 왕정에 쓰는 바실레이아(basileia)라는 낱말은(군사 지도권이 그 주된 특징이므로), 평의회와 민회가 그 곁에 있는 이상, 다만 — 군사적 민주주의를 뜻할 뿐이다.”(마르크스)

바실레우스에게는 군사적 권한 말고도 사제의 권한과 재판의 권한이 있었다. 재판의 권한은 자세히 정해져 있지 않았고, 사제의 권한은 부족이나 부족 연맹의 최고 대표라는 자격에서 나왔다. 민정이나 행정의 권한은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직무상 평의회의 성원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바실레우스를 「왕」(König)으로 옮기는 것은 어원상으로는 아주 옳다. 쾨니히(쿠닝(Kuning))라는 낱말은 쿠니(Kuni), 퀸네(Künne)에서 왔고 씨족의 장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바실레우스는 오늘날의 「왕」이라는 낱말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투키디데스는 옛 바실레이아를 명시적으로 파트리케(patrikê), 곧 씨족에서 나온 것이라 부르고, 그것이 확고하게 정해진, 따라서 제한된 권한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웅시대의 바실레이아가 자유인에 대한 지도권이었고 바실레우스는 군사 지도자, 재판관, 최고 사제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후대의 의미에서의 통치 권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1]

그러므로 우리는 영웅시대 그리스의 제도에서 옛 씨족 조직이 아직 생생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지만, 동시에 이미 그것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도 본다.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부권. 이로써 가족 안에 부가 쌓이는 것이 촉진되었고 가족은 씨족에 맞서는 하나의 힘이 되었다. 부의 차이가 세습 귀족과 왕정의 첫 싹을 만들어 내어 제도에 되먹임된 것. 노예제. 처음에는 아직 전쟁 포로만을 노예로 삼았지만, 이미 자기 부족원과 심지어 씨족원까지 노예로 삼을 전망을 열어 놓고 있었다. 부족과 부족 사이의 옛 전쟁은 이미 가축, 노예, 재물을 빼앗으려는 육지와 바다에서의 체계적인 약탈로, 정식 생계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요컨대 부는 최고의 선으로 찬양받고 존중받았으며, 옛 씨족 질서는 부를 폭력으로 약탈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남용되었다. 이제 없는 것은 단 하나, 다음과 같은 제도뿐이었다. 그 제도는 개인들이 새로 얻은 부를 씨족 질서의 공산주의적 전통에 맞서 지켜 줄 뿐 아니라, 예전에는 그토록 하찮게 여겨지던 사유재산을 신성하게 만들고 이 신성화를 모든 인간 공동체의 최고 목적이라고 선언할 뿐 아니라, 잇따라 발전해 나오는 새로운 재산 획득 형태, 곧 끊임없이 가속되는 부의 증식에 사회 전체가 인정한다는 도장을 찍어 줄 것이었다. 그것은 막 시작된 사회의 계급 분열을 영구화할 뿐 아니라, 가진 계급이 가지지 못한 계급을 착취할 권리와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것도 영구화할 제도였다. 그리고 이 제도가 나타났다. 국가가 발명되었다.

주석

  1. 그리스의 바실레우스와 마찬가지로 아즈텍의 군사 지도자에게도 근대의 군주가 덧씌워졌다. 모건은 처음에는 오해에서 나와 과장되었고 나중에는 대놓고 거짓이 된 에스파냐인의 보고를 처음으로 역사적 비판에 부쳤다. 그리고 멕시코인이 미개의 중간 단계에 있었지만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보다는 높은 단계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제도가 왜곡된 보고로 알아볼 수 있는 한에서 이에 걸맞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것은 세 부족의 연맹으로, 다른 여러 부족을 굴복시켜 공물을 바치게 했고, 연맹 평의회와 연맹 군사령관이 다스렸다. 에스파냐인은 이 연맹 군사령관을 “황제”로 만들었다. ↩

V · 아테네 국가의 성립

국가는 어떻게 발전했는가. 씨족 제도의 기관들은 일부는 바뀌고, 일부는 새 기관이 끼어들어 밀려났으며, 마침내 진짜 국가 관청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그와 함께 자기 씨족, 프라트리아, 부족 안에서 스스로를 지키던 진짜 “무장한 인민” 대신에, 이 국가 관청들에 봉사하는, 따라서 인민에게 맞서서도 쓰일 수 있는 무장한 “공적 권력”이 들어섰다. 이 과정의 적어도 첫 부분은 고대 아테네에서보다 더 잘 추적할 수 있는 곳이 없다. 형태의 변화는 대체로 모건이 서술했지만, 그 변화를 낳은 경제적 내용은 대부분 내가 덧붙여야 한다.

영웅 시대에 아테네인의 네 부족은 아티카에서 아직 서로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 부족들을 이루는 열두 프라트리아조차 케크롭스의 열두 도시에 아직 따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제도는 영웅 시대의 것, 곧 민회, 인민 평의회, 바실레우스였다. 기록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한, 토지는 이미 분할되어 사유재산이 되어 있었다. 미개의 높은 단계 끝 무렵에 이미 비교적 발달해 있던 상품생산과 그에 걸맞은 상품 거래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곡물 말고도 포도주와 올리브유가 생산되었다. 에게해의 해상무역은 점점 페니키아인의 손을 벗어나 대부분 아티카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 토지 매매와, 농경과 수공업, 상업과 항해 사이에서 진전되는 분업 때문에 씨족, 프라트리아, 부족의 성원들은 곧 서로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프라트리아와 부족의 구역에는 같은 민족이기는 하지만 이 단체들에 속하지 않는, 따라서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이방인인 주민이 생겼다. 평온한 시기에는 각 프라트리아와 각 부족이 아테네의 인민 평의회나 바실레우스에게 사람을 보내지 않고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라트리아나 부족의 구역에 살면서 거기 속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이 처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로써 씨족 제도 기관들의 규칙적인 작동이 흐트러져, 이미 영웅 시대에 대책이 필요해졌다. 테세우스가 만들었다고 하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 변화의 핵심은 아테네에 중앙 행정이 세워졌다는 데 있었다. 곧 지금까지 부족들이 각자 처리하던 일의 일부가 공동의 일로 선언되어 아테네에 자리한 공동 평의회에 넘겨졌다. 이로써 아테네인은 아메리카의 어떤 원주민 민족이 일찍이 간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나란히 사는 부족들의 단순한 연맹 대신에 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한 것이다. 그와 함께 부족과 씨족의 법 관습 위에 서는 아테네의 일반 민족법이 생겨났다. 아테네 시민은 시민으로서 일정한 권리를 얻었고, 자기 부족이 아닌 지역에서도 새로운 법적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씨족 제도를 허무는 첫걸음이었다. 나중에 아티카 전체에서 어느 부족에도 속하지 않고 아테네 씨족 제도의 완전히 바깥에 서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시민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가 만들었다고 하는 두 번째 제도는 씨족, 프라트리아, 부족을 따지지 않고 인민 전체를 세 계급으로 나눈 것이었다. 에우파트리다이 곧 귀족, 게오모로이 곧 농민, 데미우르고이 곧 수공업자다. 그리고 관직을 차지할 독점적 권리를 귀족에게 넘겼다. 이 구분은 귀족의 관직 독점을 빼면 효과가 없었다. 그 밖에는 계급들 사이에 아무런 법적 차이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분은 조용히 자라 온 새로운 사회적 요소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구분이 보여 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씨족의 관직을 특정 가문에서 채우던 관습이 이미 이 가문들이 관직을 차지할, 별로 다투어지지 않는 권리로 굳어 있었다. 가뜩이나 부로 힘센 이 가문들이 자기 씨족 밖에서 하나의 특권 계급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싹트기 시작한 국가가 이 참월을 신성하게 인정했다. 이 구분은 또 농민과 수공업자 사이의 분업이 이미 씨족과 부족에 따른 낡은 편제와 사회적 중요성에서 앞자리를 다툴 만큼 강해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 끝으로 이 구분은 씨족 사회와 국가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을 선언한다. 국가를 세우려는 첫 시도는 씨족들을 찢어 놓는 데 있다. 각 씨족의 성원을 특권층과 홀대받는 층으로 가르고, 뒤의 것을 다시 두 직업 계급으로 갈라 서로 맞세우는 것이다.

솔론에 이르기까지 아테네의 그 뒤 정치사는 불완전하게만 알려져 있다. 바실레우스 직은 사라졌다. 국가의 우두머리로는 귀족 가운데서 뽑힌 아르콘들이 들어섰다. 귀족의 지배는 점점 커져 기원전 600년 무렵에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평민의 자유를 억누르는 주된 수단은 화폐와 고리대였다. 귀족의 주된 근거지는 아테네와 그 주변이었다. 거기서 해상무역은, 여전히 이따금 덤으로 곁들인 해적질과 더불어, 귀족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화폐의 부를 그들 손에 모았다. 여기서부터 발전하는 화폐경제가 부식성 강한 질산처럼 현물경제에 기초한 농촌 공동체들의 오랜 생활 방식 속으로 스며들었다. 씨족 제도는 화폐경제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아티카 소농들의 몰락은 그들을 감싸 보호하던 옛 씨족 유대가 느슨해진 것과 때를 같이했다. 차용증서와 토지 담보는(아테네인은 저당도 이미 발명해 두었다) 씨족도 프라트리아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옛 씨족 제도는 화폐도, 대부도, 금전 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점점 더 무성하게 퍼지는 귀족의 화폐 지배는 채권자를 채무자에게서 보호하고, 화폐 소유자가 소농을 착취하는 것을 신성화하는 새로운 관습법도 만들어 냈다. 아티카의 모든 들판에는 저당 기둥이 빽빽이 서 있었다. 거기에는 이 기둥이 선 땅이 아무개에게 얼마의 돈에 저당 잡혀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 표시가 없는 밭은 대부분 이미 기한이 지난 저당이나 이자 때문에 팔려 귀족 고리대금업자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농민은 소작인으로 그 땅에 눌러앉아 자기 노동 수확의 6분의 1로 살고 6분의 5를 새 주인에게 소작료로 바치는 것이 허락되기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팔린 땅의 대금이 빚을 갚기에 모자라거나 담보 없이 빚을 졌으면,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갚기 위해 자기 아이들을 외국에 노예로 팔아야 했다. 아버지가 자식을 판다 — 이것이 부권과 일부일처제의 첫 열매였다! 그러고도 흡혈귀가 만족하지 않으면 채무자 자신을 노예로 팔 수 있었다. 이것이 아테네 민족에게 찾아온 문명의 상쾌한 새벽이었다.

예전에 인민의 생활 형편이 아직 씨족 제도에 들어맞았을 때에는 이런 격변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게 그것이 닥쳐왔다. 잠시 우리의 이로쿼이족으로 돌아가 보자. 거기서는 지금 아테네인에게 말하자면 그들이 손쓰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의 뜻을 거슬러 들이닥친 그런 상태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거기서는 해마다 똑같은 생활수단 생산 방식이 마치 밖에서 강요된 듯한 이런 갈등을 결코 낳을 수 없었고, 부자와 빈자,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대립도 낳을 수 없었다. 이로쿼이족은 자연을 지배하는 데서는 아직 멀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자연의 한계 안에서는 자기 생산을 지배했다. 작은 밭의 흉작, 호수와 강의 물고기, 숲의 사냥감이 바닥나는 경우를 빼면, 그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생계를 꾸리면 무엇이 나올지를 알고 있었다.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좀 더 빈약하든 넉넉하든 생활수단이었다. 그러나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사회적 격변, 씨족 유대의 해체, 씨족원과 부족원이 서로 맞서 싸우는 계급들로 갈라지는 일이었다. 생산은 가장 좁은 테두리 안에서 움직였다. 그러나 — 생산자들은 자기 생산물을 지배했다. 이것이 미개한 생산의 엄청난 장점이었다. 이 장점은 문명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인간이 이제 이룩한 거대한 자연 지배와 이제 가능해진 자유로운 연합을 토대로 그것을 되찾는 것이 다음 세대들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리스인의 경우는 달랐다. 가축 떼와 사치품에 대한 사적 소유가 생겨나 개인들 사이의 교환, 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여기에 그 뒤에 일어난 모든 격변의 싹이 있다. 생산자들이 자기 생산물을 더 이상 직접 소비하지 않고 교환으로 남의 손에 넘기자마자 그들은 그것에 대한 지배를 잃었다. 그들은 생산물이 어떻게 되는지 더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언젠가 생산물이 생산자에게 맞서, 그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데 쓰일 가능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개인들 사이의 교환을 없애지 않는 사회는 어떤 사회도 자기 생산에 대한 지배와 자기 생산과정의 사회적 결과에 대한 통제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개인들 사이의 교환이 생겨나고 생산물이 상품으로 바뀌면 생산물이 얼마나 빨리 생산자에 대해 지배력을 휘두르는지를 아테네인은 겪게 되었다. 상품생산과 함께 개인이 자기 계산으로 땅을 경작하는 일이 생겼고, 그와 함께 곧 개인의 토지 소유가 생겼다. 나아가 화폐가 생겼다.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일반적 상품이다. 그러나 인간은 화폐를 발명하면서 그것으로 또다시 새로운 사회적 권력, 사회 전체가 그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하는 단 하나의 일반적 권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이 새 권력, 그것을 만든 자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뜻과 상관없이 갑자기 솟아오른 이 권력이 젊음의 온갖 난폭함으로 아테네인에게 자기 지배를 느끼게 했다.

어떻게 해야 했는가? 옛 씨족 제도는 화폐의 개선 행진 앞에 무력했음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화폐, 채권자와 채무자, 강제 채무 추심 같은 것을 위한 자리를 그 틀 안에 마련하는 것조차 절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적 권력은 이미 거기 있었다. 경건한 소망이나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으로는 화폐와 고리대를 세상에서 다시 몰아낼 수 없었다. 게다가 씨족 제도에는 그 밖에도 부차적인 틈이 여럿 뚫려 있었다. 씨족원과 프라트리아원이 아티카 전역에서, 특히 아테네 시 자체에서 뒤섞이는 일은 대를 거듭할수록 심해졌다. 아테네인이 지금도 여전히 땅은 자기 씨족 밖으로 팔 수 있어도 살림집은 팔 수 없었는데도 그랬다. 농경, 수공업, 수공업 안에서도 다시 수많은 갈래, 상업, 항해 등 여러 생산 부문 사이의 분업은 산업과 교통이 나아감에 따라 더욱 완전하게 발달했다. 주민은 이제 직업에 따라 꽤 굳은 집단으로 나뉘었다. 각 집단은 씨족이나 프라트리아 안에는 자리가 없는 일련의 새로운 공동 이해관계를 가졌고, 따라서 이를 처리하려면 새로운 관직이 필요했다. 노예의 수는 크게 늘어 이미 그때 자유로운 아테네인의 수를 훨씬 넘어섰을 것이 틀림없다. 씨족 제도는 원래 노예제를 알지 못했고, 따라서 이 부자유한 대중을 억누를 수단도 알지 못했다. 끝으로 상업은 많은 외국인을 아테네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돈벌이가 쉬워서 그곳에 정착했다. 그들 역시 옛 제도로는 권리도 보호도 없었고, 관례로 용인되기는 했지만 민족 안에서 거슬리는 이질적 요소로 남았다.

요컨대 씨족 제도는 끝나 가고 있었다. 사회는 날마다 그 틀을 더 벗어나 자랐다. 씨족 제도는 자기 눈앞에서 생겨난 가장 나쁜 폐해조차 막지도 없애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사이 국가가 조용히 발전해 있었다. 처음에는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다음에는 여러 도시 노동 부문 사이에서 일어난 분업으로 생겨난 새로운 집단들이 자기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기관들을 만들었다. 온갖 관직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젊은 국가는 무엇보다 자기 고유의 무력이 필요했다. 바다를 누비는 아테네인에게 그것은 처음에는 해군일 수밖에 없었다. 작은 전쟁들을 치르고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솔론 이전의 알 수 없는 때에 나우크라리아가 만들어졌다. 각 부족에 열둘씩 있는 작은 지역 구역이다. 나우크라리아마다 전함 한 척을 내고 장비를 갖추고 사람을 태워야 했으며, 그 밖에 기병 두 명을 냈다. 이 제도는 씨족 제도를 두 가지로 공격했다. 첫째, 무장한 인민 전체와 더 이상 곧바로 일치하지 않는 공적 권력을 만들었다. 둘째, 처음으로 인민을 공적 목적을 위해 친족 집단에 따라서가 아니라 지역적 거주에 따라 나누었다. 이것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곧 드러날 것이다.

씨족 제도가 착취당하는 인민을 도울 수 없었다면 남은 것은 생겨나는 국가뿐이었다. 그리고 국가는 솔론의 제도로 도움을 주었고, 동시에 다시 한번 옛 제도를 희생시키며 자신을 강화했다. 솔론은 — 기원전 594년에 이루어진 그의 개혁이 어떤 방식으로 관철되었는지는 여기서 우리와 상관이 없다 — 솔론은 이른바 정치혁명들의 행렬을 열었다. 그것도 소유에 대한 침해로 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혁명은 한 종류의 소유를 다른 종류의 소유에 맞서 지키기 위한 혁명이었다. 혁명은 한쪽을 다치게 하지 않고는 다른 쪽을 지킬 수 없다. 프랑스 대혁명에서는 부르주아적 소유를 구하기 위해 봉건적 소유가 희생되었다. 솔론의 혁명에서는 채무자의 소유를 위해 채권자의 소유가 희생되어야 했다. 빚은 그냥 무효로 선언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솔론은 자기 시에서 빚진 땅에서 저당 기둥을 뽑아내고, 빚 때문에 외국에 팔려 가거나 도망친 사람들을 데려왔다고 자랑한다. 이것은 공공연한 소유 침해로만 가능했다. 그리고 실제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른바 정치혁명은 모두 한 종류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 일어났고, 다른 종류의 소유를 몰수, 달리 말하면 도둑질함으로써 수행되었다. 이천오백 년 동안 사유재산이 소유 침해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토록 참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유로운 아테네인이 다시 이렇게 노예가 되는 것을 막는 일이 중요했다. 이것은 우선 일반적 조치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채무자의 몸을 담보로 잡는 채무 계약을 금지했다. 나아가 귀족이 농민의 땅을 탐하는 허기에 적어도 얼마간 제한을 두려고,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토지 소유의 최대한도를 정했다. 그다음에 제도의 변경이 이어졌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평의회는 각 부족에서 백 명씩 사백 명으로 늘었다. 여기서는 아직 부족이 기초로 남았다. 그러나 이것이 옛 제도가 새 국가 조직에 끌려 들어간 유일한 측면이기도 했다. 그 밖에 솔론은 시민을 토지 소유와 그 수확에 따라 네 계급으로 나누었기 때문이다. 곡물 500, 300, 150메딤노스(1메딤노스는 약 41리터)가 첫 세 계급의 최소 수확이었다. 그보다 적게 가졌거나 토지가 없는 사람은 넷째 계급에 들었다. 모든 관직은 위의 세 계급에서만, 가장 높은 관직은 첫째 계급에서만 채울 수 있었다. 넷째 계급은 민회에서 발언하고 투표할 권리만 가졌다. 그러나 바로 민회에서 모든 관리가 선출되었고, 관리들은 거기서 책임을 보고해야 했으며, 거기서 모든 법률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거기서는 넷째 계급이 다수였다. 귀족의 특권은 부의 특권이라는 형태로 일부 되살아났지만, 결정적 권력은 인민이 쥐었다. 나아가 네 계급은 새로운 군대 조직의 토대가 되었다. 첫 두 계급은 기병을 냈다. 셋째 계급은 중장보병으로 복무해야 했다. 넷째 계급은 갑옷 없는 경보병으로, 또는 함대에서 복무했고, 그때는 아마 급료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완전히 새로운 요소가 제도 안에 들어온다. 사적 소유다. 국가 시민의 권리와 의무는 그들의 토지 소유 크기에 따라 정해진다. 그리고 재산 계급이 영향력을 얻는 만큼 옛 혈연 단체들은 밀려난다. 씨족 제도는 또 한 번 패배를 겪었다.

그렇지만 정치적 권리를 재산에 따라 정하는 것은 국가가 그것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제도는 아니었다. 그것이 국가들의 제도사에서 아무리 큰 역할을 했다 해도, 아주 많은 국가가, 그것도 가장 완전하게 발달한 국가들이 바로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도 그것은 일시적 역할만 했다. 아리스테이데스 이후 모든 관직은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었다.

그 뒤 팔십 년 동안 아테네 사회는 차츰 그다음 몇 세기 동안 발전해 간 방향으로 들어섰다. 솔론 이전 시기의 무성한 토지 고리대에도, 토지 소유의 무한정한 집중에도 빗장이 걸렸다. 상업과, 노예노동으로 점점 대규모로 운영되는 수공업과 공예가 지배적인 생업이 되었다. 사람들은 더 계몽되었다. 처음의 난폭한 방식으로 제 동료 시민을 착취하는 대신, 주로 노예와 아테네 바깥의 고객을 착취했다. 동산, 화폐의 부, 노예와 배의 부는 점점 커졌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의 편협한 시기처럼 더 이상 토지를 얻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었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이로써 한편으로는 옛 귀족 권력에 맞서 산업과 상업으로 부유해진 새 계급이 승리하는 경쟁자로 자라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옛 씨족 제도의 잔재에서도 마지막 토대가 빠져나갔다. 씨족, 프라트리아, 부족의 성원들은 이제 아티카 전역에 흩어져 완전히 뒤섞여 살았으므로, 이 단체들은 정치적 단체로서 전혀 쓸모없게 되었다. 많은 아테네 시민은 어떤 씨족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주민으로, 시민권은 얻었으나 옛 씨족 결합체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밖에 보호민일 뿐인 외국인 이주민의 수도 끊임없이 늘어 갔다.

그동안 당파 투쟁이 계속되었다. 귀족은 예전의 특권을 되찾으려 했고 잠시 다시 우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마침내 클레이스테네스의 혁명(기원전 509년)이 귀족을 최종적으로 무너뜨렸다. 그와 함께 씨족 제도의 마지막 잔재도 무너뜨렸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새 제도에서 씨족과 프라트리아에 기초한 옛 네 부족을 무시했다. 그 자리에 나우크라리아에서 이미 시도된 방식, 곧 시민을 순전히 사는 곳에 따라 나누는 방식에 기초한 완전히 새로운 조직이 들어섰다. 씨족 결합체에 속하는지가 아니라 오직 거주지가 결정했다. 인민이 아니라 지역이 나뉘었고, 주민은 정치적으로 지역의 단순한 부속물이 되었다.

아티카 전체가 백 개의 자치 구역, 곧 데모스로 나뉘었고, 각 데모스는 스스로를 다스렸다. 각 데모스에 사는 시민(데모테스)은 자기들의 장(데마르코스)과 재무관, 그리고 작은 분쟁을 재판하는 재판관 서른 명을 뽑았다. 그들은 또 자기 신전과 수호신이나 영웅을 가졌고, 그 사제를 뽑았다. 데모스의 최고 권력은 데모테스의 집회에 있었다. 모건이 옳게 지적하듯이, 이것은 자치하는 아메리카 도시 공동체의 원형이다. 근대국가가 가장 높이 발달한 끝에 이르는 바로 그 단위에서 아테네의 생겨나는 국가는 출발했다.

이런 단위, 곧 데모스 열 개가 한 부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부족은 옛 씨족 부족과 구별하여 이제 지역 부족이라 불린다. 지역 부족은 자치하는 정치적 단체일 뿐 아니라 군사적 단체이기도 했다. 지역 부족은 기병을 지휘하는 필라르코스 곧 부족장, 보병을 지휘하는 탁시아르코스, 부족 지역에서 징집된 병력 전체를 지휘하는 스트라테고스를 뽑았다. 또 전함 다섯 척을 병력과 지휘관과 함께 냈고, 아티카의 영웅 하나를 수호성인으로 받아 그 이름을 따서 불렸다. 끝으로 아테네 평의회에 평의원 쉰 명을 뽑아 보냈다.

그 꼭대기에 아테네 국가가 있었다. 이 국가는 열 부족에서 뽑힌 오백 명으로 이루어진 평의회가 다스렸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아테네 시민이 출입하고 투표할 수 있는 민회가 다스렸다. 그 곁에서 아르콘과 다른 관리들이 여러 행정 부문과 재판을 맡았다. 아테네에는 집행권의 최고 관리가 없었다.

이 새 제도와, 일부는 이주민이고 일부는 해방 노예인 아주 많은 보호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씨족 제도의 기관들은 공적 업무에서 밀려났다. 그것들은 사적 결사와 종교 단체로 전락했다. 그러나 옛 씨족 시대의 도덕적 영향력, 이어받은 견해와 사고방식은 그 뒤로도 오래 이어졌고 서서히 사라졌다. 이것은 또 하나의 국가 제도에서 드러났다.

우리는 국가의 본질적 특징이 인민 대중과 구별되는 공적 권력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 아테네는 그때 아직 인민 군대와 인민이 직접 내는 함대만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이 밖으로부터 지켰고, 이미 그때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던 노예들을 억눌렀다. 시민에 대해서는 공적 권력은 처음에는 경찰로만 있었다. 경찰은 국가만큼 오래되었다. 그래서 18세기의 순진한 프랑스인들은 문명화된 민족이라 하지 않고 경찰화된 민족(nations policées)이라 했다. 아테네인은 그러므로 국가와 동시에 경찰도 만들었다. 걸어 다니고 말을 탄 궁수들로 이루어진 진짜 헌병대, 남부 독일과 스위스에서 말하는 란트예거였다. 그런데 이 헌병대는 — 노예로 이루어졌다. 자유로운 아테네인에게 이 포졸 노릇은 너무나 품위 없는 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그런 수치스러운 짓에 나서느니 차라리 무장한 노예에게 체포당하는 쪽을 택했다. 이것이 아직 남아 있던 옛 씨족 정신이었다. 국가는 경찰 없이는 존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가는 아직 젊었고, 옛 씨족원들에게 필연적으로 파렴치하게 보이는 직업을 존중받을 만한 것으로 만들 만큼 도덕적 존경을 아직 얻지 못했다.

이제 큰 줄기가 완성된 국가가 아테네인의 새 사회 상황에 얼마나 잘 맞았는지는 부와 상업과 산업이 빠르게 꽃핀 데서 드러난다. 사회 제도와 정치 제도가 기초한 계급 대립은 더 이상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아니라 노예와 자유인, 보호민과 시민의 대립이었다. 가장 번성한 시기에 아테네의 자유 시민 전체는 여자와 아이를 포함해 약 9만 명이었고, 그 곁에 남녀 노예 36만 5천 명과 보호민 — 외국인과 해방 노예 — 4만 5천 명이 있었다. 그러니까 성인 남자 시민 한 사람에게 적어도 노예 18명과 보호민 두 명 남짓이 딸려 있었다. 노예가 많았던 것은 그들 다수가 매뉴팩처, 곧 큰 작업장에서 감독 아래 함께 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업과 산업이 발전하면서 부가 소수의 손에 축적되고 집중되었고, 자유 시민 대중은 가난해졌다. 그들에게 남은 길은 둘뿐이었다. 하나는 자기 손으로 수공업 노동을 해서 노예노동과 경쟁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수치스럽고 천한 일로 여겨졌고 성공할 가망도 적었다. 다른 하나는 영락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런 형편에서 필연적으로 뒤의 것을 택했고, 그들이 대중을 이루었으므로 그것으로 아테네 국가 전체를 망쳤다. 아테네를 망친 것은 군주에게 꼬리 치는 유럽의 학교 선생들이 주장하듯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 시민의 노동을 천시한 노예제였다.

아테네인에게서 국가가 생겨난 것은 국가 형성 일반의 특히 전형적인 본보기다. 첫째, 그것은 밖에서든 안에서든 폭력이 끼어들지 않고 아주 순수하게 진행되었다 —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짧았던 찬탈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둘째, 그것은 아주 고도로 발달한 형태의 국가, 곧 민주공화국을 씨족 사회에서 곧바로 생겨나게 한다. 끝으로 우리는 그 본질적 세부를 모두 충분히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