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1946

알바니아 해방과 인민공화국 수립

점령에 맞선 해방운동은 어떻게 공산당 중심의 국가와 경제제도로 이어졌는가?

1944년 점령군 철수와 파르티잔의 승리 이후 엔베르 호자 지도부는 권력을 집중했다. 1946년 인민공화국 선포와 헌법 제정은 전후 정권의 법적 기반이 됐다.

점령과 저항운동의 성장

이탈리아의 1939년 침공은 조그 왕정을 무너뜨렸고, 1943년 이탈리아의 항복 뒤에는 독일군이 점령을 이어갔다. 공산주의 세력은 전쟁 전부터 대규모 정당이었던 것이 아니다. 1941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적 도움을 받아 알바니아 공산당이 결성됐으며, 엔베르 호자는 알바니아의 민족해방을 내세우는 연합운동 속에서 지도력을 확대했다. 근거 1

1942년 조직된 민족해방운동에는 비공산주의 저항세력도 참여했다. 반공·민족주의 세력인 발리 콤베타르와의 협력은 코소보의 전후 귀속,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 해방 뒤 권력 문제를 둘러싸고 무너졌다. 일부 발리 콤베타르 세력은 이후 독일군과 협력했고, 왕당파 조직도 따로 활동했다. 따라서 전쟁은 외국 점령에 맞선 투쟁인 동시에 국내 세력들이 국가의 장래를 놓고 충돌한 과정이었다. 근거 1

1944년: 군사적 승리에서 통치기구로

파르티잔 지도부는 독일군이 완전히 철수하기 전부터 통치기구를 만들었다. 1944년 5월 페르메트 회의가 구성한 반파시스트 민족해방평의회는 입법·행정 권위를 주장했고, 호자는 집행기구와 군대를 이끌었다. 10월 베라트에서는 임시정부가 구성됐다. 11월 티라나를 비롯한 주요 지역에서 점령군이 물러날 때에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군사·행정 조직이 이미 경쟁세력보다 우위에 있었다. 근거 2

이 승리는 국내 파르티잔의 전쟁 수행을 바탕으로 했지만 외부 지원과 분리되지는 않았다. 영국의 무기 지원과 연합군의 작전 지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과의 연계가 함께 작용했다. 전후 정부는 파괴된 주거·교통·생산시설을 복구하고 식량을 확보해야 했다. 해방은 즉각적인 풍요의 출발점이 아니라, 전쟁 피해 속에서 행정력과 자원을 다시 모으는 출발점이었다. 근거 2 · 근거 3

1945~1946년: 공화국과 권력 집중

1945년 12월 선거에서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민주전선의 후보 명단만 제시됐다. 1946년 1월 의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했으며, 뒤이은 헌법은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제도를 참고했다. 공화국 선포는 새로운 법적 틀을 만들었지만, 여러 정당이 정부를 교체할 수 있는 경쟁적 정치체제를 뜻하지는 않았다. 근거 4 · 근거 5

호자는 당·정부·군의 핵심 직책을 겸했고, 내무장관 코치 조제는 치안기구를 통해 권력 집중에 관여했다. 전쟁 협력자 처벌은 실제 점령 협력행위에 대한 책임 추궁과 정치적 경쟁자 제거가 뒤섞인 형태로 진행됐다. 반대파와 그 가족에게 가해진 투옥·강제노동·추방은 경제개혁과 별개로 평가해야 할 국가폭력이었으며, 지도부 내부의 노선 논쟁도 자유로운 공개 경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근거 6 · 근거 4

토지 분배와 국가 소유의 확대

1945년 농지개혁은 대지주 소유를 해체하고 무토지·영세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농업 부채의 취소와 산림·목초지 국유화도 시행됐다. 토지를 얻은 농민에게 이는 생계와 지위의 실질적 변화였고, 정권에는 농촌 지지 기반을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다만 이때의 소농 토지 분배를 훗날 농업 집단화가 이미 완성된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근거 4 · 근거 7

산업·운수와 대외무역에서는 국가 통제가 빠르게 확대됐다. 점령국 자산과 옛 외국기업 특허권의 처리에 이어 주요 산업이 국유화됐고 계획기구가 투자 방향을 정했다. 이는 공업 기반이 작은 농업국가를 산업화하려는 시도였지만 기술·설비·자금의 부족 때문에 대외 원조가 중요했다. 학교 재건, 문해교육, 교사 양성과 여성의 교육 참여 확대도 추진됐으며, 교육과정과 진학에는 당의 이념·정치적 기준이 개입했다. 근거 7 · 근거 8

유고슬라비아와의 협력, 그리고 이후의 결별

초기 알바니아는 훗날의 고립적 자력갱생 국가와 달랐다. 1946년 유고슬라비아와의 우호조약 및 경제협정은 공동기업, 계획 조정과 경제 통합을 추진했다. 티라나는 원조를 필요로 했지만 산업화의 방향과 경제적 주권을 둘러싼 갈등도 커졌다. 계획 책임자 나코 스피루의 비판과 조제의 친유고슬라비아 입장은 이러한 대외관계가 당내 권력투쟁과 얽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근거 9 · 근거 3

1948년 소련·유고슬라비아 결별 이후 호자 지도부는 소련 쪽에 섰고, 조제는 숙청돼 1949년 처형됐다. 이는 1944~1946년의 국가 형성 이후에 일어난 방향 전환이다. 초기 해방·토지개혁, 이후 집단화와 당내 숙청, 더 뒤의 중국과의 관계 및 고립을 시기별로 구분해야 알바니아 사회주의의 변화와 연속성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근거 9 · 근거 6

단일 명단 선거: 국제적 승인과 반대파의 소멸

1945년 12월 2일의 제헌의회 선거는 명목상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였다. 9월의 반파시스트민족해방평의회 제3차 회의가 채택한 선거법은 이 네 원칙을 내세웠지만, 출마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하나뿐이었다. 8월에 민족해방전선을 계승해 성립한 민주전선이 단일 명단을 냈고, 무소속 후보에게는 개별 출마만 허용됐다. 교육장관 제르지 코코시는 이 회의에서 선거법을 비판하며 무소속 후보는 ‘실패할 운명’이라고 말했다. 정당도, 언론도, 선전 수단도 없는 개인이 국가 권력을 통째로 쥔 전선 후보와 맞설 수 없다는 것이다. 호자는 무소속 출마의 권리는 법이 인정한다고 답했지만, 코코시는 나중에 영국 군사사절단과 결탁해 야당을 조직하려 한 혐의로 몰렸다.

서방의 태도가 이 선거의 형태를 정했다. 영국과 미국은 잠정 승인을 하면서 정식 승인의 조건으로 자유선거 실시와 서방 기자의 선거 참관을 내걸었다. 선거일 티라나의 투표소에는 미국 대표 제이컵스와 영국 군사사절단, 외신 기자 열 명이 찾아왔다. 문맹률이 높았기에 투표는 검은 독수리가 찍힌 고무공을 붉은 상자(전선 지지)나 검은 상자(반대)에 넣는 방식이었고, 유권자는 두 상자에 모두 손을 넣어 누구를 찍었는지 감추었다. 제이컵스는 ‘비밀 방식으로 진행됐고 위협이나 협박의 증거는 없었다’며 호자가 한 약속이 지켜졌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영국 군사사절단도 선거가 ‘국민 다수의 의사 표현’으로 받아들일 만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이 ‘공정했다’는 판정은 전선이 반대파를 조직적으로 압박한 사실과 병존했다. 결과는 60만 3천여 등록 유권자 가운데 약 90퍼센트가 투표했고 93퍼센트가 전선을 택했다고 발표됐다. 영국측 호지슨 준장은 다른 집계를 보고했다. 투표율 85퍼센트, 전선 50만 5,842표(79.3퍼센트), 반대 3만 7,024표(5.8퍼센트)였다. 어느 쪽이든 압도적 승리였지만, 수치의 차이는 단일 명단 선거에서 ‘반대’가 무엇을 뜻했는지 보여준다. 정식 야당이 없는 자리에서 반대는 이름 없는 검은 상자에 공을 넣는 행위였고, 코코시처럼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인물은 숙청의 대상이 됐다. 선거는 새 정권에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이후 1990년까지 이어진 단일 명단 선거의 첫 판본이 됐다.

왕관을 내려놓게 한 하루: 1월 11일의 선포와 아직 오지 않은 헌법

1945년 12월의 단일 명단으로 뽑힌 제헌의회는 1946년 1월 11일 티라나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개회는 반파시스트 평의회 의장 오메르 니샤니가 맡았고, 최고령 의원인 코르처 출신 의사 페트라츠 포파가 임시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의회가 그날 가장 먼저 처리한 일은 왕도, 국체도 아니었다. 코초 타슈코가 이끄는 20인 위원회가 12월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의 자격을 검증했다. 넉 달 전 선거법을 비판했던 제르지 코코시가 예견한 대로, 무소속 후보가 끼어들 자리는 애초에 없었고, 자격심사는 그 단일 명단을 법적으로 봉인하는 절차였다.

자격심사가 끝나자 의회는 한 번의 결의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조그 1세를 폐위했다. 1928년 조그가 스스로 씌운 왕관은 한 문장으로 끝났다. 런던에 망명해 있던 조그의 귀국은 금지됐다. 이어 알바니아를 인민공화국으로 선포하는 선언이 채택됐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유고슬라비아의 공관 사절이 회의장에서 이를 지켜봤다. 냉전이 아직 국제적 승인의 선을 긋기 전, 새 정권은 강대국 대표가 참석한 자리에서 스스로의 국가 형태를 공식화했다.

정작 구분해야 할 것은 선포와 헌법이 같은 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월 11일에 선언된 것은 국가 형태, 곧 공화국이라는 이름이었다. 헌법은 별개의 일이었고, 공산당은 초안을 온 국민의 심판에 부친다고 내세웠다. 두 달에 걸친 격렬한 논쟁 끝에 의회는 3월 14일에야 헌법을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헌법을 본뜬 것이었다. 조항이 확정되기까지의 두 달 동안 알바니아는 법적으로 공화국이되 아직 헌법 없는 공화국이었다. 호자가 3월 24일 낭독한 정부 강령은 바로 이 문서를 건국헌법이라 부르며 새 단계가 열렸다고 선언했다. 군주제의 폐지가 하루에 끝난 일이라면, 공화국을 한 나라의 제도로 만드는 일은 그날 이후에도 계속됐다.

국가가 경제를 쥐는 법: 1946년 헌법, 국유화, 그리고 베오그라드라는 조건

1946년 1월 11일 공화국 선포만으로는 경제제도가 바뀌지 않았다. 새 국가의 소유관계를 확정한 것은 그해 3월 14일 헌법제정의회가 채택한 헌법이었다. 헌법은 형식상 사적 소유와 상속, 기업활동을 보장했지만(제9조), 동시에 광산과 지하자원, 물, 천연자원, 산림과 목초지, 항공 교통수단, 우편·전신·전화·무선국과 은행을 ‘인민의 공동재산’으로 규정하고 대외무역을 국가 통제 아래 두었다(제5조). 제6조는 국가가 경제계획에 따라 경제생활 전체를 이끌고 사적 부문에 대해 일반적 통제를 행사한다고 못박았고, 제10조는 ‘토지는 그것을 경작하는 자의 것’이라 선언하면서 대토지 소유를 어떤 이유로도 사인이 가질 수 없다고 규정했다. 즉 사유재산은 남겨두되 그 위에 계획과 국유 부문이 얹히는 구조였고, 이는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헌법을 옮겨온 것이었다.

이 조문들은 이미 벌어진 조치를 사후에 법적으로 확정하는 성격이 강했다. 임시정부는 1944년 12월 이미 대외·국내 무역과 상업기업, 소수의 산업을 국가가 규제하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독일과 이탈리아 소유 재산을 몰수하고 운송기업을 국유화했으며, 이전 정부가 외국 회사에 준 모든 양허를 취소했다. 1945년 8월의 농지개혁법은 대지주·부재지주 토지를 몰수해 경작자에게 넘기고, 종교기관과 기계 없는 농가의 소유를 20헥타르, 기계를 가진 농가는 40헥타르로 제한한 뒤 무지한 농민과 소농에게 최대 5헥타르를 분배했다. 1946년에 들어서는 남은 산업 국유화, 대외무역의 정부 독점, 국내 상업의 국가 통제, 토지 매매와 이전 금지가 한꺼번에 진행됐고, 이 해 신설된 경제기획위원회는 중공업 우선 노선을 폈다.

문제는 이 전환이 순수한 국내 결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전후 알바니아는 유엔구호부흥기구(UNRRA)의 2,630만 달러를 받았지만 투자와 개발 자금은 유고슬라비아에 의존했고, 1946년 무렵 약 2만 톤의 유고슬라비아 곡물이 기근을 막았다. 그 대가로 1946년 7월 호자가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뒤 우호·상호원조 조약과 경제협력협정이 체결되어 철도, 석유, 광물, 전력, 해운, 수출입, 은행 분야에 30년짜리 공동기업들이 세워졌다. 결정적인 것은 11월 27일의 경제조약이었다. 알바니아 측은 경제장관 겸 기획위원회 위원장인 나코 스피루, 유고 측은 보리스 키드리치가 서명했다. 이 조약은 양국 경제계획의 조정, 관세동맹, 단일 관세영역, 화폐·가격 체계의 통일을 규정했다.

여기서 알바니아 지도부 내부의 균열이 드러난다. 알바니아 정부는 통화 통합에 원칙적으로 반대했다. 레크를 디나르에 대해 어느 비율로 맞추느냐가 문제였는데, 알바니아 측은 1프랑 대 12.5디나르를 주장했고 유고 측은 1프랑 대 8디나르를 요구했으며, 최종적으로 1프랑 대 9디나르에서 타협됐다. 알바니아 측은 이 비율이 자국 경제에 불리하고 국민의 구매력을 떨어뜨린다고 보았다. 관세동맹 역시 알바니아는 관세 없는 상품 교환으로 이해한 반면, 유고 측은 국경을 열고 유고 상인이 알바니아 도시에서 값싸게 사들여 유고에서 되파는 구조를 의도했다는 것이 알바니아 측의 해석이었다. 스피루는 유고슬라비아의 경제 통제에 맞선 가장 앞선 비판자였고, 그 대립이 1947~1948년의 숙청과 1947년 스피루의 죽음, 1949년 코치 조제의 처형으로 이어졌다.

1946년 경제조약의 전문은 체결 당시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조약이 알바니아 경제를 실제로 어디까지 종속시켰는가는 사후에 각 진영이 자기 방식으로 해석한 기록, 즉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결별한 뒤 『루프테타리』 지면에서 ‘유고 민족주의 지도부의 핵심 목적은 착취와 식민화’였다고 정리한 알바니아 측 서술과, 유고 측의 계획 조정 의도에 주목하는 연구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 중이다. 확실한 것은 1946년의 국유화·계획화가 국내적 결정인 동시에, 그 재정적 조건을 베오그라드에 크게 의존한 상태에서 추진되었다는 사실이다.

끝난 것과 끝나지 않은 것: 이 전환을 두고 아직도 벌어지는 논쟁

1944~1946년의 전환이 무엇을 확정했는지는 비교적 명료하다. 군주제는 폐지됐고, 외국 자본의 특권과 대지주의 소유는 법으로 해체됐으며, 공산당은 선거와 헌법이라는 절차를 거쳐 자신의 군사적 우위를 합법적 독점으로 바꿔 놓았다. 국제적 승인도 얻었다. 흔히 전후 동유럽 공산당들이 연립정부에서 몇 년을 보낸 뒤에야 일당국가를 세운 것과 달리, 알바니아에서는 승리의 주체와 통치의 주체가 처음부터 같은 조직이었다. 반면 이 시기에 확정되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 집단화, 반종교 운동, 대중국 노선과 자력갱생은 모두 이 몇 해의 산물이 아니라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별도로 전개된 정책이다. 1946년 헌법이 정초한 것은 소유의 사회화를 향한 방향이지 그 완성이 아니었다.

이 전환을 둘러싼 사료 해석은 지금도 갈린다. 사회주의 시대 알바니아의 공식 전사(戰史)는 1941~1944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하고, 공산당을 투쟁의 유일한 조직자이자 승리의 설계자로, 발리 콤베타르와 레갈리테티 같은 비공산주의 세력을 점령군의 부역자로 규정했다. 이 서술에서 영국 군사사절단의 지원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거나 ‘제국주의의 개입 시도’로 처리됐다. 그런데 1975년 공식 전사 편찬 과정에서 정치국은 전쟁 중 지도적 역할을 했으나 훗날 당에 의해 숙청된 인물들을 원고에서 삭제하도록 결정하면서, ‘언급되면 역사에 남는다’는 이유를 달았다. 전쟁사 자체가 이후의 권력투쟁을 거꾸로 반영한 것이다.

반대편의 문제제기는 전쟁 말기의 무장 충돌을 ‘해방’이 아니라 내전으로 보는 관점이다. 베른트 위르겐 피셔는 1999년의 연구에서 1944년의 승리를 이념적 확신의 결과만이 아니라 내부 권력투쟁의 결과로 다루었고, 영국과 미국의 군사 지원이 기존 서술에서 면밀히 축소됐음을 논증했다. 사학사 연구에서는 영국 사절단의 지원이 파르티잔의 물자와 훈련에 실제로 중요했고 결정적이지는 않았지만 내전을 연장하기보다 종식시킨 방향으로 작동했다는 평가가 제기됐다. 반면 2007년의 한 연구는 영국이 발리 콤베타르를 지원하면서 ‘끔찍한 내전’을 오히려 길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는데, 이 결론은 사료 맥락화가 부족하다는 반론을 받았다. 같은 문서를 놓고도 영국 지원이 공산당의 승리를 앞당긴 조건이었는지, 공산당의 승리에 불필요한 것이었는지가 갈린다.

알바니아 국내 사학계도 정리되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우파 정부는 역사연구소에서 해방전쟁 연구 부서를 해체했고, 1997년 이후 좌파 정부는 이를 사실상 되살렸다. 연구기관의 편성 자체가 정권 교체에 따라 거듭 바뀌었다는 사실은, 전쟁사가 지금도 역사학보다 정치의 문제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탈사회주의 시대 알바니아 역사가들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사절이 1941년 알바니아 공산당 결성에 실제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됐지만, 파스칼 밀로의 표현처럼 ‘공산당의 부권(父權)은 알바니아의 것이고, 분만을 도운 조산사가 유고슬라비아’였다는 방식으로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을 함께 배치한다.

결국 이 사건이 남긴 논쟁은 두 가지다. 첫째, 1944년 11월은 ‘해방’이었는가, 아니면 정권 교체를 수반한 내전의 종결이었는가. 둘째, 그 정권이 유고슬라비아라는 조건 위에서 세워졌다는 사실을 얼마나 무겁게 볼 것인가. 두 질문 모두 단일한 답으로 닫히지 않았고, 닫히지 않은 채로 이 사건의 후속 전개를 규정했다.

결과

1944~1946년의 전환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지주·외국 자본 중심의 소유구조를 바꾸었으며, 공산당의 군사적 우위를 일당국가의 제도로 정착시켰다. 토지 분배와 교육 확대는 사회적 기반을 넓혔지만 정치적 반대와 자율적 조직 활동은 억압됐다. 훗날의 집단화·반종교 운동·자력갱생은 이 시기에 완성된 정책이 아니라 이후 수십 년의 별도 전개였다.

연표와 지도

티라나 1 티라나 4 티라나 3 베라트 2 페르메트
  1. 11941.11알바니아
    알바니아 공산당 결성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으로 분산된 조직을 통합했다.

  2. 21944.05알바니아
    페르메트 회의

    저항운동 지도부가 입법·행정 권위를 주장하는 평의회를 구성했다.

  3. 31944.10–11알바니아
    임시정부 구성과 점령 종식

    베라트 임시정부 구성 뒤 독일군 철수와 파르티잔의 집권이 이어졌다.

  4. 1945.08알바니아
    농지개혁

    대지주 토지를 분배하고 농촌 소유관계를 바꾸기 시작했다.

  5. 1945.12알바니아
    민주전선 단일 명단 선거

    공산당이 지배하는 전선의 후보들만 출마했다.

  6. 41946.01.11알바니아
    인민공화국 선포

    의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국가 형태를 채택했다.

  7. 1946알바니아
    헌법·국유화·대외협력

    계획기구와 국유 부문을 확대하고 유고슬라비아와 경제협정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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